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휴게실에서 먹기로 하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높은 건물들은 하나 둘 사라져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고 녹색 나무들이 내뿜는 싱그러운 산소가 폐로 스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깊게 숨을 한 번 내쉬고 창문을 반쯤 닫고는 오빠를 바라보았다.
“오빠! 홍천이라면 옥선주가 유명하잖아. 옥선주 만들려 가는 거야?”
“아니. 주재료인 옥수수를 구하는 것도 지금은 어렵지. 너 옥선주 유래에 대해서도 아니?”
“응. 잠깐만. 가물가물하네. 뭐였더라? ······. 아! 옛날에 괴질에 걸린 노모를 모시는 선비가 있었어. 그 선비는 부모님들을 위해 자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고 허벅지를 잘라 고기를 드렸다. 여기까지는 맞지?”
“잘 아네.”
“아! 그 다음이 잘 기억 안 난단 말이야. 헷갈려. 그 선비 부인 이름이 옥선인데.”
“그 선비 이름은 이용필이야. 그 선비의 효심은 임금님 귀까지 들어갔지. 그래서 임금님은 효자장과 벼슬을 내리고. 그 선비는 감사한 마음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술을 진상했지.”
“아, 맞다, 맞다. 그 술 이름은 부인의 이름을 따서 옥선주. 대단하네! 별 걸 다 기억해!”
“너야말로 대단하다. 난 얼마 전에 찾아서 본 거지만 넌 도대체 언제 안 거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야기 해주시곤 했으니까. 그래서 자세한 사람 이름까지는 몰랐다. 그럼 옥선주는 다음에 만들러 갈 거야?”
“아니. 그건 효자들만 만들어야 하는 술 같아. 나한테 어울리지 않지.”
얼굴의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차 속력이 갑자기 빨라졌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부모님이랑 사이가 안 좋은가? 그래서 혼자 나와 사는 거고? 그러고 보니 오빠에 대해서 난 참 아는 게 없다. 지금 물어볼 수도 없고.’
산들은 서서히 움직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가까워지는 것 같다가도 멀어지고 또 다른 산이 가까워지다가 멀어지고. 꼭 오빠의 모습 같았다. 난 기어에 손을 얹은 오빠의 손에 내 손을 살포시 올렸다. 굵은 남자의 뼈마디가 만져졌다. 하지만 오늘따라 약해 보이는 그. 그에게 위로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럭저럭 반은 왔나봐. 배고프다. 우리 이번 휴게소 들어갈까?”
조금은 하이톤으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홍주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나?”
“힘이 없어? 그럼 곤란한대.”
“뭐야? 힘없으면 버릴 것 같은 말투인데!”
‘안 버려. 이젠 오빠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굳은 다짐을 하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보통의 가정집이었다. 방 하나를 얻어서 가끔씩 내려와 술을 빚고 있다고 했다.
“좀 누추해. 아마 내 자취방보다도 못할 걸.”
“괜찮아. 호텔 가는 것보단 그게 좋으니까.”
생각보다도 훨씬 작은 방이었다. 그러나 홍천 시내를 벗어난 외진 곳에 있는 집은 마당만은 넓었다.
“홍주야, 술은 내일 빚자. 오늘은 좀 쉬고.”
“응. 좋아.”
“너한테 줄 거 있는데.”
그가 내민 것은 선물 세트 크기의 상자였다.
“뭐야, 이게? 어머나! 이거 종합 선물 세트잖아.”
“우연히 들린 슈퍼에서 샀어.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 아버지가 저녁에 가끔 사오시곤 했는데.”
“정말 오랜만에 본다. 예전이랑은 많이 다르겠지?”
그것은 여러 종류의 과자가 들어있는 그야말로 종합 선물 세트였다. 옛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날 생각하며 샀다는 그의 마음이 더 감동스러웠다.
“오늘 이거 다 먹을래. 오빠랑 같이 먹어야지.”
“홍주가 먹여줘.”
“먹여줘? 아니!”
아니, 손이 없어? 먹여 달라긴. 순간 말이 튀어나올 뻔 했는데 가까스로 참았다. 그의 깜짝 애교에 아직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였다. 작은 방에 그의 무릎을 베고 과자를 전부 뜯어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 넣어줄 때 잘못하면 과자 가루가 눈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너무나 편안했고 너무나 즐거웠다. 잠시 후 방에는 온통 과자가루투성이였다.
“오빠, 이번엔 초콜릿 줄게. 아, 해봐!”
“싫어. 입으로 줘!”
그가 내 옆으로 누웠다. 오빠는 우산모양의 초콜릿을 입에 물고 내게 다가왔다.
“싫어.”
“으응으응응.”
말을 할 수 없는 그가 우물거렸고 그 모양이 너무나 우스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귀엽다, 이 남자.’
그의 두 손이 내 얼굴을 잡았다. 정말 먹일 모양인데? 사뭇 진지해진 나는 천천히 초콜릿을 입 속에 넣었다. 강렬한 단맛이 입에 퍼졌다. 쓰다고 해야 하나, 달다고 해야 하나. 한가지로 표현하긴 어려운 맛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형언할 수 없는 맛이 나는 그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몸매처럼 미끈한 혀였다. 입 안에서 초콜릿이 녹 듯 나도 그 때문에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우린 과자가루 위에 함께 누워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차에 잠옷과 화장품을 가지러간 사이 난 어떤 잠옷일까 상상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너무 야한 건 아니겠지, 설마? 공주풍 옷이었음 좋겠다.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 같은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실크 잠옷.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럼 혹시 야한 끈 팬티에 슬립?’
나 자신을 벗겼다 입혔다 방정맞은 상상을 하는 사이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한참 긴장을 하고 있던 나는 잠옷을 보고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윗옷과 아래 바지가 세트인 아주 평범한 잠옷이었다. 그는 하늘색, 나는 분홍색.
“마음에 들어?”
“좀 노인스럽다. 이런 건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 되서야 입을 줄 알았는데.”
“야한 걸 살까도 했지만 네가 또 버럭 화를 낼까봐 무서웠어.”
“뭐야? 누가 화를 내!”
“안 사길 잘했다. 벌써 화내는 것 좀 봐.”
“너무 야한 건 민망하니까 화 낼 수 있는 거 아냐?”
“사실 그런 건 사고 싶지 않더라. 아주 편한 잠옷을 입고 편히 잠든 네가 보고 싶었어.”
“고마워. 예쁘다. 나 바지는 지금 갈아입을래.”
편한 잠옷을 입고 그와 한 이불 속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런 사이 시간은 흘러 10시 가량이 되었다.
“홍주야, 배 안 고파?”
“음. 좀 시장한 것 같기도 해. 먹을 게 있나?”
“기다려봐.”
나간 그는 잠시 후 함지박을 들고 왔다. 그 속엔 밥과 나물 그리고 고추장이 얹어 있었다. 참기름 냄새도 너무 고소했다.
“찬밥이야?”
“응. 찬 밥.”
“예술인데! 이걸 얻어온 거야?”
“주인 아줌마한테 아까 부탁해놓고 왔지. 꼭 찬밥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괜찮아?”
“당연히 비빔밥은 찬 밥이어야지. 특히 이렇게 밤에 먹을 때는. 너무 좋아!”
김치 썬 것, 콩나물, 가지나물, 무채. 간단한 재료들이었지만 밤에 먹는 비빔밥 맛은 일품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의 행복감이 날 감쌌다.
“왜 쳐다봐?”
“오빠, 입에 밥 풀 묻었어.”
“네가 입으로 떼 줘, 라고 하면 화내겠지?”
“응.”
“내가 알아서 뗄 게. 밥 먹다 한 대 맞긴 싫은 걸.”
“먹을 땐 안 때릴 게 걱정 말아.”
그와 커플 잠옷을 입고 밤에 야식을 먹고 있다니. 이 남자랑 결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이 점점 커져갔다.
‘예쁜 사랑 하고 있는 거지, 우리? 지내면 지낼수록 오빠랑 살고 싶어져. 행복하게, 아니, 늘 이렇게만 살았음 좋겠어.’
마음속 말에 대답이 없는 그는 함지박을 빡빡 긁고 있었다.
“홍주, 아 해! 마지막이야, 이게.”
밥을 받아먹으며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의 눈. 맑았으며 너무 예뻤다.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아침을 먹고는 장을 보러 갔다.
“무슨 술 만들 거야?”
“응. 석탄주.”
“오호. 난 그거 만든 적 없는데.”
“오늘은 밑술 만들고 다음 주 일요일에 와서 덧술하자.”
“좋아.”
석탄주(惜呑酒)는 아낄 석, 삼킬 탄 자를 쓴다. 한마디로 삼키기를 아낀다는 뜻이다. '그 향기와 달기가 기특하여 입에 머금으면 삼키기가 아깝다'는 연유로 지어진 이름이다. 밑술을 만든 다음 7일에서 8일 후에 덧술을 하는데 오늘은 밑술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간단하게 끝날 것 같았다.
“다음 주에도 같이 올 거지?”
“그럼 당연하지! 뗴 놓고 올려고 했어?”
나도 조금씩 넉살이 늘어나는 듯 했다. 물을 끓이면서 찹쌀가루를 곱게 풀었다. 그리고 불 조절을 하면서 죽을 쑤었다. 죽 만들기는 30분 만에 끝났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응.”
그 다음 작업은 넓은 곳에 죽을 옮겨 식히는 것이었다. 옮기고 난 후 식히는 동안 그는 등 뒤에서 날 안고 노래를 불러 주었다. 집주인은 외출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넓은 마당에 둘이 앉아 있자니 마치 우리 둘만 사는 집 같았다.
“나중에 이런 곳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아. 홍주랑 단 둘이. 다른 놈한테 눈길도 못 주게.”
“답답하지 않을까?”
“답답할 게 있나? 우리 둘이 함께 있는데?”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술을 빚으며 겨울에는 고구마를 구워먹고 밤에는 비빔밥을 먹고. 마음의 독기는 완전히 빠질 것 같은 생활이었다. 식힌 죽을 발효통에 옮기고 물을 부은 후 누룩과 효모를 넣었다. 이제 7일을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맛있겠지?”
“응.”
“술이 익으면 오빠 집에서 한 잔 마시는 거지?”
“그럼. 어울릴만한 안주는 함께 준비하자.”
“좋았어.”
맛있는 술이 되길 바라며 아쉬웠지만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운전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가 한사코 말렸다.
‘나 너무 행복하다. 그래서 조금은 불안한 거 있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나 오빠 믿지 못한 벌 받게 되는 거 아닐까?’
** 반칙사랑 - 17. 함께 빚는 술
** 반칙 사랑 - 17. 함께 빚는 술
저녁은 휴게실에서 먹기로 하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높은 건물들은 하나 둘 사라져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고 녹색 나무들이 내뿜는 싱그러운 산소가 폐로 스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깊게 숨을 한 번 내쉬고 창문을 반쯤 닫고는 오빠를 바라보았다.
“오빠! 홍천이라면 옥선주가 유명하잖아. 옥선주 만들려 가는 거야?”
“아니. 주재료인 옥수수를 구하는 것도 지금은 어렵지. 너 옥선주 유래에 대해서도 아니?”
“응. 잠깐만. 가물가물하네. 뭐였더라? ······. 아! 옛날에 괴질에 걸린 노모를 모시는 선비가 있었어. 그 선비는 부모님들을 위해 자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고 허벅지를 잘라 고기를 드렸다. 여기까지는 맞지?”
“잘 아네.”
“아! 그 다음이 잘 기억 안 난단 말이야. 헷갈려. 그 선비 부인 이름이 옥선인데.”
“그 선비 이름은 이용필이야. 그 선비의 효심은 임금님 귀까지 들어갔지. 그래서 임금님은 효자장과 벼슬을 내리고. 그 선비는 감사한 마음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술을 진상했지.”
“아, 맞다, 맞다. 그 술 이름은 부인의 이름을 따서 옥선주. 대단하네! 별 걸 다 기억해!”
“너야말로 대단하다. 난 얼마 전에 찾아서 본 거지만 넌 도대체 언제 안 거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야기 해주시곤 했으니까. 그래서 자세한 사람 이름까지는 몰랐다. 그럼 옥선주는 다음에 만들러 갈 거야?”
“아니. 그건 효자들만 만들어야 하는 술 같아. 나한테 어울리지 않지.”
얼굴의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차 속력이 갑자기 빨라졌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부모님이랑 사이가 안 좋은가? 그래서 혼자 나와 사는 거고? 그러고 보니 오빠에 대해서 난 참 아는 게 없다. 지금 물어볼 수도 없고.’
산들은 서서히 움직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가까워지는 것 같다가도 멀어지고 또 다른 산이 가까워지다가 멀어지고. 꼭 오빠의 모습 같았다. 난 기어에 손을 얹은 오빠의 손에 내 손을 살포시 올렸다. 굵은 남자의 뼈마디가 만져졌다. 하지만 오늘따라 약해 보이는 그. 그에게 위로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럭저럭 반은 왔나봐. 배고프다. 우리 이번 휴게소 들어갈까?”
조금은 하이톤으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홍주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나?”
“힘이 없어? 그럼 곤란한대.”
“뭐야? 힘없으면 버릴 것 같은 말투인데!”
‘안 버려. 이젠 오빠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굳은 다짐을 하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보통의 가정집이었다. 방 하나를 얻어서 가끔씩 내려와 술을 빚고 있다고 했다.
“좀 누추해. 아마 내 자취방보다도 못할 걸.”
“괜찮아. 호텔 가는 것보단 그게 좋으니까.”
생각보다도 훨씬 작은 방이었다. 그러나 홍천 시내를 벗어난 외진 곳에 있는 집은 마당만은 넓었다.
“홍주야, 술은 내일 빚자. 오늘은 좀 쉬고.”
“응. 좋아.”
“너한테 줄 거 있는데.”
그가 내민 것은 선물 세트 크기의 상자였다.
“뭐야, 이게? 어머나! 이거 종합 선물 세트잖아.”
“우연히 들린 슈퍼에서 샀어.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 아버지가 저녁에 가끔 사오시곤 했는데.”
“정말 오랜만에 본다. 예전이랑은 많이 다르겠지?”
그것은 여러 종류의 과자가 들어있는 그야말로 종합 선물 세트였다. 옛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날 생각하며 샀다는 그의 마음이 더 감동스러웠다.
“오늘 이거 다 먹을래. 오빠랑 같이 먹어야지.”
“홍주가 먹여줘.”
“먹여줘? 아니!”
아니, 손이 없어? 먹여 달라긴. 순간 말이 튀어나올 뻔 했는데 가까스로 참았다. 그의 깜짝 애교에 아직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였다. 작은 방에 그의 무릎을 베고 과자를 전부 뜯어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 넣어줄 때 잘못하면 과자 가루가 눈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너무나 편안했고 너무나 즐거웠다. 잠시 후 방에는 온통 과자가루투성이였다.
“오빠, 이번엔 초콜릿 줄게. 아, 해봐!”
“싫어. 입으로 줘!”
그가 내 옆으로 누웠다. 오빠는 우산모양의 초콜릿을 입에 물고 내게 다가왔다.
“싫어.”
“으응으응응.”
말을 할 수 없는 그가 우물거렸고 그 모양이 너무나 우스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귀엽다, 이 남자.’
그의 두 손이 내 얼굴을 잡았다. 정말 먹일 모양인데? 사뭇 진지해진 나는 천천히 초콜릿을 입 속에 넣었다. 강렬한 단맛이 입에 퍼졌다. 쓰다고 해야 하나, 달다고 해야 하나. 한가지로 표현하긴 어려운 맛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형언할 수 없는 맛이 나는 그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몸매처럼 미끈한 혀였다. 입 안에서 초콜릿이 녹 듯 나도 그 때문에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우린 과자가루 위에 함께 누워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차에 잠옷과 화장품을 가지러간 사이 난 어떤 잠옷일까 상상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너무 야한 건 아니겠지, 설마? 공주풍 옷이었음 좋겠다.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 같은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실크 잠옷.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럼 혹시 야한 끈 팬티에 슬립?’
나 자신을 벗겼다 입혔다 방정맞은 상상을 하는 사이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한참 긴장을 하고 있던 나는 잠옷을 보고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윗옷과 아래 바지가 세트인 아주 평범한 잠옷이었다. 그는 하늘색, 나는 분홍색.
“마음에 들어?”
“좀 노인스럽다. 이런 건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 되서야 입을 줄 알았는데.”
“야한 걸 살까도 했지만 네가 또 버럭 화를 낼까봐 무서웠어.”
“뭐야? 누가 화를 내!”
“안 사길 잘했다. 벌써 화내는 것 좀 봐.”
“너무 야한 건 민망하니까 화 낼 수 있는 거 아냐?”
“사실 그런 건 사고 싶지 않더라. 아주 편한 잠옷을 입고 편히 잠든 네가 보고 싶었어.”
“고마워. 예쁘다. 나 바지는 지금 갈아입을래.”
편한 잠옷을 입고 그와 한 이불 속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런 사이 시간은 흘러 10시 가량이 되었다.
“홍주야, 배 안 고파?”
“음. 좀 시장한 것 같기도 해. 먹을 게 있나?”
“기다려봐.”
나간 그는 잠시 후 함지박을 들고 왔다. 그 속엔 밥과 나물 그리고 고추장이 얹어 있었다. 참기름 냄새도 너무 고소했다.
“찬밥이야?”
“응. 찬 밥.”
“예술인데! 이걸 얻어온 거야?”
“주인 아줌마한테 아까 부탁해놓고 왔지. 꼭 찬밥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괜찮아?”
“당연히 비빔밥은 찬 밥이어야지. 특히 이렇게 밤에 먹을 때는. 너무 좋아!”
김치 썬 것, 콩나물, 가지나물, 무채. 간단한 재료들이었지만 밤에 먹는 비빔밥 맛은 일품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의 행복감이 날 감쌌다.
“왜 쳐다봐?”
“오빠, 입에 밥 풀 묻었어.”
“네가 입으로 떼 줘, 라고 하면 화내겠지?”
“응.”
“내가 알아서 뗄 게. 밥 먹다 한 대 맞긴 싫은 걸.”
“먹을 땐 안 때릴 게 걱정 말아.”
그와 커플 잠옷을 입고 밤에 야식을 먹고 있다니. 이 남자랑 결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이 점점 커져갔다.
‘예쁜 사랑 하고 있는 거지, 우리? 지내면 지낼수록 오빠랑 살고 싶어져. 행복하게, 아니, 늘 이렇게만 살았음 좋겠어.’
마음속 말에 대답이 없는 그는 함지박을 빡빡 긁고 있었다.
“홍주, 아 해! 마지막이야, 이게.”
밥을 받아먹으며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의 눈. 맑았으며 너무 예뻤다.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아침을 먹고는 장을 보러 갔다.
“무슨 술 만들 거야?”
“응. 석탄주.”
“오호. 난 그거 만든 적 없는데.”
“오늘은 밑술 만들고 다음 주 일요일에 와서 덧술하자.”
“좋아.”
석탄주(惜呑酒)는 아낄 석, 삼킬 탄 자를 쓴다. 한마디로 삼키기를 아낀다는 뜻이다. '그 향기와 달기가 기특하여 입에 머금으면 삼키기가 아깝다'는 연유로 지어진 이름이다. 밑술을 만든 다음 7일에서 8일 후에 덧술을 하는데 오늘은 밑술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간단하게 끝날 것 같았다.
“다음 주에도 같이 올 거지?”
“그럼 당연하지! 뗴 놓고 올려고 했어?”
나도 조금씩 넉살이 늘어나는 듯 했다. 물을 끓이면서 찹쌀가루를 곱게 풀었다. 그리고 불 조절을 하면서 죽을 쑤었다. 죽 만들기는 30분 만에 끝났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응.”
그 다음 작업은 넓은 곳에 죽을 옮겨 식히는 것이었다. 옮기고 난 후 식히는 동안 그는 등 뒤에서 날 안고 노래를 불러 주었다. 집주인은 외출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넓은 마당에 둘이 앉아 있자니 마치 우리 둘만 사는 집 같았다.
“나중에 이런 곳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아. 홍주랑 단 둘이. 다른 놈한테 눈길도 못 주게.”
“답답하지 않을까?”
“답답할 게 있나? 우리 둘이 함께 있는데?”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술을 빚으며 겨울에는 고구마를 구워먹고 밤에는 비빔밥을 먹고. 마음의 독기는 완전히 빠질 것 같은 생활이었다. 식힌 죽을 발효통에 옮기고 물을 부은 후 누룩과 효모를 넣었다. 이제 7일을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맛있겠지?”
“응.”
“술이 익으면 오빠 집에서 한 잔 마시는 거지?”
“그럼. 어울릴만한 안주는 함께 준비하자.”
“좋았어.”
맛있는 술이 되길 바라며 아쉬웠지만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운전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가 한사코 말렸다.
‘나 너무 행복하다. 그래서 조금은 불안한 거 있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나 오빠 믿지 못한 벌 받게 되는 거 아닐까?’
완벽한 행복은 걱정을 부르고 있었다. 그 걱정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밤을 새우고 쓰기는 했는데 잘 썼는지도 모르겠어요.
검토할 시간도 없어서...
내일부터는 연재 열심히 할게요.
생일 축하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