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키의 청혼>> 유키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극도로 힘들었다. 토끼같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는 선뜻 대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그녀가 충격받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의외로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어서인지 그에게 실망감이 찾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 걸까. 참을 수 없는 침묵에 그는 몸을 일으키려했다. 이때 그녀의 손이 날아와 그의 가슴을 건드렸다. "제가 잘 들은 건지 모르겠어요." "뭐?"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숨넘어갈 듯한 그녀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에게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나와 결혼하자고 했소."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그는 이곳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결혼에 대해서 여전히 비관했다. 하지만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의 육체를 공유해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 '결혼'이라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를 이대로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곁에 없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고 그녀가 다른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있다는 사실에 분노의 화신이 되어야했다. 그녀를 언제까지나 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은 '결혼'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오직 사토 유키의 것이 된다. 그에게는 여자 즉, 김 지나라는 여자가 필요했고 아들 레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했다.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은 김 지나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와의 관계는 한마디로 말해 환상적이고 완벽했다. 그녀와 있으면 매일매일이 지루하거나 예전처럼 삶이 어둡지가 않았다. 그녀 주변에 내리쬐는 햇살이 바로 그에게까지 레이에게까지 뻗어왔다. 이제 두 남자는 그녀에게서 나오는 밝은 햇살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충동적이긴해도 그녀에게 프로포즈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잘 한 짓이야. 유키는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당신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원하는 바가 아니오?" 몸을 반정도 일으켜 한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누워있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물론 결혼하고 싶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런 결혼은... 싫어요." "..." 거절이란 말인가. 유키는 그녀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 생각하지 못해 막상 거절당하자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 지나는 거절한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결혼이 아니란 걸 알기에 모른척 했다. 그녀는 사랑이 없는 결혼은 바라지 않았다. 아무리 유키를 사랑하지만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만 존재하는 결혼은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난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소." 그들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프로포즈는 진심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는 마음은 진심이 확실했다. 그녀의 거절에 그의 자존심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완벽한 자제력이 필요했다. 지나는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분명히 그의 얼굴에 실망감이 보였다. '미안해요, 유키.' 몇 시간이 흐르고나서도 그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유키는 그녀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팬티와 바지만 걸치고 테라스로 나갔다. 시간이 새벽 다섯 시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어져 있던 담배를 한 개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좀처럼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거의 안 피우지만 지금은 피우고 싶어 라이터를 켰다. 그러나 그는 이내 라이터 불을 끄고 담배를 물기만 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속이 답답해서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싶었다. 이내 그의 입에서는 거친 일본말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물고있던 담배를 질겅질걸 씹어 뱉어냈다. "뭐가 문제야?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날 사랑한다면서! 이런 의 결혼은 하기싫다고? 이런 식이 뭐? 하! 사랑이 없어서? 그래서 싫다?" 기사가 두 사람을 데리러 왔다. 그래서 그들은 나란히 뒷자리에 앉아서 집으로 향했다. 아침식사를 한 그들은 그후 한 시간이 흐른 이 시간까지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확실한 대답을 기다리겠소. 오늘 저녁식사 후요." "???" 그는 아직까지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끝까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남자는 물러날 때를 알아야 했다. 그것도 모르고 매달리는 짓은 형편없는 추한 꼴이 될 것이다. 김 지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전날 밤 이 길을 정신없이 달려왔던 기억이 났다. 한 남자를 만나려고.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집에 도착하자 유키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레이를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녀는 기사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기사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 아이 곁에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집을 지키기도 했다. "선생님!" "아, 레이!" "흐흐흐흐..." 아이의 표정이 이상했다. 웃는 얼굴이 아무 묘했다. 커다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입꼬리에 미소를 담고서. "무슨 일이야, 레이? 왜 그렇게 웃는 거지?" "전...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갑자기 레이가 그녀에게 달려와 안겼다. 놀란 지나는 간신히 아이를 품에서 떼어냈다. "선생님도 제가 좋죠? 절 사랑하시죠?" "음? 물론이지! 난 널 너무 사랑해!" 지나는 가볍게 아이를 끌어안아줬다가 풀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해맑은 미소가 가득했다. "아버지도요?" "어?" "아버지도 좋아하시냐고요." "아, 저기... 음... 그래. 좋아해." "사랑하시죠? 우리 아버지 사랑하시죠? 그렇죠?" "???" 지나는 입만 벌리고 말을 못 했다. 아이가 던진 질문은 단순히 지나가기에는 너무나도 확신에 차있었다. "레, 레이..." "그래서 아버지랑 같이 있었던 거죠? 저번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아, 저기... 그게... 시간이 좀 느, 늦어서..." 그녀의 심장이 달리기라도 하듯 부랴부랴 달리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웃고있는 아이의 시선이 오늘처럼 두려운 적이 없었다. "아저씨가 그러시는데 선생님이 뒤늦게라도 아버지한테 달려가셨대요. 그래서 전 안 기다리고 그냥 잤어요." 레이는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 옆에서 보리까지 합세해 짖어대고. 아이가 쾌활하게 바뀐 것은 좋지만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정도로 적극적으로 달라진 것이 그녀는 불안했다. "아, 레이..." 아이의 행동은 그날 저녁식사시간까지 이어졌다. 지나는 아이가 던진 올가미에 갖힌 것 같았다. "아버지." "음, 레이." "우리 반 친구 중에 석우라고 있거든요." 유키는 석우라는 아이이름을 외울 생각이 없었다. 그의 머리속은 계속 이 저녁식사 시간 이후가 중요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동생이 생겼어요. 남동생. 동생 손이 아주 작아서 인형 같다고 자랑해요." "그래." "그래서요... 아버지, 저... 동생 갖고싶어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유키는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 했다. 그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아 레이가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레이!" 지나가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그바람에 그가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정말이에요. 저도 동생 갖고싶단 말이에요." "저기, 레이... 아버지께선..." 유키는 너무 놀라 그만 밥숟가락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는 다급하게 물을 마시고 아들을 노려봤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그의 음성은 매우 화가 나있었다. 갑작스런 아이의 말이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그 말에 자신이 보인 반응에 더 화가 났다. 지나와의 관계를 마치 아들에게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 단지..." "우물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왜 아이한테 소리지르고 그러세요?" 지나가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차갑게 쏘아댔다. 그녀의 반항적인 시선을 받은 유키는 그녀를 노려봤다. "내가 내 아들한테 뭐라고 한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뭐라고요?" "레이는 내 아들이오. 그러니까 제3자는 좀 빠지시지." "..."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부자간의 일에 나설 까닭이 없었다. 왠지 그의 신경이 매우 날카롭게 보이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레이를 감싸고 둘 순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레이는 힘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라고 했지만 아이는 꾸지람을 들었다고 생기를 잃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레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괜히 애한테 짜증이야? 짜증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유키를 만나러 가야했지만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아 망설여졌다. 그를 놓치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빈껍데기 같은 남자와 부부로 사는 것은 더욱 싫었다. 침대 위에서 그들의 육체는 한몸이었고 열정적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이 빠진 관계였다. 레이와 그리고 지금 자신의 뱃속에 있는 생명에게는 유키와의 결혼은 아주 잘한 짓이 되겠지만 그녀의 감정에 상처를 주는 짓이었다. 그것을 알고있는 이상 그와의 결혼은 존재하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다시 하나로 묶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들어오라는 그의 목소리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 쪽에서 들렸다. "저에요." 유키는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봤다. 김 지나는 어떤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났다. 물론 그녀가 매일 입는 옷가지들은 모두 유명메이커가 아니라 몇 천원, 몇 만원하는 싸구려 보세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련되게 그런 싼 티를 제거할 줄 알았다. 단점을 가리고 장점을 더 승화시키기까지 했다. 몇 번이나 그녀의 몸을 감싸본 그로서는 그녀의 몸매를 눈으로 안 보고도 충분히 그릴 수 있었다. "그래, 결정했소?" 그가 자리에 일어나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끌어당겨 앉았다. "네." "어떻게?" "저... 우리 결혼..." 지나는 힘겹게 마른 침을 심키고 혀를 적셨다. 쓸데없는 소리를 제발 안 하길 바라며. "거절하겠어요." "..." "그럼..." 지나는 얼른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딱딱한 목소리에 멈춰야 했다. "이제 당신한테 나가란 말은 하지 않겠소." "..." "대신에 당신이 나가고싶을 땐 언제든지 나가도 좋소." 손이 부르르 떨려왔지만 그녀는 문 손잡이를 꼭 잡고는 열었다. "왜 그런 소리를 했어, 레이?" 지나는 레이가 잠들기 전 아이의 방으로 갔다. 그녀가 나타난 것을 기뻐한 아이는 유키에게 혼난 아이같지는 않아보였다. "그건 진심이었어요." "진심?" "전 정말... 동생이 갖고싶었으니까요." "레이." "그것도 여동생으로요." 언제였더라? 레이와 친해지기 전에 그녀는 아이에게 보리가 남자였으면 좋겠는지 여자였으면 좋겠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레이는 여자는 불행을 준다고 차갑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여동생을 갖고 싶어했다. "전요, 선생님." "그래." "선생님하고 같이 살고싶어요." "지금 같이 살고있잖아." 지나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촉감이 전해져왔다. "선생님이 제 엄마였음 좋겠어요." "???"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아이는 잠이 쏟아져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려 하고싶은 말을 할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엄마였음 좋겠어요. 그러시면... 안 돼요?" 그때 방문이 열리며 사토 유키가 들어왔다. 깜짝 놀란 지나는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멀찌기 떨어졌다. "그러면 안 돼요, 아버지?" 유키는 조금 전 아이의 말을 들었다. 그전부터 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결코! 그런데 김 지나가 나타나면서 그의 철판보다 두껍고 강한 그의 심장을 단숨에 뚫고 들어와 그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결혼해야하는 이유는 몇 가지의 이익을 위해서였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레이를 위해서였다. "그만 자거라, 레이." 그러나 레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붙잡아 세웠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선생님을 좋아하시잖아요." "..." 싫어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그래, 처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의 환한 미소에 빠져든 것이, 그녀의 맑고 깨끗한 순수함에 반한 것이... 처음 그날, 면접보러 온 날부터였을 것이다. "그래." "그럼... 선생님하고 결혼하시면 안 돼요?" "레이." 유키는 바지주머니 속에 두 손을 힘껏 주먹을 쥐었다. 그의 자제심이 최근 몇 주 동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일 학교가려면 일찍 자거라." "아버지..." "잘자라, 레이." 유키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아들녀석을 매일같이 붙어다니는 짐승을 위해서 다시 약간 열어두었다. 돌아서서 2층을 가려던 그는 맞은 편 방문을 쳐다봤다. '우리의 결혼... 거절하겠어요.' 그는 다시 몸을 돌렸지만 발이 지나의 방문 앞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의 의지와는 너무나도 상관없이 그의 왼 손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미쳤군!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건너편은 조용했다. 그녀가 잠이 벌써 들었을 리가 없었다. 아니면 자는 척이라도 하는건가? 다시 노크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다. 방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없었다. 주인 없는 방이니 당연히 문을 닫고 나가야 했지만 그의 몸은 또다시 뇌의 명령을 어겼다. 깨끗하게 정리정돈 되어있는 방은 여전히 그에게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녀의 향을 느꼈다. 찔러넣었던 손을 꺼내려다가 몇 번인가를 머뭇거렸다. 지금 그의 오른 쪽 주머니에는 그녀에게 줄 것이 있었다. 이미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녀가 자신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아주 작은 상자를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상자 속에 있던 반지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 반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리석은 자식! 뭘 믿고 반지를 마련한 거지, 유키? 무슨 생각으로 그 여자에게 이따위 짓을 한 거야?' 유키는 벨벳으로 감싸여진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두려다가 마침 그녀의 핸드백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상자를 핸드백 속에 넣으려다가 뭐라고 메모를 해둬야할 것 같아 메모지를 찾았다. 서랍을 열고 메모지와 펜을 꺼내던 그는 열었던 서랍을 닫으려다 뭔가를 발견했다. 명함. **산부인과 명함이었다! '산부인과?' 유키는 뇌를 번개에 맞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새하얘지고 말았다. 김 지나가 그녀에게 뭔가 아주 대단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바로... 아기를! 그는 그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당장 그 방에서 나왔다. 며칠 후, 유키는 일본으로 전화를 걸었다. 으례 안부전화였지만 이번에는 기분이 달랐다. 그동안 그가 퍼마신 술만해도 아마 몇 상자는 될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그에게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누구의 아기인지 전혀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순간 유스케의 아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아주 잠시 스치기는 했지만 곧 그의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은 것은 바로 자신의 아이라는 확고한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그녀가 숨길 생각인 건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는 끝까지 그녀가 먼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접니다, 어머니." "어머, 유키! 그동안 잘 지냈니?" "예. 별일 없으십니까?" "그래. 넌? 레이도 잘 있고? 그리고... 아, 음... 그 김 선생님도 잘 계시지?" "네." 유키는 지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조만간 그곳에 갈까합니다." "뭐? 유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제가 그곳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잠시 의논드릴게 있습니다." "의논?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그는 여태 살아오면서 혼자 독립적으로 잘 해내왔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심하게 혼난 적이 없었다. 또한 근심거리를 안겨줄만한 문제도 없었다. 그의 결혼 문제도 날을 잡고나서야 부모님을 불렀으니까. "아무래도 레이가 염려되서요." "레이? 레이가 왜?" "엄마 없는 아들로 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유키는 스스로가 지껄이는 말들이 모두가 진실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문을 걸었다. 오로지 아들녀석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사토 유키! 그럼... 너... 재혼하려는 거냐?" "네. 그 문제로 의논드릴게 있습니다." 일생일대의 사토 유키에게 있어서 청혼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승낙을 받아내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자존심상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러나 유키는 다시한번 그녀에게 쳐들어갈 것이다. 물론 다급하게 진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오기를 부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사랑이 없이도 결혼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매일 밤 쾌락과 희열에 몸부림을 치며 그에게 매달리게 해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더 그녀에게 매달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결심은 그가 발견한 명함으로 인해서 더욱 확신했고 단단하게 굳어졌으니까. 절대 김 지나는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절대 결혼하지 않고서는 안 되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좋아, 김 지나. 당신을 위해서 내가 한발 물러나주겠소. 당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는 거요. 더이상 내 청혼을 뿌리치지 못 할 테니까! 그의 입술이 잔인하게 치켜져 올라갔다. 그 입끝에서는 승리의 미소가 담겨있었다. to be continued
***무례한 남자 유키*** <#26. 유키의 청혼>
#26
<<유키의 청혼>>
유키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극도로 힘들었다.
토끼같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는 선뜻 대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그녀가 충격받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의외로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어서인지 그에게 실망감이 찾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 걸까. 참을 수 없는 침묵에 그는 몸을 일으키려했다. 이때 그녀의 손이 날아와 그의 가슴을 건드렸다.
"제가 잘 들은 건지 모르겠어요."
"뭐?"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숨넘어갈 듯한 그녀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에게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나와 결혼하자고 했소."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그는 이곳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결혼에 대해서 여전히 비관했다.
하지만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의 육체를 공유해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 '결혼'이라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를 이대로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곁에 없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고 그녀가 다른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있다는 사실에 분노의 화신이 되어야했다.
그녀를 언제까지나 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은 '결혼'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오직 사토 유키의 것이 된다.
그에게는 여자 즉, 김 지나라는 여자가 필요했고 아들 레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했다.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은 김 지나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와의 관계는 한마디로 말해 환상적이고 완벽했다.
그녀와 있으면 매일매일이 지루하거나 예전처럼 삶이 어둡지가 않았다.
그녀 주변에 내리쬐는 햇살이 바로 그에게까지 레이에게까지 뻗어왔다.
이제 두 남자는 그녀에게서 나오는 밝은 햇살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충동적이긴해도 그녀에게 프로포즈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잘 한 짓이야. 유키는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당신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원하는 바가 아니오?"
몸을 반정도 일으켜 한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누워있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물론 결혼하고 싶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런 결혼은... 싫어요."
"..."
거절이란 말인가. 유키는 그녀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 생각하지 못해 막상 거절당하자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 지나는 거절한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결혼이 아니란 걸 알기에 모른척 했다.
그녀는 사랑이 없는 결혼은 바라지 않았다. 아무리 유키를 사랑하지만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만 존재하는 결혼은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난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소."
그들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프로포즈는 진심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는 마음은 진심이 확실했다.
그녀의 거절에 그의 자존심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완벽한 자제력이 필요했다.
지나는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분명히 그의 얼굴에 실망감이 보였다.
'미안해요, 유키.'
몇 시간이 흐르고나서도 그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유키는 그녀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팬티와 바지만 걸치고 테라스로 나갔다. 시간이 새벽 다섯 시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어져 있던 담배를 한 개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좀처럼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거의 안 피우지만 지금은 피우고 싶어 라이터를 켰다.
그러나 그는 이내 라이터 불을 끄고 담배를 물기만 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속이 답답해서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싶었다.
이내 그의 입에서는 거친 일본말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물고있던 담배를 질겅질걸 씹어 뱉어냈다.
"뭐가 문제야?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날 사랑한다면서! 이런 의 결혼은 하기싫다고? 이런 식이 뭐? 하! 사랑이 없어서? 그래서 싫다?"
기사가 두 사람을 데리러 왔다. 그래서 그들은 나란히 뒷자리에 앉아서 집으로 향했다.
아침식사를 한 그들은 그후 한 시간이 흐른 이 시간까지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확실한 대답을 기다리겠소. 오늘 저녁식사 후요."
"???"
그는 아직까지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끝까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남자는 물러날 때를 알아야 했다. 그것도 모르고 매달리는 짓은 형편없는 추한 꼴이 될 것이다.
김 지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전날 밤 이 길을 정신없이 달려왔던 기억이 났다. 한 남자를 만나려고.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집에 도착하자 유키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레이를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녀는 기사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기사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 아이 곁에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집을 지키기도 했다.
"선생님!"
"아, 레이!"
"흐흐흐흐..."
아이의 표정이 이상했다. 웃는 얼굴이 아무 묘했다. 커다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입꼬리에 미소를 담고서.
"무슨 일이야, 레이? 왜 그렇게 웃는 거지?"
"전...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갑자기 레이가 그녀에게 달려와 안겼다. 놀란 지나는 간신히 아이를 품에서 떼어냈다.
"선생님도 제가 좋죠? 절 사랑하시죠?"
"음? 물론이지! 난 널 너무 사랑해!"
지나는 가볍게 아이를 끌어안아줬다가 풀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해맑은 미소가 가득했다.
"아버지도요?"
"어?"
"아버지도 좋아하시냐고요."
"아, 저기... 음... 그래. 좋아해."
"사랑하시죠? 우리 아버지 사랑하시죠? 그렇죠?"
"???"
지나는 입만 벌리고 말을 못 했다. 아이가 던진 질문은 단순히 지나가기에는 너무나도 확신에 차있었다.
"레, 레이..."
"그래서 아버지랑 같이 있었던 거죠? 저번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아, 저기... 그게... 시간이 좀 느, 늦어서..."
그녀의 심장이 달리기라도 하듯 부랴부랴 달리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웃고있는 아이의 시선이 오늘처럼 두려운 적이 없었다.
"아저씨가 그러시는데 선생님이 뒤늦게라도 아버지한테 달려가셨대요. 그래서 전 안 기다리고 그냥 잤어요."
레이는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 옆에서 보리까지 합세해 짖어대고.
아이가 쾌활하게 바뀐 것은 좋지만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정도로 적극적으로 달라진 것이 그녀는 불안했다.
"아, 레이..."
아이의 행동은 그날 저녁식사시간까지 이어졌다. 지나는 아이가 던진 올가미에 갖힌 것 같았다.
"아버지."
"음, 레이."
"우리 반 친구 중에 석우라고 있거든요."
유키는 석우라는 아이이름을 외울 생각이 없었다. 그의 머리속은 계속 이 저녁식사 시간 이후가 중요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동생이 생겼어요. 남동생. 동생 손이 아주 작아서 인형 같다고 자랑해요."
"그래."
"그래서요... 아버지, 저... 동생 갖고싶어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유키는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 했다. 그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아 레이가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레이!"
지나가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그바람에 그가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정말이에요. 저도 동생 갖고싶단 말이에요."
"저기, 레이... 아버지께선..."
유키는 너무 놀라 그만 밥숟가락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는 다급하게 물을 마시고 아들을 노려봤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그의 음성은 매우 화가 나있었다. 갑작스런 아이의 말이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그 말에 자신이 보인 반응에 더 화가 났다.
지나와의 관계를 마치 아들에게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 단지..."
"우물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왜 아이한테 소리지르고 그러세요?"
지나가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차갑게 쏘아댔다. 그녀의 반항적인 시선을 받은 유키는 그녀를 노려봤다.
"내가 내 아들한테 뭐라고 한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뭐라고요?"
"레이는 내 아들이오. 그러니까 제3자는 좀 빠지시지."
"..."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부자간의 일에 나설 까닭이 없었다.
왠지 그의 신경이 매우 날카롭게 보이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레이를 감싸고 둘 순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레이는 힘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라고 했지만 아이는 꾸지람을 들었다고 생기를 잃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레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괜히 애한테 짜증이야? 짜증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유키를 만나러 가야했지만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아 망설여졌다.
그를 놓치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빈껍데기 같은 남자와 부부로 사는 것은 더욱 싫었다.
침대 위에서 그들의 육체는 한몸이었고 열정적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이 빠진 관계였다.
레이와 그리고 지금 자신의 뱃속에 있는 생명에게는 유키와의 결혼은 아주 잘한 짓이 되겠지만 그녀의 감정에 상처를 주는 짓이었다.
그것을 알고있는 이상 그와의 결혼은 존재하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다시 하나로 묶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들어오라는 그의 목소리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 쪽에서 들렸다.
"저에요."
유키는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봤다.
김 지나는 어떤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났다. 물론 그녀가 매일 입는 옷가지들은 모두 유명메이커가 아니라 몇 천원, 몇 만원하는 싸구려 보세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련되게 그런 싼 티를 제거할 줄 알았다. 단점을 가리고 장점을 더 승화시키기까지 했다.
몇 번이나 그녀의 몸을 감싸본 그로서는 그녀의 몸매를 눈으로 안 보고도 충분히 그릴 수 있었다.
"그래, 결정했소?"
그가 자리에 일어나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끌어당겨 앉았다.
"네."
"어떻게?"
"저... 우리 결혼..."
지나는 힘겹게 마른 침을 심키고 혀를 적셨다. 쓸데없는 소리를 제발 안 하길 바라며.
"거절하겠어요."
"..."
"그럼..."
지나는 얼른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딱딱한 목소리에 멈춰야 했다.
"이제 당신한테 나가란 말은 하지 않겠소."
"..."
"대신에 당신이 나가고싶을 땐 언제든지 나가도 좋소."
손이 부르르 떨려왔지만 그녀는 문 손잡이를 꼭 잡고는 열었다.
"왜 그런 소리를 했어, 레이?"
지나는 레이가 잠들기 전 아이의 방으로 갔다. 그녀가 나타난 것을 기뻐한 아이는 유키에게 혼난 아이같지는 않아보였다.
"그건 진심이었어요."
"진심?"
"전 정말... 동생이 갖고싶었으니까요."
"레이."
"그것도 여동생으로요."
언제였더라? 레이와 친해지기 전에 그녀는 아이에게 보리가 남자였으면 좋겠는지 여자였으면 좋겠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레이는 여자는 불행을 준다고 차갑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여동생을 갖고 싶어했다.
"전요, 선생님."
"그래."
"선생님하고 같이 살고싶어요."
"지금 같이 살고있잖아."
지나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촉감이 전해져왔다.
"선생님이 제 엄마였음 좋겠어요."
"???"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아이는 잠이 쏟아져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려 하고싶은 말을 할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엄마였음 좋겠어요. 그러시면... 안 돼요?"
그때 방문이 열리며 사토 유키가 들어왔다. 깜짝 놀란 지나는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멀찌기 떨어졌다.
"그러면 안 돼요, 아버지?"
유키는 조금 전 아이의 말을 들었다. 그전부터 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결코!
그런데 김 지나가 나타나면서 그의 철판보다 두껍고 강한 그의 심장을 단숨에 뚫고 들어와 그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결혼해야하는 이유는 몇 가지의 이익을 위해서였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레이를 위해서였다.
"그만 자거라, 레이."
그러나 레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붙잡아 세웠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선생님을 좋아하시잖아요."
"..."
싫어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그래, 처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의 환한 미소에 빠져든 것이, 그녀의 맑고 깨끗한 순수함에 반한 것이... 처음 그날, 면접보러 온 날부터였을 것이다.
"그래."
"그럼... 선생님하고 결혼하시면 안 돼요?"
"레이."
유키는 바지주머니 속에 두 손을 힘껏 주먹을 쥐었다. 그의 자제심이 최근 몇 주 동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일 학교가려면 일찍 자거라."
"아버지..."
"잘자라, 레이."
유키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아들녀석을 매일같이 붙어다니는 짐승을 위해서 다시 약간 열어두었다.
돌아서서 2층을 가려던 그는 맞은 편 방문을 쳐다봤다.
'우리의 결혼... 거절하겠어요.'
그는 다시 몸을 돌렸지만 발이 지나의 방문 앞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의 의지와는 너무나도 상관없이 그의 왼 손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미쳤군!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건너편은 조용했다. 그녀가 잠이 벌써 들었을 리가 없었다. 아니면 자는 척이라도 하는건가?
다시 노크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다.
방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없었다.
주인 없는 방이니 당연히 문을 닫고 나가야 했지만 그의 몸은 또다시 뇌의 명령을 어겼다.
깨끗하게 정리정돈 되어있는 방은 여전히 그에게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녀의 향을 느꼈다. 찔러넣었던 손을 꺼내려다가 몇 번인가를 머뭇거렸다.
지금 그의 오른 쪽 주머니에는 그녀에게 줄 것이 있었다. 이미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녀가 자신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아주 작은 상자를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상자 속에 있던 반지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 반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리석은 자식! 뭘 믿고 반지를 마련한 거지, 유키? 무슨 생각으로 그 여자에게 이따위 짓을 한 거야?'
유키는 벨벳으로 감싸여진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두려다가 마침 그녀의 핸드백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상자를 핸드백 속에 넣으려다가 뭐라고 메모를 해둬야할 것 같아 메모지를 찾았다.
서랍을 열고 메모지와 펜을 꺼내던 그는 열었던 서랍을 닫으려다 뭔가를 발견했다.
명함. **산부인과 명함이었다!
'산부인과?'
유키는 뇌를 번개에 맞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새하얘지고 말았다.
김 지나가 그녀에게 뭔가 아주 대단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바로... 아기를!
그는 그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당장 그 방에서 나왔다.
며칠 후, 유키는 일본으로 전화를 걸었다. 으례 안부전화였지만 이번에는 기분이 달랐다.
그동안 그가 퍼마신 술만해도 아마 몇 상자는 될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그에게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누구의 아기인지 전혀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순간 유스케의 아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아주 잠시 스치기는 했지만 곧 그의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은 것은 바로 자신의 아이라는 확고한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그녀가 숨길 생각인 건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는 끝까지 그녀가 먼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접니다, 어머니."
"어머, 유키! 그동안 잘 지냈니?"
"예. 별일 없으십니까?"
"그래. 넌? 레이도 잘 있고? 그리고... 아, 음... 그 김 선생님도 잘 계시지?"
"네."
유키는 지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조만간 그곳에 갈까합니다."
"뭐? 유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제가 그곳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잠시 의논드릴게 있습니다."
"의논?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그는 여태 살아오면서 혼자 독립적으로 잘 해내왔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심하게 혼난 적이 없었다.
또한 근심거리를 안겨줄만한 문제도 없었다. 그의 결혼 문제도 날을 잡고나서야 부모님을 불렀으니까.
"아무래도 레이가 염려되서요."
"레이? 레이가 왜?"
"엄마 없는 아들로 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유키는 스스로가 지껄이는 말들이 모두가 진실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문을 걸었다.
오로지 아들녀석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사토 유키! 그럼... 너... 재혼하려는 거냐?"
"네. 그 문제로 의논드릴게 있습니다."
일생일대의 사토 유키에게 있어서 청혼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승낙을 받아내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자존심상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러나 유키는 다시한번 그녀에게 쳐들어갈 것이다. 물론 다급하게 진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오기를 부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사랑이 없이도 결혼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매일 밤 쾌락과 희열에 몸부림을 치며 그에게 매달리게 해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더 그녀에게 매달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결심은 그가 발견한 명함으로 인해서 더욱 확신했고 단단하게 굳어졌으니까.
절대 김 지나는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절대 결혼하지 않고서는 안 되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좋아, 김 지나. 당신을 위해서 내가 한발 물러나주겠소. 당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는 거요.
더이상 내 청혼을 뿌리치지 못 할 테니까!
그의 입술이 잔인하게 치켜져 올라갔다. 그 입끝에서는 승리의 미소가 담겨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