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센은 전화 한통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윌 보빈스는 신디의 먼 삼촌 뻘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일년에 두 세번 정도는 만나는 사람이었다.
-저, 사장님.
레오는 담배를 끄고 고개를 들었다.
-왜?
-강효은씨가 회사를 그만 뒀답니다. 아무래도..
-뭐?
-윈즈버그 양의 농간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레오는 얼굴을 찌뿌렸다.
-그래서?
-가디언 경제부로 옮겼답니다. 내일부터 출근이라는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오는 전화기를 들었다.
-당장 그만두게 해야지. 이코노믹스? 그런 신문사? 흥, 내가 하나 차려주겠어!
-그만두십시오.
요한센이 전화기를 받아 내려 놓았다.
-그건 아가씨가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신데렐라가 되기 싫다 하셨다면서요? 혼자 잘 하실 겁니다. 그리고...
요한센은 레오에게 뭔가를 속삭였고 그 말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피곤했다. 효은이 걱정되기도 했다. 미란다, 효은에게 못된 짓만 해봐라. 내 그냥... 레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을 본 요한센은 속으로 웃으며 방을 나왔다.
가디언에 출근한 효은은 주눅이 잔뜩 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한번씩 훑어보고 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안녕하세요..
미란다였다. 그녀는 특유의 거만한 비웃음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이코노믹스 칼럼리스트 아니야? 여긴 왠일이래?
-오늘부터 여기서 수습 기자로 일하기로 했는데요.
효은은 어깨를 피며 말했다. 내가 기죽을 필요는 없어. 스스로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그래? 그 돈 많은 애인이 그런 힘든 일을 시킨단 말이지? 가서 신문사라도 하나 차려달라 그러지 그래?
-그로스베너씨와 전 그저 친구 사인데요.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다정한 사진 아니었나?
미란다는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아, 참. 그는 장미향을 좋아해. 장미향수를 풀어놓은 욕조에 몸 담그는 걸 좋아하지. 약간 씁쓸한 와인 한잔과 함께. 예전엔 나도 같이 즐겼지만.
미란다는 효은에게 속삭이듯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효은은 눈물이 글썽거릴 만큼 화가 났다. 아니, 질투였다. 화가 나 견딜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엉엉 소리내서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 강효은씨.
편집장 스미스가 부르는 바람에 효은의 눈물은 쏙 들어갔다.
-네, 편집장님.
효은은 그의 책상으로 달려갔다.
-아직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어요. 내일 오웬 첸 기자가 그만두면 그 자리에 앉으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할 것 까지는 없고. 난 개인적으로 강효은씨에게 기대가 커요. 이코노믹스에서 칼럼 쓰는 건 대단한 거거든. 어쨌든 그런 일 하다가 수습으로 시작하는 게 힘들겠지만 참아요. 언젠간 좋은 날이 있겠지.
마음씨 좋게 생긴 스미스는 윙크까지 해 보였다. 덕분에 효은은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스미스가 요한센의 이모부였다.
효은은 스미스가 가리키는 소파에 앉았다. 그는 친절하게도 손수 커피까지 한잔 건넸다.
-사실, 오늘은 할일이 없고 내일 첸기자가 자리를 치우는 거 도와주면 그때부터 일이 시작하는 거고. 알겠지만 수습이 잡일하는 거 아닌가.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스미스는 거기까지 말해놓고 고개를 숙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내 조카 녀석이 부탁했네. 한스가.
-아, 네.
요한센의 이름을 듣자 효은은 마음이 놓였다. 효은이 웃는 것을 보자 스미스가 말했다.
-예쁘긴 하네. 한스가 말했던 것 보다 훨씬 예쁜데.
스미스의 말에 효은이 농담하지 마시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스미스가 정색을 했다.
-농담이 아니야.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그로스베너한테서 뺐어왔을 걸!
효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어쨌든 스미스는 그녀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줄 작정이었다. 낙하산으로 들어온 미란다 보다는 훨씬 능력도 좋은 것 같았고 겸손해 보이기도 했다.
가디언 본사를 나오던 효은은 낯익은 페라리를 보고 미소 지었다. 효은을 발견한 레오가 빵빵 거렸다. 덕분에 사람들 몇이 쳐다보았다.
-왠일이에요? 전화라도 하지.
-그냥. 옮겼으면 옮겼다고 말을 하지. 전화도 안하고. 그래서 그냥 온건데.
레오가 차를 출발시켰고 효은은 창밖으로 문 앞에서 노려보고 있는 미란다를 발견했다.
-아, 참. 나 윈즈버그 양하고 같은 사무실 써요.
-알아. 들었어. 불편하지 않아?
-불편하긴 한데, 어쩔 수 없지.
-그 여자가 뭐라고 하든 별 상관하지 마.
-상관 안해. 왜? 약점 잡힌 거 있어?
-솔직히 말하면, 나 미란다랑 10년이 넘게 만났어.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사이였구. 미안하
게 생각하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니까 너그럽게 생각해 주길 바래.
레오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효은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알아. 당신 장미수 푼 물에 몸 담그는 걸 좋아한다며? 와인 한 잔이랑.
-그 이야기를 하던가?
레오가 쓴 웃음을 지었다. 차는 어느새 헤롯 백화점 앞에서 멈추었다.
-나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어요.
효은이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걸 그 여자가 알고 있다는 게 화나기도 하고.
레오는 핸들에 머리를 대고 효은을 바라봤다.
-질투하는 거야?
-질투? 그런 거 아니야.
효은은 입을 다물었다.
-당신 나 사랑하는 거 아니야?
레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 당신은?
효은이 되묻자 레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적어도 날 사랑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놀리지 마. 그럴꺼면 나 내릴거에요.
효은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이 기회에 그냥 연인 하는 건 어때?
레오의 말에 효은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잖아. 난 신데렐라가 되긴 싫다고.
-그러지 마. 그럼 내가 모든 거 다 포기할까?
-그건 싫어.
-난 있는 그대로 당신이 좋은데 당신은 왜 있는 그대로 당신을 떳떳하게 보이지 못해?
-그건..
효은도 할 말을 잃었다. 왜 이 남자 앞에서는 내가 이렇게 주눅이 드는 걸까. 효은은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왕실 백화점 헤롯이 보였다. 그런데 여긴 왜 왔지? 궁금한 표정을 짓는 순간, 레오가 차에서 내렸고, 효은이 타고 있는 쪽 문이 열렸다.
-왜요?
-내려. 우리 이런 식으로 하다간 둘 다 후회할거야. 나라도 우리 사이 진전시켜야겠어.
-무슨 소리에요?
-내리라니깐!
레오가 효은의 팔을 잡아 끌었다.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챙피해진 효은은 레오의 팔을
뿌리치고 우아한 포즈로 차에서 내렸다.
-지금부턴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여기서 당신이 삐딱하게 나가면 당신도 나도 둘 다 망신이니까.
레오가 은근히 협박하는 말투로 말하자, 효은은 피식 웃었다.
헤롯 백화점은 찰스 왕세자가 운영하는 왕실 백화점이다. 영국 사람들은 작은 물건이라도 헤롯 마크가 찍힌 곳에서 사고 싶어 한다. 그러나 헤롯에 있는 물건들은 웬만한 갑부가 아니면 쳐다보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효은도 베스를 따라 몇 번 구경만 와 봤는데, 세일 때는 물건을 정말 싸게 팔기 때문에 그 때만 되면 온갖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기도 한다. 레오는 효은의 어깨를 안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들이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왜 그러는데요?
효은의 말을 무시하고 레오는 티파니 매장으로 들어갔다.
-왜요?
효은이 불안한 듯 물었다.
-예쁜 커플링 보여주세요.
-네, 그로스베너씨.
매니저로 보이는 단정한 수트를 입은 남자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커플링이요?
-그냥 사 주는 대로 껴. 던지고 싶으면 나중에 차 안에서 던지고.
효은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정말 이 남자가 날 사랑하는 건가? 아직까지 한번도 사랑한단 말도 안했으면서. 효은은 머리가 복잡했다. 매니저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하얀 빌로드 위에 반지 몇 세트를 내려놓았다.
-이 제품은 어떠십니까? hook & eye 스타일이라구요. 참 특별한 디자인이죠? 실버와 18k로 되어 있는데, 주문하시면 백금으로도 해 드립니다. 심플한 거 좋아하시면 그냥 아틀라스 스타일도 괜찮구요.
-그거 이뿌네요.
-한번 착용해보시겠습니까?
남자가 반지를 건넸다. 말 그대로 고리가 반지를 이어주고 있는 디자인 이었는데, 어디서도 보기 힘든 디자인이었다.
-예쁘죠?
효은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할까요? 반지 사이즈는 딱 맞으시는 것 같은데요?
남자가 말했고, 레오도 반지를 껴봤다.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그냥 끼고 가셔도 되시겠는데요. 아니면 백금으로 주문하시겠습니까?
-백금은 비싸잖아.
효은이 속삭였다.
-아니, 지금 끼고 가고 싶네요. 성질이 급해서요. 여기 있습니다.
레오가 건넨 카드를 매니저가 가져갔다. 효은은 반지를 들여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처음이야. 이런 반지 껴 본거.
-앞으로 더 예쁜 반지가 생겨도 빼지 마. 절대로.
말을 마친 레오는 갑자기 효은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나 당신 사랑하는 것 같아.
효은이 다시 미소 지었다.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잠깐 동안 그렇게 미소짓던 효은이 속삭였다.
-고마워요.
-천만에 말씀. 빼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그거면 충분해.
-그래요. 빼지 않을게.
매니저가 레오에게 카드와 계산서를 내 밀었다. 카드와 계산서를 지갑에 넣은 레오는 효은의 손을 잡고 티파니 매장을 나오려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쇼핑백을 몇 개나 들고 있는 미란다였다.
-자기, 여기 왠일이야?
레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레오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효은씨, 먼저 차로 가 있어요. 금방 갈게.
레오는 효은에게 차 키를 건넸다. 효은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차로 돌아갔다. 레오는 미란다와 함께 계단으로 나왔다.
-너 정말 왜 그러니?
레오의 말에 미란다가 쳇,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냥 왠일이냐고 묻는 것도 안돼?
-이코노믹스에게 효은일 짜른 것도 너지?
-내가 짤랐남? 이유가 있으니까 짤렸겠지.
그렇지만 미란다는 속이 뜨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경고하는데, 효은이 괴롭히지마. 그럼 그땐 내가 가만 안있어.
-뭐라고?
-나 마약 스켄들 났을 때 니가 나한테 보내준 편지, 아직도 나한테 있는 거 잊지마.
레오의 말에 미란다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 함께 한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넌 그렇게 못해.
미란다가 소리지르듯 말했다.
-후회해. 너를 빨리 떠나지 못한 게 후회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너만 바라보고 있던 거 후회해!
레오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돌아섰다. 뒤에서 미란다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차로 돌아온 레오는 담배에 불부터 붙였다.
-왝. 담배 연기 싫어.
효은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손을 저었다.
-아, 미안.
레오는 황급히 담배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궁금해?
-그럼요. 궁금하지.. 하지만 이야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별 이야기 안했어. 당신 괴롭히지 말라고 그랬어.
레오의 말에 효은이 피식 웃었다.
-누가 나 괴롭힌데?
-다 알어. 미란다 성격은.. 미안해.
-뭐가?
효은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그냥 미안하다면 그냥 괜찮다고 넘어가주면 안돼?
레오가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차를 출발 시켰다. 효은은 내내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울지마. 당신 우는 거 싫어.
레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오의 말에 효은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울지 말라니깐. 울보.
레오가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차를 멈추었다.
-이리 좀 봐봐.
레오가 효은의 얼굴을 들여다 보려고 하자 효은이 레오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러지 말고, 아가씨.
레오가 손가락으로 효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평생 안 울게 해줄게 이번이 우는 거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레오가 효은을 끌어안았다. 어쩐지, 그 말 그대로 이뤄질 것 같다는 생각에 효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신데렐라★20★공격 개시!!
요한센은 전화 한통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윌 보빈스는 신디의 먼 삼촌 뻘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일년에 두 세번 정도는 만나는 사람이었다.
-저, 사장님.
레오는 담배를 끄고 고개를 들었다.
-왜?
-강효은씨가 회사를 그만 뒀답니다. 아무래도..
-뭐?
-윈즈버그 양의 농간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레오는 얼굴을 찌뿌렸다.
-그래서?
-가디언 경제부로 옮겼답니다. 내일부터 출근이라는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오는 전화기를 들었다.
-당장 그만두게 해야지. 이코노믹스? 그런 신문사? 흥, 내가 하나 차려주겠어!
-그만두십시오.
요한센이 전화기를 받아 내려 놓았다.
-그건 아가씨가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신데렐라가 되기 싫다 하셨다면서요? 혼자 잘 하실 겁니다. 그리고...
요한센은 레오에게 뭔가를 속삭였고 그 말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피곤했다. 효은이 걱정되기도 했다. 미란다, 효은에게 못된 짓만 해봐라. 내 그냥... 레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을 본 요한센은 속으로 웃으며 방을 나왔다.
가디언에 출근한 효은은 주눅이 잔뜩 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한번씩 훑어보고 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안녕하세요..
미란다였다. 그녀는 특유의 거만한 비웃음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이코노믹스 칼럼리스트 아니야? 여긴 왠일이래?
-오늘부터 여기서 수습 기자로 일하기로 했는데요.
효은은 어깨를 피며 말했다. 내가 기죽을 필요는 없어. 스스로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그래? 그 돈 많은 애인이 그런 힘든 일을 시킨단 말이지? 가서 신문사라도 하나 차려달라 그러지 그래?
-그로스베너씨와 전 그저 친구 사인데요.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다정한 사진 아니었나?
미란다는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아, 참. 그는 장미향을 좋아해. 장미향수를 풀어놓은 욕조에 몸 담그는 걸 좋아하지. 약간 씁쓸한 와인 한잔과 함께. 예전엔 나도 같이 즐겼지만.
미란다는 효은에게 속삭이듯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효은은 눈물이 글썽거릴 만큼 화가 났다. 아니, 질투였다. 화가 나 견딜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엉엉 소리내서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 강효은씨.
편집장 스미스가 부르는 바람에 효은의 눈물은 쏙 들어갔다.
-네, 편집장님.
효은은 그의 책상으로 달려갔다.
-아직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어요. 내일 오웬 첸 기자가 그만두면 그 자리에 앉으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할 것 까지는 없고. 난 개인적으로 강효은씨에게 기대가 커요. 이코노믹스에서 칼럼 쓰는 건 대단한 거거든. 어쨌든 그런 일 하다가 수습으로 시작하는 게 힘들겠지만 참아요. 언젠간 좋은 날이 있겠지.
마음씨 좋게 생긴 스미스는 윙크까지 해 보였다. 덕분에 효은은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스미스가 요한센의 이모부였다.
효은은 스미스가 가리키는 소파에 앉았다. 그는 친절하게도 손수 커피까지 한잔 건넸다.
-사실, 오늘은 할일이 없고 내일 첸기자가 자리를 치우는 거 도와주면 그때부터 일이 시작하는 거고. 알겠지만 수습이 잡일하는 거 아닌가.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스미스는 거기까지 말해놓고 고개를 숙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내 조카 녀석이 부탁했네. 한스가.
-아, 네.
요한센의 이름을 듣자 효은은 마음이 놓였다. 효은이 웃는 것을 보자 스미스가 말했다.
-예쁘긴 하네. 한스가 말했던 것 보다 훨씬 예쁜데.
스미스의 말에 효은이 농담하지 마시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스미스가 정색을 했다.
-농담이 아니야.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그로스베너한테서 뺐어왔을 걸!
효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어쨌든 스미스는 그녀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줄 작정이었다. 낙하산으로 들어온 미란다 보다는 훨씬 능력도 좋은 것 같았고 겸손해 보이기도 했다.
가디언 본사를 나오던 효은은 낯익은 페라리를 보고 미소 지었다. 효은을 발견한 레오가 빵빵 거렸다. 덕분에 사람들 몇이 쳐다보았다.
-왠일이에요? 전화라도 하지.
-그냥. 옮겼으면 옮겼다고 말을 하지. 전화도 안하고. 그래서 그냥 온건데.
레오가 차를 출발시켰고 효은은 창밖으로 문 앞에서 노려보고 있는 미란다를 발견했다.
-아, 참. 나 윈즈버그 양하고 같은 사무실 써요.
-알아. 들었어. 불편하지 않아?
-불편하긴 한데, 어쩔 수 없지.
-그 여자가 뭐라고 하든 별 상관하지 마.
-상관 안해. 왜? 약점 잡힌 거 있어?
-솔직히 말하면, 나 미란다랑 10년이 넘게 만났어.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사이였구. 미안하
게 생각하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니까 너그럽게 생각해 주길 바래.
레오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효은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알아. 당신 장미수 푼 물에 몸 담그는 걸 좋아한다며? 와인 한 잔이랑.
-그 이야기를 하던가?
레오가 쓴 웃음을 지었다. 차는 어느새 헤롯 백화점 앞에서 멈추었다.
-나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어요.
효은이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걸 그 여자가 알고 있다는 게 화나기도 하고.
레오는 핸들에 머리를 대고 효은을 바라봤다.
-질투하는 거야?
-질투? 그런 거 아니야.
효은은 입을 다물었다.
-당신 나 사랑하는 거 아니야?
레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 당신은?
효은이 되묻자 레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적어도 날 사랑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놀리지 마. 그럴꺼면 나 내릴거에요.
효은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이 기회에 그냥 연인 하는 건 어때?
레오의 말에 효은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잖아. 난 신데렐라가 되긴 싫다고.
-그러지 마. 그럼 내가 모든 거 다 포기할까?
-그건 싫어.
-난 있는 그대로 당신이 좋은데 당신은 왜 있는 그대로 당신을 떳떳하게 보이지 못해?
-그건..
효은도 할 말을 잃었다. 왜 이 남자 앞에서는 내가 이렇게 주눅이 드는 걸까. 효은은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왕실 백화점 헤롯이 보였다. 그런데 여긴 왜 왔지? 궁금한 표정을 짓는 순간, 레오가 차에서 내렸고, 효은이 타고 있는 쪽 문이 열렸다.
-왜요?
-내려. 우리 이런 식으로 하다간 둘 다 후회할거야. 나라도 우리 사이 진전시켜야겠어.
-무슨 소리에요?
-내리라니깐!
레오가 효은의 팔을 잡아 끌었다.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챙피해진 효은은 레오의 팔을
뿌리치고 우아한 포즈로 차에서 내렸다.
-지금부턴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여기서 당신이 삐딱하게 나가면 당신도 나도 둘 다 망신이니까.
레오가 은근히 협박하는 말투로 말하자, 효은은 피식 웃었다.
헤롯 백화점은 찰스 왕세자가 운영하는 왕실 백화점이다. 영국 사람들은 작은 물건이라도 헤롯 마크가 찍힌 곳에서 사고 싶어 한다. 그러나 헤롯에 있는 물건들은 웬만한 갑부가 아니면 쳐다보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효은도 베스를 따라 몇 번 구경만 와 봤는데, 세일 때는 물건을 정말 싸게 팔기 때문에 그 때만 되면 온갖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기도 한다. 레오는 효은의 어깨를 안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들이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왜 그러는데요?
효은의 말을 무시하고 레오는 티파니 매장으로 들어갔다.
-왜요?
효은이 불안한 듯 물었다.
-예쁜 커플링 보여주세요.
-네, 그로스베너씨.
매니저로 보이는 단정한 수트를 입은 남자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커플링이요?
-그냥 사 주는 대로 껴. 던지고 싶으면 나중에 차 안에서 던지고.
효은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정말 이 남자가 날 사랑하는 건가? 아직까지 한번도 사랑한단 말도 안했으면서. 효은은 머리가 복잡했다. 매니저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하얀 빌로드 위에 반지 몇 세트를 내려놓았다.
-이 제품은 어떠십니까? hook & eye 스타일이라구요. 참 특별한 디자인이죠? 실버와 18k로 되어 있는데, 주문하시면 백금으로도 해 드립니다. 심플한 거 좋아하시면 그냥 아틀라스 스타일도 괜찮구요.
-그거 이뿌네요.
-한번 착용해보시겠습니까?
남자가 반지를 건넸다. 말 그대로 고리가 반지를 이어주고 있는 디자인 이었는데, 어디서도 보기 힘든 디자인이었다.
-예쁘죠?
효은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할까요? 반지 사이즈는 딱 맞으시는 것 같은데요?
남자가 말했고, 레오도 반지를 껴봤다.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그냥 끼고 가셔도 되시겠는데요. 아니면 백금으로 주문하시겠습니까?
-백금은 비싸잖아.
효은이 속삭였다.
-아니, 지금 끼고 가고 싶네요. 성질이 급해서요. 여기 있습니다.
레오가 건넨 카드를 매니저가 가져갔다. 효은은 반지를 들여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처음이야. 이런 반지 껴 본거.
-앞으로 더 예쁜 반지가 생겨도 빼지 마. 절대로.
말을 마친 레오는 갑자기 효은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나 당신 사랑하는 것 같아.
효은이 다시 미소 지었다.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잠깐 동안 그렇게 미소짓던 효은이 속삭였다.
-고마워요.
-천만에 말씀. 빼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그거면 충분해.
-그래요. 빼지 않을게.
매니저가 레오에게 카드와 계산서를 내 밀었다. 카드와 계산서를 지갑에 넣은 레오는 효은의 손을 잡고 티파니 매장을 나오려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쇼핑백을 몇 개나 들고 있는 미란다였다.
-자기, 여기 왠일이야?
레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레오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효은씨, 먼저 차로 가 있어요. 금방 갈게.
레오는 효은에게 차 키를 건넸다. 효은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차로 돌아갔다. 레오는 미란다와 함께 계단으로 나왔다.
-너 정말 왜 그러니?
레오의 말에 미란다가 쳇,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냥 왠일이냐고 묻는 것도 안돼?
-이코노믹스에게 효은일 짜른 것도 너지?
-내가 짤랐남? 이유가 있으니까 짤렸겠지.
그렇지만 미란다는 속이 뜨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경고하는데, 효은이 괴롭히지마. 그럼 그땐 내가 가만 안있어.
-뭐라고?
-나 마약 스켄들 났을 때 니가 나한테 보내준 편지, 아직도 나한테 있는 거 잊지마.
레오의 말에 미란다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 함께 한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넌 그렇게 못해.
미란다가 소리지르듯 말했다.
-후회해. 너를 빨리 떠나지 못한 게 후회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너만 바라보고 있던 거 후회해!
레오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돌아섰다. 뒤에서 미란다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차로 돌아온 레오는 담배에 불부터 붙였다.
-왝. 담배 연기 싫어.
효은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손을 저었다.
-아, 미안.
레오는 황급히 담배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궁금해?
-그럼요. 궁금하지.. 하지만 이야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별 이야기 안했어. 당신 괴롭히지 말라고 그랬어.
레오의 말에 효은이 피식 웃었다.
-누가 나 괴롭힌데?
-다 알어. 미란다 성격은.. 미안해.
-뭐가?
효은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그냥 미안하다면 그냥 괜찮다고 넘어가주면 안돼?
레오가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차를 출발 시켰다. 효은은 내내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울지마. 당신 우는 거 싫어.
레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오의 말에 효은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울지 말라니깐. 울보.
레오가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차를 멈추었다.
-이리 좀 봐봐.
레오가 효은의 얼굴을 들여다 보려고 하자 효은이 레오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러지 말고, 아가씨.
레오가 손가락으로 효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평생 안 울게 해줄게 이번이 우는 거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레오가 효은을 끌어안았다. 어쩐지, 그 말 그대로 이뤄질 것 같다는 생각에 효은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