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이는 마치 옷에 굶주린 아이처럼 모든 옷을 다 예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혼이 빠질 정도로 정신이 없었지만 잠시 태클녀와 휴전을 갖는 심정으로 나도 천천히 옷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고 싶은 것은 옷이 아니었다. 남자의 지갑. 민성오빠의 지갑이라고 둘러댈만한 지갑을 사는 것이 급했다.
“병진아, 어쩜 너는 다 잘 어울린다. 역시 얼굴이 이뻐야 옷도 산다니까.”
“정말 그렇게 잘 어울려?”
“응. 진짜 쥑어! 이거 사라. 사도 절대 후회안할 아이템이야.”
“글쎄. 집에 비슷한 것이 있기도 한데.”
“아니라니까. 입어 보러 가자. 가방 여기다 맡기면 되죠?”
병진이는 칭찬 몇 마디에 이성을 잃고 있었다. 이쯤이면 잘 몰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서루 오빠.
“오빠! 여자들 옷 보는 거 따분하지? 오빠는 남자 옷 매장 쪽으로 가있어. 내가 전화할게.”
“아니, 난 별루 볼 것 없는데.”
“병진이 옷 갈아입는 것까지 따라다닐 거야? 그냥 다른 데 좀 보고 있어.”
서루 오빠를 남겨두고 병진이의 팔을 잡아끌면서 탈의실로 향했다.
“입고 나와봐. 기다리고 있을께.”
“알았어.”
병진이도 아무 의심 없이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때다! 난 전속력으로 잡화 매장으로 달려갔다. 좋은 지갑을 사줄만한 돈이 부족했기에 그냥 무난한 스타일로 아무거나 사기로 했다. 어차피 디자인이 문제가 아니라 남자의 지갑 모양만 갖추면 되는 거니까.
지갑을 사고 난 후에 집에서 지폐 몇 장과 쓰지 않는 카드 몇 장을 넣은 후에 민성의 오빠의 지갑으로 둔갑시킬 계획이었다. 그 후에 지갑을 공짜로 돌려줄 수는 없다는 핑계로 민성 오빠를 찜질방으로 오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병진이가 연락처를 넘겨주지는 않겠지만 지갑을 찾기 위해 찜질방으로 오는 민성 오빠를 막지는 않겠지 하는 계산이었다.
“남자 지갑 좀 보여 주세요. 빨리요.”
“찾는 스타일 있으세요?”
“아무거나요. 검은 색이었나? 아무튼 가장 무난한 스타일이면 되거든요.”
가게 점원은 몇 가지를 꺼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무거나 살 생각이었는데도 막상 물건을 꺼내 놓고 보니 고르기가 쉽지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민성 오빠의 지갑을 떠올리며 가장 비슷한 것을 고르기 위해 한참을 망설였다.
“이게 제일 많이들 찾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요?”
점원이 내게 권한 것은 정말 아무 무늬도 있지 않은 검은 색 가죽 지갑이었다.
“이걸루 주세요.”
“포장은 안해드려도 되요?”
“예. 예. 얼마죠?”
지갑아! 빨리 좀 나와라. 마음이 급하니 좁은 가방 안에서 지갑을 꺼내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방을 다 뒤집은 후에 겨우 찾아내서는 돈을 꺼내들었다.
“뭐해?”
“어?”
서루 오빠였다. 하필 이럴 때 마주치다니. 돈을 건네주려는 순간 서루 오빠가 내 곁에 와서 있었던 것이다.
“지갑 사는 거야? 남자 꺼 같던데.”
“어? 어.”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은 나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버벅대고 있었다. 순간 병진이가 부러워졌다. 거짓말쯤은 하품하면서 할 수 있는 그녀가.
“너 그 지갑, 혹시 아까 병진이 친구가 잃어버렸다는 그 지갑 때문에 사는 거야?”
‘들켜버린 걸까?’
서루 오빠가 민성 오빠의 일을 알게 된다는 것은 아직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당장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떨림을 주는 민성 오빠? 아님 든든한 신랑감 서루 오빠?
그것은 마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탐스러운 과일과 맛을 알고 있는 사과를 두고 한 가지를 택해야 하는 상황과 같았다. 너무 탐스럽기는 하지만 그 맛을 알 수 없는 과일. 맛이 이상한 것은 물론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과일. 그 과일을 삼킬만한 용기가 내게는 아직 없었다.
“너 혹시...?”
내 마음을 들켜버린 걸까? 아니야. 그런 거. 심각한 사이는 아니라구. 내 마음 속은 온갖 구차한 변명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직 서루 오빠를 포기할 만한 용기가 없음이 확실해 지면서 만약 들켰다고 해도 부인을 할 생각이었다. 끝까지 부정을 한다면 그 것이 진실이 되는 거다.
“그 남자 지갑 네가 잃어버린 거야?”
“······.”
“네가 술 먹고 잃어버린 것 맞구나. 그래서 다시 사서 주려고?”
서루 오빠의 기발한 상상력에 놀라 잠시 말을 잃고 있었다. 내가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발상. 남자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의심도 없이 나를 믿고 있는 게 분명해보였다. 그런 오빠의 모습을 보자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다는 결혼, 아니 서루 오빠를 옆에 두고 오늘 내내 다른 남자를 생각했던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
“아니야. 일부러 그런 건. 지갑을 내게 맡긴 것 같은데 없어졌다고 하니까. 나도 술 취해서 잘 기억이 안나. 이거라도 사서 주게. 미안하잖아.”
“너 무지하게 착하구나. 그래두 딴 남자한테 지갑 선물은 안돼. 네 처음은 나였으면 좋겠어. 지갑 선물도 처음. 사랑도 처음. 결혼도 처음.”
“당연 결혼은 처음이지.”
그러나 사랑도 처음일까? 가슴 떨림을 사랑에서 제외하고서는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던데 병진이 같은 애를 만나지 않고서는 가슴이 아플 일도 내게는 없었다.
언니들의 말로는 사랑은 왔다가도 가는 것이라고 했다. 영원히 부여잡고 있을 수는 없다고. 그래서 가버릴 사랑이라면 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평생을 함께할 남자가 있다면 그 때 사랑을 실컷 해보리라. 결혼할 남자를 사랑하자고 결심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결심을 민성 오빠가 흔들고 있었다.
핸드폰에서 결혼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나 같이 결혼에 환장한 여자에게는 딱 맞는 벨소리. 그 벨소리는 전쟁에 나간 병사들의 전의를 높이는 나팔소리처럼 결혼에 대한 내 집념을 북돋아주곤 했었다.
‘맞다. 병진이.’
벨소리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병진이의 전화를 받았다.
- 너 어디야?
“서루 오빠랑 같이 있어.”
- 왜 기다리다 말고 사라져? 미쳤냐?
“미안해. 바로 위층에 있어. 금방 내려갈께.”
- 아니야. 내가 올라갈게. 배고프니까 밥이나 먹자.
“나도 배고프다. 올라와.”
- 넌 먹지 마! 도망간 주제에 밥이 어디 있어.
결국 지갑은 사지 못했다. 점원은 사지도 않을 거면서 남 가게 앞에서 웬 닭살 쇼를 벌이냐는 듯 째려보았고, 우리는 그 시선을 피해 급히 자리를 떠야했다.
“무지 인상 쓰네. 거 참, 아예 가게를 통째로 사 버리고, 고생 좀 시켜볼까?”
“참아. 그 돈으로 나 밥이나 사줘.”
내가 멋쩍어할까 괜한 호기를 부르는 서루 오빠가 무척 듬직해 보였다. 라볶이, 냉면, 생선초밥 그리고 볶음밥까지 여러 음식을 시켜 나누어 먹은 후에 우리는 음료수를 하나씩 들고는 같이 쇼핑을 했다. 열두시가 다 되어서 끝난 쇼핑 후에는 서루 오빠가 사준 옷가지와 목욕 용품, 나무 느낌이 나는 작은 액자, 향기 나는 초와 집에 가서 먹으라고 챙겨준 버거킹 햄버거까지 들기 버거울 정도의 선물들과 함께였다. 모두 다 마음에 드는 물건들이었지만 여전히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병진이를 데려다 주고 나서 우리 집에 도착한 것은 열두시가 20분이 지나간 시간이었다. 핸드폰에 찍힌 시간을 보며 민성 오빠와 헤어진 지 아직 24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루에 이렇게 길었던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밤의 싸늘한 기온이 겹쳐 몸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추워?”
“어, 조금.”
차에 내려서 집에 들어가는 나에게 짐을 건네주던 서루 오빠가 물었다.
“정말 몸이 차지려고 하네. 빨리 들어가.”
산 물건들을 건네며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돌아서는 내 어깨를 잡더니 두어번 도닥거려 주었다.
“오빠도 들어가. 운전 조심하고.”
돌아보지 않고 인사를 하는 내 어깨에 올려있던 서루오빠의 팔이 목으로 감겨 왔다. 뒤로 안긴 나는 들고 있던 짐이 너무 무거웠기에 팔로 저지할 수도 없었다.
“따뜻하지?”
“아니. 넘 추워. 나 들어갈게.”
“진짜. 춥긴 하다. 들어가.”
“전화할게.”
전화한다는 말을 남기고 종종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집이 빌라 2층에 있기에 계단을 올라야 했다.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하얀 입김이 나올 만큼 추운 날씨였다. 추운 날씨 때문에 서루 오빠에 대한 마음도 잠시 얼어버린 것뿐이라고,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나를 달래며 집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감이 흘렀다. 언니들은 모두 돌아와 있는 것 같은데도 모두들 자는지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고, 신발장에 신발을 넣다보니 아버지도 들어오신 것 같았다. 사온 물건들을 꺼내보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보려 했던 계획은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행여 사람들이 일어날까 거실 한구석에 짐들을 내려놓고 방문을 열었더니 셋째 언니는 역시 곤히 자고 있었다.
들어가지 않은 채 방문을 닫고는 어둠 속에서 가방도 풀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소리 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생각하는 일 뿐이었다.
‘연락처를 왜 물어본 걸까? 나랑 연락을 하기 위해서일까.’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도 거추장스러웠고, 무엇보다 이 갈증이 커피 한잔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커피도 술처럼 취할 만큼 마실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커피로 이 갈증을 채우려면 최소 열잔 이상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잠시 그렇게라도 해볼까 하다 끝내 하지 못했다. 커피로 허락된 불면의 밤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오빠가 사준 물건들을 꺼내어 보았다. 물건들을 보며 서루 오빠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민성 오빠의 생각을 가라앉히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예쁜 옷도 예쁜 양초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맨살을 긁는 느낌이었다. 가려운 곳은 오른팔인데 괜스레 왼팔을 긁는 느낌이랄까? 오히려 멀쩡한 왼팔에 상처를 낼 뿐이었다. 서루 오빠에게 감사하기 보다는 잘 못 없는 물건마저 밉게 보이고 있었다.
‘정말 지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순간 든 생각은 곧 부정되었다.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나에게 전화를 걸 이유는 없으니까. 결국 오빠도 지금의 나와 같을 거야.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견딜 수 없이 민성 오빠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잘 자라는 민성 오빠의 인사를 들으면 안정됨을 벗어나 표지판도 없이 위험한 길로 들어서고 있는 이 불면의 밤에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지?’
결국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동대문으로 향했다. 그러기 위해 가방도 풀지 못하고 앉아있었음이 분명했다. 내일 소용이 없을 지도 모르는 남자의 지갑을 꼭 사고 싶어진 것이다. 그것이 민성 오빠에게 조금이라도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kiwi (키위) - 19. 흔들리는 마음
kiwi - 19
“어때? 저것도 이뿌지?”
병진이는 마치 옷에 굶주린 아이처럼 모든 옷을 다 예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혼이 빠질 정도로 정신이 없었지만 잠시 태클녀와 휴전을 갖는 심정으로 나도 천천히 옷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고 싶은 것은 옷이 아니었다. 남자의 지갑. 민성오빠의 지갑이라고 둘러댈만한 지갑을 사는 것이 급했다.
“병진아, 어쩜 너는 다 잘 어울린다. 역시 얼굴이 이뻐야 옷도 산다니까.”
“정말 그렇게 잘 어울려?”
“응. 진짜 쥑어! 이거 사라. 사도 절대 후회안할 아이템이야.”
“글쎄. 집에 비슷한 것이 있기도 한데.”
“아니라니까. 입어 보러 가자. 가방 여기다 맡기면 되죠?”
병진이는 칭찬 몇 마디에 이성을 잃고 있었다. 이쯤이면 잘 몰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서루 오빠.
“오빠! 여자들 옷 보는 거 따분하지? 오빠는 남자 옷 매장 쪽으로 가있어. 내가 전화할게.”
“아니, 난 별루 볼 것 없는데.”
“병진이 옷 갈아입는 것까지 따라다닐 거야? 그냥 다른 데 좀 보고 있어.”
서루 오빠를 남겨두고 병진이의 팔을 잡아끌면서 탈의실로 향했다.
“입고 나와봐. 기다리고 있을께.”
“알았어.”
병진이도 아무 의심 없이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때다! 난 전속력으로 잡화 매장으로 달려갔다. 좋은 지갑을 사줄만한 돈이 부족했기에 그냥 무난한 스타일로 아무거나 사기로 했다. 어차피 디자인이 문제가 아니라 남자의 지갑 모양만 갖추면 되는 거니까.
지갑을 사고 난 후에 집에서 지폐 몇 장과 쓰지 않는 카드 몇 장을 넣은 후에 민성의 오빠의 지갑으로 둔갑시킬 계획이었다. 그 후에 지갑을 공짜로 돌려줄 수는 없다는 핑계로 민성 오빠를 찜질방으로 오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병진이가 연락처를 넘겨주지는 않겠지만 지갑을 찾기 위해 찜질방으로 오는 민성 오빠를 막지는 않겠지 하는 계산이었다.
“남자 지갑 좀 보여 주세요. 빨리요.”
“찾는 스타일 있으세요?”
“아무거나요. 검은 색이었나? 아무튼 가장 무난한 스타일이면 되거든요.”
가게 점원은 몇 가지를 꺼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무거나 살 생각이었는데도 막상 물건을 꺼내 놓고 보니 고르기가 쉽지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민성 오빠의 지갑을 떠올리며 가장 비슷한 것을 고르기 위해 한참을 망설였다.
“이게 제일 많이들 찾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요?”
점원이 내게 권한 것은 정말 아무 무늬도 있지 않은 검은 색 가죽 지갑이었다.
“이걸루 주세요.”
“포장은 안해드려도 되요?”
“예. 예. 얼마죠?”
지갑아! 빨리 좀 나와라. 마음이 급하니 좁은 가방 안에서 지갑을 꺼내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방을 다 뒤집은 후에 겨우 찾아내서는 돈을 꺼내들었다.
“뭐해?”
“어?”
서루 오빠였다. 하필 이럴 때 마주치다니. 돈을 건네주려는 순간 서루 오빠가 내 곁에 와서 있었던 것이다.
“지갑 사는 거야? 남자 꺼 같던데.”
“어? 어.”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은 나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버벅대고 있었다. 순간 병진이가 부러워졌다. 거짓말쯤은 하품하면서 할 수 있는 그녀가.
“너 그 지갑, 혹시 아까 병진이 친구가 잃어버렸다는 그 지갑 때문에 사는 거야?”
‘들켜버린 걸까?’
서루 오빠가 민성 오빠의 일을 알게 된다는 것은 아직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당장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떨림을 주는 민성 오빠? 아님 든든한 신랑감 서루 오빠?
그것은 마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탐스러운 과일과 맛을 알고 있는 사과를 두고 한 가지를 택해야 하는 상황과 같았다. 너무 탐스럽기는 하지만 그 맛을 알 수 없는 과일. 맛이 이상한 것은 물론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과일. 그 과일을 삼킬만한 용기가 내게는 아직 없었다.
“너 혹시...?”
내 마음을 들켜버린 걸까? 아니야. 그런 거. 심각한 사이는 아니라구. 내 마음 속은 온갖 구차한 변명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직 서루 오빠를 포기할 만한 용기가 없음이 확실해 지면서 만약 들켰다고 해도 부인을 할 생각이었다. 끝까지 부정을 한다면 그 것이 진실이 되는 거다.
“그 남자 지갑 네가 잃어버린 거야?”
“······.”
“네가 술 먹고 잃어버린 것 맞구나. 그래서 다시 사서 주려고?”
서루 오빠의 기발한 상상력에 놀라 잠시 말을 잃고 있었다. 내가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발상. 남자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의심도 없이 나를 믿고 있는 게 분명해보였다. 그런 오빠의 모습을 보자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다는 결혼, 아니 서루 오빠를 옆에 두고 오늘 내내 다른 남자를 생각했던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
“아니야. 일부러 그런 건. 지갑을 내게 맡긴 것 같은데 없어졌다고 하니까. 나도 술 취해서 잘 기억이 안나. 이거라도 사서 주게. 미안하잖아.”
“너 무지하게 착하구나. 그래두 딴 남자한테 지갑 선물은 안돼. 네 처음은 나였으면 좋겠어. 지갑 선물도 처음. 사랑도 처음. 결혼도 처음.”
“당연 결혼은 처음이지.”
그러나 사랑도 처음일까? 가슴 떨림을 사랑에서 제외하고서는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던데 병진이 같은 애를 만나지 않고서는 가슴이 아플 일도 내게는 없었다.
언니들의 말로는 사랑은 왔다가도 가는 것이라고 했다. 영원히 부여잡고 있을 수는 없다고. 그래서 가버릴 사랑이라면 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평생을 함께할 남자가 있다면 그 때 사랑을 실컷 해보리라. 결혼할 남자를 사랑하자고 결심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결심을 민성 오빠가 흔들고 있었다.
핸드폰에서 결혼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나 같이 결혼에 환장한 여자에게는 딱 맞는 벨소리. 그 벨소리는 전쟁에 나간 병사들의 전의를 높이는 나팔소리처럼 결혼에 대한 내 집념을 북돋아주곤 했었다.
‘맞다. 병진이.’
벨소리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병진이의 전화를 받았다.
- 너 어디야?
“서루 오빠랑 같이 있어.”
- 왜 기다리다 말고 사라져? 미쳤냐?
“미안해. 바로 위층에 있어. 금방 내려갈께.”
- 아니야. 내가 올라갈게. 배고프니까 밥이나 먹자.
“나도 배고프다. 올라와.”
- 넌 먹지 마! 도망간 주제에 밥이 어디 있어.
결국 지갑은 사지 못했다. 점원은 사지도 않을 거면서 남 가게 앞에서 웬 닭살 쇼를 벌이냐는 듯 째려보았고, 우리는 그 시선을 피해 급히 자리를 떠야했다.
“무지 인상 쓰네. 거 참, 아예 가게를 통째로 사 버리고, 고생 좀 시켜볼까?”
“참아. 그 돈으로 나 밥이나 사줘.”
내가 멋쩍어할까 괜한 호기를 부르는 서루 오빠가 무척 듬직해 보였다. 라볶이, 냉면, 생선초밥 그리고 볶음밥까지 여러 음식을 시켜 나누어 먹은 후에 우리는 음료수를 하나씩 들고는 같이 쇼핑을 했다. 열두시가 다 되어서 끝난 쇼핑 후에는 서루 오빠가 사준 옷가지와 목욕 용품, 나무 느낌이 나는 작은 액자, 향기 나는 초와 집에 가서 먹으라고 챙겨준 버거킹 햄버거까지 들기 버거울 정도의 선물들과 함께였다. 모두 다 마음에 드는 물건들이었지만 여전히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병진이를 데려다 주고 나서 우리 집에 도착한 것은 열두시가 20분이 지나간 시간이었다. 핸드폰에 찍힌 시간을 보며 민성 오빠와 헤어진 지 아직 24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루에 이렇게 길었던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밤의 싸늘한 기온이 겹쳐 몸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추워?”
“어, 조금.”
차에 내려서 집에 들어가는 나에게 짐을 건네주던 서루 오빠가 물었다.
“정말 몸이 차지려고 하네. 빨리 들어가.”
산 물건들을 건네며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돌아서는 내 어깨를 잡더니 두어번 도닥거려 주었다.
“오빠도 들어가. 운전 조심하고.”
돌아보지 않고 인사를 하는 내 어깨에 올려있던 서루오빠의 팔이 목으로 감겨 왔다. 뒤로 안긴 나는 들고 있던 짐이 너무 무거웠기에 팔로 저지할 수도 없었다.
“따뜻하지?”
“아니. 넘 추워. 나 들어갈게.”
“진짜. 춥긴 하다. 들어가.”
“전화할게.”
전화한다는 말을 남기고 종종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집이 빌라 2층에 있기에 계단을 올라야 했다.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하얀 입김이 나올 만큼 추운 날씨였다. 추운 날씨 때문에 서루 오빠에 대한 마음도 잠시 얼어버린 것뿐이라고,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나를 달래며 집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감이 흘렀다. 언니들은 모두 돌아와 있는 것 같은데도 모두들 자는지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고, 신발장에 신발을 넣다보니 아버지도 들어오신 것 같았다. 사온 물건들을 꺼내보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보려 했던 계획은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행여 사람들이 일어날까 거실 한구석에 짐들을 내려놓고 방문을 열었더니 셋째 언니는 역시 곤히 자고 있었다.
들어가지 않은 채 방문을 닫고는 어둠 속에서 가방도 풀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소리 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생각하는 일 뿐이었다.
‘연락처를 왜 물어본 걸까? 나랑 연락을 하기 위해서일까.’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도 거추장스러웠고, 무엇보다 이 갈증이 커피 한잔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커피도 술처럼 취할 만큼 마실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커피로 이 갈증을 채우려면 최소 열잔 이상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잠시 그렇게라도 해볼까 하다 끝내 하지 못했다. 커피로 허락된 불면의 밤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오빠가 사준 물건들을 꺼내어 보았다. 물건들을 보며 서루 오빠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민성 오빠의 생각을 가라앉히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예쁜 옷도 예쁜 양초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맨살을 긁는 느낌이었다. 가려운 곳은 오른팔인데 괜스레 왼팔을 긁는 느낌이랄까? 오히려 멀쩡한 왼팔에 상처를 낼 뿐이었다. 서루 오빠에게 감사하기 보다는 잘 못 없는 물건마저 밉게 보이고 있었다.
‘정말 지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순간 든 생각은 곧 부정되었다.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나에게 전화를 걸 이유는 없으니까. 결국 오빠도 지금의 나와 같을 거야.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견딜 수 없이 민성 오빠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잘 자라는 민성 오빠의 인사를 들으면 안정됨을 벗어나 표지판도 없이 위험한 길로 들어서고 있는 이 불면의 밤에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지?’
결국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동대문으로 향했다. 그러기 위해 가방도 풀지 못하고 앉아있었음이 분명했다. 내일 소용이 없을 지도 모르는 남자의 지갑을 꼭 사고 싶어진 것이다. 그것이 민성 오빠에게 조금이라도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