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집권기간중 GNP,GDP 엄청난 상승과 동반하여 환율상승 및 역대 정권중 최고의 물가상승률
역대 정권중 무역수지 적자 최고수치 기록
군대식 정치에 의한 세부계획없이 수치적인 목표만 할당하여 엄청난 양의 악성재고 발생. 이후 전두환정권부터 90년대 후반까지 출혈수출
박정희시절; 18년간 수출 638억불에, 수입 871억불, 무역적자 233억불 전두환시절; 8억불 무역흑자 노태우시절; 132억불의 무역적자, 김영삼시절; 366억불의 무역적자, 김대중시절; 846억불의 무역흑자,
핵폭탄맞아서 미국에 GG치고 한순가에 새돼버린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올라간건 뭐냐??
2000년 아시아 개발은행 자료에 의하면 1965년부터 1980년까지 동아시아 주요국의 연평균 GNP 증가율은 싱가포르가 10.1%로 가장 높았고 대만이 9.8%, 한국 9.5% 그리고 홍콩 8.6%의 순서로 되어 있다. 같은 기간 동안 위 국가들의 실질경제성장률은 일본 10.4%이고 싱가포르는 8.5%, 대만 7.5%, 한국 6.8%, 홍콩은 6.2%로 되어 있다
사실 따지고보면 우리나라가 경제성장률이 대단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도 수출기업에 제공할 차관을 빌리기 위해 보내졌다. 정부는 당시 간호사와 광부의 봉급을 담보로 잡고 차관을 얻어왔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수출경쟁력 확보의 원천이었지만, 수출 증대의 명분 아래 국민들이 희생을 강요당한 건 ‘물가 폭등’에서도 한눈에 나타난다. 물건을 나라 밖으로 보내고 그 대신 돈을 들여오는 수출 중심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됐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통화량 증대로 이어져 물가가 계속 오른 것이다. ‘수출입국’이 노동자들의 저임금으로 가능했는데, 오히려 수출 증대가 노동자들에게는 또다시 ‘높은 물가’로 보복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1974년 24%, 1975년 25%를 기록하는 등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했다. ‘독재’뿐 아니라 ‘성장’의 뒤편에서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것이다. 저임금·저곡가에 기초한 ‘내수 억압적 불균형 산업전략’에서는 내부 소비구조가 형성되지 못함에 따라, 한국 경제는 그 뒤 대외여건이 어려워져 수출 증가율이 둔화됐을 때 내수를 확대해 불황을 넘어가기 어려워졌다 특히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기업 지급보증 등 각종 지원·특혜로 자금을 풀면서 총통화 관리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물가 폭등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그때부터 ‘투기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기업들도 대출받은 돈으로 비업무용 부동산을 사들여 앉아서 떼돈을 버는 등 투기를 부추겼다.
-그외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비리들 :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사건, 조선일보 워커힐사건, 슬롯머신사건, 삼분폭리사건, 이건희회장의 아버지되시는 이병철의 사카린밀수사건 -그외 박정희 시절 부정부폐들 :
*한국 알루미늄회사의 경우, 박정권은 일본에서 현지가격으로 7백만 달러인 공장을 1천 3백만 달러에 사도록 허용. 여기서 차액인 6백만 달러는 정치자금으로 분배됨.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의 기업체들은 히다치, 도멘, 쇼와전기 등의 큰 기업체. * 서울지하철 차량 매입사건. 일본 회사는 한국에 엔진 하나당 6,400엔에 판매. 그러나 그 엔진의 일본 현지 가격은 3천 엔. 차액은 정치자금으로 조성됨. 이때 한국정부는 186개의 엔진을 매입했으며,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 기업체들은 마루베니, 미쯔비시 상사, 이와이, 고큐 등. * 대한항공 리베이트 사건. 일본 항공기 구매시 일정비율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키로 일본 우익인물들과 배후 약정
일부 언론에 속아온 국민들에게 영웅대접을 받고 있는 박정희 시절의 문제
1. 정경 유착 : 정통성없는 정권이 버티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통해 돈만 벌려고 하는 기업체와 공생하기 시작.
오일파동으로 사양길로 접어든 중공업을 미국에서 사들여오게 된 것이 한국 중공업이었고 이후 대우,현대로 갈리게 되면서 독재자의 카리스마로 엄청난 대출 및 차관을 들여와 기업들의 자금을 축적시켜주면서 정경유착이 뿌리내리고 이후 중복투자로 기업간의 경쟁심화. 부실경영발생.=>대우의 90조부도의 시작
2. 빈부격차 발생시작 : 정경유착으로 인한 늘어난 자본으로 기업은 부동산에 투자하고 이익금은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가고 다시 새로운 프리미엄을 얹어서 돌여받는 악순환의 시작. 기업은 배불러오고 이농해온 노동자들의 임금은 착취..(당시 국가에서 정한 최저생계비 이하의 노동자 평균임금)
경제학자 최용식의 글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다. 성장률이 57년에 7.6%, 58년 5.5%, 59년 3.9% 등을 기록하여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매년 50% 안팎으로 오르던 물가도 57년부터는 한 자리수로 안정되었다.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던 60년에는 성장률이 1.2%에 그쳤지만, 4ㆍ19혁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군사정권이 선전했던 61년에는 다시 5.9%로 뛰어올랐다. 또한 물가 역시 안정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완벽하게 은폐되고 말았다.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경제학자 최용식, 《경제역적들아 들어라》의 저자
참고자료
[소비자물가 상승률(cpi)]--역대최고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77년 12.1% 78년 21%(78년에 고추 한근에 1만원이었고, 배추 한포기에 3천원---정말 대단하다) 1979년에는 18.3%(79년에는 유류가격이 59%, 전기요금이 20-30% 인상)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도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도 찬양의 대상인가?-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가 상승률]--연평균땅값상승률 33.1%, 역대최고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다. 땅값상승에 따른 불로소득은 326조원이다(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1년 예산이 200조 전후이다 그당시 국민소득 최대 1천불로쳐서 326조돈을 현재 국민소득 1만7천불로 계산하면 계산이 안나온다)
[노동시간, 산업재해, 소득상황]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즉 소득세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쫒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소득불평등도-지니계수 ]
속칭 ‘한강의 기적’ 뒤편에서 부의 불균등 분배는 박정희 시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심화)는 1965년 0.344, 1970년 0.332, 1976년 0.391, 1980년 0.389, 1993년 0.310으로 나타났다. 대개 1960∼70년대를 ‘절대 빈곤의 평등’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외채무]
세계 4위 외채국, 1978년에는 148억달러에 이르러 1973-1978년간 총 112억달러가 늘어났으며 동 기간중 연평균 26.7%의 급격한 증가율을 보였다. 1970년 당시의 외채 22억 5천만불(GNP의 28.6%)에 지나지 않던 외채잔액이 72년 36억달러, 1975년에는 84억 6천만불(GNP의 41.8%)이었으며 당시의 원리금상환액은 각각 2억6천만불, 8억3천만불이었다 76년에 105억달러 77년에 126억달라 78년에 149억달라 79년에 205억달라. 외채가 3년만에 100%상승. 결국 죽기전에 180억달러 역대최고. 그당시에 갚을 능력도 없어 나라빚내서 나라빚갚았다(참고로 지금 대외채무 2000억달러라고 찌질이신문들은 난리다 그러나 김대중정부이후 순채권국으로 돌아선 사실과 현재 대외채권이 3000억달러가 넘는다는 사실은 아무도 말하지 않으며 그나마 외채2000억달러는 환리스크 방지로 인한 것이어서 심각한 수준도 아니고 박정희시절처럼 빚갚기위해 들여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더더욱 말하지 않는다)
[경제성장률] ⊙ 단순 숫치상으로 전두환이 1위, 박정희 2위, 노태우 3위, 김대중 4위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 상대평가에서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 박정희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고, 전두환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고, 김대중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
박정희 업적
18년간 외화보유율 역대정권중 최하
박정희 집권기간중 GNP,GDP 엄청난 상승과 동반하여 환율상승 및 역대 정권중 최고의 물가상승률
역대 정권중 무역수지 적자 최고수치 기록
군대식 정치에 의한 세부계획없이 수치적인 목표만 할당하여 엄청난 양의 악성재고 발생. 이후 전두환정권부터 90년대 후반까지 출혈수출
박정희시절; 18년간 수출 638억불에, 수입 871억불, 무역적자 233억불
전두환시절; 8억불 무역흑자
노태우시절; 132억불의 무역적자,
김영삼시절; 366억불의 무역적자,
김대중시절; 846억불의 무역흑자,
핵폭탄맞아서 미국에 GG치고 한순가에 새돼버린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올라간건 뭐냐??
2000년 아시아 개발은행 자료에 의하면 1965년부터 1980년까지 동아시아 주요국의 연평균 GNP 증가율은 싱가포르가 10.1%로 가장 높았고 대만이 9.8%, 한국 9.5% 그리고 홍콩 8.6%의 순서로 되어 있다. 같은 기간 동안 위 국가들의 실질경제성장률은 일본 10.4%이고 싱가포르는 8.5%, 대만 7.5%, 한국 6.8%, 홍콩은 6.2%로 되어 있다
사실 따지고보면 우리나라가 경제성장률이 대단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도 수출기업에 제공할 차관을 빌리기 위해 보내졌다. 정부는 당시 간호사와 광부의 봉급을 담보로 잡고 차관을 얻어왔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수출경쟁력 확보의 원천이었지만, 수출 증대의 명분 아래 국민들이 희생을 강요당한 건 ‘물가 폭등’에서도 한눈에 나타난다. 물건을 나라 밖으로 보내고 그 대신 돈을 들여오는 수출 중심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됐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통화량 증대로 이어져 물가가 계속 오른 것이다.
‘수출입국’이 노동자들의 저임금으로 가능했는데, 오히려 수출 증대가 노동자들에게는 또다시 ‘높은 물가’로 보복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1974년 24%, 1975년 25%를 기록하는 등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했다. ‘독재’뿐 아니라 ‘성장’의 뒤편에서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것이다.
저임금·저곡가에 기초한 ‘내수 억압적 불균형 산업전략’에서는 내부 소비구조가 형성되지 못함에 따라, 한국 경제는 그 뒤 대외여건이 어려워져 수출 증가율이 둔화됐을 때 내수를 확대해 불황을 넘어가기 어려워졌다 특히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기업 지급보증 등 각종 지원·특혜로 자금을 풀면서 총통화 관리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물가 폭등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그때부터 ‘투기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기업들도 대출받은 돈으로 비업무용 부동산을 사들여 앉아서 떼돈을 버는 등 투기를 부추겼다.
-그외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비리들 :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사건, 조선일보 워커힐사건, 슬롯머신사건, 삼분폭리사건, 이건희회장의 아버지되시는 이병철의 사카린밀수사건
-그외 박정희 시절 부정부폐들 :
*한국 알루미늄회사의 경우, 박정권은 일본에서 현지가격으로 7백만 달러인 공장을 1천 3백만 달러에 사도록 허용. 여기서 차액인 6백만 달러는 정치자금으로 분배됨.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의 기업체들은 히다치, 도멘, 쇼와전기 등의 큰 기업체.
* 서울지하철 차량 매입사건. 일본 회사는 한국에 엔진 하나당 6,400엔에 판매. 그러나 그 엔진의 일본 현지 가격은 3천 엔. 차액은 정치자금으로 조성됨. 이때 한국정부는 186개의 엔진을 매입했으며,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 기업체들은 마루베니, 미쯔비시 상사, 이와이, 고큐 등.
* 대한항공 리베이트 사건. 일본 항공기 구매시 일정비율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키로 일본 우익인물들과 배후 약정
일부 언론에 속아온 국민들에게 영웅대접을 받고 있는 박정희 시절의 문제
1. 정경 유착 : 정통성없는 정권이 버티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통해 돈만 벌려고 하는 기업체와 공생하기 시작.
오일파동으로 사양길로 접어든 중공업을 미국에서 사들여오게 된 것이 한국 중공업이었고 이후 대우,현대로 갈리게 되면서 독재자의 카리스마로 엄청난 대출 및 차관을 들여와 기업들의 자금을 축적시켜주면서 정경유착이 뿌리내리고 이후 중복투자로 기업간의 경쟁심화. 부실경영발생.=>대우의 90조부도의 시작
2. 빈부격차 발생시작 : 정경유착으로 인한 늘어난 자본으로 기업은 부동산에 투자하고 이익금은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가고 다시 새로운 프리미엄을 얹어서 돌여받는 악순환의 시작. 기업은 배불러오고 이농해온 노동자들의 임금은 착취..(당시 국가에서 정한 최저생계비 이하의 노동자 평균임금)
경제학자 최용식의 글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다. 성장률이 57년에 7.6%, 58년 5.5%, 59년 3.9% 등을 기록하여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매년 50% 안팎으로 오르던 물가도 57년부터는 한 자리수로 안정되었다.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던 60년에는 성장률이 1.2%에 그쳤지만, 4ㆍ19혁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군사정권이 선전했던 61년에는 다시 5.9%로 뛰어올랐다. 또한 물가 역시 안정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완벽하게 은폐되고 말았다.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경제학자 최용식, 《경제역적들아 들어라》의 저자
참고자료
[소비자물가 상승률(cpi)]--역대최고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77년 12.1% 78년 21%(78년에 고추 한근에 1만원이었고, 배추 한포기에 3천원---정말 대단하다) 1979년에는 18.3%(79년에는 유류가격이 59%, 전기요금이 20-30% 인상)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도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도 찬양의 대상인가?-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가 상승률]--연평균땅값상승률 33.1%, 역대최고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다. 땅값상승에 따른 불로소득은 326조원이다(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1년 예산이 200조 전후이다 그당시 국민소득 최대 1천불로쳐서 326조돈을 현재 국민소득 1만7천불로 계산하면 계산이 안나온다)
[노동시간, 산업재해, 소득상황]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즉 소득세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쫒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소득불평등도-지니계수 ]
속칭 ‘한강의 기적’ 뒤편에서 부의 불균등 분배는 박정희 시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심화)는 1965년 0.344, 1970년 0.332, 1976년 0.391, 1980년 0.389, 1993년 0.310으로 나타났다. 대개 1960∼70년대를 ‘절대 빈곤의 평등’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외채무]
세계 4위 외채국, 1978년에는 148억달러에 이르러 1973-1978년간 총 112억달러가 늘어났으며 동 기간중 연평균 26.7%의 급격한 증가율을 보였다. 1970년 당시의 외채 22억 5천만불(GNP의 28.6%)에 지나지 않던 외채잔액이 72년 36억달러, 1975년에는 84억 6천만불(GNP의 41.8%)이었으며 당시의 원리금상환액은 각각 2억6천만불, 8억3천만불이었다 76년에 105억달러 77년에 126억달라 78년에 149억달라 79년에 205억달라. 외채가 3년만에 100%상승. 결국 죽기전에 180억달러 역대최고. 그당시에 갚을 능력도 없어 나라빚내서 나라빚갚았다(참고로 지금 대외채무 2000억달러라고 찌질이신문들은 난리다 그러나 김대중정부이후 순채권국으로 돌아선 사실과 현재 대외채권이 3000억달러가 넘는다는 사실은 아무도 말하지 않으며 그나마 외채2000억달러는 환리스크 방지로 인한 것이어서 심각한 수준도 아니고 박정희시절처럼 빚갚기위해 들여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더더욱 말하지 않는다)
[설비투자비율, 소득분배율, 실업률]
기업의 설비투자비율 11.7% 역대4위
노동소득분배율 43.7% 역대최하위
79년 실업률 17.9% 역대최고
[경제성장률]
⊙ 단순 숫치상으로 전두환이 1위, 박정희 2위, 노태우 3위, 김대중 4위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 상대평가에서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
박정희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고,
전두환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고,
김대중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
ID : weds21 님 허락없이 글 인용하여 죄송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