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차고 고집세고 발랄한 꼬마였지. 틈만 나면 내 머리에 꿀밤 세례를 퍼붓고 달아나며 웃어대던 사랑스러운 공주님..."
설무랑의 어조가 차분했다. 소예는 창피한 마음도 잊고 그를 쳐다보았는데, 설무랑은 웃으며 한 쪽 눈을 찡긋했다.
" 300년 전에 말이야..."
하지만 소예는 그 때까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성인식을 위해 떠나던 날, 거친 모습으로 제황성에 들이닥친 짐승같은 느낌의 설무랑이 달갑지 않은 상태였다. 어릴 적 기억속의 그는 책을 좋아하고, 동물과 식물에 대해 아는 것이 많던 온순한 왕자였다. 하지만 300년의 시간이 지난 뒤, 기억에서도 잊혀질 즈음에 피의 냄새를 몰고 나타난 그 사건으로 소예는 설무랑이 낯선 타인일 뿐이었다.
" 기억나? 대뜸 사냥을 가자고 졸라 따라나섰더니, 그날 밤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을 땔감으로 다 써 버렸지. 잠에서 깨어나 그 상황을 보고 기가 막혀 얼마나 울었던지..아마 내 일생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이었을거야.하하.."
" 후후..."
소예는 자기도 모르게 설무랑을 따라 웃어버렸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웃음소리에 놀랐다.
300년 전 소예는 설무랑에게 분명히 악당이었다.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설무랑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괴롭히던 소예였다. 무작정 설무랑을 끌고 사냥을 떠나 길을 잃었던 과거의 한 도막이 그녀의 머릿 속에도 남아 있었다. 날이 저물어 숲에 덩그라니 남아 추위에 고생을 했던 시간이었다. 소예는 설무랑이 지쳐 잠들자 그가 가슴 속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책을 뺏어 땔감으로 다 써 버렸고 설무랑은 그 날 이후 오랜 시간을 토라져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은근히 마음이 약했던 소예는 몇날며칠 사과할 방도를 고민했고 마침내 자신의 활을 건네며 뜻대로 처리하라고 하며 사과를 청했다. 그리고 비로소 설무랑은 그녀를 용서해 준 사건이었다.
어쨌든 그 한 번의 무의식적인 웃음이 소예와 설무랑을 한 걸음 정도 가까이 다가서게 해 준 것은 사실이었다. 설무랑은 소예가 차마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과거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설무랑 역시 죽음을 통보받기전에는 관지나 비영, 제공처럼 둘도 없는 친구였다. 소예는 서서히 옛 기억이 깨어나면서 설무랑의 존재를 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덧 300년 간의 잊혀진 공백이 무색하리만치 둘은 가까워져있었다.
" 그런데....왜 네가 지금 여기 있는거지?"
갑자기 설무랑의 목소리가 원래의 차갑고도 냉랭한 어조로 바뀌었다.
" 뭐....?"
설무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걷히었다.
" 자기 삶의 첫번째가 천계인 자, 천계를 위해 수십번을 죽었다 깨어난 자..그런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 아니잖아. 너는 어릴 적부터 천계를 위해 고민하고 살았어. 누구보다 먼저 전장에서 뛰었지. 나는 네가 태자비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리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 말도 안되는 소리..집어치워!"
"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왜 다른 여자가 있는거냐고!"
설무랑이 소리쳤다. 소예는 강한 분노의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심장은 하염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음 속에서 수백번은 외치던 그 의문의 소리들을 설무랑이 대신 해 주고 있었다. 태자비의 자리가, 관지의 옆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설무랑이 외쳐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예는 동요해서는 안되었다. 누구에게도 그녀의 속마음을 보여서는 안되었다.
" 천계에 필요한 여자는 그런 여자다. 강하고 당당하며 천계를 위해 해 줄것이 있는 여자 말이야. 그런 여자가 천계의 가장 위에 서야하지."
" 가치없는 소리가 거슬리는군. 가겠어."
소예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설무랑은 그런 그녀의 등뒤에서 중얼거렸다.
" 단지 네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말 하는 것 뿐이야. 그리고.....만약 내가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면....?"
소예는 애써 냉정한 척 돌아섰지만 설무랑의 제안이 농담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선언이며 어떤 확신이 실린 말이었다. 그랬기에 소예는 오싹한 느낌을 받으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설무랑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법에 걸린 듯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소예는 다시 돌아서 설무랑의 눈을 바라보았다.
" 내가...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그걸...주겠다고?"
소예는 한 번 더 설무랑을 떠 보기 위해 말을 걸었다. 설무랑은 웃었지만 가벼운 모습이 아니었다. 소예는 설무랑의 미소 속에 담긴 무서운 힘과 자신감을 발견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소예는 미처 막아낼 틈도 없이 설무랑에게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빼앗겨 버렸다. 천계 최고의 여장군인 소예로써도 설무랑의 힘과 기습에 양팔과 입술을 빼앗긴 채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먼 테라스에서 둘을 지켜보던 제공은 그 장면을 끝으로 관람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돌아서 다시 연회장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제공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설무랑은 소예를 놓아주었다.
" 나도 이런 무뢰한은 아닌데 말이지."
소예는 얼어버린 채 넋을 빼고 설무랑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워낙 쇼를 기대하는 관중들이 많아서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을 뿐이야"
설무랑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제공은 설무랑과 소예의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며 테라스의 커튼을 헤치고 연회장으로 통하는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그는 복도의 맞은 편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초율을 발견했다.
" 자주 뵙습니다, 전하."
제공이 먼저 인사를 했다. 하지만 초율은 대답없이 몸을 움직여 그를 지나 출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버릴 뿐이었다. 이제 연회에 완전히 흥미가 사라진 그는 자신의 거처로 향하기 위해 제황성의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길게 이어진 계단의 중간에서 올라오던 설무랑과 내려가던 초율이 마주하게 되었다. 둘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 덕분에 볼거리가 많은 밤이었다."
의외로 초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내 수고를 인정해주니 고맙군 그래."
둘은 서로를 스쳐 다시 갈 길을 향했다. 두 사람은 조만간 촉룡산을 두고 분명한 거래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히이잉...푸르르르..."
손질이 제대로 된 백마(白馬) 한 마리가 허름한 객주(客宙) 앞에서 멈추어서자, 객주에 딸려있는 마굿간을 지키는 털보가 냉큼 달려왔다. 그는 눈치 빠르게 돈냄새를 맡고 굽신거리는 자세로 다가와 섰다.
말 주인은 우아하게 말 등에서 내리면서 털보에게 말고삐를 건네고는 그의 털많고 지저분한 손에 금화 두 닢을 떨어뜨려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횡재에 털보는 딸꾹질을 해 대며 귀족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이번에는 숨이 턱 막혀 켁켁 거리며 딸꾹질을 삼키는 꼴이 되었다. 난생 처음 보는 미인이 앞에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일지언정, 사람의 모습이 아닌 아름다움이었다.하지만, 털보의 상상은 말 주인이 입을 열자 끝을 맺고 말았다. 그의 목소리는 명백히 남성의 소리였다.
" 나의 애마(愛馬)일세. 다른 말들과 섞지 말고 홀로 두게나. 고삐를 거는대로 자네는 물론 그 누구도 접근하게 해서는 안돼. 그리고 아무 것도 먹이지 말게."
제공의 천마(天馬) 화류(花柳)는 주인이 우호적인 손길로 말고삐를 넘기자, 털보가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온순하게 털보의 손에 이끌려 따라갔다. 털보는 무지하여 그 말이 천마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마굿간에서 잔뼈가 굵은 터라 그 말의 범상치않음은 알 수 있어 한층 조심을 가했다. 격이 높은 말과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 주인, 볼을 몇 번이고 꼬집어 보게 하는 금화 두 닢의 횡재는 그의 평생 자랑거리가 되었다.
객주에 딸린 시끄럽고 지저분한 선술집 안으로 제공이 들어서자, 술에 취해 상스러운 야담과 욕설을 주고 받던 술꾼들은 일시에 이 아름다운 손님에게 혼을 빼앗긴 채 얼어붙었다. 그 다음 그들이 발견한 것은 그가 입고 있는 고급옷과 저절로 솟아나오는 기품과 그의 신분을 분명히 해 주는 선명한 보라색의 눈동자였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고 그 중 한명은 얼떨결에 동료들을 따라 일어섰다가 술에 못 이겨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탁자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버렸다.
제공은 급히 달려오느라 장소에 걸맞지 않은 차림새로 온 자신의 경솔함을 속으로 탓하며,
" 내가 흥을 망치는 객이 될 줄은 몰랐소. 사과하리다."
하지만, 천민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먼저 드는 이가 없었다.
" 하하..이런. 정녕 나를 내 쫓으려 하시오? 더 이상 미안케 하지 마시오."
다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전등불이 미약하게 미치는 구석에 홀로 앉아, 그 상황을 지켜보던 망토와 두건 차림의 손님이 나섰다.
초율(礎律) 제 43화
" 당차고 고집세고 발랄한 꼬마였지. 틈만 나면 내 머리에 꿀밤 세례를 퍼붓고 달아나며 웃어대던 사랑스러운 공주님..."
설무랑의 어조가 차분했다. 소예는 창피한 마음도 잊고 그를 쳐다보았는데, 설무랑은 웃으며 한 쪽 눈을 찡긋했다.
" 300년 전에 말이야..."
하지만 소예는 그 때까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성인식을 위해 떠나던 날, 거친 모습으로 제황성에 들이닥친 짐승같은 느낌의 설무랑이 달갑지 않은 상태였다. 어릴 적 기억속의 그는 책을 좋아하고, 동물과 식물에 대해 아는 것이 많던 온순한 왕자였다. 하지만 300년의 시간이 지난 뒤, 기억에서도 잊혀질 즈음에 피의 냄새를 몰고 나타난 그 사건으로 소예는 설무랑이 낯선 타인일 뿐이었다.
" 기억나? 대뜸 사냥을 가자고 졸라 따라나섰더니, 그날 밤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을 땔감으로 다 써 버렸지. 잠에서 깨어나 그 상황을 보고 기가 막혀 얼마나 울었던지..아마 내 일생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이었을거야.하하.."
" 후후..."
소예는 자기도 모르게 설무랑을 따라 웃어버렸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웃음소리에 놀랐다.
300년 전 소예는 설무랑에게 분명히 악당이었다.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설무랑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괴롭히던 소예였다. 무작정 설무랑을 끌고 사냥을 떠나 길을 잃었던 과거의 한 도막이 그녀의 머릿 속에도 남아 있었다. 날이 저물어 숲에 덩그라니 남아 추위에 고생을 했던 시간이었다. 소예는 설무랑이 지쳐 잠들자 그가 가슴 속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책을 뺏어 땔감으로 다 써 버렸고 설무랑은 그 날 이후 오랜 시간을 토라져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은근히 마음이 약했던 소예는 몇날며칠 사과할 방도를 고민했고 마침내 자신의 활을 건네며 뜻대로 처리하라고 하며 사과를 청했다. 그리고 비로소 설무랑은 그녀를 용서해 준 사건이었다.
어쨌든 그 한 번의 무의식적인 웃음이 소예와 설무랑을 한 걸음 정도 가까이 다가서게 해 준 것은 사실이었다. 설무랑은 소예가 차마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과거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설무랑 역시 죽음을 통보받기전에는 관지나 비영, 제공처럼 둘도 없는 친구였다. 소예는 서서히 옛 기억이 깨어나면서 설무랑의 존재를 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덧 300년 간의 잊혀진 공백이 무색하리만치 둘은 가까워져있었다.
" 그런데....왜 네가 지금 여기 있는거지?"
갑자기 설무랑의 목소리가 원래의 차갑고도 냉랭한 어조로 바뀌었다.
" 뭐....?"
설무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걷히었다.
" 자기 삶의 첫번째가 천계인 자, 천계를 위해 수십번을 죽었다 깨어난 자..그런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 아니잖아. 너는 어릴 적부터 천계를 위해 고민하고 살았어. 누구보다 먼저 전장에서 뛰었지. 나는 네가 태자비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리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 말도 안되는 소리..집어치워!"
"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왜 다른 여자가 있는거냐고!"
설무랑이 소리쳤다. 소예는 강한 분노의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심장은 하염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음 속에서 수백번은 외치던 그 의문의 소리들을 설무랑이 대신 해 주고 있었다. 태자비의 자리가, 관지의 옆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설무랑이 외쳐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예는 동요해서는 안되었다. 누구에게도 그녀의 속마음을 보여서는 안되었다.
" 천계에 필요한 여자는 그런 여자다. 강하고 당당하며 천계를 위해 해 줄것이 있는 여자 말이야. 그런 여자가 천계의 가장 위에 서야하지."
" 가치없는 소리가 거슬리는군. 가겠어."
소예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설무랑은 그런 그녀의 등뒤에서 중얼거렸다.
" 단지 네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말 하는 것 뿐이야. 그리고.....만약 내가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면....?"
소예는 애써 냉정한 척 돌아섰지만 설무랑의 제안이 농담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선언이며 어떤 확신이 실린 말이었다. 그랬기에 소예는 오싹한 느낌을 받으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설무랑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법에 걸린 듯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소예는 다시 돌아서 설무랑의 눈을 바라보았다.
" 내가...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그걸...주겠다고?"
소예는 한 번 더 설무랑을 떠 보기 위해 말을 걸었다. 설무랑은 웃었지만 가벼운 모습이 아니었다. 소예는 설무랑의 미소 속에 담긴 무서운 힘과 자신감을 발견했다.
" 태자비의 자리, 아니면 황비의 자리? 천제의 자리라도 상관은 없겠지....통째로 천계를 넘겨줄까?"
그는 기지개를 쭉 펴며 한 걸음 다가왔다.
" 아니면..이런 건 어때?"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소예는 미처 막아낼 틈도 없이 설무랑에게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빼앗겨 버렸다. 천계 최고의 여장군인 소예로써도 설무랑의 힘과 기습에 양팔과 입술을 빼앗긴 채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먼 테라스에서 둘을 지켜보던 제공은 그 장면을 끝으로 관람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돌아서 다시 연회장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제공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설무랑은 소예를 놓아주었다.
" 나도 이런 무뢰한은 아닌데 말이지."
소예는 얼어버린 채 넋을 빼고 설무랑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워낙 쇼를 기대하는 관중들이 많아서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을 뿐이야"
설무랑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제공은 설무랑과 소예의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며 테라스의 커튼을 헤치고 연회장으로 통하는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그는 복도의 맞은 편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초율을 발견했다.
" 자주 뵙습니다, 전하."
제공이 먼저 인사를 했다. 하지만 초율은 대답없이 몸을 움직여 그를 지나 출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버릴 뿐이었다. 이제 연회에 완전히 흥미가 사라진 그는 자신의 거처로 향하기 위해 제황성의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길게 이어진 계단의 중간에서 올라오던 설무랑과 내려가던 초율이 마주하게 되었다. 둘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 덕분에 볼거리가 많은 밤이었다."
의외로 초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내 수고를 인정해주니 고맙군 그래."
둘은 서로를 스쳐 다시 갈 길을 향했다. 두 사람은 조만간 촉룡산을 두고 분명한 거래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히이잉...푸르르르..."
손질이 제대로 된 백마(白馬) 한 마리가 허름한 객주(客宙) 앞에서 멈추어서자, 객주에 딸려있는 마굿간을 지키는 털보가 냉큼 달려왔다. 그는 눈치 빠르게 돈냄새를 맡고 굽신거리는 자세로 다가와 섰다.
말 주인은 우아하게 말 등에서 내리면서 털보에게 말고삐를 건네고는 그의 털많고 지저분한 손에 금화 두 닢을 떨어뜨려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횡재에 털보는 딸꾹질을 해 대며 귀족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이번에는 숨이 턱 막혀 켁켁 거리며 딸꾹질을 삼키는 꼴이 되었다. 난생 처음 보는 미인이 앞에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일지언정, 사람의 모습이 아닌 아름다움이었다.하지만, 털보의 상상은 말 주인이 입을 열자 끝을 맺고 말았다. 그의 목소리는 명백히 남성의 소리였다.
" 나의 애마(愛馬)일세. 다른 말들과 섞지 말고 홀로 두게나. 고삐를 거는대로 자네는 물론 그 누구도 접근하게 해서는 안돼. 그리고 아무 것도 먹이지 말게."
제공의 천마(天馬) 화류(花柳)는 주인이 우호적인 손길로 말고삐를 넘기자, 털보가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온순하게 털보의 손에 이끌려 따라갔다. 털보는 무지하여 그 말이 천마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마굿간에서 잔뼈가 굵은 터라 그 말의 범상치않음은 알 수 있어 한층 조심을 가했다. 격이 높은 말과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 주인, 볼을 몇 번이고 꼬집어 보게 하는 금화 두 닢의 횡재는 그의 평생 자랑거리가 되었다.
객주에 딸린 시끄럽고 지저분한 선술집 안으로 제공이 들어서자, 술에 취해 상스러운 야담과 욕설을 주고 받던 술꾼들은 일시에 이 아름다운 손님에게 혼을 빼앗긴 채 얼어붙었다. 그 다음 그들이 발견한 것은 그가 입고 있는 고급옷과 저절로 솟아나오는 기품과 그의 신분을 분명히 해 주는 선명한 보라색의 눈동자였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고 그 중 한명은 얼떨결에 동료들을 따라 일어섰다가 술에 못 이겨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탁자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버렸다.
제공은 급히 달려오느라 장소에 걸맞지 않은 차림새로 온 자신의 경솔함을 속으로 탓하며,
" 내가 흥을 망치는 객이 될 줄은 몰랐소. 사과하리다."
하지만, 천민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먼저 드는 이가 없었다.
" 하하..이런. 정녕 나를 내 쫓으려 하시오? 더 이상 미안케 하지 마시오."
다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전등불이 미약하게 미치는 구석에 홀로 앉아, 그 상황을 지켜보던 망토와 두건 차림의 손님이 나섰다.
" 다들 개의치 마시고 즐기라는 말씀입니다. 이곳에선 저 분이 불청객이지 않습니까? 불편해마시고 편히들 즐기세요.괜찮습니다."
제공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고 반가운 듯 웃으며 다가가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제서야 제공의 뜻을 이해한 천민들은 제공이 소탈한 목소리로 싸구려 술을 시켜 마시는 것을 보고 원래의 분위기로 차차 돌아가기 시작했다.
" 하하..아직 천민들과 친해지려면 한참 멀었나보군. 그들의 언어부터 배워야할 모양이야."
제공은 자신의 격이 높은 말을 천민들이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깨닫고 허탈하게 웃었다.
제공과 망토를 쓴 이는 주위가 충분히 시끄러워져 그들의 대화가 자연스레 묻힐 때까지 술을 주고 받으며 기다렸다.
" 늦은 시간 먼 길 오시는 수고를 하게 해 죄송합니다."
망토의 그가 먼저 분위기를 파악하고 말을 꺼냈다. 그의 망토두건 사이로 긴 금발이 흘러나와 있었다.
" 아름다운 여인이 불러준다면, 달 아래서건 태양 아래서건 사양 못할 즐거운 영광이지."
" 여전하시군요."
그녀는 웃으며 두건을 벗어넘겼다. 애써 사람들의 눈을 피해 둘의 정체를 아는 이가 없는 천민 부락으로 장소를 정한 그녀는 소예의 동생이자, 북방성 다문천왕의 둘째 딸인 소진이었다.
#######좀 길어졌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여유가 생길때면 글을 쓰는 공책을 챙기지 못한 게 어찌나 후회스럽던지요. 대신 틈틈히 앞으로 써 나갈 줄거리를 구상하면서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간 안녕들 하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