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앓이 - 4

키라라2004.12.22
조회294

 

[가슴앓이 by 키라라]

 

늦은 시간.

기숙사 생활을 하는 우리 셋은 사감 실 몰래 컵 라면을 사다 먹기로 했다.
물론 다른 방 애들 역시 그럴 요령으로 돈을 미리 각출해 놓고 있었다.


 

"2천원 씩 내놔~"

기숙사 내에서 일명 완장으로 통하는 총무 은영이가 손을 벌렸다.

"여기 있어"

 

"이번엔 누가 가는 거야?"

룸메이트 수진과 미숙이 물었다.

 

"내 차롄가?"

 

내가 나섰다.

 

"어우~야!! 넌 안돼!!"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렸다.
배짱이 부족해서 수위 아저씨한테 들키면 죽음이라는 게 이유였다.
하긴 거의 뺏기고 들어오던지 아니면 준수를 보러 줄행랑을 치는 게 나였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라면 사오면 삐삐 날려~ 잠깐 나갔다 올께."

애써 귀여운 척 웃어 보이며 밖으로 나왔다.

성희를 손봐주기 위해서였다.

 

"다리 하나만 부러뜨려주자..."

 

갑자기 즐거워졌다.

아직 지연이와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인데 또다시 일을 저지르기 위해 나서다니.

이러는 내가 미친게 아닌가...싶지만 마음을 굳게 다져 먹고 입고 있는 땀복 지퍼를 목까지 끌어 올렸다.

 

후....몇 호실이더라...107호는 아니고...

 

내 눈은 성희의 방을 기억 해 내기 위해 번들거렸다.
눈에서 갓 불을 지핀 난로처럼 후끈후끈 열이 났다.


아우~씨...

눈 빠지겠네...

 

주먹으로 따끔거리는 눈을 비비며 둘러보았다.


113호...윤성희랑 같은 과 애가 여기로 왔으니까...맞을 거야.


끼이이익....

주접스러운 문틈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났다.

 

제길...욕을 안 할랬더니...

 

과감하게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역시 예상대로 방엔 아무도 없었다.

아마 고승희와 미인 그룹도 라면을 먹기 위해 내 방이나 그 옆 휴게실로 간 게 분명했다.


 

기숙사 안에서는 나랑 친한 척...

내 남자 앞에선 가증스럽게도 예쁜 척...착한 척...

나랑 더 친한 척...
독한 것들....아니...못된 것들.

 

...
우선 침대에 붙은 이름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윤성희의 침대는 윗 층이었다.

기숙사 내의 모든 침대는 철제로 된 2층 침대다.

그것도 고물수집상 아저씨가 좋아하게 디자인 된 -군대에서 막 조달해 온 것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칙칙한 회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2층 사다리에 준비해 간 파라핀을 문질렀다.

사다리가 얇은 쇠파이프로 된 것이어서 문지르기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방에 있는 침대 사다리 모두에 파라핀을 꼼꼼하게 문지르던 나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책상 서랍을 뒤져 싸구려 플라스틱 라이타를 찾아냈다.


 

흐응...

미인이랍시고 분장하느라 라이타는 기본이다 그거지...?

이걸로 눈썹을 세우고 마스카라를 떡칠 하니 너네들 얼굴 모두가 미키 마우스 여자친구로 보이지......

쯧.쯧.쯧.쯧...

대체 이것들이 사람일까...

얼굴은 정말 예쁘긴 하더라만...쳇...

그 속눈썹 덕분에 비가 내려도 얼굴이 안 젖는다면서?

아~

물론 담배도 피우겠지.

그것 빼면 시체들 아니냐.

골 빈 것들....

그 노력으로 공부 좀 해봐라.

둔탱이들아.


 

엉겨붙어 있는 파라핀을 대충 가열해서 안경 닦는 손수건으로 문질렀다.

반들반들 잘 닦인 사다리를 흐뭇하게 보다 바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다음 시험 삼아 사다리에 발을 올려 보았다.

 

 

에구구!! 나 죽네!!

하마트면 내가 먼저 머리 깨져 죽을 뻔했다.

아니면 다리가 부러졌던지...말이야.
에구~ 무시라...사고 치려다가 초상 치르겠네...

휴~

 

일부러 방 안 불을 켜고 문을 열어 둔 채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여유 있게 내 방으로 가기 전 -시간을 끌기 위해- 화장실엘 들렀다.

 

"야!! 너 여깄냐?!!!"


아니나 다를까...

내가 안 보이면 괴팍해지는 은영이가 화장실 문을 발로 차댔다.

 

"어케 알았쪄? 은영아 나 화장지 좀..."

 

애교를 부리며 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으이구...이 웬수...너 여지껏 화장지 없어서 못 나왔냐?"

 

"헤헤헤"

 

멋적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기다려봐.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야!! 오세내!! 걔 찾지 마라!! 화장실에 틀어 박혀있다!!"

은영인 화장실 밖 복도에서 세내를 불렀다.

 

"거기있어? 화장실에 또 화장지 없어졌대?"

 

세내가 화장지를 가지고 나오는 모양이다.

슬리퍼 소리가 나더니 문을 두드린다.


"너 폰 안 가지고 갔어? 화장지 없으면 8255를 찍던지 전화를 하던지 할것이지~"

 

짓궂게 웃으며 화장지를 밀어 넣어줬다.

"생각 못 했쪄~ 히히..."

 

"에구~ 이 바보~"

 

물을 내리면서 밖으로 나온 난 손을 씻기 위해 비누를 집어들었다.


"헤이 걸~, 너한테서 익숙하게 달콤한 냄새 난다."

 

"응?"

 

손을 씻는데 장난을 치던 세내와 은영이가 내 목을 조르다 말고 물었다.
내 목은 추억의 영화에서나 볼법한 구겨진 책가방 처럼 두 사람의 옆구리에 끼인 상태다.

워낙 자주 당하는거라 평상시 처럼 헤드 락을 풀기 위해 버둥댔다.

 

"어디서 많이 맡아 본 냄샌데...뭐지?"

 

"흠..흠...왁스 냄새 같은데?"

 

세내의 말에 은영이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결론을 지었다.

 


왁스라고?

아차!!!

옷에 파라핀 냄새가 배인 모양이다.

이런...

 

귀금속 가공용 왁스는 매우 부드럽고 금속에 기포를 남기지않고 모양만 잡아준 다음 빨리 타서 없어지기 때문에 특유의 타는 냄새가 옷에 배게되면 설탕을 태우는 것보다 더 달콤한 냄새가 배게 된다.

개코 보다 한 수 위인 친구들이 그 냄새를 모를리 없었다.


"또 가지고 다니냐? 대체 이번엔 뭘 만드냐? 너 다른 남자 생겼냐? 또 무슨 사고쳤냐?"

"아..아니야...!!! 무슨..?"

 

발뺌하면서 손에 묻은 물기를 털었다.

"에게게? 야~야~ 증거가 네 슬리퍼에 묻어있다, 뭐."

 

은영이가 내 이마를 손끝으로 콕콕 찍어댔다.


 

우째 이런 일이!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내가 완전 그 꼴이잖아!

 

 

"또..또...!!! 또 손톱 물어뜯는다, 또 손톱 물어 뜯어~ 손 안 빼? 그거 정서불안이야...그거 알아?"

 

세내가 신경질적으로 내 손을 세게 쳤다.

손등에 그녀의 손 자욱이 벌겋게 남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방으로 가자 다들 컵 라면에 물을 부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난 뒤였다.

"어라? 사람이 없는데 물을 부어 놔? 이것들이 미쳤나~"

 

라면이 퉁퉁 불어있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심통 난 은영이가 화장실 변기에 쏟아버려야겠다며 컵 라면을 들고 나갔다.

 

"변기 주위에 묻지 않게 조심해"  

 

꼼꼼한 세내의 말에 자기가 알아서 버린다며 입을 세치나 쭈욱 빼고 나머지 라면도 챙겨나갔다.

"어차피 야식은 물 건너갔고...음, 이보시오 낭자... 우리 밖에서 얘기 좀 할래?"

 

은영이가 물내리는 소리가 들릴때 쯤 내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놨다.

자신의 뒤만 따라 오라는 그녀를 따라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어딜가는지 물을 필요도 없이 우린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장미 천사의 정원으로 향했다.

 

 

[가슴앓이 by 키라라]

 

 

캠퍼스 내엔 작은 정원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 중 기숙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바로 장미 천사의 정원이었다.

 

"........."  

안락하고도 우아한 나무 벤치에 앉아 내 눈앞에서 시계추처럼 이리저리 서성이는 세내를 봤다.

눈으로만 그녀를 따르자니 약 기운에 잠자했던 머릿속이 헤집듯 아팠다.


".......저기.."

한참 동안 망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지만 시선은 내가 아닌 밤하늘에 고정시킨 상태였다.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날 힐끗 쳐다 본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연이...말이야..."

 

"어? ...지...지연...이?"

 

사고 난지 여러 일이 지난 지금 그 이름을 듣게되니 어지럽고 울렁거렸다.

"아무래도...걔가 미앨 죽인 것 같아"

 

숨도 쉬지않고 내뱉는 그녀의 말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놀라 일어섰다.

그러자 놀라지 말고 천천히 들어보라며 내 어깨를 눌러 앉혔다.


세내 추리로는 지연이와 미애가 서로 다툼이 일어 과격하게 싸운 것이 시초 같다고 했다.
이럴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신고 있는 슬리퍼 앞 코 부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냥 듣는 내 입장으로서는 그녀의 추리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싸웠다는 그 부분은 미애와 친하게 지냈었던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그날... 비도 많이 내리고 강의는 거의 없었잖아? 기억나지? 평상시 미애에게 감정이 있던 지연이가 미애 뒤를 따라갔거나..."


뒤 따라 갔다는 부분에서 호흡이 가빠졌다.


"아니면 미리 시청각 실에서 걔를 기다렸을 수도 있지. 강의실에서 너랑 미애랑 얘기하는 거 듣고 나갔다더라. 그런데 무슨 이유로 따라나갔는 지는 알수도 없고...짐작가는게 있어도 아직은 단정짓고 싶진않아. 하지만...아....진짜...말하기 어렵다.....휴...."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혀끝으로 입술을 적셨다.


"후....그리고는 지연이가 가지고 있던 나이프로 미애의 얼굴을 찌른 거지."


 

얼굴을 찔러?

난 미처 그런 생각은 못했지 않은가.....

과감한 테러...

내가 지연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숨겨놨던 본능이라도 깨어나는 것 같다.

 


"아마도 싸움은 몇 초 걸리지 않았을 거야. 대충 너랑 미애가 나간 시간이랑 네가 화장실로 간 시간을 합쳐 볼 때 사건 발생 시간은 약 2~3분쯤? 비도 오고 그랬으니 더 걸렸을 수도 있겠지만 대강은 이게 맞다고 봐, 난"

 

잰 걸음으로 몸을 돌린 세내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뒷모습을 보였다.


"내가 화장실에 간 걸 누가 봤어? 어떻게 알아?"

 

그녀의 뒷통수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아~ 그거? 준수가 돌아서서 가는 널 봤었대."


"뭐...뭐?"

 

스프링 처럼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준..수가...날...봤.었...대?"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어디까지 본 걸까...

다 봤을까?...

숨이 막힌다.

 


"왜~ 낭군님이 너 쫓아 다녀주니까 행복이 마구 마구 밀려 오냐? 에구~ 이 화상~"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이번엔 내 머리를 눌러 주저앉게 했다.


가로등이 내 오른쪽에 서 있기 때문에 서로의 얼굴이 뚜렷이 보일텐데...
내 표정엔 분명 불안감이...


어금니를 힘주어 물고 고개를 숙였다.

"너 괜찮아?"

 

내 어깨에 손을 얹어 오며 물었다.

"속이 울렁거려.."

 

솔직하게 대꾸했다.

"너무 충격적이라 놀랬어? 뭘 그런거 가지고 놀래."

 

"아니야...그런거...아니야...그냥 계속해."

 

난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그 다음을 말해 달라고 했다.


"근데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지연이가 다칠 만한 시간이 있었냐는 거지..."

 

서로 해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을 거라는 게 요지였다.
지연인 일방적으로 미애를 찌르다 마지막엔 그녀의 목 줄기에 왁스 카빙용 나이프 (수술용 메스 ; 왁스 조각에 사용된다.)를 꽂았다고 했다.

알 수 없는 쾌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이런 게 대리만족인가?

아직도 난 회개하지 않았었나 보다.

그러니 이런 스릴을 느끼지...

 

"지연인..."

내가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응?"

세내가 내 옆에 앉으며 날 봤다.

 

"지연인... 내가... 그랬어..."

 

짙은 그림자가 얼굴 반쯤 덮인 세내가 숨을 멈추고 날 노려봤다.


"미...미...미앤 줄..알고...내..내..가...그랬...어"

 

탄식이 섞인 끝 마무리로 입을 다물었다.

은영이에게 모두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나 그녀의 반응이 이렇게 심각한 걸로 봐선 아무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 같다.

 


제기랄...이젠 날 안 보겠지?

얘 성격상으로는 이제 두 번 다시 나 따위와는 안 놀거야.

어쩌지?

응?

어쩌지?

 

"... 정신차려!....고개 들어!!"

" !! "

 

나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수 차례 날 불렀던 모양이다.
세내가 내 어깨를 힘주어 잡고 흔들며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라고 했다.

"못..보겠어..."


왜 너희들 앞에선 이렇게도 착해져 버리는지.... 방금까진 스릴을 느꼈잖아.

고개를 떨구고 얼굴을 가렸다.


"손 떼...고개 들고 날 봐...빨리!!"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이끌려 고갤 들어 바라봤다.

철썩!

슬며시 얼굴을 든 순간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장미 천사의 정원에 있는 나무들이 흔들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뺨을 강타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입 다물고 잘 들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랬는 데 왜 말을 하는 거야...그러다 죽고...싶어?"


뺨을 맞은 것보다도 그녀의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네가 그렇게 나 잘 했수~하고 떠벌리면 권준수 추종자들이 널 가만히 두겠어? 엉? 왜 정신을 못 차려?!"

 

뼈 밖에 없는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고 다가와 뺨 한 대를 더 후려쳤다.

날 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친구가 내 양쪽 볼을 눈물이 나올 만큼 세게 때리면서 나무랐다.

 

.

.

.

 

아아............

이제 나도 몰라.

이 죄를 어떻게 갚지?

너희를 어떻게 해야하지?

 

 

[가슴앓이 by 키라라]

 

주여!

 

차라리 날 소리없이 죽여 주소서!

 

대체 이 사건을 어찌 감당하오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