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한 마물들의 공격을 받아 함락하는 달라니안을 뒤로 하고 천사들과 어린 파크의 손을 잡은 채 적들의 포위를 뚫고 필사의 탈주를 감행했던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왜 여기 시체 더미들 사이에서 이렇게 흙탕물에 코를 박고 엎어져 있는지 알 까닭이 없다.
그 뿐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또 분명 눈을 감고 물웅덩이에 널부러져 코를 박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잘 살펴보니 주위의 풍경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병사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음이 이 날의 처참함을 말해주는 듯 하였지만 전장은 너무나도 고요하였다. 있는듯 없는 듯 자신의 존재감마저 느껴지질 않는다.
"뭐...뭐지?"
살라도르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중 벌거벗은 채 유독 한 병사의 시체 머리 맡에 웅크리고 앉은 백옥같이 하얀 피부의 소녀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살라도르는 몸을 낮춰 그 소녀에게 다가갔다.
"넌 누구냐?"
이윽고 소녀가 고개를 들어 살라도르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눈은 흰자위가 없는 온통 검은 자위 뿐이었다.
"당신은 살라도르? 달라니안 성의 성주..."
머릿속을 착착 휘어감으며 울려대는 듯한 소녀의 야릇한 음성이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살라도르가 찬찬히 살펴보니 소녀의 발 아래 엎어져 있는 병사의 시체는 바로 자신이 아닌가?
"헉!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살라도르가 자신도 모르게 이 정체 모를 소녀에게 지금의 이 상황을 물었다. 희한한 정황임에도 살라도르 자신이 왜 이렇게 침착한지 왜 처음보는 그녀에게 묻는지 자기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지요. 죽지도 살지도 않은 지금 상태의 당신은 살아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어있는 존재도 아니지요."
"내... 내가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라?"
살라도르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파악해보려고 다음 질문을 하려는데 그녀의 대답이 계속됐다.
"저는 계간을 구분짓고 있는 카르마를 소멸시킬 화약으로 쓰인 이름없는 몽마들 중 하나입니다. 완전히 타버렸으면 좋았을 걸 불발하는 바람에 남김없이 소멸되지 못하고 이 인간과 마물들의 전장을 유계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지요."
몽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살라도르는 들어본 바가 있었다. 인간들에게 악몽을 꾸게 한다는 상상 속의 요물이 아닌가?
"카르마를 소멸시키는 화약이라고? 그리고 유계라는 건 또 뭐야?"
"유계란 현실의 세계와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 현실에 끝자락에 이어져 있는 세계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구요. 인간들이 보통 꿈이라 부르는 것도 이 유계의 한 모습이자 통로이지요. 저희 몽마들은 바로 이 유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혼돈계의 존재. 모든 존재들을 이해하는 존재. 모든 존재들의 존재 이유를 아는 존재이지요. 그러기에 저희 몽마들은 모든 존재들의 태생의 업을 지고 나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답니다."
몽마는 거침없이 얘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러한 특별한 능력때문에 우리는 존재들의 계를 결정짓는 카르마를 태워버릴 화약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한때 인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흑마법사라 불리었던 자가 있었어요. 그의 이름은 도우가. 하지만 친구의 배신과 가장 사랑했던 이의 죽음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인간이란 존재를 버렸지요. 스스로 어둠 자체가 되어버린 그는 인간계와 천공계를 아우르는 복수를 다짐하게 되고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카르마를 소멸시키기 위해 저희 몽마들을 개조하여 세계의 벽을 뚫고 앞으로 엄청난 인과의 결과를 초래하게 될 지금의 이 계간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답니다."
살라도르는 생전 처음 듣는 이 엄청난 이야기들에 잠시 넋을 잃었다. 도우가라면 자신도 알 터이다. 아스가르드 왕국 최고의 흑마법사였으나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어 버린 그. 자신도 보병 대장이었던 시절에 그를 몇번 본 적이 있던 터였다.
갑자기 웅크리고 있던 검은 눈의 몽마가 다가와 살며시 등뒤에서 살라도르를 껴안는다. 벌거벗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살라도르의 등에 밀착되자 따뜻하면서도 왠지 냉랭한 그녀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극도의 흥분과 알 수 없는 편안함에 살라도르는 말 할 수 없이 노곤해졌다.
"당신의 몸을 가지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
몽마가 살라도르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뇌쇄적인 속삭임으로 말하자 살라도르의 입이 점점 벌어지고 온 몸이 뜨거워진다. 그녀의 감미로운 입김이 자꾸 살라도르의 귓바퀴를 간지르자 그는 곧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린다.
"나...나의 몸을 갖고 싶다고? 왜..왜?"
"전 살고 싶어졌어요. 유계의 존재로만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들의 세계를 살고 싶어요. 그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알 수 없는 그녀의 물음이 아득히 귓가에서 사라져 가는데 살라도르는 갑자기 숨통이 트여옴을 느꼈다.
"커억~!"
남자가 곧 입에서 흙탕물을 토해내며 정신을 차리자 레오르도가 재빨리 철심 여러 대를 꺼내 중요한 비공들에 찔러넣었다. 철심을 다루는 그의 능숙한 솜씨를 보고는 옆에 섰던 동카스가 혀를 내두른다.
"이보세요~! 이보세요~! 정신이 드세요?"
아이리스가 온통 흙탕물 범벅인 그의 얼굴을 닦아내며 묻자 살라도르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그들을 올려다본다. 달라니안에서 필사의 탈주를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엔 어찌된 것인지 영 알 수가 없다. 같이 사지를 뚫었던 천사들은 어디를 간 게며 요우단님의 아들인 파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동카스가 곧 그를 자신의 말 안장에 태우고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총총 걸어 일행은 시체 더미들 사이를 떠났다.
레오르도 일행이 곤두와나를 떠나 바이자르로 향한지도 꽤 여러 날이 되었다. 그 동안 보고 들은 참상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잔인함과 흉포함에 그들은 치를 떨었다. 그러던 중 달라니안의 근처의 이 시체더미에서 다 죽어가던 살라도르를 발견한 것이다.
"자네가 왕국 의국의 최고 의 였다는 건 정말이구먼. 인정한다구 인정해!"
동카스의 너스레에 무뚝뚝한 레오르도의 얼굴에도 슬그머니 어색한 미소가 보인다. 그들은 곧 마물들의 횡포로 폐허가 된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곳곳에 집과 담이 무너져 불타고 있었다. 무너져 내린 집들의 지붕을 보며 레오르도의 머릿속에 지난 시절의 기억들이 살포시 떠올랐다. 저런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한낱 변방의 작은 시골 마을의 의사였던 자신에게 삼고초려하여 찾아왔던 정복왕 폴크스겐님과 그의 연인 제라드님. 왕궁의 최고의로 발탁되어 보냈던 영광의 나날들. 그리고 차마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던, 얘기할 수도 없는 칠흑같이 어둡던 그 밤의 끔찍했던 기억들. 그리고 딸 아이리스를 키우며 은둔하여 살던 지난 십수년의 세월들. 자신은 그 모든 것에 해답을 얻기 위해 작정하고 몇 달 전 바이자르로의 항로를 선택한 것이다.
'키아아악~!'
뾰족한 코와 귀를 가진 가고일의 무리들이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나던 레오르도 일행을 덮쳐왔다. 혼돈의 군단에 편성되지 않은 많은 수의 저급 마물들이 카르마가 소멸되어 버린 틈새를 타고 인간계로 유입되었는데 그들 중 한 무리가 지금 레오르도 일행을 발견하고는 살육의 쾌락을 맛보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아이리스 ~! 달려라!"
레오르도가 자신의 딸에게 소리치며 검을 뽑아들었다. 동카스도 재빨리 살라도르를 태운 말의 고삐를 부여잡은 채 한 손으로 자신의 망치로 땅바닥을 치며 높이 솟아 올라 말안장에 올라탔다. 사방을 살피던 일행은 달려드는 가고일의 무리들을 쳐내면서 마을 중앙의 비교적 커다란 규모의 벽돌 건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 안으로 숨어 엄폐물을 이용하여 가고일들을 피하기 위함이다. 건물에 다다르자 그들은 곧 말을 버리고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몇 십기의 가고일이 건물의 지붕과 벽에 달라 붙었고 또 몇십기의 가고일들은 문과 창을 뚫고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레오르도가 키가 작은 동카스 대신 살라도르를 업고 가느라 땀을 뻘뻘 흘린다.
"카아앗~!"
긴 복도를 따라 달려나가는 일행에게 가고일 한 마리가 달려들자 동카스가 대갈 일성 소리를 내지르며 망치로 정수리를 내려쳤다. 순식간에 대가리가 피투성이가 된채 가고일이 복도 벽에 내동댕이쳐져 날개를 퍼덕거리다 조용해졌다.
복도를 모두 지나 연결된 문을 열어젖히자 꽤 큰 홀이 나오는데 사방에 온통 술병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곳은 아무래도 술을 제조하는 곳이었던 것 같군."
동카스가 이렇게 말하는데 홀의 한쪽 면에 나있던 창문을 부수고 또 다른 가고일 한기가 들이닥쳤다.
"어이쿠~!"
레오르도가 달려드는 강력한 가고일의 기세에 검을 든 채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신경 쓸 새도 없이 그가 업고 있던 살라도르도 아무렇게나 널부러진다. 가고일은 이 기세가 멈출 새라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레오르도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아이리스가 자신의 단검을 뽑아들어 가고일의 핏줄이 퍼렇게 선 얇은 피부막으로 된 날개를 마구 찔러댔다. 억세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레오르도를 할퀴려던 가고일은 자신의 너덜너덜해진 날개를 활짝 펼쳐 안스러운 듯 잠시 바라보다가 아이리스에게 고개를 돌리곤 징그러운 자신의 얼굴을 크게 찡그린다. 눈깜짝할 새에 가고일이 아이리스에게 달려들었다.
"꺄아아악~!"
아이리스가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질끈 감은 채 단검을 들어 달려드는 가고일을 찌르려는데 어느새 동카스가 번쩍 뛰어올라 다섯 정령의 힘이 실린 자신의 마법 망치로 녀석의 면상을 먹여버린다.
동카스의 망치가 푸르스름하게 빛나며 괴력을 발휘하는데 가고일이 통째로 망치의 엄청난 기세에 눌려 바닥에 짜부려졌다.
"쿠쿵~! 쩍!쩍!"
가고일을 통째 통조림으로 만들어 버리며 동카스의 망치가 홀의 바닥에 내려쳐지자 엄청난 충격에 낡은 건물의 여기저기서 기와 뒤틀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워낙 오래된 건물인데다가 마물들의 공격으로 약해진 구조물이 동카스의 망치의 괴력 덕분에 이제 아예 산산조각이 나려고 하는 것이다.
"허~억! 이 일을 어째?"
당황한 동카스가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아이리스를 바라보며 울상을 짓는다.
곧이어 '쩌.......억!' 소리와 함께 바닥이 움푹 꺼지면서 아이리스를 포함한 레오르도 일행은 건물의 지하로 추락했다.
마계건국기 1부-21편: 몽마
살라도르가 살며시 눈을 떴다.
강대한 마물들의 공격을 받아 함락하는 달라니안을 뒤로 하고 천사들과 어린 파크의 손을 잡은 채 적들의 포위를 뚫고 필사의 탈주를 감행했던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왜 여기 시체 더미들 사이에서 이렇게 흙탕물에 코를 박고 엎어져 있는지 알 까닭이 없다.
그 뿐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또 분명 눈을 감고 물웅덩이에 널부러져 코를 박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잘 살펴보니 주위의 풍경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병사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음이 이 날의 처참함을 말해주는 듯 하였지만 전장은 너무나도 고요하였다.
있는듯 없는 듯 자신의 존재감마저 느껴지질 않는다.
"뭐...뭐지?"
살라도르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중 벌거벗은 채 유독 한 병사의 시체 머리 맡에 웅크리고 앉은 백옥같이 하얀 피부의 소녀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살라도르는 몸을 낮춰 그 소녀에게 다가갔다.
"넌 누구냐?"
이윽고 소녀가 고개를 들어 살라도르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눈은 흰자위가 없는 온통 검은 자위 뿐이었다.
"당신은 살라도르? 달라니안 성의 성주..."
머릿속을 착착 휘어감으며 울려대는 듯한 소녀의 야릇한 음성이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살라도르가 찬찬히 살펴보니 소녀의 발 아래 엎어져 있는 병사의 시체는 바로 자신이 아닌가?
"헉!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살라도르가 자신도 모르게 이 정체 모를 소녀에게 지금의 이 상황을 물었다.
희한한 정황임에도 살라도르 자신이 왜 이렇게 침착한지 왜 처음보는 그녀에게 묻는지 자기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지요. 죽지도 살지도 않은 지금 상태의 당신은 살아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어있는 존재도 아니지요."
"내... 내가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라?"
살라도르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파악해보려고 다음 질문을 하려는데 그녀의 대답이 계속됐다.
"저는 계간을 구분짓고 있는 카르마를 소멸시킬 화약으로 쓰인 이름없는 몽마들 중 하나입니다. 완전히 타버렸으면 좋았을 걸 불발하는 바람에 남김없이 소멸되지 못하고 이 인간과 마물들의 전장을 유계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지요."
몽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살라도르는 들어본 바가 있었다. 인간들에게 악몽을 꾸게 한다는 상상 속의 요물이 아닌가?
"카르마를 소멸시키는 화약이라고? 그리고 유계라는 건 또 뭐야?"
"유계란 현실의 세계와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 현실에 끝자락에 이어져 있는 세계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구요. 인간들이 보통 꿈이라 부르는 것도 이 유계의 한 모습이자 통로이지요.
저희 몽마들은 바로 이 유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혼돈계의 존재. 모든 존재들을 이해하는 존재. 모든 존재들의 존재 이유를 아는 존재이지요.
그러기에 저희 몽마들은 모든 존재들의 태생의 업을 지고 나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답니다."
몽마는 거침없이 얘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러한 특별한 능력때문에 우리는 존재들의 계를 결정짓는 카르마를 태워버릴 화약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한때 인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흑마법사라 불리었던 자가 있었어요. 그의 이름은 도우가. 하지만 친구의 배신과 가장 사랑했던 이의 죽음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인간이란 존재를 버렸지요. 스스로 어둠 자체가 되어버린 그는 인간계와 천공계를 아우르는 복수를 다짐하게 되고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카르마를 소멸시키기 위해 저희 몽마들을 개조하여 세계의 벽을 뚫고 앞으로 엄청난 인과의 결과를 초래하게 될 지금의 이 계간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답니다."
살라도르는 생전 처음 듣는 이 엄청난 이야기들에 잠시 넋을 잃었다. 도우가라면 자신도 알 터이다.
아스가르드 왕국 최고의 흑마법사였으나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어 버린 그.
자신도 보병 대장이었던 시절에 그를 몇번 본 적이 있던 터였다.
갑자기 웅크리고 있던 검은 눈의 몽마가 다가와 살며시 등뒤에서 살라도르를 껴안는다.
벌거벗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살라도르의 등에 밀착되자 따뜻하면서도 왠지 냉랭한 그녀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극도의 흥분과 알 수 없는 편안함에 살라도르는 말 할 수 없이 노곤해졌다.
"당신의 몸을 가지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
몽마가 살라도르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뇌쇄적인 속삭임으로 말하자 살라도르의 입이 점점 벌어지고 온 몸이 뜨거워진다. 그녀의 감미로운 입김이 자꾸 살라도르의 귓바퀴를 간지르자 그는 곧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린다.
"나...나의 몸을 갖고 싶다고? 왜..왜?"
"전 살고 싶어졌어요. 유계의 존재로만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들의 세계를 살고 싶어요. 그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알 수 없는 그녀의 물음이 아득히 귓가에서 사라져 가는데 살라도르는 갑자기 숨통이 트여옴을 느꼈다.
"커억~!"
남자가 곧 입에서 흙탕물을 토해내며 정신을 차리자 레오르도가 재빨리 철심 여러 대를 꺼내 중요한 비공들에 찔러넣었다.
철심을 다루는 그의 능숙한 솜씨를 보고는 옆에 섰던 동카스가 혀를 내두른다.
"이보세요~! 이보세요~! 정신이 드세요?"
아이리스가 온통 흙탕물 범벅인 그의 얼굴을 닦아내며 묻자 살라도르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그들을 올려다본다.
달라니안에서 필사의 탈주를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엔 어찌된 것인지 영 알 수가 없다.
같이 사지를 뚫었던 천사들은 어디를 간 게며 요우단님의 아들인 파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동카스가 곧 그를 자신의 말 안장에 태우고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총총 걸어 일행은 시체 더미들 사이를 떠났다.
레오르도 일행이 곤두와나를 떠나 바이자르로 향한지도 꽤 여러 날이 되었다.
그 동안 보고 들은 참상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잔인함과 흉포함에 그들은 치를 떨었다.
그러던 중 달라니안의 근처의 이 시체더미에서 다 죽어가던 살라도르를 발견한 것이다.
"자네가 왕국 의국의 최고 의 였다는 건 정말이구먼. 인정한다구 인정해!"
동카스의 너스레에 무뚝뚝한 레오르도의 얼굴에도 슬그머니 어색한 미소가 보인다.
그들은 곧 마물들의 횡포로 폐허가 된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곳곳에 집과 담이 무너져 불타고 있었다.
무너져 내린 집들의 지붕을 보며 레오르도의 머릿속에 지난 시절의 기억들이 살포시 떠올랐다.
저런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한낱 변방의 작은 시골 마을의 의사였던 자신에게 삼고초려하여 찾아왔던 정복왕 폴크스겐님과 그의 연인 제라드님.
왕궁의 최고의로 발탁되어 보냈던 영광의 나날들.
그리고 차마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던, 얘기할 수도 없는 칠흑같이 어둡던 그 밤의 끔찍했던 기억들.
그리고 딸 아이리스를 키우며 은둔하여 살던 지난 십수년의 세월들.
자신은 그 모든 것에 해답을 얻기 위해 작정하고 몇 달 전 바이자르로의 항로를 선택한 것이다.
'키아아악~!'
뾰족한 코와 귀를 가진 가고일의 무리들이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나던 레오르도 일행을 덮쳐왔다.
혼돈의 군단에 편성되지 않은 많은 수의 저급 마물들이 카르마가 소멸되어 버린 틈새를 타고 인간계로 유입되었는데 그들 중 한 무리가 지금 레오르도 일행을 발견하고는 살육의 쾌락을 맛보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아이리스 ~! 달려라!"
레오르도가 자신의 딸에게 소리치며 검을 뽑아들었다. 동카스도 재빨리 살라도르를 태운 말의 고삐를 부여잡은 채 한 손으로 자신의 망치로 땅바닥을 치며 높이 솟아 올라 말안장에 올라탔다.
사방을 살피던 일행은 달려드는 가고일의 무리들을 쳐내면서 마을 중앙의 비교적 커다란 규모의 벽돌 건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 안으로 숨어 엄폐물을 이용하여 가고일들을 피하기 위함이다.
건물에 다다르자 그들은 곧 말을 버리고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몇 십기의 가고일이 건물의 지붕과 벽에 달라 붙었고 또 몇십기의 가고일들은 문과 창을 뚫고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레오르도가 키가 작은 동카스 대신 살라도르를 업고 가느라 땀을 뻘뻘 흘린다.
"카아앗~!"
긴 복도를 따라 달려나가는 일행에게 가고일 한 마리가 달려들자 동카스가 대갈 일성 소리를 내지르며 망치로 정수리를 내려쳤다.
순식간에 대가리가 피투성이가 된채 가고일이 복도 벽에 내동댕이쳐져 날개를 퍼덕거리다 조용해졌다.
복도를 모두 지나 연결된 문을 열어젖히자 꽤 큰 홀이 나오는데 사방에 온통 술병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곳은 아무래도 술을 제조하는 곳이었던 것 같군."
동카스가 이렇게 말하는데 홀의 한쪽 면에 나있던 창문을 부수고 또 다른 가고일 한기가 들이닥쳤다.
"어이쿠~!"
레오르도가 달려드는 강력한 가고일의 기세에 검을 든 채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신경 쓸 새도 없이 그가 업고 있던 살라도르도 아무렇게나 널부러진다.
가고일은 이 기세가 멈출 새라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레오르도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아이리스가 자신의 단검을 뽑아들어 가고일의 핏줄이 퍼렇게 선 얇은 피부막으로 된 날개를 마구 찔러댔다.
억세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레오르도를 할퀴려던 가고일은 자신의 너덜너덜해진 날개를 활짝 펼쳐 안스러운 듯 잠시 바라보다가 아이리스에게 고개를 돌리곤 징그러운 자신의 얼굴을 크게 찡그린다.
눈깜짝할 새에 가고일이 아이리스에게 달려들었다.
"꺄아아악~!"
아이리스가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질끈 감은 채 단검을 들어 달려드는 가고일을 찌르려는데 어느새 동카스가 번쩍 뛰어올라 다섯 정령의 힘이 실린 자신의 마법 망치로 녀석의 면상을 먹여버린다.
동카스의 망치가 푸르스름하게 빛나며 괴력을 발휘하는데 가고일이 통째로 망치의 엄청난 기세에 눌려 바닥에 짜부려졌다.
"쿠쿵~! 쩍!쩍!"
가고일을 통째 통조림으로 만들어 버리며 동카스의 망치가 홀의 바닥에 내려쳐지자 엄청난 충격에 낡은 건물의 여기저기서 기와 뒤틀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워낙 오래된 건물인데다가 마물들의 공격으로 약해진 구조물이 동카스의 망치의 괴력 덕분에 이제 아예 산산조각이 나려고 하는 것이다.
"허~억! 이 일을 어째?"
당황한 동카스가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아이리스를 바라보며 울상을 짓는다.
곧이어 '쩌.......억!' 소리와 함께 바닥이 움푹 꺼지면서 아이리스를 포함한 레오르도 일행은 건물의 지하로 추락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