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재벌가나 권력가와의 인연을 중요시했고, 그 필요성을 잘 알았지만 결혼만은 세준이 사랑하는 사람과 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한번도 이런 식으로 강요한 적이 없었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 다면 단 이 회사를 사회에 기부할 생각이다. 그러니 잘 생각해라." 그 말을 하고 아버지는 갑자기 들어왔던 것처럼 그렇게 뒤돌아서 나가 버렸다. 세준은 하도 어의가 없어 아버지가 나간 문을 한동안 계속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서있었다. 젠장 할! 결혼이라니 그것도 모르는 여자와 아니 여자아이겠지, 지금은 70년대라고 조선시대도 아닌데,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정략결혼이라니 사람들이 알면 아주 웃다가 배꼽까지 잃어버릴 일이었다. 다 좋았다. 28살인 그에게 어쩌면 필요한 것이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 하필 아버지가 정한 결혼 상대가 김진만 사장의 딸이란 말인가? 하고많은 집안 중에서 왜 하이에나 같은 남의 것이나 노리는 그런 비열한 인간의 딸이냔 말이다. 세준은 5년 전의 일을 아직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건 혈기 왕성한 그에게는 사형을 선도 한 것이나 다름없는 효과를 나타냈고, 그 어둠과 끈끈한 영향력에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었다.
그는 그 나이 때 어느 여자와 다르게 섹시함과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혜란에게 빠져있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와는 다르게 그녀의 모습이 남자들에게 어떻게 미칠 줄 알고 있었고 그걸 이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 처음부터 그걸 몰랐던 것이 세준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었다. 혜란은 볼륨이 정확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그걸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러다 세준의 회사 창립 20주년이 되던 날 그는 가족들에게 혜란을 소개할 겸해서 파티에 유난히 아름답게 차려 입은 그녀를 데리고 갔었다. "음, 자기야 너무 멋있다." 그 날의 화려함은 혜란에게 신선함 이였고, 상류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의 기회였다. 혜란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다녔었고, 자신의 소원대로 많은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번 찍은 여자는 꼭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건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김진만 사장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누구도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부인이 있는 집에까지 끌어들인다는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사생활이 문란한 남자였다. 그 때만해도 순진했던 세준은 자신의 어여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여자 친구가 그런 김진만 사장에게 쉽게 빠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혜란은 점점 세준에게 소원해져 갔었고, 그 이유를 알려고 하는 그에게 점차 짜증을 내기 시작했었고, 급기야는 심한 말다툼이 이어졌다. "난 너 같은 어린 남자는 싫어. 그러니 우리 그만 끝내." 세준은 갑작스런 운 혜란의 변심이 그저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나서 그냥 내 뱉은 말이거니 생각을 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우리 우선 머리나 식히고 다시 말하자. 내가 연락할게." "난 할 말없어 그러니 연락하지마." 세준은 그렇게 돌아선 후 며칠이 지나 어느 날 밤에 혜란의 집 앞에서 차안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그런데 점점 자정이 되어 가는데도 혜란은 집으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몇 시간을 기다리다가 혜란이 친구에 집에서 자고 오려니 생각을 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길 저편에서 차의 밝은 라이트가 그의 얼굴에 비추었다. 세준은 그 차가 지나가면 갈 요량으로 기다리고 서 있었는데, 그 차는 혜란의 집 앞에서 멈추었고, 혹시나 하는 그의 생각대로 혜란이 그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세준은 그녀의 모습에 반가워 차에서 내리려고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데는 순간 반대 편에 내리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남자를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하지만 더 그를 못 움직이게 하는 것은 혜란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내리는 배가 나온 중년의 남자에게다가 가더니 그의 목에 자신의 두 팔을 다정스럽게 감고 그에 품안에 안기는 것이 아닌가? 실로 그건 그에게 충격이었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남자는 그가 그토록 싫어한 김진만 사장이라는 거였다. 세준은 그가 어린 혜란과 낯뜨거운 장면을 연출한 뒤 돌아가자 겨우 분노와 배신감을 추스른 그는 혜란이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차에서 내렸다. "이혜란!" 집으로 들어가려는 여자는 익숙한 목소리에 놀랐는지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는 쪽으로 돌아보았는데, 처음에는 놀란 눈빛 이였지만, 나중에는 귀찮다는 눈빛으로 변하는 걸 세준은 똑똑히 보았다.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세준은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의 눈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좋아. 어린애 같은 너하고는 전혀 틀리거든." "그 남자는 니 아버지뻘이야. 그리고 유부남이고, 더 큰 문제는 그 족제비 같은 남자는 여자를 밥먹듯이 갈아치운단 말이야." 그의 말에 혜란이 정신을 차리기 바랬다면 그는 정말 그녀를 모르는 거였다. 그녀는 그의 그런 말을 무시하듯이 자신의 두 팔을 가슴 앞으로 올려 팔짱을 끼었다. "칫,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이 어디 있어, 서로 좋아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 사람은 이혼 할거야. 그거 알아 넌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뭐 하나 사줄 때도 몸을 사리지만, 그이는 그렇지 않아. 내가 원하면 별이라도 가져다 줄 사람이야." 혜란은 멍하게 서 있는 세준을 남겨두고 집안으로 잽싸게 들어와 버렸다. 세준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이라니?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뻘 한 남자한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녀가 그렇게 집으로 들어가 버리자 다시는 그녀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하루 밤도 지나지 않아 변심했고 세준은 그녀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바라며 그녀를 찾아가도 또 찾아갔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과 멸시였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세준은 혜란이 말한 사랑이 자신이 맹세한 사랑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세준은 그날의 악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그 날 이후로 술독에 빠져서 지냈고,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과 시비를 붙고 싸우기를 일삼았다.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가 그런 세준을 군대로 보내어 버렸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는 군대에서의 고댄 훈련과 남자들만의 세상에 있으면서 혜란이 세상에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하필 아버지가 정한 신부감이 혜란이와 놀아났던 김진만의 딸이라니 그건 그 아이가 어리다는 것 보다 더 충격을 주었다. 그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모습은 자신의 엄마의 한복 뒤에 숨던 눈망울이 유난히 키가 큰 열 살 정도 되는 모습이었고, 키가 크고 어린 모습말고는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2
태림은 친구들과 난로 옆에 모여서 불을 쬐면서 방학이 끝나고 진급을 해서도 같은 반이 된 가장 친한 친구인 유정이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단짝인 유정이지만 아버지가 한 폭탄 선언을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야! 너 무슨 일 있니?" 역시 단짝 친구였다. 태림이 아무리 태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태림의 얼굴을 보고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는 줄 안 것 보면 말이다. "아니, 그냥 저, 유정아…." 태림은 혼인신고가 끝난 데다가 오늘부터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 살아야 하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유정이가 집에 전화를 하게 되면 태림이가 없는 것을 알게 될 테고 잘못해서 아버지가 받게 되면 분명 그녀의 결혼을 유정이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왜?" 유정이의 맑은 눈동자가 작은 손거울에서 태림에게로 향했다. "나 오늘부터 사촌 오빠 집에 가서 지내게 돼서 당분간 전화 못 받어 그러니까, 내가 다른 번호 가르쳐 줄 때까지 우리 집에 전화하지 말라고." 태림의 말에 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데 갑자기 웬 사촌오빠?" -거짓말은 할수록 늦다고 하더니! "어? 응 그거, 아! 외국에서 살다가 와서 한국 생활에 적응 할 동안만 아버지가 같지 지내라고 하셔서." "사촌오빠 있다는 말 한적 없잖아." "좀 먼 친척이라 나도 어릴 때말고는 본적이 없거든." 어릴 때보고 본적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교복을 입고 군인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흐린 기억뿐이었다. 외국이라는 말에 유정이의 얼굴이 선망으로 빛났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대에 외국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부자가 아니고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유정이 더 이상의 궁금증을 가지지 않자 태림은 안심을 했다. -미안해, 유정아 나중에 말해 줄게. 어떻게 수업을 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 없는 하루를 보냈다.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으면 국사 선생님이 걱정을 했다. 평소에 국사를 좋아해서 수업을 넋 놓고 듣던 그녀가 수업에는 관심이 없어서 수업을 멈출 정도였다. 종례를 하러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는데도, 태림은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네 선생님한테는 이미 말씀 들였다.' 선생님이 자신이 혼인신고를 하고 남자의 집에 들어가 산다는 걸 안다는 게, 아무리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해도 죄를 진 것처럼 죄책감 같은 게 들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태림의 행동을 눈치 챘는지 아니면 다른 할 말이 있어서 인지 선생님은 조용히 태림을 불러냈다. 선생님은 상담실로 태림을 데리고 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여지를 없앴다. "아버님에게서 전화 받았다." 태림의 고개는 점점 밑으로 향했다.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이해해 주는 선생님이 고마워서 인지 아니면 참아 왔던 분함이 터져서 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조촐하지만 시댁에 들어가는 태림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는 엄마 앞에서도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아직 결혼이란 걸 생각해 본적이 없겠지. 나도 오랫동안 살아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뭐라고 할까 결혼이라는 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아껴주고 이해해 주는 거라고 생각해." 선생님은 결혼이란 걸 정의하기가 어려운지 수업시간과는 다르게 쩔쩔 메었지만 태림에게 많은 걸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결혼이란 걸 생각한 적이 없어서 이제부터 자신의 집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가르쳐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엄마는 아버지의 폭력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딸의 결혼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아버지의 폭탄선언 뒤로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엄마에게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뼈속 깊이서 흘러 나오는 것 같은 무거운 한숨 소리었다. 하교를 하고 수많은 여학생들 틈에 끼어서 유정과 같이 나오는데, 유정이 태림의 팔을 쿡쿡 찌르는 게 느껴져서 깊은 생각의 늪에서 빠져 나왔다. 유정을 보니 고개로 저 만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정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아버지의 말대로 아버지의 운전기사가 나와있었다. 태림이는 유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여학생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면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정작 차에 올라타는 태림은 자신이 꼭 귀향가야 하는 죄인처럼 느껴졌고 사방이 보이지 않는 감옥 같아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아가씨. 바로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네." 태림 자신이 들어도 자신의 목에서 나온 목소리는 겨우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의 뒤에 숨어서 보호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사실 태림이 커가면서 엄마를 더 보호하면서 자라온 것이 더 맞는 소리였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폭행을 가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 태림은 작은 몸으로 엄마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대부분은 성공하는 가 싶었지만 태림이 없으면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처벌은 더 살벌했다. 자신이 살게될 집으로 가는 10여분이 꼭 10초 같았다. 태림은 별별 생각을 다했다. 바퀴가 펑크가 나서 멈추어 버렸으면, 누군가 자신이 탄 차를 박아버려서 병원에 누워 있는 생각 등 별 희한한 생각을 했지만 결국은 도착하고 말았다. "다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는 돌아와서는 태림이가 앉아있는 곳의 차 문을 열어주고 태림이가 차에서 내리도록 도왔다. 그녀는 내리지 않을 생각도 해봤지만, 자신을 데려다준 아저씨가 무슨 죄가 있냐고 생각하면서 무거운 다리를 길 위로 내려놓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굵고 저음의 남자의 목소리가 들였다. "누구십니까?" 태림이 대신 운전기사가 말을 하자 문은 탁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아가씨,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혼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태림은 자신의 검은 가방의 손잡이를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쥔 채로 정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막 현관 앞에 도착해서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향하는데 안에서 문이 열렸다. "어서 와라."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은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한 두 번 뵌 적이 있어서 금방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의 아버지와 다르게 다정다감하고 웃음이 많은 분이 시아버지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갈비뼈를 뚫고 나오려는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봬요?" "그래. 많이 컸구나?" 중년의 남자는 자신의 어린 며느리에게 환영의 미소를 보여주었고, 주춤거리는 태림이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세준이는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단다. 오늘 같은 날 일찍 들어오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사실이었다. 없는 게 더 태림의 정신 상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태림이의 시아버지는 집안 이곳 저곳을 설명해 주면서 한쪽에 있는 방으로 태림이의 팔꿈치를 잡고 이끌고 갔다. "집안 일을 봐주는 파출부 아주머니가 따로 있으니 집안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 그는 태림이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팔꿈치를 놓고 방문을 열었다. 방은 창가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고, 화장대와 옷장으로 비교적 단조롭지만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 방이 너희들이 지낼 방이다. 전화선은 따로 해놓았으니까 친구들에게 번호를 알려주어도 된다." 너희들이라고, 그 말이 태림이가 처한 상태를 다시금 상기 시켜주었다. "그리고 이 옆방은 세준이가 가끔, 아니 거의 회사 일을 하면서 지내는 서재란다. 당분간은 분가하지 않고 우리 부부와 같이 살 거란다. 좀 불편할 지도 모르지만 길어야 일년이겠지만 그놈도 밖에 나가서 사는 걸 좋아하니 그렇게 까지 걸리지는 않을 게다. 태림아." 시아버지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정말 부드러웠다. 꼭 딸을 부르는 아버지 같았다. 아버지에게서 그런 정다운 소리를 들은 적이 없지만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네?" "네가 대학에 가고 싶다면 보내 주마. 그러니 계속 공부하도록 해라. 알겠니?" 그 말에 너무 고마워서 태림은 큰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와 집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포기 한지 오래였다. 태림은 엄마의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결혼하는 데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눈썹을 올리더니 태림을 우습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흥. 그래, 들어 나 보자." 태림은 아버지가 자신을 기필코 시집을 보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포기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조건을 하나 걸기로 했다. "이제 다, 다시는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주세요." 딸의 말에 눈에 독기를 품고 있던 남자는 태림이를 내리 칠 것 마냥 다가오다가 표독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녀가 알아온 아버지는 믿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런 약속이라도 받아 놓지 않으면 집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좋아. 맹세하마, 그 대신 나 역시 조건이 있다."
태림은 어릴 적 그녀를 보면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신 아저씨가 시아버지가 되어서 그나마 불행 중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만을 말하고서는 시아버지와 시갓 집 심지어는 남편이 될 사람에 대해서도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아서 무서웠었다. 그 때 아버지의 말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태림은 우선 엄마의 안전을 위해 그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제발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면 하는게 태림의 바램이었다. 갑자기 태림의 입에서 쓴 웃음이 흘러 나오 손으로 입을 막아야만 했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닌데 신랑의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사진 한번 보지 못하고 시집을 왔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할지를 생각하자 공허한 웃음만이 나왔다. 태림은 자신이 쓸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두 개를 연결해 놓았는지 침실과 다른 공간이 벽에 붙은 장식장과 분리되어 있어 수면을 방해받지 않도록 되어 있었고 다른 방에는 넓은 소파와 탁자가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놓여있었다. 실용적 이였지만 왠지 자신의 방이 아니어서 있지 불편하고 차갑게 보이기만 했다. 태림은 소파에 가방을 올려놓고 침실로 들어가 보았는데 침대는 하얀색으로 배색되어 있었고, 거실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침실 한쪽에 문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하나는 욕실과 세면대가 불리 되어 있는 실용적인 화장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림의 빈약한 옷과 남자의 옷들이 들어 있는 방이 나왔다. 옷 방문은 밖으로 열렸는데 안쪽에는 문 크기와 같은 거울이 달려 있어 옷을 입고 전신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진은 단 한 장도 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얼굴이라도 알고 싶었던 태림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방을 다 둘러보고 나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막연히 바라보았다. 곧 저녁식사시간이 되는데 내려가서 일을 도와야 하는지 그냥 아줌마가 올라 올 때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만 되었다. 똑똑똑 "네." 태림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30분 뒤에 식사시간이니까, 준비하고 내려오렴."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태림은 머리를 단정히 올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꽃무늬 치마를 입은 사람이 자신의 시어머니라는 걸 알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뵀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어머니는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태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걸 삼척동자도 알만큼 확실한 감정을 담은 행동이었다. 태림은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옷장에서 집에서 보낸 권색 치마를 먼지 입고 하얀 남방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림은 시어머니가 다시 들어 온 줄 알고 남방 소매에 팔을 재빨리 꾀어 넣고 곧 내려간다고 말을 했다. "넌 누구지." 태림은 키가 크고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방 입구에 서 있자 단추를 잠그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많은 걸 바라지도 혼자 두고 올 엄마의 걱정 때문에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지만 그녀의 남편이 된 남자는 정말이지 멋있었고, 아버지와 풍기는 이미지와 다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진한 눈썹과 커다란 눈, 코, 그리고 말을 할 때마다 보석을 뱉어 낼 것 같은 입술은 태림이 잘 알지 못하는 원초적인 뭔가를 끌어내 시선을 거둘수가 없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은 게 아니라면 옷을 마저 입지 그래." 태림은 자신의 앞섬을 내려다보고 아직 두 개밖에 잠그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고 뒤돌아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채우면서도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에 온 몸이 붉어졌다. "네가 내 아내인가 보지." 태림은 그의 말에 천천히 그와 눈을 맞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준이라고 했던 남자는 침대에 서류 가방을 던지더니 양복 상의를 벗어 태림에게 던지듯이 건네주었다. 그러자 태림은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옷을 옷걸이에 걸어 옷 방에 걸어놓았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옷을 다 벗을 작정인지 넥타이를 풀어 목에서 빼더니 와이셔츠 단추를 재빨리 풀어 젖히고 있었다. "엄마야." 세준은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내면서 뒤돌아서는 태림에 행동이 비웃는 웃음소리를 냈다. "우습군. 천하의 김진만 사장의 따님께서 이런 장면을 보고 놀라다니. 그분이 따님만은 순진하게 키웠나 보지." 태림은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고, 어디 가면 항상 엄마와 그녀는 동정과 비난의 시선을 동시에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뒤돌아 있을 거면 차라리 나가있어." 어린 신부였지만 순수함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랄랄이 같은 소녀였다면 행동하기가 더 쉬웠을 텐데. 세준의 날이 설대로 선 말투에 태림은 어깨를 축 늘어 틀인 채 방에서 나갔다. 그런 모습을 보자 괜히 죄책감이 들어 기분이 나빠진 세준은 바닥에 옷을 내팽개쳐서 자신의 좌절감을 표현했다.
식사시간은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을 만큼 불편했다. 시어머니가 되는 분은 얼굴 선은 단아했고, 친절한 인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태림이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가 밥을 어떻게 먹는지, 실수는 하지 않는지 감시를 하는 것처럼 태림이 밥먹는 모습을 자꾸 쳐다보아서 반찬하나 집어먹는 것도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전교에서 몇 등이나 하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막 집어 올린 김치가 튀어 나갈 뻔했지만 다행이 그녀의 밥그릇 위로 떨어져 칠칠맞다는 소리는 면할 수 있었다. "30등 안에 들어요." 모두들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마치 그녀가 그 자리에 없는 듯이 행동하던 세준도 태림을 빤히 쳐다봐 민망할 지경이었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가장 신경쓰이는 사람은 세준이었지만 그는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어 그녀의 성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길이 없었다. "그것 밖에 못한단 말이니. 우리 무성전자의 안주인이 되려면 적어도 상위권에 들어있어야 기본이라도 하지." "그만해요. 여보. 그 정도면 잘 하고 있는 데 그러오." 시어머니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남편의 말에 그만두었다. 태림은 그나마 시아버지 되는 엄마의 고향 선배인 형일 아저씨가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녀의 편은 시아버지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그녀가 식사를 먹는둥 마는둥 해도 관심 없다는 듯이 밥 한 공기를 해치우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계속 흘겨보면서 태림을 더 힘들게 했다. 겨우 식사시간이 끝났나 싶었는데 후식을 먹는 다면서 거실로 모여 앉았다. "전 일을 좀…." "나중에 하려무나." "네." 태림은 남편이라는 강인하고 무서운 것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꼼짝 못하는 게 신기해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태림과는 다르게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심이었다. 태림은 아줌마가 차와 과일을 내와 탁자에 올려놓자 고맙다고 말을 했다. "아가씨는 아직 어리니까. 우유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태림은 어리다는 말에 시어머니와 남편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걸보고 조심스레 우유를 마셨다. "그렇지 않아도 키가 큰데 무슨 우유, 여자가 그렇게 키만 커가지고 어디 애는 낳겠니." "어험." "웬 헛기침이세요. 그냥 평상시처럼 핀잔이나 주시지 않고?" "흠." 태림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숨을 거칠게 들어 마시는 걸 본 세준은 잠시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태림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태림은 시어머니의 그런 비아냥거림에 눈썹만 약간 움직일 뿐 얼굴 색 하나 붉히지 않는 시아버지가 놀라웠다. 태림은 시어머니의 말에 손이 날아올지 몰라 긴장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그녀가 시집온 이 새로운 가족은 태림이 알고 지내온 가족관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광경이었다. 엄마는 그런 말대꾸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기도 했지만, 엄마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라도 보이면 아버지는 반항의 싹을 처음부터 없앤다는 빌미로 항상 폭력을 휘둘렀다. 엄마는 좌절감을 버리고 그녀가 시가 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많은 걸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지만 남녀 관계에 대해서 미쳐 다 알기도 전에 아버지에게 시집오고 사랑 받지도 사랑하지도 못한 채 불행한 삶은 살아온 엄마는 자신의 욕심처럼 많을 걸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첫...첫날밤은 좀 아플 거야. 하지만 그냥 가만히 있으면 금방 지나가니까 아파도 그냥 참아야 한다. 나..중에는 괜찮아 질 거야.' 그녀는 거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생각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아프면 엄마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인지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맞았어도 아프다는 소리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림은 걱정이 되어 우유가 목에 걸릴 정도로 긴장을 했다. 거실에 둘러앉아 있었지만 그 누구도 말을 꺼내려는 사람이 없이 각자 앞에 놓여진 음료만 홀짝이고 있었고, 그런 그들이 모습에 자신이 끼면서 어색해 진 것 같아 태림은 더욱 미안해지고 죄스러웠다. "피곤하구나. 너희들도 올라가서 자도록 해라." "안녕히 주무세요." 태림의 남편이 된 남자는 그녀가 따라오던 말던 상관이 없다는 듯이 이층으로 가버렸고, 태림은 조금이나마 늦게 올라가려고 아주머니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아주머니가 그런 그녀의 등을 떠밀다시피 계단으로 올려 보내 하는 수 없이 태림은 떨리는 발길로 방으로 향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학생... 아니 작은 사모님. 겉으로는 냉랭해 보여도 이 집사람들 속마음을 참 따뜻하거든요. 너무 긴장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태림은 아주머니가 뭘 이야기 한 건 줄 어렴풋이 알고 얼굴을 붉혔지만 세준의 차갑고 이지적인 눈을 생각하자 다시금 얼굴의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하지만 첫날밤에 대한 걱정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었다. 세준은 이미 소파에 여분의 이불과 베개를 올려놓고 있었다. 세준은 언뜻 보아도 반에서 가장 큰 태림이 보다 얼굴하나는 충분히 더 커 보였다. "난 너랑 한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네가 소파에서 자. 난 키 때문에 저 소파에서는 잘 수 없으니까. 알아들어?" 태림은 세준의 차가운 눈빛이 무서웠다. 아버지의 잔혹한 눈빛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을 비추지 않는 그의 눈빛이 아버지의 먹이 감을 노리는 듯한 눈빛 보다더 태림을 두렵게 만들었다. "네." 태림은 방과 같이 딸린 거실에 있는 소파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처럼 태림이 누워 자기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지만 태림 보다 확실히 키가 큰 세준이 자기에는 불편에 보였다. 하지만 세준은 잠자리를 정해 주고서도 자신은 잘 생각이 없는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디 가세요?" 그는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 태림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문을 열었다. "상관하지말고 넌 학교 가려면 일찍 자던가 알아서 해." 그렇게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녀의 관계나 결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태림은 뭔가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다정한 말이나 행동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가 다정하게 대했다면 태림은 분명 소리를 쳤거나 방을 뛰쳐나가거나 그랬을 거다. 하지만 첫날밤을 같은 방에서도 보내지 않고 소파에서 자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뭘 원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 결혼을 취소 할 수 있으면 하고 싶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준에게 느껴지는 뭔가 이상하고 태림의 나이 또래의 남자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으로 밤을 지셀 수는 없었다. 곧 시험이 시작될 것이고, 시어머니 말씀대로 상위권은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내일을 준비해야 했기에 태림은 잠을 청했다. 서류를 보기 위해 서재로 왔지만 태림의 작고-분명 어머니의 기준으로 보면 태림은 키는 결코 작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길이다- 여린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걸 포기하고 그의 몸에 익숙해진 가죽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김진만 사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직 졸업도 하지 않고 아직 여자라기 보다 소녀인-키는 컸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뭔가에 억눌려 있는 듯 처량해 보였다.- 딸을 시집보낼 생각을 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거의 도둑 결혼을 하면서 까지 보내야 했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지만, 그의 지금까지의 행실을 보면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누구든지 손에 넣으려고 했고, 대부분의 여자들도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의 생김새는 비슷했다. 혜란 처럼 서구적으로 생긴 여자들을 좋아했는데, 혹시라도 그런 연예인이 있으면 꼭 한번쯤은 술자리 같은 곳으로 불러내어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에게 많은 돈을 주거나 마음에 들면 얼마동안 더 지내고 난 뒤에 가게 같은 걸 하나 차릴 만한 돈을 쥐어 주고 그의 인생에서 내보내고는 했다. 완전히 난잡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세준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런데 태림이 그의 인생으로 들어옴으로써 이제 그 일들이 세준과 상관 있는 일이 될까봐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피곤했다. 아무래도 그의 말도 되지 않는 결혼이 그의 신경을 좀먹고 있었는지 평상시 보다 더 피곤했다. "가서 잠이나 자야겠군." 그 고등학생이 누워 있는 방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가서 잘 곳도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신부였지만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세준은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까치발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뭐하는 짓인 줄 모르겠군." 창문에서 달빛이 들어와 태림이 자고 있는 소파 위를 비추고 있었다. 달빛에 비춘 태림을 보자 그래도 소녀 같던 그녀가 조금은 여자다워 보였다. 그런데 자면서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두 손으로 이불을 꼭 쥔 채로 턱 아래에 손을 고이고 잠들어 있었다. 그가 자고 있는 자신을 덮치기라도 할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가지라고 부탁해도 싫어." 세준은 평상시처럼 옷을 다 벗고 침대에 들었다. 저 쪼그만 여자아이 때문에 그의 습관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애련 {두번째}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재벌가나 권력가와의 인연을 중요시했고, 그 필요성을 잘 알았지만 결혼만은 세준이 사랑하는 사람과 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한번도 이런 식으로 강요한 적이 없었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 다면 단 이 회사를 사회에 기부할 생각이다. 그러니 잘 생각해라."
그 말을 하고 아버지는 갑자기 들어왔던 것처럼 그렇게 뒤돌아서 나가 버렸다.
세준은 하도 어의가 없어 아버지가 나간 문을 한동안 계속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서있었다.
젠장 할! 결혼이라니 그것도 모르는 여자와 아니 여자아이겠지, 지금은 70년대라고 조선시대도 아닌데,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정략결혼이라니 사람들이 알면 아주 웃다가 배꼽까지 잃어버릴 일이었다.
다 좋았다. 28살인 그에게 어쩌면 필요한 것이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 하필 아버지가 정한 결혼 상대가 김진만 사장의 딸이란 말인가? 하고많은 집안 중에서 왜 하이에나 같은 남의 것이나 노리는 그런 비열한 인간의 딸이냔 말이다.
세준은 5년 전의 일을 아직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건 혈기 왕성한 그에게는 사형을 선도 한 것이나 다름없는 효과를 나타냈고, 그 어둠과 끈끈한 영향력에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었다.
그는 그 나이 때 어느 여자와 다르게 섹시함과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혜란에게 빠져있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와는 다르게 그녀의 모습이 남자들에게 어떻게 미칠 줄 알고 있었고 그걸 이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 처음부터 그걸 몰랐던 것이 세준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었다.
혜란은 볼륨이 정확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그걸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러다 세준의 회사 창립 20주년이 되던 날 그는 가족들에게 혜란을 소개할 겸해서 파티에 유난히 아름답게 차려 입은 그녀를 데리고 갔었다.
"음, 자기야 너무 멋있다."
그 날의 화려함은 혜란에게 신선함 이였고, 상류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의 기회였다.
혜란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다녔었고, 자신의 소원대로 많은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번 찍은 여자는 꼭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건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김진만 사장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누구도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부인이 있는 집에까지 끌어들인다는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사생활이 문란한 남자였다.
그 때만해도 순진했던 세준은 자신의 어여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여자 친구가 그런 김진만 사장에게 쉽게 빠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혜란은 점점 세준에게 소원해져 갔었고, 그 이유를 알려고 하는 그에게 점차 짜증을 내기 시작했었고, 급기야는 심한 말다툼이 이어졌다.
"난 너 같은 어린 남자는 싫어. 그러니 우리 그만 끝내."
세준은 갑작스런 운 혜란의 변심이 그저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나서 그냥 내 뱉은 말이거니 생각을 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우리 우선 머리나 식히고 다시 말하자. 내가 연락할게."
"난 할 말없어 그러니 연락하지마."
세준은 그렇게 돌아선 후 며칠이 지나 어느 날 밤에 혜란의 집 앞에서 차안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그런데 점점 자정이 되어 가는데도 혜란은 집으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몇 시간을 기다리다가 혜란이 친구에 집에서 자고 오려니 생각을 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길 저편에서 차의 밝은 라이트가 그의 얼굴에 비추었다.
세준은 그 차가 지나가면 갈 요량으로 기다리고 서 있었는데, 그 차는 혜란의 집 앞에서 멈추었고, 혹시나 하는 그의 생각대로 혜란이 그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세준은 그녀의 모습에 반가워 차에서 내리려고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데는 순간 반대 편에 내리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남자를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하지만 더 그를 못 움직이게 하는 것은 혜란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내리는 배가 나온 중년의 남자에게다가 가더니 그의 목에 자신의 두 팔을 다정스럽게 감고 그에 품안에 안기는 것이 아닌가?
실로 그건 그에게 충격이었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남자는 그가 그토록 싫어한 김진만 사장이라는 거였다. 세준은 그가 어린 혜란과 낯뜨거운 장면을 연출한 뒤 돌아가자 겨우 분노와 배신감을 추스른 그는 혜란이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차에서 내렸다.
"이혜란!"
집으로 들어가려는 여자는 익숙한 목소리에 놀랐는지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는 쪽으로 돌아보았는데, 처음에는 놀란 눈빛 이였지만, 나중에는 귀찮다는 눈빛으로 변하는 걸 세준은 똑똑히 보았다.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세준은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의 눈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좋아. 어린애 같은 너하고는 전혀 틀리거든."
"그 남자는 니 아버지뻘이야. 그리고 유부남이고, 더 큰 문제는 그 족제비 같은 남자는 여자를 밥먹듯이 갈아치운단 말이야."
그의 말에 혜란이 정신을 차리기 바랬다면 그는 정말 그녀를 모르는 거였다. 그녀는 그의 그런 말을 무시하듯이 자신의 두 팔을 가슴 앞으로 올려 팔짱을 끼었다.
"칫,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이 어디 있어, 서로 좋아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 사람은 이혼 할거야. 그거 알아 넌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뭐 하나 사줄 때도 몸을 사리지만, 그이는 그렇지 않아. 내가 원하면 별이라도 가져다 줄 사람이야."
혜란은 멍하게 서 있는 세준을 남겨두고 집안으로 잽싸게 들어와 버렸다.
세준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이라니?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뻘 한 남자한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녀가 그렇게 집으로 들어가 버리자 다시는 그녀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하루 밤도 지나지 않아 변심했고 세준은 그녀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바라며 그녀를 찾아가도 또 찾아갔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과 멸시였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세준은 혜란이 말한 사랑이 자신이 맹세한 사랑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세준은 그날의 악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그 날 이후로 술독에 빠져서 지냈고,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과 시비를 붙고 싸우기를 일삼았다.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가 그런 세준을 군대로 보내어 버렸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는 군대에서의 고댄 훈련과 남자들만의 세상에 있으면서 혜란이 세상에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하필 아버지가 정한 신부감이 혜란이와 놀아났던 김진만의 딸이라니 그건 그 아이가 어리다는 것 보다 더 충격을 주었다.
그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모습은 자신의 엄마의 한복 뒤에 숨던 눈망울이 유난히 키가 큰 열 살 정도 되는 모습이었고, 키가 크고 어린 모습말고는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2
태림은 친구들과 난로 옆에 모여서 불을 쬐면서 방학이 끝나고 진급을 해서도 같은 반이 된 가장 친한 친구인 유정이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단짝인 유정이지만 아버지가 한 폭탄 선언을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야! 너 무슨 일 있니?"
역시 단짝 친구였다. 태림이 아무리 태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태림의 얼굴을 보고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는 줄 안 것 보면 말이다.
"아니, 그냥 저, 유정아…."
태림은 혼인신고가 끝난 데다가 오늘부터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 살아야 하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유정이가 집에 전화를 하게 되면 태림이가 없는 것을 알게 될 테고 잘못해서 아버지가 받게 되면 분명 그녀의 결혼을 유정이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왜?"
유정이의 맑은 눈동자가 작은 손거울에서 태림에게로 향했다.
"나 오늘부터 사촌 오빠 집에 가서 지내게 돼서 당분간 전화 못 받어 그러니까, 내가 다른 번호 가르쳐 줄 때까지 우리 집에 전화하지 말라고."
태림의 말에 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데 갑자기 웬 사촌오빠?"
-거짓말은 할수록 늦다고 하더니!
"어? 응 그거, 아! 외국에서 살다가 와서 한국 생활에 적응 할 동안만 아버지가 같지 지내라고 하셔서."
"사촌오빠 있다는 말 한적 없잖아."
"좀 먼 친척이라 나도 어릴 때말고는 본적이 없거든."
어릴 때보고 본적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교복을 입고 군인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흐린 기억뿐이었다.
외국이라는 말에 유정이의 얼굴이 선망으로 빛났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대에 외국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부자가 아니고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유정이 더 이상의 궁금증을 가지지 않자 태림은 안심을 했다.
-미안해, 유정아 나중에 말해 줄게.
어떻게 수업을 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 없는 하루를 보냈다.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으면 국사 선생님이 걱정을 했다. 평소에 국사를 좋아해서 수업을 넋 놓고 듣던 그녀가 수업에는 관심이 없어서 수업을 멈출 정도였다.
종례를 하러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는데도, 태림은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네 선생님한테는 이미 말씀 들였다.'
선생님이 자신이 혼인신고를 하고 남자의 집에 들어가 산다는 걸 안다는 게, 아무리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해도 죄를 진 것처럼 죄책감 같은 게 들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태림의 행동을 눈치 챘는지 아니면 다른 할 말이 있어서 인지 선생님은 조용히 태림을 불러냈다.
선생님은 상담실로 태림을 데리고 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여지를 없앴다.
"아버님에게서 전화 받았다."
태림의 고개는 점점 밑으로 향했다.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이해해 주는 선생님이 고마워서 인지 아니면 참아 왔던 분함이 터져서 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조촐하지만 시댁에 들어가는 태림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는 엄마 앞에서도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아직 결혼이란 걸 생각해 본적이 없겠지. 나도 오랫동안 살아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뭐라고 할까 결혼이라는 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아껴주고 이해해 주는 거라고 생각해."
선생님은 결혼이란 걸 정의하기가 어려운지 수업시간과는 다르게 쩔쩔 메었지만 태림에게 많은 걸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결혼이란 걸 생각한 적이 없어서 이제부터 자신의 집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가르쳐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엄마는 아버지의 폭력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딸의 결혼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아버지의 폭탄선언 뒤로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엄마에게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뼈속 깊이서 흘러 나오는 것 같은 무거운 한숨 소리었다.
하교를 하고 수많은 여학생들 틈에 끼어서 유정과 같이 나오는데, 유정이 태림의 팔을 쿡쿡 찌르는 게 느껴져서 깊은 생각의 늪에서 빠져 나왔다. 유정을 보니 고개로 저 만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정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아버지의 말대로 아버지의 운전기사가 나와있었다. 태림이는 유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여학생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면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정작 차에 올라타는 태림은 자신이 꼭 귀향가야 하는 죄인처럼 느껴졌고 사방이 보이지 않는 감옥 같아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아가씨. 바로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네."
태림 자신이 들어도 자신의 목에서 나온 목소리는 겨우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의 뒤에 숨어서 보호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사실 태림이 커가면서 엄마를 더 보호하면서 자라온 것이 더 맞는 소리였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폭행을 가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 태림은 작은 몸으로 엄마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대부분은 성공하는 가 싶었지만 태림이 없으면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처벌은 더 살벌했다.
자신이 살게될 집으로 가는 10여분이 꼭 10초 같았다. 태림은 별별 생각을 다했다. 바퀴가 펑크가 나서 멈추어 버렸으면, 누군가 자신이 탄 차를 박아버려서 병원에 누워 있는 생각 등 별 희한한 생각을 했지만 결국은 도착하고 말았다.
"다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는 돌아와서는 태림이가 앉아있는 곳의 차 문을 열어주고 태림이가 차에서 내리도록 도왔다. 그녀는 내리지 않을 생각도 해봤지만, 자신을 데려다준 아저씨가 무슨 죄가 있냐고 생각하면서 무거운 다리를 길 위로 내려놓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굵고 저음의 남자의 목소리가 들였다.
"누구십니까?"
태림이 대신 운전기사가 말을 하자 문은 탁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아가씨,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혼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태림은 자신의 검은 가방의 손잡이를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쥔 채로 정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막 현관 앞에 도착해서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향하는데 안에서 문이 열렸다.
"어서 와라."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은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한 두 번 뵌 적이 있어서 금방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의 아버지와 다르게 다정다감하고 웃음이 많은 분이 시아버지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갈비뼈를 뚫고 나오려는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봬요?"
"그래. 많이 컸구나?"
중년의 남자는 자신의 어린 며느리에게 환영의 미소를 보여주었고, 주춤거리는 태림이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세준이는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단다. 오늘 같은 날 일찍 들어오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사실이었다. 없는 게 더 태림의 정신 상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태림이의 시아버지는 집안 이곳 저곳을 설명해 주면서 한쪽에 있는 방으로 태림이의 팔꿈치를 잡고 이끌고 갔다.
"집안 일을 봐주는 파출부 아주머니가 따로 있으니 집안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
그는 태림이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팔꿈치를 놓고 방문을 열었다. 방은 창가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고, 화장대와 옷장으로 비교적 단조롭지만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 방이 너희들이 지낼 방이다. 전화선은 따로 해놓았으니까 친구들에게 번호를 알려주어도 된다."
너희들이라고, 그 말이 태림이가 처한 상태를 다시금 상기 시켜주었다.
"그리고 이 옆방은 세준이가 가끔, 아니 거의 회사 일을 하면서 지내는 서재란다. 당분간은 분가하지 않고 우리 부부와 같이 살 거란다. 좀 불편할 지도 모르지만 길어야 일년이겠지만 그놈도 밖에 나가서 사는 걸 좋아하니 그렇게 까지 걸리지는 않을 게다. 태림아."
시아버지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정말 부드러웠다. 꼭 딸을 부르는 아버지 같았다. 아버지에게서 그런 정다운 소리를 들은 적이 없지만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네?"
"네가 대학에 가고 싶다면 보내 주마. 그러니 계속 공부하도록 해라. 알겠니?"
그 말에 너무 고마워서 태림은 큰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와 집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포기 한지 오래였다.
태림은 엄마의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결혼하는 데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눈썹을 올리더니 태림을 우습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흥. 그래, 들어 나 보자."
태림은 아버지가 자신을 기필코 시집을 보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포기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조건을 하나 걸기로 했다.
"이제 다, 다시는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주세요."
딸의 말에 눈에 독기를 품고 있던 남자는 태림이를 내리 칠 것 마냥 다가오다가 표독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녀가 알아온 아버지는 믿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런 약속이라도 받아 놓지 않으면 집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좋아. 맹세하마, 그 대신 나 역시 조건이 있다."
태림은 어릴 적 그녀를 보면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신 아저씨가 시아버지가 되어서 그나마 불행 중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만을 말하고서는 시아버지와 시갓 집 심지어는 남편이 될 사람에 대해서도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아서 무서웠었다.
그 때 아버지의 말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태림은 우선 엄마의 안전을 위해 그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제발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면 하는게 태림의 바램이었다.
갑자기 태림의 입에서 쓴 웃음이 흘러 나오 손으로 입을 막아야만 했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닌데 신랑의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사진 한번 보지 못하고 시집을 왔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할지를 생각하자 공허한 웃음만이 나왔다.
태림은 자신이 쓸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두 개를 연결해 놓았는지 침실과 다른 공간이 벽에 붙은 장식장과 분리되어 있어 수면을 방해받지 않도록 되어 있었고 다른 방에는 넓은 소파와 탁자가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놓여있었다. 실용적 이였지만 왠지 자신의 방이 아니어서 있지 불편하고 차갑게 보이기만 했다. 태림은 소파에 가방을 올려놓고 침실로 들어가 보았는데 침대는 하얀색으로 배색되어 있었고, 거실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침실 한쪽에 문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하나는 욕실과 세면대가 불리 되어 있는 실용적인 화장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림의 빈약한 옷과 남자의 옷들이 들어 있는 방이 나왔다. 옷 방문은 밖으로 열렸는데 안쪽에는 문 크기와 같은 거울이 달려 있어 옷을 입고 전신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진은 단 한 장도 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얼굴이라도 알고 싶었던 태림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방을 다 둘러보고 나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막연히 바라보았다. 곧 저녁식사시간이 되는데 내려가서 일을 도와야 하는지 그냥 아줌마가 올라 올 때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만 되었다.
똑똑똑
"네."
태림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30분 뒤에 식사시간이니까, 준비하고 내려오렴."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태림은 머리를 단정히 올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꽃무늬 치마를 입은 사람이 자신의 시어머니라는 걸 알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뵀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어머니는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태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걸 삼척동자도 알만큼 확실한 감정을 담은 행동이었다.
태림은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옷장에서 집에서 보낸 권색 치마를 먼지 입고 하얀 남방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림은 시어머니가 다시 들어 온 줄 알고 남방 소매에 팔을 재빨리 꾀어 넣고 곧 내려간다고 말을 했다.
"넌 누구지."
태림은 키가 크고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방 입구에 서 있자 단추를 잠그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많은 걸 바라지도 혼자 두고 올 엄마의 걱정 때문에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지만 그녀의 남편이 된 남자는 정말이지 멋있었고, 아버지와 풍기는 이미지와 다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진한 눈썹과 커다란 눈, 코, 그리고 말을 할 때마다 보석을 뱉어 낼 것 같은 입술은 태림이 잘 알지 못하는 원초적인 뭔가를 끌어내 시선을 거둘수가 없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은 게 아니라면 옷을 마저 입지 그래."
태림은 자신의 앞섬을 내려다보고 아직 두 개밖에 잠그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고 뒤돌아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채우면서도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에 온 몸이 붉어졌다.
"네가 내 아내인가 보지."
태림은 그의 말에 천천히 그와 눈을 맞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준이라고 했던 남자는 침대에 서류 가방을 던지더니 양복 상의를 벗어 태림에게 던지듯이 건네주었다. 그러자 태림은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옷을 옷걸이에 걸어 옷 방에 걸어놓았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옷을 다 벗을 작정인지 넥타이를 풀어 목에서 빼더니 와이셔츠 단추를 재빨리 풀어 젖히고 있었다.
"엄마야."
세준은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내면서 뒤돌아서는 태림에 행동이 비웃는 웃음소리를 냈다.
"우습군. 천하의 김진만 사장의 따님께서 이런 장면을 보고 놀라다니. 그분이 따님만은 순진하게 키웠나 보지."
태림은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고, 어디 가면 항상 엄마와 그녀는 동정과 비난의 시선을 동시에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뒤돌아 있을 거면 차라리 나가있어."
어린 신부였지만 순수함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랄랄이 같은 소녀였다면 행동하기가 더 쉬웠을 텐데.
세준의 날이 설대로 선 말투에 태림은 어깨를 축 늘어 틀인 채 방에서 나갔다. 그런 모습을 보자 괜히 죄책감이 들어 기분이 나빠진 세준은 바닥에 옷을 내팽개쳐서 자신의 좌절감을 표현했다.
식사시간은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을 만큼 불편했다. 시어머니가 되는 분은 얼굴 선은 단아했고, 친절한 인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태림이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가 밥을 어떻게 먹는지, 실수는 하지 않는지 감시를 하는 것처럼 태림이 밥먹는 모습을 자꾸 쳐다보아서 반찬하나 집어먹는 것도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전교에서 몇 등이나 하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막 집어 올린 김치가 튀어 나갈 뻔했지만 다행이 그녀의 밥그릇 위로 떨어져 칠칠맞다는 소리는 면할 수 있었다.
"30등 안에 들어요."
모두들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마치 그녀가 그 자리에 없는 듯이 행동하던 세준도 태림을 빤히 쳐다봐 민망할 지경이었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가장 신경쓰이는 사람은 세준이었지만 그는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어 그녀의 성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길이 없었다.
"그것 밖에 못한단 말이니. 우리 무성전자의 안주인이 되려면 적어도 상위권에 들어있어야 기본이라도 하지."
"그만해요. 여보. 그 정도면 잘 하고 있는 데 그러오."
시어머니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남편의 말에 그만두었다.
태림은 그나마 시아버지 되는 엄마의 고향 선배인 형일 아저씨가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녀의 편은 시아버지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그녀가 식사를 먹는둥 마는둥 해도 관심 없다는 듯이 밥 한 공기를 해치우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계속 흘겨보면서 태림을 더 힘들게 했다.
겨우 식사시간이 끝났나 싶었는데 후식을 먹는 다면서 거실로 모여 앉았다.
"전 일을 좀…."
"나중에 하려무나."
"네."
태림은 남편이라는 강인하고 무서운 것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꼼짝 못하는 게 신기해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태림과는 다르게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심이었다.
태림은 아줌마가 차와 과일을 내와 탁자에 올려놓자 고맙다고 말을 했다.
"아가씨는 아직 어리니까. 우유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태림은 어리다는 말에 시어머니와 남편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걸보고 조심스레 우유를 마셨다.
"그렇지 않아도 키가 큰데 무슨 우유, 여자가 그렇게 키만 커가지고 어디 애는 낳겠니."
"어험."
"웬 헛기침이세요. 그냥 평상시처럼 핀잔이나 주시지 않고?"
"흠."
태림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숨을 거칠게 들어 마시는 걸 본 세준은 잠시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태림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태림은 시어머니의 그런 비아냥거림에 눈썹만 약간 움직일 뿐 얼굴 색 하나 붉히지 않는 시아버지가 놀라웠다. 태림은 시어머니의 말에 손이 날아올지 몰라 긴장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그녀가 시집온 이 새로운 가족은 태림이 알고 지내온 가족관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광경이었다.
엄마는 그런 말대꾸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기도 했지만, 엄마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라도 보이면 아버지는 반항의 싹을 처음부터 없앤다는 빌미로 항상 폭력을 휘둘렀다.
엄마는 좌절감을 버리고 그녀가 시가 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많은 걸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지만 남녀 관계에 대해서 미쳐 다 알기도 전에 아버지에게 시집오고 사랑 받지도 사랑하지도 못한 채 불행한 삶은 살아온 엄마는 자신의 욕심처럼 많을 걸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첫...첫날밤은 좀 아플 거야. 하지만 그냥 가만히 있으면 금방 지나가니까 아파도 그냥 참아야 한다. 나..중에는 괜찮아 질 거야.'
그녀는 거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생각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아프면 엄마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인지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맞았어도 아프다는 소리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림은 걱정이 되어 우유가 목에 걸릴 정도로 긴장을 했다.
거실에 둘러앉아 있었지만 그 누구도 말을 꺼내려는 사람이 없이 각자 앞에 놓여진 음료만 홀짝이고 있었고, 그런 그들이 모습에 자신이 끼면서 어색해 진 것 같아 태림은 더욱 미안해지고 죄스러웠다.
"피곤하구나. 너희들도 올라가서 자도록 해라."
"안녕히 주무세요."
태림의 남편이 된 남자는 그녀가 따라오던 말던 상관이 없다는 듯이 이층으로 가버렸고, 태림은 조금이나마 늦게 올라가려고 아주머니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아주머니가 그런 그녀의 등을 떠밀다시피 계단으로 올려 보내 하는 수 없이 태림은 떨리는 발길로 방으로 향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학생... 아니 작은 사모님. 겉으로는 냉랭해 보여도 이 집사람들 속마음을 참 따뜻하거든요. 너무 긴장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태림은 아주머니가 뭘 이야기 한 건 줄 어렴풋이 알고 얼굴을 붉혔지만 세준의 차갑고 이지적인 눈을 생각하자 다시금 얼굴의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하지만 첫날밤에 대한 걱정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었다. 세준은 이미 소파에 여분의 이불과 베개를 올려놓고 있었다. 세준은 언뜻 보아도 반에서 가장 큰 태림이 보다 얼굴하나는 충분히 더 커 보였다.
"난 너랑 한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네가 소파에서 자. 난 키 때문에 저 소파에서는 잘 수 없으니까. 알아들어?"
태림은 세준의 차가운 눈빛이 무서웠다. 아버지의 잔혹한 눈빛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을 비추지 않는 그의 눈빛이 아버지의 먹이 감을 노리는 듯한 눈빛 보다더 태림을 두렵게 만들었다.
"네."
태림은 방과 같이 딸린 거실에 있는 소파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처럼 태림이 누워 자기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지만 태림 보다 확실히 키가 큰 세준이 자기에는 불편에 보였다.
하지만 세준은 잠자리를 정해 주고서도 자신은 잘 생각이 없는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디 가세요?"
그는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 태림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문을 열었다.
"상관하지말고 넌 학교 가려면 일찍 자던가 알아서 해."
그렇게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녀의 관계나 결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태림은 뭔가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다정한 말이나 행동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가 다정하게 대했다면 태림은 분명 소리를 쳤거나 방을 뛰쳐나가거나 그랬을 거다.
하지만 첫날밤을 같은 방에서도 보내지 않고 소파에서 자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뭘 원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 결혼을 취소 할 수 있으면 하고 싶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준에게 느껴지는 뭔가 이상하고 태림의 나이 또래의 남자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으로 밤을 지셀 수는 없었다. 곧 시험이 시작될 것이고, 시어머니 말씀대로 상위권은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내일을 준비해야 했기에 태림은 잠을 청했다.
서류를 보기 위해 서재로 왔지만 태림의 작고-분명 어머니의 기준으로 보면 태림은 키는 결코 작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길이다- 여린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걸 포기하고 그의 몸에 익숙해진 가죽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김진만 사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직 졸업도 하지 않고 아직 여자라기 보다 소녀인-키는 컸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뭔가에 억눌려 있는 듯 처량해 보였다.- 딸을 시집보낼 생각을 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거의 도둑 결혼을 하면서 까지 보내야 했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지만, 그의 지금까지의 행실을 보면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누구든지 손에 넣으려고 했고, 대부분의 여자들도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의 생김새는 비슷했다. 혜란 처럼 서구적으로 생긴 여자들을 좋아했는데, 혹시라도 그런 연예인이 있으면 꼭 한번쯤은 술자리 같은 곳으로 불러내어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에게 많은 돈을 주거나 마음에 들면 얼마동안 더 지내고 난 뒤에 가게 같은 걸 하나 차릴 만한 돈을 쥐어 주고 그의 인생에서 내보내고는 했다.
완전히 난잡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세준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런데 태림이 그의 인생으로 들어옴으로써 이제 그 일들이 세준과 상관 있는 일이 될까봐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피곤했다. 아무래도 그의 말도 되지 않는 결혼이 그의 신경을 좀먹고 있었는지 평상시 보다 더 피곤했다.
"가서 잠이나 자야겠군."
그 고등학생이 누워 있는 방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가서 잘 곳도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신부였지만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세준은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까치발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뭐하는 짓인 줄 모르겠군."
창문에서 달빛이 들어와 태림이 자고 있는 소파 위를 비추고 있었다. 달빛에 비춘 태림을 보자 그래도 소녀 같던 그녀가 조금은 여자다워 보였다.
그런데 자면서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두 손으로 이불을 꼭 쥔 채로 턱 아래에 손을 고이고 잠들어 있었다. 그가 자고 있는 자신을 덮치기라도 할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가지라고 부탁해도 싫어."
세준은 평상시처럼 옷을 다 벗고 침대에 들었다. 저 쪼그만 여자아이 때문에 그의 습관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