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키위) - 11. 태클녀의 등장

나비200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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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나올 때는 들어갔을 때 있었던 힘마저 모두 빠진 듯 했다. 결혼에 대한 필수 질문들이 “내 아들을 정말 사랑 하는가?” 내지는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겠나?”라고 생각했었기에 나의 약점들만 들춰내는 취조에 가까운 질문들은 정말 당혹스러웠다.

만약 예상했던 질문을 해온다면 거짓말이긴 해도 자신 있게 “예”라고 말할 준비쯤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이라는 거짓말을 시작으로 나의 대답들은 거짓이 적절히 섞인 듣기 좋은 말에 불과했다. 거짓말을 잘 하고 있나 지켜보고 있는 서루 오빠의 어머님의 감시 때문에 더욱 리얼해진 연기가 끝났을 때에는 나조차 내가 대학생이며 전공인 아동 심리학 공부를 더 깊이 하기 위해 앞으로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너 말 잘하더라.”


서루 오빠의 말은 마지막 자존심까지 완전히 뭉개는 말이었다.


“이제 됐죠? 제 할 일은 끝난 건가요?”

“화 난 거야?”

“아니요. 대학 나온 아드님 가진 부모님이라면 그럴 수 있다 생각해요.”


이 순간 서루 오빠의 어머니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큰 언니의 남자를 학벌을 이유로 돌려보낸 우리 부모님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힘들었지? 내가 데려다 줄게. 그리고 이제는 말 편하게 해.”


서루 오빠는 착한 일을 한 아이를 바라보듯 흐뭇한 표정으로 웃어주더니 내 손을 잡고는 주차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착한 일 했으니 상으로 집에 데려다 준다는 거야?’


그래도 약간은 화가 나서 머뭇거리고 있던 내 손을 잡고 앞서 걸어가고 있는 오빠의 어깨는 꽤 든든해 보였다. 들썩거리는 어깨가 마음껏 응석을 부려보라고 약을 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머뭇거리는 여자를 먼저 리드하는 남자는 참 매력적이다. 특히나 화를 낼까 말까 망설일 때 먼저 웃어 보이면서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는 남자에게 어느 여자가 화를 낼 수 있을까.

음... 생각해보니 세 명 있다.



오빠가 직접 차문을 열어준 것은 멋진 흰색 자가용이었다.


‘아우디? 이런 차를 타고 다니나? 폼 난다.’


사실 우리 집에는 차가 없었다. 찜질방을 하게 된 3년 전에 찜질방에서 집까지는 도보로 이동할만한 거리라 아빠는 과감히 차를 처분하셨고, 원래 차를 가지고 있던 둘째 언니는 2년 전 사고를 내면서 처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쉬는 날이 없는 찜질방이기도 했지만 모처럼 쉬는 날도 식구들끼리 교외로 나가거나 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그런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어느 누구 구입할 생각은 하지 않고, 차 있는 남자가 집안에 들어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거 오빠 차야?”

“아니. 엄마 꺼.”

“엄마가 직접 운전하셔?”

“그럼.”


‘우리 엄마는 지금쯤 빤스만 입고 땀 흘리고 계실텐데. 엄마! 내가 빨리 시집 갈 테니까 찜질방 물려주고 엄마도 폼나게 사세요.’


“오빠 피곤해보여. 어제부터 병원에 있었던 거야?”


순간 효심에 불타는 청이가 되어서는 서루 오빠에게 친절을 베풀기 시작했다.


“아니. 집에 있었어. 오늘도 늦게 나왔는걸. 너 오기 바로 전에 왔지.”


집에 있었으면서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오늘 정말 고맙다. 사실 네가 안 나와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었거든.”

“안 나왔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글쎄.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 봤는데.”


‘뭐가 글쎄야? 오늘 밤에 술 먹고 다른 여자에게 전화했겠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할 수 없었다. 서루 오빠는 나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나 역시도 아직은 서루 오빠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어느새 차는 병원을 벗어나 뻥 뚫린 4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20분 안에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는 그 시간동안 자신에 관한 것을 전부 설명하려는 듯 빠른 말투로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모두 암기하라는 듯 중요한 이야기는 강조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팬시 용품 사업을 하셨고, 어머니는 지분을 갖고 관리를 하고 있는 큰 식당이 여러 개라는 것, 아버님의 병환으로 사업과 가게 지분을 일부 정리하고 건물을 사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자기 고향은 서울 응암동이고, 군대는 해군을 지원해서 포항에 있었다는 이야기 등 자기소개서에 쓸 법한 말들을 해댔다.


“이제 복학하면 4학년이고, 내 전공은 신방과야.”

“그건 알아. 우리 언니 후배잖아.”

“참, 그렇지.”


‘결혼을 서둘러야하니 서로를 아는 것도 이런 방법 밖에는 없겠지.’


꿈꿔왔던 결혼과 조금씩 멀어지는 현실에 체념하면서도 자꾸 서글픈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 해도 돼. 오빠의 집이나 학교 그런 거 보고 결혼 결심한 거 아니니까. 나중에 들어도 되겠어. 근데 오빠는 나에 대해 궁금한 건 없어?”

“궁금한 거라···. 아, 찜질방이 어디야? 부모님이 찜질방 하시는 줄 몰랐네.”

“오빠도 알 걸. 백록 찜질방이라구. 은행 사거리에 있는 거.”

“어? 어. 거기 알지. 제일 큰 건물에 있는 거잖아.”

“알아? 와 본 적 있어?”

“글쎄. 내가 갔었나?”


이 남자 또 글쎄란다.


‘글쎄, 그냥 이런 단어 진짜 좋아하네. 걸핏하면 글쎄라지. 뭉개기 작전이다 이거지?’


난 이미 남자의 비위를 맞추고, 눈치를 보는 데는 도사였다. 데릴라 자매의 고된 훈련을 통과하고 인정까지 받은 인간 병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오빠 본 적 있는 것 같아. 일하는 데 분홍 게 왔다 갔다 한 것도 같은데.”

“아마 갔을 거야. 그 때 봤나부다.”


이제야 꼬리를 내리고 있다.


“요즘엔 연인끼리 데이트 하러도 많이 오더라.”

“그러니? 글쎄 나는 그런 건 잘 몰라서.”

“왜 오빠도 찜질방 왔으면 봤을 거 아니야?”

“글쎄다.”


확실한 긍정.


“난 말이야. 밤늦게 와서 손 꼭 붙들고 자는 커플들이 제일 꼴보기가 싫더라. 우리 언니들도 아주 싫어해. 어쩔 때는 발로 슬쩍 건드려 보기도 한다니까.”

“···. 거기 음료수 좀 줄래? 뒷자석에 비닐 봉투 있을 거야.”


‘목이 타겠지.’


순간 그 날의 일이 떠올라 오빠에게 건네주기 전에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어떤 사연의 여자든 결국 결혼하자고 손을 내민 것은 나니까 게임은 끝난 것이다.

브라보! 혼자 씁쓸한 브라보를 외치며 남은 음료수까지 깨끗이 비워 버렸다. 망고 맛 음료수는 씁쓸한 브라보에 어울리게 마음을 얼릴 정도로 차가웠다.



나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을 의도인지 오빠의 입술은 또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 입술을 가만히 지켜보는 동안 오빠가 점점 멋있어 보였다. 어쩌면 내가 좋아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에 최면에 걸려버린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보니까 참 멋지네. 운전하는 것도 멋있고, 말 할 때 입술이 삐뚤어지지도 않는 것 같고. 목소리도 듣기 좋다. 눈도 동글동글한 게 참 선해 보여. 결혼을 하면 오빠랑 닮은 아들을 낳게 되겠지. 정말 이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 건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 지금 내 옆에 있었다. 나는 그만 바라보고, 그는 나만 바라본다. 힘든 일을 함께 나누고, 기쁜 일에 함께 웃어줄 사람. 이제 내가 아파도 제일 먼저 달려와 줄 사람. 나와 한 가족이 될 사람. 내가 그 사람 곁에 있었다. 이제 드디어 만난 거다.


“다 왔다.”

“이대로 병원 다시 들어가는 거야?”

“그래야지. 엄마 식사하시게 해야 하니까.”

“커피 한잔 마시고 가면 안돼?”


이대로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웠다. 좀 더 서루 오빠의 이야기를 듣고, 나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꿈꿔왔던 결혼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싶었다.


“미안해. 다음에 하자.”


응석을 다 받아줄 것 같던 어깨는 미동도 없었고, 오빠의 표정 또한 흔들려 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알았어. 다음엔 밥도 사야 돼.”

“진짜 맛있는 걸로 사줄게. 아, 참!”


오빠는 주머니에게 흰 봉투를 꺼내 들었다.


“이거 받아.”

“이게 뭐야?”

“너 오늘 옷 샀다며? 이 옷이지? 내가 사줘야 하는데 미안해서. 옷 값이야.”


‘옷 값?’


오빠의 손이 무안해질 정도로 돈 봉투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오늘 수고한 수고비라 이거지?’


“자, 받아. 오늘 수고 많았다.”


견서루. 너 왜 사람 자꾸 이상하게 만드니...?


인사도 하지 않고 내려서는 차 문을 쾅하고 세게 닫아버렸다.


‘수고비? 내가 수고비 때문에 거기 간 줄 알아? 잘 해 준다면서. 이게 잘해주는 거냐구?’


잔뜩 화가 나 찜질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각난 것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언니들이었다. 그녀들은 나의 표정부터 살피겠지. 그럼 웃어야지.


‘음하하하.’


“혜림이...?”


들어가자마자 언니들을 찾고 있는데 어깨를 치며 내 이름을 부른 것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 병진이었다.


“병진아, 오랜만이다.”

“너 혼자 온 거야?”

“으, 응.”

“혼자 와서는 뭐 좋다고 쪼개니? 넋 나간 애 같다. 얘.”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내 인생에 태클을 걸었던 병진이가 날 보며 웃고 있었다.


‘불안해... 좋지 않아. 이 불안감은 대체 뭐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