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러브송 < 10 >

나비200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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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토요일 오후. 백화점을 향하려던 내 발목을 잡은 것은 집 안 가득 쌓인 배추들이었다.


“엄마, 오늘 김장 해?”

“내가 화요일에 말했잖아. 까먹었다고 도망가려고 했지? 얼른 이리 와 배추 좀 옮겨라.”

“이걸 다?”


누가 요즘 김치 못 먹고 산다고 배추가 산더미였다. 어릴 적부터 엄마의 손이 큰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보기에도 질릴만한 양이었다.


“거기 신문지 깔아놓은 데로 옮겨라.”


배추뿐만이 아니었다. 대파, 쪽파, 무도 일반적인 큰 무와 달랑 무, 두 종류였다.  비닐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한참을 열심히 옮겼다.


“무 씻어 줄 테니 깍두기하게 좀 잘라.”


간신히 옮기자마자 또 다른 일을 주시는 엄마.


“모처럼의 휴일에 김장이라니.”

“모처럼의 휴일은 무슨. 매주 두 번은 놀면서?”

“휴일은 쉬라고 휴일인 거야.”

“뭘 투덜대? 이것 좀 가져가.”


엄마는 내게 큰 무를 휙 던지셨고, 우악스러운 무는 바로 내 옆에 떨어졌다.


“맞을 뻔 했잖아! 엄마! 엄마는 이 딸이 얼마나 고급 인력인 줄 알아? 하루 일당으로 치면 10만원은 줘야한다구. 김장하다 다치면 손해가 얼마야? 이런 고생 말고 내년부터는 사다 먹자!”

“그렇게 돈 많이 벌면서 에미 용돈은 그거야?”

“그야 살 것도 많고, 적금도 드니까 그렇지.”

“맨날 스키장에 퍼붓는 거지. 니가 돈도 모았어?”

“운동은 몸에 좋은 거잖아. 다 자신을 위한 투자라고. 그러다 멋진 신랑감이라도 물어 와봐. 투자한 보람이 있는 거지.”

“공부시켜놨더니 말만 많아졌어. 시끄러. 무는 다 잘랐어?”

“응. 다했어. 이제 뭐하면 돼?”


할당된 무를 조각내 놓고 흐뭇해져서는 물었다.


“양념해야지. 가만 있어봐. 어머! 내 정신 봐라. 액젖을 안 사왔잖아.”

“액젖?”

“내 주머니에서 만원짜리 꺼내서 슈퍼 좀 갖다와. 멸치 액젖 작은 거 두개만 사와.”


엄마의 말대로 츄리닝 바지에 만원짜리 한 장을 찔러 넣고 점퍼를 걸치고는 집 밖을 나섰다. 어제보다도 추워진 날씨였다.


‘이젠 더 이상의 겨울병은 없겠지.’


윤태씨를 만나 내 마음을 모두 털었으니 올 겨울부터는 내 마음이 가벼워질 거라 믿었다.


“이거 얼마에요?”

“삼천 육백 원이요.”


멸치액젖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물었다. 이제 돈을 내고 물건을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단 한번도 물건을 팔아본 적은 없지만 물건을 사는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해온 그런 행동이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내 주머니에 있어야 할 돈이 내게 이별도 고하지 않고 사라져 버려 마법 같은 일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추리닝 주머니가 뻥 뚫려버린 것을 아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기분 나쁜 색상의 액젖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슈퍼를 나왔다.


‘고급 인력 마음껏 부린다고 큰 소리쳤는데 심부름 값이나 잃어버리고 잘하는 짓이다.’


초등학생이나 저지를만한 일을 벌려놓고 덜컥 겁이 났다. 


‘어쩌지? 엄마한테 혼날 텐데.’


잘난 척 하더니 니 나이가 몇 살이니? 심부름 값을 잃어버리게. 라고 할 게 뻔한 엄마를 생각하자 괜히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져 동네를 맴돌고 있었다.


‘어쩌지? 으, 진짜 들어가기 싫다.’


엄마의 잔소리는 한 번 시작되면 그 끝을 몰랐다. 아마도 오늘 밤까지 옛일을 들먹이며 장장 연설을 할 것이 뻔했다. 그 때 갑자기 생각난 것이 윤섭씨였다. 용준씨라면 이런 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만약 윤섭씨가 한 동네 산다면 사정을 이야기하고 돈 만원 정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내가 윤섭씨를 편하게 생각하나봐. 아니, 위기에서 구해줄 왕자님으로 여기고 있나? 어려울 때 생각나는 사람. 그거 좋은 징조일까?’


이 참에 윤섭씨에게 전화나 걸어보자 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이 난 것처럼 걸어보자. 연락처를 줬는데 한번도 전화를 해주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여보세요.”

- 누구시죠?

“저 문희에요.”

- 아, 문희씨.


역시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있었다.


“밖인가봐요?”

- 예. 문희씨도 밖인가봐요?

“아니에요. 잠깐 동네 나왔어요.”

- 오늘 뭐하세요? 시간 있으시면 식사나 같이 하죠.

“오늘은 안돼요. 김장하는 거 돕고 있어요.”

- 빨리 끝내고 오시면 안돼요? 지금 여기 채련씨랑 같이 있는데.

“채련이요?”


‘왜 윤섭씨가 채련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 시간도 1시밖에 안됐는데 일요일 그렇게 일찍 만나 할 일이 뭐가 있다고. 벌써 둘이 친해진 건가?’


- 예.

“시간이 있어도 두 분 데이트를 제가 방해하면 되나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 저, 문희씨! 그거 아니라······.


난 인사도 없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뭐야, 대체? 날 좋아하는 것처럼 굴더니 그게 아니었던 거야? 여자 보는 눈도 지지리도 없이 여우같은 기집애가 뭐가 좋다구. 역시 윤섭씨도 남자야. 그 가슴에 홀랑 넘어간 거지, 뭐.

속으로 윤섭씨와 채련이 욕을 실컷 했지만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둘이 잘 만나게 두나 봐라. 내가 확 찢어놓을 거야!’


“액젖 사왔니? 이리줘.”

“없어. 못 샀어.”

“왜?”

“돈을 잃어버렸어.”


지금 엄마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이 정신 나간 기집애. 니 나이가 몇이야? 니가 초등학생이야? 심부름 값을 잃어버리게?”


예상대로 퍼부어지는 잔소리를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엄마를 도울 기분이 아니었다.


“야! 너 안나와? 너 그러면 김치 먹지 마! 딸이라고 이십 육년을 길러놨더니 손하나 까딱을 안하고 밥은 아직도 입에 넣줘야 먹고. 지가 방청소를 제대로 하나 그렇다고 변변한 남자가 있나······.”

“알았어! 나가면 되잖아.”


엄마의 잔소리는 강했다.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잔소리에 지고 만 것이다.


“일단은 이거부터 해.”


다시 쪼그리고 앉아 무청을 다듬었다.


‘진짜 그 둘 가만히 안두겠어. 둘 다 싫어. 진짜 둘 다 아주 꼴 보기가 싫다구.’


그렇게 다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어머! 아까 채련과 같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 흥분해서 전화를 끊은 거야?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자길 좋아한다고 오해하면 어쩌지? 어떻게, 어떻게.’


윤섭씨에게 그런 오해를 받느니 차라리 용준씨랑 저 사궈요, 하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있는 데로 센 척 해놓고 왜 그런 거지? 아, 오해는 안돼. 절대 안돼. 내가 윤섭씨를 마음에 두고 있긴 했어도 이건 아니지. 채련이랑 있다고 눈이 뒤집힐 정도로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여우같은 채련이에게 넘어간 게 분해서 그런 거야. 맞아. 그런 거.’


하지만 별 위로는 되지 않았고, 배추들이 김치가 되어가는 동안 일요일도 저물고 있었다.


***


“대리님! 오늘 뭐하세요?”

“뭘 하냐니?”

“퇴근하시고 뭐하시냐구요?”

“하긴 뭘 해. 집에 가지.”

“별 일 없으시면 저랑 저녁 먹고 들어가요, 네?”


혜림이가 전에 없이 살랑거리며 말했다. 잘 해줬다고 기어오르나 본데.


“저녁?”

“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한 게 집에 그냥 가기가 싫어서요.”

“남자 친구는?”

“늘 바쁘죠.”


바쁜 남자친구 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다더니 맞는 말인가보다. 심심한 겨울 밤 잠시 밥이나 먹고 들어가고 싶은데도 옆에 있어주지 못하다니. 남자친구가 못된 직장상사보다 못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 아닌가?


“그래. 좋아. 나도 왠지 바로 집에 가기는 싫다.”

“진짜요? 대신 밥은 제가 살게요.”

“뭐 사줄 건데?”

“무교동 낙지 어떠세요? 저는 매운 게 땡기는데요.”

“그거 좋다. 나도 매운 맛 좀 보고 싶다.”

“······?”


사실 내가 매운맛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두 사람에게 매운맛을 느끼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말이 헛나왔다.


과장님의 등쌀이 약해진 요즘은 회사에서 긴장감도 떨어져 설렁설렁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인지 잡생각이 더 드는 것이었다. 잡생각의 실체는 물론 불여시와 눈 먼 늑대. 이럴 때 수다가 동반할 가벼운 저녁 약속은 내게도 신나는 일이었다.


혜림이와 낚지를 먹고 근처 가까운 커피숖에 막 들어갔을 때였다. 채련에게서 전화가 왔다.


- 너 어디야?

“나 광화문 근처.”

- 그래? 잘됐다. 뭐하니? 나 너 좀 만나고 싶은데.

“왜?”

- 친구 사이에 이유가 있어야 만나니?

“지금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데.”


채련이는 회사 동생과 같이 있다고 해도 한사코 만나자고 성화여서 그러라고 했다. 강남에서 일하는 기집애가 문득 친구가 그리워 광화문까지 온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 나도 싸인 것 많으니까 오면 다 이야기 해주자. 윤섭씨 몰래 내게 작업 들어왔었다고 말해주면 열 받겠지?’


채련은 통화 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날 보자마자 입이 찢어져라 웃는 가식적 미소. 그걸 보자 어제의 일이 생각나 내 눈엔 화르륵 불꽃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