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내가 좀 그래. 그런데 이현아 저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촌오빠와 살면서 왜 방문이 안 되는지를 납득시키는 일이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아! 맞다. 나 오늘 사진 찍어야 된다고 그랬지. 우리 매니저 오빠는 나 쉬는 꼴을 못 보잖냐. 다음에 한번 꼭 초대해줘야 한다." "알았어." 태림은 이현이 건네준 볼펜을 들고 책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이현이 눈치 못 채자 가슴을 쓸어 내렸다. "휴우. 다행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친구들을 초대해 본적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항상 몸에 멍이 들어있는 엄마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생각해서 보이지 않는 곳만 때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 멍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구의 남자에게 맞는 일은 약한 뼈대를 가지고 있는 엄마의 힘을 소모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태림은 자기 때문에 엄마가 신경 쓸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더욱 꿈을 꿀 수도 없는 일이었다. "태림아?" "네. 아..버님." 아버님이라는 말이 좀처럼 잘 나오지 않았지만 시아버지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노력했다. "자기 전에 내 서재에 잠깐 들렸다 가려무나." "네."
똑똑 "들어와라." 태림은 처음으로 시아버지의 서재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의 서재는 세준의 서재처럼 책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가져다 놓은 새책이 아니라 세준처럼 거의 대부분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이었다. "앉아라." "..." "자. 이거 받아." 태림은 시아버지가 내어 놓는 하얀 봉투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놀라 숨을 들이쉬었다. "웬 돈이에요?" "용동이다. 아무리 학생이라고 넌 주부이잖니. 당장은 쓸데가 없더라도 가지고 있다가 필요로 한 일이 있으면 써라. 사람이 돈이 없으면 힘이 없는 거란다." 시아버지는 태림이 친정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온 것을 간파한 것이 틀림 없어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요." "아니다. 넌 우리집안의 며느리다. 그 정도는 받아도 괜찮아."
태림은 조금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들이려 했지만, 시아버지는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저기요?" "뭐." 막 방에서 나가려는 세준을 방문 앞에서 만났다. 분명 오늘도 서재에 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아버님이 용돈을 주셨어요." 세준의 표정은 변화가 없어 기분이 어떤지 가늠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써." "그런데요." 세준은 태림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두 갈래로 나누어져 하얀 살이 보이는 정수리 뿐이었다. "너무 많아요." "저금하던지 그건 너 알아서해." 세준은 별 관심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복도 끝에 있는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세준은 서재로 들어가 서류 사이에 끼어 있던 하얀 봉투를 꺼내어 들었다. 사실 그가 먼저 주려고 했다. 원치 않는 결혼이었지만 그래도 용돈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태림이를 아끼고 마음에 들어 했던 아버지가 선수를 치고 말았다. 알아서 태림이를 챙기는 아버지가 있어서 편안해 해야했고, 그럴거라고 생각했지만 세준의 마음속은 점점 복잡해져 갈 뿐이었다.
태림은 세준의 말대로 저금을 했다. 이 돈을 모으고 나중에 졸업해서 돈을 모으면 생각 했던 금액이 생각보다 빨리 모아 질 것 같아 최소한의 돈만 남겨 놓고 다 저금해버렸다. 이현은 새로운 영화촬영에 들어간다면서 학교에 잘 오지 못했기 때문에 얼굴을 좀처럼 볼 수가 없어서 가끔 외로웠다. 유정과 다른 친구들도 있었지만 이현이가 주는 느낌은 그녀만의 것이었기 때문에 이현과 대화를 나누고 점심도 같이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세준에게서 가지는 하나라는 어색한 둘레보다는 이현이 주는 교감이 더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한 달 전부터 옷 때문에 소란을 피우던 시어머니가 이제는 가족들 앞에서 패션 쇼를 하면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가르쳐 달라며 요란을 떨었지만 시아버지와 세준의 얼굴에는 전혀 귀찮다거나 비웃는 기색은 없었다. 만약 저런 모습을 그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했었더라면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상상해 보았지만, 시아버지가 보이는 반응은 절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가슴 시린 상상을 그만두었다. "여보. 이건 어때요? 내 나이에 핑크색은 좀 너무했나!" "아니. 당신은 뭘 입어도 예쁘니 아무거나 입어요." "매일 그 소리." 시어머니는 삐진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세준아 넌?"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넌 어떻게 생각하니?" 태림에게 물어보고 싶지 않는 표정처럼 떨떠름한 인상을 지고 있었지만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묻는 것 같아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그것도 예쁘기는 한데. 조금 전에 입으신 연두색이 더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너두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눈에는 태림이 그 옷을 고른 것에 의외라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태림이 고른 옷이 마음에 드는지 다시 그 옷을 입겠다면서 들어갔다. "창립파티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 "네." 아버지는 단 한번도 엄마와 그녀를 중요한 파티나 작은 파티나 데리고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태림은 시어머니가 수선을 피우는 게 마냥 신기해 보이기만 했다. "너도 가고 싶지?" 책을 읽는 세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관심이 전혀 없는 듯이 보였다. "전...." "무슨 말씀이세요. 저 아이가 가면 집안 망신이라고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정말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시어머니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코에서 불만 나오면 완전히 용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태림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 이 애들 결혼을 아는 건 극소수인데, 태림이를 창립파티에 데리고 가봐요. 우리 집안이 무슨 꼴이 되겠으며, 세준의 얼굴은 뭐가 되겠어요. 무슨 실수를 했기에 어린애를 그것도 쉬 쉬 숨기며 결혼을 했냐며 사람들이 속닥거리지 않겠냐구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 식구 아니오." 시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이 한심하다는 한 숨을 내쉬며 자신의 주장을 쉬지도 않고 피력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시기에 태림이가 알려지면 투자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 저 애 아버지가 어디 보통 사람 이여야지요." "여보." 시아버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호통을 쳤고, 그때까지 기세 등등하던 시어머니가 처음으로 수그러드는 모습을 보였다. 태림은 자신 때문에 시부모님들이 작은 말다툼을 할 때마다 심장이 쪼그려 드는 것 같은 긴장감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숨을 고르느라 고생을 해야했다. "우리가 왜 결혼 사실을 숨겼는지 잊지 않으셨죠. 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런 대외적인 행사에 나가도 늦지 않다고요." 시아버지는 화가 많이 났는지 주먹을 꼭 주며 손잡이를 내리 쳤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시도하지 않았다. 태림은 자신을 애물단지 이냥, 집안에 구석에 쳐 박혀 있는 집안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가구를 이야기하듯이 말하는 시어머니의 말이 상처가 되었지만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건 태림이도 마찬가 지었다. 지금 알려져 봤자 학교 생활에 전혀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태림은 시어머니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집안이 조용할..." "저희는 그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태림은 세준이 어머니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도망쳤다. 태림은 어떤 종류를 망라하고 싸움이라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웬만하면 싸움을 하지 않았고, 싸움을 구경하지도 않았다. 두 분만 남겨 놓고 올라가기가 미안스러웠지만 시부모님의 싸움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다는 걸 몇 달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에 뒤돌아보지 않았다. 작은 싸움이어도 지켜보고 있는 것에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왜 그렇게 긴장을 하는 거야. 저러다가 마시는데." 태림은 그의 말에 세준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알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왜 그러는지 자신의 감정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전 그냥 싸움이 싫어요." "그래도 싸워야 할 때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해. 세상은 네가 양보한다고 해서 널 아껴주거나 이해해 주지 않아." 세준이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것에 태림은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네." "잘 자라. 난 할 일이 좀 있어." 세준은 방으로 들어가는 힘없는 태림이를 보면서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태림은 조금의 큰소리에도 긴장을 했고, 손대면 금방이라도 뛰어오르려는 고무줄 마냥 신경이 팽팽해져 있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확인 할 길은 없지만 능구렁이 같은 김진만 사장의 영향인 것이 분명했다.
드디어 창립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피부 관리와 머리를 한다면서 일찍 집을 나섰고, 세준은 할 일이 있다며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태림은 창립파티의 전주곡 같은 설렘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을 거야. 다들 늦게 들어 올 테니 먼 저자." "네. 잘 다녀오세요." 태림은 차에서 내려 평상시처럼 그냥 가지 않고 그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태림아." "엄마야." 태림은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치는 손에 놀라 소리를 쳤다. "미안해. 많이 놀랐니?" "괜찮아.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 이현은 일찍 온다고 오는 날도 거의 1교시가 끝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찍 이현을 본다는 건 가뭄에 콩 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이 근처에 촬영이 있었거든. 하 암, 잠 온다. 나 한숨도 못 잤어." "정말?" "응. 정말 짜증나는 거 있지 상대 연기자가 자꾸 NG를 내지 뭐니. 덕분에 날 꼬빡 셌다니까. 이그∼! 생각할수록 화나내. 이왕 못 잔 김에 혹시나 니 얼굴 볼 수 있을 까해서 기다렸는데 보람 있었네." 누군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이 이렇게 감동을 주는 것인지 처음 안 태림은 아침의 차가운 바람과는 상관없이 눈이 시려왔다. "그럼 학교에는 못 들어오겠네?" "응. 사실 5분만 더 기다리다 가려고 했거든. 얼굴 봤으니까 됐다. 어서 들어가 내 몫까지 공부 열심히 해. 안녕." "안녕! 현아." 태림은 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는 이현에게 손을 흔드는 걸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흔들어 주었다.
"유정이 너 얼굴이 좋아 보인다." "정말? 사실은 어제 마사지했거든 오늘 어디 갈 때가 있어서, 정말 중요한데거든. 내가 갔다와서 너한테 먼저 말해 줄게." 태림은 유정이 어디에 가는지 알만 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태림이 알기론 유정의 집에서 세준의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유정이 어디에 간다고 말하지 않아도 목적지를 알 수 있었다. 유정이 저렇게 설레어 하는 걸 보자 태림은 처음으로 창립파티라는 것에 참여해 보고 싶었고, 세준과 손을 잡고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왈츠를 처보고 싶었지만 그건 그녀의 백일몽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태림이 집안의 경조사에 빠지게 되는 것이 마음에 마냥 들지만 않은 자신의 속내에 짜증을 내면서도 속속들이 도착하는 사람들을 맞이해 얼굴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의 감사의 말과 초대된 정치가의 축하사가 이어지자 드디어 파티는 절정으로 오르고 있었다. 무성그룹은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전자회사 중 하나였고, 싼 인건비와 저렴한 가격으로 해외에도 수출을 하고 있는 건실한 기업이었다. 그랬기에 오늘 이 파티에는 저명한 사회 인사들과 정치인들 기업인들이 모여들었고, 이 창립파티에 초대받기 위해 많을 돈을 쓰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정말 축하하네. 정 서방." "오셨습니까." 세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김진만 사장이 세준의 회사의 창립 파티에 온 것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그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의 딸인 태림이와 혼인을 한 상태이니까. 하지만 김진만 사장이 자신의 아내가 아닌 혜란이를 파트너로 데리고 온 것은 세준과 그의 부모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장모님과 태림을 한 인격체로써 완전히 무시한다는 소리였다. 혜란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서양적인 이목구비와 그 못잖은 굴곡이 아름다운 몸매도 여전했고, 쌍꺼풀이 크게 된 눈은 그녀의 야심적인 성격과는 전혀 다르게 순수함 빛을 뿜어내 주위의 남자들을 홀리고 있었다. 좀 전에 먹었던 술들이 한꺼번에 확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직도 혜란이 김진만 사장을 만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우리 사위 잘 지냈다. 어찌 결혼하고 한번도 처가에 올 생각을 하지 않는가? 우리 집사람이 태림이를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데. 한번 꼭 오게." "네." 집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이 대외적인 자리에 아내가 아닌 첩실을 데리고 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네.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혜란은 이미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신경도 쓰지 않고 김진만 사장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요즘 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설마 그 소문의 주인공이 혜란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소문은 김진만 사장이 요즘 한 젊은 여자를 사귀고 있는데, 그 여자가 결혼을 원한다면서 안방자리를 원한다는 거였고, 김진만 사장도 그 말을 별로 싫어하지 않더라는 소문이었다. 세준은 장모님과 태림이 그 소문을 듣지 않았기를 바랐다. "세준씨 정말 멋있어 졌네요." 세준은 혜란을 눈을 보자 욱하는 것이 치미는 걸 참느라고 고생해야 했다. 그녀의 눈빛은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니라 정욕의 대상을 보는 것처럼 농도가 짙어져 있었다. 다행히 김진만 사장이 그 때 다른 곳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때는 왜 혜란의 눈빛이 욕망과 허영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한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꼬마 사모님은 안 오셨나봐요?" 혜란의 눈가는 웃음으로 가늘어졌다. 하지만 김진만 사장도 이번만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태림이는 집에 있겠지?" 혜란은 그의 말에 기분 상해하는 것 같았지만 금세 표정을 바꾸더니 다시 그의 팔에 뱀처럼 엉키어 들었다. "네.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아직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김사장은 그런 세준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혜란을 대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다. "그럼. 그래야지! 우리도 조금 있다가 갈 생각이네. 우리 여기서 작별인사를 하지." 김진만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처음과는 다른 게 상당히 많이 굳어져 있었다. 세준은 가끔 아버지의 그 표정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사랑을 해서 결혼한 줄 몰랐다면 아버지가 무시당하는 김진만 사장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아버지의 표정은 미묘했다. "저 인간들은 여기에 왜 왔다니?" 어머니는 혜란이를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이 확실했다. 기분 나빠했지만 아버지처럼 굳어있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뭔지 알고 싶었지만 계속 밀려드는 축하 행렬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회장님, 사모님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어머나. 윤 사장님 오셨군요. 우리 유정이 갈수록 예뻐지는 구나. 이제는 완전히 숙녀가 되었는걸. 세준아 유정이 기억하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준은 자신의 꼬마적 보았던 소녀에게 눈길을 한번 줄뿐이었지만 그의 눈길 한번에 소녀는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다. 세준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른들의 옷을 입은 소녀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 여자아이를 보자 집에 있는 태림이 잠시 떠올라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효과만 나고 말았다.
태림은 식구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면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주말 밤이어서 인지 영화를 했는데, 이현이가 주인공으로 나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과 재력을 동시에 차지하는 억척 소녀를 이야기한 영화였다. "아직 안자고 있었니?" "네. 다녀오셨어요." 시어머니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태림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그래. 세준이가 오려면 좀 멀었으니까 너 먼저 자거라." "예." 태림은 시부모님이 그들의 방으로 들어가자 이층으로 올라왔지만 잠이 들지는 않았다. 말뿐인 부부생활이지만 세준을 기다려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거실에 앉아 책을 집어 들었다. 시어머니의 말대로 세준은 열두시가 넘어도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태림의 입에서는 연신 하품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냥 자버릴까?" 하지만 지금껏 기다린 시간과 정성이 아까워 태림은 방으로 올라가 책을 한 권 꺼내어 들었다.
세준은 자신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 빛을 보고 오늘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에 처음으로 진정한 미소를 지었다. 태림이 불을 끄지 않고 잠든 모양인 것 같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위해 불을 켜 놓은 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아직도 않자고 뭐하고 있어? 설마 나 기다린 거야." 세준은 방문을 열다 말고 소파에 이불을 덮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태림이 자신을 반기자 놀라 그 자리에 잠시 멈춰 꼭 태림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네. 잠도 오지 않고 해서요." 세준의 눈썹이 아치모양으로 변했지만 그녀가 기다린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는지 처음으로 태림에게 상의를 벗어 건네어 주고 욕실로 향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태림은 세준이 샤워를 하러 들어가자 잠을 자기 위해 소파에 누었다. 그가 샤워하는 소리가 어느 정도 귀에 익자 태림은 서서히 잠이 들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전화통화로 엄마가 아버지에게 별다르게 시달리고 있지 않다는 걸 엄마와 아주머니에게서 확인해서 인지 예전보다는 잠드는데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항상 두려움에 떨었던 삶을 살았기에 잠을 깊이 못 들기도 했지만 잠을 금방 잠들 수도 없었다.
샤워를 맞추고 나온 세준은 달빛이 곱게 머무는 태림의 얼굴에서 한동안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서도 그저 결혼이라는 이야기만을 들었을 때도 싫었던 어린 그녀가 언젠가부터 그의 마음속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는지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마음의 따뜻해졌다. 만약 태림이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혜란과 김진만 사장을 만났더라면 세준은 분명 태림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 한마디쯤은 아무렇지 않게 꺼내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 소문을 그녀가 듣지 않기를 바라고 기도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그의 걱정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어둠과 같은 것이었다.
애련{다섯번째}
"어! 내가 좀 그래. 그런데 이현아 저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촌오빠와 살면서 왜 방문이 안 되는지를 납득시키는 일이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아! 맞다. 나 오늘 사진 찍어야 된다고 그랬지. 우리 매니저 오빠는 나 쉬는 꼴을 못 보잖냐. 다음에 한번 꼭 초대해줘야 한다."
"알았어."
태림은 이현이 건네준 볼펜을 들고 책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이현이 눈치 못 채자 가슴을 쓸어 내렸다.
"휴우. 다행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친구들을 초대해 본적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항상 몸에 멍이 들어있는 엄마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생각해서 보이지 않는 곳만 때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 멍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구의 남자에게 맞는 일은 약한 뼈대를 가지고 있는 엄마의 힘을 소모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태림은 자기 때문에 엄마가 신경 쓸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더욱 꿈을 꿀 수도 없는 일이었다.
"태림아?"
"네. 아..버님."
아버님이라는 말이 좀처럼 잘 나오지 않았지만 시아버지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노력했다.
"자기 전에 내 서재에 잠깐 들렸다 가려무나."
"네."
똑똑
"들어와라."
태림은 처음으로 시아버지의 서재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의 서재는 세준의 서재처럼 책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가져다 놓은 새책이 아니라 세준처럼 거의 대부분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이었다.
"앉아라."
"..."
"자. 이거 받아."
태림은 시아버지가 내어 놓는 하얀 봉투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놀라 숨을 들이쉬었다.
"웬 돈이에요?"
"용동이다. 아무리 학생이라고 넌 주부이잖니. 당장은 쓸데가 없더라도 가지고 있다가 필요로 한 일이 있으면 써라. 사람이 돈이 없으면 힘이 없는 거란다."
시아버지는 태림이 친정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온 것을 간파한 것이 틀림 없어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요."
"아니다. 넌 우리집안의 며느리다. 그 정도는 받아도 괜찮아."
태림은 조금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들이려 했지만, 시아버지는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저기요?"
"뭐."
막 방에서 나가려는 세준을 방문 앞에서 만났다. 분명 오늘도 서재에 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아버님이 용돈을 주셨어요."
세준의 표정은 변화가 없어 기분이 어떤지 가늠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써."
"그런데요."
세준은 태림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두 갈래로 나누어져 하얀 살이 보이는 정수리 뿐이었다.
"너무 많아요."
"저금하던지 그건 너 알아서해."
세준은 별 관심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복도 끝에 있는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세준은 서재로 들어가 서류 사이에 끼어 있던 하얀 봉투를 꺼내어 들었다. 사실 그가 먼저 주려고 했다. 원치 않는 결혼이었지만 그래도 용돈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태림이를 아끼고 마음에 들어 했던 아버지가 선수를 치고 말았다.
알아서 태림이를 챙기는 아버지가 있어서 편안해 해야했고, 그럴거라고 생각했지만 세준의 마음속은 점점 복잡해져 갈 뿐이었다.
태림은 세준의 말대로 저금을 했다. 이 돈을 모으고 나중에 졸업해서 돈을 모으면 생각 했던 금액이 생각보다 빨리 모아 질 것 같아 최소한의 돈만 남겨 놓고 다 저금해버렸다.
이현은 새로운 영화촬영에 들어간다면서 학교에 잘 오지 못했기 때문에 얼굴을 좀처럼 볼 수가 없어서 가끔 외로웠다. 유정과 다른 친구들도 있었지만 이현이가 주는 느낌은 그녀만의 것이었기 때문에 이현과 대화를 나누고 점심도 같이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세준에게서 가지는 하나라는 어색한 둘레보다는 이현이 주는 교감이 더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한 달 전부터 옷 때문에 소란을 피우던 시어머니가 이제는 가족들 앞에서 패션 쇼를 하면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가르쳐 달라며 요란을 떨었지만 시아버지와 세준의 얼굴에는 전혀 귀찮다거나 비웃는 기색은 없었다.
만약 저런 모습을 그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했었더라면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상상해 보았지만, 시아버지가 보이는 반응은 절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가슴 시린 상상을 그만두었다.
"여보. 이건 어때요? 내 나이에 핑크색은 좀 너무했나!"
"아니. 당신은 뭘 입어도 예쁘니 아무거나 입어요."
"매일 그 소리."
시어머니는 삐진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세준아 넌?"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넌 어떻게 생각하니?"
태림에게 물어보고 싶지 않는 표정처럼 떨떠름한 인상을 지고 있었지만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묻는 것 같아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그것도 예쁘기는 한데. 조금 전에 입으신 연두색이 더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너두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눈에는 태림이 그 옷을 고른 것에 의외라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태림이 고른 옷이 마음에 드는지 다시 그 옷을 입겠다면서 들어갔다.
"창립파티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
"네."
아버지는 단 한번도 엄마와 그녀를 중요한 파티나 작은 파티나 데리고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태림은 시어머니가 수선을 피우는 게 마냥 신기해 보이기만 했다.
"너도 가고 싶지?"
책을 읽는 세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관심이 전혀 없는 듯이 보였다.
"전...."
"무슨 말씀이세요. 저 아이가 가면 집안 망신이라고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정말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시어머니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코에서 불만 나오면 완전히 용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태림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 이 애들 결혼을 아는 건 극소수인데, 태림이를 창립파티에 데리고 가봐요. 우리 집안이 무슨 꼴이 되겠으며, 세준의 얼굴은 뭐가 되겠어요. 무슨 실수를 했기에 어린애를 그것도 쉬 쉬 숨기며 결혼을 했냐며 사람들이 속닥거리지 않겠냐구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 식구 아니오."
시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이 한심하다는 한 숨을 내쉬며 자신의 주장을 쉬지도 않고 피력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시기에 태림이가 알려지면 투자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 저 애 아버지가 어디 보통 사람 이여야지요."
"여보."
시아버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호통을 쳤고, 그때까지 기세 등등하던 시어머니가 처음으로 수그러드는 모습을 보였다.
태림은 자신 때문에 시부모님들이 작은 말다툼을 할 때마다 심장이 쪼그려 드는 것 같은 긴장감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숨을 고르느라 고생을 해야했다.
"우리가 왜 결혼 사실을 숨겼는지 잊지 않으셨죠. 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런 대외적인 행사에 나가도 늦지 않다고요."
시아버지는 화가 많이 났는지 주먹을 꼭 주며 손잡이를 내리 쳤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시도하지 않았다.
태림은 자신을 애물단지 이냥, 집안에 구석에 쳐 박혀 있는 집안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가구를 이야기하듯이 말하는 시어머니의 말이 상처가 되었지만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건 태림이도 마찬가 지었다. 지금 알려져 봤자 학교 생활에 전혀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태림은 시어머니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집안이 조용할..."
"저희는 그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태림은 세준이 어머니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도망쳤다. 태림은 어떤 종류를 망라하고 싸움이라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웬만하면 싸움을 하지 않았고, 싸움을 구경하지도 않았다. 두 분만 남겨 놓고 올라가기가 미안스러웠지만 시부모님의 싸움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다는 걸 몇 달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에 뒤돌아보지 않았다. 작은 싸움이어도 지켜보고 있는 것에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왜 그렇게 긴장을 하는 거야. 저러다가 마시는데."
태림은 그의 말에 세준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알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왜 그러는지 자신의 감정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전 그냥 싸움이 싫어요."
"그래도 싸워야 할 때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해. 세상은 네가 양보한다고 해서 널 아껴주거나 이해해 주지 않아."
세준이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것에 태림은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네."
"잘 자라. 난 할 일이 좀 있어."
세준은 방으로 들어가는 힘없는 태림이를 보면서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태림은 조금의 큰소리에도 긴장을 했고, 손대면 금방이라도 뛰어오르려는 고무줄 마냥 신경이 팽팽해져 있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확인 할 길은 없지만 능구렁이 같은 김진만 사장의 영향인 것이 분명했다.
드디어 창립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피부 관리와 머리를 한다면서 일찍 집을 나섰고, 세준은 할 일이 있다며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태림은 창립파티의 전주곡 같은 설렘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을 거야. 다들 늦게 들어 올 테니 먼 저자."
"네. 잘 다녀오세요."
태림은 차에서 내려 평상시처럼 그냥 가지 않고 그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태림아."
"엄마야."
태림은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치는 손에 놀라 소리를 쳤다.
"미안해. 많이 놀랐니?"
"괜찮아.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
이현은 일찍 온다고 오는 날도 거의 1교시가 끝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찍 이현을 본다는 건 가뭄에 콩 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이 근처에 촬영이 있었거든. 하 암, 잠 온다. 나 한숨도 못 잤어."
"정말?"
"응. 정말 짜증나는 거 있지 상대 연기자가 자꾸 NG를 내지 뭐니. 덕분에 날 꼬빡 셌다니까. 이그∼! 생각할수록 화나내. 이왕 못 잔 김에 혹시나 니 얼굴 볼 수 있을 까해서 기다렸는데 보람 있었네."
누군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이 이렇게 감동을 주는 것인지 처음 안 태림은 아침의 차가운 바람과는 상관없이 눈이 시려왔다.
"그럼 학교에는 못 들어오겠네?"
"응. 사실 5분만 더 기다리다 가려고 했거든. 얼굴 봤으니까 됐다. 어서 들어가 내 몫까지 공부 열심히 해. 안녕."
"안녕! 현아."
태림은 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는 이현에게 손을 흔드는 걸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흔들어 주었다.
"유정이 너 얼굴이 좋아 보인다."
"정말? 사실은 어제 마사지했거든 오늘 어디 갈 때가 있어서, 정말 중요한데거든. 내가 갔다와서 너한테 먼저 말해 줄게."
태림은 유정이 어디에 가는지 알만 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태림이 알기론 유정의 집에서 세준의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유정이 어디에 간다고 말하지 않아도 목적지를 알 수 있었다.
유정이 저렇게 설레어 하는 걸 보자 태림은 처음으로 창립파티라는 것에 참여해 보고 싶었고, 세준과 손을 잡고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왈츠를 처보고 싶었지만 그건 그녀의 백일몽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태림이 집안의 경조사에 빠지게 되는 것이 마음에 마냥 들지만 않은 자신의 속내에 짜증을 내면서도 속속들이 도착하는 사람들을 맞이해 얼굴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의 감사의 말과 초대된 정치가의 축하사가 이어지자 드디어 파티는 절정으로 오르고 있었다. 무성그룹은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전자회사 중 하나였고, 싼 인건비와 저렴한 가격으로 해외에도 수출을 하고 있는 건실한 기업이었다. 그랬기에 오늘 이 파티에는 저명한 사회 인사들과 정치인들 기업인들이 모여들었고, 이 창립파티에 초대받기 위해 많을 돈을 쓰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정말 축하하네. 정 서방."
"오셨습니까."
세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김진만 사장이 세준의 회사의 창립 파티에 온 것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그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의 딸인 태림이와 혼인을 한 상태이니까. 하지만 김진만 사장이 자신의 아내가 아닌 혜란이를 파트너로 데리고 온 것은 세준과 그의 부모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장모님과 태림을 한 인격체로써 완전히 무시한다는 소리였다.
혜란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서양적인 이목구비와 그 못잖은 굴곡이 아름다운 몸매도 여전했고, 쌍꺼풀이 크게 된 눈은 그녀의 야심적인 성격과는 전혀 다르게 순수함 빛을 뿜어내 주위의 남자들을 홀리고 있었다.
좀 전에 먹었던 술들이 한꺼번에 확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직도 혜란이 김진만 사장을 만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우리 사위 잘 지냈다. 어찌 결혼하고 한번도 처가에 올 생각을 하지 않는가? 우리 집사람이 태림이를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데. 한번 꼭 오게."
"네."
집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이 대외적인 자리에 아내가 아닌 첩실을 데리고 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네.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혜란은 이미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신경도 쓰지 않고 김진만 사장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요즘 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설마 그 소문의 주인공이 혜란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소문은 김진만 사장이 요즘 한 젊은 여자를 사귀고 있는데, 그 여자가 결혼을 원한다면서 안방자리를 원한다는 거였고, 김진만 사장도 그 말을 별로 싫어하지 않더라는 소문이었다.
세준은 장모님과 태림이 그 소문을 듣지 않았기를 바랐다.
"세준씨 정말 멋있어 졌네요."
세준은 혜란을 눈을 보자 욱하는 것이 치미는 걸 참느라고 고생해야 했다. 그녀의 눈빛은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니라 정욕의 대상을 보는 것처럼 농도가 짙어져 있었다. 다행히 김진만 사장이 그 때 다른 곳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때는 왜 혜란의 눈빛이 욕망과 허영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한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꼬마 사모님은 안 오셨나봐요?"
혜란의 눈가는 웃음으로 가늘어졌다. 하지만 김진만 사장도 이번만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태림이는 집에 있겠지?"
혜란은 그의 말에 기분 상해하는 것 같았지만 금세 표정을 바꾸더니 다시 그의 팔에 뱀처럼 엉키어 들었다.
"네.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아직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김사장은 그런 세준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혜란을 대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다.
"그럼. 그래야지! 우리도 조금 있다가 갈 생각이네. 우리 여기서 작별인사를 하지."
김진만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처음과는 다른 게 상당히 많이 굳어져 있었다. 세준은 가끔 아버지의 그 표정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사랑을 해서 결혼한 줄 몰랐다면 아버지가 무시당하는 김진만 사장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아버지의 표정은 미묘했다.
"저 인간들은 여기에 왜 왔다니?"
어머니는 혜란이를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이 확실했다. 기분 나빠했지만 아버지처럼 굳어있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뭔지 알고 싶었지만 계속 밀려드는 축하 행렬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회장님, 사모님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어머나. 윤 사장님 오셨군요. 우리 유정이 갈수록 예뻐지는 구나. 이제는 완전히 숙녀가 되었는걸. 세준아 유정이 기억하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준은 자신의 꼬마적 보았던 소녀에게 눈길을 한번 줄뿐이었지만 그의 눈길 한번에 소녀는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다.
세준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른들의 옷을 입은 소녀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 여자아이를 보자 집에 있는 태림이 잠시 떠올라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효과만 나고 말았다.
태림은 식구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면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주말 밤이어서 인지 영화를 했는데, 이현이가 주인공으로 나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과 재력을 동시에 차지하는 억척 소녀를 이야기한 영화였다.
"아직 안자고 있었니?"
"네. 다녀오셨어요."
시어머니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태림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그래. 세준이가 오려면 좀 멀었으니까 너 먼저 자거라."
"예."
태림은 시부모님이 그들의 방으로 들어가자 이층으로 올라왔지만 잠이 들지는 않았다. 말뿐인 부부생활이지만 세준을 기다려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거실에 앉아 책을 집어 들었다.
시어머니의 말대로 세준은 열두시가 넘어도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태림의 입에서는 연신 하품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냥 자버릴까?"
하지만 지금껏 기다린 시간과 정성이 아까워 태림은 방으로 올라가 책을 한 권 꺼내어 들었다.
세준은 자신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 빛을 보고 오늘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에 처음으로 진정한 미소를 지었다.
태림이 불을 끄지 않고 잠든 모양인 것 같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위해 불을 켜 놓은 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아직도 않자고 뭐하고 있어? 설마 나 기다린 거야."
세준은 방문을 열다 말고 소파에 이불을 덮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태림이 자신을 반기자 놀라 그 자리에 잠시 멈춰 꼭 태림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네. 잠도 오지 않고 해서요."
세준의 눈썹이 아치모양으로 변했지만 그녀가 기다린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는지 처음으로 태림에게 상의를 벗어 건네어 주고 욕실로 향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태림은 세준이 샤워를 하러 들어가자 잠을 자기 위해 소파에 누었다. 그가 샤워하는 소리가 어느 정도 귀에 익자 태림은 서서히 잠이 들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전화통화로 엄마가 아버지에게 별다르게 시달리고 있지 않다는 걸 엄마와 아주머니에게서 확인해서 인지 예전보다는 잠드는데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항상 두려움에 떨었던 삶을 살았기에 잠을 깊이 못 들기도 했지만 잠을 금방 잠들 수도 없었다.
샤워를 맞추고 나온 세준은 달빛이 곱게 머무는 태림의 얼굴에서 한동안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서도 그저 결혼이라는 이야기만을 들었을 때도 싫었던 어린 그녀가 언젠가부터 그의 마음속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는지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마음의 따뜻해졌다.
만약 태림이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혜란과 김진만 사장을 만났더라면 세준은 분명 태림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 한마디쯤은 아무렇지 않게 꺼내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 소문을 그녀가 듣지 않기를 바라고 기도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그의 걱정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어둠과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