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남자 유키*** <#15. 엇갈림>

길스진200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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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엇갈림>>

 

 

 

 

3일 후, 지나를 포함한 일행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으음?  무슨 일이... 있었나?"

 

카오리는 2층 방으로 올라가는 지나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지나는 온천으로 출발하기 전보다 이상하리만큼 말수가 적어진 것 같고 표정도 어두워 보였다.

 

그녀와 레이가 일본에 방문한지 1주일이 넘었다.  하지만 갈수록 그녀의 안색이 어둡고 굳어가는 사실을 카오리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카오리는 일하는 사람에게 얘기해서 아래층에서 차 한잔 마시자고 했다.

 

"무슨... 일이세요?"

 

지나는 방석 위에 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그냥... 차 한잔 하고 싶었어요.  피곤한데 내가 못 쉬게 한 건 아닌가 몰라..."

 

"아뇨.  괜찮습니다."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다가와 차를 따라서 두 여자 앞에 놓고 자리를 떠났다.

 

"김 선생님."

 

"네."

 

"레이를 잘 챙겨줘서 정말 고마워요."

 

"예?  아,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레이가 착한데다 알아서 잘 해요.  오히려 제가 아이한테서 도움을 받는 걸요."

 

그녀는 카오리에게 자신이 비 맞고 감기걸렸던 얘기를 해주었다.  그때 레이가 곁에 없었다면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했다.

 

"1년 전때까지만해도 그 아이는 지금의 레이가 아니었어요.  또래 아이답지 않게 어두운 눈동자에 차가운 얼음 속에 갇혀 있었거든요.

 

지나는 카오리에게 왜 레이가 그런 성격이어야 했는지, 왜 사토 유키가 저렇게 어둠속에서 살고 있는지 묻고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과거를 물어볼 만큼 그녀에게는 아무런 자격이 없었다.  유키와 특별한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레이의 엄마도 아니었다.

 

"난... 김 선생님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좋은 분임에 틀림없다고 봐요."

 

"???"

 

카오리의 뜻밖의 칭찬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카오리는 차를 한모금 마시고 난 후,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김 선생님에게 하는 부탁이에요."

 

"예?  부...탁요?"

 

"꼭 여기에 더 머무를 필요는 없어요.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내 아들을 도와달라는 거에요."

 

"예?  아, 그게... 무슨... 뜻이세요?"

 

지나는 두 손으로 찻잔을 쓰다듬으며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 했다.  하지만 카오리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레이를 변화시킨 것 처럼... 유키도 변화시켜줘요."

 

"네-에?"

 

"레이가 김 선생님을 참 좋아하더군요.  이렇게 밝은 모습에 말도 잘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7년 전에 잘 웃던 레이로 돌아간 것 같아 좋으네요.  그 보다 더 밝아진 것 같아요.  모두가 김 선생님 덕분입니다."

 

카오리는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나는 당황한 얼굴로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7년... 전요?"

 

그녀는 끝까지 모른 척하고 입을 다물고 있을까했지만 결국 참지 못 해 말문을 열었다.

 

호기심으로 가득차있는 눈동자를 보던 카오리는 옅은 미소를 띄우고는 친밀감이 도는 말투로 7년 전에 있었던 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물론 카오리는 유키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이전, 8년 전에 죽은 아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유키의 상심은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아들의 아내가 사고당시 어떤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주변 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카오리는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들은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아내의 죽음을 그리도 가슴 아파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1년이 지난... 바로 7년 전.  유키는 아내의 기일에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을 거에요, 아마..."

 

카오리는 그 사고로 유키의 몸에는 심한 화상과 상처가 남아있다고 했다. 

 

그리고 의사 말로는 환자에게는 외상보다는 정신적인 고통이 더 심한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보호자조차도 만나지 않으려 한다고...

 

"제가 생각할 땐... 몸에 있는 상처보단 마음에 생긴 상처가... 더 깊은 것 같아요."

 

김 지나의 말에 카오리는 가지런한 눈썹을 살짝 들어보였다.

 

전혀 도도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가 좋아할 정도로 카오리는 온화했다.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그곳에 갔을 때 사장님 얼굴을 본 적이... 없거든요."

 

지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카오리에게 거짓말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에게 보여주지도 않은 얼굴을 가정교사에게는 보여줬다는 사실에 그들은 많이 서운해 할 것이다.

 

"제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상관없다고 봐요.  전 일개 가정교사일뿐이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장님 자신과 그리고 레이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짓이에요."

 

"..."

 

카오리는 가정교사가 유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아 얘기하기가 좀 더 쉬워질 것 같아 안심했다.

 

"그럼 유키를 도와줄 수 있겠죠?"

 

"예?  제가 어떻게..."

 

레이는 어린 나이인데다 그녀는 초등학교 선생을 해봤기 때문에 이런 아이들을 다루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유키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그만큼 고민이 많은 만큼 고통 또한 많이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그녀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녀는 카오리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뇨.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김 선생님은 하실 수 있어요.  당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어요.

 

레이와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당신에게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에요.

 

굳어버린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그런 마법같은 능력이... 당신에겐 있어요."

 

 

 

 

 

지나와 레이는 보리를 데리고 밖으로 바람 쐬러 근처에 나갔다.

 

다른 때라면 유스케가 동행해주었지만 온천에서 돌아온 뒤, 몇 시간 전부터 그는 보이지 않았다.

 

카오리의 말로는 사장님의 전화를 받고 회사로 잠깐 나갔다는 것이다.

 

레이는 유스케 대신에 동행자이나 통역자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가 아버지가 걱정되어 한국으로 가자고 재촉하면 어쩌나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것 같아 대견스러워 보였다.

 

"선생님!"

 

"음, 그래."

 

"보리 똥 쌌어요!"

 

아이의 인상이 귀엽게 구겨지는 것을 보고 지나는 잠깐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한국에 있는 유키 생각에서 도저히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날 그녀는 유스케에게 말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도저히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유스케의 반응은 의외로 친절했으며 그녀에게 편안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상처가 스치는 눈빛이었지만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는 것이다.

 

지나는 보리가 싼 거대한 덩어리를 봉지에 담으며 생각했다.

 

그녀가 인상 하나 변하지 않고 보리의 똥을 치우는 것을 본 레이는 그녀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선생님."

 

"..."

 

"선생님!"

 

아이의 큰소리에 지나는 깜짝 놀랐다.

 

"응?  아, 미안...  왜?"

 

"선생님 이상해요."

 

"음?  내가 이상해?  난 이 상한 적 없는데?  봐.  모두 건강해."

 

지나는 유치하게 자신의 입을 벌리고는 건강한 치아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레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게 아니구요.  선생님이... 음... 평소때 선생님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네.  어디 아픈 사람처럼...  잘 웃지도 않고, 얘기도 많이 안 하시고..."

 

지나는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언제나 곁에서 자신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 것 같아 행복했다.

 

그녀는 전혀 그런 것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레이는 아니라고 말했다.

 

"진짜에요.  사실... 여기 온 뒤로 점점 그래요.  혹시..."

 

"혹시 뭐?"

 

"혹시 아버지 생각나서 그러세요?"

 

"???"

 

그녀의 심장이 덜컹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수하게 물어보는 질문인데도 왜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아, 저기..."

 

"아버지 아프시다니까... 걱정되시는 거죠?"

 

"아, 그게... 뭐, 물론 그렇지."

 

"선생님."

 

레이는 보리의 목에 달린 줄을 잡고 그녀 옆에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지나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머리 위로 올라와있는 햇살이 아이의 까만 머리 위에 머물러졌다.

 

"음?"

 

"아버지... 좋아하시죠?"

 

"뭐, 뭐?"

 

"그럼 싫어하세요?"

 

"아... 저기, 레이."

 

지나는 레이의 시선과 마주치기 힘들었다.  아이는 뭔가 다 알고있다는 눈빛이었다.  도대체 저 아이 눈 속에 누가 들어가있는 거지?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힘겹게 침을 삼켰다.  아이의 눈동자는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싫어하시냐구요?"

 

"아, 저기... 아, 아니!  싫어하는 건 아냐!  물론... 보리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뭐 그런 것처럼 묻는 거라면..."

 

그녀는 다신 긴장으로 굳어진 덩어리를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싫어하지 않아."

 

"그런 거 아닌데요."

 

"음?"

 

"절 바보로 아세요?"

 

레이는 바닥에 있는 작은 돌맹이를 발로 이리저리 굴려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 선생님이 좋아요.  너무너무..."

 

"나도 네가 좋아.  음... 좋아하는 것보다 더 많이 널 사랑해."

 

지나는 웅크리고 앉아 아이 눈과 마주쳤다.

 

"아버지는요?"

 

"???"

 

"아버지도 사랑해요?"

 

"어?"

 

"그래서 여기 온 뒤로 힘이 없으신 거에요?  그래서 우신 거에요?"

 

"..."

 

레이는 의외로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아이였다.  혼자 집에서만 놀았던 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감각이 뛰어났다.

 

지나는 구석으로 몰리는 기분을 겪었다.  너무 예리하게 던진 그물에 그만 걸린 것 같았다.

 

"레이."

 

"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아냐."

 

"예?"

 

"아버지랑 선생님이 서로 사랑하기에는 아직 멀었어.  문제도 많고."

 

"그럼... 선생님 혼자서 아버지를 좋아하시는 거에요?  짝사랑같은 거요."

 

지나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아이는 뭔가 확실한 대답을 듣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아... 이런!'

 

뭐라고 대답해준단 말인가.  그래, 네 아빠를 좋아한단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한단다... 라고 대답하란 말인가.  그러기에는 그녀의 상황이 기가 막혔다.

 

그녀는 아까 카오리가 부탁한 말이 떠올랐다.  당장 귀를 씻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얼마나 울었던지...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아이에게 유키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무엇한단 말인가.  어차피 소용없는 감정인 것을...

 

"좋아하지만 사랑하지 않아."

 

그녀는 아이의 눈빛에서 묘한 슬픔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 그녀는 당황했다. 

 

놀랍도록 아이는 아버지를 닮아 감정조절까지 하는 것 같았다.  분명히 슬픈 얼굴이었는데 말이다.

 

레이는 다시 보리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지나는 공항까지 배웅하러 나오는 카오리의 부탁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그녀는 앞에서 걸어가고있는 레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난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약할까?  어쩌자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털컥 해버렸냐고?'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자, 오른 쪽에 앉은 유스케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는 지금 다른 여자의 시선을 받고있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그런데 유스케.  정말 같이 한국에 갈지 몰랐어요."

 

"..."

 

일등석에 세 사람은 앉았다.  레이는 그녀의 바로 왼쪽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아이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츠바사 사장님께서 부탁하신 겁니다."

 

"하지만... 사장님께서 만나주시지 않을 텐데..."

 

"하루만 머물다 갈거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예전부터 레이가 일본을 다녀갈 때면 항상 내가 아이를 직접 챙겼으니까."

 

"네..."

 

그녀의 머릿속은 서글픈 생각들로 꽉 찼다.  그녀는 무심결에 레이와 유스케를 쳐다봤다.

 

레이는 일본 할머니집에서 가져온 휴대용 게임기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고 유스케는 일본어로 가득 찬 잡지를 읽고 있었다.

 

'난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휴~'

 

한숨이 구슬프게 들릴 것 같아 한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남자의 귀는 개도 아닌 것이 너무 밝아 희미한 자신의 한숨소리까지 들었다.

 

 

 

 

 

저녁시간에 공항에 도착한 세 사람과 보리는 바깥에서 식사를 하고 집에 가기로 했다.

 

조금 전 유키와 통화해서 기사를 내보내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지만 집에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나와 레이는 걱정이 들어 급히 집에 가자고 했지만 유스케는 별일 없을 거라고 했다.

 

어차피 걱정되서 집에 도착하면 제대로 저녁도 못 먹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먹고 가도 늦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그와 통화했을 때는 그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냐고 유스케가 되묻는 바람에 지나는 저녁식사를 하는 걸로 했다.

 

한정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눌러도 문이 열리지가 않아, 조바심에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레이.  보리 발을 닦아주겠니?  유스케는 짐을 거실로 옮겨줘요.  2층에 내가 올라가볼게요."

 

지나는 황급히 2층 계단을 뛰다시피 밟았다.  그리고 유키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은 조용했다.

 

서재문까지 두드려지만 역시나 침묵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그녀의 온몸을 애워쌌다.

 

'안에서 쓰러진 건 아닐까?'

 

가스가 유출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가스로 질식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럼... 왜?

 

"사장님!  사장님!  저희 왔어요!  사장님!  안에 계세요?  대답하세요!"

 

그녀의 지르는 소리에 유스케가 2층으로 올라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요.  쓰러지신 건 아닌지..."

 

유스케는 그녀의 겁먹은 얼굴을 쳐다보고는 방문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전혀 없느냐고 물었다.

 

"없어요.  전혀.  여기 방마다 열쇠는 사장님이 가지고 계세요."

 

"유키!  유키!  나야, 유스케!"

 

이때 아래층에서 전화벨이 울려댔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거실로 뛰었다.

 

거실에 도착했을 때는 전화벨이 멈추었고 레이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저, 레이에요, 아저씨."

 

"아저씨라고?  레이, 선생님 좀 바꿔 줄래?"

 

지나는 수화기를 받아 귀에 가까이 갖다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운전기사였다.  기사는 지나의 전화를 받고 약간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다른 질문은 뒤로 하고 유키가 집에 있는 건지 나갔는지 물었다.

 

"뭐라고요?  일본에요?  아... 아니...  어, 언제요?  아프시다면서...  아, 알았습니다...  감사해요.  네... 네..."

 

그녀가 힘없이 넋을 놓은 채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두 남자의 시선이 날아왔다.

 

유스케가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기사가 뭐랍니까?"

 

"아... 사장님... 지금 일본에 계신다는데요?"

 

"뭐라구요?  유키가 일본에요?  일본에 갔다는 겁니까?  츠바사 사장님댁에요?"

 

유스케는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깁스를 할 정도로 다친 사람이 일본에 갔다니 이상했다.

 

더군다나 사토 유키는 7년동안 바깥 나들이를 하지도 않는 남자였다.

 

지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이에게로 돌아섰다.  아이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찼다.

 

한국에 와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어차피 환한 곳에서 아버지와 만나지는 못 해도 곧 밤이 될 테고, 그럼 위층에서 아버지가 내려와 잘자라고 인사하러 올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아버지, 왜 일본에 가셨데요?  우리 만나시려고요?"

 

실망과 걱정으로 이미 아이의 눈망울은 젖어있었다.  잠시 후면 눈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아,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아무래도 서로 어긋난 것 같아, 레이."

 

"편찮으신 건요?"

 

"여행하실 정도는..."

 

"치... 할머니 집에서 나오기 전에 전화라도 미리 할 걸..."

 

아이는 울먹거리며 중얼거렸다.  지나는 괜히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그래... 선생님이 그 생각을 못 했어.  미안하다, 레이."

 

갈증으로 물을 먹고 온 보리가 레이 곁에 와서 위로해주려는 듯 아이의 손등을 핥아댔다.

 

이내 위로를 받은 아이는 조금은 밝은 얼굴로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지금 전화해서 오시라고 해요!  그럼 되잖아요!  예?"

 

"그래.  그럴게."

 

레이가 잠깐 보리에게 한눈파는 동안 지나는 유스케에게 일본에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조금 전에 운전기사와 통화를 했으니 그가 유키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레이와 그녀가 서울에 도착했다라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 까요?"

 

"하지만 레이와 통화를 시켜줘야 할 것 같아요."

 

유스케는 전화를 걸어 신호음이 들리는 것을 들으면서 지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도 레이 못지 않게 실망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보지도 못 했을 텐데... 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여보세요?"

 

그는 일본어로 누군가와 통화했다.  그리고 이내 레이를 불러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아버지?  저, 레이에요!  다친신 곳은 어떠세요?  네... 아뇨...  아버지 언제 오실 거에요?  내일요?

 

전, 괜찮아요...  유스케 아저씨랑 같이 있으니까요...  네, 아버지도 안녕히 주무세요."

 

통화하는 동안 레이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지나는 다행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아이가 수화기를 그냥 내려놓자, 서운함이 가슴 속에 파고들어왔다.  적어도 유키가 자신을 바꿔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기대심에 실망이 컸다.  그녀는 짐을 풀테니까 놀고 있으라고 했다.

 

"내가 들어다주죠."

 

"아니... 그러실 필요..."

 

그녀는 유스케가 커다란 가방을 들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쳐다봤다.

 

유키 말고 다른 남자를 방에 들여놓는 것이 내심 불안했다.  그리고 유키에게 죄를 짓는 것 같기도 했다.

 

유스케는 그녀의 방을 둘러봤다.  그리고 넓은 침대에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

 

'그를 내보내야 돼.'

 

지나는 아래층에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얼른 차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스케는 '씨-익' 웃으며 문으로 나가면서 대답했다.

 

"날 그렇게 빨리 내보내고 싶어요?"

 

"네?"

 

"내가 이 방에 있는 것이 신경쓰입니까?"

 

"..."

 

그녀의 당혹스러운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자, 유스케는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오히려 난 치한을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그가 나가고 나서 지나는 침대로 다가가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옷정리고 뭐고 하기 싫었다.

 

그녀는 당장에 유키가 보고싶었다.  이곳에 오면 그의 얼굴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유키는 당장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온 것이 잘못이었다.  어짜자고 여자 하나에 눈이 멀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던가.

 

괴물쳐다보듯이 바라보는 스튜어디스의 시선을 왜 중요하지 않았던가.

 

'빌어먹을!'

 

이곳에 오면 뭘하는가.  이미 그녀와 레이는 한국으로 떠나고 없는 것을.  몇 시간 전에 출발했다는 카오리의 말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유스케가 같이 갔다는 것이다!  그 녀석이... 그 빌어먹을 녀석이 왜?

 

유스케가 그들과 같이 한국으로 떠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서울에 데려다주라고 했다지만... 그의 뇌세포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거꾸로 돌고있는 그의 뜨거운 피는 그렇게 결론짓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여자하나 때문에 7년 동안 바깥세상에 나오지 않은 그를 나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7년 동안 부모님에게 자신의 추악한 얼굴을 보여주도록, 이런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게 만든 여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수술은... 생각해보지 그랬니?"

 

한참을 울다가 정신을 차린 카오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됐습니다."

 

"유키."

 

"피곤하군요.  먼저 자겠습니다."

 

유키는 더 오랫동안 그녀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정신을 차리고서야 엄청난 실수에 목을 베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 너무 걱정했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어머니가 놀라 기절할까 봐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길한 예상과는 달리 카오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7년만에 방문해준 것만 기뻐하며 울었다.

 

2층 방으로 들어온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비행기표가 되는 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사실 지금도 불안해서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한국에서... 그의 집에서 지나와 유스케가 같이 있을 걸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내일 오후에 아버지 오실게다.  뵙고 가려무나.'

 

어머니 카오리는 어둡게 그늘진 아들의 얼굴을 마냥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외출한 아들이 한없이 고마웠고 기뻤던 것이다.  츠바사도 기뻐할 것이라며...

 

다음 날 아침.

 

그는 방에 메모지 하나 남겨두고 공항으로 향했다.

 

이곳에 무작정 아무 생각없이 날아온 것은 오직 한 여자때문이었다.  그여자가 너무 보고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실수였다.  7년 동안 악 쓰며 어둠 속에서 살았던 자신의 두꺼운 벽을 단번에 무너뜨려버렸고 일본까지 날아온 것이다.

 

그런 엄청난 위험한 모험을 한 것이 한심스러웠다.  차라리 어머니의 집에서 그 여자를 만났다면... 지금의 기분과는 정반대일 것이다.

 

그는 벙거지 모자를 질끈 눌러쓰고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유키의 기사는 초인종을 누르겠다고 했지만 유키는 그러지 않았다.  직접 열쇠를 열고 대문을 통과했다.

 

뒤에서 이내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현관문이 열려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낯선 남자의 신발 또한 발견했다.

 

거실을 가로질러서 위로 올라갈까하다가 그는 건물을 돌아 2층 자신의 방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방에 도착한 그는 옷을 갈아입다가 옆방에 귀를 기울였다.  집 안은 너무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다들 어딜 간 거지?'

 

털짐승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유키는 일본에도 날아갔다 왔기에 환한 곳에서 사람들과 맞부딪혀보고 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복도였다.  여자 목소리... 바로 지나였다.

 

"...해요...  미안해요, 유스케...  아, 유스케!  이러면..."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그녀는 애타게 유스케를 부르고 있었다.

 

유키는 터질 것 처럼 울려대는 심장소리에 칼을 들이대며 천천히 방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환한 대낮과 다르게 어두운 복도를 내다봤다.

 

그 복도에서는 두 사람의 형체가 보였고 복도에 있는 작은 조명빛에 비치는 남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지나를 닫혀 있는 문으로 밀어 그녀의 몸을 가둔 채로 키스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지나... 난 당신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 없어요."

 

"유, 유스케?"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에요."

 

"..."

 

유키는 그들의 대화를 더이상 듣고있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 눈에 띄는 뭐라도 집어들어 부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증오심이 완전히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처럼 돌아버리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7년 전... 아니 8년 전...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아내가 친구녀석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더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와 똑같은 장면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와 자신의 친구가 키스를 하고있는 모습이 바로 8년 전 그 장면을 연상케 했다.

 

그녀가 어떻게... 저 여자가 어떻게...!!

 

그때보다 더 한... 결코 덜하지 않을 정도로 분노심에 치를 떨던 그는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유스케?"

 

살기가 가득한 자신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동작이 일시에 멈춰지는 것을 그는 지켜봤다.

 

어둠 속에서 지나의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래, 많이 놀랐을 테지... 내가 와 있는 것을 몰랐을 테지.

 

그러나 유스케는 그가 생각한 대로 차분하게 대응했다.

 

"떠나기 전에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군, 사토 유키?"

 

"날... 그토록 보고싶어 했나?"

 

"당연한 거 아냐?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

 

상황에 놀라지 않는 친구녀석의 목을 비틀어버리던지 아니면 저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정확히 8년.  하지만 나보다 더 반가운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군?"

 

"..."

 

"그새... 두 사람이 그렇게... 가까워졌는지 몰랐는 걸?"

 

자신이 생각해도 아주 잔인한 말투였다.

 

그는 늦은 후회를 했다.  그녀를 레이와 같이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 굶주린 늑대 한 마리가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 했던 자신을 마구 욕했다.

 

"사, 사장님...!!"

 

"..."

 

떨리는 그녀의 음성에 그는 완전히 무시했다.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간... 그녀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잠시라도 봤다간 무슨 일이 생길 지 책임질 수가 없었다.

 

자신의 방으로 끌고오던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그녀 옷을 갈기갈기 찢어 한 녀석에게 보란 듯이 그녀의 몸을 가져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돌아서서 문을 닫았다.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을 닫았던 것처럼 문을 닫아버렸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