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깝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코에선 여전히 피가 흐르는 것 같았지만 정신을 잃은 척 해야 하는 나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옆으로 누웠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차가운 눈에 접해있는 얼굴은 무척 시렸다.
“문희씨! 정신 차려봐요!”
그가 나의 머리를 들었다. 피가 또 다시 주르르 흐르는 듯했다.
‘나 정말 많이 다친 건가?’
걱정하는 사이 그의 가는 손가락이 내 뺨을 부여잡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
로맨틱한 영화를 볼 때 토요일 친구를 만나 카페에 갔는데 다정히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을 봤을 때 문득 그와의 따뜻한 접촉을 상상하고 했었다. 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하얗게 빛에 과다 노출된 얼굴이었지만 표정만은 따뜻했으며 내 얼굴을 쓰다듬는 그의 손도 뜨거웠다. 그의 손놀림은 느릿하되 음악에 맞춰 움직이듯 우아했다. 모차르트와 어울릴만한 움직임이다. 나의 상상은 그랬건만 현실은 참으로 냉혹한 것이었다.
“문희씨!”
짝짝.
그의 말에 내가 미동도 보이지 않자 그는 나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손이 무지 맵구나!’
그의 손도 너무 차가웠다.
꿈꾸던 순간이 악몽같이 바뀔 줄이야. 왜! 왜!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냐구!
그의 손이 내 주머니로 들어왔다. 무언가를 찾는 듯 했지만 내 주머니에는 컴팩트와 립스틱뿐이었다. 그가 찾는 것이 그것들 일 리가 없었다. 찾던 것을 찾지 못했는지 윤섭씨는 이내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휴지 있으신 분 있어요? 휴지요! 급하게 필요합니다!”
윤섭씨의 말에 사람들은 대꾸가 없었고, 더 먼 곳으로 휴지를 구하러 갔는지 그의 목소리도 멀어져 갔다. 그러나 곧 휴지를 건네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인지 윤섭씨가 나의 얼굴을 휴지로 나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지금 내 얼굴은 피범벅일 텐데. 그것까지야 참을 만 했지만 동그랗게 만 휴지가 코 속에 들어올 때는 정말 망신스러웠다. 코피가 흐르는데 이보다 더 급한 응급조치가 어디있겠냐마는 조그만 휴지는 내 자존심을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난 정신을 잃은 거야. 지금의 기억은 내 것이 아니라구. 난 모르는 거야. 모르는 거.’
하지만 얄팍한 자기 위안은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대강의 조치가 끝났는지 윤섭씨는 얼굴을 닦아내던 손을 멈추고 또 나의 얼굴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슬며시 정신이 돌아온 척 할까?’
내 머리 속 세포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된다, 안된다. 5살 때부터 유치원에 다닌 것을 시작으로 총 18년간을 비싼 수업료를 내며 교육을 받았건만 이런 것은 배운 기억이 없다.
생각하는 사이 그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듯 했다.
‘뭘 하는 거지?’
내 팔을 잡는가 싶더니 순간 내 몸이 붕 뜨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날 엎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 옷 좀 여기 덮어주세요.”
옷도 언제 벗었는지 그의 옷이 나의 등에 덮여왔다.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 건넨 인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인사를 마친 윤섭씨는 뛰기 시작했다. 꽤 빠른 속도였다. 처음 업혔을 때도 따뜻했지만 달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몸이 열을 내뿜어 내 몸까지 전해져왔다. 잠시 망설이다 슬며시 눈을 떴다. 내가! 내가 그의 뜨거운 등에 업혀 항상 그리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스키장을 누비고 있었다. 낭만적인 풍경인 아니었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이 사람 날 업고 어딜 가려는 거지? 병원? 이러다 일이 커지겠는 걸. 지금 정신이 든 척을 해야겠어.’
“저, 저기여. 윤섭씨!”
그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문희씨! 정신 들었어요?”
“예.”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저 내려주세요.”
“아직 안돼요. 저 밑에 가서 좀 따뜻한 곳에서 내려줄게요.”
그가 또 달리기 시작했다. 그럼 조금 더 있어볼까, 하다 난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그의 발이 신발을 벗은 맨발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빨리 뛰더라니.
“윤섭씨! 맨발이잖아요. 저 내려줘요. 빨리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그러다 동상이라도 걸리면요.”
“견딜만해요. 우선 문희씨 따뜻한 곳으로 가는 것이 급해요.”
“내려달라니까요!”
내려달라는 말을 무시한 채 그는 계속 달리기만 했다.
“내려주세요.”
“안돼요. 계속 말하시면 더 빨리 뛸 겁니다.”
‘똑똑하게 생겼는데 왜 이리 바보 같은 거야!’
내 마음은 온통 윤섭씨의 염려로 가득찼다.
‘정말 바보다, 이 남자! 바보야, 바보!’
의무실이라도 들리자는 말을 듣지 않고 나는 방으로 데려다 달라고 우겼다. 다른 사람들과 대면하는 것도 싫었고 우선 빨리 씻고 싶어서였다.
방안은 참 따뜻했다. 윤섭씨는 힘이 들었는지 들어오자마자 거실에 주저앉았다.
“저, 화장실 좀.”
나는 얼굴을 가린 채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본 내 몰골은 정말 가관이었다. 피로 물든 휴지를 코에 꽂은 채 얼굴과 손 모두 피범벅이었던 것이다. 따뜻한 물을 틀어 손과 얼굴을 씻어냈다. 다행히 다른 곳까지 피가 묻어있지는 않았다. 씻는 동안 그도 씽크대에서 손을 씻는 소리가 들렸다. 세수를 하는 동안 마음은 밖의 소리를 주시하며 그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대강 씻고 나왔을 때 윤섭씨는 방에 이불을 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출혈이 있으시니 몸이 추울 거예요. 몸을 녹이기엔 침대보다 바닥이 좋을 것 같더라구요. 이쪽에서 몸을 좀 녹이세요.”
“감사해요. 먼저 옷부터 갈아입고 싶은데.”
“아, 예. 그러세요. 저는 나가있겠습니다.”
그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나타났다. 서른이 다 된 남자가 옷 갈아입는 다는 말에 뭘 그리 놀라는지. 그런 그가 너무 귀여웠다.
“저, 다 됐어요.”
윤섭씨가 다시 방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엔 어색함과 민망함이 섞여 있었다.
‘후후.’
“문희씨, 빨리 누우세요.”
“예.”
염치없이 그의 호의를 받았다. 사실 아파서라기보단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가 누워있는 내 옆으로 와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네요. 처음 만날 날부터 놀래키시더니 오늘도 크게 놀랐습니다.”
“예? 처음 만난 날이요?”
“아닙니다. 편히 쉬세요.”
“윤섭씨 발은 괜찮아요?”
“괜찮아요. 걱정 말고 쉬세요.”
“저 채련이가 걱정하겠어요. 우리 둘이 없어져 버려서요.”
“아, 맞다. 채련씨. 저 채련씨 데리고 오겠습니다. 보드랑 다른 장비들도 가져와야겠군요.”
이 남자 정말 잊고 있었던 걸 생각해내는 듯해 보였다. 윤섭씨가 나가는 것을 보려고 일어났다. 그는 만류했지만 나가는 모습은 꼭 보고 싶어서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문이 곧 닫혔다. 다녀오겠다. 어딜 가든 다시 내 곁으로 오겠다. 참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와 매일의 헤어짐의 인사가 그러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남편을 출근시키는 아내의 기분이 들어 혼자 웃음을 지어 보았다.
채련이 온 후에도 나는 실제로 몸이 아픈 듯하여 한 시간 가량 누워 있었다.
“희야! 배고프다. 아직 많이 아프니?”
거실에서 윤섭씨와 재잘대던 채련은 정말 배가 고픈지 내게 와 사근하게 굴었다.
“나도 배고프다. 윤섭씨랑 가서 장 좀 봐와. 요리는 내가 할게.”
“그래? 알았어.”
나도 몸을 추스르고 거실로 나갔다. 그의 표정엔 염려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우리 장보러 가요. 문희가 요리해주기로 했어요.”
“그러죠. 저도 시장하던 참이었거든요.”
두 사람이 나간 후에 준비해온 조미료와 음식 재료들을 가방에서 꺼내고, 냄비와 그릇들을 꺼내 닦았다. 오기 전부터 요리로 점수를 벌어보겠다는 계획을 세워 나름대로 준비한 것들이 있었다. 그를 위한 식사 준비라고 생각하니 그릇을 닦는 것도 하나에도 정성이 담기게 되었다.
잠시 후 돌아온 윤섭씨 양손엔 배부른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다.
“뭘 그리 많이 사셨어요? 네 명이 간단히 저녁 하는 건데.”
“저, 그게. 저희 형이 온대요. 제가 여기 온다는 말을 듣고 당일 코스로 야간 스키를 타고 가겠다고 하네요. 오면 불편해 할 거라고 해도 성격이 워낙 혼자 편한 스타일이라. 밥숟가락만 두 개 놓으면 된다고 하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
“형님 친구 분도 오시나봐요?”
“예. 형과 형 친구 둘이에요. 용준이도 다 아는 형들인데.”
“괜찮아요. 근데 걱정이네요. 차릴 것이 없어요.”
“그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든 잘 먹는 사람들이니까요.”
“예.”
채련이도 별로 상관없다는 식이라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도 별로 까다롭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당일 여행이라니까 기껏해야 몇 시간만 보면 되겠지, 싶었던 것이다.
“문희야! 윤섭씨 형 한의사라더라.”
언제 직업 조사를 마친 것인지 채련이 열심히 찌개를 끓이고 있는 내 곁에 와 속삭였다.
“그래?”
“윤섭씨 집안이 좋네. 그것까지는 기대 안했는데.”
“부모님이 정말 대단하시네. 아들 둘 모두 잘 키우셨으니. 물론 본인들이 잘한 거지만.”
“잘 보이고 싶은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남자들치고 너 싫다고 할 사람 있니?”
“너도 그렇게 생각해? 고맙다, 친구!”
내가 주방에서 혼자 고생하는 동안 채련이는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화장을 고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윤섭씨 가족과의 대면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거라 이거지. 무서운 기집애. 이번에는 작전이 다르니 누가 이기나 보자구!
딩동!
“형이 왔나 봐요.”
막상 식구들을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다.
“형! 들어와!”
“안녕하세요? 초면에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난 문을 열고 들어온 윤섭씨의 형을 보고는 너무나 놀라 인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형과 윤섭씨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말랑말랑 러브송 < 06 >
6
“문희씨!”
아주 가깝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코에선 여전히 피가 흐르는 것 같았지만 정신을 잃은 척 해야 하는 나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옆으로 누웠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차가운 눈에 접해있는 얼굴은 무척 시렸다.
“문희씨! 정신 차려봐요!”
그가 나의 머리를 들었다. 피가 또 다시 주르르 흐르는 듯했다.
‘나 정말 많이 다친 건가?’
걱정하는 사이 그의 가는 손가락이 내 뺨을 부여잡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
로맨틱한 영화를 볼 때 토요일 친구를 만나 카페에 갔는데 다정히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을 봤을 때 문득 그와의 따뜻한 접촉을 상상하고 했었다. 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하얗게 빛에 과다 노출된 얼굴이었지만 표정만은 따뜻했으며 내 얼굴을 쓰다듬는 그의 손도 뜨거웠다. 그의 손놀림은 느릿하되 음악에 맞춰 움직이듯 우아했다. 모차르트와 어울릴만한 움직임이다. 나의 상상은 그랬건만 현실은 참으로 냉혹한 것이었다.
“문희씨!”
짝짝.
그의 말에 내가 미동도 보이지 않자 그는 나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손이 무지 맵구나!’
그의 손도 너무 차가웠다.
꿈꾸던 순간이 악몽같이 바뀔 줄이야. 왜! 왜!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냐구!
그의 손이 내 주머니로 들어왔다. 무언가를 찾는 듯 했지만 내 주머니에는 컴팩트와 립스틱뿐이었다. 그가 찾는 것이 그것들 일 리가 없었다. 찾던 것을 찾지 못했는지 윤섭씨는 이내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휴지 있으신 분 있어요? 휴지요! 급하게 필요합니다!”
윤섭씨의 말에 사람들은 대꾸가 없었고, 더 먼 곳으로 휴지를 구하러 갔는지 그의 목소리도 멀어져 갔다. 그러나 곧 휴지를 건네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인지 윤섭씨가 나의 얼굴을 휴지로 나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지금 내 얼굴은 피범벅일 텐데. 그것까지야 참을 만 했지만 동그랗게 만 휴지가 코 속에 들어올 때는 정말 망신스러웠다. 코피가 흐르는데 이보다 더 급한 응급조치가 어디있겠냐마는 조그만 휴지는 내 자존심을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난 정신을 잃은 거야. 지금의 기억은 내 것이 아니라구. 난 모르는 거야. 모르는 거.’
하지만 얄팍한 자기 위안은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대강의 조치가 끝났는지 윤섭씨는 얼굴을 닦아내던 손을 멈추고 또 나의 얼굴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슬며시 정신이 돌아온 척 할까?’
내 머리 속 세포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된다, 안된다. 5살 때부터 유치원에 다닌 것을 시작으로 총 18년간을 비싼 수업료를 내며 교육을 받았건만 이런 것은 배운 기억이 없다.
생각하는 사이 그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듯 했다.
‘뭘 하는 거지?’
내 팔을 잡는가 싶더니 순간 내 몸이 붕 뜨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날 엎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 옷 좀 여기 덮어주세요.”
옷도 언제 벗었는지 그의 옷이 나의 등에 덮여왔다.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 건넨 인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인사를 마친 윤섭씨는 뛰기 시작했다. 꽤 빠른 속도였다. 처음 업혔을 때도 따뜻했지만 달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몸이 열을 내뿜어 내 몸까지 전해져왔다. 잠시 망설이다 슬며시 눈을 떴다. 내가! 내가 그의 뜨거운 등에 업혀 항상 그리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스키장을 누비고 있었다. 낭만적인 풍경인 아니었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이 사람 날 업고 어딜 가려는 거지? 병원? 이러다 일이 커지겠는 걸. 지금 정신이 든 척을 해야겠어.’
“저, 저기여. 윤섭씨!”
그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문희씨! 정신 들었어요?”
“예.”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저 내려주세요.”
“아직 안돼요. 저 밑에 가서 좀 따뜻한 곳에서 내려줄게요.”
그가 또 달리기 시작했다. 그럼 조금 더 있어볼까, 하다 난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그의 발이 신발을 벗은 맨발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빨리 뛰더라니.
“윤섭씨! 맨발이잖아요. 저 내려줘요. 빨리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그러다 동상이라도 걸리면요.”
“견딜만해요. 우선 문희씨 따뜻한 곳으로 가는 것이 급해요.”
“내려달라니까요!”
내려달라는 말을 무시한 채 그는 계속 달리기만 했다.
“내려주세요.”
“안돼요. 계속 말하시면 더 빨리 뛸 겁니다.”
‘똑똑하게 생겼는데 왜 이리 바보 같은 거야!’
내 마음은 온통 윤섭씨의 염려로 가득찼다.
‘정말 바보다, 이 남자! 바보야, 바보!’
의무실이라도 들리자는 말을 듣지 않고 나는 방으로 데려다 달라고 우겼다. 다른 사람들과 대면하는 것도 싫었고 우선 빨리 씻고 싶어서였다.
방안은 참 따뜻했다. 윤섭씨는 힘이 들었는지 들어오자마자 거실에 주저앉았다.
“저, 화장실 좀.”
나는 얼굴을 가린 채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본 내 몰골은 정말 가관이었다. 피로 물든 휴지를 코에 꽂은 채 얼굴과 손 모두 피범벅이었던 것이다. 따뜻한 물을 틀어 손과 얼굴을 씻어냈다. 다행히 다른 곳까지 피가 묻어있지는 않았다. 씻는 동안 그도 씽크대에서 손을 씻는 소리가 들렸다. 세수를 하는 동안 마음은 밖의 소리를 주시하며 그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대강 씻고 나왔을 때 윤섭씨는 방에 이불을 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출혈이 있으시니 몸이 추울 거예요. 몸을 녹이기엔 침대보다 바닥이 좋을 것 같더라구요. 이쪽에서 몸을 좀 녹이세요.”
“감사해요. 먼저 옷부터 갈아입고 싶은데.”
“아, 예. 그러세요. 저는 나가있겠습니다.”
그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나타났다. 서른이 다 된 남자가 옷 갈아입는 다는 말에 뭘 그리 놀라는지. 그런 그가 너무 귀여웠다.
“저, 다 됐어요.”
윤섭씨가 다시 방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엔 어색함과 민망함이 섞여 있었다.
‘후후.’
“문희씨, 빨리 누우세요.”
“예.”
염치없이 그의 호의를 받았다. 사실 아파서라기보단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가 누워있는 내 옆으로 와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네요. 처음 만날 날부터 놀래키시더니 오늘도 크게 놀랐습니다.”
“예? 처음 만난 날이요?”
“아닙니다. 편히 쉬세요.”
“윤섭씨 발은 괜찮아요?”
“괜찮아요. 걱정 말고 쉬세요.”
“저 채련이가 걱정하겠어요. 우리 둘이 없어져 버려서요.”
“아, 맞다. 채련씨. 저 채련씨 데리고 오겠습니다. 보드랑 다른 장비들도 가져와야겠군요.”
이 남자 정말 잊고 있었던 걸 생각해내는 듯해 보였다. 윤섭씨가 나가는 것을 보려고 일어났다. 그는 만류했지만 나가는 모습은 꼭 보고 싶어서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문이 곧 닫혔다. 다녀오겠다. 어딜 가든 다시 내 곁으로 오겠다. 참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와 매일의 헤어짐의 인사가 그러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남편을 출근시키는 아내의 기분이 들어 혼자 웃음을 지어 보았다.
채련이 온 후에도 나는 실제로 몸이 아픈 듯하여 한 시간 가량 누워 있었다.
“희야! 배고프다. 아직 많이 아프니?”
거실에서 윤섭씨와 재잘대던 채련은 정말 배가 고픈지 내게 와 사근하게 굴었다.
“나도 배고프다. 윤섭씨랑 가서 장 좀 봐와. 요리는 내가 할게.”
“그래? 알았어.”
나도 몸을 추스르고 거실로 나갔다. 그의 표정엔 염려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우리 장보러 가요. 문희가 요리해주기로 했어요.”
“그러죠. 저도 시장하던 참이었거든요.”
두 사람이 나간 후에 준비해온 조미료와 음식 재료들을 가방에서 꺼내고, 냄비와 그릇들을 꺼내 닦았다. 오기 전부터 요리로 점수를 벌어보겠다는 계획을 세워 나름대로 준비한 것들이 있었다. 그를 위한 식사 준비라고 생각하니 그릇을 닦는 것도 하나에도 정성이 담기게 되었다.
잠시 후 돌아온 윤섭씨 양손엔 배부른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다.
“뭘 그리 많이 사셨어요? 네 명이 간단히 저녁 하는 건데.”
“저, 그게. 저희 형이 온대요. 제가 여기 온다는 말을 듣고 당일 코스로 야간 스키를 타고 가겠다고 하네요. 오면 불편해 할 거라고 해도 성격이 워낙 혼자 편한 스타일이라. 밥숟가락만 두 개 놓으면 된다고 하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
“형님 친구 분도 오시나봐요?”
“예. 형과 형 친구 둘이에요. 용준이도 다 아는 형들인데.”
“괜찮아요. 근데 걱정이네요. 차릴 것이 없어요.”
“그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든 잘 먹는 사람들이니까요.”
“예.”
채련이도 별로 상관없다는 식이라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도 별로 까다롭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당일 여행이라니까 기껏해야 몇 시간만 보면 되겠지, 싶었던 것이다.
“문희야! 윤섭씨 형 한의사라더라.”
언제 직업 조사를 마친 것인지 채련이 열심히 찌개를 끓이고 있는 내 곁에 와 속삭였다.
“그래?”
“윤섭씨 집안이 좋네. 그것까지는 기대 안했는데.”
“부모님이 정말 대단하시네. 아들 둘 모두 잘 키우셨으니. 물론 본인들이 잘한 거지만.”
“잘 보이고 싶은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남자들치고 너 싫다고 할 사람 있니?”
“너도 그렇게 생각해? 고맙다, 친구!”
내가 주방에서 혼자 고생하는 동안 채련이는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화장을 고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윤섭씨 가족과의 대면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거라 이거지. 무서운 기집애. 이번에는 작전이 다르니 누가 이기나 보자구!
딩동!
“형이 왔나 봐요.”
막상 식구들을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다.
“형! 들어와!”
“안녕하세요? 초면에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난 문을 열고 들어온 윤섭씨의 형을 보고는 너무나 놀라 인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형과 윤섭씨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