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키의 아들>> "이게 뭐죠?" 다음 날. 레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 지나가 내미는 예쁜포장의 선물을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물었다. 김 지나는 전날 밤, 레이의 아버지의 무례함을 깨끗하게 잊고 다시 가정교사로서 오직 레이에게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느닷없는 그의 키스공격에 결국 밤잠을 설쳐야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와의 키스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 후끈거렸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말도 안 되는 반응이었다. 다른 남자들과 키스를 수없이 해왔지만 그녀의 몸을 한순간에 달아오르게 만든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석달 전에 해외로 출장간 그녀의 애인조차 그녀의 몸을 이토록 달구지는 못했다. 혼란스러울 정도의 충격을 잊기 위해 그녀는 오전 중으로 전날 가지 못한 서점에 가서 레이가 읽을 만한 책을 몇 권 사온 것이다. 아이는 혼자 놀기에 이미 익숙해있기 때문에 항상 책을 읽을 거라고 여겼다. "한번 풀어 봐." 레이는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고 포장지를 뜯어냈다. 두 권의 책이 나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이의 눈빛에서 반가움이 보였다. 그러나 곧 원래의 무표정함으로 돌아왔다. '왜지? 왜 좋아하는 책을 보고 네 감정을 숨기는 거니?' 레이는 힘없이 책을 내려다봤다. 분명히 그 책을 갖고싶어했다. 그런데 아이는 망설이고 있었다. 지나는 이유없는 선물이 혹시 부담이 되서 그러나 싶어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럼, 보리의 좋은 친구가 되어줄래?" "네?" "너 보리 마음에 들지?" 아이는 대답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표현은 부족하지만 풍부한 감정이 마음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지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 곁에는 보리가 앉아서 꼬리를 치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었다. "보리도 널 좋아해. 그럼 둘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 그치?" "네..." "그건 보리의 엄마로서 내가 선물하는 거야. 우리 보리하고 친구가 되어줘서 너무 고마워." "조...좋아요." 그제야 레이의 얼굴은 만족스러움에 여유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잘 웃지 않는 아이에게 비록 작은 미소라도 지을 수 있게 되어 지나는 기뻤다. "숙제부터 끝내도록 하자. 거실로 가져와." 지나는 아이가 책과 노트를 들고오는 동안에 제과점에서 산 쿠키와 우유를 가지고 왔다. 레이는 똑똑한 것 같았지만 학교생활을 즐거워하지는 않았다. 같이 놀아줄 반친구나, 동네 아이들이 없는 레이에게는 오로지 집에서 지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공부가 뒤쳐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정부의 말로는 중간정도의 성적은 유지한다고 했다. 1, 2학년까지만 해도 상위권으로 공부를 잘했다고는 하지만 점차 성적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나이든 가정부는 걱정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자주 바뀌는 가정교사때문인 것같았다. 가정교사가 없는 동안 숙제는 혼자서 했고 매일 날라오는 학습지도 혼자서 해결했다. 당연히 아이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냥 덮어둘 수 밖에 없었다. 똑똑한 것과 공부를 잘 하는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했다. 똑똑한 것도 노력하지 않으면 반에서 일등할 수 없었다. 레이의 이런 성격으로라면 고학년 올라갔을 때 중간성적도 사실상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저학년과 고학년의 생각은 차이가 있었다. 열 살이 넘게되면 그 아이들의 머릿속은 사춘기와 똑같았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수준까지 아이들은 생각하고 느낄 줄 안다. 그런데 주변에 의지하거나 어울릴 친구 하나 없는 레이라면 또래아이들에게 뒤쳐질 것이고 지금보다 더 학교에 가기 싫어질 것이다. 아이의 성적을 일등으로 올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지나는 꼭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레이의 경우는 성적이 급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조금만 노력을 해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아이의 어두운 성격이었다. 지나는 이런 아들을 사토 유키는 잘 알고있는지 궁금했다. 유키는 한 달에 한 두번씩 일본에 있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이 보고싶어서가 아니라 의례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친근한 감정은 없지만 자식으로서 안부전화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꼭 레이의 소식을 물었다. 그리고 1년 중 여름에 사토 츠바사의 조카가 한국으로 넘어와 레이를 데려갔다가 다시 데려왔다. 평소에 밖에서 놀지 않는 레이는 일본에서 방학을 보내는 것이다. 한 달 후면 레이는 또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될 것이다. 그는 한국에 온 뒤로는 일본에 한번밖에 건너가질 않았다. 사고이후로 그는 부모님에게 발길을 끊었다. "이번에는 널 봤으면 좋겠구나." 차분하고 조용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달 만에 그녀가 부쩍 세월을 맞은 것 같다고 어겼다. "죄송합니다. 방학 때 유키 보낼게요." 이번에는 가정교사인 김 지나를 아들과 같이 그곳에 보낼 생각이었다. 가정교사를 떠올리자 그의 수많은 세포들이 꿈틀거렸다. "가정교사?" "새로 들어온 여자입니다." "레이하고는 좀 어떠냐?" "아직은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그 말은 의미심장했다. 아직은 괜찮다니... 두 사람은 키스만 나눴을 뿐이니 아직은 별 탈이 없다는 것인가. 그의 머릿속을 암흑처럼 만들어놓은 것은 전날 밤에 있었던 키스때문이었다. 왜 갑자기 그녀에게 키스할 생각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욱하는 마음에 그도 모르게 그녀를 자신의 단단한 몸위로 끌어올렸지만, 앞으로는 그 여자가 이곳에 있는 동안 절대 똑같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학교를 다녀온 사토 레이는 3일 전과 마찬가지로 넓은 거실에서 숙제를 했다. 숙제를 하는 동안 레이는 어제처럼 간식에는 손을 데지 않았다. 공부를 마치고 먹을 생각이었다. "레이야." "네?" "컴퓨터 게임 좋아한다고 했니?"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숙제를 끝마치지 않았는데 가정교사는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아냐. 그냥 물어본 거야. 다 썼니?" 레이는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선생님에게 보여주기가 싫은 것 같았다. 오늘 학교에서 받아온 숙제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보여주기 싫어?" "..." "그럼 줘봐. 얼마나 네 마음을 전하도록 잘 썼는지 보자꾸나." 레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녀 앞으로 노트를 밀었다. 그동안에 과일과 과자를 먹으라고 했다. 지나는 삐뚤삐뚤하지만 그나마 또박또박 짧게 쓴 글을 읽어내려갔다. 레이가 마음을 전하고 싶은 상대는 사토 유키였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빠에게 마음을 전하고싶었던 것이다. 몇 줄 안 되는 글이었지만 아이는 아빠에게 하고싶은 말을 분명하게 적어두었다. "이걸 있다가 아빠한테 보여드릴 거지?" 그 말에 레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두려움에 아이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아뇨! 싫어요!" "???" "그냥 숙제에요! 담임선생님한테 보여드리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는 레이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았다. 뒤쫓아간 지나는 방문을 두드렸지만 아이는 열어주지 않았다. 마음을 전하는 편지라고해도 레이는 이것을 단순히 선생님이 내어준 숙제로만 받아들였다. "답답하죠?" 가정부가 마당에서 널어두었던 옷들을 가져와 그녀 곁에 앉았다. 가정부의 나이는 육십다섯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팔순이 더 넘어보일 정도로 흰머리와 주름살이 많았다. "네?" "레이말이에요." 얼굴만큼이나 주름진 손으로 옷가지를 개켰다. 지나는 얼마 되지 않는 옷이었지만 옆에서 거들어주었다. "난 저애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어요. 그래서 저애가 더 어렸을 때부터 봐 왔죠." 가정부는 여기 사람들처럼 말이 없을 줄 알았다. "레이는... 아주머니하고도 얘기를 곧잘 하나요?" "아뇨. 사장님과 똑같아요. 필요한 말만 하죠." 그렇게 갑갑하게 어떻게 산단 말인가. 지나는 평생 그렇게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었으면 그렇게 살지 못 할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혼자 있더라도 상상의 친구를 만들어 함께 얘기했다. 누군가가 보더라도 완전 정신나간 여자였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난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저애하고 상대해줄 수가 없어요. 참 불쌍한 아이인데..." "저기... 사장님은 레이 앞에서 아내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가정부의 이마에 주름이 더 깊에 파여졌다. 지나는 가정부가 이집 사정을 훤히 알고있다면 유키의 아내가 어디있는지 왜 함께 있지 못한 지 알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에게서 안주인의 얘기를 더 듣고싶었지만 가정부는 더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기라도 하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거실에 혼자 남은 지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레이의 노트를 쳐다봤다. 아까 아이가 썼던 편지였다. 담임선생님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숙제였다. '그럼 왜... 아빠를 보고싶다고 했니? ' 어차피 선생님한테 보여드리는 숙제에 불과하다면... 흔희 아이들처럼 편지를 적었어야 했다. '갖고 싶은 걸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담배끊으세요, 술 많이 마시지 마세요... 그리고 사랑해요'라는 일상적인 투정이나 애정표현을 적지 그랬니. 하지만 레이는 그런 일상적인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다. 이럴 때 또래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어떤 표현을 하는지 아이는 모르고 있었다. 가정교사가 사토 유키의 침실문을 두드린 것은 키스사건이 일어난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고서였다. 그 일주일동안 그녀는 한번도 주방이나 거실에서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고 당연히 얘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필요한 얘기는 첫날에 명시한 것처럼 냉장고에 메모지를 붙여놓았다. 조금 전 가정부가 가져다 준 커피를 들고 서재로 들어온 유키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무슨 일이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밖에 서있는 사람이 가정부가 아니라 가정교사란 걸 알 수 있었다. "외출하려고요." "그런데?" 외출하는 것까지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섰다. "레이와 같이 나갈 거에요." "뭐?" 그는 화가 난 얼굴로 단번에 문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얼음보다 차갑고 바위보다 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 선생! 지금 뭐라고 했소?" "레이와 같이 외출할 거라고 했어요." 일주일 정도 아무 문제없이 무난하게 넘어가더니, 이 여자가 문제 하나를 만드려는 것이다. "안 되오." "뭐라구요? 아니 왜요?" "외출하려거든 당신 혼자 나가시오. 당신은 가정교사요!" "그래요! 난 레이의 가정교사죠! 그래서 교과서에만 있는 것 외에도 공부를 시킬 작정이에요. 바깥에는 아이가 보고 배울 게 너무나도 많거든요." 유키는 어울리지도 못 할 사람들과 섞여서 당황하거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상처받는 것은 싫었다. 적어도 집에 있으면 아들에게 상처 줄 사람은 없었다. "아이는 바깥세상보다는 집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오." "사장님처럼요?" "..." "사장님이 세상에 등을 돌리고 산다고 해서 아이까지 그러길 바라는 거에요? 그게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건 이기적인 거에요." "뭐라고? 그 입...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유키는 주먹을 불끈 쥔채로 문을 부서져라 노려봤다. 마음같아서는 문을 박차고 나가 그녀의 목을 조를 수도 있었다. 감히 자신에게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지껄인 것을 후회하게 해주고 싶었다. "왜요? 또 저번처럼 벌 주시려고요? 그러기엔 지금 너무 훤한데요." "..." "겁쟁이! 사장님은 아주 이기적인데다 무례하고 겁쟁이에요! 아세요?" "이... 겁대가리 없는 여자같으니!" "그럼 우리 갔다올게요!" "..." 서 동인은 뒤에 아까부터 심드렁하게 앉아있는 남자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사거리 신호에 멈춰있는 동안에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귀엽게 생긴 녀석이긴 했지만 그 얼굴의 아이치고는 너무 차갑고 무뚝뚝한 눈을 가졌다. 그리고 오는 동안에 단 한마디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뭐가 불만일까... 동인은 괜히 옆에 앉아있는 털짐승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투덜거렸다. "야! 너는 왜 따라나온 거야? 이건 꼭 사람가는데 꼭 따라다녀요... 어이, 보리!" 보리는 좁은 공간에 꼬리까지 흔들며 혀를 낼름거렸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보니 녀석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 녀석 주사맞았냐?" 보리의 축축한 혀가 자신의 얼굴을 핥아대자, 동인은 인상을 구기며 뒤에 앉은 지나에게 물었다. 지나는 보리의 적극적인 애정표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렇게 해야했다. "당연하지." "이 녀석... 내가 자기 먹인 줄 알고 있는 거 아냐?" "당연하지." "야! 너 내 얘기 제대로 듣고있는 거냐?" 지나는 운전사노릇을 동인에게 부탁했다. 그는 집세를 빌려준 것처럼 선뜻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는 아끼는 외제차에 그녀와 낯선 꼬마 그리고 털짐승까지 태워 대형할인마트로 가는 중이었다. "레이." "네?" "지금 기분이 좀 어때?" 유키의 말대로 아이는 쉽게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대인공포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 틈을 두려워했다. 보리까지 합세해 문을 긁으며 바람 쐬러 가자고 짖어댔다. 볼거리가 많은 대형마트에 레이가 흥미있어할 컴퓨터게임 얘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책들도 구경하고 공짜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진짜 공짜로 음식을 먹어요?" 레이가 말하는 것은 대형할인마트에 있는 시식코너이야기였다. 지나는 그곳에서 공짜로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럼! X-BOX 게임도 공짜로 할 수 있어! 공짜로 책도 읽을 수 있고!" "진짜죠?" "그럼! 선생님만 믿어! 거긴 별 게 다 있다니까. 전자제품, 옷, 음식, 장난감, 심지어 햄스터도 구경할 수 있어. 아, 레이는 이구아나 본 적 있니?" 아이보다 더 들뜬 목소리로 지나가 말했다. "인터넷으로요. 텔레비전에서 잠깐 봤어요."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 레이는 실제로 동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학교와 집만 3년동안 다녔지 다른 곳을 가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1년에 한번씩 일본에 가더라도 그곳 사람들은 레이에게 동물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호랑이든 곰이든 동물을 좋아하고 신기해한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야, 레이!" 레이는 운전하는 사람 뒷통수를 쳐다봤다. 거울을 통해 동인의 눈이 날아왔다. "동물원 간 적 있냐?" 아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을 보고 그는 조금 놀랐다. 저 나이에 동물원도 안 가보다니... 지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언젠가 꼭 아이에게 동물 공부를 시켜주기로 했다. 책이나 텔레비전에서만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 실제로 사자, 호랑이 그리고 원숭이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레이에게 동물원에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하자,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아이의 들뜬 기분은 대형할인마트에 가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너 괜한 약속한 거 아냐?" 동인이 게임기 앞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 레이를 보고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여기 나오는 것도 그 애아버지가 싫어했다면서? 그런데 동물원까지 가는 걸 허락하겠냐고?" "난 레이가정교사라니까. 못 할 거 뭐 있니? 애한테 좋은 걸 보여주고 가르쳐줄 생각이야." 지나는 옆에 선 동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그는 고개를 돌리고는 이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도와줄 거지, 서 동인?" "뭐? 설마... 동물원에 같이 가자는 건..." "맞아! 도와줘. 난 차도 없고 운전도 못 하고... 레이와 둘이서 가기 힘들어." "그럼 못 가는 거지." "으응? 같이 가자, 동인아. 응? 같이 가줘요, 동인씨~이!" 지나가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너무나도 애절한 눈빛으로 졸라댔기 때문에 그의 뇌는 거절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정말이지?" 그는 지나의 얼굴이 곧 밝아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팔에 매달려 아이처럼 순수한 얼굴로 조르고 있을 때면 그의 마음은 약해졌다. 지나는 비염걸린 여자들처럼 코맹맹이하며 귀찮은 부탁을 자주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고있으니 냉정하게 안 된다는 거절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인은 몇걸음 물러서서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는 녀석과 같이 도서코너로 향하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밝은 미소가 남자에게, 특히나 자신에게 얼마나 영향력이 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 지나. 대신... 조건있어." 동인은 그녀 옆에서 다가와 서서 아무 책이나 집어들었다. 얼굴 보고 직접 얘기하기가 쑥스러웠다. "뭔데?" "나랑... 이번주 토요일에... 데이트하자." "데이트? 음, 그래. 그렇게 해." "???" 동인은 당황스런 눈으로 아무 고민도 없이 선뜻 대답한 그녀를 쳐다봤다. 일초의 고민도 없이 데이트하자고? 그는 막상 그녀에게서 쉽게 대답을 들어 놀랐다. "이틀 남았다." 두 시간 후에 집으로 돌아온 지나는 레이와 보리를 차에서 내리도록 도와주고 친구에게 돌아섰다. "알아. 대신에 모레 나 데리러 와." 서 동인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무표정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레이와 몇 시간 동안 차에서 얌전하게 있었던 보리에게 잘 있어라고 했다. "너, 무슨 기분 나쁜 거 있니?" 잔디가 심어져있는 넓은 마당을 지나 현관에 들어서던 지나는 레이의 얼굴이 몇 시간 전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뇨." "그런데 왜 그렇게 똥 씹는 표정이야?" 레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획 돌아섰다. 아이의 눈빛이 차갑게 변해있었다. 그녀는 약간 겁이 났다. "왜..." "그 아저씨가 선생님 애인이에요?" "음?" "그 아저씨가 선생님 애인이냐구요? 결혼할 사람!" "아... 아니.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해?" 레이는 대답하기 싫은 듯 또다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지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이가 왜 갑자기 차갑게 구는 건지 이상하게 여겼다. 밖에서 아이에게 서운함을 준 기억도 없었다. 어쩌면 서 동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평소 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니까. 저녁을 먹을 때 그 이유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걱정 말아요. 심통일 뿐이니까." 주방에서 쌀을 씻던 가정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지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했다. "레이가 그렇게 빨리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네요." "네?" "김 선생님 말이에요. 저 애가 선생님을 점점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레...이가요?" 일주일만에 아이의 마음을 열게 된 것인가. 지나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같이 만났다는 친구분... 애인일까봐 걱정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지나는 가정부의 말 뜻을 알아들은 이상 저녁식사 시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가정교사로 온 지 일주일이 흘렀지만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레이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이 잠겨져 있을 거라 여겼던 그녀는 문이 약간 열려있는 것을 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방은 아담하면서도 다른 애들 방과는 달리 매우 넓었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아이 혼자 잠 자고 공부하고 노는 것으로 이용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방은 아담했지만 너무 넓어 아이 혼자 공간을 채우기엔 썰렁하고 삭막했다. 침실은 오른쪽이었다. 침대 위가 약간 볼록한 것을 보고 지나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레이." 자신의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을 알고 레이는 이불을 내리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소리쳤다. "왜 남의 방에 들어와요!" "어머? 나 들어오라고 문 열어놓은 거 아니었니?" 독기를 품고 아이는 그녀를 노려봤다. 초등학교 3학년의 아이 눈에서 뿜어져나올 만한 눈빛이 아니었다. "나 잡아 먹으려고 그렇게 노려보는 거니? 나 쳐다보는 거야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날 잡아 먹겠어?" "..." 지나는 침대 가에 엉덩이를 걸터 앉았다. 그러자 아이와의 눈높이가 약간은 비슷해졌다. "레이야. 너 기분나쁘게 했다면 미안해. 다음에 놀러나갈 때는 그 아저씨 안 부를게." "필요없어요! 나가세요!" "그 말 진심이야? 다음에 또 안 나갈 거야? 아까 공짜음식 먹으니까 좋아라 했잖아." "그...그런 적 없어요! 누가 좋아했다고!" 레이는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붉게 상기된 얼굴은 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역시 아이는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기를 매우 두려워했다. 아마 사토 유키도 똑같을 것이다. 상처 받기 쉬운 그런 심장을 가진 부자(父子)는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기만 했다. "정말 그래? 너 거짓말이란 거 다 알아. 아까 선생님 핸드폰으로 다 찍어놨어. 너 좋아서 웃고있는 거 다 찍었거든." "씨... 너무 해!" "이것봐, 사토 레이. 누가 그러는데... 너 좋아하는 여자 있다며?" 지나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고개를 약간 숙이고 조용히 물었다. "뭐라구요?" "누가 그러는데... 넌, 그 여자가 항상 너만 걱정해주고 놀아주길 바란다며?" "네에? 아...아니에요! 여자친구 없어요! 필요도 없다구요!" "정말?" 지나는 붉게 물들어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잠시 후, 레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자 조금 전 아이를 놀렸던 자신을 욕했다. "여자들은 다 똑같이 자기밖에 모른다고 했어요! 여자들은 귀찮은 존재라고 했다구요!" 이불을 꼭 쥐고있는 아이의 두 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런... 그만 착한 레이를 울리고 만 것이다.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셨니?" 레이 혼자서 그런 생각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으리라. 아마 유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마음 속에 넣어두었을 것이다. "..." "오, 이런..." 지나는 레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레이에게 괜한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지나의 행동에 놀란 아이는 몸을 움츠리는 것 같았지만 점차 그녀의 따뜻한 품안에 안겨 울었다. 그녀의 얇은 민소매 블라우스를 통해 따뜻하고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다. "우리 레이, 미안해. 선생님이 미안해." 이불을 쥐고있던 레이의 손은 지나의 옷자락을 대신 꼭 쥐었다. "널 마음 아프게 안 할게. 다른 여자는 몰라도 난 믿어도 돼. 언제나 레이 곁에 있어줄 텐까." 그말에 지나의 품안에 안겨 있던 레이는 흠뻑 젖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저... 정말요?" "그래. 여기 있는 동안." "여기 얼마나 계실 건데요?" "음? 아, 음... 레이가 더이상 가정교사가 필요하지 않는다면... 난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 안 그래?" "..." 레이는 그녀를 보내주기 싫다는 의미로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는 풍만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김 지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점점 이 아이에게 빠져들어 너무 사랑하게 되면 어쩌나 두려웠다. 까만 눈동자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레이의 얼굴을 보고있으니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녀는 나중에 이곳을 떠날 때는 무척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아이를 그녀는 좋아하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무례한 남자 유키*** <#4. 유키의 아들>
#4.
<<유키의 아들>>
"이게 뭐죠?"
다음 날. 레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 지나가 내미는 예쁜포장의 선물을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물었다.
김 지나는 전날 밤, 레이의 아버지의 무례함을 깨끗하게 잊고 다시 가정교사로서 오직 레이에게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느닷없는 그의 키스공격에 결국 밤잠을 설쳐야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와의 키스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 후끈거렸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말도 안 되는 반응이었다. 다른 남자들과 키스를 수없이 해왔지만 그녀의 몸을 한순간에 달아오르게 만든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석달 전에 해외로 출장간 그녀의 애인조차 그녀의 몸을 이토록 달구지는 못했다.
혼란스러울 정도의 충격을 잊기 위해 그녀는 오전 중으로 전날 가지 못한 서점에 가서 레이가 읽을 만한 책을 몇 권 사온 것이다.
아이는 혼자 놀기에 이미 익숙해있기 때문에 항상 책을 읽을 거라고 여겼다.
"한번 풀어 봐."
레이는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고 포장지를 뜯어냈다. 두 권의 책이 나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이의 눈빛에서 반가움이 보였다. 그러나 곧 원래의 무표정함으로 돌아왔다.
'왜지? 왜 좋아하는 책을 보고 네 감정을 숨기는 거니?'
레이는 힘없이 책을 내려다봤다. 분명히 그 책을 갖고싶어했다. 그런데 아이는 망설이고 있었다.
지나는 이유없는 선물이 혹시 부담이 되서 그러나 싶어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럼, 보리의 좋은 친구가 되어줄래?"
"네?"
"너 보리 마음에 들지?"
아이는 대답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표현은 부족하지만 풍부한 감정이 마음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지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 곁에는 보리가 앉아서 꼬리를 치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었다.
"보리도 널 좋아해. 그럼 둘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 그치?"
"네..."
"그건 보리의 엄마로서 내가 선물하는 거야. 우리 보리하고 친구가 되어줘서 너무 고마워."
"조...좋아요."
그제야 레이의 얼굴은 만족스러움에 여유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잘 웃지 않는 아이에게 비록 작은 미소라도 지을 수 있게 되어 지나는 기뻤다.
"숙제부터 끝내도록 하자. 거실로 가져와."
지나는 아이가 책과 노트를 들고오는 동안에 제과점에서 산 쿠키와 우유를 가지고 왔다.
레이는 똑똑한 것 같았지만 학교생활을 즐거워하지는 않았다.
같이 놀아줄 반친구나, 동네 아이들이 없는 레이에게는 오로지 집에서 지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공부가 뒤쳐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정부의 말로는 중간정도의 성적은 유지한다고 했다.
1, 2학년까지만 해도 상위권으로 공부를 잘했다고는 하지만 점차 성적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나이든 가정부는 걱정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자주 바뀌는 가정교사때문인 것같았다.
가정교사가 없는 동안 숙제는 혼자서 했고 매일 날라오는 학습지도 혼자서 해결했다.
당연히 아이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냥 덮어둘 수 밖에 없었다.
똑똑한 것과 공부를 잘 하는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했다. 똑똑한 것도 노력하지 않으면 반에서 일등할 수 없었다.
레이의 이런 성격으로라면 고학년 올라갔을 때 중간성적도 사실상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저학년과 고학년의 생각은 차이가 있었다. 열 살이 넘게되면 그 아이들의 머릿속은 사춘기와 똑같았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수준까지 아이들은 생각하고 느낄 줄 안다.
그런데 주변에 의지하거나 어울릴 친구 하나 없는 레이라면 또래아이들에게 뒤쳐질 것이고 지금보다 더 학교에 가기 싫어질 것이다.
아이의 성적을 일등으로 올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지나는 꼭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레이의 경우는 성적이 급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조금만 노력을 해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아이의 어두운 성격이었다.
지나는 이런 아들을 사토 유키는 잘 알고있는지 궁금했다.
유키는 한 달에 한 두번씩 일본에 있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이 보고싶어서가 아니라 의례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친근한 감정은 없지만 자식으로서 안부전화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꼭 레이의 소식을 물었다. 그리고 1년 중 여름에 사토 츠바사의 조카가 한국으로 넘어와 레이를 데려갔다가 다시 데려왔다.
평소에 밖에서 놀지 않는 레이는 일본에서 방학을 보내는 것이다. 한 달 후면 레이는 또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될 것이다.
그는 한국에 온 뒤로는 일본에 한번밖에 건너가질 않았다. 사고이후로 그는 부모님에게 발길을 끊었다.
"이번에는 널 봤으면 좋겠구나."
차분하고 조용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달 만에 그녀가 부쩍 세월을 맞은 것 같다고 어겼다.
"죄송합니다. 방학 때 유키 보낼게요."
이번에는 가정교사인 김 지나를 아들과 같이 그곳에 보낼 생각이었다.
가정교사를 떠올리자 그의 수많은 세포들이 꿈틀거렸다.
"가정교사?"
"새로 들어온 여자입니다."
"레이하고는 좀 어떠냐?"
"아직은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그 말은 의미심장했다. 아직은 괜찮다니... 두 사람은 키스만 나눴을 뿐이니 아직은 별 탈이 없다는 것인가.
그의 머릿속을 암흑처럼 만들어놓은 것은 전날 밤에 있었던 키스때문이었다.
왜 갑자기 그녀에게 키스할 생각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욱하는 마음에 그도 모르게 그녀를 자신의 단단한 몸위로 끌어올렸지만, 앞으로는 그 여자가 이곳에 있는 동안 절대 똑같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학교를 다녀온 사토 레이는 3일 전과 마찬가지로 넓은 거실에서 숙제를 했다.
숙제를 하는 동안 레이는 어제처럼 간식에는 손을 데지 않았다. 공부를 마치고 먹을 생각이었다.
"레이야."
"네?"
"컴퓨터 게임 좋아한다고 했니?"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숙제를 끝마치지 않았는데 가정교사는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아냐. 그냥 물어본 거야. 다 썼니?"
레이는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선생님에게 보여주기가 싫은 것 같았다.
오늘 학교에서 받아온 숙제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보여주기 싫어?"
"..."
"그럼 줘봐. 얼마나 네 마음을 전하도록 잘 썼는지 보자꾸나."
레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녀 앞으로 노트를 밀었다. 그동안에 과일과 과자를 먹으라고 했다.
지나는 삐뚤삐뚤하지만 그나마 또박또박 짧게 쓴 글을 읽어내려갔다.
레이가 마음을 전하고 싶은 상대는 사토 유키였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빠에게 마음을 전하고싶었던 것이다.
몇 줄 안 되는 글이었지만 아이는 아빠에게 하고싶은 말을 분명하게 적어두었다.
"이걸 있다가 아빠한테 보여드릴 거지?"
그 말에 레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두려움에 아이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아뇨! 싫어요!"
"???"
"그냥 숙제에요! 담임선생님한테 보여드리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는 레이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았다. 뒤쫓아간 지나는 방문을 두드렸지만 아이는 열어주지 않았다.
마음을 전하는 편지라고해도 레이는 이것을 단순히 선생님이 내어준 숙제로만 받아들였다.
"답답하죠?"
가정부가 마당에서 널어두었던 옷들을 가져와 그녀 곁에 앉았다.
가정부의 나이는 육십다섯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팔순이 더 넘어보일 정도로 흰머리와 주름살이 많았다.
"네?"
"레이말이에요."
얼굴만큼이나 주름진 손으로 옷가지를 개켰다. 지나는 얼마 되지 않는 옷이었지만 옆에서 거들어주었다.
"난 저애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어요. 그래서 저애가 더 어렸을 때부터 봐 왔죠."
가정부는 여기 사람들처럼 말이 없을 줄 알았다.
"레이는... 아주머니하고도 얘기를 곧잘 하나요?"
"아뇨. 사장님과 똑같아요. 필요한 말만 하죠."
그렇게 갑갑하게 어떻게 산단 말인가. 지나는 평생 그렇게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었으면 그렇게 살지 못 할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혼자 있더라도 상상의 친구를 만들어 함께 얘기했다.
누군가가 보더라도 완전 정신나간 여자였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난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저애하고 상대해줄 수가 없어요. 참 불쌍한 아이인데..."
"저기... 사장님은 레이 앞에서 아내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가정부의 이마에 주름이 더 깊에 파여졌다.
지나는 가정부가 이집 사정을 훤히 알고있다면 유키의 아내가 어디있는지 왜 함께 있지 못한 지 알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에게서 안주인의 얘기를 더 듣고싶었지만 가정부는 더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기라도 하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거실에 혼자 남은 지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레이의 노트를 쳐다봤다.
아까 아이가 썼던 편지였다. 담임선생님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숙제였다.
'그럼 왜... 아빠를 보고싶다고 했니? '
어차피 선생님한테 보여드리는 숙제에 불과하다면... 흔희 아이들처럼 편지를 적었어야 했다.
'갖고 싶은 걸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담배끊으세요, 술 많이 마시지 마세요... 그리고 사랑해요'라는 일상적인 투정이나 애정표현을 적지 그랬니.
하지만 레이는 그런 일상적인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다.
이럴 때 또래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어떤 표현을 하는지 아이는 모르고 있었다.
가정교사가 사토 유키의 침실문을 두드린 것은 키스사건이 일어난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고서였다.
그 일주일동안 그녀는 한번도 주방이나 거실에서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고 당연히 얘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필요한 얘기는 첫날에 명시한 것처럼 냉장고에 메모지를 붙여놓았다.
조금 전 가정부가 가져다 준 커피를 들고 서재로 들어온 유키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무슨 일이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밖에 서있는 사람이 가정부가 아니라 가정교사란 걸 알 수 있었다.
"외출하려고요."
"그런데?"
외출하는 것까지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섰다.
"레이와 같이 나갈 거에요."
"뭐?"
그는 화가 난 얼굴로 단번에 문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얼음보다 차갑고 바위보다 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 선생! 지금 뭐라고 했소?"
"레이와 같이 외출할 거라고 했어요."
일주일 정도 아무 문제없이 무난하게 넘어가더니, 이 여자가 문제 하나를 만드려는 것이다.
"안 되오."
"뭐라구요? 아니 왜요?"
"외출하려거든 당신 혼자 나가시오. 당신은 가정교사요!"
"그래요! 난 레이의 가정교사죠! 그래서 교과서에만 있는 것 외에도 공부를 시킬 작정이에요. 바깥에는 아이가 보고 배울 게 너무나도 많거든요."
유키는 어울리지도 못 할 사람들과 섞여서 당황하거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상처받는 것은 싫었다.
적어도 집에 있으면 아들에게 상처 줄 사람은 없었다.
"아이는 바깥세상보다는 집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오."
"사장님처럼요?"
"..."
"사장님이 세상에 등을 돌리고 산다고 해서 아이까지 그러길 바라는 거에요?
그게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건 이기적인 거에요."
"뭐라고? 그 입...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유키는 주먹을 불끈 쥔채로 문을 부서져라 노려봤다. 마음같아서는 문을 박차고 나가 그녀의 목을 조를 수도 있었다.
감히 자신에게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지껄인 것을 후회하게 해주고 싶었다.
"왜요? 또 저번처럼 벌 주시려고요? 그러기엔 지금 너무 훤한데요."
"..."
"겁쟁이! 사장님은 아주 이기적인데다 무례하고 겁쟁이에요! 아세요?"
"이... 겁대가리 없는 여자같으니!"
"그럼 우리 갔다올게요!"
"..."
서 동인은 뒤에 아까부터 심드렁하게 앉아있는 남자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사거리 신호에 멈춰있는 동안에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귀엽게 생긴 녀석이긴 했지만 그 얼굴의 아이치고는 너무 차갑고 무뚝뚝한 눈을 가졌다.
그리고 오는 동안에 단 한마디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뭐가 불만일까...
동인은 괜히 옆에 앉아있는 털짐승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투덜거렸다.
"야! 너는 왜 따라나온 거야? 이건 꼭 사람가는데 꼭 따라다녀요... 어이, 보리!"
보리는 좁은 공간에 꼬리까지 흔들며 혀를 낼름거렸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보니 녀석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 녀석 주사맞았냐?"
보리의 축축한 혀가 자신의 얼굴을 핥아대자, 동인은 인상을 구기며 뒤에 앉은 지나에게 물었다.
지나는 보리의 적극적인 애정표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렇게 해야했다.
"당연하지."
"이 녀석... 내가 자기 먹인 줄 알고 있는 거 아냐?"
"당연하지."
"야! 너 내 얘기 제대로 듣고있는 거냐?"
지나는 운전사노릇을 동인에게 부탁했다. 그는 집세를 빌려준 것처럼 선뜻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는 아끼는 외제차에 그녀와 낯선 꼬마 그리고 털짐승까지 태워 대형할인마트로 가는 중이었다.
"레이."
"네?"
"지금 기분이 좀 어때?"
유키의 말대로 아이는 쉽게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대인공포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 틈을 두려워했다.
보리까지 합세해 문을 긁으며 바람 쐬러 가자고 짖어댔다.
볼거리가 많은 대형마트에 레이가 흥미있어할 컴퓨터게임 얘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책들도 구경하고 공짜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진짜 공짜로 음식을 먹어요?"
레이가 말하는 것은 대형할인마트에 있는 시식코너이야기였다. 지나는 그곳에서 공짜로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럼! X-BOX 게임도 공짜로 할 수 있어! 공짜로 책도 읽을 수 있고!"
"진짜죠?"
"그럼! 선생님만 믿어! 거긴 별 게 다 있다니까. 전자제품, 옷, 음식, 장난감, 심지어 햄스터도 구경할 수 있어. 아, 레이는 이구아나 본 적 있니?"
아이보다 더 들뜬 목소리로 지나가 말했다.
"인터넷으로요. 텔레비전에서 잠깐 봤어요."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 레이는 실제로 동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학교와 집만 3년동안 다녔지 다른 곳을 가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1년에 한번씩 일본에 가더라도 그곳 사람들은 레이에게 동물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호랑이든 곰이든 동물을 좋아하고 신기해한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야, 레이!"
레이는 운전하는 사람 뒷통수를 쳐다봤다. 거울을 통해 동인의 눈이 날아왔다.
"동물원 간 적 있냐?"
아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을 보고 그는 조금 놀랐다. 저 나이에 동물원도 안 가보다니...
지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언젠가 꼭 아이에게 동물 공부를 시켜주기로 했다.
책이나 텔레비전에서만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 실제로 사자, 호랑이 그리고 원숭이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레이에게 동물원에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하자,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아이의 들뜬 기분은 대형할인마트에 가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너 괜한 약속한 거 아냐?"
동인이 게임기 앞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 레이를 보고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여기 나오는 것도 그 애아버지가 싫어했다면서? 그런데 동물원까지 가는 걸 허락하겠냐고?"
"난 레이가정교사라니까. 못 할 거 뭐 있니? 애한테 좋은 걸 보여주고 가르쳐줄 생각이야."
지나는 옆에 선 동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그는 고개를 돌리고는 이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도와줄 거지, 서 동인?"
"뭐? 설마... 동물원에 같이 가자는 건..."
"맞아! 도와줘. 난 차도 없고 운전도 못 하고... 레이와 둘이서 가기 힘들어."
"그럼 못 가는 거지."
"으응? 같이 가자, 동인아. 응? 같이 가줘요, 동인씨~이!"
지나가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너무나도 애절한 눈빛으로 졸라댔기 때문에 그의 뇌는 거절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정말이지?"
그는 지나의 얼굴이 곧 밝아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팔에 매달려 아이처럼 순수한 얼굴로 조르고 있을 때면 그의 마음은 약해졌다.
지나는 비염걸린 여자들처럼 코맹맹이하며 귀찮은 부탁을 자주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고있으니 냉정하게 안 된다는 거절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인은 몇걸음 물러서서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는 녀석과 같이 도서코너로 향하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밝은 미소가 남자에게, 특히나 자신에게 얼마나 영향력이 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 지나. 대신... 조건있어."
동인은 그녀 옆에서 다가와 서서 아무 책이나 집어들었다. 얼굴 보고 직접 얘기하기가 쑥스러웠다.
"뭔데?"
"나랑... 이번주 토요일에... 데이트하자."
"데이트? 음, 그래. 그렇게 해."
"???"
동인은 당황스런 눈으로 아무 고민도 없이 선뜻 대답한 그녀를 쳐다봤다.
일초의 고민도 없이 데이트하자고? 그는 막상 그녀에게서 쉽게 대답을 들어 놀랐다.
"이틀 남았다."
두 시간 후에 집으로 돌아온 지나는 레이와 보리를 차에서 내리도록 도와주고 친구에게 돌아섰다.
"알아. 대신에 모레 나 데리러 와."
서 동인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무표정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레이와 몇 시간 동안 차에서 얌전하게 있었던 보리에게 잘 있어라고 했다.
"너, 무슨 기분 나쁜 거 있니?"
잔디가 심어져있는 넓은 마당을 지나 현관에 들어서던 지나는 레이의 얼굴이 몇 시간 전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뇨."
"그런데 왜 그렇게 똥 씹는 표정이야?"
레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획 돌아섰다. 아이의 눈빛이 차갑게 변해있었다. 그녀는 약간 겁이 났다.
"왜..."
"그 아저씨가 선생님 애인이에요?"
"음?"
"그 아저씨가 선생님 애인이냐구요? 결혼할 사람!"
"아... 아니.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해?"
레이는 대답하기 싫은 듯 또다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지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이가 왜 갑자기 차갑게 구는 건지 이상하게 여겼다. 밖에서 아이에게 서운함을 준 기억도 없었다.
어쩌면 서 동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평소 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니까.
저녁을 먹을 때 그 이유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걱정 말아요. 심통일 뿐이니까."
주방에서 쌀을 씻던 가정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지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했다.
"레이가 그렇게 빨리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네요."
"네?"
"김 선생님 말이에요. 저 애가 선생님을 점점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레...이가요?"
일주일만에 아이의 마음을 열게 된 것인가. 지나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같이 만났다는 친구분... 애인일까봐 걱정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지나는 가정부의 말 뜻을 알아들은 이상 저녁식사 시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가정교사로 온 지 일주일이 흘렀지만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레이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이 잠겨져 있을 거라 여겼던 그녀는 문이 약간 열려있는 것을 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방은 아담하면서도 다른 애들 방과는 달리 매우 넓었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아이 혼자 잠 자고 공부하고 노는 것으로 이용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방은 아담했지만 너무 넓어 아이 혼자 공간을 채우기엔 썰렁하고 삭막했다.
침실은 오른쪽이었다. 침대 위가 약간 볼록한 것을 보고 지나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레이."
자신의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을 알고 레이는 이불을 내리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소리쳤다.
"왜 남의 방에 들어와요!"
"어머? 나 들어오라고 문 열어놓은 거 아니었니?"
독기를 품고 아이는 그녀를 노려봤다. 초등학교 3학년의 아이 눈에서 뿜어져나올 만한 눈빛이 아니었다.
"나 잡아 먹으려고 그렇게 노려보는 거니? 나 쳐다보는 거야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날 잡아 먹겠어?"
"..."
지나는 침대 가에 엉덩이를 걸터 앉았다. 그러자 아이와의 눈높이가 약간은 비슷해졌다.
"레이야. 너 기분나쁘게 했다면 미안해. 다음에 놀러나갈 때는 그 아저씨 안 부를게."
"필요없어요! 나가세요!"
"그 말 진심이야? 다음에 또 안 나갈 거야? 아까 공짜음식 먹으니까 좋아라 했잖아."
"그...그런 적 없어요! 누가 좋아했다고!"
레이는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붉게 상기된 얼굴은 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역시 아이는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기를 매우 두려워했다. 아마 사토 유키도 똑같을 것이다.
상처 받기 쉬운 그런 심장을 가진 부자(父子)는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기만 했다.
"정말 그래? 너 거짓말이란 거 다 알아. 아까 선생님 핸드폰으로 다 찍어놨어. 너 좋아서 웃고있는 거 다 찍었거든."
"씨... 너무 해!"
"이것봐, 사토 레이. 누가 그러는데... 너 좋아하는 여자 있다며?"
지나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고개를 약간 숙이고 조용히 물었다.
"뭐라구요?"
"누가 그러는데... 넌, 그 여자가 항상 너만 걱정해주고 놀아주길 바란다며?"
"네에? 아...아니에요! 여자친구 없어요! 필요도 없다구요!"
"정말?"
지나는 붉게 물들어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잠시 후, 레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자 조금 전 아이를 놀렸던 자신을 욕했다.
"여자들은 다 똑같이 자기밖에 모른다고 했어요! 여자들은 귀찮은 존재라고 했다구요!"
이불을 꼭 쥐고있는 아이의 두 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런... 그만 착한 레이를 울리고 만 것이다.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셨니?"
레이 혼자서 그런 생각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으리라. 아마 유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마음 속에 넣어두었을 것이다.
"..."
"오, 이런..."
지나는 레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레이에게 괜한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지나의 행동에 놀란 아이는 몸을 움츠리는 것 같았지만 점차 그녀의 따뜻한 품안에 안겨 울었다.
그녀의 얇은 민소매 블라우스를 통해 따뜻하고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다.
"우리 레이, 미안해. 선생님이 미안해."
이불을 쥐고있던 레이의 손은 지나의 옷자락을 대신 꼭 쥐었다.
"널 마음 아프게 안 할게. 다른 여자는 몰라도 난 믿어도 돼. 언제나 레이 곁에 있어줄 텐까."
그말에 지나의 품안에 안겨 있던 레이는 흠뻑 젖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저... 정말요?"
"그래. 여기 있는 동안."
"여기 얼마나 계실 건데요?"
"음? 아, 음... 레이가 더이상 가정교사가 필요하지 않는다면... 난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 안 그래?"
"..."
레이는 그녀를 보내주기 싫다는 의미로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는 풍만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김 지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점점 이 아이에게 빠져들어 너무 사랑하게 되면 어쩌나 두려웠다.
까만 눈동자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레이의 얼굴을 보고있으니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녀는 나중에 이곳을 떠날 때는 무척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아이를 그녀는 좋아하게 되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