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된 시간.

외로서기2005.01.04
조회508

원래는 친구로 지냈었다.

동호회에서 만나 우리는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며 좀 더 친밀해졌고,

정기채팅을 할 때면 두 사람만의 방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그때부터 이성으로서의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나는 그 사람의 연애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고민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러던 차에 한창 내게 불만을 늘어놓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재작년 연말 파티에 왔었던 그 사람은 참 예뻤다.

어머니의 개인전에 초대하고, 몇 번을 거듭 더 만나면서 나는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에 확신을 갖고, 고백을 했다.

 

우리는 스물 일곱 살에, 마치 처음 연애를 하는 남녀처럼 서로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가득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나면 이미 그 전에 생각하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렸고, 항상 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행동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어갈 무렵 나는

내 자신을 찾아야겠다 마음먹고 조금씩 행동을 바꿔나갔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건대,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문제삼았고, 나를 개선해 나가야 했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스스로가 내 마음에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이제서야 깨닫는데,

대체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개선하는 데 있어 자신의 내부로 파고들며,

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나는 그에 앞서 곁에 있는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매일매일 써 보내던 편지도, 전화를 통해 불러주던 노래도,

내가 찍은 사진에 적어 보내주던 사랑의 시도, 물론 작업이 많아진 탓도 있었지만

점점 줄어들다 아예 없어져 버리고, 나의 관심을 바라던 그 사람의 마음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내 속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헤어진 뒤, 우리는 연인이 되기 전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따금씩 전화통화를 했고,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숨막히도록 힘겨운 날들은 우리에게도 예외없이 덮쳐왔다.

나는 매일밤을 울었고, 그 사람도 그랬을 게다.

 

절망처럼 다가온 아픔에 나는 헤어나지 못하고 몇 번이나

그 사람에게 돌아와달라는 부탁을 했지만, 이미 나 때문에 허물어진 그 사람의 마음은

돌아설 줄을 몰랐다. 나는 비로소 끝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헤어진 지 석 달이 지난 뒤였다.

 

나와 편해질 일 없으니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을 끝으로 그 사람은

완전히 내게서 멀어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8개월간 함께했던 디지털 카메라를 처분하고, 필름 카메라를 구입해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곳들을 찾아다니며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찍었다.

 

함께 갔던 창경궁과, 안국동 뒤편의 담장길, 인사동 거리, 그리고 코엑스와

돈암동 거리, 언젠가 길을 잘못 들어 그 사람을 기다리게 했던 미아리 고개길,

날 만나러 와 앉아 있던 학교 앞 벤치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던 내 차의 조수석까지,

그리고 2003년 2월 4일, 내 마음을 처음으로 내보였던 인사동의 전통주점을

마지막으로 그 사람과의 일들을 더듬어 가는 것을 마무리했다.

 

이따금씩 그 사람이 내게 보낸 편지들을 꺼내어 읽어보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고통과 슬픔으로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지만,

이것은 아마도 그 사람을 아프게 했던 나의 죄과일 것이다.

 

사랑하다 헤어지면, 만일 그 사랑이 변질되어 헤어진 것이라면

그저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기만 하다면 나는 2년도 채 아니되어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있을 테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언제나 잊지 못할 까닭은,

빛나도록 아름다워야 할 그 사람의 나날을 내가 더럽혀 버린 탓이 아닐까.

 

물론 나만이 잘못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충분히 그 사람을 원망할 수 있고, 내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좋을 만큼

사랑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러할 수가 없는 것은, 스물 일곱이나 먹도록 사랑할 줄만 알았지,

그것을 어떻게 해야 곁에 있는 사람이 내 사랑을 느낄 수 있는지를 모른 채

불나방처럼 사랑 속으로 뛰어들기만 했던, 그렇게 해서 서로에게 상처만

남겨야만 했던 내 지난 날들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잊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는 또 다시 주위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잊을 뻔했다.

내 마음에 드는 나는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다는 점을 나는 왜 인식하지 못했을까.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순간 나의 그림은 그 생명을 잃는 것이란 점을

이제야 비로소 나는 피부로 느낀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만큼이나 헤어진 이들에게 슬픈 말은 없는 것 같다.

무너지는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 또한 참으로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현재를 보아야 하고, 살아갈 날들을 보아야 한다.

이따금씩,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되뇌이지만,

그것은 지금 내 고통에 대한 반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것은, 내가 온전히 짊어져야 할, 내 젊은날의 부끄러운 기억 한 편이다 .

 

언젠가 기억하되 아파하지 않을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