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명:엘리자베드 바소리) 1560년생
그녀의 일기에 의하면, 피해자는 젊은 처녀만 612명
폴란드 국왕의 사촌형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와 관계가 깊은 명가의 딸로 헝가리의 귀족.
미모가 쇠약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처녀들을 죽여 그 피로 혈액목욕을 하고 마시기도 했다.
시어머니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유전적 장애등이 원인
유죄 확정 후, 자신의 소유인 체이테성에 유폐. 문이란 문은 모두 폐쇄되었다. 그 3년반 후, 54세에 사망(1614년 여름)
■ 에리자베이트·바토리는 1560년 헝가리·트랜실베니아 지방의 명가 바토리가에서 태어났다. 바토리가는 명문 합스부르크가와도 연결이 있는 오래 된 귀족 집안으로, 에리자베이트 본인도 폴란드 국왕의 조카가 된다.
근친혼이 반복되었던 까닭으로 유전적인 이상자가 많았다고 볼 수 있고, 숙부 스테판(Stephen Bathory 폴란드 국왕)이 간질로 사망하는 것을 시작으로 가계에는 자살자, 정신 장해자가 많이 확인되고 있다. 한편, 트랜실베니아 행정 장관, 추기경, 대신도 다수 배출하고 있다. (당시의 귀족은 능력이 없어도 높은 지위에 앉혔다)
11세때부터 약혼자 피렌츠·나다스디 백작(Ferencz Nadasdy)의 집에 맡겨져 있었다. 이 약혼자의 어머니 우르술라· 나다스디는 잔소리가 심한 시어머니로, 정말 꼴보기 싫은 시어머니 밑에서 그녀는 신부 수업을 하게 되었다. 일설에 이 약혼 기간중에 아이를 출산해서는 누구에게 양자로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4년이나 약혼관계로 같이 살고 있으면 임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남편 피렌츠·나다스디는 꽤 가학적 성격이었던 것 같았고, 하녀가 나태하다고 해서 남자들 앞에서 알몸으로 만든 뒤, 몸에 꿀을 발라 나무에 붙들어매고 온몸에 벌이나 벌레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좋아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16 세기의 귀족이나 영주는 하인이나 농노를 인간으로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여겼던 까닭에 특별히 이상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피렌츠 나다스디 백작이 26세, 에리자베이트가 15세 나이로 두 명은 결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에 가까운 체이테성으로 옮겨 살았으나, 집안끼리의 정략 결혼에 지나지 않았고 처음부터 에리자베이트는 심신에 모두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에리자베이트가 결혼 후에도 바토리라고 하는 성(姓)을 쓰고 있었던 것은 자기의 집안보다 바토리가의 격이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으로, 전장에 출전하는 일이 많았다. 에리자베이트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은 남편과 음습한 시어머니에게 울적한 불만을 품고있는 가운데, 흑마술을 배워 부정을 저지르게 되었다. 부정한 소란을 남편은 눈감고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에리자베이트를 엄한 감시하에 두었다.
■ 체이테성이 있는 닛테 지방은 시골이어서, 남편과 함께 방문했던 빈의 화려한 궁정과는 별세계였다. 불행하고 지루한 매일은 정신을 좀먹어 가서, 일상생활은 보석 수집이나 피부 손질 정도 밖에 하는 것이 없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닦는 일만이 흥미의 대상이 되었다. 마술, 주술에의 심취는 그 무렵부터 상궤를 벗어나게 되어 갔다. 하인으로부터 샤만의 비법을 배우거나 마술사를 성에 부르거나 하고, 동물의 시체를 악마의 제물로 바치는 의식에 집착 하게 된다.
체이테 성(城)
에리자베이트가 20대 였던 그 즈음의 이야기로는, 하녀가 옷을 입히는 방법을 잘못 행하였기 때문에 얼굴에 벌겋게 달군 쇠막대기로 지지거나, 몸 위에 종이를 쌓아 놓고 불붙이는 등의 행위가 많았다고 한다.
또, 10대 소녀를 남자들 앞에서 알몸으로 만들고 춤을 추게 한 적도 있지만, 그러한 행위도 당시의 관습이나 도덕률을 생각하면 평범한 정도였다.
남편 피렌츠 나다스디는, 오스만터키군과 싸워 55세에 전사(1604년). 당시 에리자베이트는 44세였다. 그 무렵을 경계로 오컬트 취미는 행동으로 옮겨져 갔다.
어느 날, 하녀 소녀가 에리자베이트의 머리를 빗기고 있었을 때, 빗에 얽힌 머리카락이 세게 당겨지게 되었다. 격노한 에리자베이트는 소녀의 얼굴을, 피로 젖을 때까지 계속 때렸다. 그런데, 튄 피들로 얼룩진 자신의 피부가 반들반들하게 젊어진것과 같이 보였기 때문에, 그 가정부를 살해해서 그 피를 전신에 바르고 씻었다.
20대 였으나 이미 4명의 자식을 낳아, 피부에 기미가 많이 끼고 주름도 많아졌다고 느끼고 있던 그녀는, "늙음"을 가장 두려워해서 그때부터 소녀와 처녀들의 피로 '피의 목욕'을 일삼기 시작했다.
에리자베이트는 부하나 집사에게 명해 차례차례로 가정부들을 죽이고, 소녀, 처녀들이 부족하게 되자 근린의 농촌으로부터 긁어 모았다.
"우아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는 말에 속아 성안에서 사라져 간 처녀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이윽고 성 주위로부터 젊은 처녀들의 모습이 사라져 갔다.
에리자베이트의 기학성(嗜虐性), 미와 젊음의 상징인 처녀에게로의 증오, 미신등이 결합해서, 처참한 잔학행위는 계속되었다. 머리손질이 나쁘게 되었다고 보여지면, 눈에 못을 찌르든가 손톱 사이에 바늘을 찌른다. 구두를 잘못 신기면 뜨거운 쇠꼬챙이로 발바닥을 지지고 얼굴을 벌겋게 해가지고 좋아했다.
수다떨고 있는 것을 보면 칼로 입을 양옆으로 찢고, 혹은 실로 꿰매었다. 알몸으로 해서 나무에 매달고 꿀을 발라, 벌이나 개미가 덤벼들게해서 발광사 시키는 등의 학대가 전해지고 있다.
후세의 픽션이라고 보여지는 이야기도 많이 있는것 같으나, 실제 어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발견된 사체나 물증으로부터 보아서 피로 목욕하고 있었던 일이나, 살해 자체를 오락으로 하고 있었던 것은 거의 틀림없다.
■ 고문의 방법으로써 몇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희생자들은 성안의 한방에서 알몸으로 된 다음, 목제의 고문대에 붙들어 매이거나 천정에 매달려 창이나 칼날로 몸에 구멍을 뚫어 피를 쏟아내게 했다.
고명한 시계의 장인 클락·스미스란 독일인에게 「철의 처녀」라고 불리는 사형도구를 만들게 해서 피를 쏟아 받았다. 이것은 사람 형태로 된 철제의 등신대 곽(槨)으로, 내부에 굵은 송곳들이 꽂혀져 있고, 그 안에 사람을 넣고 꽉 죄이면 밑으로 피가 쏟아져 내린다는 것이다. 또,「새장」이라는 것도 안쪽에 못들이 박혀있는 우리로, 안에 넣고 흔들어서 나오는 피를 욕조에 모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1610년 12월 30일, 희생자인 하나인 하급 귀족의 소녀가 성으로부터 탈주 바토리성에서의 학대, 살인 이야기가 전해졌다.
에리자베이트의 사촌 죠지 트루조 백작이 마티아스 국왕의 명을 받아 바토리성을 수색했는데, 피가 완전히 뽑혀진 처녀들의 시체가 산적해 있었고, 전신이 못이나 송곳들의 구멍투성이로 빈사상태로 갇혀있는 소녀들의 신음 소리가 온 성을 울리고 있었다 한다. 에리자베이트 본인의 일기에 의하면 희생자는 612명.
죄를 범하고 수감된 사람에게는 빚을 갚지 않아도 좋다는 법률이 있었기 때문에, 국왕이 그녀의 체포 명령을 내린 것은 에리자베이트가 국왕에게 고액의 채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공범이 되었던 집사겸·유모인 이로나, 집사 요하네우스·위이바바리, 하녀 드르코, 여마술사 도로테아 첸테스 등은 재판으로 참수 또는 화형이 되었다. 그러나, 왕족의 혈연 관계(폴란드 국왕의 사촌형제)였던 에리자베이트는 사형을 면했다.
그러나, 일족에 의해 체이테성에 유폐 되어 3년반 후인 1614년 54세로 사망. 죽었을 때 그녀의 미모는 몰라볼 정도로 초췌했다.
마티아스 국왕이 행한 재판은 오늘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에리자베이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재판정으로의 출정은 허용되지 않았고, 에리자베이트의 유죄를 증언한 관계자는 모두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다만, 에리자베이트의 성에서 600구 이상의 여자 시체가 발견된 것 자체는 사실상의 일로, 400-500명의 증인이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모두가 날조라고는 할 수 없다. 또 재판 기록에는, 혈액목욕이나 피를 마셨다는 사실은 쓰여지지 않았다 (물론 이 기록이 바르다고는 할 수 없다).
에리자베이트·바토리의 이야기는, 국왕의 명으로 말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다. 그러나 구전으로 "악마의 신부" 로서 전설화해 과장되었고, 그 일부가 사실로써 인정된 것은 바토리성이 발견된 1962년의 일이었다.
-----시대나 배경의 해설-----
■ 당시 유럽 전토에 퍼지고 있었던 마녀 재판의 잔학상을 보면, 바토리 백작부인의 행위는 「시대의 산물」로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잔학하게 집단 학살을 행한 것으로 유명한 여성으로서는, 칵테일의 이름으로도 있는 브래드 메리(영국의 메어리 1세)나 카트리느 드 메디시스등을 꼽을 수 있지만, 바토리 부인과의 차이점은, 잔학행위의 이유가 종교적, 정치적인 것이었던 점이다. 적어도 자신의 용모나 오락을 위해서 처녀들의 피를 강취하지는 않았다.
헝가리에서는1524년에 농노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실패, 주모자들이 전원 사형에 처해진 사건이 있었는데, 그들은 동료의 살을 생으로 먹히고 그런 후에 산 채로 철판 위에서 구워졌다.
또, 유명한 이야기로는 귀족, 영주에게는 「초야권」이 있어서, 결혼하는 아내는 첫날밤을 남편의 영주와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이 관습은 유럽 전 국토에서 행해지고 있었고 폐지된 것은17-18세기에 접어들고 나서였다).
중간 독립국이라고 할 수 있는 영지내에서는 「사법권과 경찰권」을 영주가 가지고 있어 영주는 농노, 하인에 대해서 무엇을 해도 문책받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영주가 농노의 딸을 강간하거나 애인으로 하는 것은 당시로써는 당연한 관습이었다. 그 폐단은 너무나 심하여, 하인들에게 집단 강간시키거나 수레 두 대에 묶어 찢어 죽이거나, 화형시키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삼권 분립」이란 Montesquieu의 주창이 얼마나 세계사적으로 위업을 사게된 것은 이 점을 봐서라도 분명할 것이다.
동구는, 서구와 달리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채 사회주의권에 통합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로 민주화로 진행한 것은1990년대에 들어오고 나서다. 즉, 동구에서는 일반 시민의 인권을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상식이 바로 최근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자신의 사유지를 지키는 일 밖에 머릿속에 없는 「영주」라고 하는 족속은, 유럽에만 한정되지 않고 온 세상에 퍼져있어 수많은 잔학행위를 범하고 있다.
또한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남미를 식민지화할 때에 취한 수법은, 영주, 지주를 우대 하면서 서로 적대시키는 방법도 썼다. 다만, 서구 열강이 행한 식민지 정책도 앞의 영주들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잔학한 것이었다. 인도인 장교의 무장봉기인 "세포이의 난(1857-59)" 에서는 잡은 포로를 영국군은 대포의 포신에 채워서 날려 버렸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다는 인식이 일어난 것은, 20 세기 후반을 지나고 나서라고 하는 사실을 직시 하지 않으면 과거의 사건은 잘 평가할 수 없다. 한사람의 인간이 살해당했을 때, 범인이 누구라해도 공정하게 재판받는다는 제도는 지금은 상식이지만, 그런 가치관을 생각도 못한 가운데 죽어 간 무수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꿈이며 비원이었을 것이다.
여자들만 살해한 바토리 백작부인
Erzsébet Báthory
(영어명:엘리자베드 바소리)
1560년생 그녀의 일기에 의하면, 피해자는 젊은 처녀만 612명
폴란드 국왕의 사촌형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와 관계가 깊은 명가의 딸로 헝가리의 귀족.
미모가 쇠약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처녀들을 죽여 그 피로 혈액목욕을 하고 마시기도 했다.
시어머니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유전적 장애등이 원인
유죄 확정 후, 자신의 소유인 체이테성에 유폐. 문이란 문은 모두 폐쇄되었다. 그 3년반 후, 54세에 사망(1614년 여름)
■ 에리자베이트·바토리는 1560년 헝가리·트랜실베니아 지방의 명가 바토리가에서 태어났다. 바토리가는 명문 합스부르크가와도 연결이 있는 오래 된 귀족 집안으로, 에리자베이트 본인도 폴란드 국왕의 조카가 된다.
근친혼이 반복되었던 까닭으로 유전적인 이상자가 많았다고 볼 수 있고, 숙부 스테판(Stephen Bathory 폴란드 국왕)이 간질로 사망하는 것을 시작으로 가계에는 자살자, 정신 장해자가 많이 확인되고 있다. 한편, 트랜실베니아 행정 장관, 추기경, 대신도 다수 배출하고 있다. (당시의 귀족은 능력이 없어도 높은 지위에 앉혔다)
11세때부터 약혼자 피렌츠·나다스디 백작(Ferencz Nadasdy)의 집에 맡겨져 있었다. 이 약혼자의 어머니 우르술라· 나다스디는 잔소리가 심한 시어머니로, 정말 꼴보기 싫은 시어머니 밑에서 그녀는 신부 수업을 하게 되었다. 일설에 이 약혼 기간중에 아이를 출산해서는 누구에게 양자로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4년이나 약혼관계로 같이 살고 있으면 임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남편 피렌츠·나다스디는 꽤 가학적 성격이었던 것 같았고, 하녀가
나태하다고 해서 남자들 앞에서 알몸으로 만든 뒤, 몸에 꿀을 발라 나무에 붙들어매고 온몸에 벌이나 벌레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좋아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16 세기의 귀족이나 영주는 하인이나 농노를 인간으로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여겼던 까닭에 특별히 이상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피렌츠 나다스디 백작이 26세, 에리자베이트가 15세 나이로 두 명은 결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에 가까운 체이테성으로 옮겨 살았으나, 집안끼리의 정략 결혼에 지나지 않았고 처음부터 에리자베이트는 심신에 모두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에리자베이트가 결혼 후에도 바토리라고 하는 성(姓)을 쓰고 있었던 것은 자기의 집안보다 바토리가의 격이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으로, 전장에 출전하는 일이 많았다. 에리자베이트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은 남편과 음습한 시어머니에게 울적한 불만을 품고있는 가운데, 흑마술을 배워 부정을 저지르게 되었다. 부정한 소란을 남편은 눈감고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에리자베이트를 엄한 감시하에 두었다.
■ 체이테성이 있는 닛테 지방은 시골이어서, 남편과 함께 방문했던 빈의 화려한 궁정과는 별세계였다. 불행하고 지루한 매일은 정신을 좀먹어 가서, 일상생활은 보석 수집이나 피부 손질 정도 밖에 하는 것이 없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닦는 일만이 흥미의 대상이 되었다. 마술, 주술에의 심취는 그 무렵부터 상궤를 벗어나게 되어 갔다. 하인으로부터 샤만의 비법을 배우거나 마술사를 성에 부르거나 하고, 동물의 시체를 악마의 제물로 바치는 의식에 집착 하게 된다.
체이테 성(城)
에리자베이트가 20대 였던 그 즈음의 이야기로는, 하녀가 옷을 입히는 방법을 잘못 행하였기 때문에 얼굴에 벌겋게 달군 쇠막대기로 지지거나, 몸 위에 종이를 쌓아 놓고 불붙이는 등의 행위가 많았다고 한다.
또, 10대 소녀를 남자들 앞에서 알몸으로 만들고 춤을 추게 한 적도 있지만, 그러한 행위도 당시의 관습이나 도덕률을 생각하면 평범한 정도였다.
남편 피렌츠 나다스디는, 오스만터키군과 싸워 55세에 전사(1604년). 당시 에리자베이트는 44세였다. 그 무렵을 경계로 오컬트 취미는 행동으로 옮겨져 갔다.
어느 날, 하녀 소녀가 에리자베이트의 머리를 빗기고 있었을 때, 빗에 얽힌 머리카락이 세게 당겨지게 되었다. 격노한 에리자베이트는 소녀의 얼굴을, 피로 젖을 때까지 계속 때렸다. 그런데, 튄 피들로 얼룩진 자신의 피부가 반들반들하게 젊어진것과 같이 보였기 때문에, 그 가정부를 살해해서 그 피를 전신에 바르고 씻었다.
20대 였으나 이미 4명의 자식을 낳아, 피부에 기미가 많이 끼고 주름도 많아졌다고 느끼고 있던 그녀는, "늙음"을 가장 두려워해서 그때부터 소녀와 처녀들의 피로 '피의 목욕'을 일삼기 시작했다.
에리자베이트는 부하나 집사에게 명해 차례차례로 가정부들을 죽이고, 소녀, 처녀들이 부족하게 되자 근린의 농촌으로부터 긁어 모았다.
"우아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는 말에 속아 성안에서 사라져 간 처녀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이윽고 성 주위로부터 젊은 처녀들의 모습이 사라져 갔다.
에리자베이트의 기학성(嗜虐性), 미와 젊음의 상징인 처녀에게로의 증오, 미신등이 결합해서, 처참한 잔학행위는 계속되었다. 머리손질이 나쁘게 되었다고 보여지면, 눈에 못을 찌르든가 손톱 사이에 바늘을 찌른다. 구두를 잘못 신기면 뜨거운 쇠꼬챙이로 발바닥을 지지고 얼굴을 벌겋게 해가지고 좋아했다.
수다떨고 있는 것을 보면 칼로 입을 양옆으로 찢고, 혹은 실로 꿰매었다. 알몸으로 해서 나무에 매달고 꿀을 발라, 벌이나 개미가 덤벼들게해서 발광사 시키는 등의 학대가 전해지고 있다.
후세의 픽션이라고 보여지는 이야기도 많이 있는것 같으나, 실제 어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발견된 사체나 물증으로부터 보아서 피로 목욕하고 있었던 일이나, 살해 자체를 오락으로 하고 있었던 것은 거의 틀림없다.
■ 고문의 방법으로써 몇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희생자들은 성안의 한방에서 알몸으로 된 다음, 목제의 고문대에 붙들어 매이거나 천정에 매달려 창이나 칼날로 몸에 구멍을 뚫어 피를 쏟아내게 했다.
고명한 시계의 장인 클락·스미스란 독일인에게 「철의 처녀」라고 불리는 사형도구를 만들게 해서 피를 쏟아 받았다. 이것은 사람 형태로 된 철제의 등신대 곽(槨)으로, 내부에 굵은 송곳들이 꽂혀져 있고, 그 안에 사람을 넣고 꽉 죄이면 밑으로 피가 쏟아져 내린다는 것이다. 또,「새장」이라는 것도 안쪽에 못들이 박혀있는 우리로, 안에 넣고 흔들어서 나오는 피를 욕조에 모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1610년 12월 30일, 희생자인 하나인 하급 귀족의 소녀가 성으로부터 탈주 바토리성에서의 학대, 살인 이야기가 전해졌다.
에리자베이트의 사촌 죠지 트루조 백작이 마티아스 국왕의 명을 받아 바토리성을 수색했는데, 피가 완전히 뽑혀진 처녀들의 시체가 산적해 있었고, 전신이 못이나 송곳들의 구멍투성이로 빈사상태로 갇혀있는 소녀들의 신음 소리가 온 성을 울리고 있었다 한다.
에리자베이트 본인의 일기에 의하면 희생자는 612명.
죄를 범하고 수감된 사람에게는 빚을 갚지 않아도 좋다는 법률이 있었기 때문에, 국왕이 그녀의 체포 명령을 내린 것은 에리자베이트가 국왕에게 고액의 채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공범이 되었던 집사겸·유모인 이로나, 집사 요하네우스·위이바바리, 하녀 드르코, 여마술사 도로테아 첸테스 등은 재판으로 참수 또는 화형이 되었다. 그러나, 왕족의 혈연 관계(폴란드 국왕의 사촌형제)였던 에리자베이트는 사형을 면했다.
그러나, 일족에 의해 체이테성에 유폐 되어 3년반 후인 1614년 54세로 사망. 죽었을 때 그녀의 미모는 몰라볼 정도로 초췌했다.
마티아스 국왕이 행한 재판은 오늘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에리자베이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재판정으로의 출정은 허용되지 않았고, 에리자베이트의 유죄를 증언한 관계자는 모두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다만, 에리자베이트의 성에서 600구 이상의 여자 시체가 발견된 것 자체는 사실상의 일로, 400-500명의 증인이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모두가 날조라고는 할 수 없다. 또 재판 기록에는, 혈액목욕이나 피를 마셨다는 사실은 쓰여지지 않았다 (물론 이 기록이 바르다고는 할 수 없다).
에리자베이트·바토리의 이야기는, 국왕의 명으로 말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다. 그러나 구전으로 "악마의 신부" 로서 전설화해 과장되었고, 그 일부가 사실로써 인정된 것은 바토리성이 발견된 1962년의 일이었다.
-----시대나 배경의 해설-----
■ 당시 유럽 전토에 퍼지고 있었던 마녀 재판의 잔학상을 보면, 바토리 백작부인의 행위는 「시대의 산물」로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잔학하게 집단 학살을 행한 것으로 유명한 여성으로서는, 칵테일의 이름으로도 있는 브래드 메리(영국의 메어리 1세)나 카트리느 드 메디시스등을 꼽을 수 있지만, 바토리 부인과의 차이점은, 잔학행위의 이유가 종교적, 정치적인 것이었던 점이다. 적어도 자신의 용모나 오락을 위해서 처녀들의 피를 강취하지는 않았다.
헝가리에서는1524년에 농노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실패, 주모자들이 전원 사형에 처해진 사건이 있었는데, 그들은 동료의 살을 생으로 먹히고 그런 후에 산 채로 철판 위에서 구워졌다.
또, 유명한 이야기로는 귀족, 영주에게는 「초야권」이 있어서, 결혼하는 아내는 첫날밤을 남편의 영주와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이 관습은 유럽 전 국토에서 행해지고 있었고 폐지된 것은17-18세기에 접어들고 나서였다).
중간 독립국이라고 할 수 있는 영지내에서는 「사법권과 경찰권」을 영주가 가지고 있어 영주는 농노, 하인에 대해서 무엇을 해도 문책받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영주가 농노의 딸을 강간하거나 애인으로 하는 것은 당시로써는 당연한 관습이었다. 그 폐단은 너무나 심하여, 하인들에게 집단 강간시키거나 수레 두 대에 묶어 찢어 죽이거나, 화형시키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삼권 분립」이란 Montesquieu의 주창이 얼마나 세계사적으로 위업을 사게된 것은 이 점을 봐서라도 분명할 것이다.
동구는, 서구와 달리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채 사회주의권에 통합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로 민주화로 진행한 것은1990년대에 들어오고 나서다. 즉, 동구에서는 일반 시민의 인권을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상식이 바로 최근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자신의 사유지를 지키는 일 밖에 머릿속에 없는 「영주」라고 하는 족속은, 유럽에만 한정되지 않고 온 세상에 퍼져있어 수많은 잔학행위를 범하고 있다.
또한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남미를 식민지화할 때에 취한 수법은, 영주, 지주를 우대 하면서 서로 적대시키는 방법도 썼다. 다만, 서구 열강이 행한 식민지 정책도 앞의 영주들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잔학한 것이었다. 인도인 장교의 무장봉기인 "세포이의 난(1857-59)" 에서는 잡은 포로를 영국군은 대포의 포신에 채워서 날려 버렸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다는 인식이 일어난 것은, 20 세기 후반을 지나고 나서라고 하는 사실을 직시 하지 않으면 과거의 사건은 잘 평가할 수 없다. 한사람의 인간이 살해당했을 때, 범인이 누구라해도 공정하게 재판받는다는 제도는 지금은 상식이지만, 그런 가치관을 생각도 못한 가운데 죽어 간 무수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꿈이며 비원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