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소식, 컴퓨터 고쳤습니다 (아싸라비아~~ ^0^) MS사 기술지원팀에서 여러 날, 여러 사람들이, 여러 상황을 체크해보더니... 소스를 고치려면 직접 컴퓨터를 봐야한다고 해서... 그 곳 사무실에 들고 갔었더랬습니다. 결국... 데이타를 날리지 않도록 배려해주면서, 윈도우를 다시 깔아주더군요. -.-;;;;; 그래도 끝까지 책임감있게 최선을 다해 노력해 준 기술지원팀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
두번째 소식, 네이트 말고 다른 게시판을 이리저리 찾다가... 한 군데 더 둥지를 틀었습니다. 출판할 수 있는지 원고를 보냈더니, 그 출판사가 운영하는 게시판에 올려보라더군요. 글 형식이 생소하니 우선 네티즌의 반응을 보자- 는 출판사의 소심한 반응에 무척 실망했지만... (그래도 네이트의 님들이 글 형식에 대한 의견을 써주신 리플들이 있어서... 의기소침해있던 저, 다시 용기 얻었답니다.) 첫 회부터 네이트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전문적이고 날카로운 지적들이 올라왔기에... 계속 올려서 조언을 받으려합니다. 그 곳은 <막 흡혈귀 마녀와 동침을 I>부터 연재 시작됩니다. http://e-novelist.com/index.htm 의 연재소설 게시판입니다.
세번째 소식, 제가 또 다시 갈림길에 섰습니다. 괴로워 죽을 것 같습니다. 원인은... 그저 돈이 웬수입니다 -.-;;;; 지난 번에 쌀 사려 통장을 조회해봤더니, 한달치 생활비밖에 안남았더군요. 1년동안 알바해서 번 것, 생활비만 지출하고 나머지... 머리핀 하나 안사고 꼬박꼬박 모은 자금이, 백조 생활 반 년도 채 못버티네요...에효- 그 알바하기 전에도, 이런 갈림길에 섰더랬습니다. 그 땐 첨에 호기있게 "굶더라도 글 쓸 거다!!! 아니면 내 인생 여기서 쫑내자!!" 이랬는데, 일주일 넘기고 항복하고 말았죠 T_T (사흘 굶으면 남의 담도 넘는다는 소리- 뼈저리게 알겠더군요) 결국 셀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날리고, 기억이 헷갈릴만큼 수도없이 거절당하고... 간신히 알바를 구해서 1년을 일했는데... 그 때 미완성이었던 다른 스토리... 아직도 미완성입니다.(이것도 소설로도 써서 연재하고 싶었는데...) 여기 게시판에서 보면, 학업하면서, 직장다니시면서 꿋꿋하게 글 잘 쓰시는 님들 많으신데... 부끄럽게도 저는 체력딸려서 하나밖에 올인을 못합니다 -_-;;; 지난 1년간 일하고 돌아오면 힘들어서 그저 잠만 퍼져 잤더랬죠, 그러면서 글 못쓰는 스트레스덕에, 허구헌 날 소화불량에 편두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1년도 겨우 견디다가 일을 관두고, 글 쓴다고 다시 잠수탄건데... 꼭 스토리의 중요한 시점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네요. 글쓰기는 뒷전이 됐고, -오늘부터 하루에 열 통 이상 이력서를 날리자- 뭐 그런 계획이 수립(?)됐는데... 이것도 만만찮네요. 할 줄 아는게 거의 없는데다, 나이가 많아 이력서 보낼 곳이 거의 없더라구요. 마음이 항상 콩밭에 있어, 남의 일을 열심히 해 줄 자신이 없어 간단한 단순 업무같은 분야를 찾다보니 더 그렇네요. 그러다보니 갈수록 아쉬운 것이, 출판에 대한 미련입니다... 얼마 안되더라도, 지금처럼만 최소의 지출만 하면 여러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듯 한데... '에라, 허황되게 뜬구름 쳐다보지 말자'... 그러면서 제 마음을 저 혼자 다독이고 있습니다. 그럴 듯한 결과물이라도 하나 만들어놓아야, 어느 방향이든 길을 터볼텐데... 또 다람쥐 쳇바퀴돌듯... 여전히 제자리인 듯한 막막함뿐입니다. 현재... 모든 것에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저도, 글작업도, 이 이야기도. 내일은 없다, 미래는 없다.... 그런 문장만 머릿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습니다...
네번째 소식, 어제 아침 TV에서 故人 길은정님의 추모 방송을 봤습니다. 방송인으로 20년이었다고 하는데, 저와는 인연이 없는 분인지 TV에서 거의 본 적이 없네요. 그 방송을 보는 내내... 이 이야기를, 윤아를,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신 분에게도, 지금도 투병 중인 이 세상의 환자분들에게도...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삶에서 가장 최악인 투병과 죽음을 이야기 소재꺼리로만 보고 다뤘다는 것이요. ...반성에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또 그런 소재의 글을 쓰게 된다면, 그 일을 실지로 겪고 있는 분들에겐 말 그대로 시시각각이 생존 투쟁인 것을... 절대 잊지않으렵니다... 비록 말뿐이겠지만, 이야기 시작 전에 한 줄이라도... 죄송하다는 말, 꼭 넣으렵니다.
오랜만에 들어오니... 너무 수다가 길어졌네요. 죄송합니다. (_ _)
<8회 리플 답변입니다....>
좋은아이 (2004/12/14 10:22) 윤아가 너무 힘들어하는거 같아서 마음이 아퍼요...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거 정말 어려운 일인거 같아요.. --> 동감입니다...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도...쉽지 않을터인데... 요즘은 드라마에선 허구헌 날 바람피는 얘기, 불륜 얘기... 에잇!
닉네임 (2004/12/14 10:32) 마녀님~~ 드뎌 오셨군요... 넘 오랫만에 오시는거 같어요... 님 기다리다 제 눈알 빠졌어염...ㅠㅠㅠ 선우의 마음이 많이 아프고 괴롭겠어요.. 윤아의 자살기도 사실을 알았으니.... 서로가 사랑하면서도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네요.... 선우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해라니.. 이사실을 선우가 또 안다면 고통 그 자체겠죠...이제 서로에게 한 발짝씩 다가섰으면 좋겠어요..마음이 시키는대로 말이죠...ㅠㅠㅠ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는 선우와 자해로 견디는 윤아의 모습에 가슴 넘 아파오네요... 마녀님~~ 담부터는 조금 빨리 오세요~~~ 아셨죠?? 다음편 기다릴께요~~~ 건강조심하시구요..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 닉네임님의 이 리플을 자주 생각하다가 ^^;;; "이제 서로에게 한 발짝씩 다가섰으면 좋겠어요..마음이 시키는대로 말이죠...ㅠㅠㅠ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는 선우와 자해로 견디는 윤아의 모습에 가슴 넘 아파오네요"<--이 부분... 덕분에 9회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다니 (2004/12/14 10:33) 항상 님의 글을 재밌게 보고 있답니다. 넘넘 안타깝네요... --> 저두 안타까운.....ㅠㅠ
숲 (2004/12/14 11:30) 비상이 잘나가는건 좋지만 윤아가 저렇게 자해를 하는건 너무나 안쓰럽고 가엾어여.. 죽음과 같은 고통을 이기고자 택한 방법이 자해란것에 윤아가 너무 힘들어 하는것 같아 제맘이 다 아리네여~~ 윤아는 언제나 되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수 있을런지여?? -->글쎄요... 마음의 안정이라... 윤아와 선우같은 사랑에 안정이 가능할까요....ㅠㅠ
조윤경 (2004/12/14 11:52) 항상 게시판에 들어오면 마녀님 글이 있는지 확인을 한답니다... 마녀님이 힘들어하시는것이 유나가 힘들어하는것과 내용은 다른것 같지만 글쓸때 힘들어하는것은 비슷해요! 아푸지 마시고 넘 신경쓰지마시고 편하게 글올려주세요^^ 그래도 넘 늦게 올려주시지는 마시구요... --> 에고... 넘 죄송, 게시판에 올때마다 제 글을 찾으신다니... 윤아의 시점으로 가면서, 제가 겪고 느끼는 많은 부분이 걸러지지 않고 드러나기도 합니다.
사실 쬐끔 의도적인 것도 있구요... 모르는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만 몇 시간 앉아있으면 뚝딱!하고 글이 나오는 줄 알기에...(사실은 가끔 생각합니다... 글이 뚝딱!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었음 좋겠다...라고 ㅎㅎ)
허브향기 (2004/12/14 12:46) 목빠질뻔 했어요! 왜이렇게 뜸하게 오세요! 힘드신건 아는뎅 향기는 이글 읽고 나면 완전히 패닉상태가 되거든요!그런데 왜 이글을 읽는데 힘이들까요.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버린듯한느낌과 앞으로 선우가 아파야하고 그아픔중앙에 윤아가 서있어야 한다는것이 너무 아파요!자주좀 봐요 마녀님.....부탁이예요! --> 향기님은 상당히 예민하시네요... 쓰는 사람의 느낌을 같이 공유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이런 님을 굉장히 무서워합니다... -_-;;; 어느 부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딱! 찝어내실 것 같아서리... 대신 정말 혼신을 다해 쓰고나면 제일 먼저 불러다 자랑하고 싶은 님이기도 하지요 ^_-) 저 이 이야기 쓰면서... 전 편보다 딱 3배정도 더 힘든 것 같거든요. 선우가 아니라 윤아의 이야기라서...
박기자 (2004/12/14 13:05) 오랜만에 글을 보아서, 반가웠는데,, 넘,, 안쓰럽고 맘이 아프네요 윤아가 넘넘 힘들어해서,, 참,,, 선우도 그렇구,,,,,, 그냥 서로의 맘을 확인할수 없나요? 아직까지두 서로를 사랑하구 있다는걸,,,, 사랑이 아닌가 싶기두 한데,,, 담에는 밝은 내용이었음 좋겠어요, 이제,,, 윤아가 힘들어하지 않는,,,, --> 사랑은 맞는데... -.-;;; 사랑이어서는 안되는 사랑이라 그런거겠죠... "서로의 맘을 확인할수 없나요?"<--상당히 무시할 수 없는 리플 발언!!! 이었기에...닉네임님의 리플과 동등하게 9회 스토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지니 (2004/12/14 13:09) 윤아의 모습이 처절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것 같아요. 첨엔 왜 그렇게 자해를 할까...? 궁금하다가 끝부분에서 알게 되었네요. 그리고, 1부 기억해요. 특히, 잠들겠다고 하면서 죽어가는 윤아의 모습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윤아와 선우가 어떻게 이어나갈지 아주 궁금합니다. 참, 건강은 회복되었는지요?! 정말 멋진 글입니다... 기다림의 몇 백배의 행복함을 안고 갑니다. 담엔 넘 늦게 올리지 마세요... 저말구도 목이 빠지는 사람 너무 나올까 걱정이 되는군요. 팟팅!!! --> 음... 혹시 주변에 투병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잠들겠다고 하면서 죽어가는 윤아의 모습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윤아의 마지막 말의 의미를 아시는가해서요. 지독한 통증에 마약류의 진통제도 듣지 않는 환자같은 경우는, 통증때문에 잠깐이라도 편하게 잠들기 힘들다고 합니다... 저도 편두통에 시달릴때면, 이미 진행이 많이 된 상태까지 가서 늦게서야 약을 먹으면 효과가 나타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구요. 그동안은 아픈 걸 잊게 잠들 수 있으면 좋은데, 잠을 전혀 못잡니다. 눈이 빠지는 것 같고, 계속 머리 아프고, 토할 것 같고, 울지도 못하죠...(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거 사람 잡습니다... 단순한 편두통도 이럴진데... 만약 제가 김윤아같으면 자살했을겁니다...부모님만 눈에 안밟힌다면...;;;) 그래서... 윤아의 "좀 오래 잘게..." 이 말... 단순히 폼나는 말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윤아와 선우가 어떻게 이어나갈지 아주 궁금합니다" <--이러시면 저, 자꾸 손이 근질근질해집니다 ^^;;; 뒷이야기를 그냥 막 해버리고 싶어요...;;;;
시인 (2004/12/14 16:17) 넘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 마녀님.. 흑흑 미워요.. 그리고 내 닉네임두 (홈피왜.. 다른곳) 마녀 랍니다.왠지 친숙 .... 항상 감기 조심하시구요.. 빨리 또 만나길 바랄꼐요 ^^ --> 아... 그러시구나, 시인님두 마녀님이시군요...^^;;; (동지 만났당~ㅋㅋ) 네...감기 조심할라구, 방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답니다. 옥탑방 웃풍이 워낙 쎄서요... 불편해도...그러면 덜 춥거든요.^^ 그렇긴해도 손이 꽁꽁 어는 건 달리 방법이 없네요, 장갑끼면 키보드치기 힘들어서 못끼고...
mommy (2004/12/14 19:23) 요새 계속 바쁘고 해서 여기 거의 못 들어오다가 오늘 어찌 저찌 시간이 나서 들렀다가 마녀님 글 보고 행복한 맘으로 글을 열었는데... 윤아가 또 내 속을 새까맣게 태우네요.. ㅡㅜ 예전에 선우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은탓인가요.. 그래도 이렇게 고생하는거 보면 언젠가는 좋은날이 오겠죠? 근데요 혹시 윤아의 투통이 혹시 그런건 아니죠?? ^^;;;; --> 허걱!!! 제가 아무리 재능이 없어두, 설마 한번 써먹은 설정을 또 써먹겠습니까...^^;;; 절대 아님!!! (이 세상엔 약없이 살 수 없는 만성 편두통 환자가 많답니다, 단지 편두통... 그러나 사람잡는 편두통 -_-;;;) "예전에 선우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은탓인가요"<--글쎄요... 표현 방법이 달랐을 뿐, 마녀...윤아도 선우를 많이 사랑하지 않았나요....
대님 (2004/12/14 22:07) 윤아가 너무나도 안타까와요. 저렇게 피를 말리는 작업을 해야 하는 건가... 언제쯤이면 마음으로부터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아예 그런 건 없는 걸까요? --> "피를 말리는 작업을 해야 하는 건가"<--글쟁이 팔자지요 T_T;;;; 마음으로부터의 행복...이라... 그게 뭘까요...흠...(대님 미오요... 왜 저를 고민모드로 빠지게 하시는지...)
사악고슴도치 (2004/12/15 12:49) 윤아의 마음이 너무 아픈거 같아서 ..이를 어째야할지...전편에서 조금 장난기 틱한 선우에 말이 이젠 너무 진진하네요...왠지 다른사람보는듯한 느낌...뭐 전편과 별로 연결이란 생각도 이젠 안들지만요..하지만 멋져요~~! 두사람에 모습......기대가 되네요 --> 항상 생각하지만, 닉네임이 넘 멋짐!!! "왠지 다른사람보는듯한 느낌...뭐 전편과 별로 연결이란 생각도 이젠 안들지만요"<--이 부분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진 연지바른 마녀... 이걸 좋다고 봐야하나, 나쁘다고 봐야하나... (아직까지 결론 안났다는 -.-;;;)
바이올렛 (2004/12/16 16:04) 처음부터 여기까지 쭈욱~~ 어제낮부터....지금까지...틈틈히 읽었네여...넘넘 재밌구..감동적이에요...일편에선 눈시울을 적시더군여....마녀님 덕분에 좋은글 접하게 되서 넘 기뿌구여......다음글은 얼마나 기둘려야 되는건지...하핫~^^;; 계속계속 읽고싶어지네여.....좋은 하루하루 보내시구요~ 늘 건강하세요~!! -->허걱! 처음부터 여기까지 쭈욱~~ 그렇게 봐도 과연 볼만한가요...? 요즘 폐쇄적인 출판사들에게서 왕무시를 계속 당하다보니... 혼자 엄청 의기소침에 소심해져서리...'이건 아무래도 종이책으로 나갈 수 있는 스토리는 아닌 것 같아...흑흑...빚내서 자비 출판해도 아무도 안볼거야...T_T 게시판 소설일뿐야...' 이딴 부정적인 생각만 자꾸 들어서요! 에잇!!!
임경옥 (2004/12/21 15:02) 술과....자해......저렇게까지 힘들어하는 윤아가 가엽네요.......저렇게 하는 윤아를 보는 선우도 힘들고......윤아랑 선우 둘이 조금만 아파하고 조금만 힘들어했음 좋겠네요......그동안 휴가라서 이제서야 님의 글을 읽었네요....다음편은 좀 더 빨리 올려주세요~~~ --> 휴가는 잘 다녀오셨나요... 에고...백조인 저는 '휴가'가 부럽습니다...^^;;; "윤아랑 선우 둘이 조금만 아파하고 조금만 힘들어했음 좋겠네요"<--이러지 못해서 저도 힘듭니다...
보고싶다읽고싶다 (2005/01/10 09:39) 마녀님...언제 글을 볼수 있나여~~~ T.T 언능 다른 곳에 올려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소식 기다릴게요~~ --> 다행히!!! 네이트를 다시 사용할 수 있어서...^^ 계속 여기에 올릴게요... 님들이 계셔서... 사실 떠나고 싶지 않았거든요...
-최선우(남, 60세) : 아시아 대 배우, 엔터테인먼트, 푸른 극장 대표 -유성린(여, 60세) : 선우 약혼녀, 뮤지컬 배우 -이민수(남, 21세) / 한 욱(남, 21세) / 지나현(여, 20세) -이태석(남, 62세) : 태석 영화사 대표/ 강현민(남, 51세) -박필덕 감독(남, 40대 중반)
-조유리(여, 18세) / 우해준(남, 18세) -진한기(남, 25세)
그 외...
# 팔 안에 자해한 상처가 쉽게 낫지 않았다. 연고를 발라도 계속 따끔거려, 밤 시간에 유리의 실험실을 찾아갔다. 유리가 학생인지라 박감독님과 민수 선배의 배려로 늦은 시간 촬영 스케쥴은 많이 잡혀있지 않았다.
[윤아 : 유리야.]
[유리 : 응?]
[윤아 : 내가 심각한걸까?]
유리는 내 자해 증세를 듣고도 태연했다. 유리는 자신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선 쉽게 감정적이 되지않고 냉정하다. 창상에 효과가 좋은 약초들을 짓이겨, 내 상처에 붙이고 그 위에 거즈로 팔을 몇번 감더니, 반창고를 붙여 고정시켰다.
[유리 : 아니. 언니 드라마 쓰면서, 힘들어서 그런 거잖아. 그럼 안쓰면 없어지겠네. ^^]
[윤아 : (다친 팔의 옷소매 내리고, 유리 보는)...]
[유리 : (실험가운 주머니에 두 손 찔러넣은 채) 왜?]
[윤아 : 아니... 너한테 뭐든 다 쉬워보여서.^^ 처음하는 대본 리딩도, 연기도, 공부도, 이런 진단도...]
유리는 활짝 웃으면서, 내 옆에 바짝 붙어 앉더니 내 팔에 팔짱을 끼고 내 어깨에 자기 머리를 기댔다.
[유리 : 언니도 참! ^^ 언니꺼니까 읽지. 난 다른 대본은 못읽어.]
[윤아 : (의아) 정말?]
[유리 : 그럼... 거긴 언니가 있으니까. 서하영, 그거 언니잖아.^^ 머리 좋은 설정은 나인거 같지만. 아냐?]
[윤아 : ....맞아 ^^;;;]
우린 친하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느꼈겠지.
[유리 : (중얼) 근데 있지... 가끔 대본에서 언니가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내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윤아 : ! ]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 그걸 어떻게... 정말 유리는 내 대본에서 내 감정을 그대로 읽어내는 걸까...? 나에게서 절대적인 교감을 하는걸까...?
[윤아 : (얼버무리는) 설마... 니가 뭘 잘못봤겠지.]
유리가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고 싱긋 웃었다.
[유리 : 그런가? ^^ 근데 언니.]
[윤아 : 응?]
[유리 : 언니 아직두 그 남자 사랑하니?]
[윤아 : ...? (유리 보고)]
가볍게 지나가듯 묻는 것이지만, 질문 속에 뼈가 있다.
[유리 : 언니를 자살기도하게 했던 남자 말야. 그 남자, '박상현'에 많이 투영돼있는 거잖아. 아직두, 언니... 언니의 그 감정이 읽혀. 원망도 없고, 용서같은 건 애초에 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슬프고 애틋한 감정만, 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윤아 : ...]
[유리 : (일어나, 실험테이블로 가서 등보이며) 싫다, 언니 그러는 거.]
유리가 내게 등을 보인다는 건 내게 화났다는 뜻이다.
나는 유리에게 다가가서 유리의 등을 안아줬다.
[윤아 : 다 지나간 일이야, 이야기에 필요해서 넣었을 뿐이야. 대본에 다 써버리고 나면, 부스러기처럼 남은 감정같은 것도 다 털어질거야.]
[유리 : ...정말?]
[윤아 : 그럼! ^^;;; 우리 유리가 언니 걱정 많이 했구나, 미안해라~^^]
[유리 : ...]
[윤아 : (어린애에게 노래하듯이) 언니는~ 유리를 너무너무 사랑해~ ^^]
내가 콧소리까지 내며, 살살 달래자 유리는 꽁했던 마음이 금세 풀어졌는지 몸을 돌려 나를 꼬옥 안았다.
[유리 : (글썽) 유리도 언니 너무너무 사랑해... 그냥 난... 언니가 나한테서 너무 멀어져가는 거 같아서...그랬지. 언니 집에도 못가게 하고... 난 여기서, 혼자서, 너무 힘든데...]
[윤아 : 왜 니가 혼자야. 선생님들도 계시고, 친구들도 있고...]
[유리 : 언니가 없잖아.]
[윤아 : ^^;;; 서울에 니 엄마도 계시고...]
[유리 : 칫.]
유리는 내 어깨를 탁! 치며, 나를 밀어냈다.
유린 아직도 서울의 엄마하곤, 사이가 영 아닌가...? 그래도 자꾸 말해줘서 조금씩이라도 가까워지게 해야한다.
[윤아 : (유리 눈치 살피며) 지난 번에 스튜디오 촬영하러 서울 가서, 엄마 집에 들어가서 잔거지?]
[유리 : ...(글라스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딴청) 응.]
[윤아 : 잘했네! ^^ 어우~ 우리 유리 착하다.]
[유리 : 얼굴도 못봤어.]
[윤아 : ?]
[유리 : 외국 출장갔대.]
[윤아 : ...]
괜히 미안해졌다. 유리, 나름대로 또 상처받았겠구나...
촬영 스케쥴을 짜는 조감독 민수 선배에게 서울의 스튜디오 촬영할 땐 가급적이면 유리의 촬영 스케쥴을 선우 매니지먼트사 멤버들과 맞춰서, 함께 서울을 오갈 수 있도록 유리의 교통편을 부탁했던 건 나였다.
나현에겐 유리 엄마 집 주소까지 알려주면서, 유리가 촬영끝내면, 그곳으로 꼭 데려다 주라고 부탁했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윤아 : 원래 바쁘신 분이잖어...^^; 다음에 볼 수 있겠지. (유리 표정 살피며) 다음에 올라갈 때도 엄마집에 들어가 자는거다? 밥도 거기서 먹고. 응?]
[유리 : ...]
[윤아 : (엄한 목소리) 조유리.]
[유리 : (중얼) 그런 거 필요없잖어... 인간 세상에서 자기네들끼리 만든 규율도 안지킨 사람들인데... 꼭 나만 지키라는 거 불공평하잖어.]
[윤아 : 아냐, 아냐. 니가 잘되길 바랬던거야. 나한테도 그런 천재적인 딸이 태어났음, 얼마든지 욕심냈을 걸? 이것저것 다 해보게 하고... 사람들한테 자랑도 하고. 나같음 니 엄마보다 더 극성이었을거야, 진짜야- ^^]
그게 너무 지나쳐 유리를 자신만의 세계에 가둬놓는 자폐아로 만들어버렸지만. 그리고 유리의 엄마가 재벌가 상속녀로 유리한테 돈으론 못해줄게 없었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이기도 했지만. 온갖 선생들과 유모와 가정부를 붙여줬지만, 막상 당신은 엄마로서 유리를 한번도 안아주지 않았다는 것도 어린애였던 유리에게 보이지 않는 큰 상처였겠지만.
하긴 우리 학교에 왔을 때, '엄마''아빠'란 단어를 사전적인 용어로만 알고 있던 아이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렇게 따지면 유리에게 천재적인 머리를 유전적으로 물려준 유리 아버지도 아주 책임이 없다할 순 없지만... 카이스트 교수로, 유리가 태어나던 날도 무슨 연구협회에서 주는 상을 수상하러 외국에 나가서 한국에 없었다던가...? 게다가 카이스트가 대전에 있는 관계로, 연구에 바쁘다는 핑계로 서울집에 들른 적은 가뭄에 콩나듯하고, 유리에 대해선 거의 알지도 못하고...
엄마의 사랑없는 과잉보호와 아빠의 철저한 무관심, 기막힌 조화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두 어른이 유리에게 가정이란 것 자체를 만들어주지 않았으니, 내가 이렇게 유리에게 부모의 의미를, 가정의 의미를, 집의 의미를... 사전적인 의미말고, 감정적으로 느끼게 해주기 정말 힘들다 -_-;;;
천재인 아이에게 3살박이 어린애에게 하듯이, 반복적으로 주입시키는 것도... 가끔 이상한 기분도 들고.
하긴 아인슈타인도 자기 분야 외엔 전부 저능아처럼 굴었다드라, 뭐. 고양이가 새끼를 낳으니까, 새끼 숫자대로 문에 고양이문을 뚫어줬다더라, 뭐. 벽난로 앞에서 뜨겁다 뜨겁다 하면서도,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를 뒤로 뺄 생각조차 못했더라, 뭐. -.-
[윤아 : 유리야-]
[유리 : (윤아보며) 빨리 어른됐음 좋겠다. 그치? ^^]
[윤아 : ...]
[유리 : 그럼 언니한테 이런 잔소리 안들어도 될건데. 그치? ^^]
[윤아 : 어른되도 그 때까지 모르면, 마찬가지야.]
[유리 : -_-;;]
그 때 노크소리가 들리고, 실험실 문이 열렸다.
[홍선생 : 어? 윤아가 와있었네? ^0^]
# 홍선생님은 정기적인 실험실 점검날이어서 들렀다고 했다. 새로 들여온 재료엔 위험물질은 없는지, 그동안 다른 사고는 없었는지... 그런 것을 정기적으로 점검해서 인근 경찰서에 신고해야한다. 유리의 실험실은, 단순히 학습용 과학 실험실이 아니라서 도청의 허가를 따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리에게서 부탁해 둔 일회용 수지침과 사혈침 바늘 여분을 받아들고 학교를 나서는데, 홍선생님이 배웅해준다며 따라 나섰다.
[윤아 : 위험한 길도 아닌데요. ^^]
[홍선생 : 그 핑계로 나도 바람쐬고 좋지, 뭐. ^^ 그리고 슬슬 휴가철이잖아, 근처 계곡에 놀러오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밤길 조심해야지.]
[윤아 : 그렇네요. ^^]
취객들이 우리 학교 여학생한테 잘못 찝적댔다간 우리 학교 학생들한테 몰매맞는 사태가 또 벌어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으니까. ㅎㅎ
[홍선생 :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드라마 쓰는 거 많이 힘들어?]
[윤아 : 원래 정신적으로 자기 학대하는 노동이잖아요. 육체노동이면 체력이나 키울 수 있을텐데. ^^]
[홍선생 : 음... 빨리 우리 학교로 델쿠와야겠네.]
[윤아 : 저 살찌워서 잡아먹으시게요? ^_^]
[홍선생 : 앗, 들켰다! ^.^ 주방에 가마솥 준비해놓은 극비사항을-]
[윤아 : 하하- ^0^]
[홍선생 : 하하- ^0^]
우리 천하무적 홍선생님은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쾌함을 전염시키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도 모르게 홍선생님의 에너지에 끌려가고, 홍선생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윤아 : 유리... 많이 힘들어해요? 얼마전부턴 선생님하고 같이 지낸다면서요.]
유리가 기숙사 새 룸메이트와 적응하지 못해서 홍선생님이 임시로 유리의 방으로 옮겼다고 들었다.
[홍선생 : 유리도 그렇고, 다들 좀 힘든 편이지.]
[윤아 : 네?]
[홍선생 : 지난 번엔 한밤중에 깨서는, 너 찾다가 없으니까 대성통곡하는데... 다들 혼이 다 쏙 빠졌다니까. 너무 잘먹여서 그런가, 목청은 왜 그리 큰지. 애나 작아야 안고 달래지, 다 큰 애를 어떻게도 못하고...]
[윤아 : -_-;;; (걱정스런) 혹시... 유리 다시 유아기로 돌아간 거 아니에요? 어린애들 잘 그러잖아요, 자다가 깨서 옆에 엄마없으면 울어대는 거.]
[홍선생 :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다음 날은 아무렇지도 않더라. ^^ 하긴 유리한텐 니가 친엄마나 다름없잖냐.]
[윤아 : ...]
[홍선생 : 니들은 그... 있지, 오리새끼 생태같은 거. 그런 거 같애.]
[윤아 : 오리새끼요?]
[홍선생 : 응, 오리 새끼는 알에서 나와 눈 뜨고 처음으로 본 것을 자기 엄마로 인지한다잖아. 넌 유리 손을 잡고 유리 자폐 증세에서 끌어내 준 사람이니까. 처음으로 유리 저를 사람답게, 그 나이 또래답게 살게 해 준 거니까.]
[윤아 : ... 전 그렇게 대단한 거 한 적 없는데요. ^^ 유리가 원래 정상적인 애였으니까요.]
[홍선생 : 안그럼, 널 그렇게 따르고, 한시도 니가 안보이면 불안해하고 그랬겠어?]
[윤아 : ... 어떻하죠? 유리 자주 깨서 울어요? 이것저것 좀 걸리겠지만, 제 숙소로 데리고 갈까요? 유린 싫다 안할텐데, 허락... 해주실래요?]
[홍선생 : 아니. 어차피 너도 이번 기회에 유리를 자립시켜보려고 했잖아. 오리 새끼도 자라면 스스로 나는 법을 익혀야지. 하나를 업고 같이 날려면, 결국 둘 다 날지못하고 추락해버릴 수 밖에 없어. 냉정하다 생각들겠지만, 과도기라 보고 넌 모른 척 해.]
-_-;;; 끝까지 오리 새끼라시네... 꽥꽥-
[윤아 : ...네.]
하긴 홍선생님이야 교육자 경력으로 여지껏 수많은 학생들을 품에 끼고 살아오신 분이니... 이론으로도 경험상으로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더 잘 대처하실테니까... 무조건 믿고, 내 일이나 잘 해야지.
막 새벽으로 넘어가는 하늘의 쪽빛을 감상하며 개울둑을 지나가는데, 철벅철벅- 물장구치는 소리와 여러 사람들의 소곤소곤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홍선생 : 벌써 휴가객들인가?]
[윤아 : (기웃기웃) 아닌데요, 드라마 팀이에요. 여기서 뭐하는거지?]
# [종수 : 내일, 아니 오늘 개구리 잡아 먹는 씬을 찍는데, 개구리를 어떻게 잡는지 몰라서요. 거기 학교 학생들한테 가르쳐달라고 부탁해서, 같이 나온거에요.]
청솔고 학생 몇몇과 학생 역을 연기하는 연기자 몇몇, 그리고 민수 선배와 욱이 선배까지... 함께였다.
홍선생님은 청솔고 학생들에겐 기숙사 순찰 전까진 들어오라고 당부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나야 여기 드라마팀하고 같이 돌아가면 되고.
개울물 안에선 해준이가 종수에게 나무 막대기로 개구리가 있는 곳을 찾아 그 주변을 내리쳐 개구리가 놀라 펄쩍 뛰어오르게 한 다음 야구방망이로 공을 치듯 제대로 한 방에 내쳐 기절시키는 법을 가르치는 중이었고,
개울물 밖엔 이미 모닥불을 지펴 물을 끓이는 중이었다 -_-;;
[민수 : 너네 학교 진짜 재밌다. ^^ 나두 다시 다녔음 좋겠다야-]
[윤아 : -_-;;; 선배는 개구리 잡아 먹어봤수?]
[민수 : 아니. ^^]
[윤아 : 꼭 재밌지만은 않을텐데-]
[민수 : 왜?]
[윤아 : 도시에서만 사는 사람들은 소고기를 먹으면서도 소 도축하는 장면을 상상 못하잖아. 그치만 여기선 눈앞에서 생목숨 끊는 걸 직접 보게되니까, 첨엔 역겨워하고 입에 못대는 애들도 많아요.]
[욱 : (옆으로 와서 불에 나뭇가지를 넣으며) 너도 그랬냐?]
[윤아 : 네.]
[욱 : 그래도 다 먹고 살려면, 바뀌는거다.]
[윤아 : 맞아요. 근데 여자애들은 안왔어요?]
[민수 : 대본에 남자애들만 나오잖아.]
[윤아 : 음- 사실은 여자애들이 더 잘 잡아먹는데. ^^]
[민수 : 헉!]
[윤아 : 이미지 베린다고 촬영안한다 그럴까봐, 남자애들로만 한건데...]
[해준E : 에이, 제대로 안보고 치니까 헛나가죠. 이렇게, 제대로 보고!! 타이밍 잡아서!!! 나온다! 저기! 저 놈!]
나는 개울 안의 해준이와 종수를 비롯해 여럿이 우왕좌왕하는 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겁많고, 기절도 잘 하던 해준이도 이젠 여기서 완전히 시골 총각 다 됐네.
자연은 아스팔트 위에서 상처받고 탕아가 되어 돌아온 사람도 아무말없이 끌어안고 치유해주는 어머니같은 존재같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해치고 자신을 누르고 아프게 하는데도...
[윤아 : 이렇게 재밌게 생각할 줄 알았음, 여자애들도 끼워넣을걸.. ^^]
[민수 : 아서라~ ㅎㅎ]
손전등에 비친 욱이 선배의 귓가가 언뜻 반짝거린다.
[윤아 : 어? 선배 귀 뚫었어요?]
[욱 : 어.]
작은 링귀걸이가 제법 예쁘다. 한번 만져보려고 손을 뻗었더니, 욱이 선배가 화들짝 고개를 뒤로 뺐다.
민수 선배가 우하하- 배 잡고 웃겨 죽을라 한다.
[윤아 : ?]
[민수 : 저 자식 부끄러워하는 거야.]
[욱 : (벌개져서) 아냐, 임마. 하여튼 (윤아에게) 너 나중에 알아서 책임져!]
[윤아 : (자기 손가락으로, 윤아 자신 가리키며) ? (어리둥절) 제가 뭘요?]
[욱 : 니가 효수 캐릭터에 귀뚫는게, 더 날라리같이 보이고 좋을거랬잖냐.]
[윤아 : (긁적) 내가 그랬나...? ]
[욱 : (허걱!)]
[민수 : 회의할 때 지나가는 말로 그랬지. ㅋㅋ]
[윤아 : 그랬나...그래두 선배가 진짜로 내 말 들을 줄은 몰랐는걸요. ㅎㅎ]
[욱 : 하여튼,]
[윤아 : 하여튼, 뭐요?]
[욱 : 난 이 꼴로 시골집엔 죽어도 못내려간다.]
[윤아 : (짐작가는) ...음.]
[민수 : 욱이 아버님이 상당히 보수적이시거든. ^^ 저 자식 저러고 내려가면, 집에 발도 못들여놓고 먼지나도록 맞아야 될 걸?]
[윤아 : (욱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기왕에 맞을 거, 헤어스타일도 바꾸는 게 어때요?]
[욱 : (버럭) 뭐!]
[윤아 : ^^ 어... 좀 터프하게, 효수 캐릭터에 좀 더 가까이..가려면, 앞의 한 두줄 정도는 붉은 색으로 브리치 염색하고, 나머진 층별로 빨주노초파남보로... 무지개 염색을...ㅋㅋ]
[욱 : (버럭) 신윤아!! (벌떡 일어나는)]
[윤아 : (민수 뒤로 숨으며) ^^ 살려줘~ 선배~]
[욱 : 신윤아, 너 이리 안나오냐-]
[윤아 : (요리조리 피하면서, 약올리는) 그냥 연기하기 위해선데~ ^^;;; 무대에 올라갈 때 그 정도 분장도 안하나? 진정 선배가 연기자 맞아?]
[민수 : (욱하고 윤아 사이에 끼어서, 대략 난감) 야, 저 정도도 저 자식 고리타분한 성격에 큰 결심하고 한거야~ ^^;;; 더 건드리지 마-]
[민수 : 삼촌, 여지껏 연기말고 그렇게 다른 사람한테 자기 가슴을 쉽게 빌려준 적 없었어.]
[민수 : ... 삼촌, 너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어. 돌아가신 그 분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에.] ----------------------------------------
나에게 더 이상 그런 사치스런 감정은 필요없다.
나에게 당장 절박하게 필요한 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마치고 내 스스로 밥벌이를 제대로 해낼 때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마련해야 할 학비며 생활비다.
[윤아 : 지난 번 선물은, 어차피 산 거니까 받았을 뿐이에요. 제 주제에 그런 거 쓸 일도 없겠지만, 만약에 나중에 돈 필요할 때 생기면 미련없이 처분할거에요. 이제와서 저한테 그만큼 선생님 마음, 아무것도 아니란 거에요. 선생님이 어떻든, 저한테 그런 거 배려할 여유같은 거 손톱만큼도 없다구요.]
[선우 : ...]
[윤아 : 다신 그러지 마세요, 저한테 잘해주는 척 하시지 말라구요. 그런다고 이미 저질러지고 지난 일이 없어질 순 없으니까. 저나 선생님이 기억상실증에 걸릴 수 있는게 아니라면요.]
[선우 : ...너, 나 아프게 하는데 도가 텄구나. (혼잣말처럼) 그 사람처럼.]
[윤아 : ...다치기 싫음 가까이 오지 마세요. 선생님 손만 잡음 뭐든 다 될것처럼 굴면서, 손 내밀지 마세요. (슬프게 피싯) ...저, 선생님 찌를 가시 백개쯤은 갖고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전에 선생님이 정하신 그 거리에서, 한발자욱도 더 오지마세요.]
[선우 : 그래, 그러자... 너 이렇게 잘 지내는 거면, 어쩌면 이곳이 너한테 잘 맞는 것도 같고..., 그걸로 더 욕심 안낸다.]
[윤아 : ...]
계속 지켜보겠다는 건가...? 못말릴 사람이구나, 이 사람.
서로에 대해 감정이 메말랐다면 나는 그에게 상처될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외면하고 무시하면 되는 것을... 그는 내가 내뱉는 말들 때문에, 더 이상 다치지 않을 것을...
...모르는걸까...?
우린,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아프게 생채기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도 모르겠지. 그를 아프게하는 것 만큼, 나는 그보다 수천배 더 아프다는 것을...
# 옥탑방.
겨우 설핏 잠들었나 싶었는데, 밖의 소란스러움에 금세 잠이 깼다.
방안이 환한 걸 보니, 한낮이다.
또 촬영 중간중간 짬이 나는 연기자들이 옥탑방 밖 옥상에 일광욕을 하러 올라온 모양이다.
동네가 시골인지라 조심하라고 한마디 해둬야겠다.
방을 나서려고 일어서다가,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환상통.
신체 절단환자가 이미 없어진 신체 일부에게서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난 아직도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핏빛 악몽을 꾸는 날이면, 유산할 때와 똑같은 통증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뱃속에 날카로운 송곳이 들어와 숨통에 꽃힌 것처럼 숨조차 쉴 수 없고, 온 몸을 꼼짝도 할 수 없는 날카롭고 지독한 통증...
큰 비명낼 기력이 없이, 신음만 하며 거실 바닥에서 온몸을 버둥대는데, 밖에서의 쾌활한 웃음소리와 간간히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아주 먼 세계, 다른 차원의 세계의 것인 것처럼 몽롱하게 들려왔다.
현관문 하나를 두고, 이런 엄청난 차이라니...
...겨우 통증이 사라지고, 한참을 그대로 널부러져 있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식은땀투성이다.
[박감독 : 여긴 시끄러우니까, 빈 교실로 가지. (저만치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민수에게) 민수야, 아까 어디가 비었다고 했지?]
[민수 : 교무실 쪽이요.]
[박감독 : 그리로 갈거니까, 너도 대충하고 오고. 회의 참석할 사람 있으면 그리로 오라고 해.]
[민수 : 네! 알겠습니다.]
교무실로 리모델링 된 공간에 들어갔다.
박감독과 주변 의자들 서너개를 서로 가까이 끌어다 놓고는 마주 앉았다.
[박감독 : 대본 쓰기도 바쁠텐데, 원인 분석해보라고 따로 일시켜서 미안해, 신작가.]
박감독은 어떠한 바쁘고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경우바른 인삿말을 빼먹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의 기본 매너 중 하나인가...?
[윤아 : 아니예요, 제 책임도 있는 걸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이에요.]
[박감독 : 그래, 뭐가 문제래?]
슬그머니 문이 열리면서 카메라 감독 두 사람과 유성린, 이번 달 초에 새로 투입된 예쁘장한 신인 여배우 진채진도 들어왔다.
진채진은 유성린이 슬쩍 언질을 주고 데려왔거나, 아니면 눈치빠르게 따라온 거겠지.
나는 프린트물 뭉치를 일단 와 있는 사람들에게 돌렸다.
우리 청솔고의 학생 몇몇에게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방송국 사이트의 '비상' 시청자 게시판 말고도, 이름있는 드라마 비평 사이트와 각 커뮤니케이션의 드라마 토크 게시판을 훑어서 비평들을 갈무리하도록 시켰었다.
3일을 꼬박 밤낮으로 냉혹한 평들을 읽어대며 냉수밖에 마시지 못했다. 막판엔 냉수조차 마실 수 없었다.
원래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내놓아 읽히는 것 자체가 자신의 머릿속과 내면의 추한 밑바닥까지 긁어낸 것을 내보이는, 알몸으로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젠 그 온 몸이 갈갈이 찢기고 토막당하는 기분이라니.
[박감독 : (프린트물 돌려주며) 말로 해, 글자가 눈에 안들어온다.]
[윤아 : 우선 새로 교체되어 들어온 새 학생들에 대해 불만이 많아요. 시청자들이 재은이에게 왜 그렇게 미련이 많은지.]
나는 얘기하면서 슬쩍 진채진쪽을 살폈다. 진채진은 '비상'에서 빠진 재은을 대신해 투입되었다.
[박감독 : 그럴 것 같았어. 워낙 재은이의 중성적 캐릭터가 매력적이었잖아. 또 그 배역을 소화도 잘했고.]
[윤아 : ...그렇죠.]
그래도 게시판에다 감독하고 작가한테 인신공격까지 하면 안되지. 우리가 재은일 짤랐나? 걔네가 우릴 짜르고 주말 드라마로 토낀 걸, 우리보고 어쩌란 거야. 몸값까지 엄청 뛰어서 가버린 걸, 주말 드라마는 일주일동안 두 시간 방송분 촬영이라 우리 것보다 스케쥴이 더 빡빡하다고 겹치기출연 절대 못한다고 사래질치고 튄 걸, 대체 어떻게 도로 붙잡아 오라는 거야.
[박감독 : 그래서 어떻할까?]
[윤아 : 어떻할까요?]
[성린 : 두 사람 다 왜 그래요? ^^;;]
[박감독 : (윤아에게) 생각해 온 거 없어?]
[윤아 : 우선 함재은이 떠난 것에 대한 우리 입장을 게시판에 공지로 올리죠.]
조금 컸다고, 우리가 만들어 준 이미지로 인기 얻었다고 금방 배신때리고 인사도 없이 싸가지없이 휭~날아가버린 인간에 대해 두 번 다시 언급하는 건 싫지만, 감정적으로 나오면 우리만 손해다. 인터넷 공간엔 초딩수준의 앞뒤 안가리는 열혈 팬들도 상당해서 한 번 잘못 소문나면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져나가니까. 그것이 진실이든, 악취나는 가설이든, 뭐든간에.
[성린 : 내 생각엔, 새로 교체된 학생들에 대해 캐릭터 성격이 확실히 잡혀있지 않아.]
[윤아 : 네, 맞아요.]
새로 들어온 이들은 급하게 교체되고 투입되다보니 처음 멤버들처럼 오디션 보고 함께 숙소에서 겪으며 관찰되고 만들어지고 성숙되어가는 캐릭터가 아직 되지 못했다.
나도 허둥대다보니, 여분으로 만들어놓은 캐릭터와 연기자를 잘 매치시키지 못해, 어딘가 풋내가 나는 느낌이었다. 명색이 작가인데, 캐릭터를 미리 준비된 에피소드와 제대로 조화시키지 못해 써포트 못해줬으니 전체적인 구도가 우왕좌왕인거다.
내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건 어렵지않은데, 해결책은 쉽게 안보이고,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피가 마르는 이 기분은, 말 그대로 땅 파고 기어들어가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윤아 :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에 거의 비슷하게 들어온 세 명의 학생 캐릭터 코드를 다시 제대로 잡아서 그걸 확실히 부각시킬 에피소드를 좀 쎈 걸 써야될 것 같아요.]
[박감독 : 쎈 거?]
그 때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드르르- 열렸다.
[선우 : 죄송합니다. ^^;; 좀 늦었습니다.]
그는 누가 참석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급한 촬영있을 때 빼곤, 대부분의 회의에 참석한다.
하긴 민수 선배가 슬쩍 지나가듯 하던 말엔 제작비도 어느정도 따로 보탰기에, 영화사에서라면 프로듀서 대우를 해줘야 한다든가.
[카메라 감독1 : 그게 뭐에요?]
아까까지 자기 팔짱끼고 깜빡깜빡 졸고 있던 카메라 감독이 그런덴 눈치가 백단이다.
[선우 : 지각 벌금요. ^_^]
그가 들고 있던 봉투에서 꺼낸 건 케잌 상자들과 음료수였다.
[선우 : 바깥은 나현이가 돌리고 있을겁니다, 드세요.]
[박감독 : 안그래도 출출했는데, 고맙습니다.^^]
여러 손들이 분주하게 책상 하나를 중앙으로 끌어다놓고 그 위에서 케잌들을 상자에서 꺼내고 자르고 종이컵에 음료수를 따라 서로 주고받았다.
[윤아 : (계속하는) 일단 진채진 캐릭터는 재은의 중성적인 캐릭터를 따라가기보단, 그러면 너무 대타적인 느낌이 드니까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요. 채진은 여성스런 캐릭터로 잡고, 거기에... (하는데)]
내 앞에 쟁반과 음료수가 놓여졌다. 생크림 케잌 한조각, 치즈 케잌 한 조각, 고구마 케잌 한 조각과 우유 한 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굳이 고개들어보지 않아도, 그일 것이다.
유성린은 왜 그가 내게 이러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걸까.
내가 내 앞에 간식거리를 받아놓지 않은 것은, 분명 이유가 있었는데.
[박감독 : (우물우물 먹으며) 그러고보니 신작가 꼴이 틀렸네?]
[윤아 : ...네?]
[박감독 : 시청률 떨어진다고 열받아서 쫄쫄 굶었어?]
[윤아 : ...]
[박감독 : 이거 안되겠네, 내가 내일 고기라도 사줘야겠네.]
[윤아 : 괜찮아요, 감독님. ^^ 저 이 상황에서 나몰라라 쓰러질 정도로 무책임하지 않아요.]
[성린 : 진짜 신작가 얼굴이 왜 그리 하얘? 내가 지난 번에 준 영양제 안먹어?]
[윤아 : 왜 다들 그러세요...? ^_^ 저 괜찮은데.]
[채진 : 신작가님 좀 드세요. ^^]
진채진은 드라마 중간에 투입된지 얼마 안된데다가 나와 얼굴을 자주 보고 이야기나눌 기회가 적어서인지, 나를 가장 어려워한다. 욱이 선배의 소개로 급조되긴 했어도, 내 개인적으론 맘에 드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슬쩍 보니 나 때문에 케잌에 입도 못대고 있다.
이런 미안하잖아...
우유를 한모금 마시고, 나무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윤아 : 채진씨도 먹어, 배고픈 것 같은데.]
[채진 : 네. ^^]
내 말 한마디에 금세 표정이 환해진다. 하는 몸짓들이 꾸밈없이 순수...해 보인다, 아직 연예계 생활에 때묻지 않았다는 거겠지. 제발 함재은처럼 나중에 싸가지없게 나오지만 마라.
[윤아 : (우욱-)]
우유를 마시고도 별 문제 없길래, 생크림 케잌을 조금 떼먹었는데, 목으로 넘기자마자, 곧바로 울컥 도로 올라왔다.
급히 교무실을 나가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놀란 유성린과 채진이 따라들어왔다.
어차피 최근에 먹은 것이 없어, 별로 토하지 않고 속은 금방 진정됐다.
[성린 : (윤아 등을 쓸어주며, 걱정스런) 왜 그래?]
[채진 : 괜찮으세요?]
[윤아 : (물로 입헹구고) 죄송합니다.]
[성린 : 안그래도 안좋아보인다 했어, 어디 아픈거야?]
[윤아 : 스트레스때문에, 속에서 통 안받아요.]
[성린 : (허- 기막힌) 얼마나 됐는데?]
[윤아 : ...보름정도요.]
[선우E : 신작가 괜찮아?]
여자 화장실이라 차마 못들어오고 그의 목소리만 들어왔다.
[성린 : 어.]
[윤아 : 채진씨, 미안해. 먼저 들어가서 괜찮다고 말해줄래? 먹을 것도 먹고.]
채진은 나와 성린을 보더니, 얌전하게 '네' 대답하곤 화장실을 나갔다.
[성린 : (눈치챘다) 일어나기 힘들어?]
[윤아 : 잠깐만 좀... 현기증이 조금 나서요.]
[성린 : 서운하네, 이 지경되도록 말도 안하고.]
[윤아 : ^^;;; 죄송해요. 스토리풀리면, 먹히겠죠. 가요, 선생님.]
몸을 일으켜, 화장실을 나왔다. 화장실 앞에서 어찌못하고 서 있던 그의 앞에서 일부러 웃어보였다.
속에서 술조차 받지 않아서, 이젠 그의 '술 줄이라'는 걱정을 듣지 않아도 됐는데... 다른 걸로 또 그의 관심을 받는다는 게... 불편하다. 굳이 따진다면 직업병같은 것일 뿐인데.
[성린 : 신작가 꽤 예민한가봐. 몇일동안 아무것도 못먹었대나봐, 갑자기 먹으니까 속이 놀랬대.]
[선우 : (윤아를 보기만)...]
교무실로 들어가면서, 일부러 과장되게 꾸벅거렸다.
[윤아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특히 먹을 거 앞에서 왕죄송합니다~]
[박감독 : 뭐야- 신작가 나 몰래 사고쳤다매?]
[윤아 : -_-;;;; 사, 사고라뇨... 아무리 우리 비상팀에 멋진 남자가 많다지만...^^]
[채진 : 저, 저, ... 그렇게 말씀 안드렸는데 -_-;;;;]
[선우 : (그냥 윤아가 앉은 의자 뒤로 지나가는 것 같더니, 윤아 어깨를 탁 잡고) 감독님, 신작가 당장 병원에 입원시켜야겠어요.]
헉!
[윤아 : (당황해서) 아, 아니예요. 걱정마세요, 그제도 보건소가서 영양제 맞았어요. ;;;; 저 혈당량 떨어지면 아무생각도 안나거든요. 그래서 대본쓰려면 자동으로 제가 알아서 관리하게 되요. 어, 어제도... 영양제 맞는다고, 거기 의사 선생님한테 무슨 소리 들었는 줄 아세요? 고급스런 부잣병이라나...? ^^;;; 이런 시골 동네에서 농사짓는 노인분들도 웬만해선 영양제같은 거 안맞으시거든요, 사치스럽다고.]
[박감독 : -_-;;;;;]
[윤아 : (선우 돌아보며) 저 정말 괜찮아요.]
[박감독 : (진지) 신작가.]
[윤아 : 네.]
[박감독 : 난 신작가 믿어, 믿는만큼 알아서 할거지?]
[윤아 : (단호) 그럼요.]
[박감독 : 그만 자리에 앉으시죠, 최선생님. 회의 계속 합시다, 먹을 사람 먹고. (선우, 할 수 없이 의자에 앉고) 신작가 나간 사이에 잠깐 프린트물 봤는데, 계곡 신고식이란 게 정확하게 뭐야? 이게 쎄게 나가자는 에피소드인거지?]
[윤아 : 네. 제가 급하게 생각해서 아직 구체적으로 만들진 않았지만요. 청춘 영화물같은데서 보면, 새로 전학생이 오면 텃세를 부리잖아요. 우리하고 친해지려면 이런 것도 해봐라- 뭐 그런 신고식도 치르게 하구요.]
[카메라 감독 : 외국 영화에서 자동차 경주같은 거라든가, 절벽에서 강으로 뛰어내리는, 그런 객기 말야?]
[윤아 : 네, 맞아요. 실지로 우리 청솔고에서도 그런 경우 선생님들 몰래 많이 있거든요. ^^ 1학년 신입생들이 많이 겪죠, 기숙사 신고식에,
서로 반학생들끼리도 다투다가 한바탕하기도 잘하구요. 어차피 극 초반에 술내기하는 객기는 이미 부려봤으니까, 또 울궈먹을 순 없구요. 약하기도 하구요.]
[박감독 : 계곡...이면, 저 쪽 산사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윤아 : (끄떡) ...네.]
[박감독 : 위험하진 않아?]
[윤아 : 조금 위험해요.]
[박감독 : (윤아 보는) ...?]
[윤아 : 다친 애들이 몇 있긴 하지만, 아직 죽은 사람은 없어요. ^.^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안전 그물을 설치하는 게 좋겠죠.]
박감독은 잠깐 심각해지며, 한숨을 한번 쉬더니 고개를 떨궜다.
[윤아 : 그 정도 모험도 하지 않으면, 새 인물들을 시청자 뇌리에 각인시키기 힘들어요. 실연당한 걸 치유하려면, 새 사랑을 해야하는 것처럼 시청자들한테도 옛 사랑을 잊고, 새 사랑을 하게 해야죠.]
[박감독 : ...그럼 누굴 계곡 절벽에 세울거야?]
[윤아 : (진채진 보는) ...]
[채진 : ...저요?]
[윤아 : 채진씨가 다른 전학생들에 비해 제일 약해보여. 텃새부리기 가장 좋고, 가장 골탕먹이기 좋은 대상 이미지란거지. ...안될까?]
[채진 : (잠깐 고민, 결심) ...해볼께요.]
[박감독 : 헌팅부터 해보자. (습관처럼) 민수야- (하다가) ? 왜 여태 안들어와?]
벌컥- 문이 열렸다.
[윤아 : ^^;;; 선밴 양반은 못되겠다.(하다가) ...?]
민수 선배의 표정이 엉망이다.
[박감독 : 무슨일이야.]
[민수 : 유리가 사라졌습니다.]
[윤아 : 뭐?! (벌떡 일어나는)]
그제서야 민수 선배 뒤에서 파랗게 질린 채 서 있는 홍선생님이 보였다.
[윤아 : 어떻게 된거예요, 선생님?]
홍선생님은 민수 선배를 밀치고 나에게 뛰어오다시피했다.
[민수 : 오늘 밤 촬영있어서, 올 때가 됐는데.. 아직 안오길래, 그냥 좀 늦나보다 했는데...]
[윤아 : (홍선생에게) 무슨 일 있는거예요? 유리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홍선생 : (울상) 어떻해, 어떻해, ... 너 유리 갈 만한데 알지? 너하고 둘이 따로 잘 다닌덴 없어?]
[윤아 : 무슨 일인데요!!!]
처음엔 별일 아닌 줄 알고... 태연히 지켜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홍선생님의 동동거리는 급한 태도와 나의 비명같은 말투에 심각한 사태임을 직감하고,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선생 : 유리 아버지가 오셨어.]
[윤아 : ...아, 아버지요?]
전혀 예상못했던 인물이 튀어나왔다. 유리... 아버지...???
[홍선생 : 어... 마침 유리가 촬영하러 학교 나갔다온다고 나한테 보고하러 교무실에 들렀는데...]
[윤아 : ...]
[홍선생 : (한숨-푸우-) 내가 실수해도 크게 실수한 거 같애. 유리가 지 아버지를 그냥 학교손님인 것처럼 지나치면서 인사만 하고 나가려고 하더라구. 그래서... 유리보고... '유리야, 아버지한테 그렇게만 인사하는 건 아니지.'했는데...]
[윤아 : 0.0 ]
[홍선생 : 유리 정말 몰랐나봐. 아니... 물론 10년동안 한번도 못봤어도, 어떻게 자기 아버질 못알아볼 수 있니?]
오... 맙소사.
[윤아 : 그, 그래서요....?]
[홍선생 : 애가 쇼크받았는지 뻣뻣해져서, 그대로 교무실을 뛰쳐나갔어. 여기저기 갈만한데 다 찾아보고, 혹시 여기 왔나 싶어서 온 건데... 너 혹시 짐작가는데 없어?]
[윤아 : 실험실은요?]
[홍선생 : 당연히 가봤지.]
[윤아 : 학교 뒷동산은요?]
[홍선생 : 벌써 애들이 한바탕 뒤지고 왔지.]
[윤아 : 개울쪽은요?]
[홍선생 : 선생님들이 가봤는데, 없어.]
[윤아 : 읍내로 나가는 쪽은요!]
[홍선생 : 가봤지.]
[윤아 : ... 산사 쪽은요, 계곡 쪽은요!!!]
[홍선생 : 신록사에 전화해서 찾아봐달라고 하고, 선생들도 보냈는데... 아직...]
하긴... 찾을만한 곳 다 찾아보고, 없으니까 급한 마음에 여기까지 오셨겠지.
[윤아 : 혹시 모르니까, 전 동네 한바퀴 돌아볼게요.]
[홍선생 : 그래, 난 ...]
다급히 나가려는데, 누군가에게 팔을 잡혔다.
[선우 : 사정은 대강 알겠는데, ...]
[윤아 : (말 끊고, 팔 풀며) 선생님은 몰라요, 유리가 어떤 앤지. 지금 이럴 새 없다구요!]
유리, ... 과학에 관한한 천재지만 다른 것에 대해선 어린아이같다.
어떤 것이 위험한 것인지, 어떤 것이 해서는 안되는 것인지, ... 아직 다 몰라.
그래서... 예전에 다니던 학교를 폭파시킬 뻔했지.
유리의 머릿속에서 간단한 화학폭팔물 정도야 수천개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공식도 유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공식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유리의 마음이 변덕스럽게 변하면, 그 아인 아무런 위기감도 없이 어디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윤아 : 죄송해요, 감독님. 일단 유리부터 찾고 제가 연락드릴게요.]
[박감독 : 어, 어... 민수야, 너도 같이 찾아봐라. 어차피 유리없으면 다음 촬영 못나간다.]
[민수 : 네!]
폐교를 뛰어나와 유리를 부르며 동네를 뛰어다녔다.
[윤아 : 유리야- 유리야- 유....]
몇걸음 못가서, 풀썩- 무릎이 꺽이며 주저앉았다.
뒤따라오던 그와 민수가 멈췄다.
[선우 : 왜 그래?]
...아, 이렇게 상황이 급할 때 또 환상통에 현기증까지 겹치다니.
[윤아 : (입술 악물고) 아, 아니예요... 배가 좀...]
[선우 : (윤아 안고 어쩔줄 몰라하며) 괜찮긴!!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윤아 : (간신히) 유리... 찾아주세요.]
그의 품에서... 배의 숨통이 송곳으로, 정통으로, 찔린 것처럼 숨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선우 : (당황해서 흔들며) 윤아야! 윤아야!]
[윤아 : (견디면서) 괘... 괜찮아요, 시간만 좀... 지나면 되요...]
누구의 것인지, 핸드폰 벨이 울렸다.
[민수 : 여보세요? 네... 예, 여기 같이 있습니다. 네? 찾았어요?]
정신이 번뜩 들어, 민수 선배를 올려다봤다.
[민수 : 네... 그렇게 전할게요. (끊고, 윤아보고)]
[윤아 : (간신히) ...찾았...대요?]
[민수 : 응.]
환상통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어차피 심리적인 것이니까...
[윤아 : 어디, 어디 있었대요...?]
# 내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이 고통스러워하다가 곧 멀쩡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그와 민수 선배는 황당해했지만 뭐라 따로 변명할 여유도 없이 그들을 폐교로 돌려보내고 청솔고로 들어섰다.
식당에 들어가자 주방 가까이에 있는 식탁에 유리가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평범한 식사는 아니었다.
양푼에 한가득 만든 비빔밥을 몇일은 굶은 것처럼 정신없이 퍼먹고 있었다.
유리 옆에 앉은 이모가 걱정스럽게 지켜보다가 식당에 들어온 나를 보자, 구석으로 끌고 갔다.
[이모 : 벌써 저걸로 두 그릇째야. 암만 말려도 안듣는다. 입이 짧아서 너랑 먹어야 겨우 공깃밥 한 그릇 먹는 애가 왜 저런대?]
[윤아 : ...]
나는 유리 맞은편에 앉았다.
[윤아 : (차분히) 유리야-]
그제서야 유리는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유리 : ^_^ 어, 언니... 언니도 먹을래? 되게 맛있어.]
[윤아 : 나중에.]
유리의 손에서 수저를 슬쩍 빼냈다.
[윤아 : 이모가 그러는데, 너 밥 많이 먹었대.]
[유리 : ??? 아냐, 나 아직 배고픈데- ^^]
유리의 표정은 천진난만했다.
[윤아 : 그게 니가 너무 급하게 먹어서, 니 뇌에 아직 전달이 안된거야. 조금 지나면, 니 위에서 뇌로 소식을 전할거야. 너무너무 배부르다고, 큰일났다고.]
[유리 ; ...]
[윤아 : 유리는 그런 거 언니보다 더 잘알잖아, 그치?]
[유리 : ...응.]
[윤아 : 그러니까 옆에서 이모가 객관적으로 본 게 맞아, 그만 먹어도 돼. 금방 포만감이 느껴질거니까.]
[유리 : ...]
[윤아 : 그만 먹자.]
유리가 순순히 가만히 있자, 이모가 잽싸게 양푼을 낚아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윤아 : 언니가 하나 물어봐도 돼?]
[유리 : ...응. ^_^]
갑작스런 포식의 원인은... 분명 심리적인 원인... 어떻게든 빨리 꺼내 터트려야 한다.
[윤아 : 우리 유리... 아버지 만났다면서?]
[유리 : ...?]
...뭐야, 전혀 모르겠다는 저 표정은...? 충격받았던지라, 보호본능으로 일부러 기억을 안하려는 건가?
[윤아 : 아까 낮에... 교무실에서 인사했다며... 교장선생님이 그러시던데...?]
[유리 : 아, 아...]
그제서야 기억나는 듯, 알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유리 : 내 생물학적 부계 유전자를 가진 남자 말이지?]
-_-;;; 어렵다, 어려워.
[윤아 : 아버지... 왜 못알아봤어? 지난 달 학술지에 실린 그 분 논문에 사진도 같이 있었잖아.]
[유리 : (아무렇지 않은) 옛날 사진이잖아.]
[윤아 : ...]
[유리 : (윤아 눈치보며) 나... 언니가 싫어하는 거 한 거야?]
기껏 학술지에 실린 논문과 이름, 옛날 사진으로 자신의 아버지 존재를 알고 있는 유리에게 아버지를 못알아봤다고, 누가 탓할 수 있을까.
[홍선생 : 인사드려, 유리 아버님, 조박사님이셔. (조박사에게) 이 학생이 제가 말씀드린 신윤아 학생입니다.]
아... 유리 아버지시구나.
꾸벅 인사했다.
[조박사 : 딸아이를 잘 보살펴준다고 들었어요.]
[윤아 : 아닙니다, 유리가 워낙 붙임성있게 저를 따라서요.]
[조박사 : 아, 아, ... 그래요...?]
남자에게서 당황한 기색이 나타났다.
하긴... 이 분은 여지껏 유리에 대해 이런 식의 긍정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옆에 있던 홍선생님은 내 적대감이 드러난 말투에 잠시 '이건 아닌데' 싶은 표정으로 나를 봤다.
아... 내가 지나쳤나...?
[홍선생 : 이번에 교환교수로 미국에 가신대, 그래서 유리 얼굴 보려고 잠깐 들르신거랜다.]
[윤아 : 네에... 하긴 같은 한국에 있으면서도 10년 넘게 만나기 힘들었는데, 미국까지 가시면 정말 오랫동안 못보시겠네요.]
[조박사 : ...]
유리 아버지, 아니 조박사는 나를 한참 뚫어지게 바라봤다.
[조박사 : 학생은 내가 싫은가보지?]
[윤아 : 아뇨, 전 박사님에게 아무 감정없어요. 유리 표현대로라면 박사님은 유리의 생물학적 부계 유전자를 가진 남자일 뿐이니까요.]
[조박사 : (기막힌 표정) ... 딸애가 그랬다구?]
...갑자기 이 남자가 가엾어지는 건 왜일까.
내 태도와 말투가 대뜸 부드러워졌다.
[윤아 : 네. 유리가요, 조박사님 딸 조유리가요...]
[조박사 : ...]
[윤아 : 도서관에서 잠들었는데, 지금은 편하게 보실 수 있을거예요.]
[조박사 : 아니, 됐어.]
조박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결에 나도, 홍선생님도 따라 일어났다.
[조박사 : (홍선생에게) 유리, 잘 부탁드립니다. (윤아에게) 잘 부탁하네.]
조박사는 미련따윈 태어날때부터 아예 없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돌아서서 교무실을 나갔다.
나는 홍선생님한테 꾸벅 인사하고, 급히 조박사를 따라 나갔다.
[윤아 : 박사님! 박사님!]
[조박사 : (멈춰서 돌아보는) ...]
[윤아 : (다가와서, 숨고르고) 정말 유리 안보고 가실건가요?]
... 유리가 교무실을 뛰쳐나간 후 이 시간까지 기다렸던 거라면, 한번쯤 유리를 보고 말 한번이라도 섞고 싶었던 걸텐데....
내가 그것까지 미처 생각못하고 너무 드러내놓고 가시를 곤두세웠다.
[윤아 : 유리한테 다가가는 방법을 모르신다면, 제가 생각한 걸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조박사 : ...?]
[윤아 : 유리... 사랑하세요?]
[조박사 : ...]
[윤아 : 아버지로서 말이예요.]
[조박사 : ...학생.]
[윤아 : 네.]
[조박사 : 왜 그런 걸 묻지?]
[윤아 :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 점은 사과드립니다.(꾸벅) 박사님이 이 시간까지 여기 계신 거, 유리가 박사님한테 잊혀진 딸이었을 뿐이면, 걱정같은 거 없이 벌써 떠나셨겠죠. 돌아가신 제 아버진... 무뚝뚝하신 분이셨어요, 애정 표현도 잘 못하시구요. 그래도 전 늘 사랑받는다는 걸 알았거든요. ^^ 혹시 유리가 그걸 모른다면, 제가 말해주려구요. 유리... 사랑하세요?]
조박사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가, 나를 봤다. 나도 조박사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고 더이상 묻지 않고, 옆에서 그냥 걸었다.
[조박사 : 한 때는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웠고, 한 때는 정말 잊어버렸던 딸이었지.]
[윤아 : ...유리는 박사님 미워하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조박사 : ...]
[윤아 : 그렇다고 그리워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 유리는 박사님 논문을 꼬박꼬박 챙겨 봐요, 자주 여러번 보구요.]
[조박사 : 10년만에 유리를 TV에서 처음 봤지, 정말 예쁘더군.]
[윤아 : 친해지면 더 예뻐하고 사랑하실 걸요? 유리가 얼마나 어린애처럼 맑고 여리고 천진하고 사랑스런 앤지, 아시면요. ^^]
[조박사 : ...유리를 친동생처럼 아낀단 얘긴 들었지만...]
[윤아 : 유리한테 필요한 건 인내와 기다림뿐이었어요. ^^ 어른들이 흔히 저희들한테 잘하는 실수죠. 만사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저한텐 딱! 적성이었지만요. ㅋㅋ]
[조박사 : (훗-)]
[윤아 : 아, 그 다음엔요. 계속 관심을 보여주고 무조건 칭찬하는 거예요. 다음 단계를 강요만 안하면, 자기가 알아서 더 잘해요. 유리는 특히 작은 보살핌하고 관심에도 많은 변화가 있는 애예요. 얼마나 정신없이 변하고 바뀌는지, 선생님이나 우리반 전부가 매일매일이 아주 새로웠다니까요! 그 다음은요, 끊임없이 사랑해주시기만 하면 되요...^^;;; 하긴 그건요,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기네스북감인데... ㅎㅎ 끊임없이 인내하기, 기다리기, 사랑해주기, ... 유리가 언젠가 그걸 화학공식으로 풀던데... (머리 긁적) 헤헤- 전 천재가 아니라서, 하나도 기억 안나네요.]
[조박사 : ...]
조박사는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 앞에 서서 멈춰섰다.
내 마음은 다급해졌다.
[윤아 : 마지막으로 제 생각, 말씀드려도 될까요?]
[조박사 : (본다)]
[윤아 : 저는 박사님이 카이스트에서 얼마나 머리좋은 학생들을 많이 가르치셨는지 모르지만... 유리도 그에 못지 않은 두뇌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박사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딸이니까요. 유리에겐 지금 스승이 필요합니다, 보건소 의사 선생님과 동네 한의원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예전엔 전문의였던 호안 스님의 조언도 받았지만... 사실은 유리의 연구를 구체적으로 제대로 지도해 줄 사람이 없어요. 거의 독학 수준이죠. 외국의 대학연구소에서 유리를 스카웃하고 싶어하지만, 유리의 과거 자폐 증세때문에, 망설이고 있고. 유리도 여기말고는 다른 곳에 적응할 심리적 여유를 갖지못하고 있어서 함부로 떠나지 못해요.]
[조박사 : ...?]
[윤아 : 그래도 대한민국 전국에 초고속망 인터넷이 깔려있잖아요.^^ 장비만 있으면 화상채팅이나, 연구 노트를 스캔해서 얼마든지 연구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구요. 그래서... 전 박사님이 유리의 스승이 되주셨으면 합니다. 스승과 제자로... 그런 시작이 더 편할 수도 있잖아요. 박사님하고 유리같은 별난 사람들이라면요.]
[조박사 : ...별난 사람들이라...?]
[윤아 : 네, 일반인한텐 자연스러운 아버지하고 딸 관계가 별로인 유별난 사람들이요. ^^]
[조박사 : ...]
[윤아 : 유리 이메일 주소 알려드릴까요? 사실 먼저 손 내미는 거, 어른들이 더 서툴고 두려워하는 거 알지만... 이번엔 박사님 차례 같은데요....? 그래서 찾아오신 거 맞죠? (말하면서, 주머니를 뒤지다가) 저... 수첩이나 펜 있으세요? 제가 깜빡하고 안갖고 나왔는데...]
[조박사 : 학생... 아까 들으니 유리가 나오는 드라마를 쓴다고 하던데.]
[윤아 : 네. ^^;;;]
[조박사 : 나야말로 학생 입에서 청산유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군.]
[윤아 : 그거... 칭찬이시죠? ^^;;;;]
조박사는 차 안에서 낡은 다이어리와 펜을 꺼내 내밀었다.
[윤아 : (적으면서) 이건 유리 이메일 주소구요, 우리 학교 전화번호도 적어드릴게요. ^^ 저는 임시 핸드폰만 있어서 그건 알려드리기 좀 그렇네요. 하긴 드라마 끝나면, 저도 학교로 돌아갈 거니까요.]
조박사는 내가 도로 내민 다이어리와 펜을 받아들었다.
[조박사 : 학생.]
[윤아 : 네, 박사님.]
[조박사 : 유리, 잘 부탁해요.]
[윤아 : 네, 유리 아버님. ^^]
[조박사 : 그런데 말야...]
[윤아 : 네?]
[조박사 : 왜 내가 학생한테 자꾸 혼나는 기분이 들까...? 유리한테도 그렇게 해요?]
조박사의 기분과 반대로 난 오히려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윤아 : 전 가족의 느낌을 알고, 박사님과 유리는 그걸 잘 모르니까요. 가족은 사회의 기본 구성이고, 약속인 건 알면서도 소중하게 지키려 노력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혼낸 것도 아닌데, 그런 기분이 드시는 걸 거예요.^^]
[조박사 : ...무슨 말인지 도통...]
[윤아 : -_-;;;]
머리좋은 교수가 중학교 윤리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을 못알아듣다니 =_=;;;;
떠나는 조박사의 차에 대고, 나는 깜빡했던 말을 마저 외쳤다.
[윤아 : 유리 아버님!!! 기왕에 미국까지 가신다니 한국말로 표현하기 어색하면, 영어로 하셔도 되요. 이메일 끝에 I love you라고 꼭 쓰셔야 되요...? 네?]
제대로 듣긴 들었는지 몰라...
유리는... 부모님이 살아계시니까... 언젠간 다시 만나긴 만나는구나...
돈많은 재벌 상속녀인 엄마와 머리좋은 교수 아버지... 그런 건 하나도 안부러운데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거, 그거 하난 부럽다.
갑자기 맥이 탁- 풀린다.
그나저나 드라마팀에겐 유리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내일이면... 유리 괜찮아질라나?
" 꼬꼬꼬- (퍼덕퍼덕) 꼬꼬댁! "
[윤아 : -_-;;; 뭐야, 꼬돌이 너 또 한밤중 광란의 양계장 탈출이냐? 바람피러 딴 닭장에 가는 거 아니면 그만 들어가라, 니가 여기서 갈데가 어딨냐.]
[꼬돌 : (뻣뻣하고 고고한 포즈로, 윤아 지나쳐가며) 꼬꼬꼬꼬-?]
[윤아 : 내가 삼계탕해주랴?]
[꼬돌 : (허거덕- 후다닥 양계장으로 뛰어들어가다가 닫힌 문에 쿠당~)]
[윤아 : 문 열어줄게. (양계장 문 열어주며) 넌 어떻게 탈출은 개구멍으로 나와놓고, 들어갈 땐 정문으로 들어가야 되냐? (한숨-) 우리 학생한테 배울게 따로 있지.]
# 조박사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숙소로 가는 밤길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데 저만치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사람의 움직임이 보였다.
[윤아 : 기다리지 마세요. 저 오늘 유리 아버님 뵈었거든요. 살아있으면 언젠가 그렇게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본데, 죽은 사람은... 그럴 수 없잖아요.]
[선우 : 응, 이젠 안기다린다...]
[윤아 : ...]
예상치못한 뜻밖의 대답.
괜히 기분이 센치해졌다. 그래... 사람은 계기가 없어도 변하기 마련이니까.
[선우 : ...왜, 실망했니?]
[윤아 : ...아뇨, 지금부터라도 현실감갖고 사셔야죠.]
[선우 : (피싯-)]
[윤아 : 우리 '비상'이 끝날 때쯤이면, 갈비탕 얻어먹을 수 있겠네요.^^;;;]
[선우 : ...응?]
[윤아 : 모르세요? 결혼식장 식당 메뉴가 국수에서 갈비탕으로 바뀐게 언젠데.]
[선우 : 윤아야-]
[윤아 : ...네.]
[선우 : 넌... 왜 드라마 쓰니?]
대답하기 싫은 부분을 피해서 서로 화재를 자꾸 돌린다.
[윤아 : ...싫으세요?]
[선우 : 응.]
[윤아 : 왜요?]
[선우 : 니가 이렇게 힘드니까.]
[윤아 : ...]
...그의 어깨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여자의 직감, 이 느낌...
아니, 아니야. 그는 나를, 어린 나를, 지금 힘겹게 버티고 있는 나를 가까이 있는 어른으로서 걱정해주는 것 뿐.
...그것뿐이라해도, 눈물겹게 고마웠다.
청솔고의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걱정해주는 것과 다른 차원으로 다가왔다.
안에서 치솟아올라오는 목메임을 애써 삼켰다.
[윤아 : 그래두 한 회 한 회 끝낼 때마다, 얼마나 행복하고 뿌듯한데요.^^]
[선우 : ...그래?]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그의 말 끝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는 것 같았다.
[윤아 :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선우 : ...]
[윤아 : 그러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기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나는 마치 한 사람의 하수인처럼, 밤마다 밤을 새우면서,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넋이 들려, 그들이 시키는대로 말하고, 가라는대로 내달렸다. 그것은 휘몰이 같았다]
[선우 : ...]
[윤아 : 17년동안 혼불을 쓰신 최명희 선생님이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신 거래요. 그 분도 17년동안 글을 쓰시면서, 당신 자신에게 이 질문을 가장 많이 하셨을거예요.]
[선우 : ...그랬겠지.]
[윤아 : 저도 그랬거든요. 내가 왜 이렇게 현실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에, 인물들에 미쳐있나. 안쓰면 될 것을, 안하면 될 것을, 왜 사서 고생을 하나.]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창작하고 고뇌하는 이들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왜 자신이 이 길을 가려하는지' 가장 많이 물어볼 것이다. 사는 것도 왜 사는지 -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이 인간일진대, 평범치 못한 길을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더더욱.
때로는 행복하고 환희스럽고, 그러면서도 또 자주 내면의 고통스럽고 괴로운 자신의 길에 대해. 신들린 듯이 만들어 놓고서도, 끊임없이 부족해보이고, 자신의 피를 짜내서라도 완벽성을 추구하려고 온갖 몸부림을 치고. 내 몸 하나 편하자고, 돌아서고 외면하려고 귀를 막아도 끊임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결국 돌아오게 되는... 저주라면 저주스런 길에 대해. 그럼에도 써지지 않고 그려지지 않는 부족한 재능이라면, 자살하고 싶은 절망까지 함께 주어지는 이 길에 대해.
[윤아 : 근데 그거 아세요? 전생에 죄가 많은 사람이 작가가 된대요.]
[선우 : 여자로 태어나는게 아니구?]
[윤아 : 훗- 그럼 전 전생에 아주 죄가 많았나봐요. 여자인데다 글까지 쓰고 있으니. ...다음에 태어나면, 다신 글같은 거 쓰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번 생에서 다 쓰고, 털고 말래요.]
[선우 : ...그래서 작가가 되기로 한 거야?]
[윤아 : ...네. 선생님은 왜 연기하고 노래하고 그러시는 건데요? 우연히?]
[선우 : ...]
[윤아 : ...]
[선우 : 최명희 선생님이 이런 말씀도 하셨지. 줄타는 광대가 줄에 살 듯, 소설은 자신의 삶이다. 광대가 광대로서 사는 것은 그의 몸에서 돌아가는 피가 그를 부르기 때문이요, 나도 내 몸에 도는 피가 나를 부르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이다.]
[윤아 : ...]
[선우 : 난, 순수 예술이든 대중 예술이든 창작하고 표현하는 예술가들에겐 광대의 끼가 있다고 생각해. 그것만큼은 숨길 수 없는 법이야. 그 판에서 미쳐살거나, 미쳐가며 분출하지 못하면 병들어 죽거나...그럴테니까.]
[윤아 : 그럼...선생님두 저두 광대인 셈이네요...?]
[선우 : 그렇겠지... (사이) 그것뿐이니? 드라마를 쓰는 이유가?]
그는 대체 무엇을 더 알고 싶은 것일까.
[윤아 : 선생님, 여기선 드라마도 고급 문화생활이에요. ^^]
[선우 : ...]
[윤아 : 처음 여기 왔을 때... 제 손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었다. 정말 아무것도... 어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깨어있는 시간 1분,1초마다... 수도 없는 생각들이 끝도없이 나에게 몰아쳐왔다.
그에게서 받았던 따뜻함이, 그와 보냈던 밤이, 내 안에서 잃어버린 생명이, 나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따뜻했던 성장기의 추억들이,...
살아있다는 것이 고통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무의식적으로 허전한 손을 자주 움찟거렸다. 캠코더라도 있다면, 잠시라도 다른 곳으로 시선과 생각을 돌릴 수 있다면, ... 내 무의식은, 이 고통이 덜해질거라는 것을 아는 듯이.
대전을 떠나기 전, 대전의 작은 오빠네 보내는 짐에 캠코더를 넣어버렸다는 것이 후회됐지만, 다시 장만할 돈이 없었다.
[윤아 : 그 때 우리 교장선생님이 제게 노트하고 펜을 주셨어요. 마음의 소리가 많아서 힘든 것 같은데, 아무거나 써보라고. 그래서 썼어요, 닥치는대로.]
형식에 구애없이 한 번 펜을 들고 써대기 시작하자 머릿 속에서 수많은 영상들이, 생각들이 끊임없이 퍼내지고 흘러나왔다. 배게에 머리를 뉘였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메모를 하고, 콘티를 그리고, 써내려갔다. 형편없고 버려지는 이야기여도 상관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어찌나 그 이야기들이 미칠듯이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던지...
[윤아 : 처음엔 시나리오 기획도 좀 썼는데... 여기선 새 영화를 보러 읍내까지 나가는 것도 만만치않고, 소통할 곳도 딱히 없고, ... 그래서 그냥 묵혀두면서 휴게실에 있는 TV를 많이 봤어요, 드라마를 많이 보게됐구요. 영화하고 비슷한 픽션 이야기잖아요, 물론 많은 부분 차이점도 있지만요.]
[선우 : ...그랬구나. 그럼 대본 습작도 거의 독학이었겠네.]
[윤아 : 네... 인터넷서 대본도 구해 보고, 드라마 까페같은 곳에서 사람들한테서도 많이 배우고 그랬어요. 학교 컴퓨터실에 수업없을 땐, 오락만 안하면 자유롭게 써도 되거든요.]
[선우 : ...]
[윤아 : (선우 귀에 대고 속닥) 왜 드라마를 쓰는지, 하나 더 알려드려요?]
[선우 : ...?]
[윤아 : 선생님이 드라마를 잘 안하셨으니까요.]
[선우 : ...응?]
세상 일은 모르는 거지만, 그런 생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지난 7년간 드라마 출연이 전혀 없었기에, 행여 영화보단 부딪칠 가능성이 덜 할 것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야한다해도, 가능하면 오랫동안 피하고 싶었기에... 그런데...
[윤아 : 근데 주변길로 돌아가려다 오히려 직코스로 간 셈이죠, 직통으로 걸렸어요. 하필이면 첫 데뷔작에 선생님까지...]
[선우 : (씁쓸) ...못됐구나, 그런 잔꾀까지 부리고.]
...네, 저 못됐어요. 그러니까 제가 행여 힘들다고, 저도 모르게 선생님께 기대고 싶어해도... 쉽게 받아주지 마세요. 저 아직도... 선생님의 사소한 배려에도, 별 것 아닌 말 한마디에도... 바보처럼 자꾸 눈물나요. 2년 전...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앞뒤 사방어디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가장 외로웠을 때, 제 손을 잡아준 사람이 선생님뿐이어서 그런가봐요. 제가 맘껏 울 수 있는 가슴을 빌려주고 기대게 해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선생님뿐이어서 그런가봐요. 나이를 더 먹으면서, 푸른 극장에서 절 냉정하게 내친 선생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이젠 원망도 못하겠어서 그런가봐요.
숙소에 거의 다 와서,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저만치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민수 : (놀라서) 에-....?]
민수 선배는 그와 나를 보곤, 막 입에 물었던 담배를 그만 툭- 떨어뜨렸다.
그제서야 아차!!! 싶어서, 나는 버둥대며 그의 등에서 내렸다. 그가 날 업고 있던 팔 힘을 풀지 않으려 했지만...
[윤아 : 서, 선배... 그, 그게... 내가 오다가 자꾸 엎어지니까, 그러니까, 선생님이 보다못하겠어서... 있지, 아, 알죠...? 내가 현기증이 잘 나서... 자꾸 엎어져서...]
당황해서 땀까지 뻘뻘흘리며 변명들을 주저리주저리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2년 전, 병실에서 날 외면하며 나가버렸던 민수 선배의 모습이, 욱이 선배 자취방에서, 그를 흔들지 말라며 다그치던 민수 선배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민수 : (멀뚱) 나 아무말도 안했어.]
[윤아 : ;;;;]
[선우 : (싱긋, 민수 어깨 툭 치며) 본 것도 없지? (숙소로 들어가고)]
[윤아 : -_-;;;;]
[민수 : (시침떼고) 원래 시골은 밤이 이렇게 깜깜한가? 하나두 안보이네.]
...거짓말. 저 논 건너의 집 불빛도 여기서 다 보이는데.
2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이기 때문인가...? 민수 선배가 아까의 나에게 너그러운 것이 당혹스럽다.
[윤아 : 먼저 들어갈게요.(숙소로 가려는데)]
[민수 : 감독님 아직 안주무셔.]
[윤아 : 네?]
[민수 : 낮에 회의하다말고 뛰쳐나갔잖아. 어차피 촬영도 펑크났고, 니가 말한 계곡에 헌팅갔다 왔어. 유리 문제도 있고, 너하고 더 얘기하려고 기다리시는 거 같더라.]
[윤아 : ...]
# 숙소 마당에 들어서자, 박감독이 1층 대청마루의 형광등을 환하게 밝히고 밥상을 펼쳐놓고 입에 담배를 문 채, 촬영 대본을 보며 체크하고 있었다.
대본 옆엔 플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계곡 사진들이 흐트러져 있었고, 박감독 옆에 앉아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그였다.
[박감독 : 어, 왔어?]
박감독 맞은 편에 앉았다.
[윤아 : ...네, 죄송합니다.]
[박감독 : 조유리는 어때.]
그제서야 나는 유리의 상태와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아주 간.단.하.게.
[박감독 : 천재? 아이큐 190? 과학영재? 뭐야, 머리좋은 놈이란 생각은 했지만... 비정상적으로 나올정도로 머리가 좋으면 어쩌자는 거야.]
[윤아 : 잠깐 충격받은 것 뿐이니까, 곧 괜찮아질 거예요.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 못드려서.]
[박감독 : 알면됐고, 유리때문에 펑크난 거 빨리 대처해야 돼, 알지?]
[윤아 : 네.]
[박감독 : (사진 가리키며) 신작가가 말한 계곡 여기 맞지?]
[윤아 : 네.]
[박감독 : 진채진이 하겠대, 그대로 가자. 한 장이든 두 장이든, 오늘 아침까지 촬영나가기 전까지 해당 씬 써 와. (수정하던 대본 내밀며) 이거, 허술하고 불필요해서 뺄 곳 체크했으니까 참고해서.]
[선우 : (걱정스럽게 윤아보는) ...]
[윤아 : (대본 받아들며) 네, 알겠습니다.]
결국 한 쪽, 두 쪽... 쪽대본 훨훨~ 날리는 작가가 됐군 -_-;;;
계곡 씬엔 그 앞뒤 구성이 어떻게 다시 짜맞춰지든간에 대사에 헛점이 없어야 한다. 진채진 계곡 씬말고도 새로 추가로 들어가는 에피소드가 두어개 더 있으니까... 그것들 찾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데도 아침까지 시간이 빠듯하겠군. 하지만 이 부분이 대본으로 나가지 않으면, 촬영을 나갈 수 없으니... 죽는 한이 있어도 써내야 한다.
[윤아 : (일어나며) 그런데요, 감독님.]
[박감독 : 응? ]
[윤아 : 연기자들 빠져나가는 거, 어떻게 막을 수 없을까요?]
[박감독 : 뭐... 지들이 잘되서 나가는 걸 어떻하겠어.]
[윤아 : 그래도 이렇게 자주 교체되면은 리얼리티가 얼마나 떨어지는데요. 실지로 대안학교까지 와서 도중에 다른 학교로 전학가는 건 말이 안되죠, 더더군다나 새로 투입되는 핑계도 전학생은 전혀 말이 안되요. 원래 전학생은 거의 안받는다구요, 일반학교도 아니구. 그나마 여지껏 중간에 휴학했다가 돌아오는 거나, 방학 때 집에 갔다가 안 돌아왔었던 애가 정신차리고 돌아온 그런 정도로 처리를 했지만... 더는 방법이 없다구요.]
[박감독 : (태평) 또 있겠지, 뭐. 웬 엄살이야.]
[윤아 : -_-;;; 새로 대체하는 캐릭터를 전혀 다르게 하려다보니까 자꾸 미숙하게 잡히는 것도...]
[박감독 : 그 정도도 순발력있게 대처 못해?]
박감독은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박감독 : 능력 안 돼? 더 못하겠어? 지금이라도 작가 교체해 줘?]
[윤아 : ...]
입을 앙다물었다.
여긴 냉혹한 프로의 세계다. 더구나 프리랜서인 작가가 창작력이 딸리면, 냉정하게 내쳐지는 건 당연한거다. 현재 '비상'의 객관적 평가 잣대인 시청률 수치가 떨어져있고, 내가 내 분신같은 대본을 주관적으로 봐도, 구성과 캐릭터에 많은 부분 헛점이 보인다.
그렇다고 이렇게 내쳐질 순 없다. 처음부터 나 혼자 전부, 뼈대부터 만들고 다듬어 시작한 내 스토리다. 내 사랑이고, 또 다른 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내 이름을 걸고, 책임지고 -추락이든 성공이든- 함께 할 거다.
[박감독 : 지금 나라고 마냥 부처님 심보인 줄 알아? 신작가까지 징징대지 마, 나 받아줄 여유 없어.]
[윤아 : 죄송합니다.]
[선우 :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
[박감독 : 정확하게 말해, 못하겠음 지금이라도 손들어. 그래야 나도 대책을 세우니까.]
[윤아 : ...하겠습니다.]
[박감독 : 그래, 그럼 지금 올라가서 시작해.]
[윤아 : 네. (사이) 저...]
[박감독 : ...]
[윤아 : 다음 회에 준비된 에피소드를 이번 회에 더 끌어와도 될까요?]
[박감독 : 어?]
[윤아 : 술내기, 교통사고, 그리고 계곡씬... 세 개 한꺼번에 조합시키겠습니다.]
[박감독 : 너무 쎄게 가는 거 아냐?]
[윤아 : 기존 멤버들을 뒤로 밀어놓더라도, 한 에피소드마다 새로 투입된 세 캐릭터들을 한꺼번에 부각시키는게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실지로 그런 사고들은 한꺼번에 터지거든요.]
[박감독 : 알아서 해, 뒷부분의 빈 에피소드는 신작가가 책임지겠지.]
[윤아 : ...네.]
대청 마루를 내려와 신발을 꿰찼다.
[박감독 : 참, 재방송 시간대 변경하고, 새 캐릭터에 대한 ost 제작 요청.]
내가 낮에 회의 때 나눠준 프린트물에 있던 내용이었다.
[박감독 : 그 건으로 연감독하고 국장한테 전화 넣었어.]
[윤아 : ...네에..]
[박감독 : (윤아 안보고) 국장이 예고편 내보낼 분량 나오는대로 올려보내라더군. 일일극하고 미니 전후반 시간대에 내보내겠다고 하네. 교체된 새 등장인물하고 앞으로 있을 에피소드에 관한 내용도 보내주면 언론에 홍보성 기사도 내주겠대.]
박감독 말론 국장은 자기 이름으로 시작한 건 끝까지 책임진다더니... 내가 미처 생각 못했던 홍보 부분까지 언급하며, 소매걷고 나선 모양이다. 하긴 결국 실패의 책임 추궁이 위로위로 올라가면, 국장도 피할 수 없을테니.
그래도 박감독이 이 상황에까지 와서도 대본에 관한한 작가의 책임부분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위임해주는 것, 나로선 이런 감독을 만난 것은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다. 어떤 감독은 아예 대사의 토씨까지 자기가 불러대며 고치도록 강요한다는데...
[윤아 : 서두르겠습니다.]
[박감독 : 어. 수고.]
박감독에게 꾸벅 인사하다가 안쓰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내가 해내야 할 내 몫이니까.
[윤아 : 저... 최선생님.]
[선우 : 어?]
[윤아 : 죄송한데요, 저 링거 좀 놔주실 수 있으세요?]
[선우 : ...?]
[윤아 : 지난 번 보건소에서 영양제 맞을 때, 혹시 몰라서 몇 병 받아왔어요. 근데 제가 주사 바늘을 못 찔러서요.]
늘 실험쥐에 주사바늘을 수도없이 찌르는 유리가 있긴 하지만... 유리는 지금 학교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터였다.
[선우 : (일어나며) 그래.]
# 옥탑방 거실.
그의 손에 한 손을 맡기고 고개를 돌렸다.
[윤아 : 손등에요, 선생님.]
손등이 따끔했다.
모양새야 처량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혈당량이 떨어지면, 평소에 잘 하던 생각이나 단어도 쉽게 떠오르지 않으니... 뭐라도 먹을 수 있다면 이 꼴까지 되지 않았겠지만...
손등의 혈관에 찔러 넣은 바늘과 링거 줄 위에
일부러 반창고를 여러번 덧붙여 단단히 고정시켰다. 키보드를 치다가, 행여 바늘이 흔들리면 아플테니까.
영양제 팩은 내 거처에 옷걸이 가구가 없어서 벽시계를 걸어두었던 거실 벽 못에다가 걸고 노트북을 올려놓은 탁자를 그 쪽 가까이로 끌어놓았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우선 계곡 씬부터... 일단 진채진이 소심한 아이니까, 반 아이들의 텃새가 유별나게 진채진에게 몰리는 분위기로- 계곡 씬 전에 교실과 기숙사 방에서 미리 그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그 분위기로 이어져서 진채진이 계곡으로 반 아이들한테 떠밀리다시피해서 앞장서서 가는거야. 진채진을 가장 눈엣가시로 보는 아이는... 공주과 '승희'? 그렇다면 승희의 얄미운 대사 비중이 높아지는데... 평소 안좋게 봤다해도 무조건 이유없이 얄밉게 가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진채진이 승희에게 무슨 작은 실수라도 해서 그동안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서 진채진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게 할 계기가 필요한데...
그러고 보니 피싯 미소가 나왔다.
승희의 캐릭터를 만들 때, 모델삼아 떠올렸던, 1학년 때 나와 다투기도 많이 다퉜던, (중간에 유학간다고 자퇴하고 떠난) 박은경이 생각났다.
호안 스님의 권유만 아니었다면 입학은커녕, 있었는지도 몰랐을 학교였기에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청솔고는 안팎으로 나를 실망시켰다.
낡고 허름한 학교 시설과 학교와 밖의 경계선이 어디인지 모를...울타리조차 없는 운동장.
완전 자유로운 차림에 화장이며 염색, 악세사리 착용도 전혀 규제하지 않는다.
수업도 아직까진 교과서조차 나눠주지 않은 채 학교 적응과 학습에 대한 학생들의 질문만 받고 있었다.
일반 학교에서도 선생을 무시하고 뒷자리에서 딴짓하는 광경이야 다반사였지만, 교실 안에서 이렇게 대놓고 껌을 씹고, 선생이 들어오든말든 인사도 없이 친구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가며 수다를 떨고, 음악을 듣고, 만화책을 보고, 맘대로 교실을 들락날락거리고, ... 이런 난장판도 과연 학교 교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더더군다나 기막힌 건 선생들의 태도였다. 자기 쪽을 보라고 탁자나 칠판을 치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아주 태연했다. 월급은 타면서, 이렇게 자기도 놀면서 시간만 대충 때우는 건가?
난 그동안 여기 사람들과 거의 말 한마디도 섞지 않고, 뒷좌석에 앉아서, 등록금만 반환된다면 빨리 그만둬야겠다... 그런 생각을 잠깐하고, 다시 괴로운 기억들이 몰려오기 전에, 곧바로 머릿속을 비우려 창밖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지금 사람 무시하냐? 너 2년 꿇었다매?"
휙- 여자애를 쳐다봤다.
여자애와 그 주변을 둘러싼 다른 여자애들의 모양새에서 왜 나한테 시비조의 말을 걸었는지, 대뜸 알 수 있었다.
여기서까지 서열을 만들겠다는 건가...?
피싯- 웃음이 나왔다.
"뭐야? 왜 기분나쁘게 웃어?"
이런 애와 말 섞고 싶지 않았다.
여자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어쭈- 니가 아웃사이더처럼 굴면, 뽀대가 나는 줄 아나본데 여기 애들 다 전 학교에서 한 가닥씩 한 애들이야."
짐짓 한숨이 나왔다.
몇일전부터 한두마디씩 말을 붙여보던 것과 달리 쉽게 물러날 것 같지않았다.
[윤아 : (차분히) ...살자.]
"뭐? 방금 뭐라고 그랬냐?"
나는 거칠게 옆의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우당탕- 그 앞의 책상까지 도미노처럼 넘어졌다. 바로 그 앞 책상에 앉아있던 키만 멀대같이 큰 해준이가 '허억!' 놀라서 방방 뛰었다.
[윤아 : (차분) 조.용.히. 살.자.구.]
여자애들 대부분은 내가 나이도 있는데다가 거칠게 나오자 주춤거렸지만 처음부터 시비를 건 여자애, 은경인 더 독이 올랐다.
은경인 대뜸 내 머리를 휘어잡고 늘어졌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휘둘렀다.
[해준 : (방방 떠다니며) 으악! 으악! 쌈났어요!!!! 선생님!!! 선생님!!!]
그 당시 악 밖에 남지 않았던 난 어떻게 할 수 있었던건진 몰라도 은경일 교실 뒷벽으로 밀어붙여 뒷통수를 몇 번 찧게했다.
[윤아 : (싸늘) 나 안그래도 세상 안살고 싶은 사람이거든...? 니가 나 죽게 해줄래?]
[은경 : ...]
[홍선생 : (교실 들어오며) 무슨 일이야?]
[윤아 : (은경 탁 놔주고, 태연히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어들고 의자에 앉아 책보는)]
[홍선생 : (윤아 보고, 은경 보는)]
[은경 : 에이, 씨발... (교실 나가고)]
그 후에도 은경인 언니 격인 나를 어떻게든 이겨먹어보려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댔다.
그 덕에 나는 은경이와 읍내에 나가 기절할 때까지 술 내기를 하기도 했었고, 술기운에 차도로 뛰어드는 위험한 짓도 했었고, 한 겨울에 얼음같이 차가운 계곡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짓도 청솔고 역사상 처음으로 벌이기도 했다.
이미 사고뭉치들만 보아오며, 웬만한 일엔 강심장이 된 청솔고 선생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들로 나는 선생님들의 위선없는 모습에 점차 신뢰를 갖게 되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나 할까.
은경이와의 술내기로 죽기살기로 정신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언제 기절했는지도 모르다가, 병원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내 옆엔 홍선생님이 서 있었다.
[홍선생 : 정신 들어? 괜찮아?]
[윤아 : 목말라요, 물 좀 주세요.]
[홍선생 : (물 주며) 탈수 증세야, 술을 그렇게 마셔댔으니.]
[윤아 : (물 마시고) 은경인요?]
[홍선생 : (옆 침대 가리키며) 아직 안 깨어났어.]
[윤아 : (피싯)]
[홍선생 : 웃음이 나와?]
[윤아 : 제가 또 이겼어요.]
[홍선생 : 그래, 축하한다! 축하주 한 잔 사야지? ^0^]
[윤아 : (황당) 선생님은 그게 제자한테 할 소리세요?]
[홍선생 : 어쩌냐, 일은 벌어졌고. 너는 이겼다는데, 내가 할일은 니 손을 들어주는 것 밖에.^^ 신윤아 판정 승!!!(^0^)/ ]
[윤아 : (피싯-)]
[홍선생 : 왜 또 은경이하고 술싸움까지 한 거야?]
[윤아 : 몰라요, 쟨 제가 무조건 싫은가봐요.]
[홍선생 : 그래도 그렇지, 술 잘못 마시면 죽는 거 몰라?]
[윤아 : 그럼 죽죠, 뭐.]
[홍선생 : 넌 이 세상에 대체 뭐가 불만인데? 어? 말만 해!! 이래뵈도 내 (자신을 가리키며) 아줌마 펀치가 좀 쎄걸랑? 내가 한 방 먹이고 올게.]
오늘까지 그도 나오는 늦은 오후의 계곡 씬을 촬영하지 못하면...? 내일 방송될 '비상'은 어떻게 되는거지...?
[민수 : (매달릴듯) 나, 나현아!!!]
[나현 : 안돼요!!! 이 쪽도 벌써 10년째 전속계약된 곳이라 함부로 펑크낼 곳이 아니라구요!]
[선우 : (나현의 손에서 핸드폰 낚아채고) 여보세요, 최선웁니다. 네... 이 곳 스케쥴이 갑자기 변경되서요. (듣는) 네... 그럼 이렇게 하죠. 지금 출발할테니까, 제가 도착하는대로 시작할 수 있게 세팅같은 거 모든 준비 끝내주세요. 늦어도 그 곳에서 3시엔 출발해야 됩니다, 끝나지 않아도 출발할 겁니다. 그래도 다른 날로 변경이 어려우면 그렇게 합시다. 네- (끊고, 나현에게) 나현아, 지금 출발하자. 요기는 가면서 하고.]
[나현 : 네!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가고)]
[민수 : 삼촌! 올거지? 올거지?]
[선우 : 방금 들었잖아, 최대한 서두를게. (민수 손의 대본 낚아챈다) 이건 내가 가면서 볼게, 너는 신작가한테 다시 받아. (박감독에게) 서둘러 오겠습니다. (방에 들어가 웃웃 걸치고 나오고)]
[박감독 : 네.]
[윤아 : ...]
[박감독 : 신작가.]
[윤아 : 네.]
[박감독 : 만약을 위해서 계곡 씬에서, 최선생 부분을 유선생 것으로 바꿔서 대본 하나 더 여분을 만들어야겠어.]
[윤아 : 네.]
[선우 : (멈칫, 윤아 보고) ...]
[윤아 : (선우 안보고, 계단 올라가고)]
[나현 : (2층에서 내려오다가, 윤아 스쳐내려가고)]
그와 나현이 서둘러서 떠나는 것을 보고, 다시 계단을 올라가는데, 2층 문이 열리면서 유성린이 고개를 내밀었다.
[윤아 : (꾸벅) 안녕히 주무셨어요.]
[성린 : 응. ^^ 들어와- 아침 먹자. 어젠 뭐 좀 먹었어?]
[윤아 : 아, 아뇨. 어제 것도...]
[성린 : 응?]
[윤아 : 아, 아니예요.]
그가 새벽에 올려 온 음식이, 거의 남아있었다. 하지만 유선생에게 그걸 굳이 이야기해서 아침부터 기분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유선생이 이끄는대로 2층 거실로 들어갔다.
여분 대본을 만드는 것은 약간의 여유를 가져도 될 듯했고, 유선생한테 상황 설명도 해야했다.
[예지 : 어머, 또 밤샜나보네. 얼굴이 저래갖구 화장이나 한 번 제대로 해보겠어?]
[윤아 : -_-;;; 곧 새로 에피소드들 추가된 새 대본 올라올거예요. (모두에게 꾸벅,꾸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성린 : 회의대로 하기로 한 거야?]
[윤아 : 네.]
[성린 : 그것때문에 신작가도 고생하는데, 너무 그럴 거 없어.]
[윤아 : ...네에-]
[성린 : 밥 먹을 수 있겠어?]
[윤아 : ...잘 모르겠어요, 그냥 숭늉이나 있으면 그거나 좀 마셔볼래요.]
[성린 : 그래라, 지금 만들게.]
[윤아 : 제가 할게요.]
[성린 : 기왕에 손에 물 묻힌 사람이 할게, 신작가는 밥 먹는 시늉이라도 해 봐.]
[채진 : 괜찮으세요? 얼굴이 하얘요.]
[윤아 : 괜찮아, 그나저나 채진씨 오늘 괜찮겠어? 그 계곡 물, 한 여름에도 굉장히 차. 그리고 절벽 쪽에서 뛰어내리는 거면 줄없이 번지점프하는 거라고 봐야하는데.]
[채진 : (허억-)]
유선생한테서 숭늉을 받아들었다.
촬영이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박감독의 실력에 방송은 어떻게든 펑크나진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손등에 남아 있는 반창고의 접착제 일부와 주사 바늘이 꽃혔던 흔적을 보자 괜히 그 부분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따뜻한 숭늉물을 들이켰다. 안도감이 들어서인지, 낱낱히 곤두섰던 신경들이 이제는 많이 누그러졌는지 속에서 거부감없이 받아들인다.
# 그가 펑크낼 때를 대비한 여분의 대본까지 만들어 유성린에게 넘기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계곡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카메라 리허설이 마음에 걸렸다. 진채진이 하겠다곤 했지만, 리허설은 다른 스탭이 해야할 것 같은데 그 절벽 높이가 만만찮기 때문에... 쉽게 자청할 이가 없을 듯했다.
내가 하자고 주장했으니, 내가 책임져야지...에구구... 하여튼 난 사서 고생하는 팔자인가보다.
계곡의 촬영장에선 한창 촬영 장비 세팅 중이었다.
나는 계곡의 절벽으로 올라갔다.
카메라 높낮이를 지지하는 장비 설치가 어려워 일단 내 뒤에서 카메라를 따로 한 대 더 설치하고 있던 카메라 감독과 조명 감독이 나를 모델로 렌즈의 방향과 빛의 각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몇몇 각도의 감을 미리 잡아뒀다.
"위에 준비됐으면 시작하세요. 지직-"
카메라 감독의 무전기를 통해 아랫 쪽에서도 리허설 준비를 마쳤다는 연락이 왔다.
나도 준비됐다는 신호로 카메라 감독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 계곡의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섰다. 높은 곳의 바람이 물의 찬기운만큼이나 서늘하다.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숨을 고르며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봤다.
낮에도 별을 볼 수 있는 곳... 난 항상 이 곳에서 서면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무거운 육신의 탈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영혼만으로 우주를 유랑하고 싶다...
두 팔을 펼친 채 절벽 끝을 가볍게 탁-! 발끝으로 차내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계곡 물 길을 따라 곧바로 물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나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 한 때는 이 물 속이 온통 내 손목에서 흘러나왔던 피로 물들여졌었는데도...
저기 아래로 안전 그물이 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은 숨을 참을만했다, 그물이 잘 쳐져있는 건지 확인하려 아래 쪽으로 내려가려 했다.
풍덩-!!
누군가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 내 쪽으로 헤엄쳐오더니 나를 잡아 물 위로 끌어올렸다.
수면 위로 떠오른 뒤에야 나를 끌어올린 사람이, 그라는 걸 알았다. 그는 그의 손을 뿌리치는 나를 억지로 물 밖으로 내보내고, 그도 나왔다.
[윤아 : (주저앉은 채, 앞에 앉아 윤아를 살피는 선우에게 버럭) 저 수영할 줄 알아요!!! 수영할 줄 안단 말이예요!!! (카메라 가리키며) 이거 카메라 테스트였다구요!!! 선생님 도대체 왜 이러세요, 네?]
그는 얼굴이며 온 몸에서 물 뚝뚝 떨어뜨리며 -내 말이 끝날 때까지- 표정없이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에게서 고개돌려 나현(놀라서 우리 가까이로 달려와 뻣뻣하게 서 있는)을 보며 일어섰다.
아.... 난 갑작스레 놀라서, 그에게 마구 퍼부어대면서 미처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말없이 굳어버려 일어나 가버린 것도...
[나현 : 선생님이 너한테 해꼬지라도 하시디? 니가 들어가서 한참을 안나오니까, 무슨 일 난 줄 알고 놀라서 뛰어들어가신 거 아냐!]
[윤아 : ...]
[나현 : 너 어디가서 내 친구라고 하지마, 알았어?]
나현이가 팩-해서 돌아서서 밴의 운전석으로 가버리고, 나는 내 실수에 대해 상당히 난감해졌다.
수건으로 어깨를 감싸며 밴으로 다가가, 뒷 문 옆에 섰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면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나오다가 나를 보고 흠칫했다.
[윤아 : (고개 숙이며) 아까 버릇없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선우 : ...(보기만)]
[윤아 : (돌아서려는데)]
[선우 : 왜... 니가 뛰어내렸니.]
[윤아 : 채진씨가 두 번은 못뛴다 할까봐요.]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선우 : 나현아, 윤아 숙소에 데려다주고 와라. 저대로 있으면 감기걸려.]
[윤아 : 아, 아니예요. 지름길을 아니까, 그리로 가면 금방이예요.]
행여 그가 다른 오버 액션을 할까봐 서둘러 촬영지를 빠져나갔다.
# 숲의 오솔길을 걷는 내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입고 있는 옷 전체가 젖어있으니, 나현이가 건네준 수건도 별 소용이 없었지만,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고 하늘 저 켠이 노을로 물들어가면서 갑작스레 추위가 느껴져 상체에 두른 수건을 다시 고쳐 둘렀다.
그에게 한 실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젠장, 다른 곳도 아니고... 그에게 거절당했던 마음이 힘들어서... 그와 나의 우리 아이를 잃어버린 것이 고통스러워서... 죽으려고 손목까지 긋고 들어갔던, 그 계곡 물 속에서 느닷없이 그가 도깨비처럼 튀어나왔으니, 내가 그 순간 어떻게 멀쩡하게 그를 대할 수 있었겠어.... 더 퍼붓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내 팔을 잡아당기면서 내 몸 전체를 돌려세웠다.
[윤아 : 0.0]
입은 벌렸으나, 말이 나오지 않고 놀란 눈만 커다래졌다.
다음 순간, 그는 나를 끌어당겨 꼭 끌어안았다.
[선우 : 사랑한다, 신윤아.]
내 귓가에 대고 하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발음 분명한 말에 ... 그만 심장이 멎어버린 줄 알았다.
[윤아 : 서, 선생님...]
[선우 : 미안하다... 널 사랑해서...]
나는 그제서야 그의 말 의미를 정확히 알아듣고는 그를 확- 밀쳐냈다.
그는 비틀거렸고, 나는 숨이 마구마구 가빠지기 시작했다.
[선우 : ...]
[윤아 : 장난... 치지 마세요.]
[선우 : (멍해지더니) ...장...난?]
[윤아 : (목소리 톤 점좀 높아지는) 선생님은 이미 절 여러 번 버리셨어요, 잊으셨어요? 전... 선생님 말 절대 안믿어요. 전 선생님 사랑하지 않아요!!!]
[선우 : 윤아야, 그건...]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 늦어버린 그의 고백이, 그의 마음이, 안타까웠다...
[윤아 : (애원조) 이건 아니라는 거, 선생님이 더 먼저 아셨잖아요. 선생님 사랑은, 유선생님이지 제가 아니예요. 전... 흡-]
갑자기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고 그의 힘에 끌려가다시피, 오솔길 옆 풀 숲 뒤에 그와 마주한 채 웅크려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저 눈만 똥그랗게 뜬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저만치 계곡 쪽에서 이 쪽으로 다가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민수E : 삼촌, 삼촌-]
[나현E : 선생님! 선생님! 어디계세요?]
[민수E : 이 쪽이 아닌가본데? 저 쪽으로 가보자. 삼촌- 삼촌- 어딨어? 곧 촬영 들어가요!]
민수 선배와 나현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내 입술에서 그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그와 아주 가까이... 얼굴을 맞댄 채 마주보고, 서로의 눈을 보고 있었다.
[선우 : (윤아 두 어깨를 꽉 잡고, 나즈막히)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거다. 변하는 건 없어.]
[윤아 : ...]
[선우 : 아까 네가 물 속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미쳐서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늦기전에 너한테 말해줘야 된다고 생각했어. 2년 전 네가 나한테서 갖고 싶어했던 거, 이미 가졌다는 거...]
[로맨스 소설]<<흡혈귀 마녀와 동침을II-09>>
안녕하세요, 연지바른 마녀입니다. (_ _)
첫번째 소식, 컴퓨터 고쳤습니다 (아싸라비아~~ ^0^)
MS사 기술지원팀에서 여러 날, 여러 사람들이, 여러 상황을 체크해보더니...
소스를 고치려면 직접 컴퓨터를 봐야한다고 해서... 그 곳 사무실에 들고 갔었더랬습니다.
결국... 데이타를 날리지 않도록 배려해주면서, 윈도우를 다시 깔아주더군요. -.-;;;;;
그래도 끝까지 책임감있게 최선을 다해 노력해 준 기술지원팀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
두번째 소식, 네이트 말고 다른 게시판을 이리저리 찾다가... 한 군데 더 둥지를 틀었습니다.
출판할 수 있는지 원고를 보냈더니, 그 출판사가 운영하는 게시판에 올려보라더군요.
글 형식이 생소하니 우선 네티즌의 반응을 보자- 는 출판사의 소심한 반응에 무척 실망했지만... (그래도 네이트의 님들이 글 형식에 대한 의견을 써주신 리플들이 있어서... 의기소침해있던 저, 다시 용기 얻었답니다.)
첫 회부터 네이트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전문적이고 날카로운 지적들이 올라왔기에... 계속 올려서 조언을 받으려합니다.
그 곳은 <막 흡혈귀 마녀와 동침을 I>부터 연재 시작됩니다.
http://e-novelist.com/index.htm 의 연재소설 게시판입니다.
세번째 소식, 제가 또 다시 갈림길에 섰습니다.
괴로워 죽을 것 같습니다.
원인은... 그저 돈이 웬수입니다 -.-;;;;
지난 번에 쌀 사려 통장을 조회해봤더니, 한달치 생활비밖에 안남았더군요.
1년동안 알바해서 번 것, 생활비만 지출하고 나머지... 머리핀 하나 안사고 꼬박꼬박 모은 자금이, 백조 생활 반 년도 채 못버티네요...에효-
그 알바하기 전에도, 이런 갈림길에 섰더랬습니다.
그 땐 첨에 호기있게 "굶더라도 글 쓸 거다!!! 아니면 내 인생 여기서 쫑내자!!" 이랬는데,
일주일 넘기고 항복하고 말았죠 T_T
(사흘 굶으면 남의 담도 넘는다는 소리- 뼈저리게 알겠더군요)
결국 셀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날리고, 기억이 헷갈릴만큼 수도없이 거절당하고...
간신히 알바를 구해서 1년을 일했는데...
그 때 미완성이었던 다른 스토리... 아직도 미완성입니다.(이것도 소설로도 써서 연재하고 싶었는데...)
여기 게시판에서 보면, 학업하면서, 직장다니시면서 꿋꿋하게 글 잘 쓰시는 님들 많으신데...
부끄럽게도 저는 체력딸려서 하나밖에 올인을 못합니다 -_-;;;
지난 1년간 일하고 돌아오면 힘들어서 그저 잠만 퍼져 잤더랬죠,
그러면서 글 못쓰는 스트레스덕에, 허구헌 날 소화불량에 편두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1년도 겨우 견디다가 일을 관두고, 글 쓴다고 다시 잠수탄건데...
꼭 스토리의 중요한 시점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네요.
글쓰기는 뒷전이 됐고, -오늘부터 하루에 열 통 이상 이력서를 날리자- 뭐 그런 계획이 수립(?)됐는데... 이것도 만만찮네요.
할 줄 아는게 거의 없는데다, 나이가 많아 이력서 보낼 곳이 거의 없더라구요.
마음이 항상 콩밭에 있어, 남의 일을 열심히 해 줄 자신이 없어
간단한 단순 업무같은 분야를 찾다보니 더 그렇네요.
그러다보니 갈수록 아쉬운 것이, 출판에 대한 미련입니다...
얼마 안되더라도, 지금처럼만 최소의 지출만 하면 여러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듯 한데...
'에라, 허황되게 뜬구름 쳐다보지 말자'... 그러면서 제 마음을 저 혼자 다독이고 있습니다.
그럴 듯한 결과물이라도 하나 만들어놓아야, 어느 방향이든 길을 터볼텐데...
또 다람쥐 쳇바퀴돌듯... 여전히 제자리인 듯한 막막함뿐입니다.
현재... 모든 것에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저도, 글작업도, 이 이야기도.
내일은 없다, 미래는 없다.... 그런 문장만 머릿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습니다...
네번째 소식, 어제 아침 TV에서 故人 길은정님의 추모 방송을 봤습니다.
방송인으로 20년이었다고 하는데, 저와는 인연이 없는 분인지 TV에서 거의 본 적이 없네요.
그 방송을 보는 내내... 이 이야기를, 윤아를,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신 분에게도, 지금도 투병 중인 이 세상의 환자분들에게도...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삶에서 가장 최악인 투병과 죽음을 이야기 소재꺼리로만 보고 다뤘다는 것이요.
...반성에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또 그런 소재의 글을 쓰게 된다면, 그 일을 실지로 겪고 있는 분들에겐 말 그대로 시시각각이 생존 투쟁인 것을... 절대 잊지않으렵니다...
비록 말뿐이겠지만, 이야기 시작 전에 한 줄이라도... 죄송하다는 말, 꼭 넣으렵니다.
오랜만에 들어오니... 너무 수다가 길어졌네요.
죄송합니다. (_ _)
<8회 리플 답변입니다....>
좋은아이 (2004/12/14 10:22)
윤아가 너무 힘들어하는거 같아서 마음이 아퍼요...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거 정말 어려운 일인거 같아요..
--> 동감입니다...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도...쉽지 않을터인데...
요즘은 드라마에선 허구헌 날 바람피는 얘기, 불륜 얘기... 에잇!
닉네임 (2004/12/14 10:32)
마녀님~~ 드뎌 오셨군요... 넘 오랫만에 오시는거 같어요... 님 기다리다 제 눈알 빠졌어염...ㅠㅠㅠ 선우의 마음이 많이 아프고 괴롭겠어요.. 윤아의 자살기도 사실을 알았으니.... 서로가 사랑하면서도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네요.... 선우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해라니.. 이사실을 선우가 또 안다면 고통 그 자체겠죠...이제 서로에게 한 발짝씩 다가섰으면 좋겠어요..마음이 시키는대로 말이죠...ㅠㅠㅠ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는 선우와 자해로 견디는 윤아의 모습에 가슴 넘 아파오네요... 마녀님~~ 담부터는 조금 빨리 오세요~~~ 아셨죠?? 다음편 기다릴께요~~~ 건강조심하시구요..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 닉네임님의 이 리플을 자주 생각하다가 ^^;;;
"이제 서로에게 한 발짝씩 다가섰으면 좋겠어요..마음이 시키는대로 말이죠...ㅠㅠㅠ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는 선우와 자해로 견디는 윤아의 모습에 가슴 넘 아파오네요"<--이 부분...
덕분에 9회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다니 (2004/12/14 10:33)
항상 님의 글을 재밌게 보고 있답니다. 넘넘 안타깝네요...
--> 저두 안타까운.....ㅠㅠ
은빛여우 (2004/12/14 11:03)
마녀님 반가워요 ..건강은 하시죠 .오늘도 잘읽고 갑니다... 화이팅!!
--> 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끼니때마다 소화제를 동반하는데...흠.
숲 (2004/12/14 11:30)
비상이 잘나가는건 좋지만 윤아가 저렇게 자해를 하는건 너무나 안쓰럽고 가엾어여.. 죽음과 같은 고통을 이기고자 택한 방법이 자해란것에 윤아가 너무 힘들어 하는것 같아 제맘이 다 아리네여~~ 윤아는 언제나 되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수 있을런지여??
-->글쎄요... 마음의 안정이라... 윤아와 선우같은 사랑에 안정이 가능할까요....ㅠㅠ
조윤경 (2004/12/14 11:52)
항상 게시판에 들어오면 마녀님 글이 있는지 확인을 한답니다... 마녀님이 힘들어하시는것이 유나가 힘들어하는것과 내용은 다른것 같지만 글쓸때 힘들어하는것은 비슷해요! 아푸지 마시고 넘 신경쓰지마시고 편하게 글올려주세요^^ 그래도 넘 늦게 올려주시지는 마시구요...
--> 에고... 넘 죄송, 게시판에 올때마다 제 글을 찾으신다니...
윤아의 시점으로 가면서, 제가 겪고 느끼는 많은 부분이 걸러지지 않고 드러나기도 합니다.
사실 쬐끔 의도적인 것도 있구요... 모르는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만 몇 시간 앉아있으면 뚝딱!하고 글이 나오는 줄 알기에...(사실은 가끔 생각합니다... 글이 뚝딱!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었음 좋겠다...라고 ㅎㅎ)
허브향기 (2004/12/14 12:46)
목빠질뻔 했어요! 왜이렇게 뜸하게 오세요! 힘드신건 아는뎅 향기는 이글 읽고 나면 완전히 패닉상태가 되거든요!그런데 왜 이글을 읽는데 힘이들까요.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버린듯한느낌과 앞으로 선우가 아파야하고 그아픔중앙에 윤아가 서있어야 한다는것이 너무 아파요!자주좀 봐요 마녀님.....부탁이예요!
--> 향기님은 상당히 예민하시네요... 쓰는 사람의 느낌을 같이 공유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이런 님을 굉장히 무서워합니다... -_-;;; 어느 부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딱! 찝어내실 것 같아서리... 대신 정말 혼신을 다해 쓰고나면 제일 먼저 불러다 자랑하고 싶은 님이기도 하지요 ^_-)
저 이 이야기 쓰면서... 전 편보다 딱 3배정도 더 힘든 것 같거든요.
선우가 아니라 윤아의 이야기라서...
박기자 (2004/12/14 13:05)
오랜만에 글을 보아서, 반가웠는데,, 넘,, 안쓰럽고 맘이 아프네요 윤아가 넘넘 힘들어해서,, 참,,, 선우도 그렇구,,,,,, 그냥 서로의 맘을 확인할수 없나요? 아직까지두 서로를 사랑하구 있다는걸,,,, 사랑이 아닌가 싶기두 한데,,, 담에는 밝은 내용이었음 좋겠어요, 이제,,, 윤아가 힘들어하지 않는,,,,
--> 사랑은 맞는데... -.-;;; 사랑이어서는 안되는 사랑이라 그런거겠죠...
"서로의 맘을 확인할수 없나요?"<--상당히 무시할 수 없는 리플 발언!!! 이었기에...닉네임님의 리플과 동등하게 9회 스토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지니 (2004/12/14 13:09)
윤아의 모습이 처절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것 같아요. 첨엔 왜 그렇게 자해를 할까...? 궁금하다가 끝부분에서 알게 되었네요. 그리고, 1부 기억해요. 특히, 잠들겠다고 하면서 죽어가는 윤아의 모습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윤아와 선우가 어떻게 이어나갈지 아주 궁금합니다. 참, 건강은 회복되었는지요?! 정말 멋진 글입니다... 기다림의 몇 백배의 행복함을 안고 갑니다. 담엔 넘 늦게 올리지 마세요... 저말구도 목이 빠지는 사람 너무 나올까 걱정이 되는군요. 팟팅!!!
--> 음... 혹시 주변에 투병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잠들겠다고 하면서 죽어가는 윤아의 모습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윤아의 마지막 말의 의미를 아시는가해서요.
지독한 통증에 마약류의 진통제도 듣지 않는 환자같은 경우는, 통증때문에 잠깐이라도 편하게 잠들기 힘들다고 합니다... 저도 편두통에 시달릴때면, 이미 진행이 많이 된 상태까지 가서 늦게서야 약을 먹으면 효과가 나타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구요. 그동안은 아픈 걸 잊게 잠들 수 있으면 좋은데, 잠을 전혀 못잡니다. 눈이 빠지는 것 같고, 계속 머리 아프고, 토할 것 같고, 울지도 못하죠...(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거 사람 잡습니다... 단순한 편두통도 이럴진데... 만약 제가 김윤아같으면 자살했을겁니다...부모님만 눈에 안밟힌다면...;;;)
그래서... 윤아의 "좀 오래 잘게..." 이 말... 단순히 폼나는 말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윤아와 선우가 어떻게 이어나갈지 아주 궁금합니다" <--이러시면 저, 자꾸 손이 근질근질해집니다 ^^;;; 뒷이야기를 그냥 막 해버리고 싶어요...;;;;
시인 (2004/12/14 16:17)
넘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 마녀님.. 흑흑 미워요.. 그리고 내 닉네임두 (홈피왜.. 다른곳) 마녀 랍니다.왠지 친숙 .... 항상 감기 조심하시구요.. 빨리 또 만나길 바랄꼐요 ^^
--> 아... 그러시구나, 시인님두 마녀님이시군요...^^;;; (동지 만났당~ㅋㅋ)
네...감기 조심할라구, 방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답니다.
옥탑방 웃풍이 워낙 쎄서요... 불편해도...그러면 덜 춥거든요.^^
그렇긴해도 손이 꽁꽁 어는 건 달리 방법이 없네요, 장갑끼면 키보드치기 힘들어서 못끼고...
mommy (2004/12/14 19:23)
요새 계속 바쁘고 해서 여기 거의 못 들어오다가 오늘 어찌 저찌 시간이 나서 들렀다가 마녀님 글 보고 행복한 맘으로 글을 열었는데... 윤아가 또 내 속을 새까맣게 태우네요.. ㅡㅜ 예전에 선우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은탓인가요.. 그래도 이렇게 고생하는거 보면 언젠가는 좋은날이 오겠죠? 근데요 혹시 윤아의 투통이 혹시 그런건 아니죠?? ^^;;;;
--> 허걱!!! 제가 아무리 재능이 없어두, 설마 한번 써먹은 설정을 또 써먹겠습니까...^^;;; 절대 아님!!! (이 세상엔 약없이 살 수 없는 만성 편두통 환자가 많답니다, 단지 편두통... 그러나 사람잡는 편두통 -_-;;;)
"예전에 선우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은탓인가요"<--글쎄요... 표현 방법이 달랐을 뿐, 마녀...윤아도 선우를 많이 사랑하지 않았나요....
대님 (2004/12/14 22:07)
윤아가 너무나도 안타까와요. 저렇게 피를 말리는 작업을 해야 하는 건가... 언제쯤이면 마음으로부터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아예 그런 건 없는 걸까요?
--> "피를 말리는 작업을 해야 하는 건가"<--글쟁이 팔자지요 T_T;;;;
마음으로부터의 행복...이라... 그게 뭘까요...흠...(대님 미오요... 왜 저를 고민모드로 빠지게 하시는지...)
사악고슴도치 (2004/12/15 12:49)
윤아의 마음이 너무 아픈거 같아서 ..이를 어째야할지...전편에서 조금 장난기 틱한 선우에 말이 이젠 너무 진진하네요...왠지 다른사람보는듯한 느낌...뭐 전편과 별로 연결이란 생각도 이젠 안들지만요..하지만 멋져요~~! 두사람에 모습......기대가 되네요
--> 항상 생각하지만, 닉네임이 넘 멋짐!!!
"왠지 다른사람보는듯한 느낌...뭐 전편과 별로 연결이란 생각도 이젠 안들지만요"<--이 부분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진 연지바른 마녀... 이걸 좋다고 봐야하나, 나쁘다고 봐야하나...
(아직까지 결론 안났다는 -.-;;;)
바이올렛 (2004/12/16 16:04)
처음부터 여기까지 쭈욱~~ 어제낮부터....지금까지...틈틈히 읽었네여...넘넘 재밌구..감동적이에요...일편에선 눈시울을 적시더군여....마녀님 덕분에 좋은글 접하게 되서 넘 기뿌구여......다음글은 얼마나 기둘려야 되는건지...하핫~^^;; 계속계속 읽고싶어지네여.....좋은 하루하루 보내시구요~ 늘 건강하세요~!!
-->허걱! 처음부터 여기까지 쭈욱~~ 그렇게 봐도 과연 볼만한가요...?
요즘 폐쇄적인 출판사들에게서 왕무시를 계속 당하다보니... 혼자 엄청 의기소침에 소심해져서리...'이건 아무래도 종이책으로 나갈 수 있는 스토리는 아닌 것 같아...흑흑...빚내서 자비 출판해도 아무도 안볼거야...T_T 게시판 소설일뿐야...' 이딴 부정적인 생각만 자꾸 들어서요! 에잇!!!
임경옥 (2004/12/21 15:02)
술과....자해......저렇게까지 힘들어하는 윤아가 가엽네요.......저렇게 하는 윤아를 보는 선우도 힘들고......윤아랑 선우 둘이 조금만 아파하고 조금만 힘들어했음 좋겠네요......그동안 휴가라서 이제서야 님의 글을 읽었네요....다음편은 좀 더 빨리 올려주세요~~~
--> 휴가는 잘 다녀오셨나요... 에고...백조인 저는 '휴가'가 부럽습니다...^^;;;
"윤아랑 선우 둘이 조금만 아파하고 조금만 힘들어했음 좋겠네요"<--이러지 못해서 저도 힘듭니다...
보고싶다읽고싶다 (2005/01/10 09:39)
마녀님...언제 글을 볼수 있나여~~~ T.T 언능 다른 곳에 올려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소식 기다릴게요~~
--> 다행히!!! 네이트를 다시 사용할 수 있어서...^^ 계속 여기에 올릴게요...
님들이 계셔서... 사실 떠나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야기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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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이 : 연지바른 마녀(mskim0920@nate.com)
*등장인물*
-신윤아(여, 20세, 화자)
-최선우(남, 60세) : 아시아 대 배우, 엔터테인먼트, 푸른 극장 대표
-유성린(여, 60세) : 선우 약혼녀, 뮤지컬 배우
-이민수(남, 21세) / 한 욱(남, 21세) / 지나현(여, 20세)
-이태석(남, 62세) : 태석 영화사 대표/ 강현민(남, 51세)
-박필덕 감독(남, 40대 중반)
-조유리(여, 18세) / 우해준(남, 18세)
-진한기(남, 25세)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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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안에 자해한 상처가 쉽게 낫지 않았다.
연고를 발라도 계속 따끔거려, 밤 시간에 유리의 실험실을 찾아갔다.
유리가 학생인지라 박감독님과 민수 선배의 배려로
늦은 시간 촬영 스케쥴은 많이 잡혀있지 않았다.
[윤아 : 유리야.]
[유리 : 응?]
[윤아 : 내가 심각한걸까?]
유리는 내 자해 증세를 듣고도 태연했다.
유리는 자신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선
쉽게 감정적이 되지않고 냉정하다.
창상에 효과가 좋은 약초들을 짓이겨, 내 상처에 붙이고
그 위에 거즈로 팔을 몇번 감더니, 반창고를 붙여 고정시켰다.
[유리 : 아니. 언니 드라마 쓰면서, 힘들어서 그런 거잖아.
그럼 안쓰면 없어지겠네. ^^]
[윤아 : (다친 팔의 옷소매 내리고, 유리 보는)...]
[유리 : (실험가운 주머니에 두 손 찔러넣은 채) 왜?]
[윤아 : 아니... 너한테 뭐든 다 쉬워보여서.^^
처음하는 대본 리딩도, 연기도, 공부도, 이런 진단도...]
유리는 활짝 웃으면서, 내 옆에 바짝 붙어 앉더니
내 팔에 팔짱을 끼고 내 어깨에 자기 머리를 기댔다.
[유리 : 언니도 참! ^^ 언니꺼니까 읽지.
난 다른 대본은 못읽어.]
[윤아 : (의아) 정말?]
[유리 : 그럼... 거긴 언니가 있으니까.
서하영, 그거 언니잖아.^^
머리 좋은 설정은 나인거 같지만. 아냐?]
[윤아 : ....맞아 ^^;;;]
우린 친하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느꼈겠지.
[유리 : (중얼) 근데 있지... 가끔 대본에서
언니가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내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윤아 : ! ]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 그걸 어떻게...
정말 유리는 내 대본에서 내 감정을 그대로 읽어내는 걸까...?
나에게서 절대적인 교감을 하는걸까...?
[윤아 : (얼버무리는) 설마... 니가 뭘 잘못봤겠지.]
유리가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고 싱긋 웃었다.
[유리 : 그런가? ^^ 근데 언니.]
[윤아 : 응?]
[유리 : 언니 아직두 그 남자 사랑하니?]
[윤아 : ...? (유리 보고)]
가볍게 지나가듯 묻는 것이지만,
질문 속에 뼈가 있다.
[유리 : 언니를 자살기도하게 했던 남자 말야.
그 남자, '박상현'에 많이 투영돼있는 거잖아.
아직두, 언니... 언니의 그 감정이 읽혀.
원망도 없고, 용서같은 건 애초에 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슬프고 애틋한 감정만, 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윤아 : ...]
[유리 : (일어나, 실험테이블로 가서 등보이며) 싫다, 언니 그러는 거.]
유리가 내게 등을 보인다는 건
내게 화났다는 뜻이다.
나는 유리에게 다가가서
유리의 등을 안아줬다.
[윤아 : 다 지나간 일이야, 이야기에 필요해서 넣었을 뿐이야.
대본에 다 써버리고 나면, 부스러기처럼 남은 감정같은 것도 다 털어질거야.]
[유리 : ...정말?]
[윤아 : 그럼! ^^;;; 우리 유리가 언니 걱정 많이 했구나, 미안해라~^^]
[유리 : ...]
[윤아 : (어린애에게 노래하듯이) 언니는~ 유리를 너무너무 사랑해~ ^^]
내가 콧소리까지 내며, 살살 달래자
유리는 꽁했던 마음이 금세 풀어졌는지
몸을 돌려 나를 꼬옥 안았다.
[유리 : (글썽) 유리도 언니 너무너무 사랑해...
그냥 난... 언니가 나한테서 너무 멀어져가는 거 같아서...그랬지.
언니 집에도 못가게 하고... 난 여기서, 혼자서, 너무 힘든데...]
[윤아 : 왜 니가 혼자야. 선생님들도 계시고, 친구들도 있고...]
[유리 : 언니가 없잖아.]
[윤아 : ^^;;; 서울에 니 엄마도 계시고...]
[유리 : 칫.]
유리는 내 어깨를 탁! 치며, 나를 밀어냈다.
유린 아직도 서울의 엄마하곤, 사이가 영 아닌가...?
그래도 자꾸 말해줘서 조금씩이라도 가까워지게 해야한다.
[윤아 : (유리 눈치 살피며) 지난 번에 스튜디오 촬영하러 서울 가서,
엄마 집에 들어가서 잔거지?]
[유리 : ...(글라스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딴청) 응.]
[윤아 : 잘했네! ^^ 어우~ 우리 유리 착하다.]
[유리 : 얼굴도 못봤어.]
[윤아 : ?]
[유리 : 외국 출장갔대.]
[윤아 : ...]
괜히 미안해졌다.
유리, 나름대로 또 상처받았겠구나...
촬영 스케쥴을 짜는 조감독 민수 선배에게
서울의 스튜디오 촬영할 땐 가급적이면 유리의 촬영 스케쥴을
선우 매니지먼트사 멤버들과 맞춰서, 함께 서울을 오갈 수 있도록
유리의 교통편을 부탁했던 건 나였다.
나현에겐 유리 엄마 집 주소까지 알려주면서,
유리가 촬영끝내면, 그곳으로 꼭 데려다 주라고 부탁했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윤아 : 원래 바쁘신 분이잖어...^^; 다음에 볼 수 있겠지.
(유리 표정 살피며) 다음에 올라갈 때도 엄마집에 들어가 자는거다?
밥도 거기서 먹고. 응?]
[유리 : ...]
[윤아 : (엄한 목소리) 조유리.]
[유리 : (중얼) 그런 거 필요없잖어...
인간 세상에서 자기네들끼리 만든 규율도 안지킨 사람들인데...
꼭 나만 지키라는 거 불공평하잖어.]
[윤아 : 널 낳아주고 키워주셨잖아, 니 엄마잖아.
아버지하고 이혼하셨어도, 그건 안변해.]
작년 가을에 부모님이 이혼했을 땐
너무도 태연히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더니.
[유리 : 그게 싫어.]
[윤아 : ?]
[유리 : 그 여잔 날 키운게 아냐, 사육한거지.]
[윤아 : 유리야-!]
안타까웠다.
유리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이.
[윤아 : 아냐, 아냐. 니가 잘되길 바랬던거야.
나한테도 그런 천재적인 딸이 태어났음, 얼마든지 욕심냈을 걸?
이것저것 다 해보게 하고... 사람들한테 자랑도 하고.
나같음 니 엄마보다 더 극성이었을거야, 진짜야- ^^]
그게 너무 지나쳐
유리를 자신만의 세계에 가둬놓는 자폐아로 만들어버렸지만.
그리고 유리의 엄마가 재벌가 상속녀로
유리한테 돈으론 못해줄게 없었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이기도 했지만.
온갖 선생들과 유모와 가정부를 붙여줬지만,
막상 당신은 엄마로서 유리를 한번도 안아주지 않았다는 것도
어린애였던 유리에게 보이지 않는 큰 상처였겠지만.
하긴 우리 학교에 왔을 때,
'엄마''아빠'란 단어를 사전적인 용어로만 알고 있던 아이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렇게 따지면 유리에게 천재적인 머리를 유전적으로 물려준
유리 아버지도 아주 책임이 없다할 순 없지만...
카이스트 교수로, 유리가 태어나던 날도
무슨 연구협회에서 주는 상을 수상하러 외국에 나가서 한국에 없었다던가...?
게다가 카이스트가 대전에 있는 관계로, 연구에 바쁘다는 핑계로
서울집에 들른 적은 가뭄에 콩나듯하고, 유리에 대해선 거의 알지도 못하고...
엄마의 사랑없는 과잉보호와 아빠의 철저한 무관심, 기막힌 조화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두 어른이 유리에게 가정이란 것 자체를 만들어주지 않았으니,
내가 이렇게 유리에게 부모의 의미를, 가정의 의미를, 집의 의미를...
사전적인 의미말고, 감정적으로 느끼게 해주기 정말 힘들다 -_-;;;
천재인 아이에게 3살박이 어린애에게 하듯이,
반복적으로 주입시키는 것도... 가끔 이상한 기분도 들고.
하긴 아인슈타인도 자기 분야 외엔 전부 저능아처럼 굴었다드라, 뭐.
고양이가 새끼를 낳으니까, 새끼 숫자대로 문에 고양이문을 뚫어줬다더라, 뭐.
벽난로 앞에서 뜨겁다 뜨겁다 하면서도,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를 뒤로 뺄 생각조차 못했더라, 뭐. -.-
[윤아 : 유리야-]
[유리 : (윤아보며) 빨리 어른됐음 좋겠다. 그치? ^^]
[윤아 : ...]
[유리 : 그럼 언니한테 이런 잔소리 안들어도 될건데. 그치? ^^]
[윤아 : 어른되도 그 때까지 모르면, 마찬가지야.]
[유리 : -_-;;]
그 때 노크소리가 들리고, 실험실 문이 열렸다.
[홍선생 : 어? 윤아가 와있었네? ^0^]
#
홍선생님은 정기적인 실험실 점검날이어서 들렀다고 했다.
새로 들여온 재료엔 위험물질은 없는지, 그동안 다른 사고는 없었는지...
그런 것을 정기적으로 점검해서 인근 경찰서에 신고해야한다.
유리의 실험실은, 단순히 학습용 과학 실험실이 아니라서
도청의 허가를 따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리에게서 부탁해 둔 일회용 수지침과 사혈침 바늘 여분을 받아들고
학교를 나서는데, 홍선생님이 배웅해준다며 따라 나섰다.
[윤아 : 위험한 길도 아닌데요. ^^]
[홍선생 : 그 핑계로 나도 바람쐬고 좋지, 뭐. ^^
그리고 슬슬 휴가철이잖아,
근처 계곡에 놀러오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밤길 조심해야지.]
[윤아 : 그렇네요. ^^]
취객들이 우리 학교 여학생한테 잘못 찝적댔다간
우리 학교 학생들한테 몰매맞는 사태가
또 벌어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으니까. ㅎㅎ
[홍선생 :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드라마 쓰는 거 많이 힘들어?]
[윤아 : 원래 정신적으로 자기 학대하는 노동이잖아요.
육체노동이면 체력이나 키울 수 있을텐데. ^^]
[홍선생 : 음... 빨리 우리 학교로 델쿠와야겠네.]
[윤아 : 저 살찌워서 잡아먹으시게요? ^_^]
[홍선생 : 앗, 들켰다! ^.^ 주방에 가마솥 준비해놓은 극비사항을-]
[윤아 : 하하- ^0^]
[홍선생 : 하하- ^0^]
우리 천하무적 홍선생님은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쾌함을 전염시키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도 모르게
홍선생님의 에너지에 끌려가고,
홍선생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윤아 : 유리... 많이 힘들어해요?
얼마전부턴 선생님하고 같이 지낸다면서요.]
유리가 기숙사 새 룸메이트와 적응하지 못해서
홍선생님이 임시로 유리의 방으로 옮겼다고 들었다.
[홍선생 : 유리도 그렇고, 다들 좀 힘든 편이지.]
[윤아 : 네?]
[홍선생 : 지난 번엔 한밤중에 깨서는, 너 찾다가 없으니까
대성통곡하는데... 다들 혼이 다 쏙 빠졌다니까.
너무 잘먹여서 그런가, 목청은 왜 그리 큰지.
애나 작아야 안고 달래지, 다 큰 애를 어떻게도 못하고...]
[윤아 : -_-;;;
(걱정스런) 혹시... 유리 다시 유아기로 돌아간 거 아니에요?
어린애들 잘 그러잖아요, 자다가 깨서 옆에 엄마없으면 울어대는 거.]
[홍선생 :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다음 날은 아무렇지도 않더라. ^^
하긴 유리한텐 니가 친엄마나 다름없잖냐.]
[윤아 : ...]
[홍선생 : 니들은 그... 있지, 오리새끼 생태같은 거. 그런 거 같애.]
[윤아 : 오리새끼요?]
[홍선생 : 응, 오리 새끼는 알에서 나와
눈 뜨고 처음으로 본 것을 자기 엄마로 인지한다잖아.
넌 유리 손을 잡고 유리 자폐 증세에서 끌어내 준 사람이니까.
처음으로 유리 저를 사람답게, 그 나이 또래답게 살게 해 준 거니까.]
[윤아 : ... 전 그렇게 대단한 거 한 적 없는데요. ^^
유리가 원래 정상적인 애였으니까요.]
[홍선생 : 안그럼, 널 그렇게 따르고,
한시도 니가 안보이면 불안해하고 그랬겠어?]
[윤아 : ... 어떻하죠? 유리 자주 깨서 울어요?
이것저것 좀 걸리겠지만, 제 숙소로 데리고 갈까요?
유린 싫다 안할텐데, 허락... 해주실래요?]
[홍선생 : 아니. 어차피 너도 이번 기회에 유리를 자립시켜보려고 했잖아.
오리 새끼도 자라면 스스로 나는 법을 익혀야지.
하나를 업고 같이 날려면, 결국 둘 다 날지못하고 추락해버릴 수 밖에 없어.
냉정하다 생각들겠지만, 과도기라 보고 넌 모른 척 해.]
-_-;;; 끝까지 오리 새끼라시네...
꽥꽥-
[윤아 : ...네.]
하긴 홍선생님이야 교육자 경력으로
여지껏 수많은 학생들을 품에 끼고 살아오신 분이니...
이론으로도 경험상으로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더 잘 대처하실테니까...
무조건 믿고, 내 일이나 잘 해야지.
막 새벽으로 넘어가는 하늘의 쪽빛을 감상하며
개울둑을 지나가는데, 철벅철벅- 물장구치는 소리와
여러 사람들의 소곤소곤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홍선생 : 벌써 휴가객들인가?]
[윤아 : (기웃기웃) 아닌데요, 드라마 팀이에요.
여기서 뭐하는거지?]
#
[종수 : 내일, 아니 오늘 개구리 잡아 먹는 씬을 찍는데,
개구리를 어떻게 잡는지 몰라서요.
거기 학교 학생들한테 가르쳐달라고 부탁해서, 같이 나온거에요.]
청솔고 학생 몇몇과 학생 역을 연기하는 연기자 몇몇,
그리고 민수 선배와 욱이 선배까지... 함께였다.
홍선생님은 청솔고 학생들에겐 기숙사 순찰 전까진 들어오라고 당부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나야 여기 드라마팀하고 같이 돌아가면 되고.
개울물 안에선 해준이가 종수에게 나무 막대기로
개구리가 있는 곳을 찾아 그 주변을 내리쳐
개구리가 놀라 펄쩍 뛰어오르게 한 다음
야구방망이로 공을 치듯 제대로 한 방에 내쳐
기절시키는 법을 가르치는 중이었고,
개울물 밖엔 이미 모닥불을 지펴 물을 끓이는 중이었다 -_-;;
[민수 : 너네 학교 진짜 재밌다. ^^
나두 다시 다녔음 좋겠다야-]
[윤아 : -_-;;;
선배는 개구리 잡아 먹어봤수?]
[민수 : 아니. ^^]
[윤아 : 꼭 재밌지만은 않을텐데-]
[민수 : 왜?]
[윤아 : 도시에서만 사는 사람들은 소고기를 먹으면서도
소 도축하는 장면을 상상 못하잖아.
그치만 여기선 눈앞에서 생목숨 끊는 걸 직접 보게되니까,
첨엔 역겨워하고 입에 못대는 애들도 많아요.]
[욱 : (옆으로 와서 불에 나뭇가지를 넣으며) 너도 그랬냐?]
[윤아 : 네.]
[욱 : 그래도 다 먹고 살려면, 바뀌는거다.]
[윤아 : 맞아요. 근데 여자애들은 안왔어요?]
[민수 : 대본에 남자애들만 나오잖아.]
[윤아 : 음- 사실은 여자애들이 더 잘 잡아먹는데. ^^]
[민수 : 헉!]
[윤아 : 이미지 베린다고 촬영안한다 그럴까봐, 남자애들로만 한건데...]
[해준E : 에이, 제대로 안보고 치니까 헛나가죠.
이렇게, 제대로 보고!! 타이밍 잡아서!!!
나온다! 저기! 저 놈!]
나는 개울 안의 해준이와 종수를 비롯해
여럿이 우왕좌왕하는 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겁많고, 기절도 잘 하던 해준이도
이젠 여기서 완전히 시골 총각 다 됐네.
자연은 아스팔트 위에서 상처받고 탕아가 되어 돌아온 사람도
아무말없이 끌어안고 치유해주는 어머니같은 존재같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해치고 자신을 누르고 아프게 하는데도...
[윤아 : 이렇게 재밌게 생각할 줄 알았음, 여자애들도 끼워넣을걸.. ^^]
[민수 : 아서라~ ㅎㅎ]
손전등에 비친 욱이 선배의 귓가가 언뜻 반짝거린다.
[윤아 : 어? 선배 귀 뚫었어요?]
[욱 : 어.]
작은 링귀걸이가 제법 예쁘다.
한번 만져보려고 손을 뻗었더니,
욱이 선배가 화들짝 고개를 뒤로 뺐다.
민수 선배가 우하하- 배 잡고 웃겨 죽을라 한다.
[윤아 : ?]
[민수 : 저 자식 부끄러워하는 거야.]
[욱 : (벌개져서) 아냐, 임마.
하여튼 (윤아에게) 너 나중에 알아서 책임져!]
[윤아 : (자기 손가락으로, 윤아 자신 가리키며) ?
(어리둥절) 제가 뭘요?]
[욱 : 니가 효수 캐릭터에 귀뚫는게, 더 날라리같이 보이고 좋을거랬잖냐.]
[윤아 : (긁적) 내가 그랬나...? ]
[욱 : (허걱!)]
[민수 : 회의할 때 지나가는 말로 그랬지. ㅋㅋ]
[윤아 : 그랬나...그래두 선배가 진짜로 내 말 들을 줄은 몰랐는걸요. ㅎㅎ]
[욱 : 하여튼,]
[윤아 : 하여튼, 뭐요?]
[욱 : 난 이 꼴로 시골집엔 죽어도 못내려간다.]
[윤아 : (짐작가는) ...음.]
[민수 : 욱이 아버님이 상당히 보수적이시거든. ^^
저 자식 저러고 내려가면, 집에 발도 못들여놓고
먼지나도록 맞아야 될 걸?]
[윤아 : (욱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기왕에 맞을 거, 헤어스타일도 바꾸는 게 어때요?]
[욱 : (버럭) 뭐!]
[윤아 : ^^ 어... 좀 터프하게, 효수 캐릭터에 좀 더 가까이..가려면,
앞의 한 두줄 정도는 붉은 색으로 브리치 염색하고,
나머진 층별로 빨주노초파남보로... 무지개 염색을...ㅋㅋ]
[욱 : (버럭) 신윤아!! (벌떡 일어나는)]
[윤아 : (민수 뒤로 숨으며) ^^ 살려줘~ 선배~]
[욱 : 신윤아, 너 이리 안나오냐-]
[윤아 : (요리조리 피하면서, 약올리는) 그냥 연기하기 위해선데~ ^^;;;
무대에 올라갈 때 그 정도 분장도 안하나?
진정 선배가 연기자 맞아?]
[민수 : (욱하고 윤아 사이에 끼어서, 대략 난감)
야, 저 정도도 저 자식 고리타분한 성격에 큰 결심하고 한거야~ ^^;;;
더 건드리지 마-]
[윤아 : (두 손 들고, 외치는) 알았어요! 알았어! 항복!!!
염색 제안은 취소!! 취소합니다! 됐죠? ^^]
[욱 : (씩씩-거리는)]
욱이 선배, 터프한 액션배우 이미지에다
귀걸이를 하니까 웬지 좀 귀여운 걸? ㅎㅎ
염색도 하면, 진짜루 많이 귀여울 것 같은데...
요즘에도 저런 것 갖구,
세상 말세를 외치는 영감탱이같은 고지식한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닌 연예계에 다 있었네.
음향 감독님 같은 유부남도
귀뚫고 머리 물들이고
가끔 머리에 머리띠도 하고...그래두 태연하더만.
세상은 정말 요지경 속이야.
때마침 종수가 의기양양하게 비닐봉투를 들고
개울물을 처벅처벅 나왔다.
[종수 : 이만큼 잡았어요!! 캬캬- ^0^
물 끓여놨죠?]
욱이 선배가 종수에게서 봉투를 받아들었다.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있자, 대뜸 봉투채로 바닥에 여러번 패대기를 친다.
역시... 욱이 선배는 시골출신이라 잘아는군.
아무래도 나 대신 화풀이 상대를 제대로 찾은 것 같다. ㅎㅎ
[윤아 : 그런데 이렇게 마구잡이로 잡아대면,
내일 촬영 때 잡힐 개구리 한마리도 없겠다.]
[민수 : (그제서야) 헉!!! 안 돼!! 도로 놔 줘!!! 놔...]
그러나, 민수 선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욱이 선배가 끓는 물 속에 개구리들을 텀벙 집어넣어버렸고,
개구리들은 고대로 앞뒷다리를 쭈욱~ 뻗어버렸다.
[민수 : T_T]
조감독인 자신의 위치를 잠시 망각했던 민수 선배에겐
내일 촬영 소품 준비가 막막해지는 순간이었다. ^.^;;
[윤아 : 그냥 구워먹는 게 더 맛있는뎅~ ^^]
[욱 : 그렇게는 겨우 이걸로 누구 코에 붙이냐?]
[민수 : (땅을 치고,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있음)]
[윤아 : 그러네... 해준아, 더 잡을 수 있어?]
[민수 : (괴성) 우워워- 안 돼!!!]
[모두 : -_-;;;]
[해준 : 라면하고 끓이면 끝장인데.]
[윤아 : 맞어, 너 개구리라면 잘 끓이는데.
에라~ 좋다!!! 오늘 내가 라면 쏜다! ^0^
슈퍼 갔다 올게.]
마침 빵과 우유를(밤샘 할 때 먹을) 사가려고
주머니에 챙겨넣었던 돈이 조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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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에 있을 인원수와 남자들 먹성을 고려해서
라면봉지들을 집고 소주도 몇 병 꺼내들었더니, 돈이 모자랐다.
[윤아 : 나머진 내일 우유사러 와서 드릴게요, 어머니. ^^]
우리 학교 1학년 학생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슈퍼라
가끔 급할 땐 외상도 된다.
[남자E : (윤아 뒤에서 지폐 내미는) 나머진 여깄습니다.]
[윤아 : (?, 돌아보고) 선생님...]
그였다.
나 혼자 먹을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돈에 태클을 걸지 않고 슈퍼를 나왔다.
슈퍼를 나오면서
그가 자연스럽게 내 손의 비닐봉투를
가져가 들었다.
[선우 : (내용물 보고) 라면만 끓여먹고 사는거야?
(가라앉은) 술도... 있네.]
[윤아 : 아뇨, 이건 개구리파티에 쓸거에요. ^^]
[선우 : 개구리파티?]
[윤아 : 지금 연기하는 애들이 개울에서 개구리 잡는 리허설을 하고 있거든요.]
[선우 : 아... 41씬...?]
[윤아 : 네...
선생님, 서울에 계신 거 아녔어요?
스튜디오 촬영때문에...]
[선우 : 어. 끝내고 내려온 거야.
오늘 아침부턴 여기 촬영이니까.]
[윤아 : 네에...]
슈퍼의 불빛에서도 멀어지고...
고요한 시골의 어둔 밤 길...
자박 자박... 그와 나의 발소리만 있다.
웬지 어색하고 모든 게 낯설어지는 공간과 시간...
그의 시선이 내 손 쪽으로 향해있는 것이 느껴진다.
내 보폭에 맞춰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그에게 휙-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봤다.
그가 흠칫한다.
내 느낌이 틀린 게...아니었어.
손목 시계와 팔찌를 주고서도, 아직도 마음이 무거운 건가?
아니, 내가 시계를 찼는지 안찼는지 살펴본 건가?
확실하게 마무리지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딱- 멈췄다.
[윤아 : (단호) 선생님.]
[선우 : (걸음 멈추고) ...응.]
난 일부러 손목 흉터가 잘보이게
옷소매를 손목 위로 걷어보였다.
[윤아 : 선생님만 의식 안하시면, 저 이걸로 위축되거나 그런 일 없어요.
자랑스런 훈장은 아니지만, 굳이 숨기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구요.]
[선우 : ...! ]
[윤아 : 어른은 실수 안하나요?
저도 한 때 잠깐 실수한 것 뿐이에요.
선생님이 저한테 뭘 잘못했든, 그거하곤 상관없이
제가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에 저질러진 것 뿐이에요.]
[선우 : ...윤아야-]
[윤아 : 곧 여름이에요. 저 더 이상 이 흉터 답답하게 가리지 않을거예요.
선생님만 신경 안쓰시면 되요, 선생님만 안보시면 된다구요.]
[선우 : ...그래, 노력해볼게.
하지만 솔직히... 그러기 힘들 것 같다.]
[윤아 : (싸늘) 그러면 결국 선생님하고 전 편하게 지낼 수 없겠네요.]
[선우 : ...]
앞서서 걸어가는데
그의 손에 내 손목이 잡혔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선우 : 니가 나한테 어떻든 그건, 그건, ...괜찮아.
하지만... 하나만 약속해 줄래?]
[윤아 : ?]
[선우 : 다시는... (잡고 있는 윤아 손목을 꽉 쥐며) 그런 일... 하지 않는다고.]
[윤아 : ...]
[선우 : 너 자신을 해치는 일 하지 말아...
만약 그 정도로 힘든 상황이 있다면, 그 전에 날 찾아와라.
나...언제든 어떤 경우든 상관없어.]
[윤아 : (냉랭) 선생님.]
[선우 : 그래.]
[윤아 : 저 선생님 몰랐을 때도,
알고나서 지난 2년 동안도, 선생님 없이도 잘 살았어요.]
[선우 : ...]
[윤아 : 그러니까 선생님은 더 이상 제 인생에 참견할 자격같은 거 없으시다구요.]
그에게 잡힌 손목을 풀어냈다.
[선우 : ...(힘없이) 그래, ...미안하다.]
...아... 답답하다.
그의 모습에, 내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
보지 말라면, 안보겠다- 그러면 될 것을.
왜 그깟 사소한 죄책감으로 내 이것저것을 다 걱정하는 거야...?
[윤아 : (반항적) 저한테 정 그렇게 미안하면, 저하고 자실래요?]
[선우 : (!, 당황해서 더듬) 너, 너,... 말을 그렇게 함부로...]
[윤아 : 그러면 저한테 어느정돈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실 수 있을거에요.
(도전적) 그러실래요?]
[선우 : ...]
학실하게 못박자.
나한테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고.
이젠 상관안해, 민수 선배가 그의 마음에 대해 뭐라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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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 : ... 삼촌, 변했다. 너 때문에.]
[민수 : 삼촌, 여지껏 연기말고 그렇게 다른 사람한테
자기 가슴을 쉽게 빌려준 적 없었어.]
[민수 : ... 삼촌, 너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어.
돌아가신 그 분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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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더 이상 그런 사치스런 감정은
필요없다.
나에게 당장 절박하게 필요한 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마치고
내 스스로 밥벌이를 제대로 해낼 때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마련해야 할 학비며 생활비다.
[윤아 : 지난 번 선물은, 어차피 산 거니까 받았을 뿐이에요.
제 주제에 그런 거 쓸 일도 없겠지만,
만약에 나중에 돈 필요할 때 생기면 미련없이 처분할거에요.
이제와서 저한테 그만큼 선생님 마음, 아무것도 아니란 거에요.
선생님이 어떻든, 저한테 그런 거 배려할 여유같은 거 손톱만큼도 없다구요.]
[선우 : ...]
[윤아 : 다신 그러지 마세요, 저한테 잘해주는 척 하시지 말라구요.
그런다고 이미 저질러지고 지난 일이 없어질 순 없으니까.
저나 선생님이 기억상실증에 걸릴 수 있는게 아니라면요.]
[선우 : ...너, 나 아프게 하는데 도가 텄구나. (혼잣말처럼) 그 사람처럼.]
[윤아 : ...다치기 싫음 가까이 오지 마세요.
선생님 손만 잡음 뭐든 다 될것처럼 굴면서, 손 내밀지 마세요.
(슬프게 피싯) ...저, 선생님 찌를 가시 백개쯤은 갖고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전에 선생님이 정하신 그 거리에서, 한발자욱도 더 오지마세요.]
[선우 : 그래, 그러자... 너 이렇게 잘 지내는 거면,
어쩌면 이곳이 너한테 잘 맞는 것도 같고..., 그걸로 더 욕심 안낸다.]
[윤아 : ...]
계속 지켜보겠다는 건가...?
못말릴 사람이구나, 이 사람.
서로에 대해 감정이 메말랐다면
나는 그에게 상처될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외면하고 무시하면 되는 것을...
그는 내가 내뱉는 말들 때문에, 더 이상 다치지 않을 것을...
...모르는걸까...?
우린,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아프게 생채기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도 모르겠지.
그를 아프게하는 것 만큼, 나는 그보다 수천배 더 아프다는 것을...
#
옥탑방.
겨우 설핏 잠들었나 싶었는데,
밖의 소란스러움에 금세 잠이 깼다.
방안이 환한 걸 보니, 한낮이다.
또 촬영 중간중간 짬이 나는 연기자들이
옥탑방 밖 옥상에 일광욕을 하러 올라온 모양이다.
동네가 시골인지라 조심하라고 한마디 해둬야겠다.
방을 나서려고 일어서다가,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환상통.
신체 절단환자가 이미 없어진 신체 일부에게서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난 아직도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핏빛 악몽을 꾸는 날이면,
유산할 때와 똑같은 통증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뱃속에 날카로운 송곳이 들어와 숨통에 꽃힌 것처럼
숨조차 쉴 수 없고, 온 몸을 꼼짝도 할 수 없는 날카롭고 지독한 통증...
큰 비명낼 기력이 없이, 신음만 하며
거실 바닥에서 온몸을 버둥대는데,
밖에서의 쾌활한 웃음소리와 간간히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아주 먼 세계, 다른 차원의 세계의 것인 것처럼
몽롱하게 들려왔다.
현관문 하나를 두고, 이런 엄청난 차이라니...
...겨우 통증이 사라지고,
한참을 그대로 널부러져 있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식은땀투성이다.
대본에 대한 스트레스가 예상보다 심각한 것 같다.
우선 씻어야겠다.
#
[윤아 : 그러고 자꾸 벗고 엎어져있음,
여기 농사짓는 동네 어른들한테 욕 얻어먹어요들. 대충해요.^^]
프린트물 뭉치를 들고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나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 펼쳐져있다. ^^;;;;
[예지 : (생글생글) 작가님두 일광욕 한 번 하지.
얼굴이 그게 뭐야, 매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허얘가지구, 어...? 어디 아퍼어?? 창백하네?]
예명이 '예지'인 신인 여배우.
나이는 나보다 두 살 많지만, 상당히 동안이다.
드라마팀에서 어른격인 박감독이나 최선우와 유성린이
날 작가로 대우해주는 덕에
다른 나이많은 배우나 스탭들도
나를 꼬박꼬박 '신작가'라고 부르고,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윤아 : 아뇨. ^^]
웃어 보이면서 현관문을 잠그려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현기증.
제길... 꼼짝도 못하고 문에 머리를 대고
진정되길 기다렸다.
아니, 못기다린다.
쿵! 쿵! - 문에 머리를 박았다.
젠장 신윤아 너 뭐냐, 이 정도밖에 안되냐.
'비상'의 시청률이 개구리 파티하는 회 이후로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나마 그것도 리허설(?)때 개구리 씨를 말렸는지
다음 날 진짜 촬영 땐 개구리를 도통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쥐소동으로 대본을 고칠까 했는데,
리허설에서 개구리 사냥에 재미를 붙인 종수가
절대 안된다고 박박우겨서...
결국 옆동네 개울가로 장소를 바꿔
그 동네 주민들의 시끄럽다는 온갖 항의를 받으며
간신히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
[민수 : (옥상으로 올라오며) 그렇게 자학하면
길이길이 남을 명대사라도 나오나?]
[윤아 : -_-;;; 어, 선배...]
[민수 : 오늘 좀 늦게까지 촬영 갈 것 같아.]
[윤아 : 그래요...?]
[민수 : 중간에 시퀀스 바뀌어서 재세팅할 때 잠깐 짬이 있는데,
감독님이 그 때 회의하자고 하시네.]
[윤아 : 알았어요, 안그래도 인터넷에 있는 시청자 의견들을
더 읽어봐야 감이 잡힐 것 같았는데.
제가 그냥 알아서 폐교로 갈게요.]
오늘 긴급대책회의는
시청률 추락에 대한 원인 분석 및 대책방안 찾기 위함이다.
[민수 : (예지쪽 흘끔 보더니) 예지 선배, 해지기 전에 철수하세요.
모기들한테 헌혈하지 말구요.]
민수 선배의 대학교 같은 학과 한 학년 위라
나는 가끔 그녀가 어렵다.
[예지 : ^^;;; 걱정마, 유리가 준 약초를 온몸에 발라뒀어.]
[종수 : (올라오며) 예지씨, 몸 진짜 착하네. ㅋㅋ
핸펀으로 찍어두 되요?]
[예지 : 죽을래?]
[종수 : ^^;;; (옆 빈 의자 가리키며) 여기 비었죠?]
아니, 이 사람들이!!!
아무리 몸으로 먹고 사는 직업이라지만...
종수는 대뜸 티셔츠를 훌렁 벗고 반바지 차림 그대로
빈 의자에 퍽 엎어졌다.
나...? 당연히 다 뚫어지게 봤지. ㅎㅎ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어떻게 놓친대...ㅋㅋ
게다가 종수는 모델 출신 배우여서...한 몸매하는지라...^^;;;
아직 이 숙소가 공개되지 않은 게 참말로 아깝고만 잉~
아직 10대인 종수는 위아래 10년은 충분히 커버한다나 뭐라나
능글맞기론 우리 드라마 팀에서 1등감이다.
연기를 좀 잘하는 거 빼곤,
전부 하는 짓들이... 처음엔 뭐 저런 또라이같은 인간이 다 있나 싶었는데
어려서부터 소설같은 우여곡절 인생사로
온갖 고생해오면서 터득해 온 처세술이라는 걸 알고 나선,
웬만한 능글함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된다.
[민수 : (윤아에게) 넌 왜 핸드폰을 꺼놨어?
연락 안되서 여기까지 왔잖아.]
[윤아 : 앗! 밧데리가 다 된 걸 충전 안해놨나보다.
헤헤- 쏘리-]
[민수 : -_-;;; 충전해놓구 갖구 다녀, 언제든 호출하면 달려오라구.]
[윤아 : ...네. 선배 잔소리꾼 다 됐네. ^.^]
[민수 : 알면, 잘 해.]
[윤아 : ...]
미안해졌다.
안그래도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있는데...
나까지 민수 선배의 관리 구역 안에 들어가버렸다니...
#
늦은 오후, 폐교에 갔다.
한참 촬영중이라 주변이 조용하다.
발소리죽여, 박감독에게 다가갔다.
[박감독 : 컷! 오케이!]
박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수선함과 부산함이 시작된다.
[박감독 : 서둘러!!! 다들 3반 교실에 세팅해야 되는 거 알죠?
(윤아 보더니) 타이밍 끝내주게 온다.]
[윤아 : ^_^ (꾸벅)]
[박감독 : 여긴 시끄러우니까, 빈 교실로 가지.
(저만치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민수에게)
민수야, 아까 어디가 비었다고 했지?]
[민수 : 교무실 쪽이요.]
[박감독 : 그리로 갈거니까, 너도 대충하고 오고.
회의 참석할 사람 있으면 그리로 오라고 해.]
[민수 : 네! 알겠습니다.]
교무실로 리모델링 된 공간에 들어갔다.
박감독과 주변 의자들 서너개를
서로 가까이 끌어다 놓고는
마주 앉았다.
[박감독 : 대본 쓰기도 바쁠텐데,
원인 분석해보라고 따로 일시켜서 미안해, 신작가.]
박감독은
어떠한 바쁘고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경우바른 인삿말을 빼먹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의 기본 매너 중 하나인가...?
[윤아 : 아니예요, 제 책임도 있는 걸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이에요.]
[박감독 : 그래, 뭐가 문제래?]
슬그머니 문이 열리면서
카메라 감독 두 사람과 유성린,
이번 달 초에 새로 투입된 예쁘장한 신인 여배우 진채진도 들어왔다.
진채진은 유성린이 슬쩍 언질을 주고 데려왔거나,
아니면 눈치빠르게 따라온 거겠지.
나는 프린트물 뭉치를 일단 와 있는 사람들에게 돌렸다.
우리 청솔고의 학생 몇몇에게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방송국 사이트의 '비상' 시청자 게시판 말고도,
이름있는 드라마 비평 사이트와
각 커뮤니케이션의 드라마 토크 게시판을 훑어서
비평들을 갈무리하도록 시켰었다.
3일을 꼬박 밤낮으로 냉혹한 평들을 읽어대며
냉수밖에 마시지 못했다.
막판엔 냉수조차 마실 수 없었다.
원래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내놓아 읽히는 것 자체가
자신의 머릿속과 내면의 추한 밑바닥까지 긁어낸 것을 내보이는,
알몸으로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젠 그 온 몸이 갈갈이 찢기고 토막당하는 기분이라니.
[박감독 : (프린트물 돌려주며) 말로 해, 글자가 눈에 안들어온다.]
[윤아 : 우선 새로 교체되어 들어온 새 학생들에 대해 불만이 많아요.
시청자들이 재은이에게 왜 그렇게 미련이 많은지.]
나는 얘기하면서 슬쩍 진채진쪽을 살폈다.
진채진은 '비상'에서 빠진 재은을 대신해 투입되었다.
[박감독 : 그럴 것 같았어.
워낙 재은이의 중성적 캐릭터가 매력적이었잖아.
또 그 배역을 소화도 잘했고.]
[윤아 : ...그렇죠.]
그래도 게시판에다 감독하고 작가한테 인신공격까지 하면 안되지.
우리가 재은일 짤랐나?
걔네가 우릴 짜르고 주말 드라마로 토낀 걸, 우리보고 어쩌란 거야.
몸값까지 엄청 뛰어서 가버린 걸,
주말 드라마는 일주일동안 두 시간 방송분 촬영이라
우리 것보다 스케쥴이 더 빡빡하다고
겹치기출연 절대 못한다고 사래질치고 튄 걸,
대체 어떻게 도로 붙잡아 오라는 거야.
[박감독 : 그래서 어떻할까?]
[윤아 : 어떻할까요?]
[성린 : 두 사람 다 왜 그래요? ^^;;]
[박감독 : (윤아에게) 생각해 온 거 없어?]
[윤아 : 우선 함재은이 떠난 것에 대한 우리 입장을 게시판에 공지로 올리죠.]
조금 컸다고, 우리가 만들어 준 이미지로 인기 얻었다고
금방 배신때리고 인사도 없이 싸가지없이 휭~날아가버린 인간에 대해
두 번 다시 언급하는 건 싫지만, 감정적으로 나오면 우리만 손해다.
인터넷 공간엔 초딩수준의 앞뒤 안가리는 열혈 팬들도 상당해서
한 번 잘못 소문나면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져나가니까.
그것이 진실이든, 악취나는 가설이든, 뭐든간에.
[성린 : 내 생각엔, 새로 교체된 학생들에 대해
캐릭터 성격이 확실히 잡혀있지 않아.]
[윤아 : 네, 맞아요.]
새로 들어온 이들은 급하게 교체되고 투입되다보니
처음 멤버들처럼 오디션 보고 함께 숙소에서 겪으며
관찰되고 만들어지고 성숙되어가는 캐릭터가 아직 되지 못했다.
나도 허둥대다보니, 여분으로 만들어놓은 캐릭터와
연기자를 잘 매치시키지 못해, 어딘가 풋내가 나는 느낌이었다.
명색이 작가인데, 캐릭터를 미리 준비된 에피소드와
제대로 조화시키지 못해 써포트 못해줬으니
전체적인 구도가 우왕좌왕인거다.
내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건 어렵지않은데,
해결책은 쉽게 안보이고,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피가 마르는 이 기분은, 말 그대로 땅 파고 기어들어가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윤아 :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에 거의 비슷하게 들어온 세 명의 학생 캐릭터 코드를
다시 제대로 잡아서 그걸 확실히 부각시킬 에피소드를
좀 쎈 걸 써야될 것 같아요.]
[박감독 : 쎈 거?]
그 때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드르르- 열렸다.
[선우 : 죄송합니다. ^^;; 좀 늦었습니다.]
그는 누가 참석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급한 촬영있을 때 빼곤, 대부분의 회의에 참석한다.
하긴 민수 선배가 슬쩍 지나가듯 하던 말엔
제작비도 어느정도 따로 보탰기에,
영화사에서라면 프로듀서 대우를 해줘야 한다든가.
[카메라 감독1 : 그게 뭐에요?]
아까까지 자기 팔짱끼고 깜빡깜빡 졸고 있던 카메라 감독이
그런덴 눈치가 백단이다.
[선우 : 지각 벌금요. ^_^]
그가 들고 있던 봉투에서 꺼낸 건
케잌 상자들과 음료수였다.
[선우 : 바깥은 나현이가 돌리고 있을겁니다, 드세요.]
[박감독 : 안그래도 출출했는데, 고맙습니다.^^]
여러 손들이 분주하게 책상 하나를 중앙으로 끌어다놓고
그 위에서 케잌들을 상자에서 꺼내고 자르고
종이컵에 음료수를 따라 서로 주고받았다.
[윤아 : (계속하는) 일단 진채진 캐릭터는
재은의 중성적인 캐릭터를 따라가기보단,
그러면 너무 대타적인 느낌이 드니까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요.
채진은 여성스런 캐릭터로 잡고, 거기에... (하는데)]
내 앞에 쟁반과 음료수가 놓여졌다.
생크림 케잌 한조각, 치즈 케잌 한 조각, 고구마 케잌 한 조각과 우유 한 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굳이 고개들어보지 않아도, 그일 것이다.
유성린은 왜 그가 내게 이러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걸까.
내가 내 앞에 간식거리를 받아놓지 않은 것은, 분명 이유가 있었는데.
[박감독 : (우물우물 먹으며) 그러고보니 신작가 꼴이 틀렸네?]
[윤아 : ...네?]
[박감독 : 시청률 떨어진다고 열받아서 쫄쫄 굶었어?]
[윤아 : ...]
[박감독 : 이거 안되겠네, 내가 내일 고기라도 사줘야겠네.]
[윤아 : 괜찮아요, 감독님. ^^
저 이 상황에서 나몰라라 쓰러질 정도로 무책임하지 않아요.]
[성린 : 진짜 신작가 얼굴이 왜 그리 하얘?
내가 지난 번에 준 영양제 안먹어?]
[윤아 : 왜 다들 그러세요...? ^_^ 저 괜찮은데.]
[채진 : 신작가님 좀 드세요. ^^]
진채진은 드라마 중간에 투입된지 얼마 안된데다가
나와 얼굴을 자주 보고 이야기나눌 기회가 적어서인지,
나를 가장 어려워한다.
욱이 선배의 소개로 급조되긴 했어도,
내 개인적으론 맘에 드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슬쩍 보니 나 때문에 케잌에 입도 못대고 있다.
이런 미안하잖아...
우유를 한모금 마시고, 나무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윤아 : 채진씨도 먹어, 배고픈 것 같은데.]
[채진 : 네. ^^]
내 말 한마디에 금세 표정이 환해진다.
하는 몸짓들이 꾸밈없이 순수...해 보인다,
아직 연예계 생활에 때묻지 않았다는 거겠지.
제발 함재은처럼 나중에 싸가지없게 나오지만 마라.
[윤아 : (우욱-)]
우유를 마시고도 별 문제 없길래, 생크림 케잌을 조금 떼먹었는데,
목으로 넘기자마자, 곧바로 울컥 도로 올라왔다.
급히 교무실을 나가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놀란 유성린과 채진이 따라들어왔다.
어차피 최근에 먹은 것이 없어,
별로 토하지 않고 속은 금방 진정됐다.
[성린 : (윤아 등을 쓸어주며, 걱정스런) 왜 그래?]
[채진 : 괜찮으세요?]
[윤아 : (물로 입헹구고) 죄송합니다.]
[성린 : 안그래도 안좋아보인다 했어, 어디 아픈거야?]
[윤아 : 스트레스때문에, 속에서 통 안받아요.]
[성린 : (허- 기막힌) 얼마나 됐는데?]
[윤아 : ...보름정도요.]
[선우E : 신작가 괜찮아?]
여자 화장실이라 차마 못들어오고
그의 목소리만 들어왔다.
[성린 : 어.]
[윤아 : 채진씨, 미안해.
먼저 들어가서 괜찮다고 말해줄래?
먹을 것도 먹고.]
채진은 나와 성린을 보더니,
얌전하게 '네' 대답하곤 화장실을 나갔다.
[성린 : (눈치챘다) 일어나기 힘들어?]
[윤아 : 잠깐만 좀... 현기증이 조금 나서요.]
[성린 : 서운하네, 이 지경되도록 말도 안하고.]
[윤아 : ^^;;; 죄송해요.
스토리풀리면, 먹히겠죠.
가요, 선생님.]
몸을 일으켜, 화장실을 나왔다.
화장실 앞에서 어찌못하고 서 있던 그의 앞에서
일부러 웃어보였다.
속에서 술조차 받지 않아서,
이젠 그의 '술 줄이라'는 걱정을 듣지 않아도 됐는데...
다른 걸로 또 그의 관심을 받는다는 게... 불편하다.
굳이 따진다면 직업병같은 것일 뿐인데.
[성린 : 신작가 꽤 예민한가봐.
몇일동안 아무것도 못먹었대나봐,
갑자기 먹으니까 속이 놀랬대.]
[선우 : (윤아를 보기만)...]
교무실로 들어가면서,
일부러 과장되게 꾸벅거렸다.
[윤아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특히 먹을 거 앞에서 왕죄송합니다~]
[박감독 : 뭐야- 신작가 나 몰래 사고쳤다매?]
[윤아 : -_-;;;; 사, 사고라뇨...
아무리 우리 비상팀에 멋진 남자가 많다지만...^^]
[채진 : 저, 저, ... 그렇게 말씀 안드렸는데 -_-;;;;]
[선우 : (그냥 윤아가 앉은 의자 뒤로 지나가는 것 같더니, 윤아 어깨를 탁 잡고)
감독님, 신작가 당장 병원에 입원시켜야겠어요.]
헉!
[윤아 : (당황해서) 아, 아니예요.
걱정마세요, 그제도 보건소가서 영양제 맞았어요. ;;;;
저 혈당량 떨어지면 아무생각도 안나거든요.
그래서 대본쓰려면 자동으로 제가 알아서 관리하게 되요.
어, 어제도... 영양제 맞는다고, 거기 의사 선생님한테
무슨 소리 들었는 줄 아세요?
고급스런 부잣병이라나...? ^^;;;
이런 시골 동네에서 농사짓는 노인분들도
웬만해선 영양제같은 거 안맞으시거든요, 사치스럽다고.]
[박감독 : -_-;;;;;]
[윤아 : (선우 돌아보며) 저 정말 괜찮아요.]
[박감독 : (진지) 신작가.]
[윤아 : 네.]
[박감독 : 난 신작가 믿어, 믿는만큼 알아서 할거지?]
[윤아 : (단호) 그럼요.]
[박감독 : 그만 자리에 앉으시죠, 최선생님.
회의 계속 합시다, 먹을 사람 먹고.
(선우, 할 수 없이 의자에 앉고)
신작가 나간 사이에 잠깐 프린트물 봤는데,
계곡 신고식이란 게 정확하게 뭐야?
이게 쎄게 나가자는 에피소드인거지?]
[윤아 : 네. 제가 급하게 생각해서 아직 구체적으로 만들진 않았지만요.
청춘 영화물같은데서 보면, 새로 전학생이 오면 텃세를 부리잖아요.
우리하고 친해지려면 이런 것도 해봐라- 뭐 그런 신고식도 치르게 하구요.]
[카메라 감독 : 외국 영화에서 자동차 경주같은 거라든가,
절벽에서 강으로 뛰어내리는, 그런 객기 말야?]
[윤아 : 네, 맞아요.
실지로 우리 청솔고에서도 그런 경우 선생님들 몰래 많이 있거든요. ^^
1학년 신입생들이 많이 겪죠, 기숙사 신고식에,
서로 반학생들끼리도 다투다가 한바탕하기도 잘하구요.
어차피 극 초반에 술내기하는 객기는 이미 부려봤으니까, 또 울궈먹을 순 없구요.
약하기도 하구요.]
[박감독 : 계곡...이면, 저 쪽 산사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윤아 : (끄떡) ...네.]
[박감독 : 위험하진 않아?]
[윤아 : 조금 위험해요.]
[박감독 : (윤아 보는) ...?]
[윤아 : 다친 애들이 몇 있긴 하지만, 아직 죽은 사람은 없어요. ^.^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안전 그물을 설치하는 게 좋겠죠.]
박감독은 잠깐 심각해지며, 한숨을 한번 쉬더니
고개를 떨궜다.
[윤아 : 그 정도 모험도 하지 않으면,
새 인물들을 시청자 뇌리에 각인시키기 힘들어요.
실연당한 걸 치유하려면, 새 사랑을 해야하는 것처럼
시청자들한테도 옛 사랑을 잊고, 새 사랑을 하게 해야죠.]
[박감독 : ...그럼 누굴 계곡 절벽에 세울거야?]
[윤아 : (진채진 보는) ...]
[채진 : ...저요?]
[윤아 : 채진씨가 다른 전학생들에 비해 제일 약해보여.
텃새부리기 가장 좋고, 가장 골탕먹이기 좋은 대상 이미지란거지.
...안될까?]
[채진 : (잠깐 고민, 결심) ...해볼께요.]
[박감독 : 헌팅부터 해보자.
(습관처럼) 민수야- (하다가) ? 왜 여태 안들어와?]
벌컥- 문이 열렸다.
[윤아 : ^^;;; 선밴 양반은 못되겠다.(하다가) ...?]
민수 선배의 표정이 엉망이다.
[박감독 : 무슨일이야.]
[민수 : 유리가 사라졌습니다.]
[윤아 : 뭐?! (벌떡 일어나는)]
그제서야 민수 선배 뒤에서
파랗게 질린 채 서 있는 홍선생님이 보였다.
[윤아 : 어떻게 된거예요, 선생님?]
홍선생님은 민수 선배를 밀치고
나에게 뛰어오다시피했다.
[민수 : 오늘 밤 촬영있어서, 올 때가 됐는데..
아직 안오길래, 그냥 좀 늦나보다 했는데...]
[윤아 : (홍선생에게) 무슨 일 있는거예요?
유리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홍선생 : (울상) 어떻해, 어떻해, ... 너 유리 갈 만한데 알지?
너하고 둘이 따로 잘 다닌덴 없어?]
[윤아 : 무슨 일인데요!!!]
처음엔 별일 아닌 줄 알고... 태연히 지켜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홍선생님의 동동거리는 급한 태도와 나의 비명같은 말투에
심각한 사태임을 직감하고,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선생 : 유리 아버지가 오셨어.]
[윤아 : ...아, 아버지요?]
전혀 예상못했던 인물이 튀어나왔다.
유리... 아버지...???
[홍선생 : 어... 마침 유리가 촬영하러 학교 나갔다온다고
나한테 보고하러 교무실에 들렀는데...]
[윤아 : ...]
[홍선생 : (한숨-푸우-) 내가 실수해도 크게 실수한 거 같애.
유리가 지 아버지를 그냥 학교손님인 것처럼 지나치면서
인사만 하고 나가려고 하더라구.
그래서... 유리보고... '유리야, 아버지한테 그렇게만 인사하는 건 아니지.'했는데...]
[윤아 : 0.0 ]
[홍선생 : 유리 정말 몰랐나봐.
아니... 물론 10년동안 한번도 못봤어도,
어떻게 자기 아버질 못알아볼 수 있니?]
오... 맙소사.
[윤아 : 그, 그래서요....?]
[홍선생 : 애가 쇼크받았는지 뻣뻣해져서, 그대로 교무실을 뛰쳐나갔어.
여기저기 갈만한데 다 찾아보고, 혹시 여기 왔나 싶어서 온 건데...
너 혹시 짐작가는데 없어?]
[윤아 : 실험실은요?]
[홍선생 : 당연히 가봤지.]
[윤아 : 학교 뒷동산은요?]
[홍선생 : 벌써 애들이 한바탕 뒤지고 왔지.]
[윤아 : 개울쪽은요?]
[홍선생 : 선생님들이 가봤는데, 없어.]
[윤아 : 읍내로 나가는 쪽은요!]
[홍선생 : 가봤지.]
[윤아 : ... 산사 쪽은요, 계곡 쪽은요!!!]
[홍선생 : 신록사에 전화해서 찾아봐달라고 하고,
선생들도 보냈는데... 아직...]
하긴... 찾을만한 곳 다 찾아보고, 없으니까
급한 마음에 여기까지 오셨겠지.
[윤아 : 혹시 모르니까, 전 동네 한바퀴 돌아볼게요.]
[홍선생 : 그래, 난 ...]
다급히 나가려는데, 누군가에게 팔을 잡혔다.
[선우 : 사정은 대강 알겠는데, ...]
[윤아 : (말 끊고, 팔 풀며) 선생님은 몰라요, 유리가 어떤 앤지.
지금 이럴 새 없다구요!]
유리, ... 과학에 관한한 천재지만
다른 것에 대해선 어린아이같다.
어떤 것이 위험한 것인지,
어떤 것이 해서는 안되는 것인지, ...
아직 다 몰라.
그래서... 예전에 다니던 학교를 폭파시킬 뻔했지.
유리의 머릿속에서
간단한 화학폭팔물 정도야 수천개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공식도
유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공식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유리의 마음이 변덕스럽게 변하면,
그 아인 아무런 위기감도 없이
어디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윤아 : 죄송해요, 감독님.
일단 유리부터 찾고 제가 연락드릴게요.]
[박감독 : 어, 어... 민수야, 너도 같이 찾아봐라.
어차피 유리없으면 다음 촬영 못나간다.]
[민수 : 네!]
폐교를 뛰어나와 유리를 부르며
동네를 뛰어다녔다.
[윤아 : 유리야- 유리야- 유....]
몇걸음 못가서, 풀썩- 무릎이 꺽이며 주저앉았다.
뒤따라오던 그와 민수가
멈췄다.
[선우 : 왜 그래?]
...아, 이렇게 상황이 급할 때
또 환상통에 현기증까지 겹치다니.
[윤아 : (입술 악물고) 아, 아니예요... 배가 좀...]
[선우 : (윤아 안고 어쩔줄 몰라하며) 괜찮긴!!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윤아 : (간신히) 유리... 찾아주세요.]
그의 품에서...
배의 숨통이 송곳으로, 정통으로, 찔린 것처럼
숨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선우 : (당황해서 흔들며) 윤아야! 윤아야!]
[윤아 : (견디면서) 괘... 괜찮아요, 시간만 좀... 지나면 되요...]
누구의 것인지, 핸드폰 벨이 울렸다.
[민수 : 여보세요? 네... 예, 여기 같이 있습니다.
네? 찾았어요?]
정신이 번뜩 들어,
민수 선배를 올려다봤다.
[민수 : 네... 그렇게 전할게요. (끊고, 윤아보고)]
[윤아 : (간신히) ...찾았...대요?]
[민수 : 응.]
환상통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어차피 심리적인 것이니까...
[윤아 : 어디, 어디 있었대요...?]
#
내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이 고통스러워하다가
곧 멀쩡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그와 민수 선배는 황당해했지만
뭐라 따로 변명할 여유도 없이
그들을 폐교로 돌려보내고
청솔고로 들어섰다.
식당에 들어가자
주방 가까이에 있는 식탁에
유리가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평범한 식사는 아니었다.
양푼에 한가득 만든 비빔밥을
몇일은 굶은 것처럼 정신없이 퍼먹고 있었다.
유리 옆에 앉은 이모가 걱정스럽게 지켜보다가
식당에 들어온 나를 보자, 구석으로 끌고 갔다.
[이모 : 벌써 저걸로 두 그릇째야.
암만 말려도 안듣는다.
입이 짧아서 너랑 먹어야
겨우 공깃밥 한 그릇 먹는 애가
왜 저런대?]
[윤아 : ...]
나는 유리 맞은편에 앉았다.
[윤아 : (차분히) 유리야-]
그제서야 유리는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유리 : ^_^ 어, 언니... 언니도 먹을래? 되게 맛있어.]
[윤아 : 나중에.]
유리의 손에서 수저를 슬쩍 빼냈다.
[윤아 : 이모가 그러는데, 너 밥 많이 먹었대.]
[유리 : ??? 아냐, 나 아직 배고픈데- ^^]
유리의 표정은 천진난만했다.
[윤아 : 그게 니가 너무 급하게 먹어서, 니 뇌에 아직 전달이 안된거야.
조금 지나면, 니 위에서 뇌로 소식을 전할거야.
너무너무 배부르다고, 큰일났다고.]
[유리 ; ...]
[윤아 : 유리는 그런 거 언니보다 더 잘알잖아, 그치?]
[유리 : ...응.]
[윤아 : 그러니까 옆에서 이모가 객관적으로 본 게 맞아, 그만 먹어도 돼.
금방 포만감이 느껴질거니까.]
[유리 : ...]
[윤아 : 그만 먹자.]
유리가 순순히 가만히 있자,
이모가 잽싸게 양푼을 낚아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윤아 : 언니가 하나 물어봐도 돼?]
[유리 : ...응. ^_^]
갑작스런 포식의 원인은...
분명 심리적인 원인... 어떻게든 빨리 꺼내 터트려야 한다.
[윤아 : 우리 유리... 아버지 만났다면서?]
[유리 : ...?]
...뭐야, 전혀 모르겠다는 저 표정은...?
충격받았던지라, 보호본능으로 일부러 기억을 안하려는 건가?
[윤아 : 아까 낮에... 교무실에서 인사했다며...
교장선생님이 그러시던데...?]
[유리 : 아, 아...]
그제서야 기억나는 듯, 알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유리 : 내 생물학적 부계 유전자를 가진 남자 말이지?]
-_-;;; 어렵다, 어려워.
[윤아 : 아버지... 왜 못알아봤어?
지난 달 학술지에 실린 그 분 논문에 사진도 같이 있었잖아.]
[유리 : (아무렇지 않은) 옛날 사진이잖아.]
[윤아 : ...]
[유리 : (윤아 눈치보며) 나... 언니가 싫어하는 거 한 거야?]
기껏 학술지에 실린 논문과 이름, 옛날 사진으로
자신의 아버지 존재를 알고 있는 유리에게
아버지를 못알아봤다고,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윤아 : ...(얕은 한숨) 아니.
그냥 언닌... 유리가 아버지랑 만났으니까,
얘기도 하고,... 그랬으면 했지.]
[유리 : (어린애처럼 도리도리 고개짓) 유리는 아버지 필요없어. ^^]
[윤아 : ...(엄해져서) 유리야-]
[유리 : (금방 고개 푹-떨구고)
언니, 언니가 그런 말 싫어하는 거 유리도 아는데....]
혼나는 것 같은 분위기면
유리는 꼭 '나'라고 하지 않고 '유리'라고 한다.
지금 잘못하는 건 '나'가 아니고, '유리'라는 것처럼.
유리의 자폐 증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리 어머니의 과민 반응에
유리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같은 것이었다.
[유리 : 유리는 진짜 진짜 그런 사람 없어도 돼.
여태 없는 것처럼 있었잖아, 그치?
유리는 언니만 유리를 많이 많이 사랑해주면 돼.
그럼 유리는 행복해진다, 뭐.]
자폐아가 수천 번의 반복으로 익힌 단어들을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내뱉는 것 같은 말투다.
이런 증세... 이젠 완전히 없어진 줄 알았는데.
...난감해진다.
[유리 : (울상) 너무너무 배불러.]
[윤아 : 응?]
아차, 깜박하고 있었다.
[윤아 : (다정히) 교무실 가서 소화제 받아서 먹자, 응?]
[유리 : 응. ^^]
의자에서 일어나자
유리가 대뜸 나한테 와서 팔짱끼고
살갑게 굴며 착 달라붙는다.
안그래도 홍선생님이 교무실에서 일하고 있어도,
신경은 온통 여기로 와 있을터였다.
유리와 식당을 나서며,
언제 따라왔는지 식당 밖에서 서 있던
민수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도저히 유리의 상태를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민수 선배에게
입모양과 표정, 눈짓으로
오늘 촬영은 어렵겠다고 전달했다.
유리의 이 상태로 오늘 촬영은 커녕
이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나와 홍선생님이 옆에서 상황정리를 거든다해도,
결국 모든 것은 유리의 머릿속에서 논리적으로 정리가 끝나야 한다.
그리고 그 전에 유리가 자신만의 세계로
도로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줘야 한다.
[윤아 : 소화제 먹고, 언니랑 책 읽을까?]
[유리 : (어린애처럼 신나하며) 정말? 정말? ^.^]
유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윤아 : 우리 유리가 좋아하는 '식물도감' 읽을까?]
[유리 ; 아니, 아니, '우주의 신비'! ^0^]
남들이 들으면, 웬 뜬금없는 소리냐-겠지만...
하긴 나도 유리를 만나기 전까진,
저런 책을 굳이 찾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 -_-;;;
그것도 아주 여러번...
#
도서관 구석 소파에서 소곤소곤...
'우주의 신비'에서 명왕성까지 갔을 때,
유리는 내 곁에서 식곤증을 못이겨 잠이 들었다.
유리가 '우주의 신비' 읽다가 잠든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유리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났다.
오늘 도서관 담당인 임선생님한테 유리를 부탁하고,
홍선생님한테 숙소로 돌아간다고 인사드리러
교무실에 들렀다.
이미 늦은 밤인데도, 교무실에 남자 손님이 있었다.
[홍선생 : 어, 마침 잘 왔다.]
[윤아 : ...네?]
[홍선생 : 인사드려, 유리 아버님, 조박사님이셔.
(조박사에게) 이 학생이 제가 말씀드린 신윤아 학생입니다.]
아... 유리 아버지시구나.
꾸벅 인사했다.
[조박사 : 딸아이를 잘 보살펴준다고 들었어요.]
[윤아 : 아닙니다, 유리가 워낙 붙임성있게 저를 따라서요.]
[조박사 : 아, 아, ... 그래요...?]
남자에게서 당황한 기색이 나타났다.
하긴... 이 분은 여지껏 유리에 대해
이런 식의 긍정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옆에 있던 홍선생님은
내 적대감이 드러난 말투에
잠시 '이건 아닌데' 싶은 표정으로 나를 봤다.
아... 내가 지나쳤나...?
[홍선생 : 이번에 교환교수로 미국에 가신대,
그래서 유리 얼굴 보려고 잠깐 들르신거랜다.]
[윤아 : 네에... 하긴 같은 한국에 있으면서도 10년 넘게 만나기 힘들었는데,
미국까지 가시면 정말 오랫동안 못보시겠네요.]
[조박사 : ...]
유리 아버지, 아니 조박사는 나를 한참 뚫어지게 바라봤다.
[조박사 : 학생은 내가 싫은가보지?]
[윤아 : 아뇨, 전 박사님에게 아무 감정없어요.
유리 표현대로라면 박사님은
유리의 생물학적 부계 유전자를 가진 남자일 뿐이니까요.]
[조박사 : (기막힌 표정) ... 딸애가 그랬다구?]
...갑자기 이 남자가 가엾어지는 건 왜일까.
내 태도와 말투가 대뜸 부드러워졌다.
[윤아 : 네. 유리가요, 조박사님 딸 조유리가요...]
[조박사 : ...]
[윤아 : 도서관에서 잠들었는데, 지금은 편하게 보실 수 있을거예요.]
[조박사 : 아니, 됐어.]
조박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결에 나도, 홍선생님도 따라 일어났다.
[조박사 : (홍선생에게) 유리, 잘 부탁드립니다.
(윤아에게) 잘 부탁하네.]
조박사는 미련따윈 태어날때부터 아예 없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돌아서서 교무실을 나갔다.
나는 홍선생님한테 꾸벅 인사하고,
급히 조박사를 따라 나갔다.
[윤아 : 박사님! 박사님!]
[조박사 : (멈춰서 돌아보는) ...]
[윤아 : (다가와서, 숨고르고) 정말 유리 안보고 가실건가요?]
... 유리가 교무실을 뛰쳐나간 후
이 시간까지 기다렸던 거라면,
한번쯤 유리를 보고 말 한번이라도 섞고 싶었던 걸텐데....
내가 그것까지 미처 생각못하고
너무 드러내놓고 가시를 곤두세웠다.
[윤아 : 유리한테 다가가는 방법을 모르신다면,
제가 생각한 걸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조박사 : ...?]
[윤아 : 유리... 사랑하세요?]
[조박사 : ...]
[윤아 : 아버지로서 말이예요.]
[조박사 : ...학생.]
[윤아 : 네.]
[조박사 : 왜 그런 걸 묻지?]
[윤아 :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 점은 사과드립니다.(꾸벅)
박사님이 이 시간까지 여기 계신 거,
유리가 박사님한테 잊혀진 딸이었을 뿐이면,
걱정같은 거 없이 벌써 떠나셨겠죠.
돌아가신 제 아버진... 무뚝뚝하신 분이셨어요,
애정 표현도 잘 못하시구요.
그래도 전 늘 사랑받는다는 걸 알았거든요. ^^
혹시 유리가 그걸 모른다면, 제가 말해주려구요.
유리... 사랑하세요?]
조박사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가, 나를 봤다.
나도 조박사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고
더이상 묻지 않고, 옆에서 그냥 걸었다.
[조박사 : 한 때는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웠고,
한 때는 정말 잊어버렸던 딸이었지.]
[윤아 : ...유리는 박사님 미워하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조박사 : ...]
[윤아 : 그렇다고 그리워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
유리는 박사님 논문을 꼬박꼬박 챙겨 봐요, 자주 여러번 보구요.]
[조박사 : 10년만에 유리를 TV에서 처음 봤지, 정말 예쁘더군.]
[윤아 : 친해지면 더 예뻐하고 사랑하실 걸요?
유리가 얼마나 어린애처럼 맑고 여리고 천진하고 사랑스런 앤지, 아시면요. ^^]
[조박사 : ...유리를 친동생처럼 아낀단 얘긴 들었지만...]
[윤아 : 유리한테 필요한 건 인내와 기다림뿐이었어요. ^^
어른들이 흔히 저희들한테 잘하는 실수죠.
만사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저한텐 딱! 적성이었지만요. ㅋㅋ]
[조박사 : (훗-)]
[윤아 : 아, 그 다음엔요.
계속 관심을 보여주고 무조건 칭찬하는 거예요.
다음 단계를 강요만 안하면, 자기가 알아서 더 잘해요.
유리는 특히 작은 보살핌하고 관심에도 많은 변화가 있는 애예요.
얼마나 정신없이 변하고 바뀌는지,
선생님이나 우리반 전부가 매일매일이 아주 새로웠다니까요!
그 다음은요, 끊임없이 사랑해주시기만 하면 되요...^^;;;
하긴 그건요,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기네스북감인데... ㅎㅎ
끊임없이 인내하기, 기다리기, 사랑해주기, ...
유리가 언젠가 그걸 화학공식으로 풀던데...
(머리 긁적) 헤헤- 전 천재가 아니라서, 하나도 기억 안나네요.]
[조박사 : ...]
조박사는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 앞에 서서
멈춰섰다.
내 마음은 다급해졌다.
[윤아 : 마지막으로 제 생각, 말씀드려도 될까요?]
[조박사 : (본다)]
[윤아 : 저는 박사님이 카이스트에서
얼마나 머리좋은 학생들을 많이 가르치셨는지 모르지만...
유리도 그에 못지 않은 두뇌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박사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딸이니까요.
유리에겐 지금 스승이 필요합니다,
보건소 의사 선생님과 동네 한의원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예전엔 전문의였던 호안 스님의 조언도 받았지만...
사실은 유리의 연구를 구체적으로 제대로 지도해 줄 사람이 없어요.
거의 독학 수준이죠.
외국의 대학연구소에서 유리를 스카웃하고 싶어하지만,
유리의 과거 자폐 증세때문에, 망설이고 있고.
유리도 여기말고는 다른 곳에 적응할 심리적 여유를 갖지못하고 있어서
함부로 떠나지 못해요.]
[조박사 : ...?]
[윤아 : 그래도 대한민국 전국에 초고속망 인터넷이 깔려있잖아요.^^
장비만 있으면 화상채팅이나,
연구 노트를 스캔해서 얼마든지 연구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구요.
그래서... 전 박사님이 유리의 스승이 되주셨으면 합니다.
스승과 제자로... 그런 시작이 더 편할 수도 있잖아요.
박사님하고 유리같은 별난 사람들이라면요.]
[조박사 : ...별난 사람들이라...?]
[윤아 : 네, 일반인한텐 자연스러운 아버지하고 딸 관계가
별로인 유별난 사람들이요. ^^]
[조박사 : ...]
[윤아 : 유리 이메일 주소 알려드릴까요?
사실 먼저 손 내미는 거, 어른들이 더 서툴고 두려워하는 거 알지만...
이번엔 박사님 차례 같은데요....? 그래서 찾아오신 거 맞죠?
(말하면서, 주머니를 뒤지다가) 저... 수첩이나 펜 있으세요?
제가 깜빡하고 안갖고 나왔는데...]
[조박사 : 학생... 아까 들으니 유리가 나오는 드라마를 쓴다고 하던데.]
[윤아 : 네. ^^;;;]
[조박사 : 나야말로 학생 입에서 청산유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군.]
[윤아 : 그거... 칭찬이시죠? ^^;;;;]
조박사는 차 안에서 낡은 다이어리와 펜을 꺼내 내밀었다.
[윤아 : (적으면서) 이건 유리 이메일 주소구요,
우리 학교 전화번호도 적어드릴게요. ^^
저는 임시 핸드폰만 있어서 그건 알려드리기 좀 그렇네요.
하긴 드라마 끝나면, 저도 학교로 돌아갈 거니까요.]
조박사는 내가 도로 내민 다이어리와 펜을 받아들었다.
[조박사 : 학생.]
[윤아 : 네, 박사님.]
[조박사 : 유리, 잘 부탁해요.]
[윤아 : 네, 유리 아버님. ^^]
[조박사 : 그런데 말야...]
[윤아 : 네?]
[조박사 : 왜 내가 학생한테 자꾸 혼나는 기분이 들까...?
유리한테도 그렇게 해요?]
조박사의 기분과 반대로
난 오히려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윤아 : 전 가족의 느낌을 알고, 박사님과 유리는 그걸 잘 모르니까요.
가족은 사회의 기본 구성이고, 약속인 건 알면서도
소중하게 지키려 노력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혼낸 것도 아닌데, 그런 기분이 드시는 걸 거예요.^^]
[조박사 : ...무슨 말인지 도통...]
[윤아 : -_-;;;]
머리좋은 교수가 중학교 윤리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을 못알아듣다니 =_=;;;;
떠나는 조박사의 차에 대고,
나는 깜빡했던 말을 마저 외쳤다.
[윤아 : 유리 아버님!!! 기왕에 미국까지 가신다니
한국말로 표현하기 어색하면, 영어로 하셔도 되요.
이메일 끝에 I love you라고 꼭 쓰셔야 되요...? 네?]
제대로 듣긴 들었는지 몰라...
유리는... 부모님이 살아계시니까...
언젠간 다시 만나긴 만나는구나...
돈많은 재벌 상속녀인 엄마와
머리좋은 교수 아버지... 그런 건 하나도 안부러운데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거, 그거 하난 부럽다.
갑자기 맥이 탁- 풀린다.
그나저나 드라마팀에겐
유리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내일이면... 유리 괜찮아질라나?
" 꼬꼬꼬- (퍼덕퍼덕) 꼬꼬댁! "
[윤아 : -_-;;; 뭐야, 꼬돌이 너 또 한밤중 광란의 양계장 탈출이냐?
바람피러 딴 닭장에 가는 거 아니면 그만 들어가라,
니가 여기서 갈데가 어딨냐.]
[꼬돌 : (뻣뻣하고 고고한 포즈로, 윤아 지나쳐가며) 꼬꼬꼬꼬-?]
[윤아 : 내가 삼계탕해주랴?]
[꼬돌 : (허거덕- 후다닥 양계장으로 뛰어들어가다가 닫힌 문에 쿠당~)]
[윤아 : 문 열어줄게.
(양계장 문 열어주며) 넌 어떻게 탈출은 개구멍으로 나와놓고,
들어갈 땐 정문으로 들어가야 되냐?
(한숨-) 우리 학생한테 배울게 따로 있지.]
#
조박사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숙소로 가는 밤길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데
저만치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사람의 움직임이 보였다.
시계가 없어서 모르지만,
거의 새벽 시간대일텐데...
이 동네 사람도 아니고,
괜히 이상한 사람이면 어떻하지.
"그럼 내일까지 기다려보고, 전체 회의에 올려보죠."
...응?
낯설지 않은 문구다.
...박상현 교사의 대사?
[윤아 : ...선생님? 거기서 뭐하세요?]
...설마... 날...?
[선우 : 아직까지 안들어오길래... 혹시 무슨 일있나 해서.]
...날 기다려주는 사람두 있네...
이런 맘도 내가 정한 금지 사항인데... -고마웠다.
혼자 대사를 중얼중얼 외우면서,
밤길을 계속 서성거렸을 그가.
[윤아 : 좀 더 늦었으면, 그냥 학교에서 잤을건데요.]
[선우 : ...응.]
나란히 숙소를 향해 걸었다.
그가 나를 자꾸 본다.
[윤아 : 왜 그렇게 보세요?]
[선우 : 독기가 없어서.]
[윤아 : ^^;;; 기운이 빠져서 그럴거에요, 아마.]
[선우 : ...업어...줄까...?]
[윤아 : (빤히 보고) ...]
[선우 : ...왜?]
[윤아 : 찬스를 이용하시는 수법에 감탄하는 중이에요.
몸 안좋으면, 마음도 약해지는 찬스.]
[선우 : ...^^;;;;]
[윤아 : ...업어 주실래요?]
그의 등에 업혔다.
...몸도 마음도 한없이 편해진다.
이러다 중독되면 안되는데...
그가 업힌 나를 배려해
일부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선우 : 아까... 배 아파했던 거... 그거 아직도 안나았니?]
예전에 병원에서 검사까지 받게 했던 것을 기억하는구나.
[윤아 : 아주 가끔만... 그래요.]
[선우 : 오늘 뭐 먹었어?]
[윤아 : ...아뇨.]
[선우 : 배 안고파?]
[윤아 : 이젠 그런 거 잘 못느껴요.
배가 고픈지, 부른지.]
[선우 : 뭐라도 먹어야 할텐데.]
[윤아 : 선생님.]
[선우 : 응?]
[윤아 : 왜 유선생님하고 결혼 안하세요?]
[선우 : ...]
[윤아 : 아직도 돌아가신 그 분... 기다리세요?]
[선우 : ...]
[윤아 : 기다리지 마세요. 저 오늘 유리 아버님 뵈었거든요.
살아있으면 언젠가 그렇게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본데,
죽은 사람은... 그럴 수 없잖아요.]
[선우 : 응, 이젠 안기다린다...]
[윤아 : ...]
예상치못한 뜻밖의 대답.
괜히 기분이 센치해졌다.
그래... 사람은 계기가 없어도 변하기 마련이니까.
[선우 : ...왜, 실망했니?]
[윤아 : ...아뇨, 지금부터라도 현실감갖고 사셔야죠.]
[선우 : (피싯-)]
[윤아 : 우리 '비상'이 끝날 때쯤이면, 갈비탕 얻어먹을 수 있겠네요.^^;;;]
[선우 : ...응?]
[윤아 : 모르세요? 결혼식장 식당 메뉴가 국수에서 갈비탕으로 바뀐게 언젠데.]
[선우 : 윤아야-]
[윤아 : ...네.]
[선우 : 넌... 왜 드라마 쓰니?]
대답하기 싫은 부분을 피해서
서로 화재를 자꾸 돌린다.
[윤아 : ...싫으세요?]
[선우 : 응.]
[윤아 : 왜요?]
[선우 : 니가 이렇게 힘드니까.]
[윤아 : ...]
...그의 어깨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여자의 직감, 이 느낌...
아니, 아니야.
그는 나를, 어린 나를, 지금 힘겹게 버티고 있는 나를
가까이 있는 어른으로서 걱정해주는 것 뿐.
...그것뿐이라해도, 눈물겹게 고마웠다.
청솔고의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걱정해주는 것과 다른 차원으로 다가왔다.
안에서 치솟아올라오는 목메임을 애써 삼켰다.
[윤아 : 그래두 한 회 한 회 끝낼 때마다, 얼마나 행복하고 뿌듯한데요.^^]
[선우 : ...그래?]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그의 말 끝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는 것 같았다.
[윤아 :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선우 : ...]
[윤아 : 그러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기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나는 마치 한 사람의 하수인처럼, 밤마다 밤을 새우면서,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넋이 들려,
그들이 시키는대로 말하고, 가라는대로 내달렸다.
그것은 휘몰이 같았다]
[선우 : ...]
[윤아 : 17년동안 혼불을 쓰신 최명희 선생님이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신 거래요.
그 분도 17년동안 글을 쓰시면서,
당신 자신에게 이 질문을 가장 많이 하셨을거예요.]
[선우 : ...그랬겠지.]
[윤아 : 저도 그랬거든요.
내가 왜 이렇게 현실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에, 인물들에 미쳐있나.
안쓰면 될 것을, 안하면 될 것을, 왜 사서 고생을 하나.]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창작하고 고뇌하는 이들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왜 자신이 이 길을 가려하는지' 가장 많이 물어볼 것이다.
사는 것도 왜 사는지 -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이 인간일진대,
평범치 못한 길을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더더욱.
때로는 행복하고 환희스럽고,
그러면서도 또 자주 내면의 고통스럽고 괴로운 자신의 길에 대해.
신들린 듯이 만들어 놓고서도, 끊임없이 부족해보이고,
자신의 피를 짜내서라도 완벽성을 추구하려고 온갖 몸부림을 치고.
내 몸 하나 편하자고, 돌아서고 외면하려고 귀를 막아도
끊임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결국 돌아오게 되는...
저주라면 저주스런 길에 대해.
그럼에도 써지지 않고 그려지지 않는 부족한 재능이라면,
자살하고 싶은 절망까지 함께 주어지는 이 길에 대해.
[윤아 : 근데 그거 아세요?
전생에 죄가 많은 사람이 작가가 된대요.]
[선우 : 여자로 태어나는게 아니구?]
[윤아 : 훗- 그럼 전 전생에 아주 죄가 많았나봐요.
여자인데다 글까지 쓰고 있으니.
...다음에 태어나면, 다신 글같은 거 쓰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번 생에서 다 쓰고, 털고 말래요.]
[선우 : ...그래서 작가가 되기로 한 거야?]
[윤아 : ...네.
선생님은 왜 연기하고 노래하고 그러시는 건데요?
우연히?]
[선우 : ...]
[윤아 : ...]
[선우 : 최명희 선생님이 이런 말씀도 하셨지.
줄타는 광대가 줄에 살 듯, 소설은 자신의 삶이다.
광대가 광대로서 사는 것은 그의 몸에서 돌아가는 피가 그를 부르기 때문이요,
나도 내 몸에 도는 피가 나를 부르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이다.]
[윤아 : ...]
[선우 : 난, 순수 예술이든 대중 예술이든
창작하고 표현하는 예술가들에겐 광대의 끼가 있다고 생각해.
그것만큼은 숨길 수 없는 법이야.
그 판에서 미쳐살거나, 미쳐가며 분출하지 못하면 병들어 죽거나...그럴테니까.]
[윤아 : 그럼...선생님두 저두 광대인 셈이네요...?]
[선우 : 그렇겠지... (사이) 그것뿐이니? 드라마를 쓰는 이유가?]
그는 대체 무엇을 더 알고 싶은 것일까.
[윤아 : 선생님, 여기선 드라마도 고급 문화생활이에요. ^^]
[선우 : ...]
[윤아 : 처음 여기 왔을 때... 제 손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었다.
정말 아무것도...
어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깨어있는 시간 1분,1초마다...
수도 없는 생각들이 끝도없이 나에게 몰아쳐왔다.
그에게서 받았던 따뜻함이,
그와 보냈던 밤이,
내 안에서 잃어버린 생명이,
나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따뜻했던 성장기의 추억들이,...
살아있다는 것이 고통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무의식적으로 허전한 손을 자주 움찟거렸다.
캠코더라도 있다면, 잠시라도 다른 곳으로 시선과 생각을 돌릴 수 있다면, ...
내 무의식은, 이 고통이 덜해질거라는 것을 아는 듯이.
대전을 떠나기 전, 대전의 작은 오빠네 보내는 짐에
캠코더를 넣어버렸다는 것이 후회됐지만, 다시 장만할 돈이 없었다.
[윤아 : 그 때 우리 교장선생님이 제게 노트하고 펜을 주셨어요.
마음의 소리가 많아서 힘든 것 같은데, 아무거나 써보라고.
그래서 썼어요, 닥치는대로.]
형식에 구애없이 한 번 펜을 들고 써대기 시작하자
머릿 속에서 수많은 영상들이, 생각들이 끊임없이 퍼내지고 흘러나왔다.
배게에 머리를 뉘였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메모를 하고,
콘티를 그리고, 써내려갔다.
형편없고 버려지는 이야기여도 상관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어찌나 그 이야기들이 미칠듯이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던지...
[윤아 : 처음엔 시나리오 기획도 좀 썼는데...
여기선 새 영화를 보러 읍내까지 나가는 것도 만만치않고, 소통할 곳도 딱히 없고, ...
그래서 그냥 묵혀두면서 휴게실에 있는 TV를 많이 봤어요, 드라마를 많이 보게됐구요.
영화하고 비슷한 픽션 이야기잖아요, 물론 많은 부분 차이점도 있지만요.]
[선우 : ...그랬구나. 그럼 대본 습작도 거의 독학이었겠네.]
[윤아 : 네... 인터넷서 대본도 구해 보고, 드라마 까페같은 곳에서
사람들한테서도 많이 배우고 그랬어요.
학교 컴퓨터실에 수업없을 땐, 오락만 안하면 자유롭게 써도 되거든요.]
[선우 : ...]
[윤아 : (선우 귀에 대고 속닥) 왜 드라마를 쓰는지, 하나 더 알려드려요?]
[선우 : ...?]
[윤아 : 선생님이 드라마를 잘 안하셨으니까요.]
[선우 : ...응?]
세상 일은 모르는 거지만, 그런 생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지난 7년간 드라마 출연이 전혀 없었기에,
행여 영화보단 부딪칠 가능성이 덜 할 것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야한다해도, 가능하면 오랫동안 피하고 싶었기에...
그런데...
[윤아 : 근데 주변길로 돌아가려다 오히려 직코스로 간 셈이죠, 직통으로 걸렸어요.
하필이면 첫 데뷔작에 선생님까지...]
[선우 : (씁쓸) ...못됐구나, 그런 잔꾀까지 부리고.]
...네, 저 못됐어요.
그러니까 제가 행여 힘들다고,
저도 모르게 선생님께 기대고 싶어해도...
쉽게 받아주지 마세요.
저 아직도...
선생님의 사소한 배려에도, 별 것 아닌 말 한마디에도...
바보처럼 자꾸 눈물나요.
2년 전...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앞뒤 사방어디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가장 외로웠을 때,
제 손을 잡아준 사람이 선생님뿐이어서 그런가봐요.
제가 맘껏 울 수 있는 가슴을 빌려주고 기대게 해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선생님뿐이어서 그런가봐요.
나이를 더 먹으면서,
푸른 극장에서 절 냉정하게 내친 선생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이젠 원망도 못하겠어서 그런가봐요.
숙소에 거의 다 와서,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저만치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민수 : (놀라서) 에-....?]
민수 선배는 그와 나를 보곤,
막 입에 물었던 담배를 그만 툭- 떨어뜨렸다.
그제서야 아차!!! 싶어서,
나는 버둥대며 그의 등에서 내렸다.
그가 날 업고 있던 팔 힘을 풀지 않으려 했지만...
[윤아 : 서, 선배... 그, 그게...
내가 오다가 자꾸 엎어지니까, 그러니까,
선생님이 보다못하겠어서... 있지, 아, 알죠...?
내가 현기증이 잘 나서... 자꾸 엎어져서...]
당황해서 땀까지 뻘뻘흘리며 변명들을 주저리주저리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2년 전,
병실에서 날 외면하며 나가버렸던 민수 선배의 모습이,
욱이 선배 자취방에서, 그를 흔들지 말라며 다그치던 민수 선배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민수 : (멀뚱) 나 아무말도 안했어.]
[윤아 : ;;;;]
[선우 : (싱긋, 민수 어깨 툭 치며) 본 것도 없지? (숙소로 들어가고)]
[윤아 : -_-;;;;]
[민수 : (시침떼고) 원래 시골은 밤이 이렇게 깜깜한가? 하나두 안보이네.]
...거짓말.
저 논 건너의 집 불빛도 여기서 다 보이는데.
2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이기 때문인가...?
민수 선배가 아까의 나에게 너그러운 것이 당혹스럽다.
[윤아 : 먼저 들어갈게요.(숙소로 가려는데)]
[민수 : 감독님 아직 안주무셔.]
[윤아 : 네?]
[민수 : 낮에 회의하다말고 뛰쳐나갔잖아.
어차피 촬영도 펑크났고, 니가 말한 계곡에 헌팅갔다 왔어.
유리 문제도 있고, 너하고 더 얘기하려고 기다리시는 거 같더라.]
[윤아 : ...]
#
숙소 마당에 들어서자,
박감독이 1층 대청마루의 형광등을 환하게 밝히고
밥상을 펼쳐놓고 입에 담배를 문 채, 촬영 대본을 보며 체크하고 있었다.
대본 옆엔 플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계곡 사진들이 흐트러져 있었고,
박감독 옆에 앉아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그였다.
[박감독 : 어, 왔어?]
박감독 맞은 편에 앉았다.
[윤아 : ...네, 죄송합니다.]
[박감독 : 조유리는 어때.]
그제서야 나는 유리의 상태와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아주 간.단.하.게.
[박감독 : 천재? 아이큐 190? 과학영재?
뭐야, 머리좋은 놈이란 생각은 했지만...
비정상적으로 나올정도로 머리가 좋으면 어쩌자는 거야.]
[윤아 : 잠깐 충격받은 것 뿐이니까, 곧 괜찮아질 거예요.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 못드려서.]
[박감독 : 알면됐고, 유리때문에 펑크난 거 빨리 대처해야 돼, 알지?]
[윤아 : 네.]
[박감독 : (사진 가리키며) 신작가가 말한 계곡 여기 맞지?]
[윤아 : 네.]
[박감독 : 진채진이 하겠대, 그대로 가자.
한 장이든 두 장이든, 오늘 아침까지 촬영나가기 전까지 해당 씬 써 와.
(수정하던 대본 내밀며) 이거, 허술하고 불필요해서 뺄 곳 체크했으니까 참고해서.]
[선우 : (걱정스럽게 윤아보는) ...]
[윤아 : (대본 받아들며) 네, 알겠습니다.]
결국 한 쪽, 두 쪽... 쪽대본 훨훨~ 날리는 작가가 됐군 -_-;;;
계곡 씬엔 그 앞뒤 구성이 어떻게 다시 짜맞춰지든간에
대사에 헛점이 없어야 한다.
진채진 계곡 씬말고도 새로 추가로 들어가는 에피소드가 두어개 더 있으니까...
그것들 찾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데도 아침까지 시간이 빠듯하겠군.
하지만 이 부분이 대본으로 나가지 않으면, 촬영을 나갈 수 없으니... 죽는 한이 있어도 써내야 한다.
[윤아 : (일어나며) 그런데요, 감독님.]
[박감독 : 응? ]
[윤아 : 연기자들 빠져나가는 거, 어떻게 막을 수 없을까요?]
[박감독 : 뭐... 지들이 잘되서 나가는 걸 어떻하겠어.]
[윤아 : 그래도 이렇게 자주 교체되면은 리얼리티가 얼마나 떨어지는데요.
실지로 대안학교까지 와서 도중에 다른 학교로 전학가는 건 말이 안되죠,
더더군다나 새로 투입되는 핑계도 전학생은 전혀 말이 안되요.
원래 전학생은 거의 안받는다구요, 일반학교도 아니구.
그나마 여지껏 중간에 휴학했다가 돌아오는 거나,
방학 때 집에 갔다가 안 돌아왔었던 애가
정신차리고 돌아온 그런 정도로 처리를 했지만... 더는 방법이 없다구요.]
[박감독 : (태평) 또 있겠지, 뭐. 웬 엄살이야.]
[윤아 : -_-;;; 새로 대체하는 캐릭터를 전혀 다르게 하려다보니까
자꾸 미숙하게 잡히는 것도...]
[박감독 : 그 정도도 순발력있게 대처 못해?]
박감독은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박감독 : 능력 안 돼? 더 못하겠어?
지금이라도 작가 교체해 줘?]
[윤아 : ...]
입을 앙다물었다.
여긴 냉혹한 프로의 세계다.
더구나 프리랜서인 작가가 창작력이 딸리면, 냉정하게 내쳐지는 건 당연한거다.
현재 '비상'의 객관적 평가 잣대인 시청률 수치가 떨어져있고,
내가 내 분신같은 대본을 주관적으로 봐도, 구성과 캐릭터에 많은 부분 헛점이 보인다.
그렇다고 이렇게 내쳐질 순 없다.
처음부터 나 혼자 전부, 뼈대부터 만들고 다듬어 시작한 내 스토리다.
내 사랑이고, 또 다른 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내 이름을 걸고, 책임지고 -추락이든 성공이든- 함께 할 거다.
[박감독 : 지금 나라고 마냥 부처님 심보인 줄 알아?
신작가까지 징징대지 마, 나 받아줄 여유 없어.]
[윤아 : 죄송합니다.]
[선우 :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
[박감독 : 정확하게 말해, 못하겠음 지금이라도 손들어.
그래야 나도 대책을 세우니까.]
[윤아 : ...하겠습니다.]
[박감독 : 그래, 그럼 지금 올라가서 시작해.]
[윤아 : 네. (사이) 저...]
[박감독 : ...]
[윤아 : 다음 회에 준비된 에피소드를 이번 회에 더 끌어와도 될까요?]
[박감독 : 어?]
[윤아 : 술내기, 교통사고, 그리고 계곡씬... 세 개 한꺼번에 조합시키겠습니다.]
[박감독 : 너무 쎄게 가는 거 아냐?]
[윤아 : 기존 멤버들을 뒤로 밀어놓더라도,
한 에피소드마다 새로 투입된 세 캐릭터들을
한꺼번에 부각시키는게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실지로 그런 사고들은 한꺼번에 터지거든요.]
[박감독 : 알아서 해, 뒷부분의 빈 에피소드는 신작가가 책임지겠지.]
[윤아 : ...네.]
대청 마루를 내려와 신발을 꿰찼다.
[박감독 : 참, 재방송 시간대 변경하고,
새 캐릭터에 대한 ost 제작 요청.]
내가 낮에 회의 때 나눠준 프린트물에 있던 내용이었다.
[박감독 : 그 건으로 연감독하고 국장한테 전화 넣었어.]
[윤아 : ...네에..]
[박감독 : (윤아 안보고) 국장이 예고편 내보낼 분량 나오는대로 올려보내라더군.
일일극하고 미니 전후반 시간대에 내보내겠다고 하네.
교체된 새 등장인물하고 앞으로 있을 에피소드에 관한 내용도
보내주면 언론에 홍보성 기사도 내주겠대.]
박감독 말론 국장은 자기 이름으로 시작한 건 끝까지 책임진다더니...
내가 미처 생각 못했던 홍보 부분까지 언급하며, 소매걷고 나선 모양이다.
하긴 결국 실패의 책임 추궁이 위로위로 올라가면, 국장도 피할 수 없을테니.
그래도 박감독이 이 상황에까지 와서도
대본에 관한한 작가의 책임부분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위임해주는 것,
나로선 이런 감독을 만난 것은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다.
어떤 감독은 아예 대사의 토씨까지 자기가 불러대며 고치도록 강요한다는데...
[윤아 : 서두르겠습니다.]
[박감독 : 어. 수고.]
박감독에게 꾸벅 인사하다가
안쓰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내가 해내야 할 내 몫이니까.
[윤아 : 저... 최선생님.]
[선우 : 어?]
[윤아 : 죄송한데요, 저 링거 좀 놔주실 수 있으세요?]
[선우 : ...?]
[윤아 : 지난 번 보건소에서 영양제 맞을 때,
혹시 몰라서 몇 병 받아왔어요.
근데 제가 주사 바늘을 못 찔러서요.]
늘 실험쥐에 주사바늘을 수도없이 찌르는 유리가 있긴 하지만...
유리는 지금 학교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터였다.
[선우 : (일어나며) 그래.]
#
옥탑방 거실.
그의 손에 한 손을 맡기고
고개를 돌렸다.
[윤아 : 손등에요, 선생님.]
손등이 따끔했다.
모양새야 처량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혈당량이 떨어지면, 평소에 잘 하던 생각이나 단어도 쉽게 떠오르지 않으니...
뭐라도 먹을 수 있다면 이 꼴까지 되지 않았겠지만...
손등의 혈관에 찔러 넣은 바늘과 링거 줄 위에
일부러 반창고를 여러번 덧붙여 단단히 고정시켰다.
키보드를 치다가, 행여 바늘이 흔들리면 아플테니까.
영양제 팩은 내 거처에 옷걸이 가구가 없어서
벽시계를 걸어두었던 거실 벽 못에다가 걸고
노트북을 올려놓은 탁자를 그 쪽 가까이로 끌어놓았다.
[윤아 : 감사합니다.]
노트북 파워를 켜고,
박감독이 건넨 대본을 펼쳐들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초초함과 심장의 피가 마르는 절박함이
시작된다.
그는 말없이 옥탑방 문을 열고 나서려다 멈칫하더니
갑자기 나에게 돌아섰다.
[선우 : 내가, 링거 놓을 줄 아는 거 어떻게 알았니?]
[윤아 : (대본 내용 생각하다가, 어벙해서 선우보는) 네?]
[선우 : 내가 링거 놓을 수 있는 거, 어떻게 아냐구.]
순간 당황했다.
대체 뭐라고 해야하지...?
[윤아 : (더듬) 민수 선배가, 민수 선배한테 들었어요.
선생님 못하시는 거 없다고...]
[선우 : (약간 미심쩍은) ...그래?]
그는 의심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듯 했지만,
더 묻지않고 내려갔다.
휴우---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우선 계곡 씬부터...
일단 진채진이 소심한 아이니까,
반 아이들의 텃새가 유별나게 진채진에게 몰리는 분위기로-
계곡 씬 전에 교실과 기숙사 방에서 미리 그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그 분위기로 이어져서 진채진이 계곡으로
반 아이들한테 떠밀리다시피해서 앞장서서 가는거야.
진채진을 가장 눈엣가시로 보는 아이는... 공주과 '승희'?
그렇다면 승희의 얄미운 대사 비중이 높아지는데...
평소 안좋게 봤다해도 무조건 이유없이 얄밉게 가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진채진이 승희에게 무슨 작은 실수라도 해서
그동안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서
진채진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게 할 계기가 필요한데...
그러고 보니 피싯 미소가 나왔다.
승희의 캐릭터를 만들 때, 모델삼아 떠올렸던,
1학년 때 나와 다투기도 많이 다퉜던,
(중간에 유학간다고 자퇴하고 떠난)
박은경이 생각났다.
아... 그러고보니 이번 회에 넣는 사건들...
모두 박은경과 내가 벌였던 사고들 아냐?
#
2년 전, 청솔고 1학년 교실.
"야, 너 고아라며?"
화류계 여자처럼 껌을 짝짝 씹어대며,
화장도 진하게 한 여자애가 건들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청솔고에 1학년으로 입학하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윤아 : (창 밖을 보기만) ...]
지금은 이 곳을 좋아하지만,
처음부터 적응을 잘했던 것은 아니었다.
호안 스님의 권유만 아니었다면
입학은커녕, 있었는지도 몰랐을 학교였기에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청솔고는 안팎으로 나를 실망시켰다.
낡고 허름한 학교 시설과
학교와 밖의 경계선이 어디인지 모를...울타리조차 없는 운동장.
완전 자유로운 차림에 화장이며 염색, 악세사리 착용도 전혀 규제하지 않는다.
수업도 아직까진 교과서조차 나눠주지 않은 채
학교 적응과 학습에 대한 학생들의 질문만 받고 있었다.
일반 학교에서도 선생을 무시하고
뒷자리에서 딴짓하는 광경이야 다반사였지만,
교실 안에서 이렇게 대놓고 껌을 씹고,
선생이 들어오든말든 인사도 없이
친구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가며 수다를 떨고,
음악을 듣고, 만화책을 보고, 맘대로 교실을 들락날락거리고, ...
이런 난장판도 과연 학교 교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더더군다나 기막힌 건 선생들의 태도였다.
자기 쪽을 보라고 탁자나 칠판을 치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아주 태연했다.
월급은 타면서, 이렇게 자기도 놀면서 시간만 대충 때우는 건가?
난 그동안 여기 사람들과 거의 말 한마디도 섞지 않고,
뒷좌석에 앉아서, 등록금만 반환된다면 빨리 그만둬야겠다... 그런 생각을 잠깐하고,
다시 괴로운 기억들이 몰려오기 전에,
곧바로 머릿속을 비우려 창밖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지금 사람 무시하냐? 너 2년 꿇었다매?"
휙- 여자애를 쳐다봤다.
여자애와 그 주변을 둘러싼 다른 여자애들의 모양새에서
왜 나한테 시비조의 말을 걸었는지, 대뜸 알 수 있었다.
여기서까지 서열을 만들겠다는 건가...?
피싯- 웃음이 나왔다.
"뭐야? 왜 기분나쁘게 웃어?"
이런 애와 말 섞고 싶지 않았다.
여자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어쭈- 니가 아웃사이더처럼 굴면, 뽀대가 나는 줄 아나본데
여기 애들 다 전 학교에서 한 가닥씩 한 애들이야."
짐짓 한숨이 나왔다.
몇일전부터 한두마디씩 말을 붙여보던 것과 달리
쉽게 물러날 것 같지않았다.
[윤아 : (차분히) ...살자.]
"뭐? 방금 뭐라고 그랬냐?"
나는 거칠게 옆의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우당탕- 그 앞의 책상까지 도미노처럼 넘어졌다.
바로 그 앞 책상에 앉아있던 키만 멀대같이 큰 해준이가 '허억!' 놀라서 방방 뛰었다.
[윤아 : (차분) 조.용.히. 살.자.구.]
여자애들 대부분은
내가 나이도 있는데다가
거칠게 나오자 주춤거렸지만
처음부터 시비를 건 여자애, 은경인 더 독이 올랐다.
은경인 대뜸 내 머리를 휘어잡고 늘어졌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휘둘렀다.
[해준 : (방방 떠다니며) 으악! 으악! 쌈났어요!!!! 선생님!!! 선생님!!!]
그 당시 악 밖에 남지 않았던 난 어떻게 할 수 있었던건진 몰라도
은경일 교실 뒷벽으로 밀어붙여 뒷통수를 몇 번 찧게했다.
[윤아 : (싸늘) 나 안그래도 세상 안살고 싶은 사람이거든...?
니가 나 죽게 해줄래?]
[은경 : ...]
[홍선생 : (교실 들어오며) 무슨 일이야?]
[윤아 : (은경 탁 놔주고, 태연히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어들고 의자에 앉아 책보는)]
[홍선생 : (윤아 보고, 은경 보는)]
[은경 : 에이, 씨발... (교실 나가고)]
그 후에도 은경인 언니 격인 나를
어떻게든 이겨먹어보려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댔다.
그 덕에 나는 은경이와
읍내에 나가 기절할 때까지 술 내기를 하기도 했었고,
술기운에 차도로 뛰어드는 위험한 짓도 했었고,
한 겨울에 얼음같이 차가운 계곡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짓도
청솔고 역사상 처음으로 벌이기도 했다.
이미 사고뭉치들만 보아오며, 웬만한 일엔 강심장이 된
청솔고 선생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들로 나는 선생님들의 위선없는 모습에 점차 신뢰를 갖게 되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나 할까.
은경이와의 술내기로 죽기살기로 정신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언제 기절했는지도 모르다가, 병원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내 옆엔 홍선생님이 서 있었다.
[홍선생 : 정신 들어? 괜찮아?]
[윤아 : 목말라요, 물 좀 주세요.]
[홍선생 : (물 주며) 탈수 증세야, 술을 그렇게 마셔댔으니.]
[윤아 : (물 마시고) 은경인요?]
[홍선생 : (옆 침대 가리키며) 아직 안 깨어났어.]
[윤아 : (피싯)]
[홍선생 : 웃음이 나와?]
[윤아 : 제가 또 이겼어요.]
[홍선생 : 그래, 축하한다! 축하주 한 잔 사야지? ^0^]
[윤아 : (황당) 선생님은 그게 제자한테 할 소리세요?]
[홍선생 : 어쩌냐, 일은 벌어졌고.
너는 이겼다는데, 내가 할일은 니 손을 들어주는 것 밖에.^^
신윤아 판정 승!!!(^0^)/ ]
[윤아 : (피싯-)]
[홍선생 : 왜 또 은경이하고 술싸움까지 한 거야?]
[윤아 : 몰라요, 쟨 제가 무조건 싫은가봐요.]
[홍선생 : 그래도 그렇지, 술 잘못 마시면 죽는 거 몰라?]
[윤아 : 그럼 죽죠, 뭐.]
[홍선생 : 넌 이 세상에 대체 뭐가 불만인데? 어?
말만 해!! 이래뵈도 내 (자신을 가리키며) 아줌마 펀치가 좀 쎄걸랑?
내가 한 방 먹이고 올게.]
[윤아 : (쿡-) 아줌마 패션인 건 맞네요.]
[홍선생 : 어? (자기 츄리닝 차림 보곤) 야- 이거야 자다가 전화받고 급하게 나오느라 그랬지.
니들이 사감 선생까지 모르게 기숙사를 빠져나갈 줄 알았냐.]
[은경 : (깨어나 일어나며) 으으... 진짜 저 패션은 좀 심하다...
어제두 울 학교 대표 얼굴이라고 떠들더니, ...쪽팔려.]
[홍선생 : (다다다- 은경에게 달려가서) 정신 드냐? 목 마르지? 얼른 물 마셔.]
[은경 : (물 마시고) 쌩님- 머리가 그게 뭐에요? 머리 말다가 잤어요?]
[홍선생 : (자기 머리만져보고)어? 그렇네? ^^;;;;;]
[은경 : 우씨... 진짜 쪽팔려, 가요.]
[홍선생 : -.-;;;; 일어날 수 있어?]
[은경 : (일어나 어기적 나가며) 오려거든, 저만치서 오세요.]
[홍선생 : ^^;;;;]
자식이 부모를 구박해도, 이러진 않겠다 싶었다.
어느 세상천지에 제자한테 이렇게 당해주는 선생도 있나...?
[윤아 : (홍선생이 측은한)]
[홍선생 : (윤아에게) 넌 일어날 수 있어?]
[윤아 : 화장실 가서 머리 빗고 세수라도 하고 오세요, 전 여기 있을게요.]
[홍선생 : 아아... 그래. ^^;;;
(가려다말고) 참, 너 어젯밤도 혼자 배 아파 끙끙 앓던데, ]
[윤아 : 네?!]
[홍선생 : 너 병원 온 김에 검사 받을래?
괜히 참다가 맹장이라도 터진거면...]
[윤아 : 아, 아니예요.]
어제 여자 기숙사 순찰을 홍선생님이 돌았나?
[홍선생 : 그럼 뭐야? 생리통? 배가 아픈게 또 뭐가 있지?
새삼스레 수능 스트레스 같은 건 아닐거구.]
[윤아 : -.-;;; 심리적인 거래요.
예전에 검사받아 본 적 있는데 이상없댔어요.]
[홍선생 : 정말이지?]
[윤아 : 네.]
[홍선생 : 내가 딴 걸로는 속아도, 얼마든지 넘어가 줄 수 있지만
병 키우고 아픈 건 절대 용서 안한다!]
[윤아 : ...네, 절대 그런 거 아니예요.]
[홍선생 : (윤아 보곤, 믿는) 그래, 그럼.
그래도 담에 아프면 내 방에 와,
내 손이 아직은 제법 쓸만한 약손이야.
홍선생 손은 약손~ 우리 윤아 배는 똥배~]
[윤아 : 그, 그럴게요. ^^;;;;;]
#
다시 현재, 옥탑방.
이런... 쪽팔림 -.-;;;;
내 최악의 경험들의 밑바닥까지 닥닥 긁어서
다 써먹게 되다니...
똑똑-
[윤아 : (문 쪽은 쳐다보지 않은 채) 열려있어요.]
이 새벽 시간에 옥탑방을 노크할 사람은
박감독 아니면 민수 선배 정도일 거였다.
문이 열린 인기척이 났는데,
들려오는 말이 없이 조용한게 이상해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아 : (!, 일어나려하며) 선생님...]
그는 내 어깨를 살짝 잡아눌러, 다시 앉히며
들고 온 쟁반(상보자기 덮힌)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고, 내게 밀었다.
[선우 : 위 너무 오래 비워두면 힘들어.
토하더라도 조금씩이라도 남게, 먹히는 거 있으면 먹어봐.]
내 표정이 점점 차갑게 굳어갔다.
더 이상의 호의는, 동정은, - 감당하기 힘들다.
그의 앞에 다시 벽을 쌓고, 뒷걸음질쳤다.
[윤아 : (싸늘) 이러실 필요없는데요.]
[선우 : (당황) ...언젠가 나 간호해 준 보답이니까,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음 좋겠다.]
[윤아 : (까딱) 감사합니다.]
일부러 바쁜 티를 내며
쟁반엔 눈길도 주지 않고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았다.
황당하겠지, 변화무쌍한 내 태도에.
앞으론 일관성을 가져야겠어.
어떤 힘든 일이 있든, 아무리 내게 따뜻하게 대해준다해도,
절대 흔들리는 일 따위 없어야겠어.
그가 나가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은 뒤에야
쟁반을 덮은 상보를 걷었다.
찹쌀죽, 야채스프, 과일 갈은 것, ...
소화에 무리를 주지않는 음식들만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자꾸만 내게 따뜻하게 닿아오는 그의 마음에
나는 서럽게 울고만 싶었다.
내 몫으로 감당해야 할 혼돈을
그에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신윤아, 울지 마...
너에겐 울 시간이 없어, 울 자유가 없어.
네가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사랑할 수 없다면, 치열하게 살 자신이 없다면...
글 속에서라도 치열하게 사랑하면 돼.
대본 안의 삶에 대해서만큼은 치열하게 살도록 하면 돼.
독하게 입술을 꾹 다물고
쟁반에 다시 상보를 덮어 내 팔로 힘껏 멀리 밀어놓고
커터칼을 집어들었다.
드르륵- 칼날 아래 팔 안을 들이댔다.
------------회 상-----------------
왼쪽 팔 안, 여기저기
수시로 칼등으로 그어버린 자해 상처들...
[윤아 : 최선생님두 봤어?]
[나현 : 그건 겁나?]
----------------------------------
멈칫... 처음으로 자해하려 칼을 든 손이 떨렸다.
겁난다, 그가 아는 것이 겁난다.
내 손목의 흉터만으로도, 그는... 많이 힘들어했는데.
소매를 걷어도 잘 들키지 않을 팔꿈치 안쪽으로
칼등을 대고, 고통을 가했다.
아프다...너무, 내가 나한테 주는 벌이다.
다시는 그에게 틈을 보여선 안 돼, 아무리 몸과 마음이 약해져도.
대본도 제대로 못써내면서, 지금 무얼 누굴 신경쓰고 있는거야.
그리고... 모두 잊어라.
대본을 쓰는 시간동안만큼은
나에겐 나 자신도, 그도 없어야 한다.
대본 작업에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노트북에 꽃아 연결한 헤드폰을 썼다.
mp3플레이어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모아놓은 음악 리스트를 불러냈다.
...나는 없어진다...
내 안은 텅 비어간다...
'비상'의 폐교의 한 교실이 떠올랐다.
진채진... 승희... 를 중심으로
반 아이들이 모여있다.
그들의 표정과 태도, 대화가
내 앞에 펼쳐진다.
나는 오직 보이는대로, 들리는대로...
대리인처럼 글로 옮겨, 망설임없이 미친듯이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
1층 대청마루에서
막 아침식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박감독에게 계곡 씬을 비롯한
다음 회에 준비되어 있던 술싸움과 교통사고 씬을 수정해
앞뒤 고리를 연결시킨 대본 프린트물 뭉치를 내밀었다.
카메라 감독이 하품하며 방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오다가
대본을 흘낏거렸다.
다들 박감독의 눈치를 보며
각각의 자리에 밥공기를 놓고 국을 떠 놓고 수저를 놓으면서도
막상 수저 들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던지라,
박감독도 그 자리에서 빠르게 훑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내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박감독은 마지막 장까지 보곤, 못마땅한 듯 바닥에 탁- 내려놨다.
[윤아 : 수정볼까요?]
[박감독 : 됐어, 내가 알아봤음 됐어.]
[윤아 : 수정보겠습니다. (일어서는데)]
[박감독 : (버럭) 시청자가 대본보나? 내가 알아봤음 됐다고 하잖아!]
[윤아 : (멈칫)]
[선우 : 박감독님...]
그가 박감독을 부르고 나서야,
박감독도 나도 1층 분위기가 싸아-해진 것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박감독 : 신작가한테 더 시간을 줄 수 없을뿐이야.
대사하고 전체 구성은 매끈하고 괜찮아.
지문이 장문으로 빠진 곳이 많아서 좀 성가시긴 하지만,
다들 알아볼 수 있으면 됐어.
민수야.]
[민수 : 네, 감독님.]
[박감독 : 이거 복사부터 해 와, 밥은 나중에 먹고.]
[민수 : 네!]
민수 선배가 대본 프린트물을 받아들고 일어나는데,
2층에서 나현이가 핸드폰을 받다말고
넘어질듯 후다닥 뛰어내려왔다.
[나현 : 최선생님!! 선생님!!]
[선우 : ? (일어나고)]
[나현 : (난감) 어떻하죠? 오늘 스케쥴 겹치겠는데요?
신사복 카달로그 촬영하구요.]
[선우 : 아....(난처)]
[민수 : (으악- 난감하고)]
[박감독 : (굳고)]
오늘까지 그도 나오는 늦은 오후의 계곡 씬을 촬영하지 못하면...?
내일 방송될 '비상'은 어떻게 되는거지...?
[민수 : (매달릴듯) 나, 나현아!!!]
[나현 : 안돼요!!! 이 쪽도 벌써 10년째 전속계약된 곳이라
함부로 펑크낼 곳이 아니라구요!]
[선우 : (나현의 손에서 핸드폰 낚아채고) 여보세요, 최선웁니다.
네... 이 곳 스케쥴이 갑자기 변경되서요. (듣는) 네... 그럼 이렇게 하죠.
지금 출발할테니까, 제가 도착하는대로 시작할 수 있게
세팅같은 거 모든 준비 끝내주세요.
늦어도 그 곳에서 3시엔 출발해야 됩니다, 끝나지 않아도 출발할 겁니다.
그래도 다른 날로 변경이 어려우면 그렇게 합시다. 네- (끊고, 나현에게)
나현아, 지금 출발하자. 요기는 가면서 하고.]
[나현 : 네!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가고)]
[민수 : 삼촌! 올거지? 올거지?]
[선우 : 방금 들었잖아, 최대한 서두를게.
(민수 손의 대본 낚아챈다) 이건 내가 가면서 볼게,
너는 신작가한테 다시 받아.
(박감독에게) 서둘러 오겠습니다. (방에 들어가 웃웃 걸치고 나오고)]
[박감독 : 네.]
[윤아 : ...]
[박감독 : 신작가.]
[윤아 : 네.]
[박감독 : 만약을 위해서 계곡 씬에서,
최선생 부분을 유선생 것으로 바꿔서
대본 하나 더 여분을 만들어야겠어.]
[윤아 : 네.]
[선우 : (멈칫, 윤아 보고) ...]
[윤아 : (선우 안보고, 계단 올라가고)]
[나현 : (2층에서 내려오다가, 윤아 스쳐내려가고)]
그와 나현이 서둘러서 떠나는 것을 보고,
다시 계단을 올라가는데, 2층 문이 열리면서
유성린이 고개를 내밀었다.
[윤아 : (꾸벅) 안녕히 주무셨어요.]
[성린 : 응. ^^ 들어와- 아침 먹자.
어젠 뭐 좀 먹었어?]
[윤아 : 아, 아뇨. 어제 것도...]
[성린 : 응?]
[윤아 : 아, 아니예요.]
그가 새벽에 올려 온 음식이, 거의 남아있었다.
하지만 유선생에게 그걸 굳이 이야기해서
아침부터 기분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유선생이 이끄는대로 2층 거실로 들어갔다.
여분 대본을 만드는 것은 약간의 여유를 가져도 될 듯했고,
유선생한테 상황 설명도 해야했다.
[예지 : 어머, 또 밤샜나보네.
얼굴이 저래갖구 화장이나 한 번 제대로 해보겠어?]
[윤아 : -_-;;;
곧 새로 에피소드들 추가된 새 대본 올라올거예요.
(모두에게 꾸벅,꾸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성린 : 회의대로 하기로 한 거야?]
[윤아 : 네.]
[성린 : 그것때문에 신작가도 고생하는데, 너무 그럴 거 없어.]
[윤아 : ...네에-]
[성린 : 밥 먹을 수 있겠어?]
[윤아 : ...잘 모르겠어요,
그냥 숭늉이나 있으면 그거나 좀 마셔볼래요.]
[성린 : 그래라, 지금 만들게.]
[윤아 : 제가 할게요.]
[성린 : 기왕에 손에 물 묻힌 사람이 할게,
신작가는 밥 먹는 시늉이라도 해 봐.]
[채진 : 괜찮으세요? 얼굴이 하얘요.]
[윤아 : 괜찮아, 그나저나 채진씨 오늘 괜찮겠어?
그 계곡 물, 한 여름에도 굉장히 차. 그리고 절벽 쪽에서
뛰어내리는 거면 줄없이 번지점프하는 거라고 봐야하는데.]
[채진 : (허억-)]
유선생한테서 숭늉을 받아들었다.
촬영이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박감독의 실력에 방송은 어떻게든 펑크나진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손등에 남아 있는 반창고의 접착제 일부와
주사 바늘이 꽃혔던 흔적을 보자
괜히 그 부분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따뜻한 숭늉물을 들이켰다.
안도감이 들어서인지, 낱낱히 곤두섰던 신경들이 이제는 많이 누그러졌는지
속에서 거부감없이 받아들인다.
#
그가 펑크낼 때를 대비한 여분의 대본까지 만들어
유성린에게 넘기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계곡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카메라 리허설이 마음에 걸렸다.
진채진이 하겠다곤 했지만, 리허설은 다른 스탭이 해야할 것 같은데
그 절벽 높이가 만만찮기 때문에... 쉽게 자청할 이가 없을 듯했다.
내가 하자고 주장했으니, 내가 책임져야지...에구구...
하여튼 난 사서 고생하는 팔자인가보다.
계곡의 촬영장에선 한창 촬영 장비 세팅 중이었다.
나는 계곡의 절벽으로 올라갔다.
카메라 높낮이를 지지하는 장비 설치가 어려워
일단 내 뒤에서 카메라를 따로 한 대 더 설치하고 있던
카메라 감독과 조명 감독이
나를 모델로 렌즈의 방향과 빛의 각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몇몇 각도의 감을 미리 잡아뒀다.
"위에 준비됐으면 시작하세요. 지직-"
카메라 감독의 무전기를 통해
아랫 쪽에서도 리허설 준비를 마쳤다는 연락이 왔다.
나도 준비됐다는 신호로 카메라 감독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
계곡의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섰다.
높은 곳의 바람이 물의 찬기운만큼이나 서늘하다.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숨을 고르며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봤다.
낮에도 별을 볼 수 있는 곳... 난 항상 이 곳에서 서면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무거운 육신의 탈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영혼만으로 우주를 유랑하고 싶다...
두 팔을 펼친 채
절벽 끝을 가볍게 탁-! 발끝으로 차내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계곡 물 길을 따라
곧바로 물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나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
한 때는 이 물 속이 온통 내 손목에서 흘러나왔던 피로 물들여졌었는데도...
저기 아래로 안전 그물이 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은 숨을 참을만했다, 그물이 잘 쳐져있는 건지 확인하려
아래 쪽으로 내려가려 했다.
풍덩-!!
누군가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 내 쪽으로 헤엄쳐오더니
나를 잡아 물 위로 끌어올렸다.
수면 위로 떠오른 뒤에야
나를 끌어올린 사람이, 그라는 걸 알았다.
그는 그의 손을 뿌리치는 나를 억지로 물 밖으로 내보내고, 그도 나왔다.
[윤아 : (주저앉은 채, 앞에 앉아 윤아를 살피는 선우에게 버럭)
저 수영할 줄 알아요!!! 수영할 줄 안단 말이예요!!!
(카메라 가리키며) 이거 카메라 테스트였다구요!!!
선생님 도대체 왜 이러세요, 네?]
그는 얼굴이며 온 몸에서 물 뚝뚝 떨어뜨리며
-내 말이 끝날 때까지- 표정없이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에게서 고개돌려 나현(놀라서 우리 가까이로 달려와 뻣뻣하게 서 있는)을 보며 일어섰다.
[선우 : 나현아, 내가 여벌로 갖고 온 옷가방 밴에 있니?]
[나현 : 아, 예예-(윤아 흘끔 보더니, 선우를 앞서서 밴으로 뛰어가며) 제가 찾아드릴게요.]
난 그의 등장에 갑작스런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눈을 잠깐 감았다.
그 때 내게 커다란 세면수건이 날라왔다.
[나현 : (퉁명) 선생님이 너 갖다 주라신다.]
[윤아 : ...]
[나현 : 넌 꼭 사람많은데서 선생님 무안하시게
그렇게 싸가지없이 굴어야겠냐?]
[윤아 : ...]
아....
난 갑작스레 놀라서, 그에게 마구 퍼부어대면서
미처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말없이 굳어버려 일어나 가버린 것도...
[나현 : 선생님이 너한테 해꼬지라도 하시디?
니가 들어가서 한참을 안나오니까, 무슨 일 난 줄 알고
놀라서 뛰어들어가신 거 아냐!]
[윤아 : ...]
[나현 : 너 어디가서 내 친구라고 하지마, 알았어?]
나현이가 팩-해서 돌아서서 밴의 운전석으로 가버리고,
나는 내 실수에 대해 상당히 난감해졌다.
수건으로 어깨를 감싸며
밴으로 다가가, 뒷 문 옆에 섰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면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나오다가
나를 보고 흠칫했다.
[윤아 : (고개 숙이며) 아까 버릇없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선우 : ...(보기만)]
[윤아 : (돌아서려는데)]
[선우 : 왜... 니가 뛰어내렸니.]
[윤아 : 채진씨가 두 번은 못뛴다 할까봐요.]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선우 : 나현아, 윤아 숙소에 데려다주고 와라.
저대로 있으면 감기걸려.]
[윤아 : 아, 아니예요.
지름길을 아니까, 그리로 가면 금방이예요.]
행여 그가 다른 오버 액션을 할까봐
서둘러 촬영지를 빠져나갔다.
#
숲의 오솔길을 걷는
내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입고 있는 옷 전체가 젖어있으니,
나현이가 건네준 수건도 별 소용이 없었지만,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고
하늘 저 켠이 노을로 물들어가면서
갑작스레 추위가 느껴져
상체에 두른 수건을 다시 고쳐 둘렀다.
그에게 한 실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젠장, 다른 곳도 아니고...
그에게 거절당했던 마음이 힘들어서...
그와 나의 우리 아이를 잃어버린 것이 고통스러워서...
죽으려고 손목까지 긋고 들어갔던, 그 계곡 물 속에서
느닷없이 그가 도깨비처럼 튀어나왔으니,
내가 그 순간 어떻게 멀쩡하게 그를 대할 수 있었겠어....
더 퍼붓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내 팔을 잡아당기면서
내 몸 전체를 돌려세웠다.
[윤아 : 0.0]
입은 벌렸으나, 말이 나오지 않고
놀란 눈만 커다래졌다.
다음 순간, 그는 나를 끌어당겨 꼭 끌어안았다.
[선우 : 사랑한다, 신윤아.]
내 귓가에 대고 하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발음 분명한 말에
... 그만 심장이 멎어버린 줄 알았다.
[윤아 : 서, 선생님...]
[선우 : 미안하다... 널 사랑해서...]
나는 그제서야 그의 말 의미를 정확히 알아듣고는
그를 확- 밀쳐냈다.
그는 비틀거렸고,
나는 숨이 마구마구 가빠지기 시작했다.
[선우 : ...]
[윤아 : 장난... 치지 마세요.]
[선우 : (멍해지더니) ...장...난?]
[윤아 : (목소리 톤 점좀 높아지는) 선생님은 이미 절 여러 번 버리셨어요, 잊으셨어요?
전... 선생님 말 절대 안믿어요.
전 선생님 사랑하지 않아요!!!]
[선우 : 윤아야, 그건...]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 늦어버린 그의 고백이, 그의 마음이, 안타까웠다...
[윤아 : (애원조) 이건 아니라는 거, 선생님이 더 먼저 아셨잖아요.
선생님 사랑은, 유선생님이지 제가 아니예요.
전... 흡-]
갑자기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고
그의 힘에 끌려가다시피, 오솔길 옆 풀 숲 뒤에
그와 마주한 채 웅크려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저 눈만 똥그랗게 뜬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저만치 계곡 쪽에서 이 쪽으로 다가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민수E : 삼촌, 삼촌-]
[나현E : 선생님! 선생님! 어디계세요?]
[민수E : 이 쪽이 아닌가본데? 저 쪽으로 가보자.
삼촌- 삼촌- 어딨어? 곧 촬영 들어가요!]
민수 선배와 나현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내 입술에서 그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그와 아주 가까이... 얼굴을 맞댄 채
마주보고, 서로의 눈을 보고 있었다.
[선우 : (윤아 두 어깨를 꽉 잡고, 나즈막히)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거다.
변하는 건 없어.]
[윤아 : ...]
[선우 : 아까 네가 물 속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미쳐서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늦기전에 너한테 말해줘야 된다고 생각했어.
2년 전 네가 나한테서 갖고 싶어했던 거, 이미 가졌다는 거...]
[윤아 : ...(눈물 그렁해서) 그 분...은...요.
선생님 그 분은요...]
[선우 :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거... 알려준 건 너야.]
[윤아 : ...(눈물 툭툭-) 선생님...
(고개 젓는)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아니에요...]
[선우 : 다시 말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뭔지, 니가 제일 잘 알잖니...
너한테 안전한 울타리라도 있다면,
내가 널 지켜보는게 이렇게 힘들진 않을거다.]
나한테 부모님이 안 계신 걸, 불안해하는구나.
난 아직 어리니까...
[윤아 : 달라지는 게 없다구요?!
아니요, 사랑은 소유하고 싶고 독점하고 싶은 거에요.
제가 잘 지내는 걸 지켜보는 걸로 만족하겠다는 건,
거짓말 아니면 위선이라구요!]
[선우 : ...]
그의 손이 내 뺨의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선우 : 내가 그 이상 욕심내길 바라니?]
[윤아 : ...!]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 머뭇거렸다.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자신도 일어섰다.
[선우 : 촬영하러 가야겠다.
곧 어두워져서 오늘내로 찍지 못하면, 큰일일테니까. ^^]
그는 내 상체에 허술하게 둘러져있던 수건을 고쳐 둘러주며 꼭꼭 여며줬다.
[선우 : 빨리 숙소에 가서 샤워하고 따뜻한 차를 마셔라, 꼭.]
그는 내 이마에 따뜻한 키스를 했다.
그에게 아주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 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선우 : 네가 감기라도 걸리면, 조금이라도 아프면, ...
내가 너보다 더 아파져. 무슨 말인지 알았니? 알겠어?]
[윤아 : ...네.]
그는 내 대답에, 소년처럼 빙긋 웃었다.
그는 나를 한 번 꼭 끌어안았다가, 몸 떼고서도
줄곧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 두 걸음, ... 뒷걸음치며
서로의 모습이 많이 멀어진 뒤에야, 돌아서서 촬영지인 계곡 쪽으로 뛰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