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가 원하는 게 이런 거였어, 그렇다면 원하는대로 할게. 윤이를 위하는 일이라면. 더러운 손 치워 내가 벗을게"
앞뒤 선후 관계없이 요약하자면 은채가 최윤을 살리려고 무혁에게서 심장을 얻기 위해 던지는 대사의 조합이다.
이럴 때 무혁이의 얼굴을 보았는가. 철저히 버려진 사람의 비애가 가득한 눈을.
버려짐의 총합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입양으로 머나먼 낯선 거리로 떨궈지고 마침내 자신의 연인에게서도 버려졌다. 그 연인의 남편을 살리기 위해 머리에 총까지 맞고 시한부인생을 산다. 그리고 다시 사랑하게 된 은채, 그녀마저 무혁을 버린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이해할 거야. 거래를 했다고. 윤이를 살리기 위해서 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소지섭을 둘러싼 기운을 <경향신문>의 백승찬 기자는 '우울의 코드'라고 했다. <헤럴드프리미엄>의 서병기 기자도 '우울한 눈빛'이라고 지적했다. <문화일보> 이인표 기자는 내러티브가 아닌 소지섭의 말없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어떤 이들은 전사의 이미지에 숨겨진 소년의 미소가 특징이라고 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연기를 거론하기도 한다.
울음과 웃음 사이, 그리고 사이사이 말없음과 말사이의 여운, 그것 때문에 '알랜 폐인'과 같은 현상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물론 소지섭의 육체를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아예 무혁과 은채 커플을 엮어서 소지섭을 높이는 것은 논외의 문제지만 이것이 우습게도 핵심인 것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이들보다 무혁의 죽음을 두고 논쟁이 한참 이루어진 것은 볼만한 일이다. 단지 죽음을 다루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 뜻이 소지섭의 연기와 캐릭터, 드라마 전개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것이 어떠한 호소력을 담고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아니, 더 나가자면 그 한계점에서 다시 더 바라보아야 할 점이 있어 보인다.
일단, 차무혁을 눈물을 흘리면서 보게 하는 것은 버려짐으로 빚어진 고통과 슬픔 그리고 예정된 죽음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죽음 상황이 숨가쁘게 달려오는 운명의 기차, 그 기적 소리와 같다.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때 사람의 일상사의 모든 행동은 결국 죽음을 통해 의미가 부여된다. 영원히 사는 존재라면 눈물이나 슬픔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차무혁의 죽음은 단지 생명의 그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차무혁이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버려졌기 때문이다. 개인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도 버려진 셈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려한다. 윤서경(전혜진 분)에게는 사회적 삶을 주려하고 윤에게는 심장 즉, 생물학적 생명을 주려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는 슬픔을 통해 삶의 의미를 주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과 슬픔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이 이국에 버려진 아들이라는 사실을 형이라는 사실을, 형,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한 눈에 담아둔다.
그리고 입술은 그 말들을 참느라 항상 앙다물어져 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은 총알박힌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치거나 자신을 비추고 있는 유리를 깨는 것밖에 없다. 이것이 차무혁, 소지섭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큰 이유이다. 불통(不通)의 눈으로 쌓이는 한이다.
그럼에도 고리타분하게 말하자면 고통과 슬픔을 담아두고만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는 분명 아름다운 사회이거나 혹은 정상적인 사회는 아니다. 한이 쌓이지 않는 세상, 사람 사이의 고통과 슬픔이 드러나고 풀어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서로 고통과 아픔을 말하지 못하고 묻어만 두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차무혁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동일시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차무혁이라는 인물을 고통스럽게 하는, 버려짐의 한이 엉머구리 끓는 속에서 나올 필요가 있다. 고통과 슬픔의 가학 속에서 스스로 울음과 눈물 속에만 있는 것만이 폐인의 문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혁이의 버려짐으로 빚어지는 고통과 슬픔이 강해지고 그것이 불통일수록 차무혁의 상승이 일어나는 현상은 그런 의미에서 폐쇄 고리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슬픔의 한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놓고 그 뒤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소통이 아닌 불통의 자폐적 위안에 불과할 수 있으며 이는 미디어가 가진 가장 부정적인 면 중 하나임을 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소통만이 길이고 그것이 죽음에 대항하는 생명의 본질이다.
더 이상 무혁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
더 이상 무혁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
'불통(不通)의 미학에서 소통의 미학으로'
"아저씨가 원하는 게 이런 거였어, 그렇다면 원하는대로 할게. 윤이를 위하는 일이라면. 더러운 손 치워 내가 벗을게"
앞뒤 선후 관계없이 요약하자면 은채가 최윤을 살리려고 무혁에게서 심장을 얻기 위해 던지는 대사의 조합이다.
이럴 때 무혁이의 얼굴을 보았는가. 철저히 버려진 사람의 비애가 가득한 눈을.
버려짐의 총합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입양으로 머나먼 낯선 거리로 떨궈지고 마침내 자신의 연인에게서도 버려졌다. 그 연인의 남편을 살리기 위해 머리에 총까지 맞고 시한부인생을 산다. 그리고 다시 사랑하게 된 은채, 그녀마저 무혁을 버린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이해할 거야. 거래를 했다고. 윤이를 살리기 위해서 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소지섭을 둘러싼 기운을 <경향신문>의 백승찬 기자는 '우울의 코드'라고 했다. <헤럴드프리미엄>의 서병기 기자도 '우울한 눈빛'이라고 지적했다. <문화일보> 이인표 기자는 내러티브가 아닌 소지섭의 말없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어떤 이들은 전사의 이미지에 숨겨진 소년의 미소가 특징이라고 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연기를 거론하기도 한다.
울음과 웃음 사이, 그리고 사이사이 말없음과 말사이의 여운, 그것 때문에 '알랜 폐인'과 같은 현상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물론 소지섭의 육체를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아예 무혁과 은채 커플을 엮어서 소지섭을 높이는 것은 논외의 문제지만 이것이 우습게도 핵심인 것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이들보다 무혁의 죽음을 두고 논쟁이 한참 이루어진 것은 볼만한 일이다. 단지 죽음을 다루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 뜻이 소지섭의 연기와 캐릭터, 드라마 전개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것이 어떠한 호소력을 담고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아니, 더 나가자면 그 한계점에서 다시 더 바라보아야 할 점이 있어 보인다.
일단, 차무혁을 눈물을 흘리면서 보게 하는 것은 버려짐으로 빚어진 고통과 슬픔 그리고 예정된 죽음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죽음 상황이 숨가쁘게 달려오는 운명의 기차, 그 기적 소리와 같다.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때 사람의 일상사의 모든 행동은 결국 죽음을 통해 의미가 부여된다. 영원히 사는 존재라면 눈물이나 슬픔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차무혁의 죽음은 단지 생명의 그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차무혁이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버려졌기 때문이다. 개인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도 버려진 셈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려한다. 윤서경(전혜진 분)에게는 사회적 삶을 주려하고 윤에게는 심장 즉, 생물학적 생명을 주려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는 슬픔을 통해 삶의 의미를 주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과 슬픔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이 이국에 버려진 아들이라는 사실을 형이라는 사실을, 형,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한 눈에 담아둔다.
그리고 입술은 그 말들을 참느라 항상 앙다물어져 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은 총알박힌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치거나 자신을 비추고 있는 유리를 깨는 것밖에 없다. 이것이 차무혁, 소지섭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큰 이유이다. 불통(不通)의 눈으로 쌓이는 한이다.
그럼에도 고리타분하게 말하자면 고통과 슬픔을 담아두고만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는 분명 아름다운 사회이거나 혹은 정상적인 사회는 아니다. 한이 쌓이지 않는 세상, 사람 사이의 고통과 슬픔이 드러나고 풀어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서로 고통과 아픔을 말하지 못하고 묻어만 두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차무혁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동일시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차무혁이라는 인물을 고통스럽게 하는, 버려짐의 한이 엉머구리 끓는 속에서 나올 필요가 있다. 고통과 슬픔의 가학 속에서 스스로 울음과 눈물 속에만 있는 것만이 폐인의 문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혁이의 버려짐으로 빚어지는 고통과 슬픔이 강해지고 그것이 불통일수록 차무혁의 상승이 일어나는 현상은 그런 의미에서 폐쇄 고리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슬픔의 한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놓고 그 뒤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소통이 아닌 불통의 자폐적 위안에 불과할 수 있으며 이는 미디어가 가진 가장 부정적인 면 중 하나임을 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소통만이 길이고 그것이 죽음에 대항하는 생명의 본질이다.
글·김헌식(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