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라 삼팔선아~

조윤정200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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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원 2집을 듣던 평온하던 어느 오후에....

 

엽서를 한 장 받았다.

귀하는 19XX년 X월 XX일, 오전 11시경 버스전용차선 위반으로 <고발조치>되었으므로 엽서를 받은 후 면허증을 소지하고 XX 경찰서로 출두하시오. - XX 경찰서 사고 조사 계장 - 읽고 있자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전용차선 위반도 법규 위반이니 <고발조치>라는 말이 맞기는 맞겠지만 그 살벌함이라니! 꼭 그런 식으로 표현해야 했을까? 더구나 명령조의 말투는 꽤나 불편해 보였다. 내가 그 사고 조사 계장이었다면 그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 이 편지를 받으실 분께 가을입니다. 눈물 뚝뚝 흘리던 세월들이 제 갈 길로 가버린 오후, 문득 그대 생각이 나서 이렇게 편지 드립니다. 평온하신지요? 얼마 전 동료가 건네 준 그대의 사진을 받았습니다. 차 안에 계신 모습이더군요. 그대의 낡고 오래되어 친숙한 차도 그대에게 썩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파란 차선 안에 계신 듯합니다. 여러 가지 일로 바쁘고 피곤하실 테지만 몇 가지 상의 드릴 일이 있어 이렇게 편지하게 되었으니 일견 오셔서 저와 따뜻하고 향긋한 커피라도 나누며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어떨지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이만 총총 - XX 경찰서에서 그대의 친구 XXX 드림 ps. 그대가 요즘 읽고 계신 책이나 듣고 계신 음악은 무엇인지요? 가능하다면 그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럼 곧 만나 뵙기를 바라며.... 나 같으면 이렇게 보냈을 것이다. 그들의 살벌하기 그지없는 단어 선택은 내게 몹시 우울한 기분을 선물해 주었다. 아, 이제 나는 경찰서에 가서 취조와 심문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혹시 내가 고정 간첩으로 암약하던 사실을 그들이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경찰서에 가면 안기부 요원들이 '깜장색 지프'를 대기시켜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모처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한 채 어딘가에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지난달에 내가 밀수한 마약이 운반책의 실수로 모두 검거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이미 공항과 항구에 출국금지령이 내려진 채 도피의 생활을 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 (...운운)   어쨌든 신호위반이나 과속은 종종했지만 버스차선 위반만큼은 절대로 한 기억이 없는데 ‘버스 노는 곳에서 승용차가 놀았다’는 죄명으로 고발되었다니 좀 의아해진 나는 모범생처럼 오라는 날짜에 오라는 장소로 찾아갔다. 과연! 고발자의 말처럼 선명한 사진이 두꺼운 위반사항 스크랩 안에 들어있었다. 확실히 우리집 차였으며, 날짜와 정황으로 봐서도 내가 운전하고 있었던 것 또한 분명해 보였다. (사진 찍기에도 그만일 만큼 훌륭한 날씨였다)   그런데 문제는 버스차선 위반이라고 그들이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사진을 보니 차체가 파란색 선 안쪽으로 1/3 가량 들어가 있었던 것. 분명히 버스전용차선에 끼어든 적이 없었으므로 그것은 내 차선에 놓여있던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 들어갔거나 또는 어떤 돌발적인 상황 때문에 불가피하게 조금 진입한 것이 분명했다. 1/2도 아니고 1/3쯤 차체가 차선 안에 들어갔다고 그걸 찍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면서 어린 시절에 하던 ‘삼팔선’이란 놀이가 생각났다. 금을 밟으면 술래가 되는 그 놀이....   나는 ‘어머, 금을 밟았군. 호호, 그만 금을 밟고 말았어.’라고 나뭇잎 세 개를 달고 있던 경찰 아저씨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도 싱긋 웃었다. 우리는 정말 귀여운 아이들처럼 싱긋- 웃었지만 내 지갑은 웃지 않았다. 그 고발조치로 인해 4만원이라는 거금을 털어내야만 했으니까. 나뭇잎 세 개를 달고 있던 경찰 아저씨도 좀 어이가 없었는지 “이건 구청에서 찍어 온 사진인데 너무하네요. 이런 걸 왜 찍었을까? 구청에 이의신청하실래요?“라고 건성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거하면 받아들여져요?" "대부분 안 받아들여지더군요. 절차도 복잡하고...." "그럼 관두죠 뭐.“   나는 항변의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구차하게 소비해야 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를 나와 길을 걸었다. 마침 그 경찰서는 내가 재수하던 곳에 있었다. 내 오랜 추억이 묻어있는 길을 걷고 있자니 제 잎들을 대부분 떠나보낸 나무들만은 여전했다. 길 중간 중간 울퉁불퉁하던 보도블록도 여전했고, 떡볶이를 파는 가게들이 많은 골목들도 여전했고, 오락실의 기계음도 여전했다.   '그래. 여기는 내 이십대 초반의 구름들이 지금까지도 얼굴 찡그리고 비를 내리고 있는 곳이야.... 아, 그래. 난 여기서 스무 살을 맞았었다.....' 라고 회상했다.   은행에 범칙금을 내고 전철역에 들어서는데 따뜻한 게 마시고 싶어 자판기 앞에 섰다. 따뜻한 음료 칸에는 네스카페, 우롱차, 레몬주스가 판매되고 있었다. 요새 속이 좋지 않은 관계로 자극적이지 않겠다 싶어 우롱차를 500원을 내고 꺼냈다. (정말 따뜻했다. 시린 내 손은 따뜻한 캔에게 참 고마워했다) 캔에 인쇄된 ‘XX 우롱차’라는 문구를 보면서 뭔지는 모르지만 우롱당한 기분으로 우롱차를 마시며 앞으론 절대 "금 밟지 말아야지" 라고 결심했다. 그때 내가 타야 할 전철이 도착했다. 나는 자못 기형도를 흉내 내어 이렇게 중얼거리며 전철에 올랐다.   “잘가라- 내 어린 날의 삼팔선아, 내 젊은 날의 거리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