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은행 잎이 맹세처럼 떨어지는 늦가을에 미국에서 돌아 온 친구를 칵테일 바에서 만났다. 친구는 느닷없이 드라마에나 나오는 사건이 자신에게 생겼다고 하였다. 학교때 부터 눈빛이 살아있는 남자와 마음이 열린 여자로 환상의 커플로 알고 있던 나로서는 믿기가 어려웠다. 사랑이 다 끝까지 갈 수 있겠냐며, 친구는 독한 데킬라를 마시면서 담담하게 농담처럼 얘기를 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한 시선에 침묵하는 친구의 사연......
"당신 남자 친구 있어"
"없어, 그런 당신은?"
"나 생겼어. 같이 살아보고 싶은 여자야"
퇴근 후 그는 단호하면서도 꿈꾸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를 나 자신조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절대로 농담으로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커플로 만나 결혼을 하고 중년에 이르렀지만 한번도 이성 문제로 말썽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주변에서는 탤런트 뺨칠 정도로 잘 생긴 남자와 살면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우린 전혀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당신 마음대로 살아. 난 당신의 사생활에 개의하고 싶지 않아."
책임감과 열정으로 뭉친 그는 12살 연하인 여자에게 충실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럼 환상처럼 살아보길 바래"
더 이상 내가 뻗댈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보름내에 법적인 이혼 수속을 마치고 간단한 보따리는 친정으로 보내고 친구가 있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무지 실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지......덫에 빠지고 미로 속에 갇힌 심정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뒤 바로 네일 아트 학원에 등록했다. 며칠 뒤에 바로 샾에서 실습 겸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발을 씻기고 맛사지부터 시작했다. 지독한 냄새나 고된 노동이 차라리 자학하듯이 잡념을 없애 주었다. 일을 마치고는 으레히 단짝과 같이 바에 가서 미국식의 소주인 데킬라를 마셨다. 음악과 담배 연기 속에서 우린 마구 지껄이거나 침묵했다.
가끔은 한국인 노동자들과 합석하기도 했다. 퇴근 후의 술 한잔이 없으면 연명할 수 없는 이국생활의 허기짐이랄까. 가끔은 술기운에 못이겨 그대로 폭싹 쓰러지는 남자가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매일 죽는 남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울컥 치미는 느낌, 버려진 데 대한 동병상련이었으며, 집착이었다. 아, 이런 절박하고 외로운 상황에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구나! 비로소 그 남자의 눈먼 사랑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었다. 한국인이 모여 사는 도시의 일부는 70년대의 영등포와 같은 느낌이었다.
드디어 네일 아트 자격증을 따고 많은 사람들과도 친해졌다. 적응하고 변화하지 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뒤틀림을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낙천적인 성격과 포용력과 지혜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으며, 최대한 이국과 독신생활을 즐기기로 했다. 나도 모르고 있었던 나의 장점들이 그들을 통해서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침 6개월 간의 비수기라 그동안 꽤 모은 돈으로 친구와 유럽 등지로 여행을 하였다.
캐나다로 해서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면 "나이야 가라'고 목청껏 외친다고도 하였지. '안개 숙녀호'란 배를 탔다.
사랑은 떠난 후에야만 알 수 있는 것일까. 발자국은 항상 뒤에 남는 법이니, 사랑이 지난 자리만이 그 사랑을 돌아보아 알 수 있음이 원통한 것일까. 망망대해의 떠나는 배 안에서 천상의 음악 소리가 들려 올때, 뒤라스의 소설 '연인'의 주인공은 뒤늦게야 자신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고는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나는 나이아가라의 광대한 폭포의 포말에 의해 온통 안개로 휩싸인 곳에서 어쩔 수 없는 숙명과 나의 아이를 생각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비극은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지 억울하기만 하였다. 사랑보다, 배신보다도 더 지독한 자기연민이었다. 그러나 전설 속의 인물인 '안개의 처녀'와 만나는 순간 내 안에 장전된 폭탄이 펑 뚫리는 듯한 환희와 함께 붉은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사랑이 사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생, 그것은 우리가 만질 수도 없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였다. 비로소 물보라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 내 안의 무지개를 찾았던 것이다. 이제는 지구 어느 곳에 던져지든지 내가 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보듬으면서 살 수 있는 힘을 느꼈다.
어느새 친구는 박꽃처럼 하얀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안개의 처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안개의 처녀'를 만났다.
전설의 폭포에는
인디언 부족이 살고 있었다.
1년에 한번씩 폭포의 신에게
예쁜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었다.
추장의 딸이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다.
꽃으로 장식이 된 배 안에는
조그만 소녀가 울고 있었다.
거대한 폭포의 낭떠러지를 향해
한 남자가 배를 저으며 다가왔다.
추장은 울면서 어린 딸의 손을 꽉 쥐고
딸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탄 배는 물줄기 속으로 곤두박질치면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안개였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하루중 시간대에 따라,
연중 계절에 따라 물소리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디언은 이를 신이 노한 것으로 알고
매년 아름다운 처녀를 바쳤다고 하네요.
이는'안개의 처녀'라는 전설로 이름 붙여져,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글 붓꽃아씨
안개의 처녀 ...
안개의 처녀
노란 은행 잎이 맹세처럼 떨어지는 늦가을에 미국에서 돌아 온 친구를 칵테일 바에서 만났다. 친구는 느닷없이 드라마에나 나오는 사건이 자신에게 생겼다고 하였다. 학교때 부터 눈빛이 살아있는 남자와 마음이 열린 여자로 환상의 커플로 알고 있던 나로서는 믿기가 어려웠다. 사랑이 다 끝까지 갈 수 있겠냐며, 친구는 독한 데킬라를 마시면서 담담하게 농담처럼 얘기를 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한 시선에 침묵하는 친구의 사연......
"당신 남자 친구 있어"
"없어, 그런 당신은?"
"나 생겼어. 같이 살아보고 싶은 여자야"
퇴근 후 그는 단호하면서도 꿈꾸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를 나 자신조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절대로 농담으로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커플로 만나 결혼을 하고 중년에 이르렀지만 한번도 이성 문제로 말썽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주변에서는 탤런트 뺨칠 정도로 잘 생긴 남자와 살면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우린 전혀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당신 마음대로 살아. 난 당신의 사생활에 개의하고 싶지 않아."
책임감과 열정으로 뭉친 그는 12살 연하인 여자에게 충실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럼 환상처럼 살아보길 바래"
더 이상 내가 뻗댈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보름내에 법적인 이혼 수속을 마치고 간단한 보따리는 친정으로 보내고 친구가 있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무지 실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지......덫에 빠지고 미로 속에 갇힌 심정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뒤 바로 네일 아트 학원에 등록했다. 며칠 뒤에 바로 샾에서 실습 겸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발을 씻기고 맛사지부터 시작했다. 지독한 냄새나 고된 노동이 차라리 자학하듯이 잡념을 없애 주었다. 일을 마치고는 으레히 단짝과 같이 바에 가서 미국식의 소주인 데킬라를 마셨다. 음악과 담배 연기 속에서 우린 마구 지껄이거나 침묵했다.
가끔은 한국인 노동자들과 합석하기도 했다. 퇴근 후의 술 한잔이 없으면 연명할 수 없는 이국생활의 허기짐이랄까. 가끔은 술기운에 못이겨 그대로 폭싹 쓰러지는 남자가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매일 죽는 남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울컥 치미는 느낌, 버려진 데 대한 동병상련이었으며, 집착이었다. 아, 이런 절박하고 외로운 상황에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구나! 비로소 그 남자의 눈먼 사랑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었다. 한국인이 모여 사는 도시의 일부는 70년대의 영등포와 같은 느낌이었다.
드디어 네일 아트 자격증을 따고 많은 사람들과도 친해졌다. 적응하고 변화하지 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뒤틀림을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낙천적인 성격과 포용력과 지혜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으며, 최대한 이국과 독신생활을 즐기기로 했다. 나도 모르고 있었던 나의 장점들이 그들을 통해서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침 6개월 간의 비수기라 그동안 꽤 모은 돈으로 친구와 유럽 등지로 여행을 하였다.
캐나다로 해서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면 "나이야 가라'고 목청껏 외친다고도 하였지. '안개 숙녀호'란 배를 탔다.
사랑은 떠난 후에야만 알 수 있는 것일까. 발자국은 항상 뒤에 남는 법이니, 사랑이 지난 자리만이 그 사랑을 돌아보아 알 수 있음이 원통한 것일까. 망망대해의 떠나는 배 안에서 천상의 음악 소리가 들려 올때, 뒤라스의 소설 '연인'의 주인공은 뒤늦게야 자신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고는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나는 나이아가라의 광대한 폭포의 포말에 의해 온통 안개로 휩싸인 곳에서 어쩔 수 없는 숙명과 나의 아이를 생각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비극은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지 억울하기만 하였다. 사랑보다, 배신보다도 더 지독한 자기연민이었다. 그러나 전설 속의 인물인 '안개의 처녀'와 만나는 순간 내 안에 장전된 폭탄이 펑 뚫리는 듯한 환희와 함께 붉은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사랑이 사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생, 그것은 우리가 만질 수도 없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였다. 비로소 물보라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 내 안의 무지개를 찾았던 것이다. 이제는 지구 어느 곳에 던져지든지 내가 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보듬으면서 살 수 있는 힘을 느꼈다.
어느새 친구는 박꽃처럼 하얀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안개의 처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안개의 처녀'를 만났다. 전설의 폭포에는 인디언 부족이 살고 있었다. 1년에 한번씩 폭포의 신에게 예쁜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었다. 추장의 딸이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다. 꽃으로 장식이 된 배 안에는 조그만 소녀가 울고 있었다. 거대한 폭포의 낭떠러지를 향해 한 남자가 배를 저으며 다가왔다. 추장은 울면서 어린 딸의 손을 꽉 쥐고 딸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탄 배는 물줄기 속으로 곤두박질치면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안개였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하루중 시간대에 따라, 연중 계절에 따라 물소리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디언은 이를 신이 노한 것으로 알고 매년 아름다운 처녀를 바쳤다고 하네요. 이는'안개의 처녀'라는 전설로 이름 붙여져,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글 붓꽃아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