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나 월세집도 불평하지 맙시다 !

철부지20대2005.02.18
조회441

자기가 처해있는 현실에 불평,불만만하면 달라지던가여 ?극복하려 노력해야지..

밑글 보구 철 좀 들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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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리백용(가명)>

생지옥 북한 정치범 수용소!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호소한다. 진정으로 북한의 인권개선을 위하여 투쟁하여주길 바란다. 그리고 북한 탈출자들이 중국이라는 타향에서 이리저리 쫓기면서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 탈북 결심과 좌절

내가 김정일을 호위할 때는 북한 내 다른 곳과 접촉을 하지 못햇기에 몰랐는데.. 호위부서 제대하고

나니,인민들 생활이 내가 배우고 듣던 것과는 많이 달랐던 탓에..대한민국 방송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KBS등..대한민국 방송은,북한 기차칸에는 창문도 없고 여행다니려면 여행증 검사를 한다'는 등..북조선의 현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다. 그 후부터 대한민국 방송이 내맘을 대한민국으로 향하게 하였다. 방송이 진실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 1일 중국 국경절을 계기로 나는 중국 화룡에서 태권도로 돈을 벌어서 연길 자치주에 들어와서 조선족과 어울리며,내가 KBS방송들은 소감을 말했다.
1994년 11월 26일 대한민국 대사관원이라고 하는 김xx가 날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그는 중국주재 북조선 대사관 국가안전대표였다.
그는 중국조선족(특무)의 신고받고 날 잡으러 연길에 비행기로 온 것이다.

그는 나를 유혹하기 위하여 연변대학 수학 강좌장 집에서 한국에 가려면 기자들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쓰라'고 하여...
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왕조독재"라고 비난하고 대한민국의 생활수준이 북한보다 높다는 소리,& 김정일이 어느 통로로 어느 시간에 다니며 사무실과 별장들의 위치와 집무실 구조, 지하도로, 행사일정, 수행원의 특징,수행원들의 방탕 생활등에 대한 설명 등을 써버렸다...
..생략~

12월 3일 저녁 6시 30분 대사관 차에 태워서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간다더니 들어가 보니,,김정일 사진이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북한대사관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지만..때는 늦어버렷다...

1994년 12월 4일,저녁에 북조선 순안비행장에 강제 압송되었다. 그때 나는 옴몸에 키브스를 하고 마취약과 모르핀 주사를 맞고 평양시 연못동 국가안전보위부 예심국(제3국)에서 1호감방 1번 수감자가 되었다. 이때 나를 담당한 예심원은 김순철.

● 예심 기간의 고통

국가보위부(3국) 예심국장은 록음기로 나의 말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어떻게 그렇게 비방과 권위훼손, 심지어 호위사업 비밀까지 루설하느냐?
우리 장군님께서 얼마나 신변안전에 위험을 당부하셨는가. 너는 우리 민족의 원쑤이며 처단 받아야 할 놈이다."라고 하면서 총살하라"고 호통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독감방에서 고문을 당했다. 보위원들이 발과 총으로 구타하는 바람에 다리가 부었고 고막이 터지고 이빨이 깨지여 나갔다. 그들은 새벽 4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재우지 않았고, 잠자는 시간에는 계호원들이 들어와서 나의 머리에 물을 부어놓고 몸을 얼구었다. 그런 속에서 매일과 같이 손과 발을 맞바꾸어 족쇄를 채우고는 문틈 구멍으로 내보내게 하고,몽둥이로 발등과 다리뼈를 두드리고 고통을 주었다.
또한 족쇄로 묶어 공중에다 달아매놓고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그런 짓을 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의 말은 록음이되었다. 어떤 때는 변기 구멍에 머리를 처박고 물을 틀어서 머리를 깨끗이 씻겨준다고 하면서 몇시간씩 구박과 구타를 하면서 고통을 주었다. 12월부터 5월까지 한 겨울에 내가 겪은 고통은 표현하기 어렵다..
구류장에 들어갈 때 89킬로이던 내 체중은 나올 때는 54킬로에 불과했다.

나는 국가보위법 의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 제15호 (요덕) 관리소 생활

요덕으로 갈 때는 평양시 연골동에서부터 소련제 차 신지르에 실려갔다. 관리소 입구에서 내가 살 대속리까지 가는 데 2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신입자들은 15일동안 훈련을 받고, 그 이후에 반, 소대에 배치된다. 우리 구역안에는 천명 가량의 수인이 있었다. 1반, 2반, 3반, 녀성반, 가족반, 공무반으로 되어 있다. 매 반별로 사방에 4미터 높이의 전기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
밤마다 경비대 깡패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초소에서 근무를 선다.
아침 5시까지 식사를 하고 작업장으로 진출한다. 작업은 아침 5시부터 저녁 어둡기 전까지 계속된다. 점심은 밥을 본인이 들고 와 먹는다. 작업 내용은 매일 다르다.
예;
하루 120지게의 나무를 산에서 밭까지 1000m 거리를 걸어서 옮겨 놔야 숙소로 올 수 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담당 보위지도원들 한테서 옷을 벗고 팬티만 입은 채 물푸리(재목이 단단하고 질긴 나무 이름) 나무가 끊어질 때까지 매를 맞는다.
이런 때는 남자는 그래도 낮다. 여자들은 젖가슴을 내놓고 팬티만 입고...끊어질 때까지 맞아야 한다. 또 본인이 눈 똥을 제손으로 옥수수 한 포기 한 포기에 흙을 파고 묻어야 한다.

우리 수인들은 보위원이나 경비대 군인, 사회사람이 오면 머리를 땅에 대고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한다. 만일,저들을 쳐다보았다 하면 땅에 박은 머리와 허리를 총,아니면 발로 또는 돌맹이로 마구 때리며,

때로는 사람의 뇌수가 땅에 흘러나와 죽는 일도 빈번히 벌어진다.

실례로 한승철의 경우가 있다. 그는 회령시 오산동에 살다가 월남하려다 회령땅에서 잡혀 왔다. 그가 이곳 생활 4년 만에,,주머니에서 소금이 나왔다하여 구역 끝에서부터 구역 끝까지 소련제 차 우와즈 련결차 꼬리에 발목을 쇠줄로 매여 4km을 수인들을 길 량쪽에 세우고 초소 앞에서 끌고 다녔다. 그 결과 허리 가죽과 머리 가죽이 다 벗겨져서 죽었는데, 시체를 교수대에 묶어 놓고 매 사람이 피를 만지게 하고 도주기도분자는 이렇게 죽인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 산 사람을 생매장한 경우도 있다.

반정부 음모와 대한미국 탈출기도로 96년도에 무산에서 들어온 김승철(28세)은 밤에 보위지도원이 나오라고 하여 밖으로 나가자 머리에 갓모자를 씌웠다. 집밖에서 경비대가 지키는 가운데 수인 5명으로 하여금 구덩이를 파게 하고 또 조명을 켜게 하고 나오라고 하여 모두 나가보니 구덩이 앞에 그를 세워놓고 반혁명 분자들은 이렇게 죽인다고 망치로 머리 정수리를 쳐서 의식을 잃게 한 다음,, 쳐넣고 흙으로 매장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수인 한 사람이 제대로 삽질하지 않는다고 총을 이마에 쏘고 그 자리에 같이 매장하는 것이었다.

담당 보위지도원이 계급적 원쑤라고 하는 수감 여성을 성의 노예로 삼는 경우도 있다. 리창옥은 평양시 예술단 지휘자였다.

중국의 실태와 북조선의 차이를 말하고 김정일이 나쁘다는 소리를 했다고 해서 관리소로 끌려왔다고 한다.
보위원이 하루는 녀성들을 다 모이게 하고 "이 개간나, 바지를 벗어"라고 하고는..문을 닫고 그녀를 강간질하고 성욕을 채운 후에 나무 꼬쟁기로 녀자의 자궁을 찔러 놓고 나무로 하반신을 두드리며 한 주일만에 죽게 했다.

● 굶주린 창자를 안고 죽어가는 정치범들

수인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 능재(풀의 이름)나 찔장구(질경이), 다래나무순, 도라지, 뱀, 개구리, 쥐 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먹는다.쥐털과 뱀가죽까지 그대로 다 먹어치우는 끔찍한 그 모습을 더 이상 묘사할 수가 없다.

수인들은 관리원이 키우는 소가 싼 똥에서 옥수수 알을 주어먹고는 힘이 난다"고 좋아한다. 이들은 영양실조로 서서히 죽어간다. 초기에는 이빨과 상처자리, 머리통이 다 쫄고 사람의 키가 줄어 기형화된다. 얼마 후에는 얼굴과 온몸이 부어서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죽기 전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하늘 중천아 나를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간곡히 호소한다. 진정으로 북한의 인권개선을 위하여 투쟁하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