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키위) - 09. 받을 수 없는 사랑고백

나비2004.12.03
조회2,185

kiwi - 09


“오빠, 왜 울어요?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가, 아버지가...”


결혼을 하라고 했던 아버님이 많이 편찮아지신 모양이었다.


“지금 위독하세요?”

“우리 아빠 돌아가시면, 나 어떻게 하면 좋니? 응? 어쩌면 좋아?”

“오빠라도 침착해야죠. 오빠 울지 마요.”


서루 오빠는 한동안 어쩌면 좋냐는 말만 하면서 울기만 했다. 늠름해 보이던 오빠는 한없이 약하고 여리기만 했다.


“혜림아! 너 나랑 결혼해 줄 수 있니?”

“...”

“너 저번에 너 어떠냐고 물어봤었잖아. 내가 결혼 얘기 꺼냈을 때. 맞잖아?”

“네. 맞아요.”

“나랑 결혼 해주면 안 될까? 나 너한테 잘할게. 갑작스럽게 미안하지만 아빠가 너무 아프셔.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한 모습 꼭 보여드리고 싶다. 내 말 듣고 있니?”

“듣고 있어요.”


아버님의 병환으로 흥분해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울먹거리고, 혀도 꼬인 걸 보니 술도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훨씬 컸고 두서가 없어 알아듣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결혼 너무 하고 싶었다. 그리고 서루 오빠라면 결혼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결혼 얘기가 나오자 대답은 쉽게 나와 주지 않았다.


“너도 일찍 결혼하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부족하니? 내가 잘할게. 나랑 결혼 해줘라. 정말 잘 할게.”


그때 떠오르는 것이 찜질방이었다. 결혼과 찜질방. 나는 운명의 전환점에 서 있었다.


‘나중에 결혼한다고 해도 오빠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난다는 보장도 없지. 그리고 오빠는 평생 고마워하며 살겠지. 그래. 좋은 기회가 온 거야.’


“좋아요.”

“너 좋다고 한거니? 진짜야? 지금 나올 수 있어?”

“지금이요?”

“응. 병원으로. 정장입고 와. 엄마 아빠에게 인사드리게.”


1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야밤에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라고? 너무 스피드하잖아.’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은데.”

“그래도 와줘라.”

“알았어요. 어디에요? 병원이?”

“지금 몇시니? 아이구, 시간이 너무 늦었다. 네가 나오기 힘들겠구나.”

“아니에요. 나갈께요.”


그래 결혼 해보자 마음을 먹고 보니 내가 더 마음이 급했다.


“아니야. 오늘은 집에 있어.”

“괜찮아요.”

“내가 내일 전화할게. 밤늦게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괜찮다니까요. 나갈께요.”

“잘 자라. 내 색시야!”

“아니, 저기 , 오빠!”


뚝.


‘지금 내가 결혼하게 된 것 맞지? 하하. 인생이 풀리는 구나. 그나저나 정장 어딨지?’


오빠는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인사는 둘째 치고 색시라고 불러준 오빠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내 신랑. 신랑아! 보고 싶다!!


‘내가 정장이 없으니 셋째 언니에게 빌려야겠다.’


강모양은 마른 오이를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고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쯧쯧. 이미 게임 끝났다고. 열심히 오이나 축내라.’


“언니, 나 정장 좀 빌려줘.”

“야밤에 나가게? 어디 가는데?”

“결혼할 사람이 부모님 인사 오래.”

“후후흡.”


언니는 대꾸도 없이 웃었다. 얼굴에 붙인 오이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입을 꼴뚜기처럼 오므리자 입가에 주름이 확 잡혔다.


‘맛사지 할 때 자주 웃겨 줘야겠군.’


“왜 웃어? 진짜야. 아버님이 위독하셔서 결혼을 서둘러야 한대. 다음 달에 결혼 할지도 몰라.”


그제서야 언니는 진지해졌다.


“내가 정장이 어디 있니?”

“있잖아. 분홍 정장. 저번 달에 선 볼 때 산거.”

“아, 그거 세탁소 보냈을 걸.”


위기 위식을 느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세탁소에 보내야지 하면서 보내지 않은 것을 내가 분명히 보았다.


“여기 있잖아.”


장롱에서 분홍 정장을 꺼내 들자 언니는 안색까지 변하며 오이가 떨어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옷을 뺏어 들었다.


“내일 세탁소 보내야 돼. 이거 지저분하단 말이야.”

“괜찮아. 잠깐만 입으면 돼. 밤이라 잘 안보일 거야.”

“나 모레 입어야 돼. 내일 세탁소 보내야 된다구.”

“치사하게 왜 그래?”

“치사하면 언니들한테 빌려달라고 해라. 나한테 이러지 말고.”

“언니 그러지 말고 좀 빌려줘라.”

“저리 안 갈래? 억울하면 너 사 입어라.”

“그래. 치사하고 더러워서 안 입는다.”


정장을 빌리지는 못했지만 위기감을 느낀 강모양을 보니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아무도 없으니 저런 위기감이 들테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청옥 언니 자?”


둘째 언니 방문을 빼꼼이 열었다. 둘째 언니는 식용유를 바른 듯 번지르한 얼굴을 해 가지고는 발을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다.


‘저건 생식선 자극? 언니도 피부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군.’


“키위, 잘왔다. 언니 발 맛사지 좀 해줘.”

“나 바빠.”

“2만원 줄게 좀 해줘.”


짠돌이 청옥 언니가 2만원이라. 평소 같으면 바로 해주었을 테지만 이제 나는 찜질방 주인이다. 저런 거 안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다.


“미안. 진짜 나가봐야 되거든. 언니, 삼돌이는 잘 커?”


삼돌이는 청옥 언니의 애완용 해삼이었다. 어느 날 해삼을 사가지고 와서는 삼돌이란 이름을 붙이고 키우고 있었다. 재작년부터 시작된 기이한 행동 중에 하나였기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삼돌이, 삼순이 한 쌍이었는데 며칠 전 삼순이가 죽고, 언니가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


“아직은 싱싱해. 근데 이 시간에 어딜 나가?”


잠시 후 내 얘기를 들은 청옥 언니도 강모양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괜한 짜증과 비협조.


“검은 정장을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데 입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난 옷이 다 검은 색이니까 큰 언니한테 가봐라.”

“그래도 괜찮으니까 좀 빌려줘.”

“병원에 계시다면서? 그럼 더 안 되지. 빨리 큰 언니한테 가봐. 시간 더 늦어지면 안되잖아.”


청옥 언니는 셋째 언니만큼 신경질적이지는 않았지만 더 완강해 보였다. 큰 언니에게는 갈 필요도 없었다. 비협조적으로 나올 것이 뻔했고, 무엇보다 사이즈가 맞지를 않았다. 할 수 없이 내 옷 중 가장 얌전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서려는 것을 언니들 셋이 나와 막아섰다.


“강혜림! 언니가 그렇게 가르쳤니? 이 야밤에 어딜 나간다는 거야?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신다고 니 멋대로 행동해도 돼? 남들이 널 보면 뭐라고 하겠니? 근본 없다고 우리 부모님 욕 할 거 아니야. 가더라도 내일 나가.”


새벽 두시건 세시건 배고프다며 24시간하는 식당을 찾아다니는 것이 취미인 큰 언니가 이해 못할 말을 하고 있었다.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아빠한테 전화하기 전에 빨리 방으로 들어가.”


셋째 언니는 협박까지 하고. 세 여자는 몸으로 문을 막아섰다. 그런 언니들을 보자 그제야 드는 생각이 있었다.

청치마... 어려보이는 게 좋다 어쩌구 하면서 한 겨울에 청치마를 입으라고 했었지. 어쩐지 만장일치를 보았다 했더니 자신들의 옷을 빌려주기 싫어서였군. 아주 치사하군. 치사해.


언니들 옷을 늘 빌려 입던 나의 유일한 옷이 청치마와 더블 후드 코트였던 것이다.


‘오호, 단체로 막아보시겠다. 어림도 없지.’


결혼해 잘 살아보겠다는 동생을 막아서는 언니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어 대답도 하지 않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게 언니들 말을 귓등으로 들어?”


셋째 언니가 내 팔을 잡았고, 큰 언니는 내 옷을, 믿었던 둘째 언니는 내 머리채를 잡았다.


“아야!”

“나가지 말라고 했지. 언니들 말 안 들을래?”


난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억센 그녀들로 변신한 언니들에게 잡혀 방까지 질질 끌려와야 했다.


“이거 놔! 아야. 아프잖아.”

“너 꼼짝 말고 있어. 방 밖에 나오지도 마.”

“왜 이래. 진짜!”

“말도 하지마. 언니들에게 맞기 싫으면.”


세 언니 모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평소 상냥했던 둘째 언니가 제일 난리였다. 둘째 언니의 손에는 내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것이 몇 올 잡혀 있었다.


‘삼돌이 네 이놈을.’


잠시 삼돌이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랬다가는 내 생명도 위태로울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야, 세시까지 감시하자. 그 시간 지나면 나가지도 못하겠지. 그 때까지는 우리는 거실에서 고스톱이나 치자.”

“알았어. 내가 담요 가져올게.”


큰 언니의 지휘에 나머지 언니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간식까지 준비된 노름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난 언니들이 무서웠다. 워낙 나이차가 많이 나는 그녀들이라 함부로 대들기가 힘들었고, 한명이라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그녀들은 세 명이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역시 나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작전상 후퇴.



언니들이랑 실랑이 하는 사이에 서루 오빠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색시야! 잘자. 내일 보자!]


‘그래. 잘 자요. 신랑님! 내일 봐요.’


그리고 다른 문자가 와있었는데 현상 오빠가 보낸 것이었다.


[혜림아 혜림아 혜림아 혜림아 혜림아 혜림아 혜림아 혜림아 혜림아 혜림아 혜림아 혜림아]


현상 오빠가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왠지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현상 오빠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결혼을 결정하면 괜히 다른 남자가 신경 쓰인 다던데 그 때문일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다.


‘어라, 문자가 또 오네.’

[사랑한다. 너무나...]

‘사...랑 한다고? 사랑?’

생전 처음 받은 사랑 고백이었다.

난 현상 오빠의 문자를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키위는 답글 안주시는 거예요? ㅜ.ㅜ

정말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글이랍니다. 여러분과 호흡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