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남자 유키*** <#1. 가정교사구함!>

길스진200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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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가정교사 구함! >>

 

 

 

종이상자 속에 제 물건들을 챙겨넣던 김 지나는 문득 상자가 너무 크다는 생각을 했다.

 

교사수첩, 굴러다니는 볼펜 몇 자루와 쥐가 파먹은 것 같은 지우개, 디스켓과 CD, 세면도구와 만원짜리 머그잔.

 

모두 다 집어넣어도 종이상자 반도 채우지 못했다.  공허한 자신의 마음처럼 상자 속도 텅비어 보였다.

 

거금 만원을 주고 산 머그잔이 깨지지 않도록 수건에 싸서 넣던 그녀는 자신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잘난 도시 교사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김 지나를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촌지>나 밝히는 교사를 마치 세상의 악으로 여기며 교사로서의 무책임함을 나무라던 지나가 그만 둔다는 사실에 그들은 모두 희희낙락했다.

 

겉으로는 그 기분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춤을 추고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김 선생!"

 

지나는 자신을 부르는 교감을 쳐다봤다.

 

대머리에 배까지 불룩한 교감은 교사들을 선동해서 돈을 받아쳐먹는 불여우같은 영감이었다.

 

그들은 <촌지>에 대해 정당하다고 여겼고 오히려 학부모들이 억지로 밀어넣어줘서 그들의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다며 얼토당토 않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교장선생님께서 찾으시네."

 

"예."

 

그러나 지나는 일부러 짐을 다 챙기고나서 교장을 만나기로 했다.  물론 그녀는 교장과는 감정이 없었다.

 

교장은 나이에 비해서 의외로 똑똑했고 당찬 여자였다.

 

자신이 이 초등학교 교장이 된 것을 불평하는 교사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특히나 불여우 같은 교감이 항상 자리를 노리고 있고 학교 분위기를 흐리게 만드는 선동자란 것도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힘이 부족했다.  여자라는 약점이 있는데다 당찬 여자여도 그녀를 받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안타깝긴 하지만 지나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가슴이 아팠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왕따나 차별이 있고, 불평등한 교육현실에 자신이 쓸려가는 것만 같아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참을 수 없는 감정에 그녀는 학교를 그만 두기로 했다.

 

6개월 동안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오래 머물렀다는 것이 대견할 정도였다.

 

상자를 들고 교장실로 향했다.  학생들은 모두 귀가를 한 상태라 쫓겨나다시피 처량한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교장실 입구에 상자를 놔두고 그녀는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또렷한 억양과 약간 날카로운 목소리의 여자 교장은 변함없이 차분하고 단정한 외모를 가졌다.

 

희끗희끗한 앞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하나로 묶었고 여느때처럼 목부분에 말아올린 상태였다.

 

"어서 와요, 김 선생.  차 한잔 할래요?"

 

"아, 네.  제가 준비할게요, 교장선생님."

 

김 지나는 응접실로 향했다.  이곳을 떠나기 전 가장 가까웠던 교장에게 마지막으로 차를 대접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6개월 동안 제법 가까웠고, 서로를 의지하기도 했다.

 

지나는 부모님 나이보다 조금 더 많은 교장에게 조언을 많이 들었다.

 

"시원한 레몬티가 있더군요."

 

그녀는 테이블에 두 사람이 마실 레몬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요즘에 당뇨검사를 하는 중이거든요."

 

"그러세요?  당뇨는 초반에 조심하셔야해요.  저희 어머니가 당뇨가 좀 있으시거든요."

 

"음... 그래요?  음, 맛있군!"

 

교장은 에어컨 대신에 선풍기를 사용했다.  다른 교사들처럼 에어컨을 마구 틀어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장실 안에서 느껴지는 후덥지근한 기운을 이 시원한 레몬티로 몰아내고 싶었다.

 

"김 선생."

 

"네, 교장선생님."

 

지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교장의 목소리는 그다지 힘이 없었고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지나는 괜히 죄책감을 느꼈다.

 

"이곳을 나가면 뭘 할 거죠?  다른 곳을 추천해주겠다고 해도 거절을 하고...  무슨 계획이 따로 있어요?"

 

"예?  아, 네."

 

지나는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린 혀를 잘라내고 싶었다.  계획은 무슨...  생각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감정에 선생질을 그만 두겠다며 사표를 써버렸고, 다가올 뒷일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고맙게도 염려해주는 교장 앞에서 '예.  생각해둔 거 전혀 없습니다, 교장선생님.

 

그만 둔다고 해놓고선 막상 살 길이 막막하네요.' 라고 어떻게 얘기한단 말인가.

 

어차피 각 학교의 반 수도 줄고 반학생 수도 예전과는 다르게 줄은 상태인데 교사들만 많이 있으면 뭘 어쩌겠는가.

 

얄미운 교감 말이 초등학교에 들어올 교사들이 줄을 섰다질 않는가. 

 

그런 와중에 그녀가 그만 둬버렸으니... 기다리던 다른 교사는 얼씨구나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자존심 문제도 있지만...

 

사실 6개월 동안 있으면서 겪었던 일을 떠올리자면 이골이 나서 서울 학교라면 끔찍하게도 싫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교장은 그녀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교장은 수첩 사이에 끼워 둔 하얀 색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지나가 제일 싫어하는 <촌지>를 연상케하는 봉투였다.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는 지나를 보던 교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꺼내 봐요."

 

지나는 봉투를 꺼내 속에 든 종이를 꺼냈다.  신문 광고를 복사한 종이였다.

 

"가정교사 구함?"

 

무슨 뜻으로 이런 것을 주느냐며 교장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그 사람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에요.  가정교사를 구하는 줄은 몰랐는데... 그저께 신문 보니까 있더군요.  혹시나..."

 

"교장선생님.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나는 교장의 말을 무례하게 잘랐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했다.

 

"제 힘든 걸 아시니까 이렇게 염려해주시는 건 고맙습니다.  하지만... 싫습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김 선생.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김 선생이 내 딸 같이 여겨져서 도와주고싶었던 그랬던 거에요.

 

내가 생각할 땐... 지금 김 선생은 다른 학교에 가는 것을 거절한 상태야.  도시 학교가 싫은 거겠지.

 

그리고 김 선생의 경제사정을 내가 잘 아는데... 수입을 거의 부모님께 보낸다면서?"

 

"..."

 

교장은 조금 남은 레몬티를 마저 마시고나서 다시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정 안 되겠다싶으면... 여기로 연락해봐요.

 

월급은... 괜찮을 거야.  거기다 숙식까지 해결한다고 되어있잖아."

 

김 지나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A4용지로 떨어트렸다.

 

 

 

1. 초등학교 3학년의 가정교사로 품행이 방정하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

 

2. 교사경험이 풍부한 사람. (연령은 27세부터 45세까지 제한)

 

3. 숙식이 가능한 사람이어야 함.

 

4. 아이의 학교 교육 외에 예의범절과 감성 교육도 필요! (가정교육과 동일)

 

5. 급여는 당일 면접 시에 의논해서 결정.

 

6. 이.사.주, 자기소개서, 대학졸업증명서. (그 외 소지한 자격증 사본 첨부)

 

 

 

김 지나는 마지막으로 전화번호를 읽었다.  이곳에 갈 것도 아닌데 굳이 신경써서 전화번호까지 볼 필요는 없었다.

 

"서울 같은 경우는 직장 구하기도 힘들지.  김 선생도 예전에 서울에서 살아 봐서 잘 알잖아요."

 

"네... 어쨌든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교장에게 봉투를 되돌려 준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무시하는 것 같아 핸드백 안에 넣었다.

 

그리고 너무 오래 앉아있는 것도 다른 교사에게 신경쓰일 것 같아 자리에 일어났다.

 

교장은 건물 앞까지 지나를 배웅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잘 지내요.  혹시나 여유가 되면 뒤에 연락해요.  식사나 같이 하게..."

 

"아,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교장선생님.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항상 건강하시구요."

 

"고마워요."

 

"연락드릴게요."

 

"그래요."

 

손을 흔드는 교장을 뒤로 돌아보며 답례로 손을 흔들어주던 그녀는 천천히 학교건물을 쳐다봤다.

 

이곳에 처음 들어설 때만해도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처럼 순수하고 열정에 가득차 있었다.

 

지금은 이미 폐교가 되고 사라졌을 예전의 시골 학교... 처음 교사가 되어 열의로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 수는 급격하게 줄었고 전교 10명 밖에 되지 않는 학생들과 보냈던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그 귀여운 아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났고 그녀도 서울에서...

 

바로 처음 도시의 초등학교 이곳에서 근무하게 된 그녀는 새로운 각오였다.

 

그때처럼만 열심히 하자, 그때처럼만 아이들을 사랑하자... 그랬건만...

 

시골학교 아이들처럼 순수하리라 여겼던 도시의 아이들은 그녀의 기대와 열의를 하루만에 꺾어버렸다.

 

순수는 커녕... 같은 친구끼도 잔인하게 무시하고 폭력을 일삼기는 예사였고,

 

오로지 좋은 학교에 가야하고 오로지 돈이 뭐든 것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을 그들의 정신세계에 집어넣고 사는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좋은 학교로 가기 위해 <촌지>를 일삼기도 했다.

 

처음 봤던 <촌지>.  지나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돈 많은 어느 학부모가 수업 후에 찾아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뭘까싶어 꺼내 본 그녀는 만원짜리가 아니라 동그라미가 여러개가 보였던 수표 2장을 발견했다.

 

말로만 들어왔던... 아니 상상도 못했던 <촌지>였다.

 

당연히 그녀는 거절했고 그녀의 거절에 인상을 쓰는 학부모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교감의 부르심에 달려갔던 지나는 이따라 날아오는 말도 안 되는 모욕을 들어야 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아무것도 모르는 선생이 무슨 교육이냐며... 시대에 걸맞게 아이들을 가르쳐야지...

 

널리고 널린 게 선생들인데 고작 시골에서 몇명 가르쳤던 촌선생을 위해 돈 낭비를 해야되겠냐는 둥...

 

그래도 참자며 참을 인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리며 오기를 부리던 그녀도 결국 6개월 만에 인내심의 한계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현실은 그녀의 생각과 마음가짐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곳은 그녀에게 현실이 무엇이란 것과 한계란 어떨 때 느끼는 것인가를 가르쳐주었다.

 

경제사정이 안 되는 아이들은 있는 집 아이들에게 밀려나야 했고 부당한 차별을 받아야 했다. 

 

그런 불쌍한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서라도 버텨야했지만 그녀는 그러기엔 너무 순수했다.

 

김 지나는 자신이 이곳에서 나가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치운 것 같아 후련해하는 교사들과 학부모들보단

 

그들에 의해 부당하게 피해를 받아야할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 모진 상처가 될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 아이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했다.  결국 버티지도 못하고 쫓겨나는구나... 불쌍한 선생.

 

그녀는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대문을 통과해 큰 길까지 걸어나갔다.

 

더운 6월 11일이었다.

 

한여름이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날씨 속에 지나의 체온은 점점 올라갔다.

 

아스팔트에서 느껴지는 과감하도고 독한 열기가 콧속으로 들어오자, 숨이 턱 막혔다.

 

커다란 라면종이상자를 들고 버스를 타야 한다... 아주 가끔은 예외가 있어야 할 테고 가끔은 큰 돈도 쓸 줄 알아야 했다.

 

지나는 도로변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잽싸게 잡아 탔다.  이내 이마에 흘렀던 땀은 택시 안의 냉기에 금새 식었다.

 

'비싼 돈 주고 택시타는 보람이 있군!'

 

 

 

 

1달 후.  지나는 점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 시작했다.

 

그냥 더럽고 치사해도 그 학교에 버틸 걸 하는 생각이 수없이 밀려왔다.

 

매일같이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생활정보지를 들고 집으로 왔지만 결국 그 신문들은 좁은 집안 곳곳에 어지러져 있었다.

 

직장이나 구한다고 부지런떨던 그녀도 어느새 노숙자같은 행세였다.

 

욕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던 지나는 자신의 몰골을 보고 기겁했다.  통통하게 쪄있던 볼살도 어느새 홀쪽해있었다.

 

그 놈의 직장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았다.  이러다간 손가락 빨게 생겼다.

 

"보리야.  우리 큰일났다.  이제 어떡허냐?"

 

이름이 보리인 진돗개.  지나는 녀석을 자식처럼 여기고 있었다.

 

6개월 전 시골학교에 있을 때 동네아저씨가 서울로 떠나는 그녀에게 준 선물이었다.

 

진돗개 새끼 중에서 가장 튼실하고 영리하다며 아낌 없이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서울에 혼자 살면서 시골향취를 그리워하는 지나에겐 한 살이 된 보리는 둘도 없는 벗이자 가족이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를 피해갈 순 없었다.

 

보리의 사료값만해도 지금의 제정상태로는 부담이었고 더 큰 문제는 집세가 두 달이나 밀렸다는 것이다.

 

개를 집 안에서 키우는 것을 몹시 불만스러워하는 집주인은 두달이나 참아준 것도 많이 참아준 거라고 했다.

 

밀린 두달치의 집세와 이번 달 집세까지 이 달 안으로 내야 했다.  그리고 당장에 집을 비워줘야 하는 사태였다.

 

지나는 두 달 전에 가게때문에 돈을 급히 구하던 부모님에게 모아두었던 돈을 모조리 주었던 것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통장에 있는 돈이라고는 50만원 정도 밖에 안 되었다.  이걸 가지고는 한달 집세밖에 못 낸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선풍기 앞에 주저앉아 있자, 보리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핥았다.

 

"힘들 때마다 네가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넌 모를 거다.  고마워, 보리야."

 

보리의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이번에는 일반 신문을 뒤적거렸다.

 

그러던 그녀는 교장이 준 종이의 내용과 똑같은 광고문구를 발견했다.  알고보니 똑같은 사람이 낸 광고였다.

 

'이 사람, 이런데다 이렇게 크게 광고내면 돈이 많이 들텐데... 어지간히도 돈이 많은가보다, 그치?"

 

보리는 그 말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한 번 짖었다.  그리고 신문을 물고는 꼬리를 흔들어댔다. 

 

"왜 그래?  보리!  그거 먹으면 안 돼!  아무리 군것질이 하고싶어도 종이를 먹을 순 없어!"

 

하지만 보리는 계속 신문을 물고는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저 녀석이 말만 할 줄 안다면...

 

'설마... 그런 생각까지 하려고?'

 

지나는 녀석이 신문광고를 읽고 이해까지 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녀석은 놀랍게도 돈이란 걸 알았다.

 

돈 많다는 얘기에 기껏 동물이 귀가 솔깃해졌단 말인가.  그래서 가정교사를 구하는 이집에 가란 말야?

 

"보리야..."

 

보리의 검고 동그란 눈동자는 애타게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주인의 마음이 결정을 못 내리고있자, 보리는 신문을 문 채로 현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보리야!  너 어디 가?  서, 설마... 지금... 지금 나보고 가자는 건 아니지?

 

이것봐.  아, 저기... 난 아직 거기 간다고 결정하지 않았어!"

 

저녀석의 단점이 있다면... 바로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심부름도 하고 주인의 기분을 달래줄 정도로 머리가 기가막히게 좋은데... 쓸데없이 고집을 잘 피운다는 것이다.

 

그땐 먹이로 달래도 듣지 않았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이끌려 면접보러 가야하다니...

 

"나 참!  좋아!  그래, 가자.  가자고!  됐니?"

 

지나는 혹시 그곳에 벌써 가정교사를 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걸었다.

 

"오늘 사람을 구했을 수도 있잖아."

 

보리의 갸우뚱한 표정에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녀석은 주인이 백조로 있는 것이 불쌍한 모양이었다.

 

신호음이 길게 세번 정도 울렸다.  그리고 이어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는 중저음의 딱딱하면서도 차가운 음성이었다.  목소리에서부터 힘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나는 심장이 뛸 정도로 긴장이 되었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저기... 신문에...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몇 살이요?"

 

대뜸 남의 나이를 묻는 말에 지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누군지도 밝히지 않는 것은 그냥 넘어가줄 수 있지만 모르는 사람한테 나이를 묻다니...

 

"몇 살이요?"

 

그의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에는 두번 질문하는 것이 매우 짜증난다는 투였다.

 

"아, 저기... 전화로 면접보시는 건가요?"

 

"아니오.  신문을 보고도 무턱대고 들이닥치는 사람들을 만나고싶지 않아서요."

 

아, 네...  저기... 스물 여덟인데요."

 

"..."

 

아주 잠깐 동안 그는 대답도 질문도 없었다.

 

그 짧은 침묵에 그녀는 뚱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보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그의 말문이 열렸다.  그는 오늘 중으로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지금 가도 되나요?"

 

"그럼, 이따 봅시다."

 

시작할 때부터 통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건방졌다.  역시 가진 사람의 여유겠지.  유세떨기는...

 

"보리야.  그럼 갔다올게."

 

시원한 하늘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친구에게 선물받은 흰색 토트백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그러나 보리가 꼬리를 흔들며 머리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지나는 얼른 녀석의 코를 눌러 안으로 밀었다.

 

"안 돼!  차도 없는데 이 더운 날씨에 어딜 따라간다고..."

 

보리는 애처로운 눈길을 던지며 꼬리를 흔들었다.  녀석의 고집이 또 시작되는 것이다.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 가서 그 사람들한테 좋은 인상을 줘야 한다고.

 

물론 동물을 싫어한다면 나도 무조건 싫어.  그 집 남자나 마누라가 좋은 사람이길 기다리면서 기도나 해."

 

지나는 문을 열기 전에 녀석의 머리를 다시한번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달랬다.

 

어쩐 일인지 녀석은 꼬리를 흔들며 더이상의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우리 애기 역시 착하네?  엄마가 갔다오면 맛있는 과자 줄게.  알았지?  그러니까 얌전하게 기다려."

 

현관 문을 잠그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나온 그녀는 마지막으로 대문까지 잠갔다.

 

그렇지 않으면 똑똑한 보리가 문을 열고나오기 때문이었다.

 

작은 개라면 길거리에 돌아다녀도 덜 위험하겠지만 보리처럼 덩치 큰 녀석이라면 동네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버스에 올라탄 지나는 지나가는 건물들을 멍하니 쳐다보며 생각했다.

 

잠시 후면 만날 그곳 사람들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야 했고, 돈은 조금 적게 받더라도...

 

물론 많이 벌면 좋기야하지만... 보리와 같이 있도록 허락을 받아야 했다.

 

거절당한다면 또 정보지나 뒤적거리며 하루하루를 주인에게 시달려야 할 것이다.

 

 

 

 

초인종이 울렸다.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그는 대문 앞에 서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뒷모습이라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리 볼 수가 없었다.

 

인상이 너무 차갑거나 아이가 싫어할 정도로 못 생겼다면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는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가 들어온다면 기다리고 있을 가정부가 알아서 차를 대접할 것이다.

 

그는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여자를 직접 만나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의 가정교사를 고용했던 그는 한번도 그들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스피커에서 나이든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60이 훨씬 넘은 어머니와도 같은 가정부였다.

 

"오셨습니다."

 

"알았어요."

 

모니터 화면이 바뀌었다.  그리고 어떤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명히 그녀의 입으로 스물여덟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여자의 얼굴은 훨씬 어려보였다.

 

여자는 나이를 속인 것이 틀림없었다.  통화할 때만해도 순진무구하게 들렸던 어리숙한 목소리치고는 뻔한 잔꾀를 부리려는 것이다.

 

그는 작은 마이크에 대고 딱딱하게 말했다.

 

"가지고 온 서류는 가정부에게 줘요."

 

여자는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면접을 보러오기 위해 온 사람들의 모습과도 똑같았다.  하지만 당황한 그녀의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잡았다.

 

"어디서 나는 소리죠?"

 

가정부의 팔이 뻗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 바로 앞에 놓여있는 텔레비전 위쪽을 가리켰다.

 

카메라가 있는 것을 본 그녀의 얼굴은 더욱 놀라 돌처럼 굳어버렸다.

 

"저걸 보란 거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과 두려움으로 날카로웠다.

 

 

 

 

김 지나는 가정부란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다시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 희한한 면접이었다.  적어도 면접을 보겠다면 서로 얼굴을 마주한 채로 대화를 해야하질 않는가.

 

이곳 사람의 얼굴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녀의 얼굴만 보고 면접을 보다니 말이 안 된다.

 

"의외로 어리게 보이는군."

 

지나는 다시 놀란 얼굴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카메라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런 소릴 좀 들어요."

 

"이름이 김 지나?  독특한 이름이군.  한달 전에 초등학교 교사였다?  왜 그만 두었소?"

 

"그런 것까지... 얘기해야 하나요?"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기억보다 결코 기억하고싶지 않는 일들이 많았던 학교였다.

 

한심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교육열기를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말한다니 부끄러웠다.

 

"당연한 거 아니오?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아야지.  사고를 치고 나온 교사인지 어떻게 알고 아들을 맡기지?"

 

"사고를 치다뇨?  절대 그런 거 없어요!  전 단지..."

 

지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입술을 깨물던 그녀는 손가락을 불안하게 매만지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전 단지... 아이들을 좋아했을 뿐이에요."

 

"아이들을 좋아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교사는 그런 건가 봐요.  특히 도시 학교는... 아이들만 좋아해서는 교사가 될 수 없나봐요."

 

돈도 좋아해야죠.  지나는 그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침과 함께 간신히 삼켰다.

 

"부모님은 경북 영주에 계신다고 했소?  그리고 대학1학년 남동생이 하나 있고."

 

"네. 그 애는 어릴적부터 변호사가 꿈이었어요.  그래서 법대를 들어갔어요.  그런데..."

 

지나는 얼른 말을 멈췄다.  주제넘게 묻지도 않은 말을 떠벌린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 주인은 말 많은 여자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일 것이다.

 

"..."

 

"죄송해요."

 

지나는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걸로 됐소.  돌아가서 기다려요."

 

"예?  아, 예..."

 

억지로 면접을 봐줬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나는 고급소파에서 일어나며 카메라를 계속 의식했다.

 

왠지 그가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지나는 손님이 오시는 것 같아 얼른 나가려고 했지만 현관문 앞에서 왠 꼬마와 마주쳤다.

 

바로 이 집 아이인 것 같았다.  아이는 낯선 여자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했지만 지나의 눈에 비친 아이의 얼굴은 어두었고 아이답지 않게 세상을 다 산 듯... 그늘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나의 상냥한 인사에 아이는 단정한 옷차림답게 간결하고 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세요?"

 

지나는 아이의 키에 맞춰 쪼그리고 앉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뇨.  아직 결정된 게 아니에요.  집에서 연락오길 기다려야 해요.  이름이 뭐에요?"

 

"레이요.  사토 레이."

 

"???"

 

지나는 멍한 얼굴로 아이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특이하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그런데 이 꼬마의 이름은 더 특이했다.  마치 외국이름 같았다.  일본 이름인가?

 

아니면 너무나도 좋아하는 만화 속 주인공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진짜 이름이 뭐냐고?"

 

"그게 제 이름이에요."

 

그래.  계속 아니라고 주장하며 따져대다간 아이가 놀라 울지도 모른다.  지나는 웃으며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사토 레미."

 

"레이."

 

"아, 레이.  오우, 미안!"

 

"아줌마 이름은 뭐에요?"

 

아... 줌....마?  이런!  아직 가정교사로 결정된 게 아니라고 했더니, 아이는 그녀에게 극한 단어를 썼다.

 

그녀가 교사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그녀에게 누나나 언니라고 불렀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줌마의 기준은 무조건 결혼해서 아이가 있어야 했다.

 

그녀는 돌처럼 굳은 얼굴에 간신히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내 이름?  음... 만약 너랑 두번째 만나게 되는 날, 그때 말해줄게요."

 

"두번째 만나는 날?"

 

"네.  오늘 우린 처음 만났잖아요.  그쵸?"

 

어느새 아이의 눈가에 반짝이는 미소가 담겼다.  지나는 녀석의 짧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레이는 이마에 맺힌 땀을 슬쩍 닦으며 걸어가는 지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낯선 여자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는 얼른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지나는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보리에게 약속대로 녀석이 좋아하는 건빵을 그릇에 담아 주었다.

 

녀석은 모든 과자를 먹긴하지만 특히 좋아하는 것은 건빵이었다.

 

시골에 있을 때부터 먹던 과자라 사료 외에 하루에 한번씩 내줘야 했다.

 

혹시나 깜빡 잊기라도 하면 건빵이 있는 곳을 찾아내 달라고 짖어댔다.

 

"세상에서 맘 편한 녀석은 너밖에 없을 거다."

 

보리는 그릇에 머리를 박고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먹어.  무슨 힘든 일이 있어도 보리 널 포기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정 안 되면... 시골에 가지 뭐.  거긴... 집이 오래되도 대신에 마당이 넓어."

 

면접을 보러갔던 그 집에서 연락이 온 것은 그날 저녁 8시였다.

 

"여보세요?"

 

"내일부터 시작할 수 있겠소?"

 

처음 통화했을 때처럼 신분을 먼저 밝히지 않고 대뜸 본론부터 말하는 이 남자.

 

지나는 어리둥절해 얼른 대답을 못 했다.  내일부터 시작할 수 있냐는 말이...

 

"내일 짐을 옮겨오란 뜻이요."

 

"예-에?  저, 정말이세요?"

 

"그래요.  내일 오전 9시에 차를 보낼겠소."

 

"자, 잠깐만요!"

 

지나는 그가 전화를 끊기라도 할까 봐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뭐요?"

 

"그건 좀... 곤란해요."

 

"..."

 

"아니, 그게... 일하기가 곤란하단 게 아니라... 내일부터 당장 그곳에 가기 힘들다고요.

 

실은... 그게... 아직..."

 

"무슨 문제라도 있소?"

 

"예?  아, 저기... 그게..."

 

그에게 석달 집세를 못 내고 무턱대고 나갈 수는 없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돈 한푼 없어서 길 바닥에 나앉게 생겼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해결할 일이 좀 있거든요.  한... 일주일 정도 시간을 좀..."

 

"안 되오."

 

"..."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너무 매정하게 안 된다는 말로 거절해버리다니.  지나는 울상을 지었다.

 

그렇다고 구한 직장을 집세때문에 그만둔다고 할 수도 없질 않는가.

 

"이틀.  이틀 시간을 주겠소."

 

"이틀이라구요?"

 

"싫으면 없었던 걸로 하지."

 

그는 급한 것이 없다는 의미였다.  전혀 매달리거나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지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틀 안으로 어떻게 돈을 구한다?  통장에 있는 돈 긁어내고... 나머지는 친구에게 빌리는 수밖에.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는 짓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나, 지나야."

 

"어떻게 된 거야?  요즘 도통 연락도 없고!  너 죽었는 줄 알았잖아!"

 

지나는 핸드폰을 살짝 귀에서 뗐다.  고막이 터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현재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서 동인은 그녀와 대학동문이었고 같은 과였다.

 

그러나 그는 교사의 꿈을 접어야 했고, 대신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싶어 술집을 차렸다. 

 

"미안해...  저기, 너 내일 시간 되니?"

 

"나야 널 위한 시간은 남아돈다.  몇 시?"

 

"내가 내일 그 쪽으로 갈게."

 

"... 너 무슨 일 있냐?"

 

지나는 그가 눈치가 보통이 아니란 걸 알고 서둘러 아니라고 했다.  단지 부탁이 있어서라도 말했다.

 

하지만 그 부탁이란 것이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동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내일 봐."

 

김 지나는 작은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 6개월 전 중고로 구입한 19인치 텔레비전텔레비전을 켰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길래 주말마다 하는 오락프로그램이 하는지 모르겠다.

 

조금 전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껴안고있는 사람처럼 울상이더니 지금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우스개소리에 배를 잡고 웃어댔다.

 

보리는 어느새 그녀의 발 위에 배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녀석이 좋아하는 것은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얌전하게 주인이 보고싶어하는 오락프로그램을 같이 봤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