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9> 뜨겁고 뭉클한 가슴...

초록물고기2005.02.01
조회1,833

 동준이 그 말끝을 흘리며 스르르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말없이 사무실을 나온 진서가 자신의 방으로 와 얇은 홑이불을 꺼내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작게 코를 골며 금방 깊은 잠속에 빠져 버린 듯 소파 깊숙이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가져온 이불을 그 위로 펴덥어 주던 진서가 조용히 그 앞에 마주앉아 잠든 동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한참동안 동준의 얼굴을 보라보고 있던 진서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그 이마에 닿아 선을 거어며 콧등과 인중을 지나 입술에 잠시 멈추었다 다시 턱으로 내렸다. 그리고 살며시 들어낸 그 손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가 눈을 감은 채 동준에게 드리웠던 그대로 선을 거어며 내렸다. 두 눈을 감은 채 깊은 호흡을 들이마시던 진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서가 사무실을 나가고 동준이 눈을 떴다. 희뿌옇게 번지든 술기운이 삽시간에 말끔히 깨어 그 심장이 호흡을 조절하지 못할 만큼 떨리고 있었다. 진서의 손이 그 입술에 잠시 멈추어 있던 한순간 동준이 떨리는 가슴을 더 참지 못하고 목까지 차오른 숨은 뱉어낼 뻔 했다.

 한참 동안 그 떨림을 붙잡고 있던 동준이 불현듯 진서가 닿았던 이마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가 보았다. 또 다시 그 느낌이 되새겨지는 듯 가슴이 조여 왔다.

 

  - 너...!!  도대체 누구니?


 방으로 와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펜을 만지작거리든 진서의 머릿속으로 동준의 뜨거운 느낌과는 또 다른 정재의 맑고 은은한 얼굴이 떠올랐다. 동준을 보아 느끼는 것은 가슴이 뜨거운 뭉클함이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느낌이 알 수 없이 쓰라리고 아팠다. 마음껏 웃지 못하는 그 그늘이 마음 쓰였고 밝은 태양을 가린 듯한 그 기운이 저렸다.

 

 그 느낌 뒤로 한없이 깊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정재의 편안한 얼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하루를 본 것이 전부인데도 자신을 다 읽고 있는 듯한 그것이 혼란스럽기도 했다. 거침없이 다가서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자신 또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졌던 것을 떠올렸다.


 술기운과 함께 잠을 잃은 동준이 여섯시가 다 돼서야 어설피 잠이 들었다. 또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이  전보다 더 생생하고 익숙하게 동준을 찾아들었다. 서로의 시선을 한순간도 놓지 않은 채 깊은 새벽의 고요를 떨리는 가슴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 종현아!

  말해라.

- 나를 다 보이지 않는 내가 서운치 않느냐?

  서운하다.

- 내 뜻대로 이리 왔다 시름만 흘리고 가는 것이 불편치 않느냐?

  불편하다.

- 서운하고 불편한 사람을 기다리느냐?

  기다린다.

- 그래서 네가 좋은 모양이다. 말하지 않는 나를 참아주고 내 시름을 나눠 가지려 애쓰는  너를 알아

  자꾸 이곳에 오고 싶은 모양이다.

  가벼워 좋은 것만 가지고 싶지 않다. 네 무심함이 길어 내게 소원한 그것도 상관치 않는 다.

  다만 너를 보아 힘든 것은…네게 내려앉은 그 무게를 한 점도 들어낼 수 없는 나다.

- 내 이기심이 너를 자꾸 무겁게 하는구나.


그가 빈 술잔을 채우려 하자 종현이 술병을 먼저 들어 치웠다.

- 오늘은 그만 해라. 눈을 붙이고 좀 쉬도록 해라.

  그래. 피곤하구나. 너무도 길고 피로한 하루였다.


 그가 몽롱한 정신을 놓으려는 듯 혼잣말을 흘렸다. 긴 하루를 버텨낸 육신이 이미 지쳐 한 점 기력도 남아있질 않았다. 불편했던 긴장과 무거웠던 감정을 종현을 만나 허물어지듯 토해내 술기운속에 그대로 자신에 풀어놓았다. 모든 것이 정지돼 고요만이 내려앉던 새벽 그를 보고 앉은 종현의 가슴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꿈길처럼 몽환의 아득한 기분이 들어 현실의 사람이 아닌 듯 착각마저 가져오고 있었다.


 [도대체 너를 보는 내 눈에 무엇이 담긴 것이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네가, 보이는 그대로의 너인지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다.]


 동준이 꿈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창으로 들이치던 햇살이 얼굴에 그대로 비쳐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올려 빛을 가렸다. 진서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다 동준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빛을 등진 채 자신을 보고 선 진서의 모습에 동준이 한순간 숨이 막혔다. 부서지는 햇살만큼이나 얇게 흩어지는 그 미소가 동준의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네가, 보이는 그대로의 너인지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가 없다...

 

 동준이 몸을 일으켜 블라인드를 내리는 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 수 없이 울려 되던 그 가슴속으로 꿈속의 그것이 영사되어 빛 속에 서 있는 진서와 뒤섞이고 있었다.

 

  - 바라보았다.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을 놓아버린 창백한 그 얼굴에서 한순간도 눈을 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정지돼 고요만이 내려앉던 새벽 그를 보고 앉은 종현의 가슴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 왜 자꾸 그 속에 니가 묻어나는 건지...

   그렇게 바라보고 있던 그 얼굴이 어째서 니 얼굴위로 내려앉는 건지...   

   지금 내가 느끼고 보는 이것이 무엇인지 갑자기 두려워진다.


 동준이 모호한 그 감정들에 휩싸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데스크로 걸어오는 진서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다 문득 새벽의 그 떨림이 떠올라 묘한 웃음이 번졌다. 자신에게 내 보이는 동준의 그 표정에 진서가 귓불까지 빨개져 머뭇거리며 물었다.

  “왜......그렇게 웃는 건데요?”

  “넌.....왜 그렇게 놀라는데?”

  “놀라긴...내가 뭘요.”

  “잘 잤니?”

  “회원들 올 시간 됐어요. 피곤하면 들어가서 좀 더 주무세요?”

  “한번 깼는데....잔다고 잠이 오냐.”

 

 동준이 몸을 일으켜 불편하게 잠들었던 팔다리를 풀었다. 키에 맞지 않은 소파에 웅크리고 잤던 탓인지 어깨가 뻐근하게 결리고 있었다. 샤워를 하면서 알 수 없이 기분이 들뜨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온 정재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창고로 가 처박아 두었던 의서들을 꺼내 놓았고 3년을 해매고 다닌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들뜬 모습이었다. 서규식이 돌아온 아들이 반가우면서도 갑작스럽게 변한 태도에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밝게 돌아온 건 기쁘다만 니가 이르는 거 니 애미는 불안한 모양이다.”

  “이젠 걱정하지 마세요. 공부도 다시 시작할거고...또...아버지가 말씀하신 그분께 치료도 받아볼 겁니다.”

 

 서규식이 정재의 말에 자못 놀라고 있었다. 치료를 꺼낼 때마다 불같은 히스테리를 부리며 거부하던 그가 너무도 태연하게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면서도 떠나있는 동안 큰 변화가 생긴 듯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고 있었다.

 

  “놓아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너는 언제나 내 기대에 한 치 어긋남이 없는 아들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었다.”

  "그래서 늘 방향을 잃지 않으려 노력합니다..절 믿으주셔러.."

 

 서규식이 따스한 얼굴로 정재를 보았다. 거칠것 없이 내 달리다 너무 크게 흔들린 그 나무가 상하지 않을까 내심으로 속을 많이 태운 그였다. 다시 재자리를 찾아  돌아온 아들이 너무도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내일 저녁에 중요한 모임이 있다. 너 괜찮다면 함께 가지 않겠느냐. 우리회사에 큰 힘이 될 사람을 만나는 자리다."

  "예. 함께 갈게요."

 

 서규식이 힘겹게 우정건설을 인수해 자리를 잡은지 벌써 10년이 넘고 있었다. 그 세월동안 수없이 몰아친 풍파로 사업에 정도가 없음을 깨닳은 그가 조금씩 다른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방으로 올라온 정재가 침대에 누워 시골집과 진서를 떠올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둑길을 걸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이 처음보다 편하게 마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전히 식지 않은 밤공기가 후덥하게 몸을 데우고 있었지만 서로를 느끼는 존재감이 그 열기를 잠재우고 있었다.

 

  “나 자주 내려오고 싶어질 것 같은데.....”

  “........”

 

진서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정재가 그 얼굴을 빤히 보다 웃었다.

 

  “아니다.....같이 내려와요. 내가 진서씨 일하는데 가서 태워오면 되겠다.”

  “이상해요. 꼭 나를 알고 찾아 온 사람처럼....”

 

 시원하게 웃는 그 얼굴이 너무도 정겨워 어떤 것도 거부하지 못하고 있었다. 티 없이 정돈된 맑은 얼굴이 편안함을 주고 있었고 자신의 속마음을 거침없이 털어놓는 모습에 진서가 마음의 경계를 풀어내고 있었다.

 

 새벽까지 강바람을 맞으며 마루에 앉았던 두 사람이 간간히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많은 말이 없었어도 진서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함에 정재의 심장이 그 영혼을 않아 가지고 있었다.

 

 늦은 잠으로 피곤함이 싸였던 진서가 정재와 함께 차를 타고 올라오다 잠이 들었다. 몇 마디를 주고받다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려본 정재가 잠이 든 그 얼굴에 빙긋이 웃었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고개를 떨군 채 새근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국도로 빠져나와 적당한 나무그늘에 차를 세운 정재가 잠이 든 그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함께 가진 사람이었다.

    정을 주고자 하는 그 얼굴에 깃든 유함이 너무도 따스해

    보고는 가슴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창공을 품어 가질 만큼 넓은 가슴을 가졌었고

    한겨울 강 얼음을 녹일 만큼 뜨거운 심장을 가졌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고 있는 것이 더 서러웠던 나를 기억한다면...

    그 세월 피로 뭉친 가슴으로 살았던 나를 안다면....

    이제는 나를 돌아봐다오.

    그 마지막을 지켜보며 산산이 부서진 내 가슴이 아직도 핏물에 젖어있다.]

 

 

    

 샤워 실에서 나온 동준이 봉걸레를 밀고 있는 진서에게로 다가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진서가 멍한 눈으로 보고 있다 별말 없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넓은 클럽 안을 밀고 들어온 동준의 얼굴에 땀이 맺혀 있었다. 아침부터 29도를 윗도는 8월의 더위가 클럽 안을 후텊하게 데우고 있었다.

 

  “하......!! 숨 넘어 가겠다...진서야...물 한 잔 주라.”

 

 진서가 건네준 한잔을 단숨에 마신 동준이 에어컨을 켜고 소파에 앉았다. 늘 하던 것처럼 신문을 펼치고 그 속에 코를 박고 있던 진서를 바라보고 있던 동준이 슬며시 장난기가 발동했다.

 

  “진서야....배고프다.”

  “선식 있는데...타 드려요?”

  “그것 말고 사람이 먹을 건 없냐?”

 

진서가 쌜쭉한 표정으로 동준을 쳐다봤다. 장난을 걸어오는 동준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 먹을 건 없는데...”

 

 동준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좀 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진서가 마지 못해 그 얼굴을 마주보고 물었다.

  “뭐 사다줘요?”

  “........”

 

말없이 스포츠 신문을 뒤적거리든 동준이 들어오는 회원에게 인사를 건네는 진서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진서야!”

  “........”

  “심심하다..!!”

  “........”

  “진서야!......놀자.”

  “..........”

  “진서야!.......심심하다...놀자.”

 

 동준이 입가에 미소를 걸고 그 눈동자를 진서에게 고정한 채 계속 그렇게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모습을 보여도 다 보아주고 다 들어줄 것 같은 그것에 동준이 어린아이 마냥 무게를 버리고 있었다.

 

 클럽에 온 그때부터 모든 순간 속에 그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는 진서를 동준이 그렇게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움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곁에 있는 그 순간이 가슴 떨리고 있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웃을 수 있었다.

 

 동준이 자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에 놀라며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에 한껏 젖어 있었다. 그러다 걸려온 한통 전화에 그 얼굴이 삽시간에 변해갔다. 무겁게 내려 깔리 저음의 목소리가 동준을 찾았다.

 

  “예. 지금 가겠습니다.”

 

김종두였다. 짧은 두 마디 대답으로 끊어진 그 통화가 동준에게서 남아있던 가벼운 기운들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했다.

 

  “....나 나가봐야겠다.”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동준이 사무실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클럽을 나갔다. 무겁게 드리워진 그 어깨가 뒤에서 지켜보고 선 진서의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동준이 룸으로 들어서자 한필중과 김종두가 나누고 있던 얘기를 멈추었다. 오랜만에 동준을 보는 김종두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오랜만이다.”

  “예. 형님도 별일 없으시죠.”

  “그렇지 뭐......니가 할 일이 있어 불렀다.”

  “뭡니까?”

 

 한필중이 동준의 잔에 술을 따르며 그 얼굴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서도 알 수 없는 놈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까이 두면서도 늘 경계를 하고 있었고 또 버리고 싶지 않은 묘한 놈이었다.

 

  “저번 일 깔끔히 처리했더구나.”

  “........”

  “너한테 맞기면서도 니 성격을 알아 남은 일을 또 한번 청소해야 되지 않을까 염려 했는데....생각지 못했던 부분까지 깨끗하게 마무리 했더구나.”

  “잡초가 되지 못할 태생이라면 한번으로 끝내주는 게......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어설프게 밟아 놓면 또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서 똑같은 낫질을 당할텐데...양쪽도 사람이 할일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역시나...먹물 튕긴 놈은 다르구나.”

  "경도건설 문제는 별탈없이 해결된걸로 안다."

  "예. "

 

한필중이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우리하고 함께 일할 우정건설에 건림돌이 되는 인물이다. 이번 입찰에 참가 못하게 해라. 그 쪽에도 뒷배가 없지 않으니 우리 쪽 들어내지 말고 피 묻히지도 마라. 그래서 너한테 맏기는 거다. 다른 아이들 시켜 일 복잡하게 만들면 도리어 우리가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오입 즐기는 외엔 틀어도 별다른 먼지 없는 자니 다음은 니가 알아서 해라.”

 

한필중이 자리에서 일어서 동준의 어깨를 힘주어 눌렀다.

 

  “종두하고도 오랜만일 테니 회포 풀고 가기 전에 사무실에 들러라.”

  “예.”

 

 한필중이 나가고 김종두와 마주 앉은 동준이 속도 풀지 못한 심장에 독한 술을 부었다. 그 앞에서는 굳이 싫은 내색을 숨길필요 없어 동준이 편치 않은 그것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었다.

 

  “쉽지 않을 거다.”

  “어떤 사람입니까?”

  “될 수 있으면 너한테 안 맏길려고 했는데....사장님께서...”

  “집엔 별일 없으시죠.”

  “아버지가 가끔 니 얘기 하신다. 나하고 일하는 거 늘 못마땅하게 여기신다. 나도...너..”

 

동준이 김종두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중간에 받아갔다. 그와의 인연도 끊어내지 못할 긴 사설로 십년이 넘게 그렇게 이어오고 있었다.


-11년 태성고등하교..

 

 맞은편 여학생 기숙사의 강간사건으로 온 학교 안이 벌집 쑤셔 놓은 듯 발깍 뒤집혀 있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제일 첫 수순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불량써클 맴버들의 색출이었다. 교무담당을 맞고 있던 김혁규에겐 무작위로 녀석들을 후려야 할 막중한 책임이 전가되어 있었다. 김종두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던 아버지였다.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져 여학생이 자실 기도를 하며 정신이상으로까지 되어 누구든 재수 없게 몰리기만 해도 인생 하차할 태풍이 태성고로 몰아치고 있었다. 사회 통념으로 보면 그런 문제일수록 집안에서 입단속을 해 당한 여학생이 이사를 하고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누구의 입김있었는지 태성고 교장실까지 경찰이 찾아와 강압 수사를 시작했고 학교안의 은밀한 리스트가 그들에게 넘어갔다.

 

 운동부 녀석들이 몇 모여 술을 마시다 객기로 시작된 그 일이 그렇게 번져 김태수의 목줄을 조여오고 있었다. 그 불안감에 밤잠을 슬치며 초조해 하던 태수 앞에 반쯤은 리스트를 좁힌 경찰이 찾아왔다. 체육부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대며 자신을 읽고 있는 듯한 싸늘한 기운을 내 뿜자 김태수가 더 버티지 못하고 부모에게 그 사실을 털어 놓았다.

 

 논밭으로 널려있던 일대의 그린 밸트가 풀려 졸지에 상위층으로 인생역전을 해버린 김조환이 마른날 날벼락 같은 아들의 말에 정신이 아찔했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편하게 살아지지 않는 것처럼 김조환이 시시때때로 벌려대는 태수의 뒤처리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하나뿐인 혈육 앞에 냉정할 수 없었다.

 

  “일이 될만한 자가 누가 있나?”

  “태수하고 같은 반에 있는 이동준이라는 애 냉동공장에 있는 이홍필이 아들입니다.”

  “....이홍필이 아들....”

 

 며칠 후 이홍필이 또 다시 고주망태가 돼 부두에서 객꾼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이미 소문난 주정꾼에 주먹질로 단 별이 여섯이나 치렁치렁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홍필과 주먹질을 했던 남자가 반 초죽음이 돼 선착장에 버려져 있었다. 옆구리에 칼까지 그어져 명백한 살인혐으로 이홍필이 지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