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번 봤을 뿐인 남자가 어제 건네준 그 비행기 표 때문에 오전 근무는 엉망이 되어 이미 포기 상태였다. 엄밀히 따지면 두 번의 만남이었다. 회사 동료인 지연의 소개로 만난 것이 한 번, 그리고 일주일 전 두 번째 만남.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 자동차 극장에서 이루어진 키스의 추억은 아직 진하게 가슴에 남아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다짜고짜 여행이라니.
일주일 전 데이트는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자동차 극장을 나와서는 분위기 있는 식사를 하고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참 매너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집에까지 데려다 주시고 감사해요.”
“늦게 들어가게 할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운전 조심하시구요.”
“청옥씨, 잠시만요!”
규섭씨는 덮치듯 기습적인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뜨거운 숨결.
“이건 너무 빨라요.”
“때론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는 것도 건강에 좋아요.”
마음 가는 대로. 그의 말대로 내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내 손은 그의 머리와 목덜미를 잡고 있었다. 너무도 향긋한 그 남자의 향에 취해서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그 일이 있고난 일주일 동안 규섭씨에게서는 전화 한 통이 없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헤어질 때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한 것이 있을까?
그 날의 나의 행동을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지만 특별히 실수를 한 것은 없었다. 처음 며칠은 애가 타다가 금요일쯤 되어서는 바람둥이 같은 남자를 만난 것이라고 애써 위로를 하고 있었는데 금요일 퇴근길에 회사 앞에 나타난 그가 뜬금없이 비행기 표를 건네고 간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5시 부산 행 비행기 표였다.
“이게 뭐죠?”
“뜯어보세요. 오시든 안 오시든 저는 내일 부산 공항에 있을 겁니다.”
봉투를 열기 전까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규섭씨는 바쁜 듯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져 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식사를 하기 전 마음을 결정을 내리리라 했는데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표를 봤을 때는 당연히 가지 말아야지 했었다. 여행 후에 자기 멋대로 연락을 끊어버릴 수 있는 그런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그 남자와 함께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더 매력적인 일이기도 했다.
“밥 먹으러 가자.”
규섭씨를 소개해 준 지연이었다. 입사동기 지연이는 연두색이 잘 어울리는 활발한 친구였다. 항상 그늘 없이 밝게 웃는 그녀의 웃음은 나의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면을 더 부각시키는 것이어서 내가 지연이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지연이와 상의를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규섭씨는 지연의 남자친구의 친구일 뿐 본인도 그날 처음 본 사이라 했고, 소문이 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빨리 가자. 늦게 가면 엄청 기다려야 하잖아.”
“그래. 가자.”
결국 부산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점심시간 바다가 보고 싶다던 지연이의 수다가 평등을 이루던 내 저울에 돌을 하나 얹어준 셈이었다. 어차피 공짜표가 생긴 거니까 규섭씨를 만나지 않고 혼자 바다를 보고 오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구름도 별로 없는 날, 창밖의 풍경은 내가 처음 그렸던 수채 풍경화 같았다. 그림을 완성해놓고 너무 흡족해서 자랑을 하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집에는 나 혼자라 자랑을 할 수도 없었다. 저 아름다운 풍경을 감탄하며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역시 내 옆엔 아무도 없었다. 돌아올 때는? 글쎄.
나의 몸이 하늘을 날아 바다를 향해 간다. 멋진 휴가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부산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규섭씨를 만나야 하는지의 문제를 두고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우리, 우리는 전사자가 된 심정으로 시작합시다. 우리, 우리의 이야기는 마치 탱크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전쟁터에 이리저리 퍼져 나갈 겁니다]
하필 떠오르는 것이 전쟁터에 나가는 이름 모를 병사의 각오였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떠오르는 문구. 마음이 거센 바람을 맞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전사자가 된 심정으로.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규섭씨를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
핸드폰도 없던 나였기에 공항을 조금 배회하다가 만나지 못하면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 방을 잡자 마음을 먹었다.
“오셨네요. 오실 줄 알았어요.”
그 말이 쉽게 보인다는 말 같아 좋게 들리지 만은 않았다. 그만큼 마음이 움츠려 있었다.
“가방 주세요.”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어 가방을 건네주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공항 밖에 나서자 서울과는 다른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일까? 이 남자에 대한 경계심도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연하늘 남방을 편하게 입은 규섭씨를 따라 호텔로 들어섰다. 여행지라 묵을 곳이 호텔 밖에 없는 것은 알지만 두 번째 만남에 키스, 세 번째 만남에 호텔이라. 철저히 이 남자의 페이스에 말리고 있었다. 너그러워 보이는 웃음 때문일까? 투명할 정도의 피부에 회색빛이 도는 눈빛 때문에?
“먼저 씻을래?”
“예?”
“샤워하겠냐고?”
여기까지 와서 순진한 척 하는 것은 더욱 웃긴 일이었다. 그 먼 길을 이 남자 때문에 달려온 꼴이 되었으니까.
“네. 먼저 씻을께요.”
대담한 내 행동에 놀라면서 욕실로 들어섰다. 뜨거울 정도의 물에 샤워를 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우습다. 내 발로 걸어들어 온걸.
문 하나를 두고 건너편에 규섭씨가 있다는 사실에 뜨거운 물이 살을 닿고 흐를 때 전기가 오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게 된 거지? 이미 내 마음의 절반 이상은 그가 갖고 있었으니까.
내 마음을 되찾으러 온 길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얼굴에 둘만의 여행에 날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문이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곳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야기 거리가 되니까. 남들이 보면 우리가 이 곳에서 무엇을 했든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 곳에 같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가십거리는 충분하다.
“빨리 나왔네.”
“원래 빨리 씻는 편이에요.”
“이 쪽으로 와. 바다가 보여. 밤바다라 잘 보이지 않지만.”
“잠깐만요. 물기 좀 털구요.”
“빨리 와 보라구. 바다가 보고 싶지 않아?”
내게 내민 손을 잡았다. 선이 굵은 손이다.
“나도 씻고 와야겠어.”
“아니요. 이대로가 좋아요.”
그의 입술을 훔친 것은 나였다.
“마음 가는 데로. 건강하게 살기로 했어요.”
“생각보다 멋진 여자군.”
누구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손이 아직 물기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내 몸을 구석구석 훑고 지나갔다.
“속옷을 다시 입었군.”
“처음이니 상대가 벗겨주는 게 좋잖아요.”
이 남자에게 지고 싶지 않다. 어차피 만만한 상대라고 생각했겠지. 나도 만만히 보면 그 것으로 됐다.
거친 손길로 그의 남방을 벗겨냈다. 서로의 몸이 거의 드러날 때쯤 규섭씨는 침대로 가려고 했다.
“아니. 여기에서 해. 침대는 재미없어.”
끝까지 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긴다는 것은 오히려 씁쓸한 기분이었다.
규섭씨는 내 몸을 뒤로 돌려 엉덩이를 잡았고, 나는 발코니 창을 잡았다. 창 밖으로 흔들리는 바다가 보였다.
“부산에 자주 와?”
팔 베게를 하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며 물었다.
“아니.”
“근데 왜 부산에 왔어? 보통 바다 보려면 동해 쪽으로 많이 가지 않나?”
“동해 쪽은 밤늦게라도 바다가 보고 싶으면 차타고 가곤 해. 부산은 그러기에 너무 머니까 자주 오게 되지 않잖아.”
“맞다. 나 먼저 자도 돼? 대신 나 자는 거 보구 자기. 재워줬음 좋겠어.”
“아니. 아직 자면 안 돼. 할 일 남았단 말이야.”
“싫어. 잘 거야.”
“안 된대두. 너 자면 나 못자.”
규섭씨는 하루 사이에 자란 수염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러댔다.
“아파. 하지마.”
“잘 거야, 안 잘 거야?”
“안 잘게. 안자.”
“진짜지?”
“대신 얘기 해줘. 규섭씨는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지.”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듣기 좋았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말을 할 때마다 속에서 울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자니 이야기가 길어져도 재미있었다.
“말하다 보니 졸리네. 그만 잘까?”
“안 돼. 이젠 내가 못 재워.”
난 그의 위로 올라가 온 몸에 키스를 퍼부었다.
“첫 날 밤에 신랑을 잡네.”
그의 강한 애무가 시작되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몸 깊숙한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도 그의 가슴을 강하게 깨물었다.
“아하.”
서로의 신음 소리에 자극이 된 우리는 더욱 바쁘게 움직였고, 참을 수 없는 내가 먼저 그를 받아들였다.
kiwi (키위) - 34. 청옥이야기 - 상
kiwi - 34
[ 청옥이야기 - 상 ]
8년 전 어느 날, 토요일 오전 11시.
부산 행 비행기표를 손에 들고서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가야해, 말아야 해.’
단 한번 봤을 뿐인 남자가 어제 건네준 그 비행기 표 때문에 오전 근무는 엉망이 되어 이미 포기 상태였다. 엄밀히 따지면 두 번의 만남이었다. 회사 동료인 지연의 소개로 만난 것이 한 번, 그리고 일주일 전 두 번째 만남.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 자동차 극장에서 이루어진 키스의 추억은 아직 진하게 가슴에 남아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다짜고짜 여행이라니.
일주일 전 데이트는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자동차 극장을 나와서는 분위기 있는 식사를 하고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참 매너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집에까지 데려다 주시고 감사해요.”
“늦게 들어가게 할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운전 조심하시구요.”
“청옥씨, 잠시만요!”
규섭씨는 덮치듯 기습적인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뜨거운 숨결.
“이건 너무 빨라요.”
“때론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는 것도 건강에 좋아요.”
마음 가는 대로. 그의 말대로 내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내 손은 그의 머리와 목덜미를 잡고 있었다. 너무도 향긋한 그 남자의 향에 취해서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그 일이 있고난 일주일 동안 규섭씨에게서는 전화 한 통이 없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헤어질 때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한 것이 있을까?
그 날의 나의 행동을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지만 특별히 실수를 한 것은 없었다. 처음 며칠은 애가 타다가 금요일쯤 되어서는 바람둥이 같은 남자를 만난 것이라고 애써 위로를 하고 있었는데 금요일 퇴근길에 회사 앞에 나타난 그가 뜬금없이 비행기 표를 건네고 간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5시 부산 행 비행기 표였다.
“이게 뭐죠?”
“뜯어보세요. 오시든 안 오시든 저는 내일 부산 공항에 있을 겁니다.”
봉투를 열기 전까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규섭씨는 바쁜 듯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져 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식사를 하기 전 마음을 결정을 내리리라 했는데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표를 봤을 때는 당연히 가지 말아야지 했었다. 여행 후에 자기 멋대로 연락을 끊어버릴 수 있는 그런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그 남자와 함께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더 매력적인 일이기도 했다.
“밥 먹으러 가자.”
규섭씨를 소개해 준 지연이었다. 입사동기 지연이는 연두색이 잘 어울리는 활발한 친구였다. 항상 그늘 없이 밝게 웃는 그녀의 웃음은 나의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면을 더 부각시키는 것이어서 내가 지연이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지연이와 상의를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규섭씨는 지연의 남자친구의 친구일 뿐 본인도 그날 처음 본 사이라 했고, 소문이 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빨리 가자. 늦게 가면 엄청 기다려야 하잖아.”
“그래. 가자.”
결국 부산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점심시간 바다가 보고 싶다던 지연이의 수다가 평등을 이루던 내 저울에 돌을 하나 얹어준 셈이었다. 어차피 공짜표가 생긴 거니까 규섭씨를 만나지 않고 혼자 바다를 보고 오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구름도 별로 없는 날, 창밖의 풍경은 내가 처음 그렸던 수채 풍경화 같았다. 그림을 완성해놓고 너무 흡족해서 자랑을 하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집에는 나 혼자라 자랑을 할 수도 없었다. 저 아름다운 풍경을 감탄하며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역시 내 옆엔 아무도 없었다. 돌아올 때는? 글쎄.
나의 몸이 하늘을 날아 바다를 향해 간다. 멋진 휴가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부산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규섭씨를 만나야 하는지의 문제를 두고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우리, 우리는 전사자가 된 심정으로 시작합시다. 우리, 우리의 이야기는 마치 탱크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전쟁터에 이리저리 퍼져 나갈 겁니다]
하필 떠오르는 것이 전쟁터에 나가는 이름 모를 병사의 각오였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떠오르는 문구. 마음이 거센 바람을 맞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전사자가 된 심정으로.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규섭씨를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
핸드폰도 없던 나였기에 공항을 조금 배회하다가 만나지 못하면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 방을 잡자 마음을 먹었다.
“오셨네요. 오실 줄 알았어요.”
그 말이 쉽게 보인다는 말 같아 좋게 들리지 만은 않았다. 그만큼 마음이 움츠려 있었다.
“가방 주세요.”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어 가방을 건네주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공항 밖에 나서자 서울과는 다른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일까? 이 남자에 대한 경계심도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연하늘 남방을 편하게 입은 규섭씨를 따라 호텔로 들어섰다. 여행지라 묵을 곳이 호텔 밖에 없는 것은 알지만 두 번째 만남에 키스, 세 번째 만남에 호텔이라. 철저히 이 남자의 페이스에 말리고 있었다. 너그러워 보이는 웃음 때문일까? 투명할 정도의 피부에 회색빛이 도는 눈빛 때문에?
“먼저 씻을래?”
“예?”
“샤워하겠냐고?”
여기까지 와서 순진한 척 하는 것은 더욱 웃긴 일이었다. 그 먼 길을 이 남자 때문에 달려온 꼴이 되었으니까.
“네. 먼저 씻을께요.”
대담한 내 행동에 놀라면서 욕실로 들어섰다. 뜨거울 정도의 물에 샤워를 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우습다. 내 발로 걸어들어 온걸.
문 하나를 두고 건너편에 규섭씨가 있다는 사실에 뜨거운 물이 살을 닿고 흐를 때 전기가 오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게 된 거지? 이미 내 마음의 절반 이상은 그가 갖고 있었으니까.
내 마음을 되찾으러 온 길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얼굴에 둘만의 여행에 날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문이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곳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야기 거리가 되니까. 남들이 보면 우리가 이 곳에서 무엇을 했든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 곳에 같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가십거리는 충분하다.
“빨리 나왔네.”
“원래 빨리 씻는 편이에요.”
“이 쪽으로 와. 바다가 보여. 밤바다라 잘 보이지 않지만.”
“잠깐만요. 물기 좀 털구요.”
“빨리 와 보라구. 바다가 보고 싶지 않아?”
내게 내민 손을 잡았다. 선이 굵은 손이다.
“나도 씻고 와야겠어.”
“아니요. 이대로가 좋아요.”
그의 입술을 훔친 것은 나였다.
“마음 가는 데로. 건강하게 살기로 했어요.”
“생각보다 멋진 여자군.”
누구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손이 아직 물기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내 몸을 구석구석 훑고 지나갔다.
“속옷을 다시 입었군.”
“처음이니 상대가 벗겨주는 게 좋잖아요.”
이 남자에게 지고 싶지 않다. 어차피 만만한 상대라고 생각했겠지. 나도 만만히 보면 그 것으로 됐다.
거친 손길로 그의 남방을 벗겨냈다. 서로의 몸이 거의 드러날 때쯤 규섭씨는 침대로 가려고 했다.
“아니. 여기에서 해. 침대는 재미없어.”
끝까지 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긴다는 것은 오히려 씁쓸한 기분이었다.
규섭씨는 내 몸을 뒤로 돌려 엉덩이를 잡았고, 나는 발코니 창을 잡았다. 창 밖으로 흔들리는 바다가 보였다.
“부산에 자주 와?”
팔 베게를 하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며 물었다.
“아니.”
“근데 왜 부산에 왔어? 보통 바다 보려면 동해 쪽으로 많이 가지 않나?”
“동해 쪽은 밤늦게라도 바다가 보고 싶으면 차타고 가곤 해. 부산은 그러기에 너무 머니까 자주 오게 되지 않잖아.”
“맞다. 나 먼저 자도 돼? 대신 나 자는 거 보구 자기. 재워줬음 좋겠어.”
“아니. 아직 자면 안 돼. 할 일 남았단 말이야.”
“싫어. 잘 거야.”
“안 된대두. 너 자면 나 못자.”
규섭씨는 하루 사이에 자란 수염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러댔다.
“아파. 하지마.”
“잘 거야, 안 잘 거야?”
“안 잘게. 안자.”
“진짜지?”
“대신 얘기 해줘. 규섭씨는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지.”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듣기 좋았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말을 할 때마다 속에서 울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자니 이야기가 길어져도 재미있었다.
“말하다 보니 졸리네. 그만 잘까?”
“안 돼. 이젠 내가 못 재워.”
난 그의 위로 올라가 온 몸에 키스를 퍼부었다.
“첫 날 밤에 신랑을 잡네.”
그의 강한 애무가 시작되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몸 깊숙한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도 그의 가슴을 강하게 깨물었다.
“아하.”
서로의 신음 소리에 자극이 된 우리는 더욱 바쁘게 움직였고, 참을 수 없는 내가 먼저 그를 받아들였다.
“니가 좋아질 것 같애.”
그의 말에 나는 대답 하지 않았다.
날 좋아하게 만들겠어. 내가 없으면 못 살만큼.
너 없이 살 자신이 없어졌거든.
첫날 밤, 그 날은 집착이 시작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