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분노와 욕망의 결합>>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버린 시커먼 방문. 지나는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지만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유스케는 그녀의 이마에 살포시 의미있는 입맞춤을 남겨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촉이나 감정이 전해오지 않는 입맞춤이었다. 그는 사토 유키가 돌아온 이상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 비행기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나는 유스케가 언제 돌아가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전혀 그녀가 신경써야 할 부분이 아니었다. 그녀의 뇌는 오로지 그가 언제 이곳에 왔는지, 왜 그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는지에만 열중했다. 그녀는 유키가 자신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땅 속으로 꺼져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유스케에게는 비록 싸늘한 인사로 들리긴 했지만... 그에게는 분명히 아는 척해 주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잘 다녀왔느냐는 말 한마디도 없이... '그는 마치 내가 이곳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어.' 그녀는 늘 그렇듯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동자가 따끔거리더니 눈가가 촉촉해져왔다. 분명히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 흘러나오는 말들은 모두 분노의 단어들이었고 잔인한 억양으로 혀를 굴렸다. 왜... 뭐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 뭐가 그를 화나게 한 거지? 설마... 유스케와 키스를 한 것 때문에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누구와 키스를 하건, 누구와 사귀건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가 화낼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지나는 오히려 그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싶었다. 자신이 다른 남자와 있었기에,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어 키스를 했기에 그래서 유키가 차갑게 변한 것이라고 머릿속에 세뇌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서든 자신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는 남자, 사토 유키... 틈만 나면 어둠속으로 숨어버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겁한 남자. 그런 그가 날 좋아한다고 억지로라도 뇌에 집어넣고 싶었다. "정말 불쌍하구나, 김 지나? 너... 어쩌다가... 이지경이 된 거니?" 뜨거운 액체가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유키의 방문을 바라봤다. 혹시나 자신이 발길을 돌려버리기라도 하면 그가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 것을... 아니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를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그가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두려웠다. 세상과 등지고 사는 남자가 한 여자에게서 사랑고백을 듣는다면 증오하거나 차갑게 콧방귀를 뀔 것이다. '온천가지 말고 곧장 여길 올 걸...' 지나는 두 손을 앞쪽에서 힘껏 꼭 쥐었다. 그는 그녀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가정부도 잘 구해지지 않는 판에 월급받는 가정교사는 '룰루랄라'하며 온천이나 즐기고 있었으니 그 얼마나 화가 났을 텐가. 아까 그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났을 때 그녀는 당황스러워 그의 다친 손을 제대로 보지 못 했다는 것을 알고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그는 많이 서운했을 거야. 그래서 화가 났을 거야.' 적어도 그가 전화했을 때 이곳에 곧장 날라왔다면... 지금처럼 가슴아픈 일은 겪지 않았으리라. 지금처럼 가슴 한켠이 아려오지 않을 것이다. 지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바깥에서 레이 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고 정원으로 나갔다. 레이와 보리는 여전히 행복해보였다. 유키때문에 곧잘 우울해보이더니 지금은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았다. 유스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1층 손님용으로 사용하는 방에서 여유분으로 놔둔 옷으로 갈아입은 듯 했다. 면바지에 흰색 면티를 입은 그의 모습이 줄곧 봐왔던 남자와는 다른 이미지를 던져주었다. 조금은 여유가 있어보였고 더 부드러운 얼굴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의 날카로움을 주는 눈매와는 다르게 입술은 매우 부드럽게 보였다. 그의 입술로 시선이 떨어지자마자, 아까 그와 2층 복도에서 키스를 나눈 것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키 만나봤어요?" 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나보는 것보단...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시커먼 문에서 나오는 살기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긴 벤치에 앉아 스커트 아래로 보이는 잘 빠진 다리를 쭉 펴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에 유스케는 괜히 미안하다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당신 얼굴보면... 다른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스케의 얼굴에 머물렀다. 약간 수줍은 듯한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띄었다. "무례했다면... 미안해요, 지나씨." 그는 언제부턴가 그녀에게 '지나씨'라고 불렀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또다시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는 아까 그녀와 키스했을 때 그녀가 그다지 발버둥을 치지 않아 은근히 속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기대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란 걸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 속은 이미 다른 상대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침침한 복도에서 갑자기 악마와도 같은 목소리가 들렸고 놀라 돌아선 지나의 눈동자는 매우 충격으로 당황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을 때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완전히 의식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돌처럼 완전히 굳어있는 한 여자의 이마에 입술을 맞춘 유스케는 몹시 쓴 맛을 느꼈다.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김 지나는 어둠 속에서만 살고있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유스케는 아직 자지 않고 어두운 마당에서 보리와 뛰어놀고 있는 레이를 불렀다. "그만 들어가서 자거라. 양치질하고." "유스케아저씨는요? 지금 가실 건가요?" 유스케는 녀석이 은근히 가주기를 바라는 투라고 생각했다. 물론 레이가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내일 아침 일찍 갈 거다." "들어가면 보리 발도 닦아줘야 해." 레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지나는 뒤에서 소리쳤다. 씩씩한 아이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마당에 떨어져있는 레이의 운동화를 주워들었다. "피곤하실텐데... 들어가 주무세요." "..." 그녀는 유스케의 대답없는 표정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약간 부담스러웠다. 그의 키스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황홀함을 주거나 몇 만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키스는 아니란 것을 그는 알아야 했다. "유스케...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것뿐입니까?" "..." 지나는 레이의 운동화 끝을 괜히 만지작거리면서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마치 운동화 끈에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유스케가 다가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운동화를 빼앗았다. 그리고 차갑게 물었다. "그게 다냐구요?" "???" 그녀는 함부로 입을 열기가 두려웠다. 무슨 말인가를 내뱉어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싶지 않았다. "그리고... 멋진 남자죠. 매력적이고, 매너있고... 갑자기 키스...를 하는 건 빼구요." 유스케는 그녀의 말에 그냥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화를 단절시키려고 했다. 지금의 이상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싶어 했다. "내일 일찍 돌아갈 겁니다." "아, 네..." 그녀는 전혀 동요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인내를 가지고 이어서 말했다. "혼자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네?" "지나씨하고... 같이 돌아가고 싶군요." 그녀는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 튀어나오는 말을 삼켰다. 그가 자신과 같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줄은 몰랐다. 그 정도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유스케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여자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나씨한테 사모님께서 부탁하셨다고요?" "네? 아, 유스케가 어떻게..." "..." 놀란 그녀를 남겨두고 유스케는 먼저 들어갔다. 그녀는 발길을 돌려 마당을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잠시나마 잊고있었던 카오리의 부탁을 떠올렸다.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유키를 사랑하기 전이라면 그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를 향한 감정이 더 크게 자라고 있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유키를 레이처럼 변화시켜 달란다. 레이는 더이상 혼자로 지낼 수 없다고 했다. 카오리는 오랫동안 고민해왔고, 그만 좋다면 새인생을 찾아주고 싶어했다. 레이에게 새엄마가 필요하듯이 유키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재혼.' 그 한 단어가 그녀의 입속에서 부드러운 혀를 공격하고 있었다. 좋겠군요, 유키... 당신의 새 인생이 바로 눈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는 현실을 비웃었다. 문제는 유키의 마음이었다. 그의 마음만 활짝 열리면 일본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착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지나는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멍청하게도 어리석게도 그런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한 괘씸한 자신의 혀를 잘라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오리 말로는 그 여자는 매우 조신하고 심성이 고운 여자라지, 아마... 좋은 가문에 일본 제일의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스물 두 살의 여자.' 좋은 가문의 여자가 왜 상처투성이의 남자와 결혼하려는 것일까. 더 나은 남자와 멋진 남자들이 많을 텐데. 지나는 카오리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유키를 염려해서 생각해온 계획이었고,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서 부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나는 바보멍텅구리처럼 카오리의 부탁에 대답했다. 미소를 지으며... '걱정마세요. 도와드릴게요. 그 아가씨와 결혼할 수 있도록 제가 사장님을 변화시켜 볼게요.' 갑자기 가슴 한켠에서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쩌자고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질렀을까. 무슨 생각으로... 그녀는 이를 악물고는 힘없이 벽에 기대었다. 유키는 차가운 수영장 물이 시원하게 느껴지자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한번도 쉬지 않고 몇 번이나 수영장을 왔다갔다했고 멈췄을 때 그의 몸은 거친 숨소리에 심하게 들썩거렸다. 얼굴 위로 마구 흐르는 물을 훔쳐내던 그의 머리는 또다시 혼란스러운 감정과 두 사람의 키스장면이 눈에 아른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또다시 수영장을 반복해서 왔다갔다했다.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더러운 기분은 떨쳐내고 싶었다. "손 다쳤다는 거, 거짓말인 줄 알았다." 유키는 어디선가 들리는 남자 목소리에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유스케가 수영장 가쪽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고 서있었다. 친구의 모습을 발견한 유키의 눈빛은 단번에 차갑게 변했다. 그는 수영을 멈추고 물밖으로 나와 유스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유스케는 수건을 집어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친구의 행동에 불만스러웠다. 내민 수건을 무시하고 상의를 걸치고 돌아섰다. 그러다 유스케의 말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너, 지나씨... 좋아해?" "???" 그는 천천히 친구에게로 돌아섰다. 두 남자의 체격은 비슷했지만 유스케는 약간 마른 체형이었다. "다쳤다고 거짓말 할 정도로 좋아하냐고?" 유키는 아직도 수건을 들고있는 친구에게 다가가서 순건을 거칠게 뺏어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로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되물었다. "그러는 넌?" "알면서 묻는 거냐?" "혹시나 하는 거다." "난... 좋아해. 지나씨 좋아한다. 그래서 내일 돌아갈 때 같이 가자고 했다." 유키는 이 자리에서 친구녀석을 반쯤 죽여놓지 않은 걸 나중에 후회할 것만 같았다. 살기가득한 그의 눈동자가 유스케를 응시했다. "그래? 그럼 잘 해 봐. 난 눈꼽만큼도 관심없으니까..." 차갑게 비아냥거리며 돌아선 유키의 어깨를 유스케는 잡아 돌려세웠다. 8년만에 유키의 얼굴을 보게된 그는 돌아가기 전에 볼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지금 넌... 예전에 내가 알았던 사토 유키가 아냐. 이 정도로 달라졌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래? 거 참 안 됐군." 유키는 어깨에 놓여있는 유스케의 손을 탁 치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유스케는 끝까지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다. "유키. 적어도 널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솔직해져야하는 거 아냐?" 그의 말에 유키의 걸음이 느려졌다. 이윽고 유키는 어두운 건물을 쳐다보며 킥킥대며 웃었다. "이것봐, 친구. 그 여자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냐. 내 돈이지." "..." "그리고 바로 너..."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공포스럽게 들렸다.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 다 바칠 여자야. 무서운 여자지. 순결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까지 갖다 버릴 여자야!" "사토 유키! 무슨 뜻이야! 왜 그런 식으로 지나씨를..." "흥! 지나씨? 그래, 너의 그 대단한 지나씨란 여자는 그런 여자야. 순진한 얼굴로 남자를 유혹하고나면 본색을 드러내는 여자지! 원하는 것을 얻고나면 또 다른 먹이감을 노리는 여자! 세상 여자들이 다 그런 것처럼! 알겠어?! 그러니까 당장 둘 다 내 눈 앞에서 사라져!" "그렇게 생각해?!" "..." 두 남자는 서로를 으르렁거리며 노려봤다. 씩씩거리며 숨쉬고 있는 유키의 가슴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었다. "넌 지나씨를 그런 여자로밖에 생각 안 했냐고?" "그래!" "지나씨는 그런 여자가 아냐! 죽은 네 아내같은 여자가 아니라고! 절대!" 유키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유스케는 김 지나가 어떤 여자란 것을 알만큼 그녀와 가까워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그녀에 대해서 자신한다 이거로군.' 유키의 심장은 일찌감치 뛰고있지 않았다. 팔딱팔딱 잘 뛰던 심장이 유스케의 등장으로 멈춰버렸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두 사람 다 사라지는게 좋을 거다! 아니면 네 숨통을 끊어놓는 일이 벌어질 거니까!' 수영장에서 걸어나온 유키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김 지나가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왜... 유스케를 찾으러 나왔나?' 그는 그녀를 완전히 무시했다. 자신에게 향한 모든 시선과 대화들을 차단하기로 했다. "저랑 얘기 좀 해요, 사장님." 그녀는 조금 전 두 남자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다. "..." 그는 그녀를 지나쳐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섰다. 그러자 뒤에서 계단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정확하게 열을 센 후,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저 멀리 있는 희미한 가로등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장님..." 빌어먹을 사장소리!!! 이것도 질투라고 할 것인가? 강열한 분노와 질투로 이글거리는 검은 눈이 그녀의 눈으로 떨어졌다. 지나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운 눈동자만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겁먹지 마. 절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지나야.' 유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머뭇거리고 있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서서 2층으로 올라가 문 앞에 섰다. "저..." "들어 오시오." "???" 계단 중간쯤에 선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분명히 그가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문을 열어둔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지나는 얼른 그가 마음이 변하기 전에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바깥보다 더 어둡다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차마 불을 켜란 말을 하지 못 했다. 유키가 어디에 서있는지 알아내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문 소리가 들리고 발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바로 앞에 그의 체취가 맡아졌다. "지금 바로 제 앞에 계시는 거죠, 사장님?" "..." "여, 영광이네요. 사장님 방에 다 들어오고... 이왕이면... 부, 불도 켜주시지..." 자기도 모르게 더듬거리는 혀때문에 지나는 등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던 그녀에게 차가운 감촉이 손등에 와 닿았다. 물잔인 것 같았다. "마시란 건가요?" "..."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킬 작정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서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아직까지 어둠에 익숙해지지 못 한 지나는 발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만 장단지에 뭔가 부딪혔다. 몸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녀는 얼른 중심을 잡았다. 침대였다. "다시 숨으셨군요?" "???" 유키는 그녀의 말 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 했다. 어디에 뭘 숨는단 말이지. "돌아오면 사장님... 달라지셨을 줄 알았는데... 제가 너무 큰 기대를 했나봐요?" "할 얘기가 뭐요?"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그의 모습이 보였다. "왜 얼굴을 안 보이세요?" "할 얘기가 뭐냐고 물었소." "그렇게 끔찍하진 않아요." "..." "제가 볼 땐... 사장님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이 심하게 다치신 거 같아요." 그녀는 여전히 함부로 입을 놀리는 버릇이 있었다. 버릇없는 혀로 남자를 유혹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키는 이제부터 그녀의 유혹에 넘어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유스케를 선택했으니까.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싶으면... 딴 데 알아 보시지." "네?" "번지 잘못 찾은 거 같군? 내 방이 아니라 1층 유스케 방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오?" 꽈배기라도 먹었나... 그는 상당히 비꼬고 있었다. "사, 사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지만... 전 사장님과 할 얘기가 있다구요!" "그 빌어먹을 사장소리 당장 때려치우지 않으면 가만 안 두겠소!" "???" "할 얘기가 있으면 당장 하고 나가시오!" "난 떠나지 않을 거에요." "..." 유키는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 그 잘난 유스케와 같이 일본으로 가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는 독한 양주를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이곳을 떠나지 않아요. 여기 있을 거에요. 제가 너무 미워서 월급주기 싫을 정도로 미우셔도 할 수 없어요. 전 떠나지 않을 거에요." "더이상 당신 필요없소. 가정교사로서 말이오." "그럼 가정부로 있겠어요." "뭐? 지금 뭐라고 했소?" "가정교사로 필요없다면 가정부로 있겠다구요. 레이 공부시키는 건 공짜로 해드리죠."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자신감에 차있었고, 전혀 그의 태도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더 당당했고 또렷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다. 유키는 또 한모금의 양주를 마셨다. 잔 속에 있는 녹은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혀 희미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내 인내심 테스트하는 거요?" 그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자, 지나는 턱을 치켜들고 천천히 뒤에 있는 침대에 앉았다. "이런 곳에 숨는 거 말고도 사장님께서 잘 하시는게 있던가요?" "지금 뭐라고..." "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전 여기 있을 거에요. 가정부로 말이죠." "흥! 젊은 가정부라..." "그래요..." "뜨거운 피와 매끈한 살결을 가지고 있는 가정부는... 문제거리를 만들 거요." "난 문제거리가 아니에요! 요리도 잘 하고 청소도 잘 한다구요! 레이는 오히려...!" 순식간에 손에 쥐고있던 유리잔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고 그녀의 몸은 뒤로 넘어가더니 벌러덩 누워있었다. 그 위로 유키의 묵직한 몸이 짓누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놀란 지나의 가슴은 놀라움과 묘한 흥분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유키는 그녀가 자신의 몸만 닿으면 흥분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유스케에게 다가갔다. 마음과 몸은 따로 놀겠다? 그렇게는 못 할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키는 독한 양주맛을 그녀에게 전해주려는 듯 깊고 진하게 키스했다. 당황한 그녀는 처음에 반항하더니 차츰 그의 느긋하고 부드러운 키스에 온순한 양이 되어갔다. 그녀는 조금씩 적극적으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는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목을 두르게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간격은 완전히 공기 하나 흐를 틈이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의 혀는 쉴새 없이 그녀의 입 속을 파고들었고 조금의 휴식도 주지 않았다. "이게 바로 젊은 가정부가 만드는 문제거리요." 그가 서로의 입술이 살짝 닿도록 한 후 조용히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욕망으로 허스키하게 변해있었다. "..." "이게 바로 당신이 만드는 문제거리요. 그래도 여기 있겠단 거요?" 그의 한 손이 그녀의 얇은 블라우스 위를 헤매고 있었다. 그 손은 열심히 하나만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풍만한 가슴... "대답해. 이렇게 해도... 있겠단 건가?" 그가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와 가슴을 움켜쥐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고있지 않았던 것이다. "네..." "???" "네. 여기 있을 거에요. 레이 곁에... 그리고... 당신 곁에..." 유키의 입술이 곧장 내려왔다. 조금 전의 달콤한 키스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거칠게 그는 키스했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를 거요." "사장님..." "아니! 두번 다시 사장님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겨 침대 밑으로 던지고 유일하게 남은 얇은 레이스 팬티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유키라고 부르시오." 그는 남은 팬티마저 벗겨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벗은 후, 다시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지나는 그의 뺨을 두손으로 감싸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당신이 보고싶어요." "???" 순간 그의 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아주 실크처럼 부드럽게 자신의 맨가슴을 쓸자, 욕망이 꿈틀거렸다. "난 부끄럽지 않아요." 유키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를 내려다봤다. 나중에 그녀가 돌아선다해도, 다른 사람을 원한다해도 지금은 함께있고 싶었다. 이 순간은 자기 것으로 두고 싶었다. 잠시 후, 침실이 환해졌다. 지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 거리다가 바로 눈앞에서 서있는 남자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가슴 여기저기에 수술자국과 상처자국, 그리고 화상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저번 수영장에서 봤을 때는 결코 이렇게 선명하게 보지 못 했던 상처들이었다. 단단하게 단련된 근육은 갈색으로 잘 그을려져 있었다. 많은 상처자국과 화상들만 아니었어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몸일 것이다. 그러나 지나에게는 그 상처들과 화상자국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혀 무섭거나 징그럽지 않았다. 그의 고통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오는 것을 지그시 참고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주... 남자답고... 너무... 너무... 멋있요." 그녀의 눈망울에서 이내 주루룩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의 몸은 사고당시의 엄청난 고통스러움을 연상시켰다. 그가 받았을 고통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어서 그가 안아주기를 바랐다. "이리 와요." 유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 몸 위에 포개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진정한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끔찍한 몸을 보고는 두려움이 언뜻 스쳤으리라. 동정심에 흘려주는 눈물이라 할지라도 그는 고마웠다. 그녀는 전혀 징그럽다고 인상을 쓰지도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그는 그녀의 이마와 뺨 그리고 코와 턱에 각각 부드러운 입맞춤을 주었다. "처음보다는 덜 아플 거요. 오늘은 절대 그때처럼 아프게 하지 않겠소."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그녀는 흥분으로 아랫쪽이 촉촉하게 젖어있어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괜찮아요. 처음이었지만... 너무 좋았으니까..." "정말이오?" 그의 몸이 천천히 파고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약간 주춤하듯 긴장했지만 완전히 그의 몸이 그녀 몸 속에 점령했을 때는 오히려 신음을 뱉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앞 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신음은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아... 너무 뜨겁군...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아!" 거친 숨을 토해내는 그가 잇사이로 말했다. 그는 조금씩 속도를 올렸고 강약을 조절하는 놀라운 테크닉까지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몸이 있는대로 비틀렸고 그의 남성을 꽉 조이기까지 했다. 유키는 그녀의 부푼 가슴을 거머쥐고는 그녀에게 개걸스럽게 키스를 마구 퍼부어대며 움직였다. 지나는 첫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가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분과 열정 그 자체였다. 배를 강타하는 그의 공격은 결코 고통이 아니라 충격적이고도 환상적이었다. 멋진 행위예술이었다. "아아아...아아...으으음... 아아아..." 유키의 마지막 질주가 이어졌다. 그의 몸에서는 괴음이 들려왔고 극도로 속력이 올라가졌다. 그는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문 채로 마지막 공격으로 몸에 있던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지나는 유키가 잠든 것을 알고 몸을 약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팔이 강하게 그녀를 끌어당겨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몇 십분 전에 맛본 환희와 쾌락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임신! 그녀는 피임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잘 넘길 수도 있겠지만... 2주 전 쯤에 이곳을 떠나기 전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처녀성을 주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기분이었다. 그때는 자신을 원망하고 저주했지만 지금 그녀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바로 자신의 순결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주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는 아직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상태이고 특히나 원하지도 뜻하지도 않은 아기가 덜컥 생겨버린다면 자신을 증오할 것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얻지 못하더라도 증오와 분노를 받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에게 미움 받기 싫었다. '난... 어쩌죠, 유키? 당신이 너무 좋은데...' to be continued
***무례한 남자 유키*** <#16. 분노와 욕망의 결합>
#16
<<분노와 욕망의 결합>>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버린 시커먼 방문. 지나는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지만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유스케는 그녀의 이마에 살포시 의미있는 입맞춤을 남겨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촉이나 감정이 전해오지 않는 입맞춤이었다.
그는 사토 유키가 돌아온 이상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 비행기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나는 유스케가 언제 돌아가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전혀 그녀가 신경써야 할 부분이 아니었다.
그녀의 뇌는 오로지 그가 언제 이곳에 왔는지, 왜 그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는지에만 열중했다.
그녀는 유키가 자신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땅 속으로 꺼져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유스케에게는 비록 싸늘한 인사로 들리긴 했지만... 그에게는 분명히 아는 척해 주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잘 다녀왔느냐는 말 한마디도 없이...
'그는 마치 내가 이곳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어.'
그녀는 늘 그렇듯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동자가 따끔거리더니 눈가가 촉촉해져왔다.
분명히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 흘러나오는 말들은 모두 분노의 단어들이었고 잔인한 억양으로 혀를 굴렸다.
왜... 뭐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 뭐가 그를 화나게 한 거지? 설마... 유스케와 키스를 한 것 때문에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누구와 키스를 하건, 누구와 사귀건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가 화낼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지나는 오히려 그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싶었다.
자신이 다른 남자와 있었기에,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어 키스를 했기에 그래서 유키가 차갑게 변한 것이라고 머릿속에 세뇌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서든 자신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는 남자, 사토 유키...
틈만 나면 어둠속으로 숨어버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겁한 남자. 그런 그가 날 좋아한다고 억지로라도 뇌에 집어넣고 싶었다.
"정말 불쌍하구나, 김 지나? 너... 어쩌다가... 이지경이 된 거니?"
뜨거운 액체가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유키의 방문을 바라봤다.
혹시나 자신이 발길을 돌려버리기라도 하면 그가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 것을... 아니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를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그가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두려웠다.
세상과 등지고 사는 남자가 한 여자에게서 사랑고백을 듣는다면 증오하거나 차갑게 콧방귀를 뀔 것이다.
'온천가지 말고 곧장 여길 올 걸...'
지나는 두 손을 앞쪽에서 힘껏 꼭 쥐었다. 그는 그녀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가정부도 잘 구해지지 않는 판에 월급받는 가정교사는 '룰루랄라'하며 온천이나 즐기고 있었으니 그 얼마나 화가 났을 텐가.
아까 그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났을 때 그녀는 당황스러워 그의 다친 손을 제대로 보지 못 했다는 것을 알고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그는 많이 서운했을 거야. 그래서 화가 났을 거야.'
적어도 그가 전화했을 때 이곳에 곧장 날라왔다면... 지금처럼 가슴아픈 일은 겪지 않았으리라. 지금처럼 가슴 한켠이 아려오지 않을 것이다.
지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바깥에서 레이 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고 정원으로 나갔다.
레이와 보리는 여전히 행복해보였다. 유키때문에 곧잘 우울해보이더니 지금은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았다.
유스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1층 손님용으로 사용하는 방에서 여유분으로 놔둔 옷으로 갈아입은 듯 했다.
면바지에 흰색 면티를 입은 그의 모습이 줄곧 봐왔던 남자와는 다른 이미지를 던져주었다.
조금은 여유가 있어보였고 더 부드러운 얼굴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의 날카로움을 주는 눈매와는 다르게 입술은 매우 부드럽게 보였다.
그의 입술로 시선이 떨어지자마자, 아까 그와 2층 복도에서 키스를 나눈 것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키 만나봤어요?"
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나보는 것보단...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시커먼 문에서 나오는 살기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긴 벤치에 앉아 스커트 아래로 보이는 잘 빠진 다리를 쭉 펴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에 유스케는 괜히 미안하다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당신 얼굴보면... 다른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스케의 얼굴에 머물렀다. 약간 수줍은 듯한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띄었다.
"무례했다면... 미안해요, 지나씨."
그는 언제부턴가 그녀에게 '지나씨'라고 불렀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또다시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는 아까 그녀와 키스했을 때 그녀가 그다지 발버둥을 치지 않아 은근히 속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기대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란 걸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 속은 이미 다른 상대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침침한 복도에서 갑자기 악마와도 같은 목소리가 들렸고 놀라 돌아선 지나의 눈동자는 매우 충격으로 당황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을 때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완전히 의식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돌처럼 완전히 굳어있는 한 여자의 이마에 입술을 맞춘 유스케는 몹시 쓴 맛을 느꼈다.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김 지나는 어둠 속에서만 살고있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유스케는 아직 자지 않고 어두운 마당에서 보리와 뛰어놀고 있는 레이를 불렀다.
"그만 들어가서 자거라. 양치질하고."
"유스케아저씨는요? 지금 가실 건가요?"
유스케는 녀석이 은근히 가주기를 바라는 투라고 생각했다. 물론 레이가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내일 아침 일찍 갈 거다."
"들어가면 보리 발도 닦아줘야 해."
레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지나는 뒤에서 소리쳤다.
씩씩한 아이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마당에 떨어져있는 레이의 운동화를 주워들었다.
"피곤하실텐데... 들어가 주무세요."
"..."
그녀는 유스케의 대답없는 표정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약간 부담스러웠다.
그의 키스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황홀함을 주거나 몇 만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키스는 아니란 것을 그는 알아야 했다.
"유스케...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것뿐입니까?"
"..."
지나는 레이의 운동화 끝을 괜히 만지작거리면서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마치 운동화 끈에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유스케가 다가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운동화를 빼앗았다. 그리고 차갑게 물었다.
"그게 다냐구요?"
"???"
그녀는 함부로 입을 열기가 두려웠다. 무슨 말인가를 내뱉어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싶지 않았다.
"그리고... 멋진 남자죠. 매력적이고, 매너있고... 갑자기 키스...를 하는 건 빼구요."
유스케는 그녀의 말에 그냥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화를 단절시키려고 했다. 지금의 이상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싶어 했다.
"내일 일찍 돌아갈 겁니다."
"아, 네..."
그녀는 전혀 동요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인내를 가지고 이어서 말했다.
"혼자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네?"
"지나씨하고... 같이 돌아가고 싶군요."
그녀는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 튀어나오는 말을 삼켰다.
그가 자신과 같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줄은 몰랐다. 그 정도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유스케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여자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나씨한테 사모님께서 부탁하셨다고요?"
"네? 아, 유스케가 어떻게..."
"..."
놀란 그녀를 남겨두고 유스케는 먼저 들어갔다. 그녀는 발길을 돌려 마당을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잠시나마 잊고있었던 카오리의 부탁을 떠올렸다.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유키를 사랑하기 전이라면 그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를 향한 감정이 더 크게 자라고 있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유키를 레이처럼 변화시켜 달란다. 레이는 더이상 혼자로 지낼 수 없다고 했다.
카오리는 오랫동안 고민해왔고, 그만 좋다면 새인생을 찾아주고 싶어했다.
레이에게 새엄마가 필요하듯이 유키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재혼.'
그 한 단어가 그녀의 입속에서 부드러운 혀를 공격하고 있었다.
좋겠군요, 유키... 당신의 새 인생이 바로 눈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는 현실을 비웃었다.
문제는 유키의 마음이었다. 그의 마음만 활짝 열리면 일본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착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지나는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멍청하게도 어리석게도 그런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한 괘씸한 자신의 혀를 잘라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오리 말로는 그 여자는 매우 조신하고 심성이 고운 여자라지, 아마... 좋은 가문에 일본 제일의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스물 두 살의 여자.'
좋은 가문의 여자가 왜 상처투성이의 남자와 결혼하려는 것일까. 더 나은 남자와 멋진 남자들이 많을 텐데.
지나는 카오리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유키를 염려해서 생각해온 계획이었고,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서 부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나는 바보멍텅구리처럼 카오리의 부탁에 대답했다. 미소를 지으며...
'걱정마세요. 도와드릴게요. 그 아가씨와 결혼할 수 있도록 제가 사장님을 변화시켜 볼게요.'
갑자기 가슴 한켠에서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쩌자고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질렀을까. 무슨 생각으로...
그녀는 이를 악물고는 힘없이 벽에 기대었다.
유키는 차가운 수영장 물이 시원하게 느껴지자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한번도 쉬지 않고 몇 번이나 수영장을 왔다갔다했고 멈췄을 때 그의 몸은 거친 숨소리에 심하게 들썩거렸다.
얼굴 위로 마구 흐르는 물을 훔쳐내던 그의 머리는 또다시 혼란스러운 감정과 두 사람의 키스장면이 눈에 아른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또다시 수영장을 반복해서 왔다갔다했다.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더러운 기분은 떨쳐내고 싶었다.
"손 다쳤다는 거, 거짓말인 줄 알았다."
유키는 어디선가 들리는 남자 목소리에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유스케가 수영장 가쪽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고 서있었다.
친구의 모습을 발견한 유키의 눈빛은 단번에 차갑게 변했다. 그는 수영을 멈추고 물밖으로 나와 유스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유스케는 수건을 집어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친구의 행동에 불만스러웠다. 내민 수건을 무시하고 상의를 걸치고 돌아섰다.
그러다 유스케의 말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너, 지나씨... 좋아해?"
"???"
그는 천천히 친구에게로 돌아섰다. 두 남자의 체격은 비슷했지만 유스케는 약간 마른 체형이었다.
"다쳤다고 거짓말 할 정도로 좋아하냐고?"
유키는 아직도 수건을 들고있는 친구에게 다가가서 순건을 거칠게 뺏어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로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되물었다.
"그러는 넌?"
"알면서 묻는 거냐?"
"혹시나 하는 거다."
"난... 좋아해. 지나씨 좋아한다. 그래서 내일 돌아갈 때 같이 가자고 했다."
유키는 이 자리에서 친구녀석을 반쯤 죽여놓지 않은 걸 나중에 후회할 것만 같았다. 살기가득한 그의 눈동자가 유스케를 응시했다.
"그래? 그럼 잘 해 봐. 난 눈꼽만큼도 관심없으니까..."
차갑게 비아냥거리며 돌아선 유키의 어깨를 유스케는 잡아 돌려세웠다.
8년만에 유키의 얼굴을 보게된 그는 돌아가기 전에 볼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지금 넌... 예전에 내가 알았던 사토 유키가 아냐. 이 정도로 달라졌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래? 거 참 안 됐군."
유키는 어깨에 놓여있는 유스케의 손을 탁 치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유스케는 끝까지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다.
"유키. 적어도 널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솔직해져야하는 거 아냐?"
그의 말에 유키의 걸음이 느려졌다. 이윽고 유키는 어두운 건물을 쳐다보며 킥킥대며 웃었다.
"이것봐, 친구. 그 여자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냐. 내 돈이지."
"..."
"그리고 바로 너..."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공포스럽게 들렸다.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 다 바칠 여자야. 무서운 여자지. 순결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까지 갖다 버릴 여자야!"
"사토 유키! 무슨 뜻이야! 왜 그런 식으로 지나씨를..."
"흥! 지나씨? 그래, 너의 그 대단한 지나씨란 여자는 그런 여자야. 순진한 얼굴로 남자를 유혹하고나면 본색을 드러내는 여자지!
원하는 것을 얻고나면 또 다른 먹이감을 노리는 여자! 세상 여자들이 다 그런 것처럼! 알겠어?! 그러니까 당장 둘 다 내 눈 앞에서 사라져!"
"그렇게 생각해?!"
"..."
두 남자는 서로를 으르렁거리며 노려봤다. 씩씩거리며 숨쉬고 있는 유키의 가슴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었다.
"넌 지나씨를 그런 여자로밖에 생각 안 했냐고?"
"그래!"
"지나씨는 그런 여자가 아냐! 죽은 네 아내같은 여자가 아니라고! 절대!"
유키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유스케는 김 지나가 어떤 여자란 것을 알만큼 그녀와 가까워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그녀에 대해서 자신한다 이거로군.'
유키의 심장은 일찌감치 뛰고있지 않았다. 팔딱팔딱 잘 뛰던 심장이 유스케의 등장으로 멈춰버렸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두 사람 다 사라지는게 좋을 거다! 아니면 네 숨통을 끊어놓는 일이 벌어질 거니까!'
수영장에서 걸어나온 유키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김 지나가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왜... 유스케를 찾으러 나왔나?'
그는 그녀를 완전히 무시했다. 자신에게 향한 모든 시선과 대화들을 차단하기로 했다.
"저랑 얘기 좀 해요, 사장님."
그녀는 조금 전 두 남자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다.
"..."
그는 그녀를 지나쳐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섰다. 그러자 뒤에서 계단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정확하게 열을 센 후,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저 멀리 있는 희미한 가로등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장님..."
빌어먹을 사장소리!!! 이것도 질투라고 할 것인가? 강열한 분노와 질투로 이글거리는 검은 눈이 그녀의 눈으로 떨어졌다.
지나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운 눈동자만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겁먹지 마. 절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지나야.'
유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머뭇거리고 있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서서 2층으로 올라가 문 앞에 섰다.
"저..."
"들어 오시오."
"???"
계단 중간쯤에 선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분명히 그가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문을 열어둔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지나는 얼른 그가 마음이 변하기 전에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바깥보다 더 어둡다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차마 불을 켜란 말을 하지 못 했다.
유키가 어디에 서있는지 알아내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문 소리가 들리고 발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바로 앞에 그의 체취가 맡아졌다.
"지금 바로 제 앞에 계시는 거죠, 사장님?"
"..."
"여, 영광이네요. 사장님 방에 다 들어오고... 이왕이면... 부, 불도 켜주시지..."
자기도 모르게 더듬거리는 혀때문에 지나는 등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던 그녀에게 차가운 감촉이 손등에 와 닿았다. 물잔인 것 같았다.
"마시란 건가요?"
"..."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킬 작정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서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아직까지 어둠에 익숙해지지 못 한 지나는 발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만 장단지에 뭔가 부딪혔다. 몸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녀는 얼른 중심을 잡았다. 침대였다.
"다시 숨으셨군요?"
"???"
유키는 그녀의 말 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 했다. 어디에 뭘 숨는단 말이지.
"돌아오면 사장님... 달라지셨을 줄 알았는데... 제가 너무 큰 기대를 했나봐요?"
"할 얘기가 뭐요?"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그의 모습이 보였다.
"왜 얼굴을 안 보이세요?"
"할 얘기가 뭐냐고 물었소."
"그렇게 끔찍하진 않아요."
"..."
"제가 볼 땐... 사장님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이 심하게 다치신 거 같아요."
그녀는 여전히 함부로 입을 놀리는 버릇이 있었다. 버릇없는 혀로 남자를 유혹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키는 이제부터 그녀의 유혹에 넘어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유스케를 선택했으니까.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싶으면... 딴 데 알아 보시지."
"네?"
"번지 잘못 찾은 거 같군? 내 방이 아니라 1층 유스케 방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오?"
꽈배기라도 먹었나... 그는 상당히 비꼬고 있었다.
"사, 사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지만... 전 사장님과 할 얘기가 있다구요!"
"그 빌어먹을 사장소리 당장 때려치우지 않으면 가만 안 두겠소!"
"???"
"할 얘기가 있으면 당장 하고 나가시오!"
"난 떠나지 않을 거에요."
"..."
유키는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 그 잘난 유스케와 같이 일본으로 가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는 독한 양주를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이곳을 떠나지 않아요. 여기 있을 거에요. 제가 너무 미워서 월급주기 싫을 정도로 미우셔도 할 수 없어요. 전 떠나지 않을 거에요."
"더이상 당신 필요없소. 가정교사로서 말이오."
"그럼 가정부로 있겠어요."
"뭐? 지금 뭐라고 했소?"
"가정교사로 필요없다면 가정부로 있겠다구요. 레이 공부시키는 건 공짜로 해드리죠."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자신감에 차있었고, 전혀 그의 태도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더 당당했고 또렷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다.
유키는 또 한모금의 양주를 마셨다. 잔 속에 있는 녹은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혀 희미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내 인내심 테스트하는 거요?"
그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자, 지나는 턱을 치켜들고 천천히 뒤에 있는 침대에 앉았다.
"이런 곳에 숨는 거 말고도 사장님께서 잘 하시는게 있던가요?"
"지금 뭐라고..."
"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전 여기 있을 거에요. 가정부로 말이죠."
"흥! 젊은 가정부라..."
"그래요..."
"뜨거운 피와 매끈한 살결을 가지고 있는 가정부는... 문제거리를 만들 거요."
"난 문제거리가 아니에요! 요리도 잘 하고 청소도 잘 한다구요! 레이는 오히려...!"
순식간에 손에 쥐고있던 유리잔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고 그녀의 몸은 뒤로 넘어가더니 벌러덩 누워있었다.
그 위로 유키의 묵직한 몸이 짓누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놀란 지나의 가슴은 놀라움과 묘한 흥분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유키는 그녀가 자신의 몸만 닿으면 흥분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유스케에게 다가갔다.
마음과 몸은 따로 놀겠다? 그렇게는 못 할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키는 독한 양주맛을 그녀에게 전해주려는 듯 깊고 진하게 키스했다.
당황한 그녀는 처음에 반항하더니 차츰 그의 느긋하고 부드러운 키스에 온순한 양이 되어갔다.
그녀는 조금씩 적극적으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는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목을 두르게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간격은 완전히 공기 하나 흐를 틈이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의 혀는 쉴새 없이 그녀의 입 속을 파고들었고 조금의 휴식도 주지 않았다.
"이게 바로 젊은 가정부가 만드는 문제거리요."
그가 서로의 입술이 살짝 닿도록 한 후 조용히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욕망으로 허스키하게 변해있었다.
"..."
"이게 바로 당신이 만드는 문제거리요. 그래도 여기 있겠단 거요?"
그의 한 손이 그녀의 얇은 블라우스 위를 헤매고 있었다. 그 손은 열심히 하나만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풍만한 가슴...
"대답해. 이렇게 해도... 있겠단 건가?"
그가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와 가슴을 움켜쥐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고있지 않았던 것이다.
"네..."
"???"
"네. 여기 있을 거에요. 레이 곁에... 그리고... 당신 곁에..."
유키의 입술이 곧장 내려왔다. 조금 전의 달콤한 키스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거칠게 그는 키스했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를 거요."
"사장님..."
"아니! 두번 다시 사장님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겨 침대 밑으로 던지고 유일하게 남은 얇은 레이스 팬티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유키라고 부르시오."
그는 남은 팬티마저 벗겨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벗은 후, 다시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지나는 그의 뺨을 두손으로 감싸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당신이 보고싶어요."
"???"
순간 그의 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아주 실크처럼 부드럽게 자신의 맨가슴을 쓸자, 욕망이 꿈틀거렸다.
"난 부끄럽지 않아요."
유키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를 내려다봤다.
나중에 그녀가 돌아선다해도, 다른 사람을 원한다해도 지금은 함께있고 싶었다. 이 순간은 자기 것으로 두고 싶었다.
잠시 후, 침실이 환해졌다. 지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 거리다가 바로 눈앞에서 서있는 남자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가슴 여기저기에 수술자국과 상처자국, 그리고 화상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저번 수영장에서 봤을 때는 결코 이렇게 선명하게 보지 못 했던 상처들이었다.
단단하게 단련된 근육은 갈색으로 잘 그을려져 있었다. 많은 상처자국과 화상들만 아니었어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몸일 것이다.
그러나 지나에게는 그 상처들과 화상자국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혀 무섭거나 징그럽지 않았다. 그의 고통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오는 것을 지그시 참고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주... 남자답고... 너무... 너무... 멋있요."
그녀의 눈망울에서 이내 주루룩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의 몸은 사고당시의 엄청난 고통스러움을 연상시켰다. 그가 받았을 고통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어서 그가 안아주기를 바랐다.
"이리 와요."
유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 몸 위에 포개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진정한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끔찍한 몸을 보고는 두려움이 언뜻 스쳤으리라. 동정심에 흘려주는 눈물이라 할지라도 그는 고마웠다.
그녀는 전혀 징그럽다고 인상을 쓰지도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그는 그녀의 이마와 뺨 그리고 코와 턱에 각각 부드러운 입맞춤을 주었다.
"처음보다는 덜 아플 거요. 오늘은 절대 그때처럼 아프게 하지 않겠소."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그녀는 흥분으로 아랫쪽이 촉촉하게 젖어있어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괜찮아요. 처음이었지만... 너무 좋았으니까..."
"정말이오?"
그의 몸이 천천히 파고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약간 주춤하듯 긴장했지만 완전히 그의 몸이 그녀 몸 속에 점령했을 때는 오히려 신음을 뱉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앞 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신음은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아... 너무 뜨겁군...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아!"
거친 숨을 토해내는 그가 잇사이로 말했다. 그는 조금씩 속도를 올렸고 강약을 조절하는 놀라운 테크닉까지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몸이 있는대로 비틀렸고 그의 남성을 꽉 조이기까지 했다.
유키는 그녀의 부푼 가슴을 거머쥐고는 그녀에게 개걸스럽게 키스를 마구 퍼부어대며 움직였다.
지나는 첫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가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분과 열정 그 자체였다.
배를 강타하는 그의 공격은 결코 고통이 아니라 충격적이고도 환상적이었다. 멋진 행위예술이었다.
"아아아...아아...으으음... 아아아..."
유키의 마지막 질주가 이어졌다. 그의 몸에서는 괴음이 들려왔고 극도로 속력이 올라가졌다.
그는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문 채로 마지막 공격으로 몸에 있던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지나는 유키가 잠든 것을 알고 몸을 약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팔이 강하게 그녀를 끌어당겨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몇 십분 전에 맛본 환희와 쾌락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임신! 그녀는 피임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잘 넘길 수도 있겠지만...
2주 전 쯤에 이곳을 떠나기 전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처녀성을 주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기분이었다.
그때는 자신을 원망하고 저주했지만 지금 그녀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바로 자신의 순결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주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는 아직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상태이고 특히나 원하지도 뜻하지도 않은 아기가 덜컥 생겨버린다면 자신을 증오할 것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얻지 못하더라도 증오와 분노를 받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에게 미움 받기 싫었다.
'난... 어쩌죠, 유키? 당신이 너무 좋은데...'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