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지는 한 숨을 푸욱 내쉬더니 핸드폰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 들어보지 못한 팝송이었는데 구슬프게 들렸다. 난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음료수를 마셨다. 6월 치고도 꽤 더운 날이었다.
평소 인간성 좋은 정연이의 신부대기실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정연이는 정말 예뻐 보였다. 웨딩드레스 입으면 나도 예쁠까? 부러움에 잠시 입까지 벌리고 정연이를 바라보았다.
“축하해, 정연아! 너무 곱다, 얘.”
“고마워, 홍주야. 준지야, 고마워!”
사진을 몇 장 찍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대기실을 나와야 했다.
“홍주야, 정연이가 결혼하는데 왜 네 입이 찢어지려고 하니?”
“내가 그랬니?”
“침 흘릴까봐 걱정되더라, 얘.”
“흘릴 만 했어. 너무 부럽더라고.”
“저 드레스 얼마일까? 디자이너한테 맞춘 거라고 했지?”
“응. 너무 예쁘더라.”
“단점은 확실히 보완해주더라, 야. 목 짧은 거 하며 가슴 없는 것까지. 그래서 디자이너꺼 입나봐.”
“······.”
“야! 정신 좀 차려.”
“응? 나도 결혼하고 싶어졌어. 정연이 보니까.”
“누구랑?”
“누구는. 당연히 찬영씨지.”
“그 사람이랑 결혼하게?”
“우린 정말 예쁜 신랑, 신부일거야.”
“디자이너 드레스 입혀줄 만한 사람이야? 아무 것도 모른다면서. 부모님이 뭐하는지도 모르고. 그럴 바에는 저번에 소개시켜준 오빠가 낫겠다.”
“무슨 그런 소릴!”
“싫지 않다면서?”
“싫어! 그 땐 찬영씨 때문에 헷가닥한 거라고.”
“지금도 헷가닥하는 것처럼 보여. 어쩌려고 그러니. 집안도 안 보고 결혼이라니. 너무 용감한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찬영씨 부모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부모님들이 날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결혼식은 별 다를 게 없었지만 친구들 중 처음 하는 결혼이라서 기분이 좀 싱숭생숭했다. 결혼은 어른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친구가 결혼을 한다니. 드레스를 입은 정연이를 보면서도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결혼식 사회는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낯이 익은 개그맨이 맡았고 주례 선생님은 나름대로 저명한 시인이었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결혼식이었다. 결혼식 내내 나와 준지는 개그맨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준지야, 너도 사회자 보는 거야? 잘 생겼다, 그지? 텔레비전 볼 때랑은 틀리네.”
“그러게. 코가 우뚝한 게 잘났다. 근데 참 웃기진 않더라.”
“하하하. 맞아. 개그를 하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하하하. 저 개그맨보다는 연미가 더 웃기지.”
“그러게 말야. 홍주야, 너 피로연 갈 거지?”
“난 못 갈 것 같은데. 오빠랑 약속 있거든.”
“말도 안돼. 의사 친구들 올 거 아냐. 그런 자리를 마다하다니. 오늘 결혼식에 여자 친구들이 많이 온 거 봐라. 다 그런 이유라고. 넌 나보다 조건도 좋잖아. 오늘 잘 해봐.”
“싫어, 얘. 애인도 있는데.”
“에이, 어쩌나. 너 안가면 나도 안 갈래. 대신 밥 먹고 커피나 한 잔 마시자. 그건 괜찮지?”
준지는 카푸치노을 시키고 난 화이트모카를 시켰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앉은 우리는 신랑 외모며 정연이가 부모님 중 누굴 닮았다느니, 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어왕자 이야기가 나온 것은 준지의 커피가 거의 다 비워질 때쯤이었다.
“현성 오빠를 처음 본 건 홍대 클럽에서였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나도 알지. 네가 말 해줬잖아. 노래를 잘하는 킹카가 나타났다고 난리를 쳤었잖아.”
“그 땐 노래 잘 하는 게 좋았지. 이런 일이 생길 줄도 모르고 말이야.”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속상한 표정을 짓던 준지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만지작거리더니 종업원에게 시원한 물을 가져달라고 했다.
“글쎄, 그 인간이 직장도 때려 치고 음악을 하겠다지, 뭐니!”
“가만, 직장을 관둬? 그 회사는 입사도 어렵다는 회사잖아. 연봉도 꽤 세고. 들어가고 싶어 했었나면서.”
“그러니까. 나도 나지만 집에서도 난리가 났나봐. 지금은 집도 나온 상태야.”
“네가 말리지 그랬어? 그 전에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말렸지. 왜 안 말렸겠니. 울면서 매달리기까지 했다니까. 꼭 이래야 하냐고. 그냥 일, 이년 있다가 남들처럼 결혼하면 안 되는 거냐구 막 대들고 소리 지르고 그랬어.”
“말을 안 들어줘?”
“집도 나왔다니까. 부모님 말도 안 듣는데 내 말을 듣겠어? 누구말도 들을 기세가 아니야. 지금 어디서 자는지 알아? 선배가 하는 식당에서 자. 낮에는 작곡을 한대. 그리고 밤에는 그 식당에 있는 쪽방에서 자고. 맨날 싸우니까 이젠 전화도 안 받더라. 그제는 밤에 식당으로 찾아갔어. 말해도 아무 대꾸도 안해. 그래서 다 엎어버렸다. 방에 있던 물건 다 집어 던지고 생난리를 쳤어. 그래도 소용이 없더라. 마음을 확실히 굳혔나봐.”
너무나 충격이었다. 회사에 입사한지 벌써 6개월이 넘어가고 있었고 가끔 본 현성씨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를 보면 전형적인 공대생, 전형적인 회사원처럼만 보였다. 준지의 옆에서 그녀를 잘 지켜줄 것 같았는데. 나도 충격이었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준지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땐 위로의 말을 해야 하나, 아님 용기를 주는 말을 해야 하는 건가?
“결심이 바뀔 것 같지 않다는 거지? 어떻게 할 거야?”
“헤어져야 지, 어떻게 하니.”
헤어진다. 현성씨는 준지가 줄자로 재고 또 잰 남자들 가운데 선택된 사람이었다. 집안도 좋았고 학벌도 괜찮았다. 준지는 안도하고 있었고, 빨리 결혼을 해서 안정된 삶을 살길 바랐다. 물론 더 좋은 조건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준지가 선택한 것은 조건 플러스 사랑. 현성오빠를 사랑했고 그 또한 준지를 사랑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헤어진다니. 갑자기 준지의 사랑이 식어버린 이유는 아닐 것이다. 남자의 조건이 바꿔버린 거다.
“너도 알지? 우리 집 망한 거. 아빠가 국회의원 한다고 다 날려먹어서 이제 남은 건 꼴랑 작은 집 하나야. 나 이런 환경에 아직 적응 못했어. 남들은 그러겠지. 아무 것도 없으면서 허세 부린다고. 욕할 사람은 욕하라 그래. 그래두 난 포기 못해. 돈 없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절실히 알게 됐어. 그래서 더 무서워. 현성씨 저러는 것도 진짜 어려운 게 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난 어쩌면 좋니. 하루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그게 그렇게 잘 못된 거야?”
준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울먹거리면서 한 두서없는 말은 그녀의 심정 그대로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나 역시 알지 못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남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격려를 보내는 것은 상상에서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아니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별 뜻 없이 보내는 격려일 때 가능한 거다. 그 때문에 내 친구가 울고 있으면 난 박수를 보낼 수가 없다. 정신 차리지 못한, 떼를 쓰고 있는 아이처럼만 보였다.
“너무하다. 너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꼭 그래야겠대? 자기 하고 싶은 거만 하면 다야? 그럼 네가 바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혼자만 좋자고 그런 행동을 하니? 너무 무책임하다.”
“자긴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하지. 나한테는 기다려 달래. 근데 우리 나이 되면 안 되는가 싶어서 다른 일 찾는데 뒤늦게 이러니까 정말 미칠 것 같애. 내가 너한테도 말한 적 있지? 인어공주 이야기. 내가 왕자라고 해도 인어공주는 싫을 것 같다고 했잖아. 다리를 얻으려고 목소리를 버린 여자. 세상엔 목소리도 있고 다리도 있는 여자가 더 많아. 그런데 굳이 인어공주를 선택할 필요가 없지.”
그제서야 아까 준지가 말한 인어왕자이야기가 이해되었다. 현성씨는 지금 목소리를 버리려 한 것이다. 그것도 다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이. 준지에게는 현성씨의 음악이 다리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절대 안 되겠어? 현성씨 정말 포기 할 거니?”
“난 인어공주가 왕자와 결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고 생각해.”
“······?”
“만약에 자신이 바다의 왕의 딸, 공주 신분이라는 걸 밝혔다고 하자. 바다의 왕과 육지의 왕이 협상을 벌이게 하는 거야. 한마디로 정략결혼. 그랬다면 인어공주는 비늘을 가지고서도 왕자와 결혼을 할 수 있었을 거라 믿어. 왕의 딸도 아닌, 목소리도 없는 공주가 싫었을 거야. 왕자는. 난 그렇게 생각해.”
준지다운 발상이었다. 육지의 왕자와 바다의 공주의 정략결혼이라니. 듣고 있자니 그럴 듯 했다. 준지가 남은 카푸치노를 다 마시고 소파에 기대에 쿠션을 안고 있는 동안 난 현성씨가 알몸으로 해변가를 거니는 상상을 했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없어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슬픈 노래였다.
“미안해, 준지야. 너 힘든데 이렇게 가도 되나 모르겠다.”
“미안하면 나대신 데이트 재미있게 해. 난 연미 끝나는 대로 얼굴 봐야겠다.”
“미안해, 정말.”
쓸쓸한 표정의 준지를 두고 찬영씨를 만나러 가는 발길은 무겁기만 했다. 그를 만났을 때 내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그는 염려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진짜 괜찮아?”
“응. 괜찮아. 그냥 좀 우울한 일이 있어서 그랬어.”
“결혼식장에서?”
“아니. 오빠! 우린 언제쯤 결혼할까?”
“글쎄.”
“오빠 부모님들이 날 마음에 들어 할지 걱정돼. 잘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음. 나 부모님들 안 계셔.”
“응? 집에서 나와 자취하는 거라며?”
“부모님들 일찍 돌아가시고 큰아버지 댁에서 컸어.”
“어머, 미안해.”
“아니야.”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미안한 마음이 조금 수그러들자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게 섭섭했다.
‘난 오빠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점점 알아갈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지는 남자였다. 언제쯤 그에 대해서 완전히 알 게 될까?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반칙사랑 - 19. 인어왕자
** 반칙사랑 - 19. 인어왕자
“그런 게 있다.”
준지는 한 숨을 푸욱 내쉬더니 핸드폰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 들어보지 못한 팝송이었는데 구슬프게 들렸다. 난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음료수를 마셨다. 6월 치고도 꽤 더운 날이었다.
평소 인간성 좋은 정연이의 신부대기실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정연이는 정말 예뻐 보였다. 웨딩드레스 입으면 나도 예쁠까? 부러움에 잠시 입까지 벌리고 정연이를 바라보았다.
“축하해, 정연아! 너무 곱다, 얘.”
“고마워, 홍주야. 준지야, 고마워!”
사진을 몇 장 찍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대기실을 나와야 했다.
“홍주야, 정연이가 결혼하는데 왜 네 입이 찢어지려고 하니?”
“내가 그랬니?”
“침 흘릴까봐 걱정되더라, 얘.”
“흘릴 만 했어. 너무 부럽더라고.”
“저 드레스 얼마일까? 디자이너한테 맞춘 거라고 했지?”
“응. 너무 예쁘더라.”
“단점은 확실히 보완해주더라, 야. 목 짧은 거 하며 가슴 없는 것까지. 그래서 디자이너꺼 입나봐.”
“······.”
“야! 정신 좀 차려.”
“응? 나도 결혼하고 싶어졌어. 정연이 보니까.”
“누구랑?”
“누구는. 당연히 찬영씨지.”
“그 사람이랑 결혼하게?”
“우린 정말 예쁜 신랑, 신부일거야.”
“디자이너 드레스 입혀줄 만한 사람이야? 아무 것도 모른다면서. 부모님이 뭐하는지도 모르고. 그럴 바에는 저번에 소개시켜준 오빠가 낫겠다.”
“무슨 그런 소릴!”
“싫지 않다면서?”
“싫어! 그 땐 찬영씨 때문에 헷가닥한 거라고.”
“지금도 헷가닥하는 것처럼 보여. 어쩌려고 그러니. 집안도 안 보고 결혼이라니. 너무 용감한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찬영씨 부모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부모님들이 날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결혼식은 별 다를 게 없었지만 친구들 중 처음 하는 결혼이라서 기분이 좀 싱숭생숭했다. 결혼은 어른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친구가 결혼을 한다니. 드레스를 입은 정연이를 보면서도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결혼식 사회는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낯이 익은 개그맨이 맡았고 주례 선생님은 나름대로 저명한 시인이었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결혼식이었다. 결혼식 내내 나와 준지는 개그맨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준지야, 너도 사회자 보는 거야? 잘 생겼다, 그지? 텔레비전 볼 때랑은 틀리네.”
“그러게. 코가 우뚝한 게 잘났다. 근데 참 웃기진 않더라.”
“하하하. 맞아. 개그를 하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하하하. 저 개그맨보다는 연미가 더 웃기지.”
“그러게 말야. 홍주야, 너 피로연 갈 거지?”
“난 못 갈 것 같은데. 오빠랑 약속 있거든.”
“말도 안돼. 의사 친구들 올 거 아냐. 그런 자리를 마다하다니. 오늘 결혼식에 여자 친구들이 많이 온 거 봐라. 다 그런 이유라고. 넌 나보다 조건도 좋잖아. 오늘 잘 해봐.”
“싫어, 얘. 애인도 있는데.”
“에이, 어쩌나. 너 안가면 나도 안 갈래. 대신 밥 먹고 커피나 한 잔 마시자. 그건 괜찮지?”
준지는 카푸치노을 시키고 난 화이트모카를 시켰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앉은 우리는 신랑 외모며 정연이가 부모님 중 누굴 닮았다느니, 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어왕자 이야기가 나온 것은 준지의 커피가 거의 다 비워질 때쯤이었다.
“현성 오빠를 처음 본 건 홍대 클럽에서였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나도 알지. 네가 말 해줬잖아. 노래를 잘하는 킹카가 나타났다고 난리를 쳤었잖아.”
“그 땐 노래 잘 하는 게 좋았지. 이런 일이 생길 줄도 모르고 말이야.”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속상한 표정을 짓던 준지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만지작거리더니 종업원에게 시원한 물을 가져달라고 했다.
“글쎄, 그 인간이 직장도 때려 치고 음악을 하겠다지, 뭐니!”
“가만, 직장을 관둬? 그 회사는 입사도 어렵다는 회사잖아. 연봉도 꽤 세고. 들어가고 싶어 했었나면서.”
“그러니까. 나도 나지만 집에서도 난리가 났나봐. 지금은 집도 나온 상태야.”
“네가 말리지 그랬어? 그 전에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말렸지. 왜 안 말렸겠니. 울면서 매달리기까지 했다니까. 꼭 이래야 하냐고. 그냥 일, 이년 있다가 남들처럼 결혼하면 안 되는 거냐구 막 대들고 소리 지르고 그랬어.”
“말을 안 들어줘?”
“집도 나왔다니까. 부모님 말도 안 듣는데 내 말을 듣겠어? 누구말도 들을 기세가 아니야. 지금 어디서 자는지 알아? 선배가 하는 식당에서 자. 낮에는 작곡을 한대. 그리고 밤에는 그 식당에 있는 쪽방에서 자고. 맨날 싸우니까 이젠 전화도 안 받더라. 그제는 밤에 식당으로 찾아갔어. 말해도 아무 대꾸도 안해. 그래서 다 엎어버렸다. 방에 있던 물건 다 집어 던지고 생난리를 쳤어. 그래도 소용이 없더라. 마음을 확실히 굳혔나봐.”
너무나 충격이었다. 회사에 입사한지 벌써 6개월이 넘어가고 있었고 가끔 본 현성씨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를 보면 전형적인 공대생, 전형적인 회사원처럼만 보였다. 준지의 옆에서 그녀를 잘 지켜줄 것 같았는데. 나도 충격이었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준지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땐 위로의 말을 해야 하나, 아님 용기를 주는 말을 해야 하는 건가?
“결심이 바뀔 것 같지 않다는 거지? 어떻게 할 거야?”
“헤어져야 지, 어떻게 하니.”
헤어진다. 현성씨는 준지가 줄자로 재고 또 잰 남자들 가운데 선택된 사람이었다. 집안도 좋았고 학벌도 괜찮았다. 준지는 안도하고 있었고, 빨리 결혼을 해서 안정된 삶을 살길 바랐다. 물론 더 좋은 조건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준지가 선택한 것은 조건 플러스 사랑. 현성오빠를 사랑했고 그 또한 준지를 사랑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헤어진다니. 갑자기 준지의 사랑이 식어버린 이유는 아닐 것이다. 남자의 조건이 바꿔버린 거다.
“너도 알지? 우리 집 망한 거. 아빠가 국회의원 한다고 다 날려먹어서 이제 남은 건 꼴랑 작은 집 하나야. 나 이런 환경에 아직 적응 못했어. 남들은 그러겠지. 아무 것도 없으면서 허세 부린다고. 욕할 사람은 욕하라 그래. 그래두 난 포기 못해. 돈 없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절실히 알게 됐어. 그래서 더 무서워. 현성씨 저러는 것도 진짜 어려운 게 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난 어쩌면 좋니. 하루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그게 그렇게 잘 못된 거야?”
준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울먹거리면서 한 두서없는 말은 그녀의 심정 그대로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나 역시 알지 못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남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격려를 보내는 것은 상상에서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아니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별 뜻 없이 보내는 격려일 때 가능한 거다. 그 때문에 내 친구가 울고 있으면 난 박수를 보낼 수가 없다. 정신 차리지 못한, 떼를 쓰고 있는 아이처럼만 보였다.
“너무하다. 너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꼭 그래야겠대? 자기 하고 싶은 거만 하면 다야? 그럼 네가 바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혼자만 좋자고 그런 행동을 하니? 너무 무책임하다.”
“자긴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하지. 나한테는 기다려 달래. 근데 우리 나이 되면 안 되는가 싶어서 다른 일 찾는데 뒤늦게 이러니까 정말 미칠 것 같애. 내가 너한테도 말한 적 있지? 인어공주 이야기. 내가 왕자라고 해도 인어공주는 싫을 것 같다고 했잖아. 다리를 얻으려고 목소리를 버린 여자. 세상엔 목소리도 있고 다리도 있는 여자가 더 많아. 그런데 굳이 인어공주를 선택할 필요가 없지.”
그제서야 아까 준지가 말한 인어왕자이야기가 이해되었다. 현성씨는 지금 목소리를 버리려 한 것이다. 그것도 다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이. 준지에게는 현성씨의 음악이 다리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절대 안 되겠어? 현성씨 정말 포기 할 거니?”
“난 인어공주가 왕자와 결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고 생각해.”
“······?”
“만약에 자신이 바다의 왕의 딸, 공주 신분이라는 걸 밝혔다고 하자. 바다의 왕과 육지의 왕이 협상을 벌이게 하는 거야. 한마디로 정략결혼. 그랬다면 인어공주는 비늘을 가지고서도 왕자와 결혼을 할 수 있었을 거라 믿어. 왕의 딸도 아닌, 목소리도 없는 공주가 싫었을 거야. 왕자는. 난 그렇게 생각해.”
준지다운 발상이었다. 육지의 왕자와 바다의 공주의 정략결혼이라니. 듣고 있자니 그럴 듯 했다. 준지가 남은 카푸치노를 다 마시고 소파에 기대에 쿠션을 안고 있는 동안 난 현성씨가 알몸으로 해변가를 거니는 상상을 했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없어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슬픈 노래였다.
“미안해, 준지야. 너 힘든데 이렇게 가도 되나 모르겠다.”
“미안하면 나대신 데이트 재미있게 해. 난 연미 끝나는 대로 얼굴 봐야겠다.”
“미안해, 정말.”
쓸쓸한 표정의 준지를 두고 찬영씨를 만나러 가는 발길은 무겁기만 했다. 그를 만났을 때 내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그는 염려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진짜 괜찮아?”
“응. 괜찮아. 그냥 좀 우울한 일이 있어서 그랬어.”
“결혼식장에서?”
“아니. 오빠! 우린 언제쯤 결혼할까?”
“글쎄.”
“오빠 부모님들이 날 마음에 들어 할지 걱정돼. 잘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음. 나 부모님들 안 계셔.”
“응? 집에서 나와 자취하는 거라며?”
“부모님들 일찍 돌아가시고 큰아버지 댁에서 컸어.”
“어머, 미안해.”
“아니야.”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미안한 마음이 조금 수그러들자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게 섭섭했다.
‘난 오빠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점점 알아갈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지는 남자였다. 언제쯤 그에 대해서 완전히 알 게 될까?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