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난 레오는 눈을 비비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요한센을 찾았다. 그런데, 그가 없었다. 매일 아침 커피와 토스트는 요한센의 몫이었는데.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접니다, 사장님.
-그래, 요한센. 뭐하는거야? 빨리 내방으로 오지 않고.
-저 영국가는 비행기입니다만.
레오는 순간 5톤짜리 망치로 얻어맞은 듯 놀랐다.
-뭐라고? 나는 지금 여기 호텔인데?
-그래서 제가 비행기를 예약해뒀습니다. 그 커피 테이블 위에 있을텐데요.
레오는 급하게 커피 테이블위를 쳐다봤다. 그러나 비행기 티켓을 커녕 지하철 티켓도 없었다.
-없는데?
-없어요? 잠깐만요.
요한센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전화기에 대고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이쿠. 일을. 비행기 티켓이 왜 제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일까요. 어쩔 수 없네요, 다음 비행기로 오세요!
레오가 미쳐 뭐라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그는 홀린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다가 항공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삼일 전 비행기 표까지 모두 예약이 끝나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영국에 많이 가나요?
레오의 말에 항공사 직원은 친절하게도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비행기도 딱 한 좌석 남았습니다만. 더 도와드릴 일 있으신가요?
-그 표라도 주쇼.
레오는 투덜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기다렸다는 듯 또 전화가 걸려왔다. 요한센이었다. 레오는 투덜거리며 3일 후 표를 예약했다고 말했고, 요한센은 잘 됐다는 투로 대답했다.
-잘 되었네요. 삼숭과 핸드폰 계약 채결하고 오십시오. 그리고 효은 아가씨도 3 일 동안 휴가라던데요. 그럼 유럽은 저에게 맡겨 주시고 사장님은... 말 안해도 아시죠?
그때서야 레오는 이 모든 일이 요한센의 계략임을 알았다.
-자네.. 혹시..
-제가 뭘요? 그럼 전 이만.. 아, 참. 제 옆에 스완 기자가 있습니다. 잘했죠?
대답할 사이도 없이 전화는 끊겼고 레오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쨌든 그는 지금 서울에 효은과 단 둘이 남았다.
효은은 아침 일찍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서 쇼핑을 하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고깃집에서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호텔로 오기로 했고 효은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효은의 머릿속에 레오가 생각났다. 왜 갑자기 그가 생각나는 거지? 효은은 머리를 흔들었다. 물방울이 튕겼다.
-어? 그로스베너씨.
낯 익은 목소리에 레오는 뒤를 돌아봤다. 효은이 한 중년 부인과 함께 서 있었다.
-안녕하시오. 이 분은?
-우리 엄마에요.
레오는 정중하게 영국 왕실 예법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효은의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져 효은에게 뭐라고 한국말로 말했다.
-엄마가 고맙대요. 우리 엄마도 영국에서 사셨거든요.
효은의 어머니가 땡큐ㅡ 라고 말하자 레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두 모녀는 레오의 앞을 스쳐 지나갔고 레오는 그런 효은의 뒷 모습을 바라봤다.
-그런데 저 남자 유명한 사람 아니니?
-어, 엄마 어떻게 알았어?
-나 영국에 살 때 신문에서 사진 봤다.
효은은 다시 한번 레오가 유명한 남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우리 딸이 저런 남자랑 결혼하믄 소원이 없겄다. 그래, 넌 애인도 없냐?
-영국에선 다들 결혼 늦게 하잖아.
효은은 애써 어머니의 푸념을 외면했다.
-한국에선 니 나이면 시집가서 애가 하나는 다들 있다. 너 시집 안가고 그럴려면 그냥 한국 들어와. 알았어?
어머니의 강압에 효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호텔로 돌아온 효은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레오가 생각났다. 요즘 들어서 문득문득 그가 생각나는 것이 못 마땅한 효은은 엘리베이터 숫자 버튼을 부서져라 눌렀다. 어쩌면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몰라. 효은은 잠시 생각했다. 그럴지도 몰라.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효은은 혹시 레오가 밖에 있나 고개만 내밀고 복도를 훑어봤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효은은 발소리도 나지 않게 살짝살짝 복도를 걸어 방 문을 열었다. 내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효은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어깨를 쫙 피고 방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간 효은은 옷을 벗고 헐렁한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때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다.
-누구에요?
효은이 묻자 밖에서 레오가 대답했다.
-어? 잠깐만요!
효은은 다시 벗었던 옷을 입고 머리를 대충 다듬고 파우더를 얼굴에 서너번 두드리고는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괜찮다면, 같이 와인이라도 한잔 하겠소?
효은은 잠깐 동안 머리를 굴렸다.
-아, 좋아요.
기사는 다 끝났고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효은은 애써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그런데 요한센씨는 먼저 갔나요?
-갔소.
레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흠.
효은도 할말이 없었다. 레오는 그저 묵묵히 와인을 따랐고 효은은 그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기만 했다.
-그 와인 찾으려고 서울 시내를 다 뒤졌소.
-어? 그래요? 어차피 난 와인 맛도 잘 모르는데요.
효은의 말에 레오가 웃었다. 레오가 웃자 효은도 웃었다. 우리 바보같아. 효은이 말했다.
-바보?
레오가 얼굴을 찌뿌렸다. 어쩌면 그럴지도.
-왜, 화났어요?
-아니. 어쩌면 우리가 진짜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레오의 말에 이번에는 효은이 얼굴을 찌뿌렸다.
-왜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와인 맛은 어때?
-달콤해서 좋아요. 약간 씁쓸하기도 하고.
-그게 인생의 맛이라던데? 요한센이.
레오의 말에 효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고양이 좋아하나?
레오가 갑자기 엉뚱한 것을 물었다.
-좋아하죠. 개보다 고양이가 더 좋아요. 나중에 한 열 두 마리쯤 기르고 싶네요.
레오는 와인을 놓아두고 자기 잔에 독한 데낄라를 부었다. 효은은 그게 무슨 술인지도 모르고 자기도
한잔 달라고 했다.
-이거 데낄라인데?
-아, 나도 알아요.
이름만 들었던 술을 처음 보자 효은의 눈이 반짝 빛났다. 효은은 자신의 잔을 레오에게 내 밀었다. 레오는 그녀가 안다고 잔을 내밀자 별 의심없이 술 잔에 데낄라를 따랐다. 독한 알쿨냄새에 눈살을 찌뿌린 그녀는 단숨에 데낄라를 마셔버렸다.
-아니. 당신 데낄라 마실지 몰라?
-이렇게 마시는 거 아닌가요?
효은은 급하게 물을 마시며 물었다.
-데낄라는 독해서 맥주나 레몬주스에 타먹는건데?
레오는 효은에게 대답하며 냉장고에서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가지고 왔다. 챙피해진 효은은 객기를 부렸다.
-흥. 이렇게 마셔도 좋다구요.
효은은 레오가 말릴 사이도 없이 또 한잔을 원샷했다.
-당신. 미쳤어? 와인 몇 잔에 취한 사람이.
레오가 깜짝 놀라 효은의 잔을 빼앗았다. 효은이 살짝 웃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아, 맛있다.
-이 술주정뱅이 아가씨.
레오는 효은을 보며 맞은 편에 앉았다. 볼이 달아오른 모습이 귀여웠다.
-그런데, 효은씨. 내가 정말 빵점짜리 남자야?
효은은 레오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이 퍽 낯설다고 생각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어차피 내 남자도 안 될건데 빵점이면 어떻고 백점이면 어때.
효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오는 쿡쿡대며 웃다가 다시 물었다.
-내가 당신 남자가 될 수도 있잖아.
-그럼 내가 신데렐라가 되는거야? 난 싫은데.
-왜 싫은데?
효은의 뜻밖의 말에 레오가 몸을 앞으로 숙이고 물었다.
-난 가진 게 쥐뿔도 없으면서 남자 덕이나 보고 사는 그런 신데렐라는 싫어. 차라리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더 낫지.
효은은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말했다. 이미 취했는 듯, 몸을 잘 가누지 못했다.
-그런데, 효은씨.
레오가 말하자 효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름을 부르죠? 내 이름이 부르지 어렵다고 한 것 같은데?
-그냥. 당신 이름이 예쁘니까.
레오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어? 당신 나 좋아해요?
효은이 대담하게도 물었다. 레오는 정말 이 여자가 취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사실은 나 당신한테 키스도 했는걸.
레오의 말에 효은이 잠깐 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쿠션을 집어들고 레오를 때리기 시작했다.
-당신 미친거아냐? 고소하겠어!
그렇지만 이미 취한 상태라 몇 번 때리는 시늉만 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소하겠어! 고소! 추행범으로 고소할거야! 고소!
레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하다 일어나 효은을 소파에 앉히고는 그 옆에 앉았다. 효은은 정말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잘 들어. 내가 왜 그랬을까 정말 많이 고민해 봤는데, 오늘도 고민했는데, 나 당신 좋아하는 것 같아. 우리 천천히 서로에게 좋은 마음 가지고 시작하면 안될까?
-그게 무슨 소리야?
효은이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나 당신 좋아한다구.
레오가 아주 정중하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 당신 좋아해. 아직 사랑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하루 내내 당신이 생각나. 오늘 내내 바이어 만나는데 당신 생각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어.
-미쳤어! 당신 미쳤어!
효은은 레오가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려 했다.
-잠깐만. 내 이야기 좀 들어줘.
-무슨 이야기를 더 들어? 당신 같은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나 돼? 왜 사람을 가지고 놀려구해?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 당신 미쳤어!
레오는 효은을 잡아서 소파에 앉혔다.
-나 정말 당신에게 잘할게. 나랑 만나달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내 애인이 되어달란 말이 아니야. 그냥 나를 좀 더 좋게 봐달라구.
-가겠어. 내일 맨 정신으로 이야기해.
-가지마. 내일이면 우리 또 싸울지도 몰라. 당신, 나랑 싸우는 게 좋아? 그게 좋아?
-나도 좋진 않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 뭐가 달라지는데? 난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겠어. 우리는 또 싸우게 될거고. 가장 중요한건 우린 서로를 너무 잘 몰라.
-알아가면 돼. 천천히 알아가면 된다고. 당신도 날 좋아하잖아.
레오의 말에 효은은 머리가 하얗게 새는 것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뭐라고?
-당신도 날 좋아하고 있다고. 아닌가?
효은은 소파 뒤로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런가? 효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대로 누워 자고 싶었다.
-나, 처음엔 당신을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냥 당신이 건방지다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하루 내내 강가에 서서 생각해 봤는데, 그게 아니더라구. 당신이 없으니 너무 허전하구. 싸워도 좋으니 당신이 내 눈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내 눈에 보이는 곳에만 있어주면 안될까?
레오가 진지하게 말을 마쳤다. 이젠 효은이 말할 차례였다.
-당신을 좋아하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은 너무 부담스러워.
효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동안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내 말에 당신도 같은 생각이면 이 목걸이 받아줘.
레오가 목걸이를 내밀었다. 효은이 보석을 좋아한다 해서 서울 시내를 다 뒤져 가까스로 발견한 목걸이였다. 효은이 목걸이를 바라봤다. 달과 별 모양의 팬던트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효은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레오를 바라봤다. 이 남자는 너무 과분하다. 너무 힘들다. 효은은 머릿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나도 저 남자가 싫지는 않아. 그래, 좋아하는 건지도 몰라. 효은은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렇지만.. 효은은 그의 눈동자에서 진심을 읽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서 목걸이를 움켜 쥐었다.
-고마워.
레오가 진심으로 말했다.
-내일 아침이면 나 후회할지도 몰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지도 몰라.
효은이 다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 말을 전부 진심이야.
레오가 효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목걸이의 차가운 느낌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레오가 효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안아줘요.
효은이 속삭였다. 효은의 말에 잠깐 동안 망설이던 레오는 효은은 살짝 잡아당겨 자신의 무릎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효은이 이마를 레오의 어깨위에 기댔다. 레오가 효은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조금씩 조심스럽게 열정적으로 변한 키스는 레오와 효은을 휘감았다. 레오는 단단한 팔로 효은을 세게 끌어안았고 효은은 레오의 머리를 부드럽게 안았다. 레오의 입술은 효은의 뺨과 목덜미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와 동시에 효은의 손가락도 레오의 어깨와 목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하지? 레오의 마음속에서 조그만 갈등이 일어났다. 침대로 갈까? 레오의 마음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그녀의 마음이 변할지 몰라. 순간, 효은이 레오의 옷을 들추고 부드럽고 따뜻한 그녀의 손가락으로 레오의 등을 더듬었다.
-침대로 가요.
그녀가 속삭였다. 레오는 자신의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지맙시다.
레오가 속삭였다. 그러나 곧 레오는 후회했다. 바보 같기는! 넌 아마 그 말을 평생을 두고 후회할거다. 레오는 자기 머리를 벽에다 박아버리고 싶었다.
-그래요. 그럼 날 재워줘요.
효은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레오는 효은을 안고 침대로 갔다. 그는 효은을 눕히고 그 옆에 누워 팔베개를 해 주었다. 효은은 어린아이처럼 레오의 품을 파고 들었다. 레오는 시트를 덮고 효은의 몸을 안아주었다. 효은은 곧 잠이 들었다. 그러나 레오는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당신이 날 사랑했으면 좋겠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거든.
레오는 효은의 뺨과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혹시 내일 아침에 모든 게 꿈이라고 했더라도 난 지금이 너무 좋은 걸. 레오는 다시 효은을 끌어안았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구요~ 댓글 만발...추천 꾸욱...안해주심 마음에 스크레치나요..ㅋ
내일은 신데렐라★16★침대로 가요(15세금)
16 침대로 가요.
아침에 일어난 레오는 눈을 비비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요한센을 찾았다. 그런데, 그가 없었다. 매일 아침 커피와 토스트는 요한센의 몫이었는데.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접니다, 사장님.
-그래, 요한센. 뭐하는거야? 빨리 내방으로 오지 않고.
-저 영국가는 비행기입니다만.
레오는 순간 5톤짜리 망치로 얻어맞은 듯 놀랐다.
-뭐라고? 나는 지금 여기 호텔인데?
-그래서 제가 비행기를 예약해뒀습니다. 그 커피 테이블 위에 있을텐데요.
레오는 급하게 커피 테이블위를 쳐다봤다. 그러나 비행기 티켓을 커녕 지하철 티켓도 없었다.
-없는데?
-없어요? 잠깐만요.
요한센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전화기에 대고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이쿠. 일을. 비행기 티켓이 왜 제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일까요. 어쩔 수 없네요, 다음 비행기로 오세요!
레오가 미쳐 뭐라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그는 홀린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다가 항공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삼일 전 비행기 표까지 모두 예약이 끝나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영국에 많이 가나요?
레오의 말에 항공사 직원은 친절하게도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비행기도 딱 한 좌석 남았습니다만. 더 도와드릴 일 있으신가요?
-그 표라도 주쇼.
레오는 투덜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기다렸다는 듯 또 전화가 걸려왔다. 요한센이었다. 레오는 투덜거리며 3일 후 표를 예약했다고 말했고, 요한센은 잘 됐다는 투로 대답했다.
-잘 되었네요. 삼숭과 핸드폰 계약 채결하고 오십시오. 그리고 효은 아가씨도 3 일 동안 휴가라던데요. 그럼 유럽은 저에게 맡겨 주시고 사장님은... 말 안해도 아시죠?
그때서야 레오는 이 모든 일이 요한센의 계략임을 알았다.
-자네.. 혹시..
-제가 뭘요? 그럼 전 이만.. 아, 참. 제 옆에 스완 기자가 있습니다. 잘했죠?
대답할 사이도 없이 전화는 끊겼고 레오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쨌든 그는 지금 서울에 효은과 단 둘이 남았다.
효은은 아침 일찍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서 쇼핑을 하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고깃집에서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호텔로 오기로 했고 효은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효은의 머릿속에 레오가 생각났다. 왜 갑자기 그가 생각나는 거지? 효은은 머리를 흔들었다. 물방울이 튕겼다.
-어? 그로스베너씨.
낯 익은 목소리에 레오는 뒤를 돌아봤다. 효은이 한 중년 부인과 함께 서 있었다.
-안녕하시오. 이 분은?
-우리 엄마에요.
레오는 정중하게 영국 왕실 예법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효은의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져 효은에게 뭐라고 한국말로 말했다.
-엄마가 고맙대요. 우리 엄마도 영국에서 사셨거든요.
효은의 어머니가 땡큐ㅡ 라고 말하자 레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두 모녀는 레오의 앞을 스쳐 지나갔고 레오는 그런 효은의 뒷 모습을 바라봤다.
-그런데 저 남자 유명한 사람 아니니?
-어, 엄마 어떻게 알았어?
-나 영국에 살 때 신문에서 사진 봤다.
효은은 다시 한번 레오가 유명한 남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우리 딸이 저런 남자랑 결혼하믄 소원이 없겄다. 그래, 넌 애인도 없냐?
-영국에선 다들 결혼 늦게 하잖아.
효은은 애써 어머니의 푸념을 외면했다.
-한국에선 니 나이면 시집가서 애가 하나는 다들 있다. 너 시집 안가고 그럴려면 그냥 한국 들어와. 알았어?
어머니의 강압에 효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호텔로 돌아온 효은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레오가 생각났다. 요즘 들어서 문득문득 그가 생각나는 것이 못 마땅한 효은은 엘리베이터 숫자 버튼을 부서져라 눌렀다. 어쩌면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몰라. 효은은 잠시 생각했다. 그럴지도 몰라.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효은은 혹시 레오가 밖에 있나 고개만 내밀고 복도를 훑어봤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효은은 발소리도 나지 않게 살짝살짝 복도를 걸어 방 문을 열었다. 내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효은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어깨를 쫙 피고 방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간 효은은 옷을 벗고 헐렁한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때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다.
-누구에요?
효은이 묻자 밖에서 레오가 대답했다.
-어? 잠깐만요!
효은은 다시 벗었던 옷을 입고 머리를 대충 다듬고 파우더를 얼굴에 서너번 두드리고는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괜찮다면, 같이 와인이라도 한잔 하겠소?
효은은 잠깐 동안 머리를 굴렸다.
-아, 좋아요.
기사는 다 끝났고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효은은 애써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그런데 요한센씨는 먼저 갔나요?
-갔소.
레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흠.
효은도 할말이 없었다. 레오는 그저 묵묵히 와인을 따랐고 효은은 그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기만 했다.
-그 와인 찾으려고 서울 시내를 다 뒤졌소.
-어? 그래요? 어차피 난 와인 맛도 잘 모르는데요.
효은의 말에 레오가 웃었다. 레오가 웃자 효은도 웃었다. 우리 바보같아. 효은이 말했다.
-바보?
레오가 얼굴을 찌뿌렸다. 어쩌면 그럴지도.
-왜, 화났어요?
-아니. 어쩌면 우리가 진짜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레오의 말에 이번에는 효은이 얼굴을 찌뿌렸다.
-왜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와인 맛은 어때?
-달콤해서 좋아요. 약간 씁쓸하기도 하고.
-그게 인생의 맛이라던데? 요한센이.
레오의 말에 효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고양이 좋아하나?
레오가 갑자기 엉뚱한 것을 물었다.
-좋아하죠. 개보다 고양이가 더 좋아요. 나중에 한 열 두 마리쯤 기르고 싶네요.
레오는 와인을 놓아두고 자기 잔에 독한 데낄라를 부었다. 효은은 그게 무슨 술인지도 모르고 자기도
한잔 달라고 했다.
-이거 데낄라인데?
-아, 나도 알아요.
이름만 들었던 술을 처음 보자 효은의 눈이 반짝 빛났다. 효은은 자신의 잔을 레오에게 내 밀었다. 레오는 그녀가 안다고 잔을 내밀자 별 의심없이 술 잔에 데낄라를 따랐다. 독한 알쿨냄새에 눈살을 찌뿌린 그녀는 단숨에 데낄라를 마셔버렸다.
-아니. 당신 데낄라 마실지 몰라?
-이렇게 마시는 거 아닌가요?
효은은 급하게 물을 마시며 물었다.
-데낄라는 독해서 맥주나 레몬주스에 타먹는건데?
레오는 효은에게 대답하며 냉장고에서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가지고 왔다. 챙피해진 효은은 객기를 부렸다.
-흥. 이렇게 마셔도 좋다구요.
효은은 레오가 말릴 사이도 없이 또 한잔을 원샷했다.
-당신. 미쳤어? 와인 몇 잔에 취한 사람이.
레오가 깜짝 놀라 효은의 잔을 빼앗았다. 효은이 살짝 웃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아, 맛있다.
-이 술주정뱅이 아가씨.
레오는 효은을 보며 맞은 편에 앉았다. 볼이 달아오른 모습이 귀여웠다.
-그런데, 효은씨. 내가 정말 빵점짜리 남자야?
효은은 레오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이 퍽 낯설다고 생각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어차피 내 남자도 안 될건데 빵점이면 어떻고 백점이면 어때.
효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오는 쿡쿡대며 웃다가 다시 물었다.
-내가 당신 남자가 될 수도 있잖아.
-그럼 내가 신데렐라가 되는거야? 난 싫은데.
-왜 싫은데?
효은의 뜻밖의 말에 레오가 몸을 앞으로 숙이고 물었다.
-난 가진 게 쥐뿔도 없으면서 남자 덕이나 보고 사는 그런 신데렐라는 싫어. 차라리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더 낫지.
효은은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말했다. 이미 취했는 듯, 몸을 잘 가누지 못했다.
-그런데, 효은씨.
레오가 말하자 효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름을 부르죠? 내 이름이 부르지 어렵다고 한 것 같은데?
-그냥. 당신 이름이 예쁘니까.
레오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어? 당신 나 좋아해요?
효은이 대담하게도 물었다. 레오는 정말 이 여자가 취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사실은 나 당신한테 키스도 했는걸.
레오의 말에 효은이 잠깐 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쿠션을 집어들고 레오를 때리기 시작했다.
-당신 미친거아냐? 고소하겠어!
그렇지만 이미 취한 상태라 몇 번 때리는 시늉만 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소하겠어! 고소! 추행범으로 고소할거야! 고소!
레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하다 일어나 효은을 소파에 앉히고는 그 옆에 앉았다. 효은은 정말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잘 들어. 내가 왜 그랬을까 정말 많이 고민해 봤는데, 오늘도 고민했는데, 나 당신 좋아하는 것 같아. 우리 천천히 서로에게 좋은 마음 가지고 시작하면 안될까?
-그게 무슨 소리야?
효은이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나 당신 좋아한다구.
레오가 아주 정중하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 당신 좋아해. 아직 사랑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하루 내내 당신이 생각나. 오늘 내내 바이어 만나는데 당신 생각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어.
-미쳤어! 당신 미쳤어!
효은은 레오가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려 했다.
-잠깐만. 내 이야기 좀 들어줘.
-무슨 이야기를 더 들어? 당신 같은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나 돼? 왜 사람을 가지고 놀려구해?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 당신 미쳤어!
레오는 효은을 잡아서 소파에 앉혔다.
-나 정말 당신에게 잘할게. 나랑 만나달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내 애인이 되어달란 말이 아니야. 그냥 나를 좀 더 좋게 봐달라구.
-가겠어. 내일 맨 정신으로 이야기해.
-가지마. 내일이면 우리 또 싸울지도 몰라. 당신, 나랑 싸우는 게 좋아? 그게 좋아?
-나도 좋진 않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 뭐가 달라지는데? 난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겠어. 우리는 또 싸우게 될거고. 가장 중요한건 우린 서로를 너무 잘 몰라.
-알아가면 돼. 천천히 알아가면 된다고. 당신도 날 좋아하잖아.
레오의 말에 효은은 머리가 하얗게 새는 것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뭐라고?
-당신도 날 좋아하고 있다고. 아닌가?
효은은 소파 뒤로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런가? 효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대로 누워 자고 싶었다.
-나, 처음엔 당신을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냥 당신이 건방지다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하루 내내 강가에 서서 생각해 봤는데, 그게 아니더라구. 당신이 없으니 너무 허전하구. 싸워도 좋으니 당신이 내 눈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내 눈에 보이는 곳에만 있어주면 안될까?
레오가 진지하게 말을 마쳤다. 이젠 효은이 말할 차례였다.
-당신을 좋아하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은 너무 부담스러워.
효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동안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내 말에 당신도 같은 생각이면 이 목걸이 받아줘.
레오가 목걸이를 내밀었다. 효은이 보석을 좋아한다 해서 서울 시내를 다 뒤져 가까스로 발견한 목걸이였다. 효은이 목걸이를 바라봤다. 달과 별 모양의 팬던트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효은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레오를 바라봤다. 이 남자는 너무 과분하다. 너무 힘들다. 효은은 머릿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나도 저 남자가 싫지는 않아. 그래, 좋아하는 건지도 몰라. 효은은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렇지만.. 효은은 그의 눈동자에서 진심을 읽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서 목걸이를 움켜 쥐었다.
-고마워.
레오가 진심으로 말했다.
-내일 아침이면 나 후회할지도 몰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지도 몰라.
효은이 다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 말을 전부 진심이야.
레오가 효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목걸이의 차가운 느낌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레오가 효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안아줘요.
효은이 속삭였다. 효은의 말에 잠깐 동안 망설이던 레오는 효은은 살짝 잡아당겨 자신의 무릎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효은이 이마를 레오의 어깨위에 기댔다. 레오가 효은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조금씩 조심스럽게 열정적으로 변한 키스는 레오와 효은을 휘감았다. 레오는 단단한 팔로 효은을 세게 끌어안았고 효은은 레오의 머리를 부드럽게 안았다. 레오의 입술은 효은의 뺨과 목덜미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와 동시에 효은의 손가락도 레오의 어깨와 목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하지? 레오의 마음속에서 조그만 갈등이 일어났다. 침대로 갈까? 레오의 마음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그녀의 마음이 변할지 몰라. 순간, 효은이 레오의 옷을 들추고 부드럽고 따뜻한 그녀의 손가락으로 레오의 등을 더듬었다.
-침대로 가요.
그녀가 속삭였다. 레오는 자신의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지맙시다.
레오가 속삭였다. 그러나 곧 레오는 후회했다. 바보 같기는! 넌 아마 그 말을 평생을 두고 후회할거다. 레오는 자기 머리를 벽에다 박아버리고 싶었다.
-그래요. 그럼 날 재워줘요.
효은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레오는 효은을 안고 침대로 갔다. 그는 효은을 눕히고 그 옆에 누워 팔베개를 해 주었다. 효은은 어린아이처럼 레오의 품을 파고 들었다. 레오는 시트를 덮고 효은의 몸을 안아주었다. 효은은 곧 잠이 들었다. 그러나 레오는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당신이 날 사랑했으면 좋겠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거든.
레오는 효은의 뺨과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혹시 내일 아침에 모든 게 꿈이라고 했더라도 난 지금이 너무 좋은 걸. 레오는 다시 효은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