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섭씨의 말에 내가 대꾸했다. 주변엔 심야 데이트를 즐기려 나온 차들이 몇 대 있긴 했지만 밝다고는 할 수 없는 가로등이 호들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적막했다.
지잉-.
윤섭씨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곧 남산의 숨결이 느껴졌다. 거칠지 않게, 조용히 남산은 숲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고, 그것은 적막함을 고즈넉함으로 바꾸어 주고 있었다.
“윤섭씨! 추워요!”
“어이구. 죄송해요. 추우셨어요? 제 생각이 짧았네요. 산 냄새를 맡게 해드리고 싶었거든요.”
물론 들어오는 공기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허락된 시간이 짧은 만큼 빨리 꼬투리를 잡고 싶었던 것이었다.
“핫초쿄 드실래요?”
윤섭씨는 보온병을 꺼내 들더니 조심스럽게 종이컵에 핫초코를 따랐다.
‘종이컵까지? 세심하네.’
“여기요, 드세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정말 먹음직스러웠다.
“밤인데. 카페인은 좋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따뜻할 때 몇 모금만 드세요. 아니면 들고만 있으시던 가요. 손이 따뜻해 질 거예요, 마시지 않아도 향만으로도 좋지 않나요?”
아니! 컵을 뺏어 버려야 어울릴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리 친절한 거람. 뭐 오늘 처음부터 시비조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이라면 시비를 걸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저 쪽은 한껏 배려를 하는데 난데없이 마호병 이야기를 꺼내는 건 우스운 도리니까.
“남산 자주 안 오시죠? 전 자주 와요. 밤에 가끔 와서 이렇게 30분쯤 앉아 있다가 내려가곤 합니다.”
“예.”
저렇게 나오는데 굳이 시비를 걸 필요가 있을까? 허나 그건 잠시 든 생각이었다. 이러다 저쪽이 언제 또 먼저 시비를 걸지 모르니까. 방심하다 당하는 편보다 먼저 공격을 하는 편이 낫다 싶었다.
“매일 늦게 끝나시니 갈 곳이 없으시겠죠. 당연히 놀아 줄 친구도 없을 거구요. 그래서 자주 오시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혼자 놀기에 익숙하게 되더라구요. 늦게 끝나 몸이 천근만근 힘들어도 집에 가기 싫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오는 곳이죠. 오늘은 문희씨가 곁에 있으니 정말 좋군요. 평소 오던 남산 같지가 않아요.”
‘진짜 즐거워하는데. 작정을 하고 말을 받는 건가? 음. 만만치 않은데.’
“혼자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 좀 폐쇄적이고 이상한 구석이 많던데요. 전 그런 사람들 무서워요.”
“그렇다면 문희씨가 함께 놀아주면 되죠. 저도 혼자 노는 건 싫거든요.”
말 빠져 나가기가 미꾸라지 같았다. 남산에만 오면 이 사람은 친절하게 바뀌는 건가?
“우리 잠시 나갈까요?”
핫초코를 한잔씩 먹고 나서 윤섭씨가 말했다. 그 말에 난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성급하게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내리기는 싫었지만 남의 차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밍기적거리며 내렸더니 이 남자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속도를 내서는 윤섭씨 있는 쪽으로 향해갔다. 따라잡았다고 느꼈을 때였다. 갑자기 그가 뒤를 돌았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 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는 마주보게 되었다.
“문희씨! 저 참고 있는 거 알아요?”
“에? 참다뇨?”
‘주변을 보니 인적도 없는데 이사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참아? 뭘 참아?’
“놀라시긴. 후후후. 문희씨의 그런 점 때문이에요. 문희씨는 놀라거나 화를 참을 때 너무 귀여워요. 그래서 자꾸 놀리고 싶어져요.”
“만만해서 그런 게 아니구요?”
“아니요. 진짜 귀여워서 그래요. 왜 초등학교 때 맘에 드는 여학생을 보면 장난치는 녀석들 있잖아요. 그런 심리일까요? 사실 전 그 때 그런 친구들이 이해가 되질 않았었어요. 좋아하면 잘 해줄 것이지 이상한 녀석들 그랬었죠. 그런데 지금에서야 이해가 되네요. 나이를 거꾸로 먹나봐요.”
그런 것 같다. 나이를 거꾸로 먹지 않고서야 가능하지 않은 일 같았다.
“그래서 절 놀리시겠다구요?”
“아니요. 참아야죠. 문희씨는 싫어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지금도 놀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지만 참기가 힘이 듭니다. 너무 큰 유혹이거든요.”
“참지 마세요! 안 참으면 되잖아요. 마음대로 해 보세요. 대신 저도 더 이상 내숭 떨며 화를 참지 않겠어요. 절 맘대로 놀려보세요.”
“진짜요?”
“예. 진짜요.”
그의 표정은 갑작스레 빛이 나듯 환해졌다. 그리고 곧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대체 얼마나 심하게 놀리려고 준비를 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좀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좋았다. 나도 퍼부을 준비는 되어 있으니까. 말싸움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잘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의 나였다.
“그럼 시작합니다.”
“시작해 보세요.”
“음. 그런데 갑자기 할 말이 없네요. 막상 하려고 하니까 놀릴 말이 생각나지 않아요.”
“윤섭씨는 좋은 친구를 두셨나봐요.”
“예?”
“그 옷 친구한테 빌린 것 아니에요. 윤섭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그 넓은 카라는 대체 뭐죠?”
“하하하. 문희씨 잘 하시네요. 그런데 그렇게 이상해요? 형 옷을 빌려 입기는 했는데.”
묘한 기분이었다. 윤섭씨를 놀리고 보니 왠지 웃음이 나는 것이었다.
“문희씨 어릴 적 별명 문짝이었죠?”
“하하하. 아닌데요. 상상력이 그것 밖에는 안 되세요? 조만간 실업 상태가 되겠군요. 광고일은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지 않나요?”
“그럼 뭐였을까? 문고리?”
“아니네요. 이제 기회는 한 번 남았어요.”
“음. 통돼지?”
“돼지요?”
진지하게 생각 중이었던 윤섭씨의 답변에 놀랐다. 돼지라니? 여태껏 돼지라고 불려본 적은 없었다. 내가 살이 쩠나? 아닌데.
“맞아요? 놀라시는 거 보니 맞는 것 같네요. 하하하.”
“아니요. 틀렸어요. 돼지라뇨? 왜 제가 통돼지에요?”
또 발끈해서는 목소리가 높여졌다.
“나뭇가지에 매달아 굽는 돼지 있잖아요. 문희씨 보면 그 생각이 나요. 그렇게 매달려 있는 것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하하하하하하.”
이 남자 무슨 상상을 하는지 즐겁게 웃었다. 날 발가벗겨 나무에 매달아 불 위에서 돌리는 상상?
“윤섭씨 별명은 섭섭이었죠?”
“네. 맞아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별명이지만요.”
저편에서는 싱겁게 맞다고 해버렸다. 섭섭이는 별 재미있는 별명도 아니어서 왠지 내가 진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윤섭씨 많이 피곤하세요? 눈 밑이 까매요!”
“문희씨도 피곤해요? 문희씨도 까만데요.”
“윤섭씨는 좀 얍삽해 보여요.”
“문희씨는 솔직히 좀 둔해 보여요.”
“그럼 제가 둔한 통돼지라는 거예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시네요.”
야밤에 남산에 끌려와서는 둔한 통돼지라니.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차라리 마시던 핫초코를 뺏는 편이 나겠어. 괜히 시작하자고 했다가 본전도 건지지 못한 셈이었다.
“문희씨 또 입 나왔네. 삐졌어요?”
“몰라요. 추워요.”
“에이. 해도 좋다고 해 놓구선. 제가 그냥 참는다고 했잖아요. 이젠 안할게요. 화내지 말아요. 놀리고 싶어도 문희씨가 싫다면 저 하지 않을 거예요.”
그의 얼굴이 가만히 내 얼굴 가까이 왔다.
“우는 건 아니죠?”
그가 말하자 핫초코 향이 났다.
“아니에요. 차로 가요, 우리. 추워요.”
그리고 성큼성큼 차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뭐야?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면 어떻게 해? 가까이 보니 피부가 정말 깨끗하네. 그래도 싫어. 통돼지가 뭐야? 통돼지가?
본전도 찾기 못한 싸움이었지만 재미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정드는 거 아니야? 하지만 정들어서 사귀게 되는 것은 싫었다. 날 강렬하게 사로잡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으니까.
***
첫 눈이 내렸다.
그 첫눈을 용준씨와 함께 맞고 있었다.
“와! 눈이 쌓이려나봐요. 정말 예쁘죠?”
“예쁘기 한데 용준씨 운전하기엔 힘들겠어요. 괜히 교외로 나오자고 했나봐요.”
“아니에요. 서울에 있었다면 이런 구경은 못했을 거예요.”
용준씨와 함께 온 것은 남한산성에 있는 맛있기로 유명한 멧돼지구이 집이었다. 전체를 통나무로 장식한 이곳에 오자고 한 것은 나였다. 그런데 막상 오고 보니 통돼지라 놀렸던 윤섭씨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함께 있었다면 또 놀렸을 테지.
“첫눈을 문희씨와 함께 맞는다는 건 좋은 징조 같은데요.”
그렇다. 첫 눈에는 마음이 약해져서 의미를 부여하기가 쉬워진다. 나도 모르게 용준씨가 운명의 남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래, 운명일지도 모르지.
말랑말랑 러브송 < 19 >
19
그의 차가 멈추어 섰다. 마치 쿠션 좋은 소파에 몸을 묻을 때처럼 느리고 부드러웠다.
‘역시 운전은 잘 한단 말이야.’
“한산하네요.”
“밤이 늦었잖아요. 이런 야밤에 남산에 여자를 끌고 오는 남자가 많다면 이상한 거겠죠.”
윤섭씨의 말에 내가 대꾸했다. 주변엔 심야 데이트를 즐기려 나온 차들이 몇 대 있긴 했지만 밝다고는 할 수 없는 가로등이 호들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적막했다.
지잉-.
윤섭씨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곧 남산의 숨결이 느껴졌다. 거칠지 않게, 조용히 남산은 숲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고, 그것은 적막함을 고즈넉함으로 바꾸어 주고 있었다.
“윤섭씨! 추워요!”
“어이구. 죄송해요. 추우셨어요? 제 생각이 짧았네요. 산 냄새를 맡게 해드리고 싶었거든요.”
물론 들어오는 공기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허락된 시간이 짧은 만큼 빨리 꼬투리를 잡고 싶었던 것이었다.
“핫초쿄 드실래요?”
윤섭씨는 보온병을 꺼내 들더니 조심스럽게 종이컵에 핫초코를 따랐다.
‘종이컵까지? 세심하네.’
“여기요, 드세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정말 먹음직스러웠다.
“밤인데. 카페인은 좋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따뜻할 때 몇 모금만 드세요. 아니면 들고만 있으시던 가요. 손이 따뜻해 질 거예요, 마시지 않아도 향만으로도 좋지 않나요?”
아니! 컵을 뺏어 버려야 어울릴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리 친절한 거람. 뭐 오늘 처음부터 시비조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이라면 시비를 걸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저 쪽은 한껏 배려를 하는데 난데없이 마호병 이야기를 꺼내는 건 우스운 도리니까.
“남산 자주 안 오시죠? 전 자주 와요. 밤에 가끔 와서 이렇게 30분쯤 앉아 있다가 내려가곤 합니다.”
“예.”
저렇게 나오는데 굳이 시비를 걸 필요가 있을까? 허나 그건 잠시 든 생각이었다. 이러다 저쪽이 언제 또 먼저 시비를 걸지 모르니까. 방심하다 당하는 편보다 먼저 공격을 하는 편이 낫다 싶었다.
“매일 늦게 끝나시니 갈 곳이 없으시겠죠. 당연히 놀아 줄 친구도 없을 거구요. 그래서 자주 오시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혼자 놀기에 익숙하게 되더라구요. 늦게 끝나 몸이 천근만근 힘들어도 집에 가기 싫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오는 곳이죠. 오늘은 문희씨가 곁에 있으니 정말 좋군요. 평소 오던 남산 같지가 않아요.”
‘진짜 즐거워하는데. 작정을 하고 말을 받는 건가? 음. 만만치 않은데.’
“혼자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 좀 폐쇄적이고 이상한 구석이 많던데요. 전 그런 사람들 무서워요.”
“그렇다면 문희씨가 함께 놀아주면 되죠. 저도 혼자 노는 건 싫거든요.”
말 빠져 나가기가 미꾸라지 같았다. 남산에만 오면 이 사람은 친절하게 바뀌는 건가?
“우리 잠시 나갈까요?”
핫초코를 한잔씩 먹고 나서 윤섭씨가 말했다. 그 말에 난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성급하게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내리기는 싫었지만 남의 차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밍기적거리며 내렸더니 이 남자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속도를 내서는 윤섭씨 있는 쪽으로 향해갔다. 따라잡았다고 느꼈을 때였다. 갑자기 그가 뒤를 돌았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 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는 마주보게 되었다.
“문희씨! 저 참고 있는 거 알아요?”
“에? 참다뇨?”
‘주변을 보니 인적도 없는데 이사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참아? 뭘 참아?’
“놀라시긴. 후후후. 문희씨의 그런 점 때문이에요. 문희씨는 놀라거나 화를 참을 때 너무 귀여워요. 그래서 자꾸 놀리고 싶어져요.”
“만만해서 그런 게 아니구요?”
“아니요. 진짜 귀여워서 그래요. 왜 초등학교 때 맘에 드는 여학생을 보면 장난치는 녀석들 있잖아요. 그런 심리일까요? 사실 전 그 때 그런 친구들이 이해가 되질 않았었어요. 좋아하면 잘 해줄 것이지 이상한 녀석들 그랬었죠. 그런데 지금에서야 이해가 되네요. 나이를 거꾸로 먹나봐요.”
그런 것 같다. 나이를 거꾸로 먹지 않고서야 가능하지 않은 일 같았다.
“그래서 절 놀리시겠다구요?”
“아니요. 참아야죠. 문희씨는 싫어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지금도 놀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지만 참기가 힘이 듭니다. 너무 큰 유혹이거든요.”
“참지 마세요! 안 참으면 되잖아요. 마음대로 해 보세요. 대신 저도 더 이상 내숭 떨며 화를 참지 않겠어요. 절 맘대로 놀려보세요.”
“진짜요?”
“예. 진짜요.”
그의 표정은 갑작스레 빛이 나듯 환해졌다. 그리고 곧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대체 얼마나 심하게 놀리려고 준비를 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좀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좋았다. 나도 퍼부을 준비는 되어 있으니까. 말싸움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잘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의 나였다.
“그럼 시작합니다.”
“시작해 보세요.”
“음. 그런데 갑자기 할 말이 없네요. 막상 하려고 하니까 놀릴 말이 생각나지 않아요.”
“윤섭씨는 좋은 친구를 두셨나봐요.”
“예?”
“그 옷 친구한테 빌린 것 아니에요. 윤섭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그 넓은 카라는 대체 뭐죠?”
“하하하. 문희씨 잘 하시네요. 그런데 그렇게 이상해요? 형 옷을 빌려 입기는 했는데.”
묘한 기분이었다. 윤섭씨를 놀리고 보니 왠지 웃음이 나는 것이었다.
“문희씨 어릴 적 별명 문짝이었죠?”
“하하하. 아닌데요. 상상력이 그것 밖에는 안 되세요? 조만간 실업 상태가 되겠군요. 광고일은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지 않나요?”
“그럼 뭐였을까? 문고리?”
“아니네요. 이제 기회는 한 번 남았어요.”
“음. 통돼지?”
“돼지요?”
진지하게 생각 중이었던 윤섭씨의 답변에 놀랐다. 돼지라니? 여태껏 돼지라고 불려본 적은 없었다. 내가 살이 쩠나? 아닌데.
“맞아요? 놀라시는 거 보니 맞는 것 같네요. 하하하.”
“아니요. 틀렸어요. 돼지라뇨? 왜 제가 통돼지에요?”
또 발끈해서는 목소리가 높여졌다.
“나뭇가지에 매달아 굽는 돼지 있잖아요. 문희씨 보면 그 생각이 나요. 그렇게 매달려 있는 것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하하하하하하.”
이 남자 무슨 상상을 하는지 즐겁게 웃었다. 날 발가벗겨 나무에 매달아 불 위에서 돌리는 상상?
“윤섭씨 별명은 섭섭이었죠?”
“네. 맞아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별명이지만요.”
저편에서는 싱겁게 맞다고 해버렸다. 섭섭이는 별 재미있는 별명도 아니어서 왠지 내가 진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윤섭씨 많이 피곤하세요? 눈 밑이 까매요!”
“문희씨도 피곤해요? 문희씨도 까만데요.”
“윤섭씨는 좀 얍삽해 보여요.”
“문희씨는 솔직히 좀 둔해 보여요.”
“그럼 제가 둔한 통돼지라는 거예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시네요.”
야밤에 남산에 끌려와서는 둔한 통돼지라니.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차라리 마시던 핫초코를 뺏는 편이 나겠어. 괜히 시작하자고 했다가 본전도 건지지 못한 셈이었다.
“문희씨 또 입 나왔네. 삐졌어요?”
“몰라요. 추워요.”
“에이. 해도 좋다고 해 놓구선. 제가 그냥 참는다고 했잖아요. 이젠 안할게요. 화내지 말아요. 놀리고 싶어도 문희씨가 싫다면 저 하지 않을 거예요.”
그의 얼굴이 가만히 내 얼굴 가까이 왔다.
“우는 건 아니죠?”
그가 말하자 핫초코 향이 났다.
“아니에요. 차로 가요, 우리. 추워요.”
그리고 성큼성큼 차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뭐야?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면 어떻게 해? 가까이 보니 피부가 정말 깨끗하네. 그래도 싫어. 통돼지가 뭐야? 통돼지가?
본전도 찾기 못한 싸움이었지만 재미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정드는 거 아니야? 하지만 정들어서 사귀게 되는 것은 싫었다. 날 강렬하게 사로잡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으니까.
***
첫 눈이 내렸다.
그 첫눈을 용준씨와 함께 맞고 있었다.
“와! 눈이 쌓이려나봐요. 정말 예쁘죠?”
“예쁘기 한데 용준씨 운전하기엔 힘들겠어요. 괜히 교외로 나오자고 했나봐요.”
“아니에요. 서울에 있었다면 이런 구경은 못했을 거예요.”
용준씨와 함께 온 것은 남한산성에 있는 맛있기로 유명한 멧돼지구이 집이었다. 전체를 통나무로 장식한 이곳에 오자고 한 것은 나였다. 그런데 막상 오고 보니 통돼지라 놀렸던 윤섭씨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함께 있었다면 또 놀렸을 테지.
“첫눈을 문희씨와 함께 맞는다는 건 좋은 징조 같은데요.”
그렇다. 첫 눈에는 마음이 약해져서 의미를 부여하기가 쉬워진다. 나도 모르게 용준씨가 운명의 남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래, 운명일지도 모르지.
“저 용준씨와 만나고 싶어졌어요.”
“예?”
“용준씨와 교제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내 마음의 결정을 용준씨에게 조용한 어조로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