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24. 미열

나비200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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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칙사랑 - 24. 미열


“아버지, 찬기씨라뇨? 네?”


나는 아버지와 나란히 차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묵묵부답인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설명을 듣지 않고도 위험한, 내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짐작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가 찬기씨다. 찬영이 아니라. 그는 내게 자신의 이름마저 속였다.


‘대체 내게 말한 것 중 어떤 게 진실이란 말이야! 뭐든 내게는 숨기고 감추지. 그가 말한 감정이 진실이란 법이 없잖아!’


“아버지, 말씀해 주세요. 그 사람 누구에요?”


접근하기 무서운 진실에 다가서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에 들어온 이유가 뭐예요? 다른 사람들처럼 돈벌려고 회사에 취직한 건 맞나요?”

“술을 좋아하지. 그 열정은 인정한다. 하지만 나도 헷갈리는구나. 과연 바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회사를 노리고 들어온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다만 회사 정보 유출 건은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이긴 하지. 게다가 너에게 접근한 것도 그렇고.”

“그가 먼저 접근한 건 아니에요.”

“그럼 네가 먼저 놈한테 친절하게 굴었다는 게야? 그것도 술책일 테지. 그래야 상대가 더 안심하고 믿을 테니까.”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에요?”

“현재 하양주류의 장손. 과거엔 내 사업동료의 아들이었지.”


하양주류의 장손이라. 찬영씨가? 믿어지지 않았다. 하양주류는 우리 송화주류가 가장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있는 회사였고 요즘 들어 우리에게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회사였다. 얼마 전 광고기획을 가로챈 것도 그 회사 아니었던가. 비록 우연이라는 결론으로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말았지만. 그런데 그가 그 회사의 장손? 아버지는 그걸 알면서도 그를 회사에 계속 두셨단 말인가?


“찬기 아버지는 처음 회사를 같이 만든 동료였어. 그런데 부부가 함께 사고를 당했지. 옛정을 생각해서 찜찜했지만 회사에 받아주기로 했었던 건데 이런 일을 벌이다니. 하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겠지.”

“······.”


아버지는 옛 생각에 잠기 듯 먼 곳을 바라보았고, 잠시 후 말씀을 다시 시작하셨다.


“찬기 아버지는 회사가 좀 성장하고 돈을 만지자마자 쓰는데 정신이 없었지. 매일 술이었어. 출근을 못하기 일쑤였고 나중엔 지분을 돌려달라고 성화를 부려 회사 경영에 차질을 주기도 했었다. 그러다 두 부부가 사고를 당한거지.”

“그럼 지분을 돌려주지 않은 건가요?”

“아니. 깨끗하게 정리를 해주었지. 당신 꽤 큰 돈이었고 그 돈을 받은 찬기 작은 아버지는 다른 자본을 모아 주류 회사를 차렸다. 그게 지금의 하양주류지. 그런데 찬기가 큰 아들이긴 해도 진짜 아들은 아니었으니 회사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게다. 본래 큰 아들은 찬영이니까.”


찬영은 그럼 찬기씨 동생의 이름? 왜 이름을 속여야 했을까?


“이름은요? 왜 이름을 속이게 두셨어요?”

“하양주류 사주가 찬기한테 회사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으로 술에 관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지금은 외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대. 그래서 동생을 이름을 빌어 입사한 거지. 동생은 아직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까 월급이나 다른 서류 처리를 하긴 더 좋지. 내가 묵인해주면 아무 문제없으니까.”

“······.”

“찬기를 처음 봤을 때 열정이 있는 젊은이라고 느꼈다. 눈빛도 선했고. 선친과의 의리도 있고 해서 여자인 너희들보다 나중에 회사를 물러줄 생각을 하고도 있었지. 그런데 역시 그릇이 작아. 너를 이런 곳으로 끌고 가? 당장 앞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사람이야. 지 애비랑 똑같은 거지. 큰 그릇이라면 이런 식으로 일처리는 못했을 테지.”


아버지는 단단히 화가 나신 듯 보였다.


“찬기 문제뿐만이 아니야. 지금 난 네가 내 딸인 것이 최초로 부끄럽다. 앞으론 행실을 바로 해. 네 심지가 강했다면 찬기가 납치를 했더라도 돌아왔을 거야! 앞으론 회사 나올 생각도 하지 말거라!”

“아버지!”

“시끄러. 넌 당분간 외출도 금지야!”


모든 게 끝난 기분이었다. 단 한 사람으로 인해 난 신뢰를 잃게 된 것이었다. 그보다도 그에 대한 배신감에 투명한 6월 햇살도 짜증스런 눈부심일 뿐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해. 일단은 듣자. 지금 이야기는 아버지의 이야기일 뿐이잖아. 내 믿음이 산산조각 나더라도 일단은 그를 믿고 싶어.’


집에 당도하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는 사랑을 말하는 가수의 노래가 몇 소절 나오지 않았을 때 바로 받았다.


“당신 이름이 뭐야?”

“들은 거야?”

“당신 이름이 뭐냐고!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

“홍주야, 집엔 무사히 간 거니?”

“이름을 묻고 있잖아, 지금!”

“내 이름? 내 이름은 이찬기.”

“그래?”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


“홍주야!”

“응. 내 이름은 홍주야. 당신은 내가 찬영이라 불러도 대답을 잘도 하더군.”

“이름이 중요한 거니?”

“어어, 변명을 시작하시겠다?”

“미안하다. 내 입으로 말해야 할 이야기였어.”

“당신은 늘 이래. 언제까지 중요한 것들은 다 남의 입에서 듣게 할 건데! 내가 알고 있는 건 대체 뭐지? 눈으로 보이는 얼굴, 그리고 만져지는 몸? 그럼 당신의 말들은? 내게 했던 말들은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이름까지 감춰버리는 남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거냐구!”

“홍주야, 홍주야······.”

“그래! 변명이라도 해보라고!”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잖니. 네 눈으로 본 거 그거 다 진실이잖아. 내 감정, 널 생각하는 내 마음. 넌 다 보았잖아. 대체 뭐가 더 필요한거니? 네가 새롭게 알게 된 것들 때문에 우리 사이가 달라질 것이라도 있는 거야?”

“미리 알았더라면 아무 문제 없었겠지. 하양주류 사주의 아들이더라도 말이야.”

“그게 문제가 되는 거니?”

“응. 문제야! 문제가 돼. 나도 당신이 의심스러워. 회사 기밀을 하양주류가 알고 있던 것도 그래. 이젠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다고! 내가 또 알아야 하는 게 뭐지? 더 이상 놀라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 말해줘!”

“더는 없어, 진짜야.”

“그 말도 믿을 수 없어. 이젠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다고!”


온 몸에 힘이 풀려 전화기를 들고 있는 것 마저 힘겨웠다. 팔을 내리고 고개를 옆으로 숙여봤지만 역시나 힘겹기만 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런 수고쯤 평생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우습게도 그 마음은 변해버렸다. 그와 통화를 더 하고 싶지가 않았다.


“오빠, 나 피곤해. 쉬고 싶어.”

“그럴래? 잠 못 자서 피곤하지? 미안하다. 다 나 때문이야. 어제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회사에 나가지 말래. 한동안 못 볼지도 모르겠어.”

“정말이야? 예상은 했지만 아버님이 화가 많이 나셨구나. 내가 오늘 말씀을 잘 드릴게.”

“결혼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겠어. 우린 당분간 얼굴 보기도 힘들어지겠지. 그동안 나 생각 좀 할래.”

“생각? 무슨 생각? 우리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거니?”

“미안. 정말 쉬어야겠어. 나중에 통화하자.”

“홍주야!”

“미안. 지금은 머리가 너무 아프다.”


멍하게 미끄러지듯 닫힌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숨 막히듯 답답한 통화는 한 적이 없다는 듯  액정 가득히 나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핸드폰에선 약한 미열이 느껴졌다. 마치 아파하는 듯이 그렇게 열이 나고 있었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이틀 집에 있긴 굉장히 답답한 노릇이었다. 막상 한가해지고 보니 낮에 수다를 떨 친구도 없었고 엄마의 일을 돕기에는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더 이상 회사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아버지에게 경주에서 법주를 만들겠다고 청했다. 아버지는 고민하시더니 어렵게 허락을 하셨다. 아마도 찬영, 아니 찬기씨를 정리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신 듯 했다. 그에게 전화가 수차례 온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법주는 만드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술이다. 숙성 과정이 길고 과정도 복잡하다. 찹쌀로 죽을 쑤고 여기에 누룩을 섞어 오랫동안 발효시켜 밑술을 만든다. 그리고 이 밑술에 본 술을 섞는데 본 술은 찹쌀고두밥과 생수를 혼합해 만든다. 이 찌꺼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50여일이나 걸린다. 그동안 5개의 독을 바꿔가며 숙성시켜야 하고 숙성시간은 백일이상이 되어야 하는 술이었다. 만드는 데만 3개월 이상이 걸리는 술을 만들겠다고 청했으니 아버지가 마음을 정리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신 것은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간편한 차림으로 작업복 몇 벌만으로 꾸려진 짐을 들고 차에 올랐다. 법주가 완성되기 전까지 어떤 결론에 이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를 다시 믿게 되든 믿음이 사라져 그를 만나지 않든 어떤 결론 말이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차 문을 열지 않고 에어컨을 켠 채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휴게소에 들려 햄버거를 하나 먹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지냈어?”

[홍주야, 집이니?]

“아니, 나 출장 가. 아니, 출장이 아니라 유배 가는 기분이네. 지금 경주 가는 길이야.”

[경주? 일 때문에 가는 거야?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집에서 전화를 못하게 하셨던 거야?]

“나한테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네. 믿음 없는 사랑이라는 거 이런 거구나. 힘드네, 참.”

[미안해, 내가 정말 잘못했다. 백번 생각해도 내 잘못이야.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네 마음 생각을 못하고. 이렇게 알게 되면 너한테 충격일 수 있다는 거 나중에 알았어.]

“지금은 말할 기분 아니야. 일주일내로 전화 다시 할게. 오빠도 출장중이지? 건강 챙기고.”


그렇게 전화를 또 끊어버렸다.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아직 알 수가 없다. 내 마음이 머물게 될 곳을 나도 빨리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디로 갈까? 내 마음은. 다시 그를 믿게 될까? 햄버거로 더부룩해진 배로 다시 차를 몰았다. 더웠지만 창문을 열었다. 바람을 맞지 않고는 답답해 소리를 치고 싶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