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러브송 < 17 >

나비200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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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가만 보니 이 남자 이 곳이 영화관 안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은 것처럼 곤하게 자고 있었다. 입을 오물거리며 자는 그의 잠이 달아 보이는 만큼 나에 대한 무례가 큰 것처럼 생각이 되었다. 


‘도저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아니, 참을 이유가 있나?’


결국 그의 무례함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막상 나가는 내 모습은 몰래 야반도주라도 하는 폼이었다. 갑작스레 눈을 뜬 윤섭씨가 어디 가세요, 라고 묻는다면 곤란한 일이니까. 다행히 무릎이 약간 스쳤음에도 윤섭씨는 깨지 않았다.


‘정말 별꼴이지.’


조심스레 컴컴한 상영실을 나오자 대기실에는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 하긴 보통 사람이라면 잘 시간이니까. 당장 도로로 달려 나가 택시를 잡아탈 생각이었던 나는 공연히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봤다가 다시 대기실로 나와서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는 호호 불어대며 화풀이를 해댔다.


‘잠깐, 내가 왜 가야 하는 거야? 표도 내 돈으로 두장이나 샀는데. 보고 싶던 영화이기고 했고 그냥 가기는 아깝잖아.’


아마도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분이 삭혀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다. 사실은 무서웠다. 겨울 밤 새벽 혼자 택시를 잡을 것을 생각하니 음흉한 눈빛을 보내는 택시 운전수를 만나서 커피 한 잔 하자고 하자면 어쩌지 하는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었다.


‘영화도 영화지만 비겁하게 도망갈 이유가 없잖아. 따끔하게 충고를 해주어야겠어.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저러다 어떤 여자를 만나도 퇴짜를 맞을 테지. 생긴 건 멀쩡하다 했더니 여태껏 연애를 못한 이유가 있었군. 인생이 불쌍해서라도 한마디 해줘야겠다. 난 왜 이리 착한 거야?’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상영실로 들어서는데 재미있는 장면을 놓친 것은 아닐까하는 조바심마저 들었다.


“화장실 다녀오세요?”


부스스하게 일어난 윤섭씨가 물었다.


“일어나셨네요?”

“일어나다뇨?”

“아까 잤잖아요.”

“누가요? 제가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더 우기다가는 내가 바보가 되는 분위기였다. 너 꿈꿨니, 하는 윤섭씨의 눈빛은 녹음이라도 해두었냐, 그게 아니라면 우기지 말아라, 하는 듯한 청렴결백한 것이어서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희씨, 피곤해요?”

“피곤하죠. 시간이 몇 시인데요?”

“그래도 졸지 말고 봐요. 이 영화 재미있어요. 두 번 봐도 재미있네요.”


한 술을 더 떠 나에게 졸지 말라고 하는 이 남자. 대꾸를 하자니 더 기막힌 말을 들을까 할 수 없이 윤섭씨 말대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스크린에 집중을 해보았다.


***


다른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윤섭씨의 안정된 운전만은 마음에 들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영화를 본 후 바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희씨 뒤에 쇼핑백 있거든요. 그것 좀 꺼내 주실래요?”

“이따 꺼내세요. 저 내리고 꺼내시면 되잖아요.”


화가 나 있는 나는 그의 심부름이나 할 생각이 없었다. 예의 없는 여자라고 욕하려면 욕하라지. 나도 영화보다 잠이나 자는 남자라고 소문내면 되지 뭐.


“문희씨 줄 선물이에요. 좀 꺼내 줘요.”


‘내게 선물을? 나름대로 신경은 썼나본데.’


“으흠. 저 선물 달란 적 없는데요. 그리고 저 용준씨와 윤섭씨 동시에 만나고 있다는 것 잊으신 건 아니죠? 선물을 받는 것은 공평치 못하다고 생각해요.”

“용준이라. 용준이랑 한 여자를 두고 싸우고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말이군요. 잘 알고 있죠.”

“······.”


‘왜 화난 척 하는 거야?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일부러 바로 손닿는 곳에 두었어요. 꺼내주세요.”

“싫어요. 받지 않겠어요.”

“부담될 만한 것은 아니에요.”

“싫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싫다면 할 수 없죠.”


끼익-.

“어머!”


윤섭씨의 차는 도로에 급정거를 하고 섰다. 차가 없는 도로였지만 갑작스러운 멈춘 덕에 내 몸은 앞으로 쏠려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도 윤섭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벨트를 풀려내더니 기어코 쇼핑백에서 책 한권을 꺼내 내 무릎에 얹어 주었다. 그리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


‘이거 뭐야? 정말 제멋대로잖아.’


“제가 좋아하는 사진작가의 사진집이에요.”

“고집 정말 대단하시네요.”

“예전에 캐나다에 갔을 때 산 거예요. 사실 새 책으로 드리고 싶었는데 한국에는 나와 있지 않은 책이라서요.”

“이렇게 귀한 것을 주셔도 되요? 다시 못 보신다면 아까우실 텐데.”

“요즘은 인터넷으로 구입할 수 있으니까 저도 다시 살까 했죠. 그런데 그럴 필요 없겠더라고요. 앞으로 한 집에서 살게 된다면 한 권으로 족하잖아요.”


‘누가 누구랑 한집에 살아? 웃겨, 정말.’


“살 필요 없다는 말은 맞을 거예요. 남 물건 갖고 있는 취미는 없으니 택배로 보내드려도 되니까.”

“벌써 이별을 준비하시는 건가요?”

“그건······.”


당신 같은 남자에겐 취미없다, 분명히 말할까 하다 그만 두었다. 굳이 전 용준씨에게 가게 될 것 같군요,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 말이 있죠. 남자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면 저 여자랑 사랑에 빠지면, 하는 상상을 하지만 여자는 멋진 남자를 보면 이별부터 생각한다는 말이요.”

“마음대로 생각하시는 버릇이 있으시네요.”

“그런 생각 하실 필요 없어요.”

“무슨 생각이요?”

“저랑 이별한다는 생각. 저랑 헤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정말 이상한 분이시네요. 우린 헤어지지 않는다, 최면을 거는 건가요? 이래봐도 몇마디 말에 그렇게 될 거야 생각할 만큼 어리숙하지 않아요!”

“문희씨 또 화를 내시는 군요. 전 그저 제 생각을 말하는 것 뿐입니다. 문희씨를 보면 괜히 저 여자랑은 헤어질 것 같지가 않다. 다 늙어서 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질 때도 내 옆에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같은 양로원을 다니나보죠. 아니면 옆집에 살게 되던지요.”

“그런 것도 인연이겠죠. 대단한 인연.”


그의 입에서 인연이란 말이 나왔을 때 그의 표정은 짐짓 진지했다. 순간 ‘인연’이라는 말은 운명이나 숙명보다도 더 질긴 것처럼 느껴졌다.


“담배 하나 피우겠습니다. 추우실 텐데 죄송해요.”


그의 손가락에 얇은 담배가 끼워졌다. 그가 막대 사탕의 막대 같은 담배를 손에 들 때마다 무슨 마법을 쓰는 건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날렵하고 하얀 막대는 금세 한 줌의 재가 되었지만 그것 또한 마술 같기만 했다.


“너무 눈치를 주시네요.”


나도 모르게 담배를 피우는 그의 입술과 담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게 담배는 왜 피세요?”


공연한 투덜거림.


“전화가 오는 것 같은데요. 제 껀 아니에요. 윤섭씨 전환가봐요.”

“회사일 거예요.”

“이 시간에 회사요?”

“사실 몰래 나왔거든요. 지금 문희씨 데려다드리고 빨리 다시 들어가봐야해요.”

“일하실 분이 막 나오시면 어떻게 해요?”

“보고 싶은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럼 막 참아요?”


새벽 3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다시 회사로 들어간다니.


“밤 세우시는 거예요?”

“어제도 한 숨도 못 잤는데 오늘도 그럴 것 같네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점은 좋지만 매일 야근은 정말 피곤해요.”


그래서 아까 잠이 들었던 거구나.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잠 이기는 장사는 없다고 어제 한 숨도 못 잔 것이라면 이해될 만도 했다.


“저기 앞에서 들어가면 되나요?”

“아니요. 여기서 잠깐만 세워주세요.”

“여기요?”

“네. 편의점 앞에서요. 살 것이 있어요.”


윤섭씨를 차에 두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여기요.”

“이게 뭡니까?”

“캔 커피에요. 이건 회사에서 동료분들이랑 같이 마시세요. 그리고 운전하다 졸지 마시고 지금 하나 드시고 가요.”

“저, 고맙습니다.”


감동어린 윤섭씨의 눈빛.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이게 아닌데. 왜 야근이라는 말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착한 짓을 한 거야?


“졸음운전 하지 마시라고요. 다른 뜻은 없어요. 저 데려다 주시고 가시다 사고라도 나면 제가 마음이 편치 않잖아요.”


그래. 그 마음뿐이었다. 사고라도 나면 마음의 빚을 덜기 위해서. 단지 그 뿐이었다.


***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한 편으로 기울지 않고 평행을 이루는 가운데 용준씨와 두 번째 데이트 날이 되었다. 근무가 없는 토요일. 용준씨는 가벼운 캐주얼 차림으로 나와 달라고 하더니 스케이트장에 가자고 했다.


“스케이트 싫으세요?”

“아니요.”

“근사한 데이트를 기대했는데 실망하신 건가요?”

“아니에요. 조금 의외라 그래요. 용준씨하면 왠지 클럽이나 바가 어울릴 것 같아서요.”

“예전엔 저도 그런 곳 다니길 좋아했죠. 그런데 문희씨를 보면 그런 곳보다 함께 움직이고 호흡하는 곳에 가고 싶어져요. 제 마음이 문희씨에게 모아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 같은데 맞을까요?”

“그렇게 되나요?”


토요일이라 적잖은 사람들이 이미 스케이팅을 즐기고 있었다.


“남자 쪽에서 정한 데이트 코스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는 것이 룰이긴 하지만 사실 전 스케이트를 잘 타지 못해요.”

“저도 사실은 잘 못 탑니다. 잘 되었네요. 우리 서로 의지하며 타면 좋잖아요. 제 손 잡으세요.”


용준씨가 손을 내밀었다. 처음 잡는 손도 아니었지만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다.


“왜 이곳에 오자고 했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나의 손을 꽉 잡은 용준씨가 말했다.


“······?”

“문희씨 손을 원 없이 잡고 싶었어요. 이러지 않고는 못 잡게 할 것 같아서요.”


손을 잡기 위해 스케이트장에 왔다고 말하는 용준씨는 천진스레 웃었고, 그 웃음은 기존의 바람둥이 이미지를 걷어내고 있었다. 용준씨의 말 때문이었을까? 엉거주춤 스케이트를 타는 내내 나는 잡은 손에 신경을 더 쓰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남자의 손을 잡고 있구나하는 것을 시시각각 느끼게 할 만한 손이었다. 뼈마디가 굵은, 여자와 다른 남자의 손. 자신과 함께 해달라고 내민 그 손을 잡고 나는 토요일 오후를 신나게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