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술주정일 거야. 술만 취하면 아무 여자에게나 내 여자라고 하는 사람들. 얼굴 값 하는 군. 그래. 오늘 하루만 니 여자 해준다.’
주사라고 밖에는 민성 오빠의 행동을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언제 봤다고 입에서 내 여자라는 술술 나올 수가 있는가? 저 말이 진심이라면 얼마나 멋질까 아쉬운 생각이 들면서 일단은 비위를 맞춰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하루, 난 일회용이니까.
“예. 알았어요. 안 받을게요.”
“보수적이라고 생각 하지마. 나도 내 여자 앞에서는 한 눈 팔지 않는다. 그게 당연한 거야.”
“알았대두요. 오빠 학생이라고 했죠?”
“지금은 백수야. 휴학생이거든.”
“그럼 맨날 놀아요?”
“노냐고? 그렇지 뭐.”
어쩐지 피부가 뽀샤시 하더라. 고생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봤을 것 같은 손이며. 자고로 남자란 처자식 먹여 살리려면 억척스러운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까 내 손을 잡았던 고운 손의 감촉을 애써 나쁘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는 오빠와 헤어진 후에도 그 손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혜림이는 운동하는 거 있니?”
“아뇨.”
“나는 일요일마다 아이스하키 하고 있는데.”
“아이스하키요?”
“아는 형 소개로 일요일 마다 운동하는 거야. 이번 주 일요일 시합인데 응원하러 와줄래?”
‘이건 애프터 신청? 오늘 하루 놀자는 게 아니었어? 정말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건가?’
도저히 오빠의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진심일까? 아님 그냥 호의일 뿐일까? 진심과 호의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난 오빠의 눈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말은 거짓일수 있지만 눈 속에는 진실이 보이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결국 진실을 발견해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일요일에는 오빠를 보기위해 그곳에 가게 될 것은 알게 되었다. 이 남자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졌기 때문이었다.
오빠를 처음 볼 때처럼 시간은 다시 멈춰버린 듯 했다. 나의 존재마저 희미해지고, 모든 것들이 사그라지고, 이 세상에 민성 오빠 혼자 있는 듯 했다. 아니, 내게는 이 세상이 오빠였다. 오빠가 내 주변 세상을 모두 삼키고 있었다.
“올 거지?”
“네. 갈게요.”
“내 옆으로 올래? 같이 앉고 싶어.”
일어나야 하나 주저하는 동안 오빠는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는 이후로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빠도 나와 같이 서로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충분했다. 완벽했다. 정말 행복했다.
그 기분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그런 좋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눈을 쳐다보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빠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것은 힘들 정도였다. 오빠도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 손 이상의 스킨쉽은 하려하지 않았다. 행복감은 아련함으로, 아련함은 아쉬움으로, 아쉬움은 안타까움으로 바뀌어 갔다.
“너무 늦었다. 괜찮겠어?”
어느새 시간이 새벽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늦게 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늦게 들어가는 여자를 결혼 상대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헤프다고 생각하지.’ 첫째 언니의 그 말을 여태껏 어긴 적이 없었다. 아까부터 언니의 그 말을 떠올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 분 일초가 너무 아쉬워하는 사이에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5시. 이제 곧 날이 밝아올 시간이었다. 그리고 주변 상황에 대담하게 행동하게 했던 술도 깨오고 있었다. 더 지체하면 정말 단 꿈에서 깬 듯한 생각이 들 것만 같아 집에 가기로 했다.
“정말 많이 늦었어요. 가야겠어요.”
“그래. 가자.”
그러면서 민성 오빠는 나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만 일어나요.”
오빠의 손을 놓고 그렇게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는 집에 바래다준다는 오빠를 제안을 한사코 뿌리치고는 혼자 택시에 올랐다. 민성 오빠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프게 아주 슬프게...
다음날. 잠에서 깨어서는 어제 민성 오빠의 만남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버거워하고 있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꿈이었다면 마음이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텐데.
하루 만에 민성 오빠가 곁에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베고 잤던 베개, 덮고 잤던 흐트러진 이불. 현실의 물건들이 너무 외롭게만 보였다. 기념될 만한 물건이라도 나누고 오는 건데. 그래서 정표를 나누는 구나. 반지도 같은 것을 끼고. 오빠를 기념할 만한 것은 내 작은 머릿속 기억들뿐이라 행여 기억이 씻겨질까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늦은 출근을 하면서 어제의 기억을 계속 리플레이 시켰다.
“야, 사장님 딸이라고 유세냐? 너무 늦었다. 지금이 몇 시야?”
늦은 출근을 병진이가 호들갑스럽게도 맞아주었다.
“어제 술 마셨잖아.”
“술은 너만 마셨어? 다같이 늦게 들어갔지.”
“...”
“말 씹냐? 띠꺼워?”
“아니야. 정신이 없어서.”
“정신 나간 년. 그럼 찬물로 씻고 오던가.”
“병진아, 민성 오빠라는 사람 어떤 사람이야?”
“그건 왜? 너 또 잘생긴 얼굴에 혹했구나.”
“오빠가 여자들한테 인기 많지?”
“얼굴을 봐라. 여자가 줄을 섰지. 한번만 만나달라고 길에서도 엄청 달려든대. 우리 오빠가 그것 때문에 그 오빠 만나는 거 별로 안 좋아할 정도라니까.”
“그 정도야?”
“너 봐라. 너도 한번 보고 헬레레하잖아.”
인가가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이었다. 하긴 나도 얼굴보고 좋아하는 거니까 할 말은 없었다.
“그럼 만나는 여자도 많겠네?”
“아니. 오빠 여자들 안 좋아해. 워낙 시달려서 그런지 여자를 여자로 안 본다니까.”
“정말이야?”
“너는 결혼할 남자도 있으면서 왜 그래? 정신 차려. 그 오빠가 널 여자로 보기나 하겠니? 나도 퇴짜 맞았는데.”
“너도?”
“고등학교 때 처음 보고 나도 뿅가서 작업 좀 봤지. 근데 안 넘어오잖아. 간신히 협박해서 한 번 만났는데 친구들이랑 같이 나오더라구. 그 때 우리 자기 만난 거야.”
“너희 오빠가 그걸 알고도 만났어?”
“내가 영규 오빠 보자마자 또 맛이 가서 작업 봤거든. 사실 민성 오빠야 얼굴보고 혹한거지만 우리 오빠는 다 멋지잖아. 내가 민성 오빠 진짜 좋아한 것도 아니구 안 만나준다니까 오기로 그런 건데 뭐.”
“아직도 민성 오빠 좋아하는 건 아니구?”
“내가 미쳤냐? 누굴 양다리로 보는 거야. 아니야. 절대.”
병진이가 민성오빠를 좋아했었다는 것은 충격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었다. 적어도 병진이가 좋아하는 사람을 같이 좋아할 마음은 없었다.
“민성 오빠의 얼굴 보구 마음 안 흔들릴 여자가 어디 있겠냐? 너도 그만 마음 접어 넣어. 오빠 여자 좋아하는 거 나 한 번도 못 봤으니까.”
“어제 소개팅 해주는 거냐고 물어봤었잖아. 싫은 내색은 안하던데.”
“아마 소개팅이라고 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을 걸. 그런 거 질색하거든. 친구가 하도 졸라서 민성 오빠한테 말도 없이 소개팅 해줬는데 바로 나가버렸어. 그 정도로 여자 안 좋아해. 그리고 너는 결혼할 남자까지 있다고 말했잖아. 말이 되냐? 꿈 깨라. 너한테 넘어갈 거였으면 나한테 넘어왔지.”
병진이의 말대로라면 어제의 행동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날 여자로 본 것도 아니라면 어제의 행동들은 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일요일 자기 시합 있다고 보러 오라고 하던데.”
“오빠가 그랬어?”
“응.”
“나도 오라고 했어. 우리 오빠한테도 오라고 하고. 자주 그래. 우리가 귀찮아서 안가지. 백화점은 일요일도 일하잖아. 시합 때 아는 사람은 전부 불러. 그래도 많이 안 오지.”
“그랬구나.”
“헛물 켜지 말고, 찬물로 좀 씻어라. 너 술 냄새나.”
병진이는 냄새난다는 말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 내 착각이었구나. 아는 사람은 다 부르는 자리인데. 말을 안 한 건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거였나봐. 그래도 슬퍼 보인 눈빛, 그것은 정말 같았는데.
점점 더 복잡해져가는 머리에 찬물을 부었다. 이대로 얼어버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릿속은 점점 더 민성오빠의 생각으로 엉켜가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았던 서루 오빠는 이제 괜찮아졌는지 퇴근 시간에 맞추어 찜질방 앞으로 오겠다고 했다. 어제 전화가 갑자기 끊어진 것에 관해서는 배터리가 다 되어버렸다는 어설픈 변명을 했고, 서루 오빠는 그것을 믿어주었다. 처음으로 퇴근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서루 오빠를 볼 자신이 없었다. 아직 민성 오빠의 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고, 서루 오빠에게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민성 오빠의 전화였다. 사실 민성 오빠는 내 번호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묻지 않았다. 밤이 지나 아침이 되면 내가 다른 남자의 여자로 돌아가기를 바랬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난 물을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서로의 연락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나는 얄팍한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병진아! 오늘 남친한테 전화 안왔어?”
“너 니 서방한테 전화 받았다고 자랑이냐? 꼴 사나워.”
“그게 아니라.”
“아니긴. 서방한테 전화 왔다고 저 구석에서 몰래 받는 거 다 봤는데. 나는 아까 점심 때 전화 받았어. 너 나오기 전에.”
“그 때 아무 말도 안했어?”
“전화했는데 아무 말도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 오빠가 변태냐?”
“그게 아니라 내 얘기.”
“너 공주냐? 도끼병? 우리 오빠가 니 얘길 왜 해?”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 아, 짜증나. 뭐?”
“민성 오빠가 내 얘기 안했냐고?”
“너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좀 더 씻고 와라.”
달리 태클녀겠냐? 병진이는 아무 도움도 못 될 것 같았다.
“전화기 잘 보구 있어. 니 오빠한테 전화 올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잘 보구 있을께. 진짜 퇴근 시간 다 됐네. 왜 전화가 없지?”
“오겠지.”
그건 내 바램이었다.
“혜림아, 너 퇴근하고 나랑 같이 옷 바꾸러 같이 갈래?”
“옷 샀어?”
“응. 너무 갖고 싶은 게 있더라구. 거기다가 할인중이라 보자마자 샀는데 나한테 안 어울려.”
“뭔데? 한 번 봐봐.”
“쎄븐 파리꺼야. 할인해도 10만원 넘더라.”
“거기 옷 이쁘잖아.”
병진이가 보여준 옷은 진한 자주색 벨벳 원피스였다. 이쁜 계집애가 보는 눈도 높아서 이쁜 옷은 잘도 골라냈다.
“어머! 너무 이뻐. 왜 바꿔. 그냥 입어.”
“이쁘긴 한데 이상하게 나한테 안 어울려.”
“한번 대봐.”
정말 이상하게 옷이 어울리지 않았다. 옷도 정말 이뻤고, 병진이도 이뻤는데 둘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다. 옷은 이쁜데. 라인도 잘 떨어졌는데.”
“그렇지? 이상해. 네가 봐도 안 어울려?”
“음, 솔직히.”
“너 한 번 대 봐.”
병진이가 건넨 옷을 거울에 대 보았다.
“야! 이쁘다. 네가 사라. 11만 8천원이야.”
“진짜 이뻐?”
“민성 오빠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병진이는 완전 장사꾼이었다. 민성 오빠라는 말이 나오자 안 살 수가 없었다. 왠지 속는 기분을 느끼며 돈을 건네주었다.
kiwi (키위) - 17. 안타까운 그날 밤
kiwi - 17
‘분명 술주정일 거야. 술만 취하면 아무 여자에게나 내 여자라고 하는 사람들. 얼굴 값 하는 군. 그래. 오늘 하루만 니 여자 해준다.’
주사라고 밖에는 민성 오빠의 행동을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언제 봤다고 입에서 내 여자라는 술술 나올 수가 있는가? 저 말이 진심이라면 얼마나 멋질까 아쉬운 생각이 들면서 일단은 비위를 맞춰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하루, 난 일회용이니까.
“예. 알았어요. 안 받을게요.”
“보수적이라고 생각 하지마. 나도 내 여자 앞에서는 한 눈 팔지 않는다. 그게 당연한 거야.”
“알았대두요. 오빠 학생이라고 했죠?”
“지금은 백수야. 휴학생이거든.”
“그럼 맨날 놀아요?”
“노냐고? 그렇지 뭐.”
어쩐지 피부가 뽀샤시 하더라. 고생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봤을 것 같은 손이며. 자고로 남자란 처자식 먹여 살리려면 억척스러운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까 내 손을 잡았던 고운 손의 감촉을 애써 나쁘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는 오빠와 헤어진 후에도 그 손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혜림이는 운동하는 거 있니?”
“아뇨.”
“나는 일요일마다 아이스하키 하고 있는데.”
“아이스하키요?”
“아는 형 소개로 일요일 마다 운동하는 거야. 이번 주 일요일 시합인데 응원하러 와줄래?”
‘이건 애프터 신청? 오늘 하루 놀자는 게 아니었어? 정말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건가?’
도저히 오빠의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진심일까? 아님 그냥 호의일 뿐일까? 진심과 호의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난 오빠의 눈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말은 거짓일수 있지만 눈 속에는 진실이 보이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결국 진실을 발견해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일요일에는 오빠를 보기위해 그곳에 가게 될 것은 알게 되었다. 이 남자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졌기 때문이었다.
오빠를 처음 볼 때처럼 시간은 다시 멈춰버린 듯 했다. 나의 존재마저 희미해지고, 모든 것들이 사그라지고, 이 세상에 민성 오빠 혼자 있는 듯 했다. 아니, 내게는 이 세상이 오빠였다. 오빠가 내 주변 세상을 모두 삼키고 있었다.
“올 거지?”
“네. 갈게요.”
“내 옆으로 올래? 같이 앉고 싶어.”
일어나야 하나 주저하는 동안 오빠는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는 이후로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빠도 나와 같이 서로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충분했다. 완벽했다. 정말 행복했다.
그 기분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그런 좋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눈을 쳐다보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빠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것은 힘들 정도였다. 오빠도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 손 이상의 스킨쉽은 하려하지 않았다. 행복감은 아련함으로, 아련함은 아쉬움으로, 아쉬움은 안타까움으로 바뀌어 갔다.
“너무 늦었다. 괜찮겠어?”
어느새 시간이 새벽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늦게 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늦게 들어가는 여자를 결혼 상대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헤프다고 생각하지.’ 첫째 언니의 그 말을 여태껏 어긴 적이 없었다. 아까부터 언니의 그 말을 떠올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 분 일초가 너무 아쉬워하는 사이에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5시. 이제 곧 날이 밝아올 시간이었다. 그리고 주변 상황에 대담하게 행동하게 했던 술도 깨오고 있었다. 더 지체하면 정말 단 꿈에서 깬 듯한 생각이 들 것만 같아 집에 가기로 했다.
“정말 많이 늦었어요. 가야겠어요.”
“그래. 가자.”
그러면서 민성 오빠는 나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만 일어나요.”
오빠의 손을 놓고 그렇게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는 집에 바래다준다는 오빠를 제안을 한사코 뿌리치고는 혼자 택시에 올랐다. 민성 오빠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프게 아주 슬프게...
다음날. 잠에서 깨어서는 어제 민성 오빠의 만남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버거워하고 있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꿈이었다면 마음이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텐데.
하루 만에 민성 오빠가 곁에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베고 잤던 베개, 덮고 잤던 흐트러진 이불. 현실의 물건들이 너무 외롭게만 보였다. 기념될 만한 물건이라도 나누고 오는 건데. 그래서 정표를 나누는 구나. 반지도 같은 것을 끼고. 오빠를 기념할 만한 것은 내 작은 머릿속 기억들뿐이라 행여 기억이 씻겨질까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늦은 출근을 하면서 어제의 기억을 계속 리플레이 시켰다.
“야, 사장님 딸이라고 유세냐? 너무 늦었다. 지금이 몇 시야?”
늦은 출근을 병진이가 호들갑스럽게도 맞아주었다.
“어제 술 마셨잖아.”
“술은 너만 마셨어? 다같이 늦게 들어갔지.”
“...”
“말 씹냐? 띠꺼워?”
“아니야. 정신이 없어서.”
“정신 나간 년. 그럼 찬물로 씻고 오던가.”
“병진아, 민성 오빠라는 사람 어떤 사람이야?”
“그건 왜? 너 또 잘생긴 얼굴에 혹했구나.”
“오빠가 여자들한테 인기 많지?”
“얼굴을 봐라. 여자가 줄을 섰지. 한번만 만나달라고 길에서도 엄청 달려든대. 우리 오빠가 그것 때문에 그 오빠 만나는 거 별로 안 좋아할 정도라니까.”
“그 정도야?”
“너 봐라. 너도 한번 보고 헬레레하잖아.”
인가가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이었다. 하긴 나도 얼굴보고 좋아하는 거니까 할 말은 없었다.
“그럼 만나는 여자도 많겠네?”
“아니. 오빠 여자들 안 좋아해. 워낙 시달려서 그런지 여자를 여자로 안 본다니까.”
“정말이야?”
“너는 결혼할 남자도 있으면서 왜 그래? 정신 차려. 그 오빠가 널 여자로 보기나 하겠니? 나도 퇴짜 맞았는데.”
“너도?”
“고등학교 때 처음 보고 나도 뿅가서 작업 좀 봤지. 근데 안 넘어오잖아. 간신히 협박해서 한 번 만났는데 친구들이랑 같이 나오더라구. 그 때 우리 자기 만난 거야.”
“너희 오빠가 그걸 알고도 만났어?”
“내가 영규 오빠 보자마자 또 맛이 가서 작업 봤거든. 사실 민성 오빠야 얼굴보고 혹한거지만 우리 오빠는 다 멋지잖아. 내가 민성 오빠 진짜 좋아한 것도 아니구 안 만나준다니까 오기로 그런 건데 뭐.”
“아직도 민성 오빠 좋아하는 건 아니구?”
“내가 미쳤냐? 누굴 양다리로 보는 거야. 아니야. 절대.”
병진이가 민성오빠를 좋아했었다는 것은 충격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었다. 적어도 병진이가 좋아하는 사람을 같이 좋아할 마음은 없었다.
“민성 오빠의 얼굴 보구 마음 안 흔들릴 여자가 어디 있겠냐? 너도 그만 마음 접어 넣어. 오빠 여자 좋아하는 거 나 한 번도 못 봤으니까.”
“어제 소개팅 해주는 거냐고 물어봤었잖아. 싫은 내색은 안하던데.”
“아마 소개팅이라고 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을 걸. 그런 거 질색하거든. 친구가 하도 졸라서 민성 오빠한테 말도 없이 소개팅 해줬는데 바로 나가버렸어. 그 정도로 여자 안 좋아해. 그리고 너는 결혼할 남자까지 있다고 말했잖아. 말이 되냐? 꿈 깨라. 너한테 넘어갈 거였으면 나한테 넘어왔지.”
병진이의 말대로라면 어제의 행동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날 여자로 본 것도 아니라면 어제의 행동들은 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일요일 자기 시합 있다고 보러 오라고 하던데.”
“오빠가 그랬어?”
“응.”
“나도 오라고 했어. 우리 오빠한테도 오라고 하고. 자주 그래. 우리가 귀찮아서 안가지. 백화점은 일요일도 일하잖아. 시합 때 아는 사람은 전부 불러. 그래도 많이 안 오지.”
“그랬구나.”
“헛물 켜지 말고, 찬물로 좀 씻어라. 너 술 냄새나.”
병진이는 냄새난다는 말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 내 착각이었구나. 아는 사람은 다 부르는 자리인데. 말을 안 한 건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거였나봐. 그래도 슬퍼 보인 눈빛, 그것은 정말 같았는데.
점점 더 복잡해져가는 머리에 찬물을 부었다. 이대로 얼어버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릿속은 점점 더 민성오빠의 생각으로 엉켜가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았던 서루 오빠는 이제 괜찮아졌는지 퇴근 시간에 맞추어 찜질방 앞으로 오겠다고 했다. 어제 전화가 갑자기 끊어진 것에 관해서는 배터리가 다 되어버렸다는 어설픈 변명을 했고, 서루 오빠는 그것을 믿어주었다. 처음으로 퇴근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서루 오빠를 볼 자신이 없었다. 아직 민성 오빠의 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고, 서루 오빠에게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민성 오빠의 전화였다. 사실 민성 오빠는 내 번호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묻지 않았다. 밤이 지나 아침이 되면 내가 다른 남자의 여자로 돌아가기를 바랬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난 물을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서로의 연락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나는 얄팍한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병진아! 오늘 남친한테 전화 안왔어?”
“너 니 서방한테 전화 받았다고 자랑이냐? 꼴 사나워.”
“그게 아니라.”
“아니긴. 서방한테 전화 왔다고 저 구석에서 몰래 받는 거 다 봤는데. 나는 아까 점심 때 전화 받았어. 너 나오기 전에.”
“그 때 아무 말도 안했어?”
“전화했는데 아무 말도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 오빠가 변태냐?”
“그게 아니라 내 얘기.”
“너 공주냐? 도끼병? 우리 오빠가 니 얘길 왜 해?”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 아, 짜증나. 뭐?”
“민성 오빠가 내 얘기 안했냐고?”
“너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좀 더 씻고 와라.”
달리 태클녀겠냐? 병진이는 아무 도움도 못 될 것 같았다.
“전화기 잘 보구 있어. 니 오빠한테 전화 올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잘 보구 있을께. 진짜 퇴근 시간 다 됐네. 왜 전화가 없지?”
“오겠지.”
그건 내 바램이었다.
“혜림아, 너 퇴근하고 나랑 같이 옷 바꾸러 같이 갈래?”
“옷 샀어?”
“응. 너무 갖고 싶은 게 있더라구. 거기다가 할인중이라 보자마자 샀는데 나한테 안 어울려.”
“뭔데? 한 번 봐봐.”
“쎄븐 파리꺼야. 할인해도 10만원 넘더라.”
“거기 옷 이쁘잖아.”
병진이가 보여준 옷은 진한 자주색 벨벳 원피스였다. 이쁜 계집애가 보는 눈도 높아서 이쁜 옷은 잘도 골라냈다.
“어머! 너무 이뻐. 왜 바꿔. 그냥 입어.”
“이쁘긴 한데 이상하게 나한테 안 어울려.”
“한번 대봐.”
정말 이상하게 옷이 어울리지 않았다. 옷도 정말 이뻤고, 병진이도 이뻤는데 둘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다. 옷은 이쁜데. 라인도 잘 떨어졌는데.”
“그렇지? 이상해. 네가 봐도 안 어울려?”
“음, 솔직히.”
“너 한 번 대 봐.”
병진이가 건넨 옷을 거울에 대 보았다.
“야! 이쁘다. 네가 사라. 11만 8천원이야.”
“진짜 이뻐?”
“민성 오빠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병진이는 완전 장사꾼이었다. 민성 오빠라는 말이 나오자 안 살 수가 없었다. 왠지 속는 기분을 느끼며 돈을 건네주었다.
“땡스. 옷 사러 가야겠네. 같이 갈래?”
“아니. 나 서루 오빠 만나기로 했어.”
“좋겠다. 그 옷 입고 서방 만나러 가면 되겠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민성 오빠에게 보이고 싶어 산 옷을 입고, 서루 오빠를 만나러 가야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