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러브송 < 05 >

나비200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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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련은 밥을 먹는 내내 조그만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취미에서부터 직장생활에서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들 자세히 듣다보면 모두 교묘한 자기 자랑이었다.


“같은 부서 사람들이 워낙 다재다능해서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아요. 저 입사 때만해도 경쟁률이 30대 1이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 경쟁을 뚫고 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못하는 게 없나봐요. 어머, 그렇다고 제가 잘하는 것은 없어요. 오해하시겠다.”


이 말을 들으면 예의상 근무 회사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채련씨는 어디 근무하시는데요?”


그들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나야 모르는 내용도 아니니 물을 말도 없고, 간간히 듣는 척 대꾸하는 말은 채련의 자랑에 추임새 역할을 할 뿐이었다.


“어머, 너무 제 얘기만 했나 봐요. 윤섭씨 이상형은 어떻게 되요?”

“제 이상형이요?”


윤섭씨의 이상형이라. 듣지 않는 척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저는 운명을 믿는 편이에요. 우습죠? 어떤 특별한 이상형을 그려본 일은 없어요. 제 짝은 정말 운명처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죠. 느낌이 좋은 스타일을 묻는 것이라고 한다면 채련씨 같은 스타일 좋은데요.”

“어머, 감사해요.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니었는데. 재치 있으시군요. 저도 재치 있는 남자 좋아요.”


채련은 설렁탕을 먹던 숟가락까지 내려놓고 그에게 몸을 기울었다.


‘채련이 같은 스타일? 여시 같은 스타일? 아님 가슴만 큰 스타일?’


굳이 채련이를 지목하여 말하는 것에도 섭섭했지만 윤섭씨 역기 다른 남자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 속상했다.


“제 이상형도 윤섭씨 같은 분이에요.”


나직히 속삭이는 듯한 채련의 말에 윤섭씨는 깍두기를 베어 물다 흠칫 놀랐다.


‘저 여시 같은 기집애 좀 보게. 왕여시! 왕불여시!’


난 채련이 대신 깍두기가 우걱우걱 씹어댔다. 상황은 점점 채련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내가 끼어들기엔 늦어버린 것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중도 포기로 미련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문희씨는요?”


윤섭씨가 내게 물었다.


“제 이상형이요?”

“예.”

“저도 윤섭씨 같은 분 좋아요.”


난 당당히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사실 분위기상 그냥 넘길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

“저, 음. 저도 채련이 말대로 재치있는 분이 좋거든요.”

“문희가요, 예전부터 이상형이라고 광고를 하고 다닌 스타일이 윤섭씨와 비슷하기는 해요. 샤프함 그리고 차가운 이미지. 그렇지, 문희야?”

“응.”

“윤섭씨는 좋으시겠어요. 두 여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셔서.”


채련의 말투는 다소 도전적이었다. 당장 두 여자 중에 한 여자를 택하라는 말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윤섭씨도 그랬지만 그 말엔 나도 거북해져서는 어색하게 식사를 마쳤다.


‘꼭 이래야 하는 걸까?“


윤섭씨가 나의 심장을 3년 동안 꽁꽁 얼려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아니면 절대 안된다고 수절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남자들을 더러 만나기도 했지만 그다지 감정의 이끌림이  없었던 것뿐이니까. 그런 일을 겪으면서 윤섭씨와 만나게 되었으면 하는 어렴풋한 바람이 생겼던 것이었다. 그런데 친구와 남자를 두고 싸우는 꼴이라니. 평소 볼 상 사납다 생각했던 그 꼴이 아닌가?


식사를 마치고 객실로 올라가는 길에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뒤에 조금 떨어져 지켜보았다. 그가 채련과 웃으며 말하는 옆모습이 보였다. 보기 좋은 미소. 그 모습을 보자 내 마음속에서 그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내 남자로 만들고 싶어! 나 스스로도 꺾을 수 없는 강한 욕망이었다.


“문희씨 기다렸다 가죠.”


앞서가던 그들이 발길을 멈추었다.


“희씨! 용준이 기다려지죠?”

“예?”

“초조해하시는 것 같고, 재미없어 보이시는 것 같기도 해요.”

“아니에요. 이젠 남자를 기다리는 일은 하지 않아요.”

“·······?”

“빨리 올라가죠. 윤섭씨는 보드를 타죠? 잘 타시나요?”

“뭐 그다지.”

“우리 시합해요. 내기도 걸고. 재미있겠는데요.”

“그러죠. 잘 타진 못하지만 내기란 말에 흥미가 생기네요.”

“난 윤섭씨에게 걸래요.”


채련이는 윤섭씨 편을 들었다.


‘정정당당하면 되는 거야. 채련이에게는 나중에 솔직하게 말하면 이해해주겠지.’


우리 셋은 처음으로 자연스레 이야기하며 객실로 향했다.




아직 개장초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속속 도착하는 사람들은 꽤 많아 보였다. 작년과는 다른 기분으로 오게 된 스키장. 이제 마음껏 누려보고 싶었다.


“시합은 일단 몸풀기부터 하고 할까요?”


그가 말했다.


“그러죠. 내기는 뭘로 정할지 생각하셨어요?”

“아직은요. 내기에 상관없이 꼭 이기고 싶은 시합인데요.”


윤섭씨는 내기라는 말이 나오면서부터 꽤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청색과 베이지색이 섞인 무난한 스타일의 보드복을 입고 고글을 쓴 윤섭씨는 첫 느낌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리고 하얀 눈밭에서 시합이란 말에 약간은 상기된 표정은 오히려 차가운 이미지를 부드럽게 해주고 있었다. 윤섭씨의 다른 모습. 이제 조금씩 서로를 알게 되는 과정인 것이겠지.


나름대로 설레고 있던 시합을 가로막은 것은 또 채련이었다. 채련이 보드를 잘 타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도 미처 알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채련아! 너 보드 못 탄다고 말 안했잖아.”


이미 세번째 넘어져 있는 채련에게 말했다.


“전에 타보긴 했거든. 전보다는 잘 할 줄 알았는데 어렵다.”

“일어나 보세요.”


윤섭씨는 채련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그렇듯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저 꼴을 보느니 차라리 혼자 노는 게 낫겠지, 싶었다.


“윤섭씨! 채련이 좀 잘 부탁해요. 저는 혼자 타고 올게요.”

“저, 문희씨!”


윤섭씨의 부름을 뒤로 하고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내고 타는 것이었지만 눈길의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어느새 내 몸에 완전히 익은 것이리라. 낯설지 않다는 것. 그도 내게 그런 날이 올까?


끝까지 내려가보니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을 보니 혼자 놀고 있는 내가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친구들과 왔을 때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런데 저 낯익은 얼굴은?


혜림이었다. 혜림이도 주말을 이용해 스키장을 찾은 모양이었다. 아는 체를 할까 했지만 내 일행이 없는 것도 그렇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옆에 있는 남자는 남자 친군가? 다정해 보이네.’


혜림이는 회사에서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이었다. 주변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으니 즐거운 표정이 저절로 지어지는 것이겠지 싶었다.


이번에는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다시 내려오는데 혼자 앉아있는 채련의 모습이 보였다.


“채련아!”

“어, 희야.”

“윤섭씨는 어디 갔어?”

“못 내려가는 걸 뻔히 보고도 너 찾는다고 내려갔다. 같이 타야 재미있다나. 니 걱정 엄청 하던데.”

“그랬어?”

“너 내가 윤섭씨 마음에 든다고 말한 거 알아?”

“알아. 너 그 말 여러 번 했잖아.”

“니가 용준씨 없어서 심심하고 외로운 건 알겠는데 우리 둘 얘기 나눌 수 있게 비켜줬으면 좋겠어. 너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니가 옆에 있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네. 우린 친구니까 그럴 수 있겠지?”

“내가 없어야 둘이 친해질 수 있다는 거야?”


내 말에는 어느 정도 가시가 돋쳐 있었다.


“문희야, 나 니 마음 알아.”


그녀는 짐짓 진중한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

“너 윤섭씨 좋아하지?”

“아, 아니야.”

“아니긴. 네가 물러설 수 없다면 이렇게 하자. 너도 솔직히 윤섭씨에게 말하기 어려운 모양인데 내가 니 마음 전해줄게. 그러면 되는 거지?”


보드를 못 탄다던 채련은 말을 마치자마자 날렵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못 탄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던 거야?’


“채련아!”


황급히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급했던 걸까? 급정거를 한 남자를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부딪치기 직전 피해보려는 생각에 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오히려 얼굴 정면으로 땅에 처박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 아파라.’


몸을 일으켰을 때는 급정거의 주인공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유유히 내려가고 있었다.


‘뭐, 저런 게 다 있대? 매너는 삶아 먹었나?’


아픔은 상당했지만 그대로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 이거 뭐지?’


내 하얀 보드 복이 코에서 흐르는 빨간 피로 물들여 가고 있었다.


“아, 아악!”


눈밭에도 나의 귀중한 철분들의 흔적이 있었고 손과 옷 모두 붉은 피범벅이 되어 갔다. 너무나 당황스러웠지만 그 상황에서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코를 쥐고 하늘을 보는 것뿐이었다. 내 마음과는 달리 너무나, 너무나 쾌청한 하늘이었다.


‘하늘이시여!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나의 이 원망이 저 하늘에 닿을까. 땅바닥에 앉아 코를 쥐고 있는 흉물스런 여자의 원망이 말이다.


“문희씨!”


이 상황에서 제일 듣고 싶지 않던 윤섭씨의 목소리였다. 뭐라고 말을 하면 좋아? 더는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은 머리를 너무 많이 썼어.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척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