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사랑의 그늘>> 레이는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학교가는 것 싫어하거나 지루해하지 않았다. 한달이라는 방학기간 동안 지나는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꼈다. 레이와 매일 같이 보내던 하루하루가 익숙해지 모양이었다. 아이가 없는 시간이 되자, 허전함과 무료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개학 후, 며칠 동안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 마당으로 나갔다. 조금있으면 마당에 심어져있는 나무들이 가을색깔로 변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햇살이 뜨겁기는 했지만 막상 '가을'이라는 단어를 떠오르자, 내심 마음이 설레였다. 그러고보면 그녀는 올 여름기간을 이곳에서 거의 보낸 것이다. 6월달부터 있었으니... 벌써 2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2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특별한 남자를 만났다. 사토 유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와 열정적으로 보낸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와 나누었던 키스와 침대에서의 관계까지. 그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주었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가 아니라 사토 유키에게 순결을 준 것은 그녀로서는 기쁨이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어. 시간이 그렇게...' 부러져있는 가는 가지를 툭 꺾던 그녀의 손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 한달 동안 그녀는 생리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날짜가 지났잖아? 오늘이 며칠이지?' 그녀는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작은 달력을 집어들었다. 날짜가 2주가 지나버렸다. 예전에 가끔씩 스트레스 받는 일로 날짜가 불안정한 경우도 있었고 아예 한달을 건너뛰기도 했었다. 다른 때라면 '뭐, 그러려니...' 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왠지 가볍게 떠넘기기에는 불안했다. 벌써 그와 관계를 두 번이나 가지질 않았는가. "괜찮을 거야. 조금 늦거나 한달 거르는 것 뿐이라고." 그녀는 달력을 내려놓고 방문으로 나서며 속으로 자신있게 주문을 외웠다. 레이의 방학이 끝나기 전, 바닷가에 있는 호텔에서 그들은 말 그대로 잠을 잤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는 그것이 서운했다. 하지만 가슴을 다쳐서 붕대를 감고있는 남자한테 다른 생각을 품고있는 것 자체가 사악하다고 생각했다. 벌써 한 남자에게 섹스를 생각하고 요구하게 될 정도로 자신이 변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유키는 그녀를 껴안고 밤새 지켜주었다. 가슴에 난 상처때문인지 아니면 그녀를 위험에 빠트린 죄책감때문인지 그는 그녀를 건들지 않았다. 방학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그녀에게 더이상의 접촉을 하지 않았다. 키스도, 턱을 만지는 것도, 아랫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피하는 것만 같았다. 가슴의 상처도 그녀가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겠다고 했지만 유키는 거절했다. 지나는 혹시나 예전의 사토 유키로 돌아가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조바심이 생겼다. 거실로 내려간 그녀는 약상자를 꺼내들고 2층 유키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혼자서 어떻게 상처를 치료하는지 걱정되었다. 칼에 베인 곳은 깊이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소독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염증이 생겨 곪을 수도 있어 빨리 아물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오?" 그의 목소리는 특별히 화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상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손잡이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이 아닌 서재로 곧장 향하려던 그녀의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유키의 모습이었다. 그는 막 붕대를 풀고있었다. 그녀가 나타난 것을 보고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못 올 데를 왔어요?" 그녀는 약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그녀의 가슴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키스하기 쉬운 가까운 거리였고 그녀의 향기를 충분히 맡을 수 있는 거리였다. 유키의 시선이 그녀의 유혹적인 시선을 피했다. 유키는 그녀가 손을 뻗기도 전에 다시 붕대를 원래대로 감기 시작했다. "제가 할게요." "..." "소독 안 할 거에요?" "됐소. 내가 나중에 하지." 지나는 화가 났다. 그는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했고 도움마저도 거절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 땀인지 젖어 있었다. 세수하고 나온 얼굴은 아니었다. 분명히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저건 뭐죠?" 테이블 위에 유리잔을 발견한 지나는 그것을 집어들어 냄새를 맡았다. "술이군요?" "평소에 한 잔씩 마시는데 새삼스럽게 뭘 그러지?" "유키씨. 지금 당신은 아프잖아요. 그런데 술을 마시다니..." "또 시작이로군." 유키는 그녀의 잔소리가 듣기싫어 투덜거렸다. 김 지나는 그의 앞에 다시 돌아와 앉고는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당연히 유키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표정에 겁먹지 않았다. 감았던 붕대를 다시 풀었다. "병원가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던가요?" "뭐?" "잠도 못 잘정도로 그렇게 아팠으면... 절 부르지 그러셨어요? 도대체... 며칠동안 이렇게... 이렇게 있었던 거죠?" 붕대를 완전히 풀자, 아직 아물지도 못한 상처가 훤히 보였다. 소독을 제대로 안 한 건지... 일부분이 곪아있기도 했다. 그의 상처를 보자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의 상처만큼이나 자신의 심장 쪽에 통증이 전해오자, 입술을 질끈 물고는 소독약을 집었다. "세상에... 왜, 왜 이렇게 미련하세요? 얼마나 아팠을까..." 적어도 상처의 길이는 10센티가 넘어보였다. 대각선으로 그어진 상처 외에도 과거에 생긴 상처들은 그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보였다. '당신 몸에 또 하나의 기억이 생겨버렸어요. 이 상처 하나는 저 때문이죠.' 그의 몸에 그녀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표시였다. 그의 마음 속에 자신의 진실된 마음이 아닌 안 좋은 기억 하나를 준 것 같아 가슴이 메어왔다. 소독하는 동안 통증이 심한지 유키의 인상이 심하게 일그러졌고 그의 숨소리가 탁했다. 그러나 아픈 상처와는 다르게 그의 눈길은 그 고통을 배신하듯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과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 그리고 만지기만하면 비명을 지를 것만 같은 볼록한 젖가슴 위에 머물러 있었다. 지나는 그의 뜨거운 시선을 모른 채 소독 후, 임시방편으로 집에 있는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있다가 저랑 병원에 가요." "됐소. 며칠 있으면 나을 거요." "주사맞는 게 그렇게 겁나요? 애도 아니고..." 유키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꽂혔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눈에 들어와 더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며칠 동안 그는 괜히 짜증이 났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그 감정이 화로 바뀌었다. 그녀에게 험한 소리를 할까 봐 그녀와의 자리를 피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침과 저녁 식사때는 레이가 함께하기 때문에 두 사람만의 대화나 시선은 어떻게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은 쉽지 않았다. 아니 괴로웠다. 마주편에 앉아서 식사하고 있는 지나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바쁜 일 없으면 병원 가요. 잘 아시는 병원이라도 있나요? 예약을 해야되면 그렇게 하고요." "그럴 필요..." "어차피 장보러 가야하니까 점심 전에 갔다오죠. 너무 늦으면 레이 혼자 집에 있게 되요." 그녀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깨끗한 붕대를 새로 감아주고는 마지막으로 반창고를 붙여 고정시켰다. 유키는 그녀의 손놀림은 제법 노련했다. 소독을 하거나 약을 바르고 붕대까지 감는 솜씨는 자주 해본 것 같았다. "다 됐어요." 그녀가 상처 옆을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키는 통증을 느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하나만 묻겠소." 사토 유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그의 상체가 그녀 눈 앞에 다가와 멈췄다.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여기 그만둘 생각 없소?" "???" 지나는 놀란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몇 분이 흘러서야 지나는 그의 질문을 기억해냈다. 갑자기 그가 그만 두 생각이 없냐고 묻다니... 왜? 그녀는 마음을 냉정하게 가드듬었다. "그러길... 바라세요?" "..." 유키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과는 다르게 입 속에서는 다른 말이 뭉쳐지고 있었다. 그녀가 계속 여기 있으면 그녀는 상처받을 것이다. 그리고 레이와의 감정도 더 견디기 힘들어질 것이다. 물론 아들녀석도 뜻밖의 이별을 견딜 수 없으리라. 그러나 시간이 더 흘렀을 때보다는 나을 것이다. "네?" 그의 침묵에 지나는 참을 수 없었다. 혹시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 튀어나올까 봐 떨렸다. "그렇소. 그러길 바라오." 그의 대답에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금새 차오르더니 이내 뺨으로 흘러내렸다. 참을 겨를도 없이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간신히 목구멍을 막고있던 덩어리를 삼킨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왜요?" "당신에게 상처주기 싫소." "전 상처받은 적 없어요." "아니. 당신은..." "아뇨! 유키씨는 저한테 상처를 준 적이 없어요. 만약 상처를 받는다해도... 괜찮아요." "...??" 지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그를 쳐다봤다. "내가 저번에 말했을 텐데? 당신은 문제거리를 만드는 여자라고." "미안해요. 하지만 전 괜찮아요." "당신이 여기 있으면 난 참을 수 없소! 언제 어느 때든 당신한테 키스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언제든 당신을 원하게 될 거요! 그래도 괜찮다는 거요?" "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침대든 거실바닥이든... 욕조든...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원하게 될 텐데도?" "네..." "흥! 미안하지만 난 당신과 결혼할 마음 없소! 죽어도! 한번 결혼이면 족한 사람이니까! 충분히 그 고통 겪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당신이 여기 계속 있다면 난 언제까지나 당신의 육체를 탐하고 싶어져. 그 정도로 당신은 위험한 여자라는 거요. 당신은 내 본능을 자꾸 건들거든. 난 당신의 육체를 원하지 마음을 원하지 않소. 그리고 당신을 책임지는 일따윈 없소." 유키는 차츰 그녀와의 간격을 좁혔다. "그래도 떠나질 않겠다는 거요?" "네. 전 괜찮아요. 정말요..." "하! 당신 미쳤군. 결혼하지도 않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내가 요구할 때마다 들어주겠단 건가?" 그가 잔인하게 입술을 비틀며 비아냥거렸다. 그의 입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결혼하지도 않고 나와 지내는 모습... 과연 레이한테 좋은 모습일까?" "떠나고 싶을 땐 제가 정해요. 그 때가 오면 말씀드릴게요. 그때까지 여기 있겠어요." "그 날이 언제요?" "..." 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 숙인 정인의 턱을 살며시 손가락으로 받쳐들었다. "레이에게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필요해요. 레이를 위해서 재혼 생각은 안 해보세요?" 갑자기 유키는 턱을 받쳐든 손을 냉큼 치워버렸다. 그녀는 그와의 결혼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흠... 말했을 텐데. 나와의 결혼따윈 기대하지 말라고." "저 말고요. 당연히... 그런 생각 안 해요. 전, 단지 레이가 걱정됐을 뿐이에요." 지나는 몸을 틀어 약상자를 들고 도망치듯 방에서 나갔다. 유키는 그대로 서서 조금 전 그녀의 말을 되새겨봤다. 레이를 위해서 재혼을 생각 안 하느냐고? '세상의 여자들은 요물이란 것도 모르고 던진 질문이겠지.'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지금 그는 독한 양주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그가 꺼낸 말에 무조건 좋다, 괜찮다라고 대답했던 그녀가 화가 치밀어오를 정도로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레이는 소파에서 잠들어 버렸다. 작은 아이라면 그녀가 옮길 수도 있었지만 레이는 그녀가 감당하기에 컸다. 지나는 서재에 있는 유키를 찾았다. 그리고 거실에 자고있는 아이를 침실로 옮겨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의 상처가 염려가 되었지만. "알았소." 유키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지나치려다 잠깐 멈추었다. "당신은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육체만의 교감을. 당신은 그러기에 너무 순수하거든." "...??" 그는 앞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아직까지 그녀가 이곳을 떠나기를 원했다. 그녀에게 떠날 기회를 한번 더 주는 것이다. 아들을 안아들고 레이의 침실로 갔다. 뒤에 내려온 지나가 먼저 방에 도착해 이불을 제꼈다. 보리가 방에서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조금 열어두고 그들은 방에서 나왔다. 지나는 자기 전에 거실을 치워야 했다. 아까 레이가 가지고 놀았던 게임기와 장난감 등을 치워야 했다. 유키는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고 없었다. "넌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한 거니? 차라리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그랬니? 그러면 속이라도 후련할 거 아냐? 김 지나... 너 정말 바보구나?" 그녀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자신의 방으로 갔다. 어두운 방의 불을 켜려다 그만 두고 침대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곳에 유키가 앉아있었다. 너무나도 놀란 그녀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더듬대며 물었다. "지, 지금 여기서 뭐하시는... 거죠?" "그만 둬요." "무슨..." "그만 떠나라고 했소. 더이상 가정부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지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픈 가슴을 달랬다. 그는 자신과의 육체적인 접촉을 피하려고 나가라고 말했다. 위험한 장난은 하고싶지 않은 것이다. "당신을 변화시키고 싶었어요. 당신이 좋은 아버지가 되길, 좋은 남자가 되길 바랬어요." "그만 둬, 그런 소리." "내일부터 아래층에서 지낼게요. 예전에 아주머니가 쓰셨던 방을 쓸까해요." 지나는 벽으로 가서 방의 불을 켰다. 또다시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그의 눈이었다. 유키는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뻗어 불을 도로 꺼버렸다. 그녀의 맑고 짙은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갈수록 힘들어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을 찾았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음 좋겠소." "???" "만약 그런 감정이라면... 그런 감정으로 여기 있는 거라면 내가 거절이오." 지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조금이라도 입술을 벌렸다간 울음이 새어나갈 것이다. 두 손을 꼭 모으다 깍지를 꼈다. 방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는 나가지 않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긴장하는 것 같았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오. 좋은 부모, 좋은 남자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소." "노력하면 되요." "날 좋아하오?" "???" 그녀는 '네'라고 말할 뻔 했다. 혀 끝에서 맴돌고있는 그 한마디를 못 해 애가 탈 지경이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의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잠시 그들 사이에 떠도는 침묵 속에 섞였다. "아뇨. 유키씨,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 "좋아한 적... 없어요." 사토 유키는 그녀를 노려봤다. 왜... 어쩌자고 그녀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는지, 자신의 혀를 씹어 삼키고만 싶었다. "그래. 당신이 그렇듯이 난 그런 남자요." "사랑해요." 유키의 몸이 돌로 변해버렸다.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 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의 겁도 없는 고백은 또다시 튀어나왔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렇게 충격적일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자신의 입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가? 다른 남자에게 고백해야할 것을 번지를 잘못 찾은 것이리라. 그의 당황스럽고 화난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녀의 말은 그의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일어났을 때 당신이 없길 바라겠소." 그가 떠난 자리는 매우 추웠다. 갑자기 지나는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차가운 공기를 접했다. 단지 방문이 열렸다 닫혔을 뿐인데도 복도의 공기가 이다지도 차갑게 느껴지다니... 지그시 깨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나온 것은 한숨이 섞인 흐느낌이었다. 그에게 고백만 하면, 자신의 감정을 밝히기만 하면 마음이 후련해질 거라고 여겼다. 마음만은 편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지?' 그녀의 고백을 들은 그의 반응이 놀랍도록 차갑고 냉혈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방바닥에 그녀의 몸이 힘없이 떨어졌다. 끝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를 향한 그녀의 뜨거운 심장은 어느새 움직임을 멈추었다. 방으로 돌아온 유키는 너무나도 화가 나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던졌다. 술잔과 책이었다. 날아간 책은 문에 부딪혔고 술잔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파편을 날렸다. 그는 그것들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술잔을 꺼내 양주를 가득 따랐다. 한번에 들이키고 다시 연이어 술을 가득 채웠다. 두 잔째도 모두 마셨다. 목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는 석 잔째 술을 따르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 말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고 메아리쳐댔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그 말이 울려댔다. "날 사랑한다고? 하! 날 사랑한다? 이런 나를? 크크크큭..." 남은 술까지 모조리 비워버린 유키는 문으로 향했다. 깨진 유리조각이 슬리퍼 아래로 밟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간 곳은 김 지나의 방문 앞이었다.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곧 후회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손을 문에 댄 채 머리를 갖다댔다. 그녀에게서 들은 뜻밖의 고백에 그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충격적이다 못 해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이유는 자신도 알지 못 했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는다면 놀랍기도 하겠지만 기뻐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괴로울 정도로 그 울음소리가 심장을 파고들어와도 그는 그녀를 당장 원했다. "김 지나." 그의 소리에 방에서 들리던 울음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찢어질 듯한 그녀의 비명이 들렸다. "저리 가요!"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이 잠겨져 있었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저리 가요! 가라구요!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러니까 제발 가세요!" 순간 가슴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그는 참을 수 있었다. 아마 술에 절여서 잔다면 내일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잘 수 있을 것이다. 징징짜대는 여자를 상대하는 것보단 그게 더 나을 것이다. 문에 바짝 기대어 선 채 그가 속삭였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숨이 막힐만큼 당신을 원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당신이 여기 있는 건 싫소!"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당신이 이곳에 더 있다간 난 폭발하고 말 거요! 하루라도 당신을 가지지 못 하면 안 될 정도로 당신을 원한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당신은 그러기에 너무 순진하지.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그래서 상처주기 싫다는 거요. 알겠소? 그러니까... 제발..." 그의 상체가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먼길을 달려온 것처럼 맥박이 마구 뛰었고 숨소리까지 거칠었다. 한참동안 그들은 조용했다. 유키는 문에서 물러나 방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시간은 한 달이란 시간을 더 집어삼켰다. 어느새 10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키는 그날 이후로 지나에게 싸늘하게 대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아래층의 가정부의 방에서 지냈다. 유키는 그녀가 떠나지 않은 것도 기분 나빴지만 아래층에서 지내는 것이 더 화났다. 그들은 레이가 있는 자리에서만 예전처럼 대화를 했지만 아이가 없는 곳은 금새 그들 사이로 두꺼운 벽을 세웠다. 그 벽을 만든 사람은 사토 유키였다. 지나는 그의 모진 태도에 매일마다 울며 잠이 들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너, 살 빠진 것 같다?" 동인과의 모처럼 만나는 자리였다. 재영도 불렀지만 통화만 할 뿐 나올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 살이 좀 찐 것 같아서... 다이어트 좀 했더니..." "뭐? 네가 살이 쩌? 농담하네." "정말이야."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데 얼굴이 그 모양이야?" 동인의 눈이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나는 서둘러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며칠 전에... 조금 아팠어. 장이 좀 안 좋았나봐. 설사 좀 하고그러더니... 살이 쏘옥 빠졌지 뭐. 이, 이젠 괜찮아. 다 나았어." 그녀는 습관적으로 또다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을 서 동인은 눈치챘다.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캐묻지 않았다. 숨기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몸 잘 챙겨. 시집가려면 몸관리 잘 해야지. 그래야 나중에 애기도 낳지." "그, 그렇지?" "먹고싶다고 사달라더니 더 안 먹어?" 동인은 그녀의 식사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지나는 입맛이 전혀 없었다. 아마 한달 정도 계속 이런 기분이었다. 초상집도 아니고 그에게서 반경 3미터 안으로는 무거운 침묵 뿐이었다. 레이와 계속 식사를 하고 같이 소파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결코 그녀와는 함께하지 않았다. 처음보다 더 그녀와의 대화를 피했다. 그의 행동과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같은 눈빛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가?' 집에까지 태워다주겠다던 동인의 호의를 거절한 그녀는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눈앞에 보이는 빼곡한 건물들이 어지럽게 보였다. 색색의 간판들조차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뭐지? 그다지 더운 것 같지도 않는데... 좀 어지럽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상했다. 이 달에도 시작했어야할 생리가 없었다. 두 달째 건너뛰는 경우는 없었다. 한번도... 고개를 들자마자 눈앞에 들어온 간판이 병원이었다. '혹시... 모르잖아?' 병원 의사는 여자였다. 비쩍마른 몸매에 날카로운 첫인상의 여 의사였지만 그녀는 친절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두 달째 생리를 안 하셨다고요?" "네..." "마지막 생리 날짜가 언제였죠?" 지나는 두 달 전의 기억을 돌렸다. "임신이네요." "예? 뭐, 뭐라구요?" "임신 2개월째에요." 지나는 자신의 심장이 저 발끝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다. 임신이란다... 의사가. "저, 정말인가요?" "감기처럼 한기가 들고 어지럼증이 있는 건 자연스러운 임신증상입니다. 몸 관리 잘 하시고, 영양가 있는 음식 꼭 드세요. 임신 초에 무리한 활동은 금하셔야 됩니다. 혹시나 다른 반응이 있거나 문제가 있으시면..."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지나는 서둘러 그곳에서 나왔다. 병원의 특유의 약 냄새를 맡자 속이 울렁거렸다. 산만큼이나 불러온 다른 산모들의 배를 쳐다보는 순간 가슴이 먼저 아파왔다. '가슴이 아픈 건, 어디가 잘못된 거죠?' 길 거리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그녀의 충혈된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버스에 올라탄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신호를 기다리느라 버스가 잠깐 멈추었다. 인도길에 나란히 걸어가는 가족이 보였다. 그들에게는 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유모차에 있는 갓난아기가 있었다. '아기...' 눈물이 또다시 흘렀다. 그들을 보고있자니 명치끝이 아파왔다. '나에게도 아이가 있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 그의 아이...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해?' 덜컹거리며 버스가 출발했다. 그 가족들의 모습은 시야에서 멀어졌다. 버스는 종점까지 갔다. 그때까지 지나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내려야할 곳에서 한참이나 온 것이다. "어이, 이것 봐요, 아가씨." "???" 그녀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오 십대쯤으로 보이는 버스기사였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다 왔어요. 여기 종점인데?" "네? 아, 그래요?" 그녀는 재빨리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어 뒤따라 내리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여기가 어디죠?" "뭐요?" "정신을 파느라... 이 근처 택시가 잘 다니나요?" "주위를 살펴 봐요. 택시가 다니나. 한참 걸어가야 할 거에요. 저기 사거리에 가면 몇 대 다니긴 하지." 지나는 사거리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몇 시인지 보려고 했지만 이미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동인을 만날 때 핸드폰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듣기는 했었다. 해가 산쪽으로 기우는 것을 보면 5시가 넘은 것 같았다. 이런, 저녁차려줄 시간인데...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사거리에 도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10분이 지났지만 택시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20분이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택시를 기다리던 그녀를 누군가가 불렀다. "지나씨?!" 바로 뒤에 검은 차의 내려진 유리문 사이로 남자 얼굴이 보였다. 그는 일본에 있어야할 남자였다. "유, 유스케...?" 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to be continued *****************************************************************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 때 가장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 gils-jin *****************************************************************
***무례한 남자 유키*** <#22. 사랑의 그늘>
#22
<<사랑의 그늘>>
레이는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학교가는 것 싫어하거나 지루해하지 않았다.
한달이라는 방학기간 동안 지나는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꼈다. 레이와 매일 같이 보내던 하루하루가 익숙해지 모양이었다.
아이가 없는 시간이 되자, 허전함과 무료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개학 후, 며칠 동안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 마당으로 나갔다.
조금있으면 마당에 심어져있는 나무들이 가을색깔로 변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햇살이 뜨겁기는 했지만 막상 '가을'이라는 단어를 떠오르자, 내심 마음이 설레였다.
그러고보면 그녀는 올 여름기간을 이곳에서 거의 보낸 것이다. 6월달부터 있었으니... 벌써 2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2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특별한 남자를 만났다. 사토 유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와 열정적으로 보낸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와 나누었던 키스와 침대에서의 관계까지.
그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주었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가 아니라 사토 유키에게 순결을 준 것은 그녀로서는 기쁨이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어. 시간이 그렇게...'
부러져있는 가는 가지를 툭 꺾던 그녀의 손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 한달 동안 그녀는 생리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날짜가 지났잖아? 오늘이 며칠이지?'
그녀는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작은 달력을 집어들었다. 날짜가 2주가 지나버렸다.
예전에 가끔씩 스트레스 받는 일로 날짜가 불안정한 경우도 있었고 아예 한달을 건너뛰기도 했었다.
다른 때라면 '뭐, 그러려니...' 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왠지 가볍게 떠넘기기에는 불안했다. 벌써 그와 관계를 두 번이나 가지질 않았는가.
"괜찮을 거야. 조금 늦거나 한달 거르는 것 뿐이라고."
그녀는 달력을 내려놓고 방문으로 나서며 속으로 자신있게 주문을 외웠다.
레이의 방학이 끝나기 전, 바닷가에 있는 호텔에서 그들은 말 그대로 잠을 잤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는 그것이 서운했다. 하지만 가슴을 다쳐서 붕대를 감고있는 남자한테 다른 생각을 품고있는 것 자체가 사악하다고 생각했다.
벌써 한 남자에게 섹스를 생각하고 요구하게 될 정도로 자신이 변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유키는 그녀를 껴안고 밤새 지켜주었다. 가슴에 난 상처때문인지 아니면 그녀를 위험에 빠트린 죄책감때문인지 그는 그녀를 건들지 않았다.
방학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그녀에게 더이상의 접촉을 하지 않았다.
키스도, 턱을 만지는 것도, 아랫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피하는 것만 같았다.
가슴의 상처도 그녀가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겠다고 했지만 유키는 거절했다.
지나는 혹시나 예전의 사토 유키로 돌아가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조바심이 생겼다.
거실로 내려간 그녀는 약상자를 꺼내들고 2층 유키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혼자서 어떻게 상처를 치료하는지 걱정되었다.
칼에 베인 곳은 깊이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소독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염증이 생겨 곪을 수도 있어 빨리 아물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오?"
그의 목소리는 특별히 화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상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손잡이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이 아닌 서재로 곧장 향하려던 그녀의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유키의 모습이었다.
그는 막 붕대를 풀고있었다. 그녀가 나타난 것을 보고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못 올 데를 왔어요?"
그녀는 약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그녀의 가슴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키스하기 쉬운 가까운 거리였고 그녀의 향기를 충분히 맡을 수 있는 거리였다.
유키의 시선이 그녀의 유혹적인 시선을 피했다. 유키는 그녀가 손을 뻗기도 전에 다시 붕대를 원래대로 감기 시작했다.
"제가 할게요."
"..."
"소독 안 할 거에요?"
"됐소. 내가 나중에 하지."
지나는 화가 났다. 그는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했고 도움마저도 거절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 땀인지 젖어 있었다. 세수하고 나온 얼굴은 아니었다. 분명히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저건 뭐죠?"
테이블 위에 유리잔을 발견한 지나는 그것을 집어들어 냄새를 맡았다.
"술이군요?"
"평소에 한 잔씩 마시는데 새삼스럽게 뭘 그러지?"
"유키씨. 지금 당신은 아프잖아요. 그런데 술을 마시다니..."
"또 시작이로군."
유키는 그녀의 잔소리가 듣기싫어 투덜거렸다.
김 지나는 그의 앞에 다시 돌아와 앉고는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당연히 유키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표정에 겁먹지 않았다. 감았던 붕대를 다시 풀었다.
"병원가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던가요?"
"뭐?"
"잠도 못 잘정도로 그렇게 아팠으면... 절 부르지 그러셨어요? 도대체... 며칠동안 이렇게... 이렇게 있었던 거죠?"
붕대를 완전히 풀자, 아직 아물지도 못한 상처가 훤히 보였다. 소독을 제대로 안 한 건지... 일부분이 곪아있기도 했다.
그의 상처를 보자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의 상처만큼이나 자신의 심장 쪽에 통증이 전해오자, 입술을 질끈 물고는 소독약을 집었다.
"세상에... 왜, 왜 이렇게 미련하세요? 얼마나 아팠을까..."
적어도 상처의 길이는 10센티가 넘어보였다. 대각선으로 그어진 상처 외에도 과거에 생긴 상처들은 그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보였다.
'당신 몸에 또 하나의 기억이 생겨버렸어요. 이 상처 하나는 저 때문이죠.'
그의 몸에 그녀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표시였다.
그의 마음 속에 자신의 진실된 마음이 아닌 안 좋은 기억 하나를 준 것 같아 가슴이 메어왔다.
소독하는 동안 통증이 심한지 유키의 인상이 심하게 일그러졌고 그의 숨소리가 탁했다.
그러나 아픈 상처와는 다르게 그의 눈길은 그 고통을 배신하듯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과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 그리고 만지기만하면 비명을 지를 것만 같은 볼록한 젖가슴 위에 머물러 있었다.
지나는 그의 뜨거운 시선을 모른 채 소독 후, 임시방편으로 집에 있는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있다가 저랑 병원에 가요."
"됐소. 며칠 있으면 나을 거요."
"주사맞는 게 그렇게 겁나요? 애도 아니고..."
유키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꽂혔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눈에 들어와 더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며칠 동안 그는 괜히 짜증이 났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그 감정이 화로 바뀌었다.
그녀에게 험한 소리를 할까 봐 그녀와의 자리를 피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침과 저녁 식사때는 레이가 함께하기 때문에 두 사람만의 대화나 시선은 어떻게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은 쉽지 않았다. 아니 괴로웠다. 마주편에 앉아서 식사하고 있는 지나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바쁜 일 없으면 병원 가요. 잘 아시는 병원이라도 있나요? 예약을 해야되면 그렇게 하고요."
"그럴 필요..."
"어차피 장보러 가야하니까 점심 전에 갔다오죠. 너무 늦으면 레이 혼자 집에 있게 되요."
그녀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깨끗한 붕대를 새로 감아주고는 마지막으로 반창고를 붙여 고정시켰다.
유키는 그녀의 손놀림은 제법 노련했다. 소독을 하거나 약을 바르고 붕대까지 감는 솜씨는 자주 해본 것 같았다.
"다 됐어요."
그녀가 상처 옆을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키는 통증을 느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하나만 묻겠소."
사토 유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그의 상체가 그녀 눈 앞에 다가와 멈췄다.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여기 그만둘 생각 없소?"
"???"
지나는 놀란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몇 분이 흘러서야 지나는 그의 질문을 기억해냈다.
갑자기 그가 그만 두 생각이 없냐고 묻다니... 왜? 그녀는 마음을 냉정하게 가드듬었다.
"그러길... 바라세요?"
"..."
유키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과는 다르게 입 속에서는 다른 말이 뭉쳐지고 있었다.
그녀가 계속 여기 있으면 그녀는 상처받을 것이다. 그리고 레이와의 감정도 더 견디기 힘들어질 것이다.
물론 아들녀석도 뜻밖의 이별을 견딜 수 없으리라. 그러나 시간이 더 흘렀을 때보다는 나을 것이다.
"네?"
그의 침묵에 지나는 참을 수 없었다. 혹시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 튀어나올까 봐 떨렸다.
"그렇소. 그러길 바라오."
그의 대답에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금새 차오르더니 이내 뺨으로 흘러내렸다. 참을 겨를도 없이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간신히 목구멍을 막고있던 덩어리를 삼킨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왜요?"
"당신에게 상처주기 싫소."
"전 상처받은 적 없어요."
"아니. 당신은..."
"아뇨! 유키씨는 저한테 상처를 준 적이 없어요. 만약 상처를 받는다해도... 괜찮아요."
"...??"
지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그를 쳐다봤다.
"내가 저번에 말했을 텐데? 당신은 문제거리를 만드는 여자라고."
"미안해요. 하지만 전 괜찮아요."
"당신이 여기 있으면 난 참을 수 없소! 언제 어느 때든 당신한테 키스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언제든 당신을 원하게 될 거요! 그래도 괜찮다는 거요?"
"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침대든 거실바닥이든... 욕조든...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원하게 될 텐데도?"
"네..."
"흥! 미안하지만 난 당신과 결혼할 마음 없소! 죽어도! 한번 결혼이면 족한 사람이니까! 충분히 그 고통 겪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당신이 여기 계속 있다면 난 언제까지나 당신의 육체를 탐하고 싶어져. 그 정도로 당신은 위험한 여자라는 거요.
당신은 내 본능을 자꾸 건들거든. 난 당신의 육체를 원하지 마음을 원하지 않소. 그리고 당신을 책임지는 일따윈 없소."
유키는 차츰 그녀와의 간격을 좁혔다.
"그래도 떠나질 않겠다는 거요?"
"네. 전 괜찮아요. 정말요..."
"하! 당신 미쳤군. 결혼하지도 않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내가 요구할 때마다 들어주겠단 건가?"
그가 잔인하게 입술을 비틀며 비아냥거렸다. 그의 입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결혼하지도 않고 나와 지내는 모습... 과연 레이한테 좋은 모습일까?"
"떠나고 싶을 땐 제가 정해요. 그 때가 오면 말씀드릴게요. 그때까지 여기 있겠어요."
"그 날이 언제요?"
"..."
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 숙인 정인의 턱을 살며시 손가락으로 받쳐들었다.
"레이에게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필요해요. 레이를 위해서 재혼 생각은 안 해보세요?"
갑자기 유키는 턱을 받쳐든 손을 냉큼 치워버렸다. 그녀는 그와의 결혼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흠... 말했을 텐데. 나와의 결혼따윈 기대하지 말라고."
"저 말고요. 당연히... 그런 생각 안 해요. 전, 단지 레이가 걱정됐을 뿐이에요."
지나는 몸을 틀어 약상자를 들고 도망치듯 방에서 나갔다.
유키는 그대로 서서 조금 전 그녀의 말을 되새겨봤다. 레이를 위해서 재혼을 생각 안 하느냐고?
'세상의 여자들은 요물이란 것도 모르고 던진 질문이겠지.'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지금 그는 독한 양주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그가 꺼낸 말에 무조건 좋다, 괜찮다라고 대답했던 그녀가 화가 치밀어오를 정도로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레이는 소파에서 잠들어 버렸다.
작은 아이라면 그녀가 옮길 수도 있었지만 레이는 그녀가 감당하기에 컸다.
지나는 서재에 있는 유키를 찾았다. 그리고 거실에 자고있는 아이를 침실로 옮겨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의 상처가 염려가 되었지만.
"알았소."
유키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지나치려다 잠깐 멈추었다.
"당신은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육체만의 교감을. 당신은 그러기에 너무 순수하거든."
"...??"
그는 앞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아직까지 그녀가 이곳을 떠나기를 원했다. 그녀에게 떠날 기회를 한번 더 주는 것이다.
아들을 안아들고 레이의 침실로 갔다. 뒤에 내려온 지나가 먼저 방에 도착해 이불을 제꼈다.
보리가 방에서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조금 열어두고 그들은 방에서 나왔다.
지나는 자기 전에 거실을 치워야 했다. 아까 레이가 가지고 놀았던 게임기와 장난감 등을 치워야 했다.
유키는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고 없었다.
"넌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한 거니? 차라리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그랬니? 그러면 속이라도 후련할 거 아냐? 김 지나... 너 정말 바보구나?"
그녀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자신의 방으로 갔다.
어두운 방의 불을 켜려다 그만 두고 침대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곳에 유키가 앉아있었다.
너무나도 놀란 그녀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더듬대며 물었다.
"지, 지금 여기서 뭐하시는... 거죠?"
"그만 둬요."
"무슨..."
"그만 떠나라고 했소. 더이상 가정부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지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픈 가슴을 달랬다. 그는 자신과의 육체적인 접촉을 피하려고 나가라고 말했다. 위험한 장난은 하고싶지 않은 것이다.
"당신을 변화시키고 싶었어요. 당신이 좋은 아버지가 되길, 좋은 남자가 되길 바랬어요."
"그만 둬, 그런 소리."
"내일부터 아래층에서 지낼게요. 예전에 아주머니가 쓰셨던 방을 쓸까해요."
지나는 벽으로 가서 방의 불을 켰다. 또다시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그의 눈이었다.
유키는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뻗어 불을 도로 꺼버렸다. 그녀의 맑고 짙은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갈수록 힘들어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을 찾았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음 좋겠소."
"???"
"만약 그런 감정이라면... 그런 감정으로 여기 있는 거라면 내가 거절이오."
지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조금이라도 입술을 벌렸다간 울음이 새어나갈 것이다. 두 손을 꼭 모으다 깍지를 꼈다.
방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는 나가지 않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긴장하는 것 같았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오. 좋은 부모, 좋은 남자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소."
"노력하면 되요."
"날 좋아하오?"
"???"
그녀는 '네'라고 말할 뻔 했다. 혀 끝에서 맴돌고있는 그 한마디를 못 해 애가 탈 지경이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의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잠시 그들 사이에 떠도는 침묵 속에 섞였다.
"아뇨. 유키씨,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
"좋아한 적... 없어요."
사토 유키는 그녀를 노려봤다. 왜... 어쩌자고 그녀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는지, 자신의 혀를 씹어 삼키고만 싶었다.
"그래. 당신이 그렇듯이 난 그런 남자요."
"사랑해요."
유키의 몸이 돌로 변해버렸다.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 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의 겁도 없는 고백은 또다시 튀어나왔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렇게 충격적일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자신의 입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가?
다른 남자에게 고백해야할 것을 번지를 잘못 찾은 것이리라. 그의 당황스럽고 화난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녀의 말은 그의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일어났을 때 당신이 없길 바라겠소."
그가 떠난 자리는 매우 추웠다. 갑자기 지나는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차가운 공기를 접했다.
단지 방문이 열렸다 닫혔을 뿐인데도 복도의 공기가 이다지도 차갑게 느껴지다니...
지그시 깨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나온 것은 한숨이 섞인 흐느낌이었다.
그에게 고백만 하면, 자신의 감정을 밝히기만 하면 마음이 후련해질 거라고 여겼다. 마음만은 편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지?'
그녀의 고백을 들은 그의 반응이 놀랍도록 차갑고 냉혈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방바닥에 그녀의 몸이 힘없이 떨어졌다. 끝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를 향한 그녀의 뜨거운 심장은 어느새 움직임을 멈추었다.
방으로 돌아온 유키는 너무나도 화가 나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던졌다. 술잔과 책이었다.
날아간 책은 문에 부딪혔고 술잔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파편을 날렸다. 그는 그것들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술잔을 꺼내 양주를 가득 따랐다. 한번에 들이키고 다시 연이어 술을 가득 채웠다.
두 잔째도 모두 마셨다. 목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는 석 잔째 술을 따르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 말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고 메아리쳐댔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그 말이 울려댔다.
"날 사랑한다고? 하! 날 사랑한다? 이런 나를? 크크크큭..."
남은 술까지 모조리 비워버린 유키는 문으로 향했다. 깨진 유리조각이 슬리퍼 아래로 밟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간 곳은 김 지나의 방문 앞이었다.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곧 후회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손을 문에 댄 채 머리를 갖다댔다. 그녀에게서 들은 뜻밖의 고백에 그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충격적이다 못 해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이유는 자신도 알지 못 했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는다면 놀랍기도 하겠지만 기뻐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괴로울 정도로 그 울음소리가 심장을 파고들어와도 그는 그녀를 당장 원했다.
"김 지나."
그의 소리에 방에서 들리던 울음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찢어질 듯한 그녀의 비명이 들렸다.
"저리 가요!"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이 잠겨져 있었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저리 가요! 가라구요!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러니까 제발 가세요!"
순간 가슴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그는 참을 수 있었다.
아마 술에 절여서 잔다면 내일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잘 수 있을 것이다. 징징짜대는 여자를 상대하는 것보단 그게 더 나을 것이다.
문에 바짝 기대어 선 채 그가 속삭였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숨이 막힐만큼 당신을 원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당신이 여기 있는 건 싫소!"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당신이 이곳에 더 있다간 난 폭발하고 말 거요! 하루라도 당신을 가지지 못 하면 안 될 정도로 당신을 원한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당신은 그러기에 너무 순진하지.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그래서 상처주기 싫다는 거요. 알겠소? 그러니까... 제발..."
그의 상체가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먼길을 달려온 것처럼 맥박이 마구 뛰었고 숨소리까지 거칠었다.
한참동안 그들은 조용했다. 유키는 문에서 물러나 방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시간은 한 달이란 시간을 더 집어삼켰다.
어느새 10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키는 그날 이후로 지나에게 싸늘하게 대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아래층의 가정부의 방에서 지냈다.
유키는 그녀가 떠나지 않은 것도 기분 나빴지만 아래층에서 지내는 것이 더 화났다.
그들은 레이가 있는 자리에서만 예전처럼 대화를 했지만 아이가 없는 곳은 금새 그들 사이로 두꺼운 벽을 세웠다.
그 벽을 만든 사람은 사토 유키였다. 지나는 그의 모진 태도에 매일마다 울며 잠이 들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너, 살 빠진 것 같다?"
동인과의 모처럼 만나는 자리였다. 재영도 불렀지만 통화만 할 뿐 나올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 살이 좀 찐 것 같아서... 다이어트 좀 했더니..."
"뭐? 네가 살이 쩌? 농담하네."
"정말이야."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데 얼굴이 그 모양이야?"
동인의 눈이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나는 서둘러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며칠 전에... 조금 아팠어. 장이 좀 안 좋았나봐. 설사 좀 하고그러더니... 살이 쏘옥 빠졌지 뭐. 이, 이젠 괜찮아. 다 나았어."
그녀는 습관적으로 또다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을 서 동인은 눈치챘다.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캐묻지 않았다. 숨기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몸 잘 챙겨. 시집가려면 몸관리 잘 해야지. 그래야 나중에 애기도 낳지."
"그, 그렇지?"
"먹고싶다고 사달라더니 더 안 먹어?"
동인은 그녀의 식사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지나는 입맛이 전혀 없었다. 아마 한달 정도 계속 이런 기분이었다.
초상집도 아니고 그에게서 반경 3미터 안으로는 무거운 침묵 뿐이었다.
레이와 계속 식사를 하고 같이 소파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결코 그녀와는 함께하지 않았다.
처음보다 더 그녀와의 대화를 피했다. 그의 행동과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같은 눈빛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가?'
집에까지 태워다주겠다던 동인의 호의를 거절한 그녀는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눈앞에 보이는 빼곡한 건물들이 어지럽게 보였다. 색색의 간판들조차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뭐지? 그다지 더운 것 같지도 않는데... 좀 어지럽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상했다. 이 달에도 시작했어야할 생리가 없었다. 두 달째 건너뛰는 경우는 없었다. 한번도...
고개를 들자마자 눈앞에 들어온 간판이 병원이었다.
'혹시... 모르잖아?'
병원 의사는 여자였다. 비쩍마른 몸매에 날카로운 첫인상의 여 의사였지만 그녀는 친절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두 달째 생리를 안 하셨다고요?"
"네..."
"마지막 생리 날짜가 언제였죠?"
지나는 두 달 전의 기억을 돌렸다.
"임신이네요."
"예? 뭐, 뭐라구요?"
"임신 2개월째에요."
지나는 자신의 심장이 저 발끝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다. 임신이란다... 의사가.
"저, 정말인가요?"
"감기처럼 한기가 들고 어지럼증이 있는 건 자연스러운 임신증상입니다. 몸 관리 잘 하시고, 영양가 있는 음식 꼭 드세요.
임신 초에 무리한 활동은 금하셔야 됩니다. 혹시나 다른 반응이 있거나 문제가 있으시면..."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지나는 서둘러 그곳에서 나왔다.
병원의 특유의 약 냄새를 맡자 속이 울렁거렸다. 산만큼이나 불러온 다른 산모들의 배를 쳐다보는 순간 가슴이 먼저 아파왔다.
'가슴이 아픈 건, 어디가 잘못된 거죠?'
길 거리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그녀의 충혈된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버스에 올라탄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신호를 기다리느라 버스가 잠깐 멈추었다.
인도길에 나란히 걸어가는 가족이 보였다. 그들에게는 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유모차에 있는 갓난아기가 있었다.
'아기...'
눈물이 또다시 흘렀다. 그들을 보고있자니 명치끝이 아파왔다.
'나에게도 아이가 있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 그의 아이...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해?'
덜컹거리며 버스가 출발했다. 그 가족들의 모습은 시야에서 멀어졌다.
버스는 종점까지 갔다. 그때까지 지나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내려야할 곳에서 한참이나 온 것이다.
"어이, 이것 봐요, 아가씨."
"???"
그녀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오 십대쯤으로 보이는 버스기사였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다 왔어요. 여기 종점인데?"
"네? 아, 그래요?"
그녀는 재빨리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어 뒤따라 내리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여기가 어디죠?"
"뭐요?"
"정신을 파느라... 이 근처 택시가 잘 다니나요?"
"주위를 살펴 봐요. 택시가 다니나. 한참 걸어가야 할 거에요. 저기 사거리에 가면 몇 대 다니긴 하지."
지나는 사거리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몇 시인지 보려고 했지만 이미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동인을 만날 때 핸드폰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듣기는 했었다.
해가 산쪽으로 기우는 것을 보면 5시가 넘은 것 같았다. 이런, 저녁차려줄 시간인데...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사거리에 도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10분이 지났지만 택시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20분이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택시를 기다리던 그녀를 누군가가 불렀다.
"지나씨?!"
바로 뒤에 검은 차의 내려진 유리문 사이로 남자 얼굴이 보였다. 그는 일본에 있어야할 남자였다.
"유, 유스케...?"
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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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 때 가장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 gils-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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