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된 일주일은 눈코뜰새 없이 바빠 퇴근 후 데이트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각 팀의 새 제품 아이디어 회의가 금요일에 잡혀 있었고 나는 판매신장을 위한 매장 확장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했다. 찬영씨는 새 제품 디자인을 맡고 있었다. 오후 9시가 넘어도 회사 안은 직원들로 꽉 차 활기차게 움직였다.
준지는 찬영씨를 위해 비타민과 피로 회복제를 사다주라고 조언을 해주었고 난 근처 약국에서 사온 약봉지를 들고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자기야, 피곤하지? 내 뽀뽀보다는 효과가 없겠지만 먹고 힘내, 알았지?”
화장실에서 말을 연습하고 있는 거울 속 내 표정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으! 이런 말을 진짜 해야 하는 거야? 약 사다주는 정성이면 됐지, 그런 간지러운 말까지 해야 하냐고!’
하지만 어느새 20번도 넘게 되뇐 말을 중얼거리며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자기야! 피곤하지!”
“아니야. 괜찮아.”
그는 내 입에서 나온 자기란 말에 놀라고 있었고, 난 생각지 못한 괜찮다는 말에 허둥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야 내가 말할 수 있었던 건데! 저 인간도 눈치도 없어, 정말!
“저 이거 받아.”
“뭐야, 이게?”
“비타민이랑 피로회복제. 저, 저······.”
“응? 할 말 있었어?”
‘용기를 내자, 정홍주!’
“아, 아마도 내 뽀뽀보다 효과는 없을 거야!”
그는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뭐야? 내가 웃겨? 아니, 약국에서 수고스럽게 약을 사다 줬는데 어떻게 면전에서 웃을 수가 있어?”
“미안, 미안해. 홍주야, 잠깐 이리 와 봐.”
“왜에?”
화를 내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비상구로 끌고 갔다.
“뽀뽀해줘!”
“뭐?”
“효과도 없는 피로회복제 말고 뽀뽀해주면 되잖아.”
“미쳤어? 회사에서!”
“소리 지르지 마. 사람들이 들어.”
“싫어. 누가 보면 어떻게?”
난 아까보다는 작게 말했다.
“그럼 안 데려다주고 퇴근한다. 나는 할 일 끝났단 말이야. 너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어.”
“치사하다! 차 안가지고 온 거 뻔히 알면서.”
“싫으면 내가 할 게. 눈 감아.”
“눈은 왜 감으래?”
“하하하. 홍주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너무 귀엽다.”
귀엽다고? 그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 뽀뽀하자는 말을 들을 때보다 심장이 더욱 뛰었다.
“으씨, 진짜. 하려면 빨리 해!”
“눈 감아봐!”
그의 손이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찐한 키스. 가벼운 뽀뽀를 생각하고 있던 난 그의 말랑한 혀에 깜짝 놀랐다. 그렇지만 단 1초도 거부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의 코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에 그만의 체취가 섞여 있어 정신은 아련해졌고 점점 세상과 차단되어 갔다. 가까스로 그에게 떨어져 괜히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피로회복제가 따로 필요가 없네! 준지 말이 맞잖아.’
“어때? 피로가 풀렸어?” 그에게 많이 상냥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안 풀렸어. 좀 만 더 해.”
그의 팔이 다시 허리를 감겨왔다. 우린 한동안 입술을 탐하며 피로 회복을 하고 있었다. 에너지가 서서히 차 듯 온 몸에 힘이 돌았다. 그러다 허리께 머물렸던 찬영씨의 손이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안돼! 어딜 더듬어?”
“에구. 귀여워!”
그는 엉덩이를 몇 번이나 두들겼다.
“몰라! 화장 다 지워졌겠다! 나 먼저 들어간다.”
부끄러움에 그를 남겨두고 황급히 사무실로 들어섰다. 함께 밤을 지낸 적도 있었는데 이런 일로 부끄러워지다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마치 모든 게 처음인 듯 그와 눈을 마주칠 때도 먼저 시선을 피하게 되는 일이 많았고, 운전을 하는 그의 옆모습만 봐도 가슴이 떨리곤 했다.
‘오빠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거 아냐? 오빤 내 시선 피하는 것 같지 않던데. 그렇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이젠 문자도 덜 보내고 전화도 먼저 하지 말아야지!’
준지에게 남자를 안달 나게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해야지, 생각하며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그 곳에선 벌건 얼굴의 내가 서 있었다. 고구마가 따로 없었다!
드디어 아이디어 발표 당일. 파란색 가로줄무늬 와이셔츠를 입은 그가 발표를 할 차례였다.
“이번 저희 제품 ‘홍실’을 보면 타 회사와 뚜렷하게 경쟁이 될만한 제품이 없습니다. 저희가 공략하는 소비층을 토대로 보자면 B회사의 ‘영롱’일 것입니다. 그 제품의 마켓쉐어(market share - 시장점유율)는 30%가 넘습니다. 우리는 틈새시장을 노릴 게 아니라 그 제품을 점유율을 낮추는 마케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중 제 일의 공략층이 바로 젊은 여성입니다. 그래서 홍주를 희석시킨 저희 제품을 평범한 병에 넣는 것이 아니라 삼각형의 병에 넣는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그가 회의 탁자에 올려놓은 병은 타 제품보다 조금 더 길었으며 더 두꺼운 재질이었다. 날렵하게 생긴 삼각형의 병은 내 마음에도 꼭 들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 너무 멋진 거 아냐? 저런 남자한테 시집가는 난 행복하다! 하하.’
“이 병에 ‘홍실’을 넣으면 빨간 색이 되겠지요. 뚜껑은 빨간색의 보색인 청록색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젊은 여성들에게 어필할 것이라 봅니다.”
모두들 마음에 들었는지 웅성거리며 칭찬을 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그에게 물었다.
“디자인은 마음에 드네. 그런데 단가가 높아지는 문제가 있지 않나?”
“그 점은 이미 공장과 협의했습니다. 물론 기존 병보다는 단가가 높지만 어차피 들어갈 디자인은 새 디자인입니다. 둥근 병을 만들 때와 단가차이가 없겠금 조정을 했습니다.”
“음. 용량 문제는? 둥근 병보다는 용량이 작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존 병들보다는 높이가 높게 만들어 그 문제를 없앴습니다.”
“좋네.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보지. 장점보다 문제점을 찾아보는데 주력하도록 해. 흠없는 건 없으니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저기,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꺼낸 건 귀민이었다.
“찬영군에게 할 질문이 있으면 질문 하지.”
“혹시 병에 술을 담아 드셔보셨어요?”
“예? 아직 거긴 까진.”
“그 병은 무게가 다른 병보다 더 나갈 것 같군요. 그렇다면 술을 따라 마시기에 불편할 수 있다는 뜻이겠죠. 그런 기본적인 실험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취중엔 손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미끄러질 위험도 있다고요. 디자인은 눈으로만 보라고 있는 게 아니죠.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거라면 좀 더 실용적인 디자인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묻고 싶네요.”
‘아니, 저게! 칭찬은 한마디 안하고 공격을 하잖아! 눈을 부릅뜨고 할 질문은 아닌데 좀 심하게 구는 걸.’
“죄송합니다. 검토하겠습니다.”
“검토는 제가 하도록 하죠. 여성이 타켓이라면 남자인 찬영씨보다 제가 더 적격인 것 같네요. 제가 술을 마셔보고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정대리님! 그 실험은 일반적인 여성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대리님이 하시기는 너무 주량이 쎄시잖아요. 대리님은 거의 주당 수준이죠.”
“그렇다면 술 못 먹는 귀민씨랑 함께 하면 되겠네요. 더 이상 질문이 없다면 귀민씨 발표하시죠?”
아이디어 회의는 꽤 성공적으로 끝났다. 오전 일찍 시작된 회의는 점심시간을 지나고 끝이 나서 직원들 모두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난 명주언니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너 귀민이한테 좀 심한 거 아니야? 찬영씨한테 질문한 건데 네가 껴드는 것처럼 보였어.”
“알아, 언니. 화가 나서 껴든 건 아니었어.”
“그럼?”
그간의 일을 모두 다 들은 언니는 내 태도를 염려하며 물었다.
“귀민씨가 공과 사를 구분 못하고 찬영씨한테 공격적으로 구니까 그렇지. 그 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그럴 거라는 경고였어.”
“물론 그런 건 문제긴 하지만 좀 불쌍하기도 해.”
“미안한 건 사실인데 티내지 않으려고. 아마 더 자존심 상해 할 것 같아. 귀민씨 자존심 강하잖아.”
“홍주 이제 보니 속도 깊네. 그런 생각을 다 하고 있었어? 그나저나 진짜 귀민이랑 술 마실 거야?”
“그래야지. 뱉은 말이니까.”
솔직히 겁이 났다. 그녀와 마주 앉아 찬영씨가 만든 병을 사이에 놓고 술을 마셔야 하다니. 그녀가 공격해도 난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피해서는 안되는 자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
회의가 끝난 금요일 오후. 모두들 일찍 퇴근을 했고 나도 찬영씨와 일찍 퇴근을 하자고 약속한 상태였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자 늘 변함없는 자리에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그는 웃는 표정으로 날 맞았다. 그리고 저녁은 먹은 우리는 뭘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딜 가면 좋을까? 영화나 볼까, 오빠?”
“음. 홍주야, 오늘 집에 가지 마라.”
“뭐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집에 가지 말라니?”
“지금 당장 너랑 하고 싶은 게 생각났어.”
“그게 뭔데?”
“술 빚으러 가자. 홍천에 내가 술 빚는 곳이 있거든. 당장 가자. 너랑 함께 만들고 싶어.”
“술 빚으러? 그건 좋긴 한데 너무 급작스럽다. 지금 준비된 것도 없고. 간다고 해도 집에는 들려야겠는 걸. 옷이랑 화장품이 없어서.”
“그 문제라면 걱정 안 해도 돼. 내 차에 네 화장품, 잠옷까지 풀 세트로 대기 중이니까.”
“사 놓은 거야?”
“응. 널 언제든 납치할 수 있게, 준비해 놨지. 나한테 도망가려고 하면 납치할 생각이었거든.”
“진짜 엉뚱하다.”
“가는 거지?”
그는 망설이는 날 바라보며 물었다. 난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그렇게 우린 처음으로 단 둘의 여행을 떠났다. 6월이 다가오는, 아직 여름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밤에 충동적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 반칙사랑 - 16. 6월이 다가오는 밤
** 반칙사랑 - 16. 6월이 다가오는 밤
새로 시작된 일주일은 눈코뜰새 없이 바빠 퇴근 후 데이트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각 팀의 새 제품 아이디어 회의가 금요일에 잡혀 있었고 나는 판매신장을 위한 매장 확장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했다. 찬영씨는 새 제품 디자인을 맡고 있었다. 오후 9시가 넘어도 회사 안은 직원들로 꽉 차 활기차게 움직였다.
준지는 찬영씨를 위해 비타민과 피로 회복제를 사다주라고 조언을 해주었고 난 근처 약국에서 사온 약봉지를 들고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자기야, 피곤하지? 내 뽀뽀보다는 효과가 없겠지만 먹고 힘내, 알았지?”
화장실에서 말을 연습하고 있는 거울 속 내 표정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으! 이런 말을 진짜 해야 하는 거야? 약 사다주는 정성이면 됐지, 그런 간지러운 말까지 해야 하냐고!’
하지만 어느새 20번도 넘게 되뇐 말을 중얼거리며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자기야! 피곤하지!”
“아니야. 괜찮아.”
그는 내 입에서 나온 자기란 말에 놀라고 있었고, 난 생각지 못한 괜찮다는 말에 허둥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야 내가 말할 수 있었던 건데! 저 인간도 눈치도 없어, 정말!
“저 이거 받아.”
“뭐야, 이게?”
“비타민이랑 피로회복제. 저, 저······.”
“응? 할 말 있었어?”
‘용기를 내자, 정홍주!’
“아, 아마도 내 뽀뽀보다 효과는 없을 거야!”
그는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뭐야? 내가 웃겨? 아니, 약국에서 수고스럽게 약을 사다 줬는데 어떻게 면전에서 웃을 수가 있어?”
“미안, 미안해. 홍주야, 잠깐 이리 와 봐.”
“왜에?”
화를 내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비상구로 끌고 갔다.
“뽀뽀해줘!”
“뭐?”
“효과도 없는 피로회복제 말고 뽀뽀해주면 되잖아.”
“미쳤어? 회사에서!”
“소리 지르지 마. 사람들이 들어.”
“싫어. 누가 보면 어떻게?”
난 아까보다는 작게 말했다.
“그럼 안 데려다주고 퇴근한다. 나는 할 일 끝났단 말이야. 너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어.”
“치사하다! 차 안가지고 온 거 뻔히 알면서.”
“싫으면 내가 할 게. 눈 감아.”
“눈은 왜 감으래?”
“하하하. 홍주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너무 귀엽다.”
귀엽다고? 그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 뽀뽀하자는 말을 들을 때보다 심장이 더욱 뛰었다.
“으씨, 진짜. 하려면 빨리 해!”
“눈 감아봐!”
그의 손이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찐한 키스. 가벼운 뽀뽀를 생각하고 있던 난 그의 말랑한 혀에 깜짝 놀랐다. 그렇지만 단 1초도 거부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의 코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에 그만의 체취가 섞여 있어 정신은 아련해졌고 점점 세상과 차단되어 갔다. 가까스로 그에게 떨어져 괜히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피로회복제가 따로 필요가 없네! 준지 말이 맞잖아.’
“어때? 피로가 풀렸어?” 그에게 많이 상냥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안 풀렸어. 좀 만 더 해.”
그의 팔이 다시 허리를 감겨왔다. 우린 한동안 입술을 탐하며 피로 회복을 하고 있었다. 에너지가 서서히 차 듯 온 몸에 힘이 돌았다. 그러다 허리께 머물렸던 찬영씨의 손이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안돼! 어딜 더듬어?”
“에구. 귀여워!”
그는 엉덩이를 몇 번이나 두들겼다.
“몰라! 화장 다 지워졌겠다! 나 먼저 들어간다.”
부끄러움에 그를 남겨두고 황급히 사무실로 들어섰다. 함께 밤을 지낸 적도 있었는데 이런 일로 부끄러워지다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마치 모든 게 처음인 듯 그와 눈을 마주칠 때도 먼저 시선을 피하게 되는 일이 많았고, 운전을 하는 그의 옆모습만 봐도 가슴이 떨리곤 했다.
‘오빠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거 아냐? 오빤 내 시선 피하는 것 같지 않던데. 그렇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이젠 문자도 덜 보내고 전화도 먼저 하지 말아야지!’
준지에게 남자를 안달 나게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해야지, 생각하며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그 곳에선 벌건 얼굴의 내가 서 있었다. 고구마가 따로 없었다!
드디어 아이디어 발표 당일. 파란색 가로줄무늬 와이셔츠를 입은 그가 발표를 할 차례였다.
“이번 저희 제품 ‘홍실’을 보면 타 회사와 뚜렷하게 경쟁이 될만한 제품이 없습니다. 저희가 공략하는 소비층을 토대로 보자면 B회사의 ‘영롱’일 것입니다. 그 제품의 마켓쉐어(market share - 시장점유율)는 30%가 넘습니다. 우리는 틈새시장을 노릴 게 아니라 그 제품을 점유율을 낮추는 마케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중 제 일의 공략층이 바로 젊은 여성입니다. 그래서 홍주를 희석시킨 저희 제품을 평범한 병에 넣는 것이 아니라 삼각형의 병에 넣는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그가 회의 탁자에 올려놓은 병은 타 제품보다 조금 더 길었으며 더 두꺼운 재질이었다. 날렵하게 생긴 삼각형의 병은 내 마음에도 꼭 들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 너무 멋진 거 아냐? 저런 남자한테 시집가는 난 행복하다! 하하.’
“이 병에 ‘홍실’을 넣으면 빨간 색이 되겠지요. 뚜껑은 빨간색의 보색인 청록색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젊은 여성들에게 어필할 것이라 봅니다.”
모두들 마음에 들었는지 웅성거리며 칭찬을 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그에게 물었다.
“디자인은 마음에 드네. 그런데 단가가 높아지는 문제가 있지 않나?”
“그 점은 이미 공장과 협의했습니다. 물론 기존 병보다는 단가가 높지만 어차피 들어갈 디자인은 새 디자인입니다. 둥근 병을 만들 때와 단가차이가 없겠금 조정을 했습니다.”
“음. 용량 문제는? 둥근 병보다는 용량이 작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존 병들보다는 높이가 높게 만들어 그 문제를 없앴습니다.”
“좋네.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보지. 장점보다 문제점을 찾아보는데 주력하도록 해. 흠없는 건 없으니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저기,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꺼낸 건 귀민이었다.
“찬영군에게 할 질문이 있으면 질문 하지.”
“혹시 병에 술을 담아 드셔보셨어요?”
“예? 아직 거긴 까진.”
“그 병은 무게가 다른 병보다 더 나갈 것 같군요. 그렇다면 술을 따라 마시기에 불편할 수 있다는 뜻이겠죠. 그런 기본적인 실험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취중엔 손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미끄러질 위험도 있다고요. 디자인은 눈으로만 보라고 있는 게 아니죠.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거라면 좀 더 실용적인 디자인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묻고 싶네요.”
‘아니, 저게! 칭찬은 한마디 안하고 공격을 하잖아! 눈을 부릅뜨고 할 질문은 아닌데 좀 심하게 구는 걸.’
“죄송합니다. 검토하겠습니다.”
“검토는 제가 하도록 하죠. 여성이 타켓이라면 남자인 찬영씨보다 제가 더 적격인 것 같네요. 제가 술을 마셔보고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정대리님! 그 실험은 일반적인 여성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대리님이 하시기는 너무 주량이 쎄시잖아요. 대리님은 거의 주당 수준이죠.”
“그렇다면 술 못 먹는 귀민씨랑 함께 하면 되겠네요. 더 이상 질문이 없다면 귀민씨 발표하시죠?”
아이디어 회의는 꽤 성공적으로 끝났다. 오전 일찍 시작된 회의는 점심시간을 지나고 끝이 나서 직원들 모두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난 명주언니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너 귀민이한테 좀 심한 거 아니야? 찬영씨한테 질문한 건데 네가 껴드는 것처럼 보였어.”
“알아, 언니. 화가 나서 껴든 건 아니었어.”
“그럼?”
그간의 일을 모두 다 들은 언니는 내 태도를 염려하며 물었다.
“귀민씨가 공과 사를 구분 못하고 찬영씨한테 공격적으로 구니까 그렇지. 그 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그럴 거라는 경고였어.”
“물론 그런 건 문제긴 하지만 좀 불쌍하기도 해.”
“미안한 건 사실인데 티내지 않으려고. 아마 더 자존심 상해 할 것 같아. 귀민씨 자존심 강하잖아.”
“홍주 이제 보니 속도 깊네. 그런 생각을 다 하고 있었어? 그나저나 진짜 귀민이랑 술 마실 거야?”
“그래야지. 뱉은 말이니까.”
솔직히 겁이 났다. 그녀와 마주 앉아 찬영씨가 만든 병을 사이에 놓고 술을 마셔야 하다니. 그녀가 공격해도 난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피해서는 안되는 자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
회의가 끝난 금요일 오후. 모두들 일찍 퇴근을 했고 나도 찬영씨와 일찍 퇴근을 하자고 약속한 상태였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자 늘 변함없는 자리에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그는 웃는 표정으로 날 맞았다. 그리고 저녁은 먹은 우리는 뭘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딜 가면 좋을까? 영화나 볼까, 오빠?”
“음. 홍주야, 오늘 집에 가지 마라.”
“뭐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집에 가지 말라니?”
“지금 당장 너랑 하고 싶은 게 생각났어.”
“그게 뭔데?”
“술 빚으러 가자. 홍천에 내가 술 빚는 곳이 있거든. 당장 가자. 너랑 함께 만들고 싶어.”
“술 빚으러? 그건 좋긴 한데 너무 급작스럽다. 지금 준비된 것도 없고. 간다고 해도 집에는 들려야겠는 걸. 옷이랑 화장품이 없어서.”
“그 문제라면 걱정 안 해도 돼. 내 차에 네 화장품, 잠옷까지 풀 세트로 대기 중이니까.”
“사 놓은 거야?”
“응. 널 언제든 납치할 수 있게, 준비해 놨지. 나한테 도망가려고 하면 납치할 생각이었거든.”
“진짜 엉뚱하다.”
“가는 거지?”
그는 망설이는 날 바라보며 물었다. 난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그렇게 우린 처음으로 단 둘의 여행을 떠났다. 6월이 다가오는, 아직 여름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밤에 충동적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