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이 이렇게 행복한 적은 그녀의 생에서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시험기간이여서 그런지 시어머니는 태림이에게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사실 태림과 말을 섞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태림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세준은 일이 많은 건지 태림이 보고 싶지 않아서 인지 저녁에 일찍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행이 첫날 아침 이후로 태림은 충격적인 장면을 본적이 없었다. 그녀보고 조심하라고 했던 세준이 항상 먼저 조심을 했고, 보게 되더라도 이불을 허리춤에 두른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야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대화는 얼굴을 보는 횟수보다 더 적었고, 그 대화의 내용도 그녀가 일방적으로 하는 아침인사나 등교 인사가 대부분이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응'이라는 정말 짧고도 정 없는 단어로 일관했기 때문에 부부간의 정이라는 화분을 일구고 싶어도 그런 싹 조차 키울 수가 없었다. "저기요?" "왜?" 세준이 욕실에서 나오자 마자 태림은 말을 꺼냈다. 그는 요즘 늦게 들어왔다. 분명 태림의 얼굴을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는 아침에도 차에서 서류나 밖을 내다볼 뿐 태림에게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고, 굳이 노력해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용하지 않으시는 시간에 서재 좀 사용했으면 해서요." "왜?" 저렇듯 짧게 대답하는 것도 기술이라고 한다면 태림의 남편은 수준 급일 것이다. "시험 기간이라 서요. 방에서 공부하려면 불을 켜야 하는데, 주무시기가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젖은 머리를 말리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 세준의 표정은 전혀 달갑지 않았지만 반대하진 않았다. 태림은 세준이 젖은 머리를 말리는 손질과 그의 움직임과 함께 같이 움직이는 처음 보는 근육을 보자 이상하게 떨렸고, 얼굴이 붉어지자 고개를 숙였다. "알아서 해. 대신 내 물건은 만지지 말고 사용하더라도 항상 제자리에 놓아둬." "네? 감사합니다." 태림은 머릿속에서 세준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 그의 말을 빨리 알아 들을 수 조차 없었다. 그 날부터 태림은 세준이 서재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평상시에는 전혀 쓸 일이 없는 화장대를 책상 삼아 공부를 하고 그가 잠을 자러 방에 올 때면 재 빨리 서재로 나갔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에 태림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는데, 시간은 벌써 새벽 한시를 달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시아버지였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잠이 오지 않아서 말이다." 그는 쟁반을 태림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간식." 태림은 그의 따뜻한 마음에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언제 아버지의 폭행이 시작될지 몰라 항상 조마조마 했었고, 여기서는 시어머니의 차가움과 세준의 냉대에 힘들었지만 시아버지의 관심이 태림을 버티게 해주었다. "태림아. 굳이 성적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잖니. 그러니 그냥 평상시에 하던 데로 하렴." 어깨에 올려진 시아버지의 따뜻한 손은 더욱더 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태림은 늦게 나마 시아버지에게라도 사랑을 받아 보지만 엄마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없다는 걸 생각하자 눈가에 눈물이 맴돌았지만 시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미소를 지어 올렸다. "네." "정 성적을 올리기 원한다면 과외 선생님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는데. 필요하니?" 태림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럼 몸 생각해가면서 공부하렴. 사실 세준이도 전교에서 10등 밖에 하지 않았으니, 너도 딸리는 성적은 아니야." 태림은 그가 나가자 쟁반에 올려져 있는 사과를 한쪽 집어 들었다. 이걸 누가 깎았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세준 처럼 키가 큰 시아버지가 그 투박한 손으로 과일을 이렇게 예쁘게 깎았을 장면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세준이 전교에서 10등을 했다고는 했지만, 그가 다니던 학교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수재들만 모이는 명문고였다. 만약에 그가 태림의 학교를 다녔다면 전교1등은 쉽게 지키고도 남았을 거라는 걸 태림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오늘 성적이 나오는 날이구나." "네." 시어머니는 항상 그런 무거운 주제를 아침에 식사를 할 때만 꺼내어 놓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질문의 수혜자는 항상 태림이었다. "세준이 일도 하지 못하게 서재를 차지하고 밤새 공부를 했으니, 성적이 잘 나오겠지." 시어머니의 말에 시아버지는 눈치를 주었지만, 시어머니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태림은 어제 빼고는 두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자신이 매본 점수는 평상시 보다 평점이 4점 정도 오른 것 같았지만, 같은 순위에 있는 아이들이 태림 처럼 성적이 올랐다면 등수에는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어서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잘 모르......." "밥 다 먹었으면 가자." 시어머니가 뭔가 말을 하려는데 세준은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어머. 세준아 밥 다 먹어야지." "별로 생각이 없어요. 다녀오겠습니다." 세준이 입맛이 없다는 덕에 태림은 그 껄끄러운 아침 식사시간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었다. "죄송해요." "뭐가?" 역시나 세준은 태림의 얼굴을 바라볼 시도는 하지 않았다. "서재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어서요." "별로 상관없어. 내가 필요했다면 비켜주지도 않았을 거야."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뭐 때문에 그녀를 위해서 그런 수고를 했겠는가? 태림은 교실에 도착해서도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집에서 있을 때는 이렇게 성적에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집가서 받는 처음 시집살이가 성적이라는 걸 알면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실 지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어차피 일등을 하지 못할 거라면 태림이 꼴등만 하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다는 투였고, 엄마는 태림이 정신적인 상처를 받지만 않는다면 그녀가 뭘 해도 받아들을 각오가 되어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성적으로 태림을 닦달하는 일은 없었다. 엄마와는 하루에 한번 전화통화를 하는데 아직까지는 목소리에 별다른 문제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엄마가 맞더라도 태림에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편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보니 아버지가 아직은 엄마를 괴롭힐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애들아! 방 붙었다." 방이란 성적표가 복도 게시판에 붙었다는 소리였다. 교장선생님의 명령으로 전교생의 성적이 학년별로 각 층에 붙이는 걸 아이들은 방이라고 불렀다. 이번엔 태림이도 아이들의 틈에 끼여 성적표를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보통은 아이들의 열기가 식으면 확인했지만 오늘은 떨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태림아! 너무 좋겠다. 너 21등이야." 태림은 이름을 확인하자 한시름 놓았다. 시어머니의 기대처럼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성적이 조금이나마 올랐으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으히. 난 또 120등이야. 난 어떻게 이 숫자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를 않는 지 몰라. 평균이 올라도 이 등수, 내려도 이 등수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유정은 오늘도 성적을 보고 짜증을 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야 오늘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래?" 태림은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다가 오늘은 일찍 끝내는 날이니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이현인가 하는 애, 생각보다 똑똑하다." 태림과 유정은 옆에서 말하는 소리에 다른 반 아이의 눈길을 따라갔다. 이현은 전학 온 뒤로도 학교에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밖에 나오지를 않았는데, 성적은 50등 안에 들어있었다. 태림의 학교는 한 학년 당 학생이 400명이 넘은 일명 콩나물 시루 학교였기 때문에 이현의 성적은 아이들의 이슈거리가 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과외 받나봐.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바쁜 애가 저런 성적이 나올 리 가 있니." 아이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지만 태림은 별로 관심 있게 듣지 않았다. 그 아이가 어떻게 공부를 했던 말던 자신의 일을 가지고서도 학교 공부에 소홀하지 않는 이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내 짝궁은 전학안가나?" "왜?" 태림은 갑작스런 유정의 말에 고개를 돌려 유정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네 옆자리 가서 앉으려고, 이현이가 전학을 왔지만 넌 항상 혼자 앉는 시간이 많잖아." 태림은 유정이의 말이 고마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사실 친해진 것은 고등학교 들어와서 줄 곳 같은 반이 되고 나서 부터였다. "그래도 성적처럼 변하지 않는 이 키 때문에 안되겠지." 태림의 반은 키 순번대로 자리를 정했기 때문에 유정과 태림이 만날 일은 없었다. 유정은 태림의 어깨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키를 가지고 있었고 반면에 아버지의 훤칠한 체격을 닮은 태림은 반에서 가장 키가 컸다. "그래도 넌 내 제일 친한 친구잖아." "그건 그래. 내가 키가 작은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네가 내 친구라서 나도 좋아." 그녀들은 점점 몰려드는 친구들의 틈에서 빠져 나왔다. "야 3학년 4반은 가정 대신 교련으로 바뀌었단다." 이 말에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태림이 4반이었고, 같은 반 아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제히 교실로 뛰어들어갔고, 얼마 남지 않는 시간 안에 운동장으로 나가기 위해 용을 써야만했다. 교련 선생님은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걸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운동장 청소를 시키거나, 잔디밭에 풀 뽑기를 시켜서 아이들은 절대 늦으려 고를 하지 않았다. "왜 하필 교련이냐고. 차라리 내가 수학을 듣고 만다." 하지만 그런 투정은 잠깐의 웃음만 줄뿐 아무도 옷을 갈아입는 걸 멈추지를 않았다.
"정말 두꺼비한테 수업 안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냐?" 한 친구의 말에 정렬을 서 있다가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들이 웃음이 나온단 말이지. 너희들은 무장공비가 쳐들어와도 그렇게 웃을 거냐? 다들 운동장 다섯 바퀴 돈다. 실시." 여 학생들의 야유에 찬 불만에도 두꺼비 선생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왜 웃었는지도 모르는 다른 아이들까지 다 뛰게 했다. "우리가 무슨 군인도 아닌데 왜 매일 교련시간마다 뛰어야 하는 거냐! 정말 화나. 두꺼비 차라리 체육선생님을 하던가. 두꺼비 지가 무슨 개구리도 아니면서 멀리까지 뛰려고 야단이냐고." 별로 말도 없고 친구를 사귀는데도 관심이 없는 전학생인 이현이의 말에 옆에 서서 뛰고 있던 태림은 웃음을 지었다. "맞아." 태림이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이현이의 표정이 잠시 이상해지더니 태림이를 마주보고 웃어주었다. 이현은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고 요즘 하이틴 스타였고, 그걸 부러워하면서도 시기하는 여학생들 때문에 친구가 없었다. "너 김태림이지." "응." 그 간단한 대답에 그 날부터 그녀들은 친구가 되었다. 집에 돌아가자 시어머니는 태림이 보다는 그녀의 성적표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들고는 단 한번에 쑥 훑어보았다. "조금 올랐구나. 하지만 어디 이래서 사람들에게 내놓기나 하겠니." 확실히 못마땅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슬리는 말투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쯧쯧. 이 정도 올리려고 새벽까지 일하는 우리 세준이를 귀찮게 했니. 다음부터는 무슨. 지금 고3인데 노력한다고 해서 오리가 백조가 될 수나 있겠니. 됐으니까 이 성적이나 떨어지지 않고 잘 유지나 해." "네." 시어머니는 태림을 보고만 있어도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더니 성적표를 던지듯이 태림의 손에 주고서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림은 이 답답한 새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현이는 스케줄 때문에 학교에 자주 나오지는 못했지만 학교에 나올 때마다 태림이와 붙어 다녔고, 그녀들은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을 걸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이현과의 시간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태림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작용을 많이 했다. 하지만 당연히 태림은 이현이에게 결혼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태림아!" 태림은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는 시험성적을 봐서는 머리가 좋은 것 같은데 평상시에 보면 책을 보려고 하지를 않았었다. "왜." "나 너희 집에 놀러가도 돼." 태림은 이현의 말에 놀라 들고 있던 볼펜을 교실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너 그렇게 손가락에 힘이 없냐. 수업시간에도 보면 잘 떨어트리더라."
애련{네번째}
시험기간이 이렇게 행복한 적은 그녀의 생에서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시험기간이여서 그런지 시어머니는 태림이에게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사실 태림과 말을 섞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태림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세준은 일이 많은 건지 태림이 보고 싶지 않아서 인지 저녁에 일찍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행이 첫날 아침 이후로 태림은 충격적인 장면을 본적이 없었다. 그녀보고 조심하라고 했던 세준이 항상 먼저 조심을 했고, 보게 되더라도 이불을 허리춤에 두른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야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대화는 얼굴을 보는 횟수보다 더 적었고, 그 대화의 내용도 그녀가 일방적으로 하는 아침인사나 등교 인사가 대부분이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응'이라는 정말 짧고도 정 없는 단어로 일관했기 때문에 부부간의 정이라는 화분을 일구고 싶어도 그런 싹 조차 키울 수가 없었다.
"저기요?"
"왜?"
세준이 욕실에서 나오자 마자 태림은 말을 꺼냈다. 그는 요즘 늦게 들어왔다. 분명 태림의 얼굴을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는 아침에도 차에서 서류나 밖을 내다볼 뿐 태림에게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고, 굳이 노력해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용하지 않으시는 시간에 서재 좀 사용했으면 해서요."
"왜?"
저렇듯 짧게 대답하는 것도 기술이라고 한다면 태림의 남편은 수준 급일 것이다.
"시험 기간이라 서요. 방에서 공부하려면 불을 켜야 하는데, 주무시기가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젖은 머리를 말리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 세준의 표정은 전혀 달갑지 않았지만 반대하진 않았다. 태림은 세준이 젖은 머리를 말리는 손질과 그의 움직임과 함께 같이 움직이는 처음 보는 근육을 보자 이상하게 떨렸고, 얼굴이 붉어지자 고개를 숙였다.
"알아서 해. 대신 내 물건은 만지지 말고 사용하더라도 항상 제자리에 놓아둬."
"네? 감사합니다."
태림은 머릿속에서 세준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 그의 말을 빨리 알아 들을 수 조차 없었다.
그 날부터 태림은 세준이 서재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평상시에는 전혀 쓸 일이 없는 화장대를 책상 삼아 공부를 하고 그가 잠을 자러 방에 올 때면 재 빨리 서재로 나갔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에 태림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는데, 시간은 벌써 새벽 한시를 달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시아버지였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잠이 오지 않아서 말이다."
그는 쟁반을 태림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간식."
태림은 그의 따뜻한 마음에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언제 아버지의 폭행이 시작될지 몰라 항상 조마조마 했었고, 여기서는 시어머니의 차가움과 세준의 냉대에 힘들었지만 시아버지의 관심이 태림을 버티게 해주었다.
"태림아. 굳이 성적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잖니. 그러니 그냥 평상시에 하던 데로 하렴."
어깨에 올려진 시아버지의 따뜻한 손은 더욱더 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태림은 늦게 나마 시아버지에게라도 사랑을 받아 보지만 엄마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없다는 걸 생각하자 눈가에 눈물이 맴돌았지만 시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미소를 지어 올렸다.
"네."
"정 성적을 올리기 원한다면 과외 선생님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는데. 필요하니?"
태림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럼 몸 생각해가면서 공부하렴. 사실 세준이도 전교에서 10등 밖에 하지 않았으니, 너도 딸리는 성적은 아니야."
태림은 그가 나가자 쟁반에 올려져 있는 사과를 한쪽 집어 들었다. 이걸 누가 깎았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세준 처럼 키가 큰 시아버지가 그 투박한 손으로 과일을 이렇게 예쁘게 깎았을 장면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세준이 전교에서 10등을 했다고는 했지만, 그가 다니던 학교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수재들만 모이는 명문고였다. 만약에 그가 태림의 학교를 다녔다면 전교1등은 쉽게 지키고도 남았을 거라는 걸 태림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오늘 성적이 나오는 날이구나."
"네."
시어머니는 항상 그런 무거운 주제를 아침에 식사를 할 때만 꺼내어 놓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질문의 수혜자는 항상 태림이었다.
"세준이 일도 하지 못하게 서재를 차지하고 밤새 공부를 했으니, 성적이 잘 나오겠지."
시어머니의 말에 시아버지는 눈치를 주었지만, 시어머니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태림은 어제 빼고는 두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자신이 매본 점수는 평상시 보다 평점이 4점 정도 오른 것 같았지만, 같은 순위에 있는 아이들이 태림 처럼 성적이 올랐다면 등수에는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어서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잘 모르......."
"밥 다 먹었으면 가자."
시어머니가 뭔가 말을 하려는데 세준은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어머. 세준아 밥 다 먹어야지."
"별로 생각이 없어요. 다녀오겠습니다."
세준이 입맛이 없다는 덕에 태림은 그 껄끄러운 아침 식사시간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었다.
"죄송해요."
"뭐가?"
역시나 세준은 태림의 얼굴을 바라볼 시도는 하지 않았다.
"서재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어서요."
"별로 상관없어. 내가 필요했다면 비켜주지도 않았을 거야."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뭐 때문에 그녀를 위해서 그런 수고를 했겠는가?
태림은 교실에 도착해서도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집에서 있을 때는 이렇게 성적에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집가서 받는 처음 시집살이가 성적이라는 걸 알면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실 지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어차피 일등을 하지 못할 거라면 태림이 꼴등만 하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다는 투였고, 엄마는 태림이 정신적인 상처를 받지만 않는다면 그녀가 뭘 해도 받아들을 각오가 되어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성적으로 태림을 닦달하는 일은 없었다.
엄마와는 하루에 한번 전화통화를 하는데 아직까지는 목소리에 별다른 문제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엄마가 맞더라도 태림에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편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보니 아버지가 아직은 엄마를 괴롭힐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애들아! 방 붙었다."
방이란 성적표가 복도 게시판에 붙었다는 소리였다. 교장선생님의 명령으로 전교생의 성적이 학년별로 각 층에 붙이는 걸 아이들은 방이라고 불렀다.
이번엔 태림이도 아이들의 틈에 끼여 성적표를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보통은 아이들의 열기가 식으면 확인했지만 오늘은 떨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태림아! 너무 좋겠다. 너 21등이야."
태림은 이름을 확인하자 한시름 놓았다. 시어머니의 기대처럼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성적이 조금이나마 올랐으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으히. 난 또 120등이야. 난 어떻게 이 숫자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를 않는 지 몰라. 평균이 올라도 이 등수, 내려도 이 등수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유정은 오늘도 성적을 보고 짜증을 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야 오늘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래?"
태림은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다가 오늘은 일찍 끝내는 날이니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이현인가 하는 애, 생각보다 똑똑하다."
태림과 유정은 옆에서 말하는 소리에 다른 반 아이의 눈길을 따라갔다.
이현은 전학 온 뒤로도 학교에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밖에 나오지를 않았는데, 성적은 50등 안에 들어있었다. 태림의 학교는 한 학년 당 학생이 400명이 넘은 일명 콩나물 시루 학교였기 때문에 이현의 성적은 아이들의 이슈거리가 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과외 받나봐.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바쁜 애가 저런 성적이 나올 리 가 있니."
아이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지만 태림은 별로 관심 있게 듣지 않았다. 그 아이가 어떻게 공부를 했던 말던 자신의 일을 가지고서도 학교 공부에 소홀하지 않는 이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내 짝궁은 전학안가나?"
"왜?"
태림은 갑작스런 유정의 말에 고개를 돌려 유정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네 옆자리 가서 앉으려고, 이현이가 전학을 왔지만 넌 항상 혼자 앉는 시간이 많잖아."
태림은 유정이의 말이 고마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사실 친해진 것은 고등학교 들어와서 줄 곳 같은 반이 되고 나서 부터였다.
"그래도 성적처럼 변하지 않는 이 키 때문에 안되겠지."
태림의 반은 키 순번대로 자리를 정했기 때문에 유정과 태림이 만날 일은 없었다. 유정은 태림의 어깨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키를 가지고 있었고 반면에 아버지의 훤칠한 체격을 닮은 태림은 반에서 가장 키가 컸다.
"그래도 넌 내 제일 친한 친구잖아."
"그건 그래. 내가 키가 작은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네가 내 친구라서 나도 좋아."
그녀들은 점점 몰려드는 친구들의 틈에서 빠져 나왔다.
"야 3학년 4반은 가정 대신 교련으로 바뀌었단다."
이 말에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태림이 4반이었고, 같은 반 아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제히 교실로 뛰어들어갔고, 얼마 남지 않는 시간 안에 운동장으로 나가기 위해 용을 써야만했다.
교련 선생님은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걸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운동장 청소를 시키거나, 잔디밭에 풀 뽑기를 시켜서 아이들은 절대 늦으려 고를 하지 않았다.
"왜 하필 교련이냐고. 차라리 내가 수학을 듣고 만다."
하지만 그런 투정은 잠깐의 웃음만 줄뿐 아무도 옷을 갈아입는 걸 멈추지를 않았다.
"정말 두꺼비한테 수업 안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냐?"
한 친구의 말에 정렬을 서 있다가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들이 웃음이 나온단 말이지. 너희들은 무장공비가 쳐들어와도 그렇게 웃을 거냐? 다들 운동장 다섯 바퀴 돈다. 실시."
여 학생들의 야유에 찬 불만에도 두꺼비 선생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왜 웃었는지도 모르는 다른 아이들까지 다 뛰게 했다.
"우리가 무슨 군인도 아닌데 왜 매일 교련시간마다 뛰어야 하는 거냐! 정말 화나. 두꺼비 차라리 체육선생님을 하던가. 두꺼비 지가 무슨 개구리도 아니면서 멀리까지 뛰려고 야단이냐고."
별로 말도 없고 친구를 사귀는데도 관심이 없는 전학생인 이현이의 말에 옆에 서서 뛰고 있던 태림은 웃음을 지었다.
"맞아."
태림이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이현이의 표정이 잠시 이상해지더니 태림이를 마주보고 웃어주었다. 이현은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고 요즘 하이틴 스타였고, 그걸 부러워하면서도 시기하는 여학생들 때문에 친구가 없었다.
"너 김태림이지."
"응."
그 간단한 대답에 그 날부터 그녀들은 친구가 되었다.
집에 돌아가자 시어머니는 태림이 보다는 그녀의 성적표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들고는 단 한번에 쑥 훑어보았다.
"조금 올랐구나. 하지만 어디 이래서 사람들에게 내놓기나 하겠니."
확실히 못마땅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슬리는 말투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쯧쯧. 이 정도 올리려고 새벽까지 일하는 우리 세준이를 귀찮게 했니. 다음부터는 무슨. 지금 고3인데 노력한다고 해서 오리가 백조가 될 수나 있겠니. 됐으니까 이 성적이나 떨어지지 않고 잘 유지나 해."
"네."
시어머니는 태림을 보고만 있어도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더니 성적표를 던지듯이 태림의 손에 주고서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림은 이 답답한 새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현이는 스케줄 때문에 학교에 자주 나오지는 못했지만 학교에 나올 때마다 태림이와 붙어 다녔고, 그녀들은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을 걸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이현과의 시간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태림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작용을 많이 했다.
하지만 당연히 태림은 이현이에게 결혼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태림아!"
태림은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는 시험성적을 봐서는 머리가 좋은 것 같은데 평상시에 보면 책을 보려고 하지를 않았었다.
"왜."
"나 너희 집에 놀러가도 돼."
태림은 이현의 말에 놀라 들고 있던 볼펜을 교실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너 그렇게 손가락에 힘이 없냐. 수업시간에도 보면 잘 떨어트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