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88. 양봉일 그만두기

무늬만여우공주2005.02.12
조회2,649

랑은 겨울 내내 심심해서 맴을 돌았다.
젊은 남자가 할 일이 없는 것도 벌이다. 그 당시에 카드 놀이가 교민 사회에 유행이 되었다. 친구들은 어느 집이고 모이면 카드 놀이를 하게 되었다. 카드 놀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랑. 대학 시절에 배운 카드 실력으로 친구들 집에 돌아가며 모여서 포카를 쳐댔다.

그 놀이가 길어지며 돈이 왔다갔다하며 와이프들은 진저리를 쳐댔다. 집집마다 부부싸움이 일어나고 친구들이 오는걸 싫어하게 되었다.

난 시골에서 올라와서 그저 사람 모이는 곳이라면 좋아서 한 밤중이라도 랑을 쫓아가서 졸다가 오곤했는데, 나중엔 정말 어디 나가자면 괴로웠다. 집에 있고 싶었다. 자기 혼자가서 치면 어디가 덧나나. 난 아이 데리고 피곤해서 싫다고 했다. 그랬더니 허구헌날 외박이 아닌가. 그렇게 되니 자연 싸움하는 날이 늘어갔다.

'비행기표만 해달라. 그럼 난 그냥 한국으로 가겠다.'
이게 내가 매일 부르짖는 이야기였고, 랑은 랑대로 내게
'지금 당분간은 내가 할 일을 못찾았으니 이대로 봐달라' 였다.

밖으로 도는 랑을 집에 붙들어두기 위해서 차라리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라고 했다.

랑은 좋아라 하며 친구들을 허구헌날 집으로 불러들였다.

보통 예닐곱 사람이 모여서 밤새 포카를 치는데 끼니 때가 되어도 도통 움직이지를 않으니 미칠지경이었다. 밥도 해주고 라면도 끓여주고 밤참 내가고 중간에 간식거리 주고 과일 깍아내고 하다보니 도대체 내가 뭔짓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랑 친구 중 하나가 제의를 했다.

"야야~ 제수씨 너무 힘드니까 고리 뜯어서 주자"

그렇게 하다보니 지네들은 밤을 새워서 포카를 해대도 딴 사람이 별로 없고, 난 중간에 밥주고 간식주며 나중에 결과적으로 나만 돈이 수북했다.
처음에는 포카 구경하고 외로운 시골 생활로 인해 한국 사람들 모여서 이야기 하는 것을 듣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는데 슬슬 그것도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랑은 백전백승이라 단 한번도 잃은 적이 없이 따기만 하니까 주위 친구들은 나중에 돈을 안가져오고 외상으로 치기 시작했다. 작은 돈이지만 주위 친구들에게 받을 돈이 많아지니 그 친구들이 랑만 보면 슬슬 피하는게 아닌가. 참 친구잃고 돈 잃는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부다.

게다가 형형 하며 따르는 후배들은 왜그리 많은지 조폭처럼 우르르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녔다. 그 동생들 다 챙기며 좋은 형노릇하며 자기는 대우받고 좋은가 모르지만 난 그 동생들 챙겨주며 짜증날 때도 많았다.

한 번은 새벽 다섯 시에 들어오며 초인종을 있는대로 눌렀다.
자다가 짜증이 나서 문 열어주러 나갔더니 랑 뒤에 동생삼은 녀석들이 열명은 있는게 보였다. 아무리 사람 좋아도 그렇지 세상에 이 새벽에 사람을 저렇게 몰고 다니며 또 이 시간에 저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끌어들인다는게 너무 화가났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랑 체면 살려주기 위해 난 되도록이면 화를 안낸다. 하지만 그 날은 문을 열어주며 내가 짜증을 냈다.

"뭐야, 양심도 없어. 이 시간에 웬 사람들을 이렇게 데리고 와. 예의도 없이 이 시간에 오라고 또 쫓아오는 사람들은 뭐야."

그 말을 들은 랑은 그 자리에서 자기 자존심 다치게 했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자기 삶에 있어서 그런 대접 받고는 못산다나.
뒤에 있던 후배녀석들은 랑을 붙들고 말렸고, 난 나대로 맘대로 하라며 문을 걸어잠궈버렸다.랑은 그 길로 홧김에 집을 나가 3일만에 들어왔다.

혈기 왕성한 나이. 말다툼과 싸움은 이틀에 한 번씩 일어났다.

그 와중에 동생들 중 한 명이 아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신랑은 그 동생이 불쌍하다고 우리집에서 데리고 있자고 했다. 그래도 그 동생이 제일 싹싹하고 예의 바른 친구였는데 안됐다 싶어서 1년 반을 집에서 데리고 있었다. 형수님 형수님 하며 하는 행동도 귀여웠고 랑이 시골에 가서 일을 하든 어디 옷 장사를 하러가든 쫓아다니며 랑을 도와줬다.

아이들도 삼촌이라며 잘 따랐다. 그 후배가 집에 있으면서 랑도 차츰 자기 생활 리듬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신문을 사서 매물로 나온 차를 새벽에 현찰 들고가서 싸게 사온 다음 바로 광고를 내서 500불 비싸게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

그건 꽤나 짭짤했고,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 집에는 정해진 차가 없이 허구헌날 차가 바뀌게 되었다. 빠를 때는 이틀만에도 차종이 바뀌었다. 오늘은 티코타면 낼 모레는 르망 타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가게가 없이 하는 일이어서 아르바이트 일거리 밖에 안되었다.

그 후배를 데리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옷을 팔러 파라과이 브라질 국경에 다녀오고는 했다.

돈이 된다고 하면 작은 일이라도 닥치는대로 다했다. 집에서 빈둥거리며 노는 상태에서 나와 부부싸움하며 내게 백수건달이라는 욕을 들은 랑은 그 말을 안들으려고 이 일 저 일 했지만 마땅히 할 만한 일이 눈에 안띄였는지 하는 일이 종류만 많았지 도무지 안정이 되지 않아보였다.

시골의 양봉일도 완전히 손을 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비로 인한 피해가 많아서 전적으로 매달리기도 불안한 상태였다. 그래서 시골 집에다 우리 방 살림살이를 그대로 놔둔 채 카피탈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파트에서는 손님처럼 몇 달을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사는 게 참 서글펐다.

한국처럼 바닥이 보일러가 되어서 따뜻한 것도 아니어서 바닥에서는 냉기가 올라왔다.

랑은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양봉일을 그만 두고 다른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을 찾든지 아니면 양봉에 다시 전적으로 매달려야 할지.

내 건강 상태가 시골에 다시 내려 갈 상태가 아니었고, 또 시골만 가면 알레르기가 도져 천식과 기침이 시작되니까 랑은 고민이 되었다. 벌통의 상태도 안좋고, 여러가지 조건이 양봉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랑은 마침내 결단을 내려 최소한의 것만 놔두고 벌통을 다 팔기로 했다.
양봉업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규모가 꽤 컸기 때문에 우리 벌통을 살 작자가 금방 나설까도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신문 광고를 보고 어느 양봉업자가 넘겨받기를 원해 시골의 우리 정성이 뭉쳐져 있던 창고와 함께 팔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