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7> 나를 주고 싶어졌다.

초록물고기200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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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 잎이 사방을 감싼 그 방에서 밤새 진서의 생각을 붙잡고 있던 정재가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해연사에서 들었던 월정의 말들이 자꾸 바람처럼 가슴을 휘젓고 다녀 믿을 수 없었던 그것들을 조금씩 각인시키고 있었다.   


 [자네에게 비켜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네. 다가오지 않는 것을 애써 찾으려 하지 말게.]


 오랜 불면증으로 클럽에 있을 때도 서너 시간은 달밤의 운동으로 몸을 혹사했던 그였다. 그렇게 하고도 잠들지 못하는 날은 하릴없이 인터넷을 써핑했다. 삼 년 전 그날 우연히 클릭한 산악 동호회의 사진 한 장이 정재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꽃잎이 흩날리는 매화나무 아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새 한 마리가 내려 앉아 있었다. 그 괴이한 형상이 섬뜩하면서도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은 그 붉은 눈이 정재의 가슴속을 꿰뚫어 보는 듯 심장을 떨리게 했다.

 

 눈에 보이는 정도만을 믿어야 하는 의학도의 정점에서 자신에게 찾아든 것이 빙의라는 것을 받아들여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거칠 것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던 그 삶이 현대 의약으로 판명 내려진 빙의의 실체앞에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정신과 치료를 권하는 의사의 소견으로 미련없이 의학공부를 포기했다.   

 

 집을 나와 방황하던 그때 동준을 만났다. 지금의 클럽 건물 분양을 앞두고 건설회사와 입주자들 간의 마찰이 생겨 결국 주먹들이 인간띠를 두르고 건물 앞을 가로막는 사태가 벌어졌었다. 공사장의 잡일을 하고 있던 정재 또한 두 달 치 임금을 받지 못해 어정쩡하게 한쪽 발이 그 일에 닿아 있었다. 

 

 처음부터 주먹을 뒤에 두고 건물주와 한사장간의 은밀한 거래가 있었던 계획적인 게임이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날리고도 아무런 보장을 받을 수 없게 된 입주자들이 죽기로 달려들며 주먹들과 대치하던 찰나에 한 입주자가 한사장의 존재를 알아내 칼부림이 났었다.

 

 동준이 한 사장에게 달려드는 남자를 몸으로 막아내었다. 이미 이성이 마비된 듯 격해진 입주자들이 옆구리를 움켜 쥔 채 썰어지는 동준을 볼모로 잡아 한 사장을 협박했다. 그때 건물 안으로 끌려 들어온 동준의 상처를 정재가 응급조치로 지혈을 했었다.

 

 의학을 버리고 돌아서던 그때 다시는 병원 문을 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다. 40도로 끓어오르는 열에도 끝까지 병원을 가지 않은 채 버티던 그 싸늘한 심장이 피를 흘리는 동준을 앞에 두고는 버티지 못하고 상처를 소독하고 응급조치를 했다.

 

  “다들 못 죽여서 안달인데.....”

  “이렇게 당해도 될만한 짓을 한 것 아닙니까?”

  “알고 있다. 알고 있어서 묻는 거다.”

  “입주민들에겐 전부가 걸린 일입니다.”


동준이 소독약과 붕대를 챙기는 정재의 손을 보다 허리를 펴 등을 기대며 말을 했다.

 

  “이런 일을 할 손 같지는 않은데..”

 

 정재가 엷은 웃음을 흘리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까치를 동준에게 내밀었다. 폐까지 흘러들어온 담배연기가 상처로 긴장됐던 몸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햇볕에 그을렸어도 여전히 다른 태생을 보여주고 있는 정재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동준이 빙긋이 웃으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가출할 나이는 아닌 것 같고......사는 거 지루해서 연습 삼아 땀 흘려 보는 건가?”

  “다른 사람 사는 거 너무 함부로 짐작하고 낮춰보지 마세요.”

  “사정이 있는 모양이군.....”

  “....왜.....한사장 같은 사람과 일을 합니까?”

  “살아가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잘잘못을 따지는 게 의미가 있나.”

  “처음 어깨들 온 날 입주민들 손대지 말라는 얘기 하는 거 들었습니다. 이런 일 하는 거 불편해 보이는데....굳이 왜...”

  “너도 함부로 사람 짐작하지 마라....그냥 일일 뿐이고....편하고 불편하고는 나한테 별 의미도 없다.”

 

 그 일이 있은 후 동준이 한 사장의 일에서 한 발짝 물러나 클럽을 맞았다. 자신의 개인적인 일 외엔 동준을 따로 불러 일을 맞기지 않았고 클럽 또한 전적으로 동준에게 일임했다. 다만 지윤의 일이 두 사람의 평행선 위에 칼날같이 세워져 있어 동준이 항상 불편하고 무거웠다.

 

 여러 가지 풍파를 겪으며 입주민들과의 일이 마무리된 후 동준이 정재를 클럽에 들였다. 좀 채 입을 열지 않는 그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잘잘못을 따져드는 그것이 신선해 곁에 두고 싶었다.   

 

 아침에 출발해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며 장장 6시간을 달려 고성에 도착한 진서가 마을 입구에 다 달아 쉼 호흡을 크게 가다듬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그림을 궁금해 하던 사람이라 는 말을 전해 들어 처음 오는 손님을 맞는 기분보다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친구를 만나는 듯한 설렘이 일고 있었다.

 큰나무 아래를 지나자 김노인이 반갑게 진서를 불렀다.

 

 “언자 내려오는기가. 집에 손님 온 거 알고 있제. 아따...술 한 잔 맥이낳고 한나절 내내 진땀빼게 안했나,,,,,갸가..”


 김노인의 말에 영문을 몰라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는 진서에게 가게 집 안평댁이 시멘트 마당을 식히려 바가지로 물을 뿌려 데며 말을 했다.


  “니가 만들던 애기정자 안있나....어제 오후내내 영감님들하고 그 손님이 올렸다 아이가..언자 아매도 다 됐지 쉽다....자재가 모자란다꼬 직접 시내까징 나가서 이것저것 사와쌌더나만.....근데.....누고? 눈데...니도 없는데 혼자 와서 저래샀노.”


 대문 앞에 도착한 진서가 잠시 발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집 앞에 서서도 편하게 들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그 마음이 이상해 대문을 한번에 열어젖히지 못하고  빠끔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마루 밑에 신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대문을 들어선 진서가 조심스럽게 마당을 가로질러가 마루위에 가방을 올렸다. 뒤뜰에서 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며 방말이질을 해댔다.


  -그 사람이 와 있다.

   내 그림 하나를 묻기 위해 몇 년이나 해연사를 찾아갔고 결국 이곳까지 찾아온 사람이다.

  스님의 말대로 어쩌면 정말 전생에 버리지 못한 업이 내 몸에 내려앉아 병이 되었던 것처럼 내 그림을 알아본 그 사람도 나를 떠돌던 내 인연이 아닐까?

 

 뒤뜰을 돌아들어가 정자에 못질을 하고 있는 정재의 뒷모습을 보고 선 진서의 가슴이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말을 꺼내야 하는 입술이 말라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진서의 인사에 놀라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킨 정재가 머뭇거리다 주섬주섬 말을 이었다.

 

  “아...예.....저.....미안해요. 주인도 없는 집에.....”

  “힘들었을텐데....어떻게 하루만에.....”

  “마을영감님들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생각했던 데로 모양이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괜히 손댄 건 아닌가 걱정도 했는데.....”

 

애기정자를 한바퀴 돌아보던 진서의 얼굴에 놀란 표정과 밝은 기운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시작은 했지만...혼자서는 엄두가 안 나서 걱정을 했었는데......정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만들어졌어요.“

  “다행이네요.”

  “서정재라고 합니다. 스님께....”

  “예. 말씀 들었습니다. 윤진서예요.”

 

진서가 내미는 손을 잡으려다 흙먼지가 가득한 자신의 손을 보아 정재가 얼른 내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괜찮아요. 이렇게 멋진 걸 만들어 주셨는데.....”

  “아니에요. 처음 인산데...”

 

 마당으로 돌아 나온 정재가 수돗가에서 땀으로 젖은 얼굴을 씻어냈다. 진서가 얼른 방으로 들어가 수건을 가져 나오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섰던 정재의 얼굴에 시원한 웃음이 번졌다.

 

  “집이.....너무 멋진데요. 들어서서 놀랐어요. 작은 집인 줄 알았는데 호수가 한눈에 쏟아져 들어와서 꼭 그림 속에 들어온 그런 느낌요.”

  “식사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어요? 시내가 좀 멀어서....”

  “아니에요. 가게 집에서 잘 얻어먹었어요.”


  뜨거운 햇살만큼이나 왕왕대는 매미소리가 집안 가득히 울려대고 있었다. 그나마 호수에서 불어드는 간간한 바람이 아니라면 금방이라도 셔츠가 축축이 젖어들 더위였다. 잠시 서먹한 침묵이 흐르고 진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집을 오래 비워서 뭐 마땅히 해먹을게 없어요. 호수 좀 걸어가면 매운탕집 있는데....”

  “잘됐네요. 소주도 한잔 하고 싶었는데....”


 가방을 방에 들여다 놓고 나와 수돗가에서 손을 씻는 진서의 모습에서 눈을 때지 않고 지켜보던 정재가 불현듯 모자 아래 반쯤 가려진 그 느낌이 궁금했다.

 

  “....그 모자.....한번 벗어봐 줄래요?”

 

 정재의 그 말에 조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 진서의 표정이 가벼운 웃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농담을 섞어 대답을 했다.

  “안돼는데.....”

  “......왜.......요?”

 

빙긋이 웃는 그 얼굴이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정재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처음 보아 가슴에 꽂혔던 그 그림처럼 그렇게 정재의 가슴에 스며들고 있었다.

 

  “머리 엉망인데.....안 그래도 이 머리 어디가면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해서...”

  “난....그냥.....그런 그림 그리는 사람 느낌은 어떤가 궁금해서요. 얼굴도 작은데 창이 너무 커서.....”

 

정재가 말을 다 하기 전에 진서가 모자를 벗어내고 머리를 한번 털어냈다. 짧은 머리가 재멋 대로 솟아나와 좀 전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밝은 인상을 전해주었다. 정재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만들자 진서가 다시 농담을 했다.

 

  “보라니까요. 그냥 쓰고 있는 게 좋은데...”

  “아니에요. 훨씬 밝고 좋아 보여요.”

   

 호수를 돌아 둑을 타고 걷자 한결 시원한 바람이 열기를 식혀주었다. 좁은 길을 진서의 뒤를 따라 걸음을 내 딛다 두 사람이 함께 설만큼 길이 넓어지지 정재가 그 곁으로 나란히 섰다. 자신도 모르게 계속 입가에 미소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림.....어떻게 그리게 된 건지 많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월정 스님께 침묵시위로 버텼는데.....이번엔 제가 이겼어요.”


호수를 한번 돌아보던 진서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자를 벗으며 농담을 하던 느낌과는 또 다르게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몸이 좀 아팠었어요. 별 이유도 없이....아프면서 여러 가지 환상을 보게 됐는데....가끔은 환영들이 제 몸속에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그 그림....그때 보았던 환상이었어요. 그런데 해연사에 계신 스님께서 제 그림과 같은 것을 가지고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놀랐어요. 확인하고 싶어 갔었는데 .......”


 갑자기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던 진서의 얼굴이 조금씩 창백해지고 있었다. 말을 하는 그 얼굴이 불편해 보여 정재가 얼른 다음 말을 건넸다.

  “하고 싶지 않은 얘기면....지금 당장 해주지 않아도 되요. 궁금했던 사람....이렇게 만났으니 차차 들어도 괜찮아요. 불편한 얘기면 언제라도 상관없으니 하고 싶을 때 해요.”


 오래 알아오던 사람처럼 그 불편한 마음조차 보듬어 가지고 싶었다. 굳이 그 이유를 찾을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깊은 끌림.

   돌아서 마주한 그 순간부터 이미 그 느낌이 내게 와 닿았다.

   잠시 마주 보아 느꼈던 그것으로 충분했다.

   낯설지 않은 것에 당혹스러울 필요조차 없는 따스함.

   내게 닿는 그 푸른 기운이 영혼을 흔들 만큼 강하고 익숙하다.

   다가오지 않는 것을 굳이 찾지 마라 했다.

   하지만 이미 내가......

   내 심장이....

   그것을 알아보고 있다.

   

 바람 속에 부서지는 그 연한 미소처럼 그 사람이 정재의 가슴에 내려앉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것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정재가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수많았던 혼란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었고 믿으려는 것과 부정하려는 것이 의미 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말없이 둑을 걷고 있는 진서를 정재가 불러 세웠다. 바라보는 그 눈에 깊고 강렬한 힘이 담겨 있었다.

 

  “잠깐만요.”

 

 돌아서 정재의 시선을 마주한 진서의 눈이 당황해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그 깊은 시선이 진서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진서에게 정재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아직 악수 못했는데......”

 

 엉거주춤 내미는 진서의 손을 그 크고 흰 손이 부드럽게 감쌌다. 그 시선 속에 담겨있던 깊은 떨림이 힘주어 잡은 정재의 손끝에 닿아 있었다. 여전히 큰 눈에 놀라움이 가득담긴 진서가 조심스럽게 손을 빼내려 하자 정재의 눈에 장난기가 담긴 웃음이 번졌다.

 

  “놓고 싶지가 않은데.....그럼 미친놈 소리 듣겠죠.”

  “네.....”

 

 손을 놓으며 큰 소리로 웃어버리는 정재의 행동이 불편하거나 싫지 않았다. 힘주어 잡은 손조차 그냥 두고 싶을 만큼 따스하고 편했다. 그런 자신이 더 이상해 진서의 머릿속이 혼란해지고 있었다.

 매운탕 집에 도착해 음식이 나오기 전에 기울인 술잔이 벌서 한 병을 비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경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워지는 그 술잔 또한 걸릴 것 없이 편하게 목을 넘어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스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그 그림도.......제 것이었다고 하네요. 비익조를 그린 사람이....제가 본 환형 속에 있던 그 사람인 것 같아 믿을 수도....믿지 않을 수도 없네요....그래서 그 그림 궁금하다고 한 그쪽....저도 많이 궁금했어요.”

  “스님께서 하신말씀....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이제 조금은 그 뜻을 알 것 같기도 해요.”

진서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정재를 보았다. 그 눈이 이유를 묻고 있었다.

  “애써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나를 비켜가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하셨어요. 아까 처음 얼굴 보면서 그 생각 했어요.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그냥 앞에 서 있어 보여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고.....그래서 애써 다른 걸 찾을 필요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진서가 또 다시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재를 보았다. 살포시 내려앉은 홍조가 재멋데 로 헝클어진 머리와는 상반되게 단아한 느낌을 주었다. 선이 부드럽게 올라간 입 꼬리가 정재의 가슴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작고 붉은 그 입술이 한마디를 내놓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려 정재의 술잔이 급하게 비워지고 있었다.

 

  “이상하네. 나도 그랬는데......내가 믿지 못하는 거 다 말해도 들어줄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매운탕을 떠먹던 진서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눈을 때지 않고 있는 정재를 보았다. 비워진 술잔만큼 가벼워진 마음이 실없이 농담을 만들고 있었다.

 

  “어.....너무 그렇게 쳐다보면 먹는 사람 불편한데.....”

그 말에 정재가 하얀 이를 들어내며 편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 아무도 믿지 않고 들어주지 않아도....내가 다 들어주고 다 믿으면...그 마음에 가졌던 병....조금은 들어낼 수 있나요.”

  “이젠 그것들이 뭔지 굳이 찾으려 애쓰지 않아요. 스님께서 그렇게 집착하면 할수록 병이 깊어진다 해서...가끔 그림으로 그려 풀어내기는 방법도 익혀가는 중이에요.”


  - 상관하지 않고 싶다.

    어떤 형태로 이어졌던 인연이었는지 알아내고 싶지 않아졌다.

    너를 보면서 한번에 알아졌다.

   지금부터는 지금의 너를 알아가고 싶다.

   내 속에 찾아들었던 빙의의 원인으로 너를 보고 싶지 않다.

   그저 온전한 한 사람의 영혼으로 가져보고 싶다.

   너에게도 그렇게 나를 주고 싶어 졌다.

   그러고 싶어졌다.


  “그새....비익조라고 했던가요?”

  “네.”

 

진서가 또 한잔을 비우자 정재가 다시 채우지 않고 걱정스럽게 붉어진 그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너무 과하게 마시지 말아요.”

  “그 새는...슬픔이고 그리움이에요. 가지 못해서, 보지 못해서, 날지 못해서 슬픔이고..

평생을 그 하나만 기다려 함께 해야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리움이에요.“

  “너무 길게.....너무 오래 가지면.....병이 되요. 그래서 그 마음....병든 건지도 몰라요. 지금부터는 눈앞에 있는 것들만 보고 느껴지는 그것만 믿고 가지고 싶은 건 망설이지 말고 가져요. 그렇게 살면 분명 그 마음 다신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는 진서의 눈이 정재를 보고 있었다. 말하지 않는 자신의 가슴을 이미 알아가고 있는 정재가 이상하리만치 편하고 익숙해 현실을 떠나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술이 취했나 봐요. 아니면....이럴 리가 없는데.....”

  “난.....어때요? 진서씨 눈으로 보고 있는 난.....어때요? 앞으로 나 한번 봐주지 않을래요. 그 마음에 찾아든 환영 말고 눈앞에 두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하나 가져요.”

 

 갑작스러운 정재의 말에 진서가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겨우 한나절을 함께 했을 뿐인데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다가서는 그 행동에 당혹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다가오려 했던 사람처럼 아무런 주저 없이 그 눈에 진서를 담고 있었다.  

  

[보이느냐.

오늘은 겨울 산을 담았다.

백설이 세상을 뒤덮어 이 머리에 내려앉은 세월만큼 무상하다.

그곳은 어떠냐.

아무런 시름이 없어 혹여 나를 잊지는 않았느냐.

다 담고 가려니 힘이 드는 구나.

개울가에 뒹구는 자갈돌 하나도 네가 보지 못한 것은 다 담아가야 하니……

이리도 시간이 더디어 흐르는 구나.

너는 여전히 그동안의 얼굴로 나를 맞을 것인데……

나만이 이리 늙어 어찌 하느냐.

보고 있느냐.

나를 보고 있느냐.

보고 싶구나.

나를 향해 웃던 그 얼굴이 너무도 사무치는 구나.

이제 더 담을 것이 없다면 내 이 그리움 거두어 가다오.

간밤에 너를 보아 남은 머리에 백설이 더 내렸다.

이만하면 되질 않았느냐.

더 늙어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찌 하려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