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째 깔려있던 잔재들이라 이제 더 이상 낯설지도 않은 감정들이 아상하리만치 아련하게 동준을 휩싸고 있었다. 베란다 밖의 풍경에 시선을 주고 있던 동준이 휴대폰 소리에 붙잡고 있던 그것을 놓았다. 호경이 모임장소를 변경한다는 전화였다.
“왜 갑자기....”
“그렇게 됐다...나중에 오면 말해줄게.....술딴지 8시다...”
보름만의 마음편한 외출이었다. 샤워를 하며 등줄기에 한기가 들만큼 차가운 물줄기로 모호한 느낌들을 씻어내고 있었다. 늘 방치돼 있던 시간들이 잠시 복병에게 침범당해 그 가치를 일깨우고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인 냥 양껏 일상의 자유를 누리다 한사람의 부제로 그 평화를 다시금 인식해가고 있었다.
정재가 그곳에 와 일한지가 벌서 삼년이 넘고 있었다. 좀 채 방향을 잡기 힘든 성격이긴 했으나 이번처럼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가끔 하루 이틀 사라지다 오는 것은 이제 동준도 이골이 나 더 묻지도 않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보름이 지나고도 연락이 없었다. 동준이 처음 일주일은 화만 돋우고 기다리다 다음은 은근히 걱정을 하다 현재로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마직의 헐렁한 바지와 다리지 않은 듯 구겨짐이 자연스러운 같은 계열의 셔츠를 챙겨 입고 엷은 하늘빛의 재캣을 걸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동준이 만족스러운 듯 현관문을 나섰다. 그러다 퍼뜩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첫날부터 낯선 곳에 혼자 있게 한 것이 조금은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술딴지로 가던 방향을 다시 털어 클럽으로 향했다. 퇴근시간 후라 클럽 안은 회원들로 북적되고 있었다. 동준이 안을 돌아보며 아이를 찾다 사람들이 빽빽이 막고 있는 스쿼시 코트속의 두 사람에 시선이 멈추었다. 김주현과 그 아이였다. 이미 많은 회원들이 하던 운동을 멈추고 두 사람의 게임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오년의 구력을 가진 김주현과의 게임에 한 치 밀리지 않을 만큼 다부진 경기를 하고 있어 보는 이들이 포인트를 한점 한점을 함께 넘기고 있었다. 마르고 외소 한 체격일거라 생각한 그 몸에서 생각지 못했던 힘이 꿈틀거리고 있어 동준이 한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게임을 끝내고 온통 땀에 젖은 얼굴을 닦으며 사무실로 들어온 아이가 동준을 보고 말없이 목례를 했다.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요. 그 정도 신력이라고 말했으면 다른 얘기할 필요도 없었겠는데..”
“.........”
아이가 작게 웃어 보일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게임을 할 때와 달리 금방 분위기를 바꿔버린 그것이 이상해 동준이 다시 말을 한마디를 던졌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
“처음 온 회원들에겐 먼저 다가가 분위기를 익히게 해줘야 하는데 ...”
동준이 말을 다 하기 전에 아이가 입을 열었다.
“일에 지장을 줄만큼 말이 없진 않아요. 저 좀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나가실 건가요?”
동준이 한순간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불편해 할 것을 걱정하고 온 자신이 오히려 겸연쩍어 질만큼 그 행동에 거칠 것이 없었다.
“아니...뭐..... 좀 있다 갈 테니 샤워하구 와요. .....근데 갈아입을 옷은 있어요.”
“차에 있어요.”
아이가 나가고 신문을 뒤적거리든 동준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세어 나왔다. 그 등장이 좀 생뚱맞긴 했지만 생각 외로 좋은 결과를 낳고 있는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놓이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민팔의 셔츠와 짧은 트레이닝 바지를 갈아입은 아이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약간의 웨이브가 있는 짧은 머리가 정리되지 않은 채 삐줏삐줏 제멋대로 솟아있어 활기차고 밝아보였다.
“열두시에 문 잠그면 되죠?”
“열한시 이후에 회원들 없으면 대충 정리하고 닫으면 되요. 그리고 저녁은 이층에 내려가서 먹으면 되요. 여기서 일한다고 하면 알아서 해줄 거예요.”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다 동준을 보며 말을 꺼냈다.
“탈의실 옆에 있는 방....제가 쓰면 안 될까요...집이 너무 멀어서요.”
동준이 아이의 말에 당혹스러움이 스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정재의 짐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였고 여자아이 혼자 낯선 곳에 있겠다고 하는 것도 석연치 않아 머뭇거리고 있었다.
“뭐..상관은 없는데....괜찮겠어요? 여기건물 새벽되면 모두 빠져나가고 아무도 없는데...”
“주말엔 집에 갈게예요...저녁에 마치고 가기가 너무 먼 거 같아서요.”
“전에 일하던 친구 짐이 아직 남아 있어요. 대충 치워서 탈의실 창고 안에....”
동준이 말을 하다 멈추었다. 혼자 치우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내일 아침에 내가 치워 줄 테니...그냥 둬요.”
동준이 다음날 전쟁을 치루며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그것에 한층 더 그 밤이 달콤하게 몸에 감기고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차의 시동을 거는 순간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호경일거라 생각하고 무심히 받은 목소리가 한순간 경직되었다.
“여보세요.”
“어디니?”
“.....클럽이에요.”
“그린 힐이야. 지금 와.”
“...........”
여인이 말을 해놓고 잠시 후 뜻 없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녁에 별 약속 있는 거 아니지?”
“.........갈게요.”
아무런 이유도 달지 않고 간다는 말로 마무리를 하고 전화를 끊은 동준의 얼굴빛에 조금 전의 가벼운 기운이 사라지고 없었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아버리는 그것으로 가라앉는 기분을 추스르고 있었다.
-징그러운 놈.
제수 없는 놈.
넌 사람새끼도 아냐.
가슴 밑바닥에서 꺼이꺼이 고개를 쳐드는 오물 같은 그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핸들을 돌릴 뿐 목적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차 문을 열고 내려서자 덥고 습한 기운이 훅하고 몸을 엄습했다.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열대아가 지속돼 태양을 잃은 밤이 낮보다 맹렬히 도시를 데우고 있었다.
사람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카페를 들어선 동준이 끈적이고 침울한 분위기에 자신을 내맡기듯 꿈틀거리던 그것을 버리고 있었다. 지윤이 벌서 술병을 반이나 비우고 있었다. 전화 너머로 읽어낸 동준의 메마른 감정 선이 그녀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 전화를 끊고 스트레이트로 마신 술에 벌써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동준이 재킷을 벗어 놓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언제 왔는데 벌써 이렇게 마셨어요?”
“나쁜 새끼.........”
지윤이 술잔에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마주앉는 동준에게 말을 뱉어냈다. 그 속에 아픔과 시린 감정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웨이터가 가져온 술잔에 얼음을 넣고 직접 술을 따른 동준이 얼음이 풀리기도 전에 한잔을 비워냈다.
“무슨 일 있어요?”
“그렇게 오기 싫으면 오지말지.....왜 왔니?”
짧은 침묵 속에 외면하고 싶은 서로의 감정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너를 모르니.”
“필요 없는 말이에요.........내가 그렇게 못할 거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해요...”
동준이 말을 멈추고 지윤을 건너다보았다. 취기가 오른 얼굴위로 아픔이 배인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전화가 칼날같이 서늘하면서도 오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그 눈에 드리워져 있었다.
“오지 않으면......밤새 이르고 있을 거잖아요? 날 알면.....처음부터 전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어요.”
“나쁜 새끼....”
동준이 스트레이트로 잔을 드는 지윤의 술잔을 받아 얼음 잔에 부은 후 벨을 눌러 웨이터를 불렀다.
“알아요...그렇게 말 안 해도 내가 나쁜 새낀거 아니까 자꾸 각인시키지 않아도 돼요.”
동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웨이터가 들어왔다.
“안주 중에 저녁이 될만한 걸로 하나 같다주세요.”
그녀가 다시 술잔을 들려하자 동준이 그 잔을 비켜 들었다.
“저번처럼 응급실 데려가게 하지 말고 뭐라도 먹고 술 마셔요.”
지윤이 동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차갑고 냉담하게 대하면서도 그 속에 다른 감정이 묻어 있어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을 때는 잠시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 전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후로는 한순간도 편하게 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한곳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방탕하게 자신을 버려두는 듯 하면서도 단 한번도 허물어짐을 들키지 않을 만큼 지독한 사람이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서도 수없이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그 삶을 지윤이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연락 안하면.....넌 그대로 나 잊을 놈이다...”
“정재가 증발했어요. 보름째에요. 변명 듣고 싶다면 그게 이유에요. 녀석 없으면 혼자 정신없는 거 알잖아요.”
“어쩐 일로 나한테 변명씩이나 해줄 마음이 생겼니.........”
동준이 지윤의 말에 방향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말을 다시 이었다.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 또다시 치르게 될 전쟁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삼년이나 같이 있어도 알 수가 없는 놈이에요.”
지윤이 피식 웃으며 술잔을 비워 내렸다.
“넌.....넌 그보다 들 할 것 같니?”
그 얼굴에 장난기를 담아 지윤의 말을 받았다.
“왜 날 몰라요. 있는 데로, 보이는 데로......그게 난데.....아직 나 몰라요?”
“빈정대지 마.”
계속 겉을 맴돌고 있는 대화였다. 결코 자신을 풀지 않고 있는 독한 녀석이었다. 함부로 방치하는 듯 자신을 두면서도 그 심연을 들어내 놓지 않고 있어 지윤이 그를 앞에 두고도 시린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 초점이 흐려진 시선 속에 들어온 동준의 얼굴이 또 다시 지윤을 흔들고 있었다. 그 가슴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미 없는 웃음에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지윤이 그런 자신이 경멸하고 있었다.
“저번에 봤던 애 기억하지? 내 후배 연주...”
“.......”
“계가 너 마음이 든다고 만나보고 싶다더라.”
또 다시 불필요한 감정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싫어 동준이 그것을 맞받아쳤다.
“만나보죠 뭐. 그 정도면 나한테 황송한 상대데 내가 왜 마다 하겠어요.”
“............”
지윤이 아무 말 없이 그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뭣으로라도 그를 흔들고 싶은 충동이 매순간 일고 있었다.
“.......나한테.....싸움 걸어오지 말아요.”
“너.....죽여 버리고 싶어.”
동준이 술잔에 시선을 둔 채 지윤의 그 말을 따라 되 뇌였다.
“날.....죽여 버리고 싶으면.....이렇게 진저리쳐지게 감정싸움 걸어오지 말고 그냥 한번에 죽여요. 안 그럼 내가 당신....죽여 버리고 싶을지도 모르니.....”
지윤이 그에게 상처를 줘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그 화살이 늘 자신에게 돌아와 심장에 꽂히고 있었다. 그가 냉냉하고 차갑게 굴수록 그 충동이 한층 더 거세지고 있었다.
“그래! 내 주위에 있는 애들 다 만나....만나서 놀고 싶은 만큼 놀고.....마지막엔 내 앞에 앉아있어.”
동준이 염증석인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비운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어떡하면 나 할퀴어서 상처 낼까 그것만 생각해요? 사람 불러다 놓고 뭐하자는 거예요........내가 무슨 말 하길 바라는데......나 알면....그딴 얘기 아무 의미 없이 부서질 거 몰라요.”
“나쁜 새끼.....너 같은 새끼 정말 안볼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거야.......”
비틀거리며 일어선 지윤이 동준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도대체 니가 뭐야.....니가 뭔데...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네까짓 새끼가 뭔데 날 이렇게 피참하게 만들어......”
지윤이 몸을 더 가누지 못하고 소파에 쓰러졌다. 굳은 얼굴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동준이 얼얼한 뺨 속을 혀로 핥으며 손톱자국이 스친 뺨을 만져보았다.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는 그녀의 우울증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고 생각하든 동준이 어느 순간 자신 또한 그녀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있었다.
지윤을 부축해 어깨를 감싸않은 동준이 자신에게 흘리듯 그 말들을 흘려냈다.
“이렇게 이를 갈아대면서....뭐하러..날 봐....
당신 보고 있으면 내 삶이 보이는 것 같아서.....
내가 더 독해지는 거 몰라....”
룸에 들어와 지윤을 침대에 눕힌 동준이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쉬지 않고 한 캔을 거의 다 비워버린 후 커튼을 젖히고 어둠이 내려깔린 도시를 응시했다. 모든 사악함이 암흑 속에 묻히고 불빛만이 생명을 발하는 어둠의 바다가 동준의 흔들리던 감정을 다시 잠재우고 있었다.
[날 닮아서 싫어...
텅 비어 있는 듯한 당신 그 눈이 나를 숨 막히게 해...
그냥 즐기는 쪽에 나를 걸지 그랬어....
왜 자꾸 어둠속에서 다른 색을 찾으려고 애쓰니...
내게서 그걸 찾고 있는 당신이 나를 더 시궁창으로 밀어 넣고 있어...]
동준이 창밖의 어둠에 그대로 시선을 둔 채 지윤에게 말을 건넸다. 잠시 흔들리던 감정이 심연으로 가라않고 그 목소리에 마른 느낌이 묻어있었다.
“약속 있어요. 잠깐 있다 괜찮아지면 가요.”
동준이 애써 지윤을 보지 않고 있었다. 문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가는 동준에게 지윤의 싸늘한 독설이 퍼부어졌다.
“.....너 아무리 나한테 지독하게 굴어도 내가 너 안 놔.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해. 안 놔 줄 거야. 니가 뭘 하고 어떻게 살아도 내가 먼저 널 놓기 전에는 넌 나 못 벗어나.”
동준이 멈추지 않고 문을 열고 나왔다. 몸을 휘감는 질척하고 후끈한 밤공기가 마른 가슴속으로 불어들었다.
환생...<2> 싸늘한 피.......
일주일째 깔려있던 잔재들이라 이제 더 이상 낯설지도 않은 감정들이 아상하리만치 아련하게 동준을 휩싸고 있었다. 베란다 밖의 풍경에 시선을 주고 있던 동준이 휴대폰 소리에 붙잡고 있던 그것을 놓았다. 호경이 모임장소를 변경한다는 전화였다.
“왜 갑자기....”
“그렇게 됐다...나중에 오면 말해줄게.....술딴지 8시다...”
보름만의 마음편한 외출이었다. 샤워를 하며 등줄기에 한기가 들만큼 차가운 물줄기로 모호한 느낌들을 씻어내고 있었다. 늘 방치돼 있던 시간들이 잠시 복병에게 침범당해 그 가치를 일깨우고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인 냥 양껏 일상의 자유를 누리다 한사람의 부제로 그 평화를 다시금 인식해가고 있었다.
정재가 그곳에 와 일한지가 벌서 삼년이 넘고 있었다. 좀 채 방향을 잡기 힘든 성격이긴 했으나 이번처럼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가끔 하루 이틀 사라지다 오는 것은 이제 동준도 이골이 나 더 묻지도 않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보름이 지나고도 연락이 없었다. 동준이 처음 일주일은 화만 돋우고 기다리다 다음은 은근히 걱정을 하다 현재로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마직의 헐렁한 바지와 다리지 않은 듯 구겨짐이 자연스러운 같은 계열의 셔츠를 챙겨 입고 엷은 하늘빛의 재캣을 걸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동준이 만족스러운 듯 현관문을 나섰다. 그러다 퍼뜩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첫날부터 낯선 곳에 혼자 있게 한 것이 조금은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술딴지로 가던 방향을 다시 털어 클럽으로 향했다. 퇴근시간 후라 클럽 안은 회원들로 북적되고 있었다. 동준이 안을 돌아보며 아이를 찾다 사람들이 빽빽이 막고 있는 스쿼시 코트속의 두 사람에 시선이 멈추었다. 김주현과 그 아이였다. 이미 많은 회원들이 하던 운동을 멈추고 두 사람의 게임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오년의 구력을 가진 김주현과의 게임에 한 치 밀리지 않을 만큼 다부진 경기를 하고 있어 보는 이들이 포인트를 한점 한점을 함께 넘기고 있었다. 마르고 외소 한 체격일거라 생각한 그 몸에서 생각지 못했던 힘이 꿈틀거리고 있어 동준이 한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게임을 끝내고 온통 땀에 젖은 얼굴을 닦으며 사무실로 들어온 아이가 동준을 보고 말없이 목례를 했다.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요. 그 정도 신력이라고 말했으면 다른 얘기할 필요도 없었겠는데..”
“.........”
아이가 작게 웃어 보일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게임을 할 때와 달리 금방 분위기를 바꿔버린 그것이 이상해 동준이 다시 말을 한마디를 던졌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
“처음 온 회원들에겐 먼저 다가가 분위기를 익히게 해줘야 하는데 ...”
동준이 말을 다 하기 전에 아이가 입을 열었다.
“일에 지장을 줄만큼 말이 없진 않아요. 저 좀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나가실 건가요?”
동준이 한순간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불편해 할 것을 걱정하고 온 자신이 오히려 겸연쩍어 질만큼 그 행동에 거칠 것이 없었다.
“아니...뭐..... 좀 있다 갈 테니 샤워하구 와요. .....근데 갈아입을 옷은 있어요.”
“차에 있어요.”
아이가 나가고 신문을 뒤적거리든 동준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세어 나왔다. 그 등장이 좀 생뚱맞긴 했지만 생각 외로 좋은 결과를 낳고 있는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놓이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민팔의 셔츠와 짧은 트레이닝 바지를 갈아입은 아이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약간의 웨이브가 있는 짧은 머리가 정리되지 않은 채 삐줏삐줏 제멋대로 솟아있어 활기차고 밝아보였다.
“열두시에 문 잠그면 되죠?”
“열한시 이후에 회원들 없으면 대충 정리하고 닫으면 되요. 그리고 저녁은 이층에 내려가서 먹으면 되요. 여기서 일한다고 하면 알아서 해줄 거예요.”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다 동준을 보며 말을 꺼냈다.
“탈의실 옆에 있는 방....제가 쓰면 안 될까요...집이 너무 멀어서요.”
동준이 아이의 말에 당혹스러움이 스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정재의 짐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였고 여자아이 혼자 낯선 곳에 있겠다고 하는 것도 석연치 않아 머뭇거리고 있었다.
“뭐..상관은 없는데....괜찮겠어요? 여기건물 새벽되면 모두 빠져나가고 아무도 없는데...”
“주말엔 집에 갈게예요...저녁에 마치고 가기가 너무 먼 거 같아서요.”
“전에 일하던 친구 짐이 아직 남아 있어요. 대충 치워서 탈의실 창고 안에....”
동준이 말을 하다 멈추었다. 혼자 치우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내일 아침에 내가 치워 줄 테니...그냥 둬요.”
동준이 다음날 전쟁을 치루며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그것에 한층 더 그 밤이 달콤하게 몸에 감기고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차의 시동을 거는 순간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호경일거라 생각하고 무심히 받은 목소리가 한순간 경직되었다.
“여보세요.”
“어디니?”
“.....클럽이에요.”
“그린 힐이야. 지금 와.”
“...........”
여인이 말을 해놓고 잠시 후 뜻 없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녁에 별 약속 있는 거 아니지?”
“.........갈게요.”
아무런 이유도 달지 않고 간다는 말로 마무리를 하고 전화를 끊은 동준의 얼굴빛에 조금 전의 가벼운 기운이 사라지고 없었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아버리는 그것으로 가라앉는 기분을 추스르고 있었다.
-징그러운 놈.
제수 없는 놈.
넌 사람새끼도 아냐.
가슴 밑바닥에서 꺼이꺼이 고개를 쳐드는 오물 같은 그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핸들을 돌릴 뿐 목적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차 문을 열고 내려서자 덥고 습한 기운이 훅하고 몸을 엄습했다.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열대아가 지속돼 태양을 잃은 밤이 낮보다 맹렬히 도시를 데우고 있었다.
사람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카페를 들어선 동준이 끈적이고 침울한 분위기에 자신을 내맡기듯 꿈틀거리던 그것을 버리고 있었다. 지윤이 벌서 술병을 반이나 비우고 있었다. 전화 너머로 읽어낸 동준의 메마른 감정 선이 그녀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 전화를 끊고 스트레이트로 마신 술에 벌써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동준이 재킷을 벗어 놓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언제 왔는데 벌써 이렇게 마셨어요?”
“나쁜 새끼.........”
지윤이 술잔에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마주앉는 동준에게 말을 뱉어냈다. 그 속에 아픔과 시린 감정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웨이터가 가져온 술잔에 얼음을 넣고 직접 술을 따른 동준이 얼음이 풀리기도 전에 한잔을 비워냈다.
“무슨 일 있어요?”
“그렇게 오기 싫으면 오지말지.....왜 왔니?”
짧은 침묵 속에 외면하고 싶은 서로의 감정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너를 모르니.”
“필요 없는 말이에요.........내가 그렇게 못할 거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해요...”
동준이 말을 멈추고 지윤을 건너다보았다. 취기가 오른 얼굴위로 아픔이 배인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전화가 칼날같이 서늘하면서도 오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그 눈에 드리워져 있었다.
“오지 않으면......밤새 이르고 있을 거잖아요? 날 알면.....처음부터 전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어요.”
“나쁜 새끼....”
동준이 스트레이트로 잔을 드는 지윤의 술잔을 받아 얼음 잔에 부은 후 벨을 눌러 웨이터를 불렀다.
“알아요...그렇게 말 안 해도 내가 나쁜 새낀거 아니까 자꾸 각인시키지 않아도 돼요.”
동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웨이터가 들어왔다.
“안주 중에 저녁이 될만한 걸로 하나 같다주세요.”
그녀가 다시 술잔을 들려하자 동준이 그 잔을 비켜 들었다.
“저번처럼 응급실 데려가게 하지 말고 뭐라도 먹고 술 마셔요.”
지윤이 동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차갑고 냉담하게 대하면서도 그 속에 다른 감정이 묻어 있어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을 때는 잠시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 전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후로는 한순간도 편하게 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한곳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방탕하게 자신을 버려두는 듯 하면서도 단 한번도 허물어짐을 들키지 않을 만큼 지독한 사람이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서도 수없이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그 삶을 지윤이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연락 안하면.....넌 그대로 나 잊을 놈이다...”
“정재가 증발했어요. 보름째에요. 변명 듣고 싶다면 그게 이유에요. 녀석 없으면 혼자 정신없는 거 알잖아요.”
“어쩐 일로 나한테 변명씩이나 해줄 마음이 생겼니.........”
동준이 지윤의 말에 방향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말을 다시 이었다.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 또다시 치르게 될 전쟁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삼년이나 같이 있어도 알 수가 없는 놈이에요.”
지윤이 피식 웃으며 술잔을 비워 내렸다.
“넌.....넌 그보다 들 할 것 같니?”
그 얼굴에 장난기를 담아 지윤의 말을 받았다.
“왜 날 몰라요. 있는 데로, 보이는 데로......그게 난데.....아직 나 몰라요?”
“빈정대지 마.”
계속 겉을 맴돌고 있는 대화였다. 결코 자신을 풀지 않고 있는 독한 녀석이었다. 함부로 방치하는 듯 자신을 두면서도 그 심연을 들어내 놓지 않고 있어 지윤이 그를 앞에 두고도 시린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 초점이 흐려진 시선 속에 들어온 동준의 얼굴이 또 다시 지윤을 흔들고 있었다. 그 가슴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미 없는 웃음에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지윤이 그런 자신이 경멸하고 있었다.
“저번에 봤던 애 기억하지? 내 후배 연주...”
“.......”
“계가 너 마음이 든다고 만나보고 싶다더라.”
또 다시 불필요한 감정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싫어 동준이 그것을 맞받아쳤다.
“만나보죠 뭐. 그 정도면 나한테 황송한 상대데 내가 왜 마다 하겠어요.”
“............”
지윤이 아무 말 없이 그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뭣으로라도 그를 흔들고 싶은 충동이 매순간 일고 있었다.
“.......나한테.....싸움 걸어오지 말아요.”
“너.....죽여 버리고 싶어.”
동준이 술잔에 시선을 둔 채 지윤의 그 말을 따라 되 뇌였다.
“날.....죽여 버리고 싶으면.....이렇게 진저리쳐지게 감정싸움 걸어오지 말고 그냥 한번에 죽여요. 안 그럼 내가 당신....죽여 버리고 싶을지도 모르니.....”
지윤이 그에게 상처를 줘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그 화살이 늘 자신에게 돌아와 심장에 꽂히고 있었다. 그가 냉냉하고 차갑게 굴수록 그 충동이 한층 더 거세지고 있었다.
“그래! 내 주위에 있는 애들 다 만나....만나서 놀고 싶은 만큼 놀고.....마지막엔 내 앞에 앉아있어.”
동준이 염증석인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비운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어떡하면 나 할퀴어서 상처 낼까 그것만 생각해요? 사람 불러다 놓고 뭐하자는 거예요........내가 무슨 말 하길 바라는데......나 알면....그딴 얘기 아무 의미 없이 부서질 거 몰라요.”
“나쁜 새끼.....너 같은 새끼 정말 안볼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거야.......”
비틀거리며 일어선 지윤이 동준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도대체 니가 뭐야.....니가 뭔데...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네까짓 새끼가 뭔데 날 이렇게 피참하게 만들어......”
지윤이 몸을 더 가누지 못하고 소파에 쓰러졌다. 굳은 얼굴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동준이 얼얼한 뺨 속을 혀로 핥으며 손톱자국이 스친 뺨을 만져보았다.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는 그녀의 우울증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고 생각하든 동준이 어느 순간 자신 또한 그녀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있었다.
지윤을 부축해 어깨를 감싸않은 동준이 자신에게 흘리듯 그 말들을 흘려냈다.
“이렇게 이를 갈아대면서....뭐하러..날 봐....
당신 보고 있으면 내 삶이 보이는 것 같아서.....
내가 더 독해지는 거 몰라....”
룸에 들어와 지윤을 침대에 눕힌 동준이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쉬지 않고 한 캔을 거의 다 비워버린 후 커튼을 젖히고 어둠이 내려깔린 도시를 응시했다. 모든 사악함이 암흑 속에 묻히고 불빛만이 생명을 발하는 어둠의 바다가 동준의 흔들리던 감정을 다시 잠재우고 있었다.
[날 닮아서 싫어...
텅 비어 있는 듯한 당신 그 눈이 나를 숨 막히게 해...
그냥 즐기는 쪽에 나를 걸지 그랬어....
왜 자꾸 어둠속에서 다른 색을 찾으려고 애쓰니...
내게서 그걸 찾고 있는 당신이 나를 더 시궁창으로 밀어 넣고 있어...]
동준이 창밖의 어둠에 그대로 시선을 둔 채 지윤에게 말을 건넸다. 잠시 흔들리던 감정이 심연으로 가라않고 그 목소리에 마른 느낌이 묻어있었다.
“약속 있어요. 잠깐 있다 괜찮아지면 가요.”
동준이 애써 지윤을 보지 않고 있었다. 문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가는 동준에게 지윤의 싸늘한 독설이 퍼부어졌다.
“.....너 아무리 나한테 지독하게 굴어도 내가 너 안 놔.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해. 안 놔 줄 거야. 니가 뭘 하고 어떻게 살아도 내가 먼저 널 놓기 전에는 넌 나 못 벗어나.”
동준이 멈추지 않고 문을 열고 나왔다. 몸을 휘감는 질척하고 후끈한 밤공기가 마른 가슴속으로 불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