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러브송 < 07 >

나비2005.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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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하나, 둘, 셋, ······.

그리고 잠시 후 나는 하마터면 ‘아악!’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분명, 분명히 그였다. 스키장에서 내 남자에 대한 자연스런 호기심과 이끌림을 불구로 만든 남자. 그, [윤섭]은 윤섭씨의 형이었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 둘은 무척 닮았지만 한 편은 진짜고, 다른 한편은 교묘한 가짜인 것처럼 틀린 구석이 있었다. 그 둘이 쌍둥이였더라면 어쩌면 큰 위로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불운하게 그들은 그저 닮은 사람들이었을 뿐이고, 더욱 불운하게도 난 그들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난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도 못하고,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건 그거 실생활에서는 약간의 불편함이었고, 무시하고 살아도 되는 단점이었는데 오늘 같은 결과를 빚어내다니. 미리 예측을 했더라면 비슷한 사람들의 사진을 모아놓고 매일 밤 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리라.


“안녕하세요? 채련이라고 해요.”

“오호, 미인이신데요. 반갑습니다. 윤섭이 형, 이윤태입니다.”


그 때는 분명 윤섭이라고 했는데 3년 동안 이름이 바뀌어 있다. 나는 인사를 나눌 경황도 없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정겨운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윤태입니다.”


이 남자 얄밉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물론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지금 악수라니.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어, 근데 어디서 뵌 분 같아요.”

“어, 나도. 아! 스키장 아가씨? 예전에 우리 스키장에서 봤죠?”


싱글거리는 사내는 3년 전 윤섭씨 친구의 무리에 있던 남자 같았다. 이로서 모든 것은 명확해 진 거다. 이윤태는 이윤섭임을 사칭하고 친구들과 함께 우리를 헌팅했던 것이다.


“예. 그런 것 같네요.”


다소 화난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무도 눈치를 채고 있지는 못했다.


“어, 진짜네. 넌 여자 얼굴은 기가 막히게 기억 한다니까.”

“타고난 걸 어쩌냐? 저는 차치현입니다.”

“예. 치현씨. 그 때는 치현씨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치현이라는 남자가 내민 손은 잡았지만 내 목소리가 누그러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죠. 그 때는 다른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하하하.”

“여자를 헌팅할 때는 이름까지 바꾸시나봐요?”

“가시 돋친 말씀을 하시네요.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뭐 이름이 중요합니까? 다시 만난 인연이 중요한 것이죠. 하하하.”

“용준씨 제수씨 인가요? 용준이 스타일인데. 그 자식이 가시 돋친 여자를 보면 환장을 하잖아.”


윤태씨가 말했다.


“맞아. 좀 그런 게 있지.”

“치현아, 그 때 왜 우리가 도망가듯 갔더라?”

“왜, 봉이 제수씨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랬잖아. 하마터면 들킬 뻔 했지.”

“맞아, 하하. 봉이 제수씨 무섭잖아.”

“지금도 그렇지. 봉이가 불쌍해. 난 그런 여자랑은 못 살 것 같아. 하하.”


두 남자는 자신들이 내 인생에 끼어든 것도 모른 채 남의 여자 흉을 보고 있었다. 이런 남자를 3년 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다니 뒷골이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문 앞에서 그러지 말고 들어오세요.”


남자들에겐 늘 상냥스런 채련은 자신이 집주인 양 사람들을 안내했다.


“형, 들어와!”

“밥은 차려 놓은 거냐?”


두 사람은 염치없이 들어오자마자 밥타령이었다.


“밥이 먹기야 쉽지만 차리기가 쉬운가? 지금 문희씨가 준비중이었어. 형들이 생각보다 빨리 왔네.”

“문희씨? 용준이 제수씨?”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제수씨래. 문희씨 불편하겠다.”

“용준이가 작업 들어갔다하면 100%지 뭐. 문희씨! 용준이 어때요? 마음에 들죠?”

“하하. 놀리지 말아라. 니 밥에 침 뱉는데.”


계속 하하 거리는 치현씨의 말에는 별 악의가 없어 참을 만 했지만 윤태씨는 말은 마치 이 곳에 남자들끼리 있는 것처럼 사람에 대한 배려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어서 내가 그릇을 다루는 소리는 거칠어져 갔다.

달그락, 달그락.


‘참자! 그래도 윤섭씨 형인데.’


마음을 억누르다가 내가 왜,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섭씨는 이제 내가 찾았던 그 사람이 아닌 거다. 그리워했던, 꿈속에서 내게 따스한 손길을 주었던 그는 저렇듯 안하무인인 인간이고 더 이상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며 내가 왜, 누구를 위해서 참아야한단 말인가? 윤섭씨도 꼴도 보기 싫은 저 남자의 동생일 뿐인데.

몸을 확 돌려 그들을 보았다. 손에는 숟가락을 든 채였다. 네 사람은 편하게도 앉아 있었다. 치현씨는 연신 하하 거리고 있고, 다른 이들도 윤태씨의 농담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제수씨! 밥 아직 멀었습니까? 배고픈데.”


또 염치없는 윤태씨.


“그래, 문희야. 나도 배고파. 아까부터 부지런히 하더니 아직 멀었어?”


친구라는 기집애까지 한 무리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여기 니들 밥해주러 온 줄 알아?


“왜들 재촉해? 그러기에 내가 오지 말라니까. 초면인데 너무들 하네. 형들, 우리 나가자. 내가 밥살게. 간단히 먹고 스키타고 얼른 가.”


그래, 내가 윤섭씨 때문에 참는다. 정상인이 한명이라도 있으니 밥은 줘야지. 이왕 해놓은 밥이기도 하고.


“너 우리 빨리 보내고 채련씨랑 같이 있고 싶은 거지? 속 보인다. 밥만 먹고 빨리 갈게. 그나저나 밥이 빨리 와야 빨리 먹지. 제수씨, 아직 멀었어요?”

“가요. 간다구요. 지금 밥 푸고 있어요.”


니들 다 나가, 하고 싶었던 나는 자신이 열심히 밥을 푸고 있음으로 밝혀야 했다. 그래. 밥만 빨리 먹여 보내자. 화내기보단 그 편이 낫지. 이미 참을 수 있는 수위는 넘고 있었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한 번 더 참자했다.


채련이가 숟가락 놓는 것만 도와줌으로서 상차림은 끝이 났다.


“스키장에서 잔치상을 받아보네. 문희씨 특기는 요리에요? 안됐네요. 용준이가 아직 안와서.”


윤태씨가 밥을 먹으며 말했다.


“예. 아쉬워요. 용준씨 드리려고 준비한 건데 정작 본인이 없으니.”


당신들을 위한 밥상은 아니라는 뜻의 적절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윤섭씨의 표정이 눈에 밟혔다. 희미하지만 분명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희야! 찌게가 너무 짜다. 물 부어서 다시 끓여야겠어.”

“짜?”

“아니요. 괜찮은데요.”

“예의상 말씀 하실 것 없어요. 짠데요. 뭘. 희야! 이것도 다시 끓여다 줘, 응?”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고 하는데도 채련이는 한사코 다시 해오라고 시켰다. 열심히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뒤로 하고 찌게를 들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진짜 침을 뱉어버려?’


어떤 행동을 하지 않고는 분이 삭힐 것 같지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 고작 물을 틀어 손을 빡빡 씻는 일뿐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봐라. 내가 가만있나.’


다행히 이후에 음식 투정을 하는 이들은 없었지만 음식을 너무 맛있게 한 것이 잘못이었다. 모두들 맛있다며 더 먹겠다고 난리였고 결국은 고기라도 더 구워야 할 판이었다.


“제가 할께요. 문희씨는 그만 쉬어요.”

“괜찮아요.”


역시 내 생각을 해주는 것은 윤섭씨뿐이었다.


“야! 윤섭아! 우리 술 한잔 해야지. 고기는 제수씨가 굽게 냅두고 잔이나 가져와!”


이건 마치 집들이 풍경이었다. 윤섭씨와 채련은 신혼부부고. 난 도우미 아줌마. 졸지에 부엌떼기가 되어서는 내 몸은 온통 삼겹살 기름 냄새로 쩔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나도 그 분위기에 익숙해진 건지 용준씨의 제수씨라는 말에 최면이 걸린 건지 뭐 더 필요한 건 없나요, 하며 주방과 거실을 오가고 있었다.

화가 누그러진 데는 몸이 좋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아까 넘어진 것의 여파인지 온 몸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빨리 하고 쉬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이제, 됐나요? 필요한 건 더 없으세요?”

“예. 이젠 살 것 같네요.”


재미있게 노는 사람들의 흥을 깰까봐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그제야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는데 구석구석 저려오는 아픔과 방밖의 즐거운 사람들의 소리가 섞이자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우나?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보니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손에서 나는 각종 음식 냄새에 더욱 서러워 졌다. 처음부터 생각해봐도 이건 뭐가 잘못된 여행이지 싶다.


“희야! 너 왜 그래? 졸려?”


채련은 아픔이라는 것은 모르는지 누워있는 내가 그저 졸린 것으로 보였나 보다. 아파서 그래.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고.


“아니. 왜?”

“졸린 것도 아닌데 왜 이러고 있어? 분위기 깨게. 너 데리고 나오래. 너 삐진 것 같다고 기분 풀어준다고 하더라. 미안해하던데?”

“누가? 윤태씨?”

“그래. 너 화난 거야? 사람 좋기만 하던데 왜 이리 민감해? 그저 농담을 하는 것 가지고.”

“누가 화났대? 그것도 윤태씨가 그러든?”

“너 윤태씨 좋아하니? 왜 이리 예민하게 굴어? 별 말도 아닌데.”

“알았다. 나가면 되잖아. 괜한 오해 사는 것 보단 아파도 나가 있는 게 낫겠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는 나를 채련은 황당하다는 듯 보았다. 그래. 잠시 즐거운 척 있자. 채련이 기집애 또 한 소리 하기 전에.

나이가 먹어 가면 먹어갈 수록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게 된다. 순수하게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적어지는 것이다. 현재 나는 함께 여행 온 무리의 한 사람일뿐 내 이름은 찾을 수가 없다.


“나오셨네. 화 나셨어요?”


윤태씨 얼굴에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했을 수도 있어. 이 사람들은 그 과거의 감정을 알 길이 없었으니까.


“아니요. 화난 것 아니에요. 포카 치시던 중인가 봐요?”

“예. 야간 스키까지 시간이 좀 남네요. 그 때까지 맥주 마시며 카드나 치려구요. 그래서 그런데 저희 안주 좀 부탁드릴게요.”


이 남자 내 끝을 보고 싶은 모양이다.


“채련이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절 부르신 거예요?”

“야, 나 요리 못하잖아. 미안하다. 대신 나 아까 먹거리 살 때 돈 냈어. 넌 돈도 안가지고 왔잖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쏟아지는 것 같았다. 여행 오면서 돈도 없이 남자에게 다 얻어먹으러 온 여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벗겨먹으러 왔군. 어쩐지 열심히 밥을 하더라니, 하는 듯한.


“그건 내가 실수로 지갑을 두고 온 거라고 했잖아!”

“내가 뭐라고 했니? 나 요리 못하니까 네가 좀 해줘라. 응?”

“제가 할게요. 문희씨는 들어가 쉬어요.”


채련의 말에 윤태씨가 치사하다는 듯 일어섰다.


“됐어요. 제가 하면 되잖아요.”

“문희씨, 죄송해요. 제가 부탁 좀 드릴게요. 형들 곧 갈 거예요.”


이젠 윤섭씨까지.


“알았어요. 금방 만들어 내올게요.”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이젠 남은 음식 재료들도 없었다. 차라리 말 안하고 내 돈으로 사오면 좋겠는데 내겐 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은 고기를 다시 굽기로 했다. 이제 다시 고기는 굽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기름 냄새가 또 나를 감쌌다. 정말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삼겹살에서 나오는 연기도 싫었다. 자꾸 눈에 들어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울지 말자. 여기서 울면 완전히 바보 되는 거잖아.’


가까스로 눈물을 참으며 고기를 구웠다. 그 때 기름이 튀어 얼굴이 닿았다.


“야아.”


소리를 냈건만 아무도 괜찮냐고 물어오는 이가 없었다. 작은 기름방울이 결국 내 울음을 터지게 하고 말았다. 하지만 소리 없이 울고 있어 누구도 눈치를 채지는 못했다.


딩동!


그 때 벨이 울렸다.


“문희씨! 용준이 왔나봐요. 문 좀 열어 줄래요?”


사람들은 게임에 정신이 팔려 아무도 나가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몸 구석까지 파고드는 듯 했다.


“문희씨!”

“······.”

“문희씨! 지금 울어요?”


이상하게도 용준씨를 보자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왜 울어요? 왜?”


그의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급기야 나는 용준씨를 붙들고 펑펑 울고 말았다.


“어, 엉. 엉.”


서글픈 여인의 울음소리가 객실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