** 반칙사랑 - 15. 수컷A, 수컷B, 수컷C

나비2004.12.02
조회3,238

** 반칙사랑 - 15. 수컷A, 수컷B, 수컷C


그와 사랑을 새롭게 시작하고 처음 맞는 주말, 우린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며칠 동안은 은은한 레몬 맛이 나는 물을 머금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르고 말라서 갈라질 지경이었던 내가 촉촉하게 젖어서 가슴 저리던 유행가 가사들은 남 일처럼 느껴졌고 운전 중 노래를 흥얼거렸다. 퇴근길엔 엄마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해서는 아침에 깜짝 선물을 드리기도 했다. 갸륵한 딸의 마음씨를 오해하며 어디서 공돈이 생긴 거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올 때도 실실 웃기만 했다.


“공돈 생긴 거 아니면 너도 언니처럼 갑자기 외국 나가버리려고 하는 거야?”

“아니야. 내가 외국을 왜 가. 엄마 아빠 옆에 꼭 붙어있어야지.”

“네가 갑자기 그러니 엄마가 어리둥절해. 무슨 사고 친 거 아닌가 불안하고.”

“아니래두. 그냥 세상사는 게 재미있어서 그래. 엄마 아빠한테도 효도하고 싶고.”

“오늘 토요일인데 어디 가?”

“친구랑 영화 보러. 어머, 늦었다. 다녀올게요.”


‘지금 가도 20분은 늦겠다. 큰 일 났네. 하여간 짧은 머리는 손이 많이 가. 머리 길 때가 좋았는데.’


택시 안에서도 연신 거울만 들여다보았다. 조조영화를 보기로 한 10시 반 약속이었는데 아침에 8시에 일어나 부산하게 준비를 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었다.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는 찬물로 마무리를 했다. 몸서리 칠 정도로 싫었지만 피부가 탱탱해지는 법이라고 해서 참았다. 샴푸 후 트리트먼트를 하고 린스도 잊지 않았다. 화장을 곱게 하기 위해서 피부에 화장품이 스며들 시간을 충분히 주었고 잡지를 보며 익힌 화장법을 사용해 눈 화장을 정성스럽게 했다. 모든 것이 그를 위해서였다. 온전한 나를 주기 위해서 꼭 해야 할 수고처럼 느껴졌다.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처음 시도한 화장법은 시간이 많이 걸렸고 급기야 결국 20분을 늦고 말았다.


“왜 늦었어? 지하철 타고 온 거 아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고작 20분 늦었다고 타박하는 거야?”


늦었다는 미안함보다는 그가 나의 노력들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커 사과는커녕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는 그가 야속했다. 예쁘다고 한 마디도 안 해주냐? 정말 눈치 없기는.


“머리 다시 한 거야? 미장원 갔었어?”

“미장원이 뭐야?”

“그럼?”

“미용실이지. 그리고 안 갔어!”

“좀 달라 보이는데. 집에서 한 거야?”

“몰라. 신경 쓰지 마. 늦었잖아. 들어가자. 영화보기 전에 핫도그라도 먹을래.”

“누가 늦게 오래?”


그가 변화는 눈치를 챘지만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괜스레 틱틱거리게 되었다. 뭔가 들킨 기분. 마치 가슴이 커 보이게 하고 싶어서 과장된 속옷을 입었다가 들킨 것처럼 쑥스러웠다. 그러다 막상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앞에서 핫도그를 우거우걱 먹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이 남자를 만나려고 아침에 애를 쓴 건가, 하는 허탈감이 들었다. 어차피 출발 30분전에 일어나 허겁지겁 나왔어도 이 남자는 상관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속상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준지 말대로라면 ‘자갸! 나 자기한테 보이려고 아침부터 일어나서 머리했는데 나 예뻐?’ 이렇게 해야 하는 건가? 으. 그럴 순 없어. 자존심 상하잖아! 남자 때문에 몇 시간 거울 봤다고 한심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르고. 몰라! 다시는 치장 같은 거 안 할 거야!’


마음이 뻣뻣해져서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필름이 돌아가자 슬며시 손을 잡았다. 난 음료수를 마시는 척 슬쩍 손을 빼버렸다.


‘웃겨! 내가 영화 볼 땐 손 잡혀주는 사람이야? 아, 속상해. 왜 괜히 화가 나는 거지?’


영화는 잔잔했고 주인공의 사랑은 무르익어 갔다. 그 둘에겐 시련이 닥쳤으며 중반에 이르자 둘은 무척 힘겨워하고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풀렸다. 음료수를 마시는 거겠지, 했는데 찬영씨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어머, 우는 거야? 의외다, 정말.’


그런데 그의 눈물이 날 슬프게 만들었다. 혹시 그녀를 추억하면서 우는 건 아닐까, 하는 섭섭함에 난 영화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내내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려있었다. 그는 몇 번을 울었다. 눈물을 훔쳐내고 젖은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젖은 손은 찝찝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옛 애인의 추억이 내게 묻어오는 것 같았다.


“미안, 화장실 좀.”


결국 손을 놓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조조시간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빠져나오는 건 수월했고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커다란 거울만이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아닐 거야. 사람 옆에 두고 다른 생각 하겠어? 만약에 맞더라도 내가 이해해야지.’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거울 속 열심히 치장한 내 모습은 더욱 비참해 보이기만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좀 더 근사한 식사를 기대했었기에 실망스러웠고 식사 중엔 그가 아직도 영화에 빠져있는지 말도 하지 않아 답답했다. 밥이 반 넘게 남아있는데도 더 이상 먹긴 싫었다.


“다 먹었어?”

“응. 나가자.”


한적했던 길가는 오후에 들어서면서 점차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왜 자꾸 웃어?”

“홍주랑 영화도 보고 밥도 먹으니까 좋아서 그렇지. 웃지 말까?”

“웃지 마!”


놀리는 것 같아 그를 앞서 걸었다.


“어이! 도망가면 바보!”

“누가 도망간대!”

“앞에 가는 사람 도둑~, 뒤에 가는 사람 경찰~.”


정말 유치한 그의 행동에 풋, 하고 웃음이 나와 버렸다.


“뒷모습도 예쁘더라. 오늘이 최고 예뻐 보여.”

“입에 발린 말은.”

“근데 나 만날 때는 편하게 입고 와. 구두에 치마 입지 말고 운동복 입고와도 돼. 어떻게 해도 예쁘니까.”

“진짜 슬리퍼에 체육복 입고 온다!”

“좋아, 좋아. 뭘 하든지 예뻐 보이니까. 꾸민 네 모습보다 편한 네 모습 보고 있는 게 난 더 행복해.”


아, 이렇게 간사할 수가! 그의 말 몇 마디에 뻣뻣했던 마음이 유들유들해졌다. 이래서 유들유들함이 필요하다고 했던 걸까?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라고 다시 틱틱거렸지만 마음만은 그에게 크나큰 고마움과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이 남자 정말 날 사랑하나봐!


***


일요일 오후는 연미와 함께 쇼핑을 했다. “요즘 행복하냐?”로 통화를 시작한 우리는 곧 마음이 맞아 쇼핑을 나오게 된 것이었다.


“진짜 그렇게 말하든?”

“응.”

“닭살 9단 이구만.”

“좀 닭 살스럽긴 하더라. 그런 말이 입에서 술술 나오더라고.”

“근데 너는 너무 뻣대는 거 아니냐?”

“내가 뭘?”

“행복한 연애를 위해선 몸도 적당히 꽈주고 비정상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하잖아. 예를 들면 ‘오빠’ 라고 하는 것 보단 ‘어빠’ 가 낫다고들 하지.”

“그런 말을 하는 횟수에 비례하지 않을 거야. 믿을 수 없어. 난 충분히 행복한 걸. 필요하면 그 사람이 하면 되잖아!”

“이 봐. 너무 뻣뻣해. 나는 그게 싫어서 아예 연애를 안 하고 있긴 하지만 이왕 하는 거면 잘 해봐. ‘어빠!’”

“귀가 울렁거리는 것 같아. 이런 느낌 처음이야. 연미씨, 참아줘요! 야! 저기 매장 새로 생겼네. 저기 가볼까?”


연미는 좀처럼 과거 남자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와인 병을 끼고 밤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되거나 내게 조언을 해줄 때 가끔 예를 들 때만 말을 꺼낸다.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수컷A와 수컷B, 수컷C 다. 언젠가 이름을 듣긴 했지만 그 것에 익숙해져서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컷A는 풋사랑이었고, 수컷B가 연미의 첫사랑이다. 때때로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행동을 한다. 그와의 추억이 깃든 유행가를 들으면 화를 내고 어떤 음식점은 절대 가지 않는다. 와인 병을 끼고 술을 마시던 날 연미는 그를 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면전에서 거절을 당한 사람이라서 그런 가봐. 살면서 그럴 일은 많지 않잖아. 대학을 떨어질 때도 서면으로 접하거나 전화로 듣게 되지. 그래도 그 편은 공손히 말하는 편인데 수컷B는 면전에서 ‘너 싫어, 가’ 이러더라고. 그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어. 그 이후로도 없었고. 그래서 기억에 남는 것 같아. 그가 그리워서 잊을 수 없는 게 아니라.”


딱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절의 상처가 연미에게 얼마나 컸던지는 짐작하게 해주는 말이다. 이제 1년 반이 지났고 가지 않던 음식점에 출입하는 것을 보게 된다. 되물으면 “내가 그랬었어?” 라고 쓸쓸하게 말하지만.


쇼핑은 재미있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옷만 골라주며 웃음을 터트렸고 같은 옷을 사서 입을까, 궁리도 하며 간만에 남자로 인한 상처가 없었던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연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그래?”

“방금 수컷B가 지나갔어.”

“누구? 저 사람?”


뒷모습만 본 것이지만 연인과 동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번 굳어진 연미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연미야, 이건 어때? 너한테 어울릴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사지 뭐.”


연미는 망설임 없이 카드를 꺼내들었고 난 그 모습이 안 돼 보여 손목을 끌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그 남자 못생겼더라.”

“너 뒷모습밖에 못 봤잖아.”

“뒷모습이 그렇게 후지니까 앞모습도 후질 거야.”

“하하하. 맞아. 못생긴 남자였어. 시를 좋아해서 좋아했던 거지.”

“못생겨서 시 타령이라니. 헤어지길 잘했다, 야.”

“그래도 닭살 9단 보단 낫다.”

“뭐야? 닭살이 나아. 네가 겪어봐.”


연미에게 그동안 가지 않았던 음식점을 가자고 할 생각이다. 그녀도 오늘은 거절하지 않을 것 같다. 난 연미의 손을 잡고 당당히 걸어 들어갈 것이며 가장 맛있고 비싼 요리를 시킬 것이다. 배가 부르면 연미에게 그에 대한 험담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상처는 조금은 치유될 것이고 전보다는 더 멋진 여자들이 되어 음식점을 나오게 될 것이다. 멋진 일요일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