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혼자 갈게. 안 그래도 기분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괜히 마주치기라도 해봐. 나만 욕먹어.”
요즘 들어 너무 자주 싸우는 것 아니야? 근래들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병진이는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불안감이 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왔냐? 앉아.”
“무슨 술을 혼자 먹고 있어? 또 싸운 거야?”
“아니. 헤어졌어. 이젠 싸울 일도 없어.”
“맨날 헤어진대지. 뭐 이런 게 한 두 번인가?”
“믿기 싫음 믿지 마라.”
반박조차 하지 않고 술을 연거푸 마시는 병진이는 다른 날과는 분명히 달랐다.
“사랑, 왜 이리 허무하냐?”
“왜 또?”
“밥 매일 먹어도 배 꺼지잖아. 그것보다 더 허무한 게 사랑인 것 같아. 남는 게 없어. 주먹 쥐어 봐도 다 통과해버리는 거 있지. 잡히는 게 없어.”
“왜 추억은 남는다 잖니.”
사랑이 왜 허무해, 라고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사랑은 내일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사랑예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추억? 그까짓 께 무슨 필요야? 너 자장면 먹고 입에 까맣게 묻으면 좋겠니? 그거 누가 알아줄 건데. 그러고 거리 나가면 쟤는 자장면 먹었구나 누가 알아주냐고? 사랑 없는 추억도 그런 거야. 아주 쓸데없는 거라고.”
“정말 헤어진 거야?”
“응.”
“무슨 일로?”
“무슨 일이긴 다 돈 때문이지. 이 기집애야! 너도 정신차려. 너 보면 내 일년 전이랑 똑같애. 너도 분명히 나처럼 될 거라구!”
“술 그만 마셔. 너 많이 취했나봐.”
“에. 너 속으로 난 아니다 그러고 있지? 그것도 나랑 똑같애. 나랑 내기 할래? 너 헤어진다. 백프로!”
“그만 마셔.”
“야, 죽고 못 살 것 남자랑 헤어졌는데 술도 못먹냐? 내가 왜 술을 먹는지 알아? 슬퍼서가 아니야. 죽을 것 같은데 하나도 아무렇지가 않아서 그래. 너무 멀쩡해서 이상하더라구. 술이라도 마셔야지. 그냥 정상으로 있으니까 내 자신이 견딜 수가 없어. 차라리 헤어짐을 겪고 나면 몸에 상처가 남듯 뭐라도 남아야 하는 것 아니니? 근데 너무 멀쩡해. 나만 멀쩡한 게 아니야. 그 놈도 멀쩡해. 그 쓰레기 같은 놈도 멀쩡하더라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냐?”
“멀쩡하면 좋지 뭐.”
“그래? 니 말이 맞는 건가?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암튼 난 술 마실 거야. 그리고 넌 헤어진다. 백프로!”
그녀의 주정은 밤새 이어졌다. 가슴이 뻥 뚫려 보이는 병진이는 하나도 멀쩡하지 않은데 계속 멀쩡한 것이 속상하다며 소리를 쳤다. 난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친구란 그저 들어주기용으로 머물러야 할 때도 있는 거니까.
그녀는 내게 민성 오빠와 헤어질 거라는 소리를 백번도 넘게 했다. 그것도 백프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헤어질 가망성은 50%니까.
kiwi - 45
3개월 후. 큰 언니의 결혼식장.
6월이었는데도 후덥지근한 게 여름을 느낄 수 있는 날씨였다. 난 연한 청록색 블라우스와 시원한 연두색 치마를 입고 식구들과 함께 예식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대 노처녀인 큰 언니가 결혼을 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부모님이 평생 뿌리신 축의금을 대대적으로 회수하는 날이기도 한 것이었다. 장성한 딸이 넷이나 있으면서도 한번도 집안에 행사가 없었던지라 조카들 돌잔치라도 가실 때면 배 아파하시던 부모님들 이었다. 다른 언니들도 본인의 결혼이 아직 예정에 없었으므로 자신들이 뿌린 축의금을 큰 언니의 결혼식을 통해서 회수를 해보겠다는 심산인지 텔레마케터처럼 여기저기 전화를 열심히 돌렸고, 그 성과가 있었는지 우리 쪽 하객만 무려 600명이나 참석을 한다는 것이었다.
집안 잔치가 아니라 축제 같았다. 일주일 전부터 우리 집은 웃음이 끊이지 않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진정한 축제 분위기가 연출될 수 있었던 것은 찜질방의 매각이었다. 2개월 전 아빠는 우리를 불러 모으셨다.
“전서방이 유망한 직종의 전문가인 관계로 찜질방을 물러주겠다는 말은 없던 말로 하겠다.”
아빠의 곁에 있는 큰 언니는 절대 섭섭한 얼굴이 아니었다.
“전서방은 데릴사위도 괜찮다며 가업을 잇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서도······.”
아빠의 얼굴에 맏사위에 대한 자긍심이 비춰졌다.
“에헴. 회계사라는 직업을 살려 본인의 일에 충실한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되는바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허나 너희도 알다시피 너희 부모는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이제는 노후를 즐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찜질방을 과감히 처분, 매각된 돈은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겠다.”
기대하지 않았던 꿈같은 일이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주신다는 돈을 사회에 환원하시라고 권할 만큼 의협심이 높지 않은 나였다.
“우리 노후문제도 있고 하니 일단 각자에게 1억씩 재산을 분배한다.”
세 여자 모두 마음의 술렁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단! 결혼을 할 시에 결혼자금으로 나누어 주겠다.”
능력 있는 맏형부덕에 정말 어려울 것 같았던 내 인생이 풀린 셈이었다. 그 소식으로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더욱 열심히 살고자하는 의지가 북돋았을 뿐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민성 오빠에게 전하지 않았다. 무서운 현실 속에 산 한 달 동안 나의 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행여 그 돈으로 민성 오빠가 나태해질까봐 무섭기도 했고, 너희 부모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다고 자존심을 내세울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여하튼 매일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셋째 언니는 제이 오빠와의 결혼 후 발맛사지 전문점을 낼 계획이 있다며, 내가 유학을 다녀온 후에 내게 분배된 돈을 공동 투자해보자고 했다. 마음에 드는 계획이었다.
드디어 예식장에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신랑이 입장했다. 정말 든든한 형부의 모습이었다. 5년의 시간을 언니를 위해 공부한 점도 좋았고, 무엇보다 언니를 데려가 주니 고마운 사람이었다.
딴딴따라. 딴딴따라.
신랑 입장 후 결혼 행진곡에 맞춰 큰 언니가 아빠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아빠는 딸을 보낸다는 섭섭함은 전혀 없으신지 연신 웃는 낯을 보이셨고, 언니도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보기 좋은 부녀모습이었다. 엄마는 섭섭하신 건지 그 모습이 흐뭇하신 건지 언뜻 눈물을 비추셨다.
“니네 언니 정말 예쁘다. 웨딩드레스 이 결혼식장에서 한 거야?”
옆에 있던 병진이가 부러운 듯 물었다. 병진이를 만난 것은 2달 만이었다. 찜질방을 관두고 집으로 돌아갔기에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혜림이가 더 이쁠 걸.”
민성 오빠가 날 편들어 주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사귄지 벌써 2달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혜림이가 뭐가 예뻐? 나니까 친구 삼아 주는 거지.”
병진이는 질 기세가 아니었다. 둘이 합심한다해도 병진이를 이기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그 일 이후로 더 독해졌으니까. 병진이는 결국 영규 오빠와 헤어졌다. 바닷가에서 화해를 하고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헤어지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병진이었다고 했다. 그녀의 마음속을 끝내 내게도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러다 집으로 들어가고 일주일 후 만난 카페에서 그녀는 말했다.
“사랑 맞아. 지금 생각해도 사랑했었어. 하지만 그건 분명 실패한 사랑이야.”
그리고 나에게도 헤어질 것을 은근히 권유했었다. 나도 그 말에 예전처럼 강하게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해야했던 고생스러움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던 중이었기에.
“결국 너도 나처럼 될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래.”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더 이상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요즘 유행하는 구두 스타일이나 연예인의 성형이야기를 주제 삼아 이야기할 뿐이다.
[ 완결 ] kiwi - 44. 봄이 가고 여름이 오다
kiwi - 44
민성오빠와 당구장에서 포켓볼을 치고 있는데 병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병진이가 나보고 급하게 오라고 하는데.”
“무슨 일인데?”
“몰라. 영규 오빠랑 또 싸웠나.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가봐. 어디로 가면 되는데. 내가 데려다 줄게.”
“아니야. 혼자 갈게. 안 그래도 기분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괜히 마주치기라도 해봐. 나만 욕먹어.”
요즘 들어 너무 자주 싸우는 것 아니야? 근래들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병진이는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불안감이 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왔냐? 앉아.”
“무슨 술을 혼자 먹고 있어? 또 싸운 거야?”
“아니. 헤어졌어. 이젠 싸울 일도 없어.”
“맨날 헤어진대지. 뭐 이런 게 한 두 번인가?”
“믿기 싫음 믿지 마라.”
반박조차 하지 않고 술을 연거푸 마시는 병진이는 다른 날과는 분명히 달랐다.
“사랑, 왜 이리 허무하냐?”
“왜 또?”
“밥 매일 먹어도 배 꺼지잖아. 그것보다 더 허무한 게 사랑인 것 같아. 남는 게 없어. 주먹 쥐어 봐도 다 통과해버리는 거 있지. 잡히는 게 없어.”
“왜 추억은 남는다 잖니.”
사랑이 왜 허무해, 라고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사랑은 내일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사랑예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추억? 그까짓 께 무슨 필요야? 너 자장면 먹고 입에 까맣게 묻으면 좋겠니? 그거 누가 알아줄 건데. 그러고 거리 나가면 쟤는 자장면 먹었구나 누가 알아주냐고? 사랑 없는 추억도 그런 거야. 아주 쓸데없는 거라고.”
“정말 헤어진 거야?”
“응.”
“무슨 일로?”
“무슨 일이긴 다 돈 때문이지. 이 기집애야! 너도 정신차려. 너 보면 내 일년 전이랑 똑같애. 너도 분명히 나처럼 될 거라구!”
“술 그만 마셔. 너 많이 취했나봐.”
“에. 너 속으로 난 아니다 그러고 있지? 그것도 나랑 똑같애. 나랑 내기 할래? 너 헤어진다. 백프로!”
“그만 마셔.”
“야, 죽고 못 살 것 남자랑 헤어졌는데 술도 못먹냐? 내가 왜 술을 먹는지 알아? 슬퍼서가 아니야. 죽을 것 같은데 하나도 아무렇지가 않아서 그래. 너무 멀쩡해서 이상하더라구. 술이라도 마셔야지. 그냥 정상으로 있으니까 내 자신이 견딜 수가 없어. 차라리 헤어짐을 겪고 나면 몸에 상처가 남듯 뭐라도 남아야 하는 것 아니니? 근데 너무 멀쩡해. 나만 멀쩡한 게 아니야. 그 놈도 멀쩡해. 그 쓰레기 같은 놈도 멀쩡하더라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냐?”
“멀쩡하면 좋지 뭐.”
“그래? 니 말이 맞는 건가?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암튼 난 술 마실 거야. 그리고 넌 헤어진다. 백프로!”
그녀의 주정은 밤새 이어졌다. 가슴이 뻥 뚫려 보이는 병진이는 하나도 멀쩡하지 않은데 계속 멀쩡한 것이 속상하다며 소리를 쳤다. 난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친구란 그저 들어주기용으로 머물러야 할 때도 있는 거니까.
그녀는 내게 민성 오빠와 헤어질 거라는 소리를 백번도 넘게 했다. 그것도 백프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헤어질 가망성은 50%니까.
kiwi - 45
3개월 후. 큰 언니의 결혼식장.
6월이었는데도 후덥지근한 게 여름을 느낄 수 있는 날씨였다. 난 연한 청록색 블라우스와 시원한 연두색 치마를 입고 식구들과 함께 예식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대 노처녀인 큰 언니가 결혼을 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부모님이 평생 뿌리신 축의금을 대대적으로 회수하는 날이기도 한 것이었다. 장성한 딸이 넷이나 있으면서도 한번도 집안에 행사가 없었던지라 조카들 돌잔치라도 가실 때면 배 아파하시던 부모님들 이었다. 다른 언니들도 본인의 결혼이 아직 예정에 없었으므로 자신들이 뿌린 축의금을 큰 언니의 결혼식을 통해서 회수를 해보겠다는 심산인지 텔레마케터처럼 여기저기 전화를 열심히 돌렸고, 그 성과가 있었는지 우리 쪽 하객만 무려 600명이나 참석을 한다는 것이었다.
집안 잔치가 아니라 축제 같았다. 일주일 전부터 우리 집은 웃음이 끊이지 않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진정한 축제 분위기가 연출될 수 있었던 것은 찜질방의 매각이었다. 2개월 전 아빠는 우리를 불러 모으셨다.
“전서방이 유망한 직종의 전문가인 관계로 찜질방을 물러주겠다는 말은 없던 말로 하겠다.”
아빠의 곁에 있는 큰 언니는 절대 섭섭한 얼굴이 아니었다.
“전서방은 데릴사위도 괜찮다며 가업을 잇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서도······.”
아빠의 얼굴에 맏사위에 대한 자긍심이 비춰졌다.
“에헴. 회계사라는 직업을 살려 본인의 일에 충실한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되는바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허나 너희도 알다시피 너희 부모는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이제는 노후를 즐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찜질방을 과감히 처분, 매각된 돈은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겠다.”
기대하지 않았던 꿈같은 일이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주신다는 돈을 사회에 환원하시라고 권할 만큼 의협심이 높지 않은 나였다.
“우리 노후문제도 있고 하니 일단 각자에게 1억씩 재산을 분배한다.”
세 여자 모두 마음의 술렁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단! 결혼을 할 시에 결혼자금으로 나누어 주겠다.”
능력 있는 맏형부덕에 정말 어려울 것 같았던 내 인생이 풀린 셈이었다. 그 소식으로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더욱 열심히 살고자하는 의지가 북돋았을 뿐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민성 오빠에게 전하지 않았다. 무서운 현실 속에 산 한 달 동안 나의 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행여 그 돈으로 민성 오빠가 나태해질까봐 무섭기도 했고, 너희 부모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다고 자존심을 내세울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여하튼 매일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셋째 언니는 제이 오빠와의 결혼 후 발맛사지 전문점을 낼 계획이 있다며, 내가 유학을 다녀온 후에 내게 분배된 돈을 공동 투자해보자고 했다. 마음에 드는 계획이었다.
드디어 예식장에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신랑이 입장했다. 정말 든든한 형부의 모습이었다. 5년의 시간을 언니를 위해 공부한 점도 좋았고, 무엇보다 언니를 데려가 주니 고마운 사람이었다.
딴딴따라. 딴딴따라.
신랑 입장 후 결혼 행진곡에 맞춰 큰 언니가 아빠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아빠는 딸을 보낸다는 섭섭함은 전혀 없으신지 연신 웃는 낯을 보이셨고, 언니도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보기 좋은 부녀모습이었다. 엄마는 섭섭하신 건지 그 모습이 흐뭇하신 건지 언뜻 눈물을 비추셨다.
“니네 언니 정말 예쁘다. 웨딩드레스 이 결혼식장에서 한 거야?”
옆에 있던 병진이가 부러운 듯 물었다. 병진이를 만난 것은 2달 만이었다. 찜질방을 관두고 집으로 돌아갔기에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혜림이가 더 이쁠 걸.”
민성 오빠가 날 편들어 주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사귄지 벌써 2달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혜림이가 뭐가 예뻐? 나니까 친구 삼아 주는 거지.”
병진이는 질 기세가 아니었다. 둘이 합심한다해도 병진이를 이기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그 일 이후로 더 독해졌으니까. 병진이는 결국 영규 오빠와 헤어졌다. 바닷가에서 화해를 하고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헤어지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병진이었다고 했다. 그녀의 마음속을 끝내 내게도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러다 집으로 들어가고 일주일 후 만난 카페에서 그녀는 말했다.
“사랑 맞아. 지금 생각해도 사랑했었어. 하지만 그건 분명 실패한 사랑이야.”
그리고 나에게도 헤어질 것을 은근히 권유했었다. 나도 그 말에 예전처럼 강하게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해야했던 고생스러움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던 중이었기에.
“결국 너도 나처럼 될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래.”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더 이상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요즘 유행하는 구두 스타일이나 연예인의 성형이야기를 주제 삼아 이야기할 뿐이다.
“결혼식 끝나고 커피한 잔 마시고 가.”
“싫어. 니들 커플끼리 마셔. 눈치 없이 끼는 짓은 안할란다. 오빠랑 오랜만에 만났다면서?”
“너도 오랜만에 만났잖아.”
“니 언니 보니까 괜히 배 아파. 집에 가서 쉴래.”
예식이 모두 끝나고 병진이는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졌고, 나는 간신히 시간을 내 민성오빠와 커피 한잔을 하기로 했다.
“우리도 이런 날 오겠지?”
“당연하지. 넌 정말 아름다운 신부일 거야.”
“언니들처럼 늦게는 안했으면 좋겠어. 오빠 제대하기 전에 해도 좋은데.”
“안돼! 네 형부처럼 멋지게 데려갈래.”
“알았어. 큰 기대하고 있을께요. 난 여름엔 하기 싫어. 겨울도 싫고.”
“그럼 언제 할까?”
“봄이었으면 좋겠어. 가능하다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이었으면 더 좋겠고. 벚꽃 나무 밑에서 결혼하면 더 좋겠구.”
“그렇게 하면 되지.”
“진짜?”
“난 혜림이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 좋아.”
“바보!”
“뭐야?”
민성 오빠는 내 머리를 안았다. 창 밖으로는 여름이 오고 있었다. 커피보다는 시원한 청량음료가 어울릴 것 같은 여름이.
20대의 봄 하나가 날 떠나고 있는 것이었다.
[ 1년 전 병진이의 마음 일기 ]
드디어 살 집을 구했다. 화장실도 세집이 같이 써야한다는 주인의 말에 기겁했지만 우리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 하루 종일 버벅대고 있었다.
“오빠는 안 신나? 나만 좋나봐.”
“나도 좋아.”
감정 표현에 인색한 영규 오빠. 그런 모습이 듬직해 보여 더 사랑스럽기만 하다.
“이 그릇들 갖다 놓고, 이불만 사면 끝나는 건가?”
오빠가 말했다.
“응. 이불 사고 나서 잠부터 자자. 너무 졸려.”
“자기 전에 할 일이 있을 텐데.”
“밝힘증 환자! 그러다 늙어서 지팡이 짚고 다닐래?”
“너랑 사이좋게 지팡이 짚고 다닐 건데 뭐. 나 혼자 다니나?”
벌써 오늘만 세 번째 시장과 집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차도 없는 우리 형편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돈도 아끼기 위해 근처 할인마트를 가자고 하는 영규 오빠를 조금 더 먼 재래시장까지 끌고 간 것이었다.
“어때? 분홍색이 날까? 이 하늘색이 날까?”
“난 하늘색.”
“피, 남자 아니랄까봐. 핑크가 더 예쁘지 않아?”
드디어 함께 덮고 잘 이불을 고르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꿈마저 포근하게 덮어줄 이불. 세상에서 나만큼 행복한 여자는 없을 것이다.
이불을 산 후 찬거리를 몇 가지 사서 멋진 요리를 만들어줄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짐이 너무 많아 포기해야했다. 어쩔 수 없이 근처 분식집에서 만두와 떡볶이를 사고, 라면을 사서 끓여먹기로 했다.
“아쉽다. 나 요리 잘하는데.”
“괜찮아. 내일 해주면 되잖아. 내일 또 같이 시장에 오자.”
그래.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매일 아쉬움에 헤어져야 할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내 옆에는 사랑하는 영규 오빠가 있는 것이다.
“오빠! 라면 먹어.”
“알았어.”
영규 오빠는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야, 기가 막히게 맛이 있다.”
“진짜?”
“어, 세상에서 가장 맛좋은 라면인데.”
라면을 먹고 있는데 영규 오빠가 기습적으로 뽀뽀를 해왔다.
“뭐야?”
“고마워.”
“뭐가? 라면이 맛있어서?”
“그것도 그렇고. 모자른 것이 많은 내게 와주어서.”
“그런 말 하지마. 오빠가 뭐가 모자라?”
“집은 이렇게 작지만 이 안에서만큼은 공주처럼 살게 해줄게.”
“라면 끓이는 공주도 있나?”
“이젠 라면도 끓이지 마. 넌 이 안에서 만큼은 공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잘해줄게.”
“라면이나 먹지?”
장난으로 넘겼지만 오빠의 말이 너무나 고마웠다. 공주처럼 사는 것이 내 꿈이었지만 누구의 공주도 될 생각이 없다. 오직 영규 오빠의 공주이고 싶다.
아직 초저녁이었지만 이만저만 피곤한 것이 아니어서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했다. 오빠는 설거지를 하겠다며 이불을 퍼주고 일어섰다.
“뽀뽀해주고 가. 잘 자란 뽀뽀는 해줘야지.”
“잘 자요, 공주님.”
오빠는 내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에잇! 나 설거지 이따 할래.”
오빠는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싫어. 나가!”
“어디 서방을 나가라고 하고. 못 써!”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내 입술도 오빠만큼 뜨거워져 있었다. 행복한 입맞춤. 이제 제대로 된 행복이 시작되고 있었다.
- 완결.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