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보이지 않는 얼굴 >> "어서 와라, 지나야!" "잘 지냈어?" 지나는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 동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키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는 유리컵을 행주로 닦다가 그녀를 시원한 창가 쪽으로 안내했다. "여전히 사람이 많구나?" 지나는 가게 안을 잠깐 둘러보고는 웃었다. 친구가 여전히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아 기뻤다. "그런대로지 뭐." 동인은 가게 입구 문이 열리면서 세 명의 손님이 연이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지나에게 잠깐 기다려달라고 했다. 지나는 괜찮다며 갔다오라고 했다. 그 동안에 직원 한 명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그녀는 술을 잘 못 했다. 고작 마시는 거라고는 맥주 한 병이 전부였다. 한 병까지는 그나마 변기를 끌어안고 속에 있는 것을 모두 끄집어내는 일만 하면 되지만, 그 이상을 마시게 되면 바닥에 쓰러지든, 아무에게 안겨 잠들거나 하는 짓을 했다. 동인은 대학시절부터 줄곧 그런 그녀의 뒷바라지를 몇 번 해준 적이 있었다. 지나는 500cc 하나를 주문했다. 하지만 나갈 때까지 다 마실 생각은 결코 아니었다. 동인이 그녀가 주문한 맥주와 팝콘을 들고 나타났다. "이거 다 마실 건 아니지?" "당연하지. 아니면 여기서 엎어져 잘지도 몰라." 그녀는 미소를 지은 후,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그래도 맥주가 맛있는 이유는 시원함이었다. 쌉쓰리하고 톡 쏘는 이 맛!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땀 나거나 갈증이 날 때 마시는 것은 역시 순간의 행복과 짜릿함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거품을 살짝 혀로 닦은 후 팝콘을 하나 먹었다. 이때 동인의 손가락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그녀의 입술 가를 재빠르게 닦아주었다. 마치 오빠가 여동생의 입가를 닦아주는 것처럼 그의 행동은 전혀 부담이 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대학시절부터 내내 그녀의 리포트를 도와줬고, 같이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까지 와서 매상을 올려주기도 했고, 가끔 늦게까지 일하면 집에 바래다주기도 하는 의리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지나는 너무나도 편한 동인과 오랫동안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껏 힘들어도 단 한번도 빌리지 않았던 돈을 빌려야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그래, 무슨 문제야?" 지나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있자 동인이 먼저 화제를 끄집어냈다. "미안해, 동인아." 그녀는 뜬금없이 미안하단 말부터 해 그를 놀라게 했다. 그는 지나의 맥주 잔을 들어 반 정도 맥주를 마셔버렸다. "뭐가? 뭐가 미안한데?" "난 이제까지 너한테 도움이 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항상 너한테 신세만 지고." "이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칭찬으로 날 띄우는 거야? 도대체 무슨 부탁인데 이렇게 뜸을 들이냐?" "저기... 나 돈... 빌려줘." 그녀는 곧장 역시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들어 지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몸을 움츠렸다. 역시 친한 친구 사이라고해도 돈 빌리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그러던가... 돈과 애인과 그리고 차라고 했었나? 그 세 가지를 빌려주지 말라고 어디선가 그런 걸 본 적이 있었다. 걱정하는 그녀의 얼굴과는 달리 동인은 무덤덤한 얼굴로 얼마인지 물었다. "100만원." 그는 돈 빌려달라고 할 때보다는 다르게 놀란 표정이었다. 역시 액수가 컸던 거야. "나 참... 야, 김 지나. 그 돈 얘기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냐?" "음?" "난 또... 한번도 돈 빌려달란 소리를 안 하던 녀석이 갑자기 돈 타령하니까 무슨 큰 일났는 줄 알았네. 100만원이면 되? 더 필요한데 괜히 눈치보느라 일부러 깎아서 말한 거 아냐?" 지나는 손을 내저었다. 빌린 돈과 통장에 있는 돈까지 합치면 집세를 말끔히 계산할 수 있었다. "넌 학교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그랬잖아. 힘든 거 있어도 절대 친구한테 돈 빌려달란 소리 안 했어. 그래도 난 너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겼는데, 넌 오히려 돈 빌리는 걸 꺼려했어. 힘들면 얘기하면 되는데." 서 동인은 웃는 얼굴이 유난히 천진난만하게 귀엽고 한편으로는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지나를 몇 주 동안 내내 걱정했다. "미안해. 하지만... 돈까지 너한테 부탁할 수는 없었어. 없으면 없는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임마! 그러지 좀 마라. 이제 속 편하게 좀 살아! 그러다가 살 쏙 빠지겄다, 이것아! 몇 주 안 보고 살았다고 얼굴 꼴이 그게 뭐냐? 지 재영이가 네 얼굴이 해골인 거 알면 나자빠질 거다." "그 앤 그러고도 남아." 지 재영은 동인과 고등학교 때 단짝이었고 대학시절 그를 통해 만났다. 욱하는 성격에 모진 구석이 있는 재영은 여자이기 보다는 남자 쪽에 가까운 여자였다. 지금은 몇 번의 직장생활을 옮겨다니는 것도 지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준비한다고 학원다니고 있었다. 더이상의 공부는 대학시절 뿐이라며 책과는 담 쌓고 살았던 그녀에게는 놀라운 변화였다. 동인은 잠깐 자리를 비우더니 15분 정도 지나서 다시 돌아와 그녀 앞에 현금 100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그냥 주는 거 아냐, 임마. 나중에 너 돈 많이 벌면 그때 이자쳐서 받을 생각이야." "고마워, 동인아." 서 동인은 핸드백에 돈을 단단히 집어넣는 그녀에게 그 돈을 어디에다 쓸 건지 묻지 않았다. 분명히 요긴하게 쓸 일이 있어서일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라 여겼다. 그에게는 당장 수중에 100만원이 없다해도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 일자리 구했어." 그는 팝콘을 입에 넣다가 그 말에 잠깐 멈추었다. "가정교사." "뭐? 가정교사? 아, 저번에 교장이 얘기한 거기? 그럼 거기 가기로 결정한 거야?" 그는 지나가 학교를 그만 둔 것을 알았고 그만 둘때 교장이 건넨 가정교사 얘기를 언뜻 들은 바가 있었다. 약간 꺼림직한 것이 있다면... 그 집에서 숙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들어간다지만, 숙식까지 한다는 것이 신경쓰였다. "음. 어제 면접보고 왔는데 저녁늦게 연락이 왔어. 모레 짐 옮기기로 했어." "그래... 보리 얘기는 했어? 거기서 오케이 해?" "..." 지나는 그 질문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보리 얘기는 아에 끄집어내지도 못 했다. 무슨 사람 얼굴을 봐야 개 얘기를 꺼내든 고양이 얘기를 꺼내든 하지. "모레 가서 얘기할 생각이야." "아직 말 못 했어? 안 된다고 하면 어쩌려고? 집도 정리하고 들어갈 거 아냐?" 그가 쏟아내는 질문들이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지나는 조금 남은 맥주를 털어넣고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잘 생각하지 그랬냐?" "괜찮아. 걱정 마. 설마 그렇게 넓은 마당있는 집인데... 개 한 마리 키우면 어때서?" 지나는 친구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무시하며 잘 해결 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긍정적으로 일이 해결될 거라며 다독거렸다. 짐은 챙기다보니 어느덧 상자가 하나 둘씩 늘어났다. 좁은 집안을 차지하던 가구들은 모두 중고들이었고 거의 귀퉁이나 손잡이가 온전하지 못해 처분할 생각이었다. 커다란 종이상자 두 군데에 책과 중요한 물건들, 그리고 신발과 보리의 사료 등을 챙겨넣었다. 그리고 다른 커다란 상자 세 군데에는 사계절 옷을 차곡차곡 개겨 넣었다. 이미 서울에 올라올 때 옷을 추스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싸짊어지고 갈 것들이 많은지 원... 거의 정리를 끝낼 갈 무렵 시원한 냉커피가 마시고 싶은 그녀는 주방으로 가다가 시간이 몇 신지 확인했다. 잠 잘 시간이 훨씬 넘은 12시 하고도 10분이었다. 그녀의 기분은 다음 날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앞둔 학생마냥 들떠 있었다. 냉커피를 타서 상자들이 쌓여있는 거실로 온 그녀는 부산스럽게 왔다갔다하던 보리가 침실에서 자고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루종일 주인이 왔다갔다해서 정신이 없었을 것이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여 피곤했을 것이다. 내일 9시에 차가 온다고 했다. 상자들을 나르기만하면 되었다. 지나는 방으로 들어가 보리 바로 옆에 얇은 담요 하나를 깔고 배 위에 이불을 덮고 선풍기를 튼 채로 누웠다. "보리야. 오늘 여기서 자는 게 마지막이야. 좋은 꿈 꾸고... 잘 자." 보리는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누운채로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된 그녀는 졸리우는 눈을 간신히 뜨고는 천장을 응시했다. 그리고 내일 만나게 될 주인과 아이를 생각했다. 아직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집주인. 매력적인 목소리인 만큼 얼굴도 매력적이지 않을까 상상도 해봤다. 귀엽고 잘 생긴 레이...라는 아이를 볼 때 그 무레한 남자는 매력이 넘지는 유부남일 것이다. 첫날은 나타나지 않고 특이하게 면접을 보긴했지만 결국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점에서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숙식이 돈과 같이 해결이 된까 말이다. 그는 새로 올 가정교사의 집으로 차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여자가 올 것이다. 그는 요 이틀 동안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화면에 비쳤던 김 지나 때문이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그 옂는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답지 않게 어리고 순수하게 보였다. 세상물정 같은 것을 전혀 모르는 여자같았다. 자기소개서에 적힌 내용처럼 시골에 있었던 영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여자를 쉽게 믿는 성격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그랬다. 커다란 실수는 딱 한번으로 족했고 전처의 배신으로 쓰고 악취나는 맛을 된통 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번 다시 여자라는 동물에 속히는 따위는 절대 없을 것이다. 더이상 여자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쳐저서는 안 되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대문 앞에 서있는 여자가 보였다. 김 지나. 그는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주었다. 지나는 집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맞이하는 가정부에게 지금 주인이 있는지 물었다. "그럼, 할 얘기가 있다고 전해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여기서 기다려요." 나이든 가정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동안에 지나는 첫날 처럼 소파에 앉아서 앞에 보이는 작은 카메라를 쳐다봤다. 그가 어디선가 이 카메라를 통해 그녀를 보고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요?" 지나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토록 남자목소리에 거칠게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실은... 첫날에 얘기하지 못한 게 있었거든요." "뭐요?" "미리 얘기했어야 했는데..." 어떻게 하면 그가 화를 내지 않고 해결이 될까 걱정하고 있는 틈을 타 그가 끼어들었다. "결혼했소?" "네? 아, 아뇨." "그럼 아이가 있소?" "뭐라구요?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아이가 있냐는 거죠?" 당황스런 질문에 그녀는 더욱 더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다. 왜 오늘도 나타나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담? "실은... 보리라는... 애완견이 있어요. 하지만 절대 피해가 가지 않을 거에요. 매우 똑똑하거든요." "..." 그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에 그녀는 그가 대화를 거부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가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보리와 정말이지 우려했던 대로 길에서 자야할 판이었다. "어떤 개요?" "네? 아, 진돗개에요. 진짜 토종이에요! 아주 영리해요. 그리고 아이들 감성교육에도 도움이 될 거에요." 그가 보리가 어떤 개인지 묻는 것 자체가 희망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최대한 그에게 좋은 얘기를 꺼냈다. "동물과 식물 그리고 아기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 없댔어요. 보리는 레미, 아니 레이한테 좋은 친구가 될 거에요!" "마당에서 키우시오." "네? 아, 그건..." "또 뭐요?" "정말 죄송해요. 쫓아내도 할 수 없지만... 보리를 거실에서 지내게 하면 안 되나요?" 이렇게 넓은 거실이라면 보리는 너무나도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넓은 마당. 잔듸까지 있는 마당이었다. "안 되오." "그럼 월급을 깎아주세요. 물론 첫날에 월급 얘긴 안 하셨지만..." 차라리 월급을 조금이라도 포기해서라도 보리를 곁에 두고싶었다. 아직 한번도 보리와 떨어져서 자 본 적이 없었다. 문앞에 항상 자는 습관이 된 보리도 주인과 떨어져 자는 건 바라지 않을 것이다. "두달은 150. 석달째부터는 300을 주겠소." "???" 지나는 어마어마한 액수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자리에 까무라치지 않길 천만다행이었다. 어떻게 가정교사 한달 수입이 초등학교교사보다 더 많단 말인가! 말도 안 되었다. 혹시 잘 못알아 들었을까봐 그녀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똑같았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 동인한테 빌린 100만원은 한달 후면 금방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두달동안은 150만원이고 그 뒤부터는 300만원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석달부터는 배로 주겠다니. "뭘 믿고 그렇게 큰 액수를 선뜻 주시겠단 거죠?" "많이 줘도 불만인가?" 그의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칼날같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4시 쯤이면 아이가 올 거요. 시간은 당신 편한대로 해요. 아이의 교육에 관한 것은 이제부터 전적으로 당신이 책임져야 할 테니까. 공부뿐만 아니라 아이의 인성교육에도 신경을 써줬으면 하니까." "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월급에 대한 충격이 어느정도 가라앉은 그녀는 그동안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뭐요?" "죄송하지만... 이곳에는 레이 어머니는..." "없소." 그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음성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 얘긴 두번 다시 꺼내지 마시오! 안 들은 걸로 하겠소. 여기 있는동안 명심하시오. 첫째, 아이 앞에서는 절대 엄마얘기는 꺼내지 말 것. 둘째, 식사는 아이와 둘이서 항상 먹도록 해요. 음식은 가정부가 알아서 준비해줄 테니까. 셋째, 레이의 학교를 가야하거나 레이가 외출을 하게되면 당신이 항상 신경을 쓰도록 해요. 마지막으로 넷째, 필요한 것이나 할 얘기가 있으면 냉장고에 꼭 메모해두시오. 또 질문 있소?" 김 지나는 네가지의 이해할 수 없는 규칙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남자가 레이의 아버지가 확실한지 의심스러웠다. 아이의 교육에 완전히 손을 놓겠다는 뜻이 아니고 뭔가. 학교에 가는 것까지 그녀가 간다는 것은 엄마 노릇을 대신하란 의미였다. '아내와 이혼했나? 아니면...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라도 했나?' 그녀는 더이상 질문이 없다고 했지만 가정부가 알려준 2층 방으로 향했다. 계단 바로 앞에 그녀의 방이 있었고 우측 복도로는 문이 몇 개가 더 보였다. 가정부는 방 안으로 욕실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지나는 방문을 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오래된 건물에 통풍까지 제대로 안 되었던 그녀의 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좁은 그 집을 합친 넓이의 침실이었다. 침대는 두 사람이 자도 될 정도로 킹사이즈였고 책상 위에는 최신 컴퓨터까지 놓여있었다. 물론 다른 가구들은 비싼 가격대에 비해 화사한 벽지와 너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칙칙한 갈색이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침대위에 펼쳐져 있는 이불이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푸른색 얇은 이불 두 장이 보기만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바로 침대 위에 뻗어 자고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짐 풀기 전에 그녀는 당장 밖에 있을 보리를 데려와야 했다. 보리는 새로 살 집이 너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현관에서 녀석 발을 닦아주자마자 쏜살같이 거실을 운동장인냥 뛰어다녔다. 내심 이집 주인에게 미움당할까봐 긴장되기도 했지만 녀석이 좋아하니까 그녀도 기분 좋았다. 12시 전에 짐 정리를 모두 끝낸 지나는 아래 층으로 내려가 점심식사를 돕기로 했다. 요리가 취미이기도 한 그녀는 주위에서 그녀의 요리솜씨가 일품이란 소리를 종종 들었다. "이건 뭐죠?" 싱크대 한쪽에 놓인 음식들을 발견한 지나가 물었다. "사장님 거에요." "여기서 식사하시는 게 아니라 매번 갖다드려야 되나요?" 그녀는 잔뜩 얼굴에 의문을 담았다. 얼굴을 보이지 않는 주인을 위해 매끼니를 갖다줘야 한다고 했다. "아주머니. 혹시... 여기 주인 얼굴 보셨어요?" 지나는 이층으로 식사를 가져다주고 오는 가정부에게 물었다. "사장님말씀이신가요?" 가정부는 약간 차갑게 그녀를 쳐다봤다. '주인'이란 호칭이 아니라 '사장님'이란 호칭을 써달란 뜻이었다. "아, 네. 사장님." "당연하죠." "정말 이상하네요. 왜 숨어있는 거죠?" 가정부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 위로 날아왔다. 나이든 여자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지나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주인에 대한 염려가 느껴졌다. 가정부는 식탁을 다 차린 후, 그녀의 대답도 없이 나가버렸다. '혼자 점심을 먹으란 뜻이군.' 그녀는 주방 입구쪽에 앉아 끙끙거리고 있는 사랑스런 보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희망을 품고있는 보리의 눈은 반짝거렸다. 그러나 지나는 고개를 저으며 밥 먹고나서 간식을 주겠다고 했다. 간식이라고 해봐야 건빵이었다. 문득 식사를 하던 그녀는 다른 건 몰라도 주인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데 놀랐다. 그는 처음부터 이름같은 것은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녀가 궁금해할 거라고도 생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식사를 끝내고 그의 방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는 한참 키보드 위에 손을 바쁘게 움직이다가 무슨 소리에 멈췄다. 조금 전에 식사를 했고, 그릇을 가지러 이 시간에 가정부가 올 리가 없었다. 두 시간이 지나야 가정부가 왔다.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는 일어나 책상을 돌아 문으로 향했다. "누구요?" "접니다. 김 지나." "???"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왜 그녀가 이곳에 온 거지. 가정부에게 아무런 얘기를 못 들었나. "뭐요?" "차 한잔 하실래요?" "고맙지만 됬소." "그래요? 그럼... 도로 가져가야겠네..." 지나의 한숨 쉬는 소리가 문을 통해 전해왔다. 그는 무슨 차를 가져왔는지 보다는 그녀가 무슨 용건으로 여길 왔는지 더 궁금했다. "문 옆에 테이블이 있을 거요. 그 위에 놓고 가요." "무례하시군요?" "뭐?" 책상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그의 걸음이 그녀의 화난 목소리에 멈춰야 했다. 긴장감이 맴돌더니 이내 지나가 말문을 열었다. "이유가 뭐죠? 도대체 이유가 뭐길래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거죠?" "돌아가시오." "아이하고는 만나나요? 설마 아버지가 아이 앞에까지 안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죠?" "돌아가라고 했소!" 그가 화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거친 한숨을 토해냈다. "..." 그녀의 쓸데없는 질문을 받을 마음이 없었다. 모두 똑같은 질문이었다. 이곳에 온 가정교사들은 모두 그 질문을 가장 중요시 했다. "그래서... 아이 눈 속이 달라보였군요?" "그게 무슨 뜻이오?" "얼음이 다 녹겠어요." "무슨 뜻이냐고 물었는데." 그녀의 발소리가 약간 들렸다. 그녀가 발길을 돌린 것이 분명했다. "레이는... 다른 또래애들하고 달라요. 처음 여길 온 날 레이를 만났거든요. 진짜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레이래요. 사토...라고 하던가? 음, 사토 레이라고 했어요." "진짜 이름 맞소." "한국 이름이... 아니네요?" "일본 이름이요. 레이는 한국 말로 영리하다는 뜻이오. 영리할 영(伶)." 그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벽에 살짝 몸을 기대어섰다. 이상하게도 문이란 것이 그녀와 그의 사이를 가로막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맡아보는 향기가 코끝에 전해왔다. "그럼... 사장님도..." "태어나기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님이 일본사람과 재혼하셨소. 그래서 난 아버지의 성을 따라아야 했소." "그래요? 일본에 오래있었나요?" "열네 살에 건너갔었소. 그리고 10년 전에 한국으로 다시 왔소." 20년 전에 일본에 갔다가 스물 네 살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10년 전. 사랑하는 여자를 놓칠 수가 없어서. 그녀와 결혼해서 평생을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 그녀가 있는 한국에서 살아야했으니까. 사랑하는 여자라고... 아니지! 적어도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여자였지. 나에게 깊은 상처와 배신을 주고간 여자니까. "그럼 사장님의 성함이..." "유키... 사토 유키요." "유키? 유키... 사토 유키..." 그녀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눈이란 뜻이지." to be continued
***무례한 남자 유키*** <#2. 보이지 않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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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얼굴 >>
"어서 와라, 지나야!"
"잘 지냈어?"
지나는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 동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키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는 유리컵을 행주로 닦다가 그녀를 시원한 창가 쪽으로 안내했다.
"여전히 사람이 많구나?"
지나는 가게 안을 잠깐 둘러보고는 웃었다. 친구가 여전히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아 기뻤다.
"그런대로지 뭐."
동인은 가게 입구 문이 열리면서 세 명의 손님이 연이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지나에게 잠깐 기다려달라고 했다.
지나는 괜찮다며 갔다오라고 했다. 그 동안에 직원 한 명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그녀는 술을 잘 못 했다. 고작 마시는 거라고는 맥주 한 병이 전부였다.
한 병까지는 그나마 변기를 끌어안고 속에 있는 것을 모두 끄집어내는 일만 하면 되지만,
그 이상을 마시게 되면 바닥에 쓰러지든, 아무에게 안겨 잠들거나 하는 짓을 했다.
동인은 대학시절부터 줄곧 그런 그녀의 뒷바라지를 몇 번 해준 적이 있었다.
지나는 500cc 하나를 주문했다. 하지만 나갈 때까지 다 마실 생각은 결코 아니었다.
동인이 그녀가 주문한 맥주와 팝콘을 들고 나타났다.
"이거 다 마실 건 아니지?"
"당연하지. 아니면 여기서 엎어져 잘지도 몰라."
그녀는 미소를 지은 후,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그래도 맥주가 맛있는 이유는 시원함이었다.
쌉쓰리하고 톡 쏘는 이 맛!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땀 나거나 갈증이 날 때 마시는 것은 역시 순간의 행복과 짜릿함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거품을 살짝 혀로 닦은 후 팝콘을 하나 먹었다.
이때 동인의 손가락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그녀의 입술 가를 재빠르게 닦아주었다.
마치 오빠가 여동생의 입가를 닦아주는 것처럼 그의 행동은 전혀 부담이 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대학시절부터 내내 그녀의 리포트를 도와줬고, 같이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까지 와서 매상을 올려주기도 했고,
가끔 늦게까지 일하면 집에 바래다주기도 하는 의리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지나는 너무나도 편한 동인과 오랫동안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껏 힘들어도 단 한번도 빌리지 않았던 돈을 빌려야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그래, 무슨 문제야?"
지나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있자 동인이 먼저 화제를 끄집어냈다.
"미안해, 동인아."
그녀는 뜬금없이 미안하단 말부터 해 그를 놀라게 했다. 그는 지나의 맥주 잔을 들어 반 정도 맥주를 마셔버렸다.
"뭐가? 뭐가 미안한데?"
"난 이제까지 너한테 도움이 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항상 너한테 신세만 지고."
"이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칭찬으로 날 띄우는 거야? 도대체 무슨 부탁인데 이렇게 뜸을 들이냐?"
"저기... 나 돈... 빌려줘."
그녀는 곧장 역시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들어 지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몸을 움츠렸다.
역시 친한 친구 사이라고해도 돈 빌리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그러던가...
돈과 애인과 그리고 차라고 했었나? 그 세 가지를 빌려주지 말라고 어디선가 그런 걸 본 적이 있었다.
걱정하는 그녀의 얼굴과는 달리 동인은 무덤덤한 얼굴로 얼마인지 물었다.
"100만원."
그는 돈 빌려달라고 할 때보다는 다르게 놀란 표정이었다. 역시 액수가 컸던 거야.
"나 참... 야, 김 지나. 그 돈 얘기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냐?"
"음?"
"난 또... 한번도 돈 빌려달란 소리를 안 하던 녀석이 갑자기 돈 타령하니까 무슨 큰 일났는 줄 알았네.
100만원이면 되? 더 필요한데 괜히 눈치보느라 일부러 깎아서 말한 거 아냐?"
지나는 손을 내저었다. 빌린 돈과 통장에 있는 돈까지 합치면 집세를 말끔히 계산할 수 있었다.
"넌 학교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그랬잖아. 힘든 거 있어도 절대 친구한테 돈 빌려달란 소리 안 했어.
그래도 난 너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겼는데, 넌 오히려 돈 빌리는 걸 꺼려했어. 힘들면 얘기하면 되는데."
서 동인은 웃는 얼굴이 유난히 천진난만하게 귀엽고 한편으로는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지나를 몇 주 동안 내내 걱정했다.
"미안해. 하지만... 돈까지 너한테 부탁할 수는 없었어. 없으면 없는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임마! 그러지 좀 마라. 이제 속 편하게 좀 살아! 그러다가 살 쏙 빠지겄다, 이것아!
몇 주 안 보고 살았다고 얼굴 꼴이 그게 뭐냐? 지 재영이가 네 얼굴이 해골인 거 알면 나자빠질 거다."
"그 앤 그러고도 남아."
지 재영은 동인과 고등학교 때 단짝이었고 대학시절 그를 통해 만났다.
욱하는 성격에 모진 구석이 있는 재영은 여자이기 보다는 남자 쪽에 가까운 여자였다.
지금은 몇 번의 직장생활을 옮겨다니는 것도 지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준비한다고 학원다니고 있었다.
더이상의 공부는 대학시절 뿐이라며 책과는 담 쌓고 살았던 그녀에게는 놀라운 변화였다.
동인은 잠깐 자리를 비우더니 15분 정도 지나서 다시 돌아와 그녀 앞에 현금 100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그냥 주는 거 아냐, 임마. 나중에 너 돈 많이 벌면 그때 이자쳐서 받을 생각이야."
"고마워, 동인아."
서 동인은 핸드백에 돈을 단단히 집어넣는 그녀에게 그 돈을 어디에다 쓸 건지 묻지 않았다.
분명히 요긴하게 쓸 일이 있어서일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라 여겼다.
그에게는 당장 수중에 100만원이 없다해도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 일자리 구했어."
그는 팝콘을 입에 넣다가 그 말에 잠깐 멈추었다.
"가정교사."
"뭐? 가정교사? 아, 저번에 교장이 얘기한 거기? 그럼 거기 가기로 결정한 거야?"
그는 지나가 학교를 그만 둔 것을 알았고 그만 둘때 교장이 건넨 가정교사 얘기를 언뜻 들은 바가 있었다.
약간 꺼림직한 것이 있다면... 그 집에서 숙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들어간다지만, 숙식까지 한다는 것이 신경쓰였다.
"음. 어제 면접보고 왔는데 저녁늦게 연락이 왔어. 모레 짐 옮기기로 했어."
"그래... 보리 얘기는 했어? 거기서 오케이 해?"
"..."
지나는 그 질문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보리 얘기는 아에 끄집어내지도 못 했다.
무슨 사람 얼굴을 봐야 개 얘기를 꺼내든 고양이 얘기를 꺼내든 하지.
"모레 가서 얘기할 생각이야."
"아직 말 못 했어? 안 된다고 하면 어쩌려고? 집도 정리하고 들어갈 거 아냐?"
그가 쏟아내는 질문들이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지나는 조금 남은 맥주를 털어넣고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잘 생각하지 그랬냐?"
"괜찮아. 걱정 마. 설마 그렇게 넓은 마당있는 집인데... 개 한 마리 키우면 어때서?"
지나는 친구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무시하며 잘 해결 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긍정적으로 일이 해결될 거라며 다독거렸다.
짐은 챙기다보니 어느덧 상자가 하나 둘씩 늘어났다.
좁은 집안을 차지하던 가구들은 모두 중고들이었고 거의 귀퉁이나 손잡이가 온전하지 못해 처분할 생각이었다.
커다란 종이상자 두 군데에 책과 중요한 물건들, 그리고 신발과 보리의 사료 등을 챙겨넣었다.
그리고 다른 커다란 상자 세 군데에는 사계절 옷을 차곡차곡 개겨 넣었다.
이미 서울에 올라올 때 옷을 추스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싸짊어지고 갈 것들이 많은지 원...
거의 정리를 끝낼 갈 무렵 시원한 냉커피가 마시고 싶은 그녀는 주방으로 가다가 시간이 몇 신지 확인했다.
잠 잘 시간이 훨씬 넘은 12시 하고도 10분이었다.
그녀의 기분은 다음 날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앞둔 학생마냥 들떠 있었다.
냉커피를 타서 상자들이 쌓여있는 거실로 온 그녀는 부산스럽게 왔다갔다하던 보리가 침실에서 자고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루종일 주인이 왔다갔다해서 정신이 없었을 것이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여 피곤했을 것이다.
내일 9시에 차가 온다고 했다. 상자들을 나르기만하면 되었다.
지나는 방으로 들어가 보리 바로 옆에 얇은 담요 하나를 깔고 배 위에 이불을 덮고 선풍기를 튼 채로 누웠다.
"보리야. 오늘 여기서 자는 게 마지막이야. 좋은 꿈 꾸고... 잘 자."
보리는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누운채로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된 그녀는 졸리우는 눈을 간신히 뜨고는 천장을 응시했다.
그리고 내일 만나게 될 주인과 아이를 생각했다. 아직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집주인.
매력적인 목소리인 만큼 얼굴도 매력적이지 않을까 상상도 해봤다.
귀엽고 잘 생긴 레이...라는 아이를 볼 때 그 무레한 남자는 매력이 넘지는 유부남일 것이다.
첫날은 나타나지 않고 특이하게 면접을 보긴했지만 결국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점에서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숙식이 돈과 같이 해결이 된까 말이다.
그는 새로 올 가정교사의 집으로 차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여자가 올 것이다.
그는 요 이틀 동안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화면에 비쳤던 김 지나 때문이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그 옂는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답지 않게 어리고 순수하게 보였다.
세상물정 같은 것을 전혀 모르는 여자같았다. 자기소개서에 적힌 내용처럼 시골에 있었던 영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여자를 쉽게 믿는 성격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그랬다.
커다란 실수는 딱 한번으로 족했고 전처의 배신으로 쓰고 악취나는 맛을 된통 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번 다시 여자라는 동물에 속히는 따위는 절대 없을 것이다.
더이상 여자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쳐저서는 안 되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대문 앞에 서있는 여자가 보였다. 김 지나.
그는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주었다.
지나는 집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맞이하는 가정부에게 지금 주인이 있는지 물었다.
"그럼, 할 얘기가 있다고 전해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여기서 기다려요."
나이든 가정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동안에 지나는 첫날 처럼 소파에 앉아서 앞에 보이는 작은 카메라를 쳐다봤다.
그가 어디선가 이 카메라를 통해 그녀를 보고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요?"
지나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토록 남자목소리에 거칠게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실은... 첫날에 얘기하지 못한 게 있었거든요."
"뭐요?"
"미리 얘기했어야 했는데..."
어떻게 하면 그가 화를 내지 않고 해결이 될까 걱정하고 있는 틈을 타 그가 끼어들었다.
"결혼했소?"
"네? 아, 아뇨."
"그럼 아이가 있소?"
"뭐라구요?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아이가 있냐는 거죠?"
당황스런 질문에 그녀는 더욱 더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다. 왜 오늘도 나타나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담?
"실은... 보리라는... 애완견이 있어요. 하지만 절대 피해가 가지 않을 거에요. 매우 똑똑하거든요."
"..."
그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에 그녀는 그가 대화를 거부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가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보리와 정말이지 우려했던 대로 길에서 자야할 판이었다.
"어떤 개요?"
"네? 아, 진돗개에요. 진짜 토종이에요! 아주 영리해요. 그리고 아이들 감성교육에도 도움이 될 거에요."
그가 보리가 어떤 개인지 묻는 것 자체가 희망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최대한 그에게 좋은 얘기를 꺼냈다.
"동물과 식물 그리고 아기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 없댔어요. 보리는 레미, 아니 레이한테 좋은 친구가 될 거에요!"
"마당에서 키우시오."
"네? 아, 그건..."
"또 뭐요?"
"정말 죄송해요. 쫓아내도 할 수 없지만... 보리를 거실에서 지내게 하면 안 되나요?"
이렇게 넓은 거실이라면 보리는 너무나도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넓은 마당. 잔듸까지 있는 마당이었다.
"안 되오."
"그럼 월급을 깎아주세요. 물론 첫날에 월급 얘긴 안 하셨지만..."
차라리 월급을 조금이라도 포기해서라도 보리를 곁에 두고싶었다. 아직 한번도 보리와 떨어져서 자 본 적이 없었다.
문앞에 항상 자는 습관이 된 보리도 주인과 떨어져 자는 건 바라지 않을 것이다.
"두달은 150. 석달째부터는 300을 주겠소."
"???"
지나는 어마어마한 액수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자리에 까무라치지 않길 천만다행이었다.
어떻게 가정교사 한달 수입이 초등학교교사보다 더 많단 말인가! 말도 안 되었다.
혹시 잘 못알아 들었을까봐 그녀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똑같았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 동인한테 빌린 100만원은 한달 후면 금방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두달동안은 150만원이고 그 뒤부터는 300만원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석달부터는 배로 주겠다니.
"뭘 믿고 그렇게 큰 액수를 선뜻 주시겠단 거죠?"
"많이 줘도 불만인가?"
그의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칼날같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4시 쯤이면 아이가 올 거요. 시간은 당신 편한대로 해요.
아이의 교육에 관한 것은 이제부터 전적으로 당신이 책임져야 할 테니까.
공부뿐만 아니라 아이의 인성교육에도 신경을 써줬으면 하니까."
"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월급에 대한 충격이 어느정도 가라앉은 그녀는 그동안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뭐요?"
"죄송하지만... 이곳에는 레이 어머니는..."
"없소."
그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음성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 얘긴 두번 다시 꺼내지 마시오! 안 들은 걸로 하겠소.
여기 있는동안 명심하시오. 첫째, 아이 앞에서는 절대 엄마얘기는 꺼내지 말 것.
둘째, 식사는 아이와 둘이서 항상 먹도록 해요. 음식은 가정부가 알아서 준비해줄 테니까.
셋째, 레이의 학교를 가야하거나 레이가 외출을 하게되면 당신이 항상 신경을 쓰도록 해요.
마지막으로 넷째, 필요한 것이나 할 얘기가 있으면 냉장고에 꼭 메모해두시오. 또 질문 있소?"
김 지나는 네가지의 이해할 수 없는 규칙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남자가 레이의 아버지가 확실한지 의심스러웠다. 아이의 교육에 완전히 손을 놓겠다는 뜻이 아니고 뭔가.
학교에 가는 것까지 그녀가 간다는 것은 엄마 노릇을 대신하란 의미였다.
'아내와 이혼했나? 아니면...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라도 했나?'
그녀는 더이상 질문이 없다고 했지만 가정부가 알려준 2층 방으로 향했다.
계단 바로 앞에 그녀의 방이 있었고 우측 복도로는 문이 몇 개가 더 보였다.
가정부는 방 안으로 욕실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지나는 방문을 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오래된 건물에 통풍까지 제대로 안 되었던 그녀의 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좁은 그 집을 합친 넓이의 침실이었다. 침대는 두 사람이 자도 될 정도로 킹사이즈였고 책상 위에는 최신 컴퓨터까지 놓여있었다.
물론 다른 가구들은 비싼 가격대에 비해 화사한 벽지와 너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칙칙한 갈색이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침대위에 펼쳐져 있는 이불이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푸른색 얇은 이불 두 장이 보기만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바로 침대 위에 뻗어 자고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짐 풀기 전에 그녀는 당장 밖에 있을 보리를 데려와야 했다.
보리는 새로 살 집이 너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현관에서 녀석 발을 닦아주자마자 쏜살같이 거실을 운동장인냥 뛰어다녔다.
내심 이집 주인에게 미움당할까봐 긴장되기도 했지만 녀석이 좋아하니까 그녀도 기분 좋았다.
12시 전에 짐 정리를 모두 끝낸 지나는 아래 층으로 내려가 점심식사를 돕기로 했다.
요리가 취미이기도 한 그녀는 주위에서 그녀의 요리솜씨가 일품이란 소리를 종종 들었다.
"이건 뭐죠?"
싱크대 한쪽에 놓인 음식들을 발견한 지나가 물었다.
"사장님 거에요."
"여기서 식사하시는 게 아니라 매번 갖다드려야 되나요?"
그녀는 잔뜩 얼굴에 의문을 담았다. 얼굴을 보이지 않는 주인을 위해 매끼니를 갖다줘야 한다고 했다.
"아주머니. 혹시... 여기 주인 얼굴 보셨어요?"
지나는 이층으로 식사를 가져다주고 오는 가정부에게 물었다.
"사장님말씀이신가요?"
가정부는 약간 차갑게 그녀를 쳐다봤다. '주인'이란 호칭이 아니라 '사장님'이란 호칭을 써달란 뜻이었다.
"아, 네. 사장님."
"당연하죠."
"정말 이상하네요. 왜 숨어있는 거죠?"
가정부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 위로 날아왔다.
나이든 여자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지나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주인에 대한 염려가 느껴졌다.
가정부는 식탁을 다 차린 후, 그녀의 대답도 없이 나가버렸다.
'혼자 점심을 먹으란 뜻이군.'
그녀는 주방 입구쪽에 앉아 끙끙거리고 있는 사랑스런 보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희망을 품고있는 보리의 눈은 반짝거렸다.
그러나 지나는 고개를 저으며 밥 먹고나서 간식을 주겠다고 했다. 간식이라고 해봐야 건빵이었다.
문득 식사를 하던 그녀는 다른 건 몰라도 주인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데 놀랐다.
그는 처음부터 이름같은 것은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녀가 궁금해할 거라고도 생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식사를 끝내고 그의 방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는 한참 키보드 위에 손을 바쁘게 움직이다가 무슨 소리에 멈췄다.
조금 전에 식사를 했고, 그릇을 가지러 이 시간에 가정부가 올 리가 없었다. 두 시간이 지나야 가정부가 왔다.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는 일어나 책상을 돌아 문으로 향했다.
"누구요?"
"접니다. 김 지나."
"???"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왜 그녀가 이곳에 온 거지. 가정부에게 아무런 얘기를 못 들었나.
"뭐요?"
"차 한잔 하실래요?"
"고맙지만 됬소."
"그래요? 그럼... 도로 가져가야겠네..."
지나의 한숨 쉬는 소리가 문을 통해 전해왔다.
그는 무슨 차를 가져왔는지 보다는 그녀가 무슨 용건으로 여길 왔는지 더 궁금했다.
"문 옆에 테이블이 있을 거요. 그 위에 놓고 가요."
"무례하시군요?"
"뭐?"
책상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그의 걸음이 그녀의 화난 목소리에 멈춰야 했다.
긴장감이 맴돌더니 이내 지나가 말문을 열었다.
"이유가 뭐죠? 도대체 이유가 뭐길래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거죠?"
"돌아가시오."
"아이하고는 만나나요? 설마 아버지가 아이 앞에까지 안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죠?"
"돌아가라고 했소!"
그가 화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거친 한숨을 토해냈다.
"..."
그녀의 쓸데없는 질문을 받을 마음이 없었다. 모두 똑같은 질문이었다.
이곳에 온 가정교사들은 모두 그 질문을 가장 중요시 했다.
"그래서... 아이 눈 속이 달라보였군요?"
"그게 무슨 뜻이오?"
"얼음이 다 녹겠어요."
"무슨 뜻이냐고 물었는데."
그녀의 발소리가 약간 들렸다. 그녀가 발길을 돌린 것이 분명했다.
"레이는... 다른 또래애들하고 달라요. 처음 여길 온 날 레이를 만났거든요.
진짜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레이래요. 사토...라고 하던가? 음, 사토 레이라고 했어요."
"진짜 이름 맞소."
"한국 이름이... 아니네요?"
"일본 이름이요. 레이는 한국 말로 영리하다는 뜻이오. 영리할 영(伶)."
그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벽에 살짝 몸을 기대어섰다.
이상하게도 문이란 것이 그녀와 그의 사이를 가로막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맡아보는 향기가 코끝에 전해왔다.
"그럼... 사장님도..."
"태어나기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님이 일본사람과 재혼하셨소. 그래서 난 아버지의 성을 따라아야 했소."
"그래요? 일본에 오래있었나요?"
"열네 살에 건너갔었소. 그리고 10년 전에 한국으로 다시 왔소."
20년 전에 일본에 갔다가 스물 네 살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10년 전. 사랑하는 여자를 놓칠 수가 없어서.
그녀와 결혼해서 평생을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 그녀가 있는 한국에서 살아야했으니까.
사랑하는 여자라고... 아니지! 적어도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여자였지. 나에게 깊은 상처와 배신을 주고간 여자니까.
"그럼 사장님의 성함이..."
"유키... 사토 유키요."
"유키? 유키... 사토 유키..."
그녀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눈이란 뜻이지."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