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두번째 키스의 의미?>> 저녁식사를 하던 지나는 아까부터 레이가 자신에게 뭔가 하고싶은 얘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가정부가 주방에서 나가는 틈을 타 아이를 돌아봤다. 첫날보다 훨씬 그녀와 얘기를 많이 하게된 레이는 가정교사가 부르자 입에 밥을 떠 넣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나는 아이의 입가에 밥풀이 묻은 것을 보고 웃으며 떼어주었다. "맛있니?" "그저 그래요." 레이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가정부가 아무리 요리를 잘 한다고 해도 자신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레이... 할 얘기가 뭐니?" "...?" 아이의 까만 눈이 의아하게 빛이 났다.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것이다. 지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그러자 레이는 아이답지 않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음, 그래." "내일... 가실 거에요?" "음? 어딜?" 그는 얼른 질문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채지 못하다가 이내 '아하'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약속했으니까." 그녀는 약속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레이는 제법 심각하게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아이의 힘빠진 어깨는 금새 쳐져있었다. "걱정 마. 너 학교 갔다올 때까지 기다려줄 테니까." "쳇!" 레이는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고 터벅터벅 거실로 가더니 텔레비전을 켰다. 그러나 재밌는 프로그램이 없자, 바닥에 늘어져있는 보리를 발로 툭툭 찼다. "바보! 멍청이!" 보리는 이유없이 공격을 당해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레이는 리모콘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계속 돌려대면서 혼자서 중얼중얼거렸다. "애인 자주 만나면 나랑 상대도 안 해 줄거면서..." 지나는 아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퉁퉁한 볼에 입술은 삐죽 내민 걸로 봐선 심통난 것이 분명했다. 거실에서 늦게까지 책을 보고있던 지나는 무릎에 올려져있던 책이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화들짝 잠에서 깼다. 환하던 거실은 어느새 어둠 속에서 벽에 있는 작은 조명 빛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어둠을 좋아하는 이집 주인을 위해선 그녀 또한 어둠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바닥에 떨어진 책을 들고 거실을 가로질러 계단으로 향하던 그녀는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방 뒷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사토 유키였다. 그도 침침한 거실에 서서 자신을 보고있는 여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는 가정교사가 자신의 방 입구에 있는 테이블에 레몬티를 올려놓고 가서 며칠 동안은 아래층에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흘 동안 잠을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하고 글을 쓰던 그에게 두통이 찾아들었고 그는 약을 먹기 위해 물을 가지러 주방으로 왔다. 두 사람은 먼저 입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동안의 침묵 속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지나였다. "여태 안 주무셨어요?" 그녀는 긴장으로 떨리는 몸을 추스리며 걸음을 떼었다. "..." 그는 아직까지 기분이 저기압이었다. 그의 냉랭한 기운이 그녀의 피부에 와닿을 정도였다. 유키는 전날 그녀가 허락도 없이 레이를 데리고 외출한 것 때문에 화가 아직 덜 풀려 있는 상태였다. 물론 가정부 말로는 레이가 전날 외출하고 들어온 뒤로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활기가 있어보이고, 말 수도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누그러진 듯 했지만 가정부의 뒤이은 말에 다시 기분이 언짢아지고 말았다. 가정교사는 내일 애인과 데이트가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성인여자라면 애인이나 남자친구가 있을 것이다. 그녀가 데이트를 하든 그 이상을 하든 그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니, 아무 상관이 없어야 했다. 솔직히 저녁식사 후, 김 지나... 그녀가 누구와 만나서 데이트를 하는 문제에 뜻하지 않게 신경을 쏟느라 머리가 욱신거렸던 것이다. 그의 두통의 원인제공을 한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저 여자였다. 레이의 가정교사. 김 지나는 그가 대화를 하기 싫어하리라 여기고 몸을 돌렸지만 계단 아랫참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발을 묶어버렸다. "내일 외출한다고?" "???" 그녀는 누가 말했을지에 대해 궁금했지만 그에게 말할 사람은 가정부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네. 데이트가 있거든요." 지나는 무엇때문에 나가는지를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머리와는 다르게 뱉어진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좋겠군." 짧은 말 속에 비아냥거림이 들어있다는 것을 지나는 알았다. "저녁 때 나갈 거거든요. 괜찮겠죠?" "나한테 허락 받을 필요없소. 난 아들의 외출을 신경쓰는 아버지지, 가정교사의 데이트나 신경써야 할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 지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는 남자를 노려봤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냉장고 문이 열렸을 때 불빛으로 그의 얼굴의 일부분이 보았던 것이다. 몸이 돌처럼 굳어버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 본 유키의 얼굴이 그녀의 뇌리에 번개치듯이 들어온 것이다. 비록 얼굴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그가 매력적인 남자란 것을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유키는 그녀가 아직 올라가지 않고 그대로 서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모았다.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걸까. 그러나 그가 물병을 든 채로 돌아서자 그녀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놀랐다. "김 선생." "네?" "혹시 술 마시오?" "네?" "술을 마실 줄 아는지 물었소." "아, 네... 조금요." 유키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거실에 있는 장식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집안 구석구석 어두운 곳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유리문을 열고 안에서 고급와인을 꺼내었다. "설마 이렇게 어두운데서 마시자는 건 아니시죠?" 그녀를 지나쳐서 주방으로 들어온 유키는 대답을 무시했다. 그리고 크리스탈로 만든 와인 잔 두 개를 꺼내었다. "그 정도로 어둡지는 않소." "그리고 그 정도로 밝지도 않구요." 그녀는 결코 지지 않고 톡 쏘아댔다. 유키는 그런 그녀의 성격에 칭찬해주고 싶었다. 순진한 구석만 있을 줄 알았더니 재치있게 대들기도 했다. "앉으시오." "조, 좋아요. 조금만 마시죠." 지나는 들고있던 책을 식탁에 올려놓고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와인 뚜껑이 열리며 잔 속으로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그냥 마시는 것보다 건배하고 마시는 건 어때요?" 유키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건배까지나 필요할까 싶었다. "그래, 뭐요?" "음... 레이. 사토 레이를 위해서 건배해요. 사장님이나 저나... 레이를 걱정하고 있으니까요." "좋소. 건배." 두 개의 와인잔이 '쨍'하는 음악같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지나는 싸구려 와인은 마셔봤지만 이렇게 진하고 독특한 맛이 느껴지는 와인은 처음이었다. 액체를 목구멍으로 살짝 넘길 때 느낌이 아슬할 정도였다. 그녀는 난생 처음 마셔보는 와인에 매료되었는지 건너편에 있는 검은 눈동자를 의식하지 못 했다. "한잔 더 하겠소?" "아, 음... 네. 맛있네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와인병을 내밀자 팔을 뻗었다. 그리고 조금씩 마신다고 하는게 그만 물 마시듯 다 마셔버렸다. "보기보단 술이 센가보군?" "그렇게 보여요? 그렇지 않아요. 맥주 한 잔 가지고 여러병 마시는 동인이를 상대하는 걸요." 동인? 유키는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남자같은 이름에 입술에 가져간 잔을 떼었다. 그녀의 입안에서 울린 그 이름은 아주 친밀했고 달콤하게 들릴 정도였다. 가정부가 말한 애인이 바로 그 남자로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꼭 대답해야 되는 거요?" 어떤 질문인지 모르면서 그의 목소리에서는 질문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녀는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요. 레이 일인걸요." "뭐요?" "학교에서 부모님을 만나야하는 경우는 없었나요?" "있었소." "담임을 만나셨나요?" "한가지를 물어본다고 하질 않았소?" 유키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꼭 한가지만 물어보란 거에요?" "만나지 않았소.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또 궁금한 게 있소?" "그럼 어떻게 하셨는데요?" "통화만 했소. 전화로도 해결이 되니까. 굳이 만나볼 필요가 없었거든." 지나는 기운빠진 목소리로 조용하고도 차분하게 말했다. "담임은 전화통화나 봉투보단 직접 학부모와 진실하게 대화를 나누길 바래요.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아이는 이런 쪽보단 이런 쪽을 더 관심있어한다는지, 그리고 아이는..." "왜 그만두었소?" 그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네?" "학교를 왜 그만두었냐고." "..." 그 질문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들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거실에 있는 카메라를 보고 대답을 했었다. "그때 질문으로는 부족하지." "뭐가 듣고 싶은신 거죠? 정말 제가 무슨 문제라도 만들고 쫓겨난 교사이길 바라세요?" "난 진실을 듣고싶을 뿐이오." "그런 대답을 드리기엔... 상대가 너무 의문스럽다면요?" 사토 유키는 속으로 웃었다. 이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다.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순진한 얼굴로도 충분히 남자들의 마음을 화산처럼 폭발할 지경까지 만들기도 했고, 뭔가 훔치면 안 될 것을 훔친 소년의 심장처럼 목구멍까지 두근거리게도 했다. 어느 것이 그녀의 본 모습인지는 정작 그는 몰랐다. 여자들은 요괴니까... 알 수 없는 동물이었다. "그 말은 내가 너무 수상한 남자다 이거요? 그래서 속 마음을 얘기해줄 수 없다?" "두 말하면 잔소리죠." 지나는 가볍게 대답을 하며 속으로 은근히 승리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앞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물어본 건 단순히 호기심으로 물어본 게 아니라, 아들의 가정교사이기에 물어본 거요.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 대답해야할 그 질문들은... 개인적인 문제요." "아뇨. 절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그녀는 어둡긴 했지만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져있을 거라는데 내기를 걸 수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탁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잘 자시오." 사토 유키는 의자를 뒤로 밀고는 일어났다. 그리고 뒷문으로 나갔다. 이곳에 가정교사로 머물러 있은 지가 10일이 다 되어갔다. 김 지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부모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어둠속의 남자, 사토 유키라는 것이다. 술에 약한 그녀가 와인을 두 잔이나 연거푸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레이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는 그가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붙잡기 위해 뒷문을 열고 쫓아갔다. 다행히 유키는 계단 중간쯤에 오르고 있었다. 뒤에서 다급하게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에 놀란 그가 돌아섰다. "지금 뭐하는 거요?" 불호령같은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전혀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이 가정교사때문에 더 골치가 아팠다. 은근히 그의 화를 돋구고 있음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얘기 좀 해요!" "얘기? 무슨 얘기?" "레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애가 아빠인 사장님한테 뭘 원하는지, 무슨 말을 제일 하고싶어하는지 아세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당신은 나한테서 거저 돈을 받을 셈이로군?" "쓸데없는 소리로 듣지 마세요!" "지금 당신이 여기까지 쫓아 나와 지껄이는게 쓸데없는 소리요!" 지나는 화가 났다. 왜 갑자기 이렇게 화가 치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그냥 포기하고 방으로 갈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목구멍까지 치고올라오는 말들을 뱉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삼켜버린다면 화병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녀가 슬리퍼신은 발로 씩씩하게 올라오는 것을 유키는 지켜봤다. 전쟁터에 적을 무찌르기 위해 용감하게 전진하는 것 같았다. 잠깐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는 동안 어느새 그의 앞에 그녀가 도착해 있었다. 계단은 그리 넓지 않아 두 사람이 서있기에는 조금 좁았다. 특히 몸집이 있는 성인남자와 같이 한자리에 서있기는... "좋아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억지로 물어보지 않겠어요!" "그거 다행이군. 탁월한 생각이..." "내 말 끝까지 들으세요!" 유키는 감히 가정교사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그에게 소리를 치며 대드는 여자를 흠씬 두들켜 패 버릇을 고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하지만 레이는 달라요! 사장님의 그늘 속에 집어넣지 말아요! 억지로 강요하지도 말라구요! 애가 왜 학교에 가길 싫어하는지, 왜 친구가 없는지, 왜 밖으로 나가는 걸 그토록 꺼려하는지 아신다면 그럴 순 없어요! 사람들을 싫어하고 바깥세상을 싫어하는 사람은 사장님이지 사토 레이가 아니라구요! 아시겠어요? 어떻게서든 세상에서 등을 돌리고 숨기만 하고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빼고는 아무도 없다구요!" "..." "바로 사장님요! 바로 당신... 사토 유키란 사람, 그 사람 뿐이에요!"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쏟아낸 것 처럼 속이 시원했다. 마음 속에 넣어두었던 하고싶었던 말들을 모조리 토해냈다. 그런데... 이 남자, 사토 유키는 조용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공포와 두려움이 한순간에 몰려들었다. 분을 삭히느라 들썩거리는 가슴은 갑자기 그의 어두운 얼굴을 올려다보며 멈추었다. '난... 죽었어! 오늘부로 직장을 잃은 거야!' 여름의 따뜻한 공기가 사르르 불며 두 사람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뜨거운 열기에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사토 유키는 터져버릴 것만 같은 분노를 삼켜내야 했다. 이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정말 겁대가리 없는 여자였다. 너무 순진하다 못해 바보였다. 이런 여자한테 아들의 가정교사로 정했으니, 그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이성을 가지려고 무던히 애쓴 결과 입을 열었을 때 평소때처럼 차가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신 아이큐가 얼마지?" "???" "얼마길래 내 경고를 잊은 거지?" "경고라니..." "흥, 내 아들을 염려해주는 척하며 나한테 접근하는 이유가 뭐지?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요?" 너무나도 싸늘하면서도 얼토당토 않는 말에 지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뭐... 뭐라구요?" "날 흥분시켜서 나와 키스라도 하고 싶었나? 그 정도로 날 원하는지 몰랐군 그래." "???" "하긴... 당신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단 걸 눈치챘지..." 건물 주변을 맴도는 고요함 속에 울리는 '찰싹'하는 소리가 두 사람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유키는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뺨을 있는 힘껏 때린 여자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지나는 그의 눈에서 잔인함이 느껴졌다. 달빛으로 보이는 희미한 그의 얼굴 윤곽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람 하나... 여자 하나 감쪽같이 죽일 정도로 사악한 기운도 동시에 보였다. 손바닥이 따끔거려왔다. 태어나서 한번도 뺨을 때린 적이 없었다. 주먹질이나 발길질도 없었다. 그에게 잡혀 죽을 거란 생각보다는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자신에게 맹렬히 쏟았던 그 지독한 말들때문에 가슴아팠다. 심장을 후벼파고 들어올 정도로 잔인한 말들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입술과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자리에 1초라도 더 있으면 그의 다른 쪽 뺨도 또 때릴 것만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는 계단 밑 땅을 딛지도 못하고 그에게 잡히고 말았다. 공포심을 느끼기도 전, 그의 강압적인 키스와 그의 억센 힘에 밀려 그녀는 건물 벽으로 밀쳐졌다. 처음 키스한 것보다 훨씬 거칠고 다급했다. 놀란 그녀가 벽과 그의 육체 사이에서 발버둥을 쳐댔지만 그는 풀어주지 않았다. 그녀의 공격만 받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받은 대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와 아랫배가 있는 힘껏 밀어부치자, 그녀는 꼼짝도 없이 갇히고 말았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느새 그의 몸은 단단하게 부풀어있어 그녀의 복부를 아프도록 눌렀다. 지나는 이성과는 달리 자신의 몸이 무섭도록 반응하는 것을 느끼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달궈진 욕망은 이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공격을 즐기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입술 사이로 밀고들어오는 뜨거운 혀를 피하려고 머리를 돌렸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거칠게 쥐었다. 입술 사이로 들어온 혀는 그의 닫힌 이 사이에서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엄청난 자제력이 필요했다. 그의 키스는 그녀의 몸을 꼼짝도 못하게 만들정도로 엄청난 힘을 소유했다. "벌려." 지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허스키하면서도 거친 말이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 울렸다. "어서 벌려!" 그의 손이 그녀의 얇은 옷 위에 올라오더니 열정에 부풀어있는 가슴을 건드렸다. 불에 덴 것처럼 놀란 그녀는 입술을 벌렸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뜨거운 혀를 집어넣었다. 거친 혀놀림에 그녀는 까무라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연거푸 와인을 두 잔이나 마셔댄 영향인지 더욱 그녀의 머릿속은 혼미해져갔다. 옷 속으로 파고들어온 그의 손은 따뜻한 공기를 압도할 만큼 뜨거웠고 그녀의 몸을 더욱 달구었다. 브래지어 위에 올라온 그의 손은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속을 비집었고... 충격으로 몸을 트는 그녀의 입술에서 잠깐 내려온 그의 입술은 그녀의 귀와 턱 그리고 목까지 내려왔다. "아아~!" 자기도 모르게 벌려진 입술 사이로 비명이 나왔다. 멈출 수 없는 욕망이 그녀의 온몸을 지배했고 이어서 그의 몸까지 지배했다. "너무 부드러워!" 그가 내뱉은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건들면 안 된다는 이성과 며칠동안이나 싸워야 했던가. 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와 키스를 하고있고 그녀의 속살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그의 손에 딱 알맞은 크기였고 탐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먹음직스러웠다. 그가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살짝 건드리자, 지나의 몸은 비틀거리듯 꿈틀거렸다. 유키는 그녀의 꿈틀거리는 육체에 더욱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벽에 기댄 채로 그녀의 몸을 소유하고 싶었다. 이토록 여자를 갈망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유키는 엄청난 이성을 가진 남자였다. 언제 어느때나 여자를 열정의 꼭대기까지 몰고갈 수도 있고 한순간에 달궈진 여자를 떨쳐낼 수도 있는 이성이 있었다. 그런 이성으로 오랫동안 섹스를 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기 전에 거친 키스와는 하늘과 땅 차이일 정도로 부드럽게 키스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입술은 제법 부풀어서 뜨겁게 뛰고있었다. 유키의 입술은 촉촉한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쓸듯 애무했다. "으으음..." 유키는 가빠진 숨결을 내쉬어가며 그녀의 얼굴과 가슴을 만졌다. 그리고 다시 가볍게 살짝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지나는 키스할 때보다 지금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마치... 지금 그의 행동은 사랑하는 연인을 깨질듯한 유리잔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달빛을 등지고 있어 그의 얼굴은 더욱 어둡게 보여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었을 때는 적어도 자신과 같은... 열정적이고 엄청난 흥분을 경험한 기분은 아니란 걸 알았다. "내 경고 듣는게 좋을 거요. 날 시험하려는 게 아니라면..." "???" "난 오랫동안 금욕하고 살아온 사람이니까...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적어도 내 아들의 선생을 가지고는 싶지 않소." "...??!!" 몸에서 떨어져간 유키는 계단 위를 성큼 올라가더니 문을 닫았다. 한참을 벽에 기대어있던 지나는 마치 자신의 반쪽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가슴 한켠이 썰렁하고 아려왔다. 갑자기 온몸이 떨리며 소름이 돋아 그녀는 두 팔로 몸을 감싸듯 끌어안더니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할 수 없어 그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의 흥분과 욕망을 경험했던 그녀로서는 참기 힘든 고통과 충격이었다. 두 다리로 서있기조차 힘든 경험에 그녀는 무너지고 만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리더니 재빠르게 뺨 위로 흘러내려갔다. 키스일 뿐이었는데 그 남자에게 빠져들다니... 그를 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나는 두 손을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막으려고 입술에 갖다대고는 눌렀다. 한 남자의 매력에 흔들리고 그의 키스에 쉽게 농락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미리 알았더라면... 예상했다면 외국으로 떠나야 했던 애인을 따라갔을 것이다! to be continued
***무례한 남자 유키*** <#5. 두번째 키스의 의미?>
#5.
<<두번째 키스의 의미?>>
저녁식사를 하던 지나는 아까부터 레이가 자신에게 뭔가 하고싶은 얘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가정부가 주방에서 나가는 틈을 타 아이를 돌아봤다.
첫날보다 훨씬 그녀와 얘기를 많이 하게된 레이는 가정교사가 부르자 입에 밥을 떠 넣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나는 아이의 입가에 밥풀이 묻은 것을 보고 웃으며 떼어주었다.
"맛있니?"
"그저 그래요."
레이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가정부가 아무리 요리를 잘 한다고 해도 자신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레이... 할 얘기가 뭐니?"
"...?"
아이의 까만 눈이 의아하게 빛이 났다.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것이다.
지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그러자 레이는 아이답지 않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음, 그래."
"내일... 가실 거에요?"
"음? 어딜?"
그는 얼른 질문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채지 못하다가 이내 '아하'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약속했으니까."
그녀는 약속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레이는 제법 심각하게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아이의 힘빠진 어깨는 금새 쳐져있었다.
"걱정 마. 너 학교 갔다올 때까지 기다려줄 테니까."
"쳇!"
레이는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고 터벅터벅 거실로 가더니 텔레비전을 켰다.
그러나 재밌는 프로그램이 없자, 바닥에 늘어져있는 보리를 발로 툭툭 찼다.
"바보! 멍청이!"
보리는 이유없이 공격을 당해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레이는 리모콘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계속 돌려대면서 혼자서 중얼중얼거렸다.
"애인 자주 만나면 나랑 상대도 안 해 줄거면서..."
지나는 아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퉁퉁한 볼에 입술은 삐죽 내민 걸로 봐선 심통난 것이 분명했다.
거실에서 늦게까지 책을 보고있던 지나는 무릎에 올려져있던 책이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화들짝 잠에서 깼다.
환하던 거실은 어느새 어둠 속에서 벽에 있는 작은 조명 빛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어둠을 좋아하는 이집 주인을 위해선 그녀 또한 어둠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바닥에 떨어진 책을 들고 거실을 가로질러 계단으로 향하던 그녀는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방 뒷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사토 유키였다. 그도 침침한 거실에 서서 자신을 보고있는 여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는 가정교사가 자신의 방 입구에 있는 테이블에 레몬티를 올려놓고 가서 며칠 동안은 아래층에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흘 동안 잠을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하고 글을 쓰던 그에게 두통이 찾아들었고 그는 약을 먹기 위해 물을 가지러 주방으로 왔다.
두 사람은 먼저 입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동안의 침묵 속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지나였다.
"여태 안 주무셨어요?"
그녀는 긴장으로 떨리는 몸을 추스리며 걸음을 떼었다.
"..."
그는 아직까지 기분이 저기압이었다. 그의 냉랭한 기운이 그녀의 피부에 와닿을 정도였다.
유키는 전날 그녀가 허락도 없이 레이를 데리고 외출한 것 때문에 화가 아직 덜 풀려 있는 상태였다.
물론 가정부 말로는 레이가 전날 외출하고 들어온 뒤로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활기가 있어보이고, 말 수도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누그러진 듯 했지만 가정부의 뒤이은 말에 다시 기분이 언짢아지고 말았다.
가정교사는 내일 애인과 데이트가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성인여자라면 애인이나 남자친구가 있을 것이다.
그녀가 데이트를 하든 그 이상을 하든 그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니, 아무 상관이 없어야 했다.
솔직히 저녁식사 후, 김 지나... 그녀가 누구와 만나서 데이트를 하는 문제에 뜻하지 않게 신경을 쏟느라 머리가 욱신거렸던 것이다.
그의 두통의 원인제공을 한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저 여자였다. 레이의 가정교사.
김 지나는 그가 대화를 하기 싫어하리라 여기고 몸을 돌렸지만 계단 아랫참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발을 묶어버렸다.
"내일 외출한다고?"
"???"
그녀는 누가 말했을지에 대해 궁금했지만 그에게 말할 사람은 가정부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네. 데이트가 있거든요."
지나는 무엇때문에 나가는지를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머리와는 다르게 뱉어진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좋겠군."
짧은 말 속에 비아냥거림이 들어있다는 것을 지나는 알았다.
"저녁 때 나갈 거거든요. 괜찮겠죠?"
"나한테 허락 받을 필요없소. 난 아들의 외출을 신경쓰는 아버지지, 가정교사의 데이트나 신경써야 할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
지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는 남자를 노려봤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냉장고 문이 열렸을 때 불빛으로 그의 얼굴의 일부분이 보았던 것이다.
몸이 돌처럼 굳어버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 본 유키의 얼굴이 그녀의 뇌리에 번개치듯이 들어온 것이다.
비록 얼굴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그가 매력적인 남자란 것을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유키는 그녀가 아직 올라가지 않고 그대로 서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모았다.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걸까.
그러나 그가 물병을 든 채로 돌아서자 그녀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놀랐다.
"김 선생."
"네?"
"혹시 술 마시오?"
"네?"
"술을 마실 줄 아는지 물었소."
"아, 네... 조금요."
유키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거실에 있는 장식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집안 구석구석 어두운 곳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유리문을 열고 안에서 고급와인을 꺼내었다.
"설마 이렇게 어두운데서 마시자는 건 아니시죠?"
그녀를 지나쳐서 주방으로 들어온 유키는 대답을 무시했다. 그리고 크리스탈로 만든 와인 잔 두 개를 꺼내었다.
"그 정도로 어둡지는 않소."
"그리고 그 정도로 밝지도 않구요."
그녀는 결코 지지 않고 톡 쏘아댔다.
유키는 그런 그녀의 성격에 칭찬해주고 싶었다. 순진한 구석만 있을 줄 알았더니 재치있게 대들기도 했다.
"앉으시오."
"조, 좋아요. 조금만 마시죠."
지나는 들고있던 책을 식탁에 올려놓고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와인 뚜껑이 열리며 잔 속으로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그냥 마시는 것보다 건배하고 마시는 건 어때요?"
유키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건배까지나 필요할까 싶었다.
"그래, 뭐요?"
"음... 레이. 사토 레이를 위해서 건배해요. 사장님이나 저나... 레이를 걱정하고 있으니까요."
"좋소. 건배."
두 개의 와인잔이 '쨍'하는 음악같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지나는 싸구려 와인은 마셔봤지만 이렇게 진하고 독특한 맛이 느껴지는 와인은 처음이었다.
액체를 목구멍으로 살짝 넘길 때 느낌이 아슬할 정도였다.
그녀는 난생 처음 마셔보는 와인에 매료되었는지 건너편에 있는 검은 눈동자를 의식하지 못 했다.
"한잔 더 하겠소?"
"아, 음... 네. 맛있네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와인병을 내밀자 팔을 뻗었다. 그리고 조금씩 마신다고 하는게 그만 물 마시듯 다 마셔버렸다.
"보기보단 술이 센가보군?"
"그렇게 보여요? 그렇지 않아요. 맥주 한 잔 가지고 여러병 마시는 동인이를 상대하는 걸요."
동인? 유키는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남자같은 이름에 입술에 가져간 잔을 떼었다.
그녀의 입안에서 울린 그 이름은 아주 친밀했고 달콤하게 들릴 정도였다. 가정부가 말한 애인이 바로 그 남자로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꼭 대답해야 되는 거요?"
어떤 질문인지 모르면서 그의 목소리에서는 질문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녀는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요. 레이 일인걸요."
"뭐요?"
"학교에서 부모님을 만나야하는 경우는 없었나요?"
"있었소."
"담임을 만나셨나요?"
"한가지를 물어본다고 하질 않았소?"
유키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꼭 한가지만 물어보란 거에요?"
"만나지 않았소.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또 궁금한 게 있소?"
"그럼 어떻게 하셨는데요?"
"통화만 했소. 전화로도 해결이 되니까. 굳이 만나볼 필요가 없었거든."
지나는 기운빠진 목소리로 조용하고도 차분하게 말했다.
"담임은 전화통화나 봉투보단 직접 학부모와 진실하게 대화를 나누길 바래요.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아이는 이런 쪽보단 이런 쪽을 더 관심있어한다는지, 그리고 아이는..."
"왜 그만두었소?"
그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네?"
"학교를 왜 그만두었냐고."
"..."
그 질문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들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거실에 있는 카메라를 보고 대답을 했었다.
"그때 질문으로는 부족하지."
"뭐가 듣고 싶은신 거죠? 정말 제가 무슨 문제라도 만들고 쫓겨난 교사이길 바라세요?"
"난 진실을 듣고싶을 뿐이오."
"그런 대답을 드리기엔... 상대가 너무 의문스럽다면요?"
사토 유키는 속으로 웃었다. 이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다.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순진한 얼굴로도 충분히 남자들의 마음을 화산처럼 폭발할 지경까지 만들기도 했고, 뭔가 훔치면 안 될 것을 훔친 소년의 심장처럼 목구멍까지 두근거리게도 했다.
어느 것이 그녀의 본 모습인지는 정작 그는 몰랐다. 여자들은 요괴니까... 알 수 없는 동물이었다.
"그 말은 내가 너무 수상한 남자다 이거요? 그래서 속 마음을 얘기해줄 수 없다?"
"두 말하면 잔소리죠."
지나는 가볍게 대답을 하며 속으로 은근히 승리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앞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물어본 건 단순히 호기심으로 물어본 게 아니라, 아들의 가정교사이기에 물어본 거요.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 대답해야할 그 질문들은... 개인적인 문제요."
"아뇨. 절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그녀는 어둡긴 했지만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져있을 거라는데 내기를 걸 수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탁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잘 자시오."
사토 유키는 의자를 뒤로 밀고는 일어났다. 그리고 뒷문으로 나갔다.
이곳에 가정교사로 머물러 있은 지가 10일이 다 되어갔다.
김 지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부모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어둠속의 남자, 사토 유키라는 것이다.
술에 약한 그녀가 와인을 두 잔이나 연거푸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레이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는 그가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붙잡기 위해 뒷문을 열고 쫓아갔다.
다행히 유키는 계단 중간쯤에 오르고 있었다. 뒤에서 다급하게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에 놀란 그가 돌아섰다.
"지금 뭐하는 거요?"
불호령같은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전혀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이 가정교사때문에 더 골치가 아팠다. 은근히 그의 화를 돋구고 있음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얘기 좀 해요!"
"얘기? 무슨 얘기?"
"레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애가 아빠인 사장님한테 뭘 원하는지, 무슨 말을 제일 하고싶어하는지 아세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당신은 나한테서 거저 돈을 받을 셈이로군?"
"쓸데없는 소리로 듣지 마세요!"
"지금 당신이 여기까지 쫓아 나와 지껄이는게 쓸데없는 소리요!"
지나는 화가 났다. 왜 갑자기 이렇게 화가 치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그냥 포기하고 방으로 갈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목구멍까지 치고올라오는 말들을 뱉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삼켜버린다면 화병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녀가 슬리퍼신은 발로 씩씩하게 올라오는 것을 유키는 지켜봤다. 전쟁터에 적을 무찌르기 위해 용감하게 전진하는 것 같았다.
잠깐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는 동안 어느새 그의 앞에 그녀가 도착해 있었다.
계단은 그리 넓지 않아 두 사람이 서있기에는 조금 좁았다. 특히 몸집이 있는 성인남자와 같이 한자리에 서있기는...
"좋아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억지로 물어보지 않겠어요!"
"그거 다행이군. 탁월한 생각이..."
"내 말 끝까지 들으세요!"
유키는 감히 가정교사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그에게 소리를 치며 대드는 여자를 흠씬 두들켜 패 버릇을 고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하지만 레이는 달라요! 사장님의 그늘 속에 집어넣지 말아요! 억지로 강요하지도 말라구요!
애가 왜 학교에 가길 싫어하는지, 왜 친구가 없는지, 왜 밖으로 나가는 걸 그토록 꺼려하는지 아신다면 그럴 순 없어요!
사람들을 싫어하고 바깥세상을 싫어하는 사람은 사장님이지 사토 레이가 아니라구요! 아시겠어요?
어떻게서든 세상에서 등을 돌리고 숨기만 하고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빼고는 아무도 없다구요!"
"..."
"바로 사장님요! 바로 당신... 사토 유키란 사람, 그 사람 뿐이에요!"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쏟아낸 것 처럼 속이 시원했다. 마음 속에 넣어두었던 하고싶었던 말들을 모조리 토해냈다.
그런데... 이 남자, 사토 유키는 조용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공포와 두려움이 한순간에 몰려들었다.
분을 삭히느라 들썩거리는 가슴은 갑자기 그의 어두운 얼굴을 올려다보며 멈추었다.
'난... 죽었어! 오늘부로 직장을 잃은 거야!'
여름의 따뜻한 공기가 사르르 불며 두 사람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뜨거운 열기에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사토 유키는 터져버릴 것만 같은 분노를 삼켜내야 했다. 이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정말 겁대가리 없는 여자였다. 너무 순진하다 못해 바보였다.
이런 여자한테 아들의 가정교사로 정했으니, 그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이성을 가지려고 무던히 애쓴 결과 입을 열었을 때 평소때처럼 차가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신 아이큐가 얼마지?"
"???"
"얼마길래 내 경고를 잊은 거지?"
"경고라니..."
"흥, 내 아들을 염려해주는 척하며 나한테 접근하는 이유가 뭐지?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요?"
너무나도 싸늘하면서도 얼토당토 않는 말에 지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뭐... 뭐라구요?"
"날 흥분시켜서 나와 키스라도 하고 싶었나? 그 정도로 날 원하는지 몰랐군 그래."
"???"
"하긴... 당신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단 걸 눈치챘지..."
건물 주변을 맴도는 고요함 속에 울리는 '찰싹'하는 소리가 두 사람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유키는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뺨을 있는 힘껏 때린 여자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지나는 그의 눈에서 잔인함이 느껴졌다. 달빛으로 보이는 희미한 그의 얼굴 윤곽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람 하나... 여자 하나 감쪽같이 죽일 정도로 사악한 기운도 동시에 보였다.
손바닥이 따끔거려왔다. 태어나서 한번도 뺨을 때린 적이 없었다. 주먹질이나 발길질도 없었다.
그에게 잡혀 죽을 거란 생각보다는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자신에게 맹렬히 쏟았던 그 지독한 말들때문에 가슴아팠다.
심장을 후벼파고 들어올 정도로 잔인한 말들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입술과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자리에 1초라도 더 있으면 그의 다른 쪽 뺨도 또 때릴 것만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는 계단 밑 땅을 딛지도 못하고 그에게 잡히고 말았다.
공포심을 느끼기도 전, 그의 강압적인 키스와 그의 억센 힘에 밀려 그녀는 건물 벽으로 밀쳐졌다.
처음 키스한 것보다 훨씬 거칠고 다급했다. 놀란 그녀가 벽과 그의 육체 사이에서 발버둥을 쳐댔지만 그는 풀어주지 않았다.
그녀의 공격만 받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받은 대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와 아랫배가 있는 힘껏 밀어부치자, 그녀는 꼼짝도 없이 갇히고 말았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느새 그의 몸은 단단하게 부풀어있어 그녀의 복부를 아프도록 눌렀다.
지나는 이성과는 달리 자신의 몸이 무섭도록 반응하는 것을 느끼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달궈진 욕망은 이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공격을 즐기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입술 사이로 밀고들어오는 뜨거운 혀를 피하려고 머리를 돌렸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거칠게 쥐었다.
입술 사이로 들어온 혀는 그의 닫힌 이 사이에서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엄청난 자제력이 필요했다. 그의 키스는 그녀의 몸을 꼼짝도 못하게 만들정도로 엄청난 힘을 소유했다.
"벌려."
지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허스키하면서도 거친 말이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 울렸다.
"어서 벌려!"
그의 손이 그녀의 얇은 옷 위에 올라오더니 열정에 부풀어있는 가슴을 건드렸다.
불에 덴 것처럼 놀란 그녀는 입술을 벌렸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뜨거운 혀를 집어넣었다.
거친 혀놀림에 그녀는 까무라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연거푸 와인을 두 잔이나 마셔댄 영향인지 더욱 그녀의 머릿속은 혼미해져갔다.
옷 속으로 파고들어온 그의 손은 따뜻한 공기를 압도할 만큼 뜨거웠고 그녀의 몸을 더욱 달구었다.
브래지어 위에 올라온 그의 손은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속을 비집었고...
충격으로 몸을 트는 그녀의 입술에서 잠깐 내려온 그의 입술은 그녀의 귀와 턱 그리고 목까지 내려왔다.
"아아~!"
자기도 모르게 벌려진 입술 사이로 비명이 나왔다.
멈출 수 없는 욕망이 그녀의 온몸을 지배했고 이어서 그의 몸까지 지배했다.
"너무 부드러워!"
그가 내뱉은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건들면 안 된다는 이성과 며칠동안이나 싸워야 했던가.
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와 키스를 하고있고 그녀의 속살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그의 손에 딱 알맞은 크기였고 탐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먹음직스러웠다.
그가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살짝 건드리자, 지나의 몸은 비틀거리듯 꿈틀거렸다.
유키는 그녀의 꿈틀거리는 육체에 더욱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벽에 기댄 채로 그녀의 몸을 소유하고 싶었다. 이토록 여자를 갈망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유키는 엄청난 이성을 가진 남자였다.
언제 어느때나 여자를 열정의 꼭대기까지 몰고갈 수도 있고 한순간에 달궈진 여자를 떨쳐낼 수도 있는 이성이 있었다.
그런 이성으로 오랫동안 섹스를 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기 전에 거친 키스와는 하늘과 땅 차이일 정도로 부드럽게 키스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입술은 제법 부풀어서 뜨겁게 뛰고있었다.
유키의 입술은 촉촉한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쓸듯 애무했다.
"으으음..."
유키는 가빠진 숨결을 내쉬어가며 그녀의 얼굴과 가슴을 만졌다. 그리고 다시 가볍게 살짝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지나는 키스할 때보다 지금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마치... 지금 그의 행동은 사랑하는 연인을 깨질듯한 유리잔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달빛을 등지고 있어 그의 얼굴은 더욱 어둡게 보여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었을 때는 적어도 자신과 같은... 열정적이고 엄청난 흥분을 경험한 기분은 아니란 걸 알았다.
"내 경고 듣는게 좋을 거요. 날 시험하려는 게 아니라면..."
"???"
"난 오랫동안 금욕하고 살아온 사람이니까...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적어도 내 아들의 선생을 가지고는 싶지 않소."
"...??!!"
몸에서 떨어져간 유키는 계단 위를 성큼 올라가더니 문을 닫았다.
한참을 벽에 기대어있던 지나는 마치 자신의 반쪽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가슴 한켠이 썰렁하고 아려왔다.
갑자기 온몸이 떨리며 소름이 돋아 그녀는 두 팔로 몸을 감싸듯 끌어안더니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할 수 없어 그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의 흥분과 욕망을 경험했던 그녀로서는 참기 힘든 고통과 충격이었다.
두 다리로 서있기조차 힘든 경험에 그녀는 무너지고 만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리더니 재빠르게 뺨 위로 흘러내려갔다.
키스일 뿐이었는데 그 남자에게 빠져들다니... 그를 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나는 두 손을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막으려고 입술에 갖다대고는 눌렀다.
한 남자의 매력에 흔들리고 그의 키스에 쉽게 농락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미리 알았더라면... 예상했다면 외국으로 떠나야 했던 애인을 따라갔을 것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