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설익은 감정의 정체?>> "이야~ 대단한 발전인데, 김 지나? 그 사람을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만들다니 말야." 서 동인은 맞은 편에 앉아있는 두 여자 중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여자의 접시에 자신의 음식을 조심스럽게 덜어주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아까부터 지켜보던 지 재영은 은근히 심술이 났고 녀석의 얼굴을 그냥 때려주고 싶었다. 그는 지나가 손을 못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먹기 좋게 썰은 스테이크를 덜어주고 있었다. 단순히 오빠가 여동생을 챙겨주는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재영은 한쪽 눈썹을 기분 나쁘게 올리며 음식을 신경질적으로 씹어댔다. "야. 여자가 조신하게 좀 먹어. 씹는 소리 좀 내지 말고. 쩝쩝대는 거 듣기 싫다는 거 몰라?" 동인은 지나 옆에 앉은 여자를 힐끗 쳐다봤다. 오늘도 여전히 재영은 군복스타일의 카키색 바지에 같은 톤의 낡은 민소매 티를 입고 있었다. "어쭈? 너 이제 내 먹는 거 가지고 시비냐?" "시비로 들리긴 해?" "쳇, 그래도 내가 있다는 건 아는구나? 난 네가 계속 지나만 챙기길래 난 없는 걸로 생각하는 줄 알았다?" "네 씹는 소리가 그냥 무시할 수 있는 소리는 아니잖아." 지나는 아무래도 곧 두 사람이 싸울 것 같아 걱정부터 앞섰다. 남자처럼 억센 성격의 지 재영이 지고 살 성격이 못 되었다. 그런 그녀와 그는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만났다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남들은 그러다가 미운 정, 고운 정 들다가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될 거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절대적으로 콧방귀로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 보면 그동안 주위에서 들려온 소리같은 것은 믿을 게 못 되었다. 정이란 정은 들어서 결혼까지 해야할 그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개와 고양이 관계였다. "그만 해. 그러다가 또 싸우겠다." 지나의 말에 동인과 재영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은 지나만 없으면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김 지나는 몇 주만에 친구들을 보는 기회라 기분 좋게 헤어지고 싶었다. 더군다나 세 사람이 같이 만나는 경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 얼굴이 그렇게 엉망이냐?" 동인이 계산을 하는 동안 지나와 재영이 식당에서 나왔다. 재영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열을 손으로 가리며 옆에 나란히 선 지나에게 물었다. "음? 아, 동인이가 그래? 아니... 그정도까진 아냐. 얼굴에 좀 상처가 조금 있고..." "잘 생겼냐?" "음? 아... 음, 그래." "매력적이고?" "매력적? 음... 글쎄. 그런데 네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니까 좀 이상하다." "뭐? 난 사람도 아니냐?" 재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투덜거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런데 그 매력적이란 거 말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잖아. 사람마다 매기는 기준이 다르듯이." "그럼 네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건 뭐냐?" 지나는 오늘따라 남자의 외모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어대는 친구가 이상했다. 평소대로라면 눈앞에 잘생긴 배우가 지나가도 모르는 그녀였다. 그런데 왠 호기심일까. "그, 글쎄..." 재영은 지나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분명히 질문의 요점을 자꾸 피하려는 듯 대충 얼머부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예리함을 지닌 재영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마음이 설레이거나 하는, 뭐 그런 게 느껴지느냐고? 아니면 몇 날 몇 일씩 그 사람이 눈에 아른거려서 잠을 설치기도 하느냐는 거야. 그 정도로 매력적인지를 묻는 거다." 그러나 지나는 재영의 질문이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매력적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느냐,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묻는 것 같았다. "아... 저기... 그게... 음... 모, 모르겠어." 지나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더듬거리는 입을 곧 다물어버렸다. 더 벌렸다간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갈까?" 다행스럽게 동인이 두 여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김 지나는 끈질긴 재영의 질문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리를 이동하기도 전에 지나의 핸드백에서 핸드폰이 울려댔다. "잠깐만." 지나는 친구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나와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갖다댔다. "여보세요? 음, 레이." 동인은 전화 건 사람이 레이라는 꼬마녀석이라는 걸 듣고는 어쩌면 아이때문에 더이상 그녀를 붙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예감했다. 실망이 밀려오기 했지만 겉으로 내색할 순 없었다. "...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동인은 옆에 서있던 지 재영을 쳐다봤다. 그녀가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 확실히 듣지 못 했다. "음? 뭐가?" 재영은 팔짱을 끼며 자신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동인에게 말했다. "지나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 집에서 아이아빠하고 같이 사는 건데... 특히나 그 남자한테는 마누라가 없다며?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사는 남자의 눈에 지나가 어떻게 보이겠냐? 대단한 진수성찬으로 보이지 않을까? 굴러 들어온 호박이지." 서 동인은 여자의 입에서 술술 흘러 나오는 민망한 말들을 듣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야! 넌 여자가 되어가지곤 말을 그 따위로 밖에 못 하냐? 지나가 무슨 음식이냐? 진수성찬이라니? 말하는 거 하곤... 뭐? 굴러 들어온 호박?" 재영은 그가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이기에 그녀는 얼른 뱉은 말을 기억했다. "아, 호박은 취소. 지나는 호박으로 하기엔 너무 예쁘니까. 야, 그래도 언제까지나 애아빠한테 지나가 그림의 떡일 수는 없을 거 아냐?" "뭐-어?" "남자는 다 똑같다는 거 몰라? 요즘 10대 남자애들도 또래 여자애들하고 섹스한다는 거 모르냐? 더군다나 혼자 사는 남자라면 더 굶주린 늑대지." "야! 지 재영!" "소리지르지 마, 인마! 귀 안 먹었어." "어휴~ 정말 저걸 그냥..." 동인은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봤다. 도저히 예뻐해 줄래야 해 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의 화난 표정에도 그녀는 주눅들지 않고 계속 말했다. "야, 서 동인. 너만 깨끗한 척 하지 마라. 세상 남자들 다 똑같으니까. 너는 안 그럴 줄 아냐? 가슴 속에다 사랑이란 감정만 품고 있으면 그저 넌 제외될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지? 신부나 중이나 다 똑같해. 무인도에다 예쁜 여자하고 한 달을 가둬나 봐라. 언제까지나 우리가 믿고있는 그 순수함이 유지될 수 있는지..." 재영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켜고는 담배끝에 붙였다. 한 모금 길게 빨아당기고는 코구멍과 입으로 연기를 내뿜어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어느때와 같았고 자연스러울 정도로 남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반면에 그녀를 바라보는 동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운 돌처럼 굳어 있었고 어두웠다. 재영은 그의 표정에 일격을 가하 듯 차갑게 말을 이어나갔다. "자기 혼자만은 깨끗하고 순수한 척 해도...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못하는 게 남자야. 눈앞에 있는 먹이감을 어떻게 포기하냐? 배가 고픈데... 엊그제만 해도 자기는 깨끗하다고 주장했던 남자들도 다 똑같아진다는 거다. 같은 한통속이라는 거지. 알겠냐? 너도 마찬가지야, 서 동인. 너는 너 자신한테만은 솔직하고 깨끗하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네 감정을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그녀는 동인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아직까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통화하고있는 지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 지나는 어떤 남자라도 좋아할만한 타입이었다. 착하고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그녀의 마음 속에 남아있었다. 거기다 여성스럽기까지 하고. 남자들과 섞어둬도 도무지 여자로 분간이 가질 않는 자신과는 판이하게 다르질 않는가. 그런 지나를 서 동인이 오랫동안 마음 속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언제까지 네 감정이 순수해질 거라고 생각하냐고? 감정보단 나중에 육체가 먼저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너도 다른 남자들처럼 김 지나같은 여자 탐나잖아? 안 그러냐?" "그만해라, 지 재영!" 동인은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쳤다. 다행히 지나는 고함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다. "흥! 끝까지 순수한 척 하기는... 웃겨! 네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 마라. 눈에 보인다, 보여. 그렇게 얼간이처럼 굴고있다간 또다시 다른 남자에게 뺏기고 말거다." "..." "이번엔 유부남에게 지나를 뺏길 차례냐?" 재영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돌아섰다. 계속 얘기했다간 동인의 분노를 살 것 같았다. "간다! 지나한테는 바쁜 일 있어서 간다고 해!" 주머니에 바지를 찔러넣은 채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재영의 뒷모습은 영판 남자의 모습이었다. 무자비한 말들을 있는대로 쏟아부어 사람 속을 마음대로 뒤집어놓았던 그녀였다. 그리고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자리에서 떠났다. 동인은 그녀의 뒷통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눈빛을 거두었다. 김 지나가 통화를 끝내고 그에게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 재영이 갔어?" "음... 조금 전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갔다. 미안하다고 그러네. 담에 또 만나자고 말이다." 미리 재영과 입을 맞춘 것처럼 그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나오자, 그는 스스로에게 약간 놀라웠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안 그래도 금방 레이가 전화와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자꾸 언제 오냐고 물어대잖아." 동인은 그 꼬마녀석이 고단수로 느껴졌다. 마치 일부러 녀석이 훼방을 놓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아가야하는 그녀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집까지 태워다주겠다며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그녀와 걸었다. 유키는 차 소리에 커튼을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까지는 밝은 햇살을 자신있게 받아들이기가 두려웠다. 이런 행동이 비겁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대문 앞에서 김 지나가 내리고 이어서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리는 것을 목격했을 때는 당장에 뛰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친구들을 만나러간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라는 것이 여자들인지 아니면 남자들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질문자체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그와 그녀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이어줄 수 있는 어떠한 연결된 고리조차 없었다. 적어도 그들이 친한 친구사이라면 가볍게 어떤 친구인지를 물어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사토 유키는 여자친구가 필요없는 남자였다. 만약 김 지나와 어떤 관계를 원하냐고 묻는다면... '그래, 애인이겠지. 아니면 아예 서로가 만나기 전의 완전히 모르는 사이이거나.' 유키는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의 몸짓이 왠지 가벼워 보였다. 무엇때문일까. 조금 전 헤어졌던 남자가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처음 보던 차도 아니었다. 이곳에 몇 번 왔던 차였다. 헤어졌다던 그 애인일 것이다. 그와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일까. 유키는 목젖너머로 쓰디 쓴 맛을 느꼈다. 단순히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의 순결을 무시했던 녀석이 아니던가. 그런 자식과 다시 시작하는 그녀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것도 사랑의 힘이라는 것인가? 유키는 속으로 비웃었다. 세상은 '사랑'이라는 복잡하고도 감성적인 것이 존재하기에는 너무나도 거칠고 험난했다. 그것을 예전에 이미 한 여자를 통해서 깨달은 그는 그녀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수 밖에 없었다. 유키는 서재로 돌아와서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모니터에 입력이 되어있는 글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는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네요. 더운 것만 빼면." 지나가 계단을 막 올라오며 그를 보고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입가와 눈에 웃음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유키에게 있어서 마약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자극적이고 중독성이 짙었다. 온종일 그녀의 얼굴이 눈에 떠나지 않을 정도니까 말이다. "예상보다 일찍 왔군?" 그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지나는 입꼬리를 익살스럽게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래요? 어떻게 예상했는데요?" "밤늦게야 올 줄 알았소." "음? 그래요? 이런... 예상이 틀려도 엄청 틀렸군요?" 지나는 그가 서있는 곳까지 올라와 섰다. 하지만 그는 그녀보다 한참이나 키가 컸다. 대신 턱을 올리고 그를 쳐다봤다. 유키는 도발적이고도 유혹적인 그녀의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봤다. "설마... 애인을 만나러 갔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그는 그녀의 스치는 듯한 미소를 눈으로 삼키며 돌아섰다. 그녀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가는 그자리에서 그녀와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밤바다를 보신 적 있으세요?" 지나는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끝낸 지나는 냉커피를 두 잔을 만들어 베란다로 가지고 나갔다. 그곳에는 유키가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유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사고가 나기 훨씬 전, 글을 쓰기 바빴던 그는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을 때면 가끔 바다가 아닌 산을 찾았다. "바다 안 좋아하세요?" "아니." "밤바다를 언제 보셨는데요?" "그건 왜 묻는 거요?" 유키는 그녀가 들고있는 유리잔 하나를 집어들어 커피를 마셨다. 시원한 냉커피가 그의 뜨거운 열을 식혀주는 것 같았다. 밤공기 중에 섞여있는 더위가 그의 피부와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이내 시원한 액체에 식혀지고 있었다. "이틀 후면 레이 개학이에요. 아시죠?"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원하는 게 뭐요?" "아, 저기..." "당신은 항상 대답하기 전에 꼭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요?" "네?" "왜 그렇게 긴장하지? '아, 저기...'라는 말. 꼭 그런 말을 하면서까지 그 뻣뻣하고 단단하게 굳은 머리를 돌려야하는 거요?" "뭐라구요? 뻣뻣하게 굳은 머리라뇨? 전 단지... 상대방의 감정을 생각해서 쓸 데 없는 말을 안 하려는 것 뿐이라구요." 돌아서서 냉커피를 마시는 그에게 지나는 열이 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상대방의 감정이 그렇게 중요하오?" "네? 그,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상대의 기분이 어떤지, 감정이 어떤지도 상관하지 않고 제멋대로 말한다면 그 상대를 무시하는 것밖에 더 되요?" 지나도 그의 옆에 서서 난간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어섰다. "주제를 아주 능숙하게 돌리시는 군요?" "무슨 말이오?" "조금 전 저에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셨죠?" "그래, 뭐요?" 지나는 이가 시릴정도로 시원한 냉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유리문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들어주실 건가요?" "내가 왜?" 짧은 그의 질문에 지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한다해도 그가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약간 굴리기로 했다. "레이가 개학하기 전에 같이 밤바다를 보러갔으면 해요. 아마 레이는 밤바다를 본 적이 없을 걸요?" "좀 솔직해지시지. 레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보고싶은 거겠지. 안 그렇소?" 지나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인정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바캉스시즌은 끝났지만 덥기는 마찬가지잖아요. 집에 있으면서 내내 에어컨이나 틀어대고 있을 수도 없고요." "그렇다고 계속 밤바다나 보러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 유키는 지나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흘겨보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러나 그는 까만 정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건가요?" "갈 때 되면 얘기해요. 기사 부를테니." 지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전, 레이와 사장님 아니 유키씨와 같이 가고 싶었어요." 속삭이는 듯이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완전히 그녀에게로 몸을 돌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와 같이 가는 일은 없을 거요." "하지만..." 유키는 그녀가 이어서 무슨 말을 꺼낼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그곳을 떠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김 지나는 두 손으로 유리잔을 꼭 거머쥐고는 난간에 자신의 체중을 완전히 실었다. 처음부터 쉽게 승낙을 받아내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심해둔 바가 있었다. 사토 유키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기로 결심한 이상, 그의 어머니와 약속한 이상... 쉽게 얻지 못하는 승낙 받아낼 것이다. 다음 날, 레이는 밤바다를 보러가자는 지나의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밀린 방학숙제가 없는 아이는 일기만 쓰면 되기 때문에 외출한다는 말이 더없이 기쁘고 즐거웠다. "아버지랑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레이의 까만 눈동자가 천장을 가리켰다. "같이 갈 수 있는지 여쭤볼까?" "정말요?" 지나는 유키에게 처음 얘기를 꺼내보는 것 처럼 아이에게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아이는 그녀에게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갔다올 테니까 보리 밥 좀 줘." 레이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지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발 아래 있는 털짐승에게 말했다. "보리야. 밥 먹자." 보리는 커다란 소리로 몇 번 짖어대고는 자신의 밥그릇으로 먼저 달려갔다. "있다가 저녁 먹고 너도 같이 가자. 밤바다 보러. 내가 허락 받을게." 아이의 말을 들었는지 보리는 또다시 짖어대며 꼬리까지 신나게 흔들어댔다. 이때 지나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레이는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물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세요? 같이 가신데요?" "방에 안 계시던데? 아마 수영하러 가신 모양이야." 자신의 예감대로 그녀는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다지 올라가고 싶을 만큼 크게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강한 호기심에 이끌려 옥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옥상에 올라온 그녀는 또 하나의 건물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살짝 문 손잡이를 돌려봤다. '세, 세상에!' 다양한 운동기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런닝머신을 비롯해, 상반신과 하반신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구들이 있었다. 그의 몸이 탄력적이고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운동기구로 혼자서 꾸준히 운동을 해온 것이다. '이곳에서 운동을 하며 얼마나 땀을 흘렸을까?' 그는 단순히 운동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순간과 억제할 수 없는 많은 슬픔을 아마 이곳에서 억지로 지워보려고 무던히도 애썼을 것이다. "거기서 뭐 하는 거요?" 지나는 펄쩍 뛰듯이 놀라 돌아섰다. 사토 유키가 젖은 머리로 그녀 앞에 서있었다. 역시나 그가 수영을 하고온 것 같았다. "아, 죄송해요." "사과를 받고싶은 게 아니라 여기 어쩐 일이냐고?" "전날과 다르게 마음이 바뀌셨을까 봐요." "전날? 아... 아니. 안 갈 거요. 분명히 어제 얘기했잖소. 안 간다고." "유키씨. 하지만 레이가 같이 가고싶어 해요." 갑자기 유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지나는 겁먹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던가. "생각해 보세요. 방학 동안에 레이는 내내 일본에 있었어요. 그전 방학 때도 그리고 다음 방학 때도 그렇겠죠? 그럼 언제 아이와 같이 있어주실 거죠?" 지나는 또다시 부자지간의 관계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 같아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 이대로 물러나긴 싫었다. "왜... 아래층으로 내려오시기로 결심하신 거죠? 왜 아이와 같이 식사를 하시는 거죠? 레이때문이 아닌가요? 아니면... 그저 저의 충동적인 행동들때문에 하는 수 없어, 억지로 그러시는 거라면... 레이에겐 너무도 큰 실망이 될 거에요."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무작정 강요하고 있다는 거 모르나?" 지나는 문에서 물러나 유키에게 조금 떨어져 섰다. 그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열을 등지고 서 있어 이내 그늘이 만들어졌다. "이건 레이를 위해서에요. 정말 아이를 사랑하신다면 아이에게 더 큰 실망과 고통은 주지 마세요. 지금 겪고있는 건 유키씨의 몫이지, 레이 몫이 아니에요. 억지로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이해시키려 하지도 마세요. 레이는 지금보다 더 가여워져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아이는 못 견뎌할 거에요. 아이를 사랑하는 그 감정 그대로 보여 주세요.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부모가 자식에게 보이는 애정표현은 말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되는 거에요." 유키는 그녀의 장황한 설득에 그만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같이 가겠다는 말 한마디에 지나의 표정은 곧 활짝 핀 백합 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그녀가 옥상에서 내려가는 것을 보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그녀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김 지나의 말 한마디에 휘둘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조리있게 늘어놓은 놀라운 설득력에 껌뻑 넘어가 곧 후회하기를 몇 번이었다. 또한 차갑게 원래의 이성을 가지고 그녀를 대면하려고 해도 그녀의 따스하고도 시원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곧 이성은 마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심장과 뇌는 이미 주인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따금씩 그것들은 신체의 일부분이라는 인식을 주기라도 하듯 거칠게 두근거리거나, 욱신거리는 두통증상을 몰고 왔다. 첫사랑의 설익은 감정을 겪고있는 것 같았다. 사랑이라고? 유키는 운동기구에 걸쳐놓은 수건을 집어들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씹어 삼켰다. '사랑일 리가 없어! 이제 사랑같은 거 안 믿으니까! 두 번 다시 여자에게 빠져 불행 속에서 살고싶은 마음 없어!' 이건 결코 사랑이 아니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고 혼자 오랫동안 금욕생활을 해온 그에게 묵은 때와 같은 욕구불만일 뿐이었다. 거실로 내려온 유키는 지나와 레이가 어느새 마당에 나가 커다란 파라솔 아래에서 뭔가를 맛있게 먹고있는 것을 바라봤다. 물론 그들이 먹고있는 것이 시원하고 맛있는 화채라는 사실을 그는 알턱이 없었다. 그저 흰색 스커트를 바람에 팔락거리며 드러누워있는 지나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난, 사랑과 욕구 정도는 구분할 줄 아는 남자야." 또다시 어리석게 바보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냉수가 든 물병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제는 그녀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항상 그녀이 체취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공기 중에 흐리고 있는 그녀의 향수나 또는 샴푸향기는 그에게 자극을 주었다. 그것도 그의 남성을 단순하고도 뜨겁게 반응하게 만들었고 평범하게 뛰던 맥박조차 가속으로 내달리게 만들었다. 쉽게 그녀에게 반응하는 자신에게 여간 화가 나는 것이 아니었다. 유키는 비록 혼자만의 어둠 속에 갇혀지냈긴 했지만 나름대로 한가로운 삶이었다. 그런 삶 속에 한 여자가 계속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고, 그는 매일매일을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무례한 남자 유키*** <#19. 설익은 감정의 정체?>
#19
<<설익은 감정의 정체?>>
"이야~ 대단한 발전인데, 김 지나? 그 사람을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만들다니 말야."
서 동인은 맞은 편에 앉아있는 두 여자 중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여자의 접시에 자신의 음식을 조심스럽게 덜어주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아까부터 지켜보던 지 재영은 은근히 심술이 났고 녀석의 얼굴을 그냥 때려주고 싶었다.
그는 지나가 손을 못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먹기 좋게 썰은 스테이크를 덜어주고 있었다.
단순히 오빠가 여동생을 챙겨주는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재영은 한쪽 눈썹을 기분 나쁘게 올리며 음식을 신경질적으로 씹어댔다.
"야. 여자가 조신하게 좀 먹어. 씹는 소리 좀 내지 말고. 쩝쩝대는 거 듣기 싫다는 거 몰라?"
동인은 지나 옆에 앉은 여자를 힐끗 쳐다봤다. 오늘도 여전히 재영은 군복스타일의 카키색 바지에 같은 톤의 낡은 민소매 티를 입고 있었다.
"어쭈? 너 이제 내 먹는 거 가지고 시비냐?"
"시비로 들리긴 해?"
"쳇, 그래도 내가 있다는 건 아는구나? 난 네가 계속 지나만 챙기길래 난 없는 걸로 생각하는 줄 알았다?"
"네 씹는 소리가 그냥 무시할 수 있는 소리는 아니잖아."
지나는 아무래도 곧 두 사람이 싸울 것 같아 걱정부터 앞섰다. 남자처럼 억센 성격의 지 재영이 지고 살 성격이 못 되었다.
그런 그녀와 그는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만났다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남들은 그러다가 미운 정, 고운 정 들다가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될 거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절대적으로 콧방귀로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 보면 그동안 주위에서 들려온 소리같은 것은 믿을 게 못 되었다.
정이란 정은 들어서 결혼까지 해야할 그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개와 고양이 관계였다.
"그만 해. 그러다가 또 싸우겠다."
지나의 말에 동인과 재영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은 지나만 없으면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김 지나는 몇 주만에 친구들을 보는 기회라 기분 좋게 헤어지고 싶었다. 더군다나 세 사람이 같이 만나는 경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 얼굴이 그렇게 엉망이냐?"
동인이 계산을 하는 동안 지나와 재영이 식당에서 나왔다.
재영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열을 손으로 가리며 옆에 나란히 선 지나에게 물었다.
"음? 아, 동인이가 그래? 아니... 그정도까진 아냐. 얼굴에 좀 상처가 조금 있고..."
"잘 생겼냐?"
"음? 아... 음, 그래."
"매력적이고?"
"매력적? 음... 글쎄. 그런데 네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니까 좀 이상하다."
"뭐? 난 사람도 아니냐?"
재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투덜거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런데 그 매력적이란 거 말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잖아. 사람마다 매기는 기준이 다르듯이."
"그럼 네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건 뭐냐?"
지나는 오늘따라 남자의 외모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어대는 친구가 이상했다.
평소대로라면 눈앞에 잘생긴 배우가 지나가도 모르는 그녀였다. 그런데 왠 호기심일까.
"그, 글쎄..."
재영은 지나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분명히 질문의 요점을 자꾸 피하려는 듯 대충 얼머부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예리함을 지닌 재영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마음이 설레이거나 하는, 뭐 그런 게 느껴지느냐고? 아니면 몇 날 몇 일씩 그 사람이 눈에 아른거려서 잠을 설치기도 하느냐는 거야. 그 정도로 매력적인지를 묻는 거다."
그러나 지나는 재영의 질문이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매력적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느냐,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묻는 것 같았다.
"아... 저기... 그게... 음... 모, 모르겠어."
지나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더듬거리는 입을 곧 다물어버렸다. 더 벌렸다간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갈까?"
다행스럽게 동인이 두 여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김 지나는 끈질긴 재영의 질문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리를 이동하기도 전에 지나의 핸드백에서 핸드폰이 울려댔다.
"잠깐만."
지나는 친구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나와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갖다댔다.
"여보세요? 음, 레이."
동인은 전화 건 사람이 레이라는 꼬마녀석이라는 걸 듣고는 어쩌면 아이때문에 더이상 그녀를 붙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예감했다.
실망이 밀려오기 했지만 겉으로 내색할 순 없었다.
"...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동인은 옆에 서있던 지 재영을 쳐다봤다. 그녀가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 확실히 듣지 못 했다.
"음? 뭐가?"
재영은 팔짱을 끼며 자신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동인에게 말했다.
"지나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 집에서 아이아빠하고 같이 사는 건데... 특히나 그 남자한테는 마누라가 없다며?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사는 남자의 눈에 지나가 어떻게 보이겠냐? 대단한 진수성찬으로 보이지 않을까? 굴러 들어온 호박이지."
서 동인은 여자의 입에서 술술 흘러 나오는 민망한 말들을 듣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야! 넌 여자가 되어가지곤 말을 그 따위로 밖에 못 하냐? 지나가 무슨 음식이냐? 진수성찬이라니? 말하는 거 하곤... 뭐? 굴러 들어온 호박?"
재영은 그가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이기에 그녀는 얼른 뱉은 말을 기억했다.
"아, 호박은 취소. 지나는 호박으로 하기엔 너무 예쁘니까. 야, 그래도 언제까지나 애아빠한테 지나가 그림의 떡일 수는 없을 거 아냐?"
"뭐-어?"
"남자는 다 똑같다는 거 몰라? 요즘 10대 남자애들도 또래 여자애들하고 섹스한다는 거 모르냐? 더군다나 혼자 사는 남자라면 더 굶주린 늑대지."
"야! 지 재영!"
"소리지르지 마, 인마! 귀 안 먹었어."
"어휴~ 정말 저걸 그냥..."
동인은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봤다.
도저히 예뻐해 줄래야 해 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의 화난 표정에도 그녀는 주눅들지 않고 계속 말했다.
"야, 서 동인. 너만 깨끗한 척 하지 마라. 세상 남자들 다 똑같으니까. 너는 안 그럴 줄 아냐?
가슴 속에다 사랑이란 감정만 품고 있으면 그저 넌 제외될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지? 신부나 중이나 다 똑같해.
무인도에다 예쁜 여자하고 한 달을 가둬나 봐라. 언제까지나 우리가 믿고있는 그 순수함이 유지될 수 있는지..."
재영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켜고는 담배끝에 붙였다.
한 모금 길게 빨아당기고는 코구멍과 입으로 연기를 내뿜어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어느때와 같았고 자연스러울 정도로 남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반면에 그녀를 바라보는 동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운 돌처럼 굳어 있었고 어두웠다.
재영은 그의 표정에 일격을 가하 듯 차갑게 말을 이어나갔다.
"자기 혼자만은 깨끗하고 순수한 척 해도...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못하는 게 남자야. 눈앞에 있는 먹이감을 어떻게 포기하냐? 배가 고픈데...
엊그제만 해도 자기는 깨끗하다고 주장했던 남자들도 다 똑같아진다는 거다. 같은 한통속이라는 거지. 알겠냐?
너도 마찬가지야, 서 동인. 너는 너 자신한테만은 솔직하고 깨끗하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네 감정을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그녀는 동인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아직까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통화하고있는 지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 지나는 어떤 남자라도 좋아할만한 타입이었다. 착하고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그녀의 마음 속에 남아있었다. 거기다 여성스럽기까지 하고.
남자들과 섞어둬도 도무지 여자로 분간이 가질 않는 자신과는 판이하게 다르질 않는가. 그런 지나를 서 동인이 오랫동안 마음 속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언제까지 네 감정이 순수해질 거라고 생각하냐고? 감정보단 나중에 육체가 먼저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너도 다른 남자들처럼 김 지나같은 여자 탐나잖아? 안 그러냐?"
"그만해라, 지 재영!"
동인은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쳤다. 다행히 지나는 고함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다.
"흥! 끝까지 순수한 척 하기는... 웃겨! 네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 마라. 눈에 보인다, 보여. 그렇게 얼간이처럼 굴고있다간 또다시 다른 남자에게 뺏기고 말거다."
"..."
"이번엔 유부남에게 지나를 뺏길 차례냐?"
재영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돌아섰다. 계속 얘기했다간 동인의 분노를 살 것 같았다.
"간다! 지나한테는 바쁜 일 있어서 간다고 해!"
주머니에 바지를 찔러넣은 채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재영의 뒷모습은 영판 남자의 모습이었다.
무자비한 말들을 있는대로 쏟아부어 사람 속을 마음대로 뒤집어놓았던 그녀였다.
그리고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자리에서 떠났다.
동인은 그녀의 뒷통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눈빛을 거두었다. 김 지나가 통화를 끝내고 그에게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 재영이 갔어?"
"음... 조금 전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갔다. 미안하다고 그러네. 담에 또 만나자고 말이다."
미리 재영과 입을 맞춘 것처럼 그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나오자, 그는 스스로에게 약간 놀라웠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안 그래도 금방 레이가 전화와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자꾸 언제 오냐고 물어대잖아."
동인은 그 꼬마녀석이 고단수로 느껴졌다. 마치 일부러 녀석이 훼방을 놓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아가야하는 그녀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집까지 태워다주겠다며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그녀와 걸었다.
유키는 차 소리에 커튼을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까지는 밝은 햇살을 자신있게 받아들이기가 두려웠다.
이런 행동이 비겁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대문 앞에서 김 지나가 내리고 이어서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리는 것을 목격했을 때는 당장에 뛰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친구들을 만나러간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라는 것이 여자들인지 아니면 남자들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질문자체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그와 그녀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이어줄 수 있는 어떠한 연결된 고리조차 없었다.
적어도 그들이 친한 친구사이라면 가볍게 어떤 친구인지를 물어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사토 유키는 여자친구가 필요없는 남자였다.
만약 김 지나와 어떤 관계를 원하냐고 묻는다면...
'그래, 애인이겠지. 아니면 아예 서로가 만나기 전의 완전히 모르는 사이이거나.'
유키는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의 몸짓이 왠지 가벼워 보였다. 무엇때문일까.
조금 전 헤어졌던 남자가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처음 보던 차도 아니었다. 이곳에 몇 번 왔던 차였다. 헤어졌다던 그 애인일 것이다.
그와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일까. 유키는 목젖너머로 쓰디 쓴 맛을 느꼈다.
단순히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의 순결을 무시했던 녀석이 아니던가. 그런 자식과 다시 시작하는 그녀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것도 사랑의 힘이라는 것인가? 유키는 속으로 비웃었다.
세상은 '사랑'이라는 복잡하고도 감성적인 것이 존재하기에는 너무나도 거칠고 험난했다.
그것을 예전에 이미 한 여자를 통해서 깨달은 그는 그녀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수 밖에 없었다.
유키는 서재로 돌아와서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모니터에 입력이 되어있는 글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는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네요. 더운 것만 빼면."
지나가 계단을 막 올라오며 그를 보고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입가와 눈에 웃음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유키에게 있어서 마약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자극적이고 중독성이 짙었다. 온종일 그녀의 얼굴이 눈에 떠나지 않을 정도니까 말이다.
"예상보다 일찍 왔군?"
그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지나는 입꼬리를 익살스럽게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래요? 어떻게 예상했는데요?"
"밤늦게야 올 줄 알았소."
"음? 그래요? 이런... 예상이 틀려도 엄청 틀렸군요?"
지나는 그가 서있는 곳까지 올라와 섰다. 하지만 그는 그녀보다 한참이나 키가 컸다. 대신 턱을 올리고 그를 쳐다봤다.
유키는 도발적이고도 유혹적인 그녀의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봤다.
"설마... 애인을 만나러 갔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그는 그녀의 스치는 듯한 미소를 눈으로 삼키며 돌아섰다.
그녀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가는 그자리에서 그녀와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밤바다를 보신 적 있으세요?"
지나는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끝낸 지나는 냉커피를 두 잔을 만들어 베란다로 가지고 나갔다. 그곳에는 유키가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유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사고가 나기 훨씬 전, 글을 쓰기 바빴던 그는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을 때면 가끔 바다가 아닌 산을 찾았다.
"바다 안 좋아하세요?"
"아니."
"밤바다를 언제 보셨는데요?"
"그건 왜 묻는 거요?"
유키는 그녀가 들고있는 유리잔 하나를 집어들어 커피를 마셨다. 시원한 냉커피가 그의 뜨거운 열을 식혀주는 것 같았다.
밤공기 중에 섞여있는 더위가 그의 피부와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이내 시원한 액체에 식혀지고 있었다.
"이틀 후면 레이 개학이에요. 아시죠?"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원하는 게 뭐요?"
"아, 저기..."
"당신은 항상 대답하기 전에 꼭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요?"
"네?"
"왜 그렇게 긴장하지? '아, 저기...'라는 말. 꼭 그런 말을 하면서까지 그 뻣뻣하고 단단하게 굳은 머리를 돌려야하는 거요?"
"뭐라구요? 뻣뻣하게 굳은 머리라뇨? 전 단지... 상대방의 감정을 생각해서 쓸 데 없는 말을 안 하려는 것 뿐이라구요."
돌아서서 냉커피를 마시는 그에게 지나는 열이 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상대방의 감정이 그렇게 중요하오?"
"네? 그,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상대의 기분이 어떤지, 감정이 어떤지도 상관하지 않고 제멋대로 말한다면 그 상대를 무시하는 것밖에 더 되요?"
지나도 그의 옆에 서서 난간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어섰다.
"주제를 아주 능숙하게 돌리시는 군요?"
"무슨 말이오?"
"조금 전 저에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셨죠?"
"그래, 뭐요?"
지나는 이가 시릴정도로 시원한 냉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유리문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들어주실 건가요?"
"내가 왜?"
짧은 그의 질문에 지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한다해도 그가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약간 굴리기로 했다.
"레이가 개학하기 전에 같이 밤바다를 보러갔으면 해요. 아마 레이는 밤바다를 본 적이 없을 걸요?"
"좀 솔직해지시지. 레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보고싶은 거겠지. 안 그렇소?"
지나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인정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바캉스시즌은 끝났지만 덥기는 마찬가지잖아요. 집에 있으면서 내내 에어컨이나 틀어대고 있을 수도 없고요."
"그렇다고 계속 밤바다나 보러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
유키는 지나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흘겨보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러나 그는 까만 정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건가요?"
"갈 때 되면 얘기해요. 기사 부를테니."
지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전, 레이와 사장님 아니 유키씨와 같이 가고 싶었어요."
속삭이는 듯이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완전히 그녀에게로 몸을 돌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와 같이 가는 일은 없을 거요."
"하지만..."
유키는 그녀가 이어서 무슨 말을 꺼낼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그곳을 떠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김 지나는 두 손으로 유리잔을 꼭 거머쥐고는 난간에 자신의 체중을 완전히 실었다. 처음부터 쉽게 승낙을 받아내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심해둔 바가 있었다. 사토 유키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기로 결심한 이상, 그의 어머니와 약속한 이상... 쉽게 얻지 못하는 승낙 받아낼 것이다.
다음 날, 레이는 밤바다를 보러가자는 지나의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밀린 방학숙제가 없는 아이는 일기만 쓰면 되기 때문에 외출한다는 말이 더없이 기쁘고 즐거웠다.
"아버지랑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레이의 까만 눈동자가 천장을 가리켰다.
"같이 갈 수 있는지 여쭤볼까?"
"정말요?"
지나는 유키에게 처음 얘기를 꺼내보는 것 처럼 아이에게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아이는 그녀에게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갔다올 테니까 보리 밥 좀 줘."
레이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지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발 아래 있는 털짐승에게 말했다.
"보리야. 밥 먹자."
보리는 커다란 소리로 몇 번 짖어대고는 자신의 밥그릇으로 먼저 달려갔다.
"있다가 저녁 먹고 너도 같이 가자. 밤바다 보러. 내가 허락 받을게."
아이의 말을 들었는지 보리는 또다시 짖어대며 꼬리까지 신나게 흔들어댔다.
이때 지나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레이는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물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세요? 같이 가신데요?"
"방에 안 계시던데? 아마 수영하러 가신 모양이야."
자신의 예감대로 그녀는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다지 올라가고 싶을 만큼 크게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강한 호기심에 이끌려 옥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옥상에 올라온 그녀는 또 하나의 건물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살짝 문 손잡이를 돌려봤다.
'세, 세상에!'
다양한 운동기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런닝머신을 비롯해, 상반신과 하반신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구들이 있었다.
그의 몸이 탄력적이고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운동기구로 혼자서 꾸준히 운동을 해온 것이다.
'이곳에서 운동을 하며 얼마나 땀을 흘렸을까?'
그는 단순히 운동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순간과 억제할 수 없는 많은 슬픔을 아마 이곳에서 억지로 지워보려고 무던히도 애썼을 것이다.
"거기서 뭐 하는 거요?"
지나는 펄쩍 뛰듯이 놀라 돌아섰다. 사토 유키가 젖은 머리로 그녀 앞에 서있었다. 역시나 그가 수영을 하고온 것 같았다.
"아, 죄송해요."
"사과를 받고싶은 게 아니라 여기 어쩐 일이냐고?"
"전날과 다르게 마음이 바뀌셨을까 봐요."
"전날? 아... 아니. 안 갈 거요. 분명히 어제 얘기했잖소. 안 간다고."
"유키씨. 하지만 레이가 같이 가고싶어 해요."
갑자기 유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지나는 겁먹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던가.
"생각해 보세요. 방학 동안에 레이는 내내 일본에 있었어요. 그전 방학 때도 그리고 다음 방학 때도 그렇겠죠? 그럼 언제 아이와 같이 있어주실 거죠?"
지나는 또다시 부자지간의 관계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 같아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 이대로 물러나긴 싫었다.
"왜... 아래층으로 내려오시기로 결심하신 거죠? 왜 아이와 같이 식사를 하시는 거죠? 레이때문이 아닌가요?
아니면... 그저 저의 충동적인 행동들때문에 하는 수 없어, 억지로 그러시는 거라면... 레이에겐 너무도 큰 실망이 될 거에요."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무작정 강요하고 있다는 거 모르나?"
지나는 문에서 물러나 유키에게 조금 떨어져 섰다. 그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열을 등지고 서 있어 이내 그늘이 만들어졌다.
"이건 레이를 위해서에요. 정말 아이를 사랑하신다면 아이에게 더 큰 실망과 고통은 주지 마세요.
지금 겪고있는 건 유키씨의 몫이지, 레이 몫이 아니에요. 억지로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이해시키려 하지도 마세요.
레이는 지금보다 더 가여워져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아이는 못 견뎌할 거에요.
아이를 사랑하는 그 감정 그대로 보여 주세요.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부모가 자식에게 보이는 애정표현은 말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되는 거에요."
유키는 그녀의 장황한 설득에 그만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같이 가겠다는 말 한마디에 지나의 표정은 곧 활짝 핀 백합 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그녀가 옥상에서 내려가는 것을 보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그녀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김 지나의 말 한마디에 휘둘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조리있게 늘어놓은 놀라운 설득력에 껌뻑 넘어가 곧 후회하기를 몇 번이었다.
또한 차갑게 원래의 이성을 가지고 그녀를 대면하려고 해도 그녀의 따스하고도 시원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곧 이성은 마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심장과 뇌는 이미 주인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따금씩 그것들은 신체의 일부분이라는 인식을 주기라도 하듯 거칠게 두근거리거나, 욱신거리는 두통증상을 몰고 왔다.
첫사랑의 설익은 감정을 겪고있는 것 같았다. 사랑이라고?
유키는 운동기구에 걸쳐놓은 수건을 집어들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씹어 삼켰다.
'사랑일 리가 없어! 이제 사랑같은 거 안 믿으니까! 두 번 다시 여자에게 빠져 불행 속에서 살고싶은 마음 없어!'
이건 결코 사랑이 아니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고 혼자 오랫동안 금욕생활을 해온 그에게 묵은 때와 같은 욕구불만일 뿐이었다.
거실로 내려온 유키는 지나와 레이가 어느새 마당에 나가 커다란 파라솔 아래에서 뭔가를 맛있게 먹고있는 것을 바라봤다.
물론 그들이 먹고있는 것이 시원하고 맛있는 화채라는 사실을 그는 알턱이 없었다.
그저 흰색 스커트를 바람에 팔락거리며 드러누워있는 지나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난, 사랑과 욕구 정도는 구분할 줄 아는 남자야."
또다시 어리석게 바보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냉수가 든 물병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제는 그녀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항상 그녀이 체취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공기 중에 흐리고 있는 그녀의 향수나 또는 샴푸향기는 그에게 자극을 주었다.
그것도 그의 남성을 단순하고도 뜨겁게 반응하게 만들었고 평범하게 뛰던 맥박조차 가속으로 내달리게 만들었다.
쉽게 그녀에게 반응하는 자신에게 여간 화가 나는 것이 아니었다. 유키는 비록 혼자만의 어둠 속에 갇혀지냈긴 했지만 나름대로 한가로운 삶이었다.
그런 삶 속에 한 여자가 계속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고, 그는 매일매일을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