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50화

피바다200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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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라나는 설무랑은 문왕(文王)인 아버지를 유난히 닮아가고 있었다. 아들은 학문적 호기심이 왕성해서 책에 파묻혀 지내길 좋아했고, 깊은 철학적 사색 끝에 내던지는 질문은 지국천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설무랑은 어디에 내 놔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지국천왕의 최고 기쁨이었다.

  설무랑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수 없으리만치 심성이 고왔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소예의 거친 장난에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약한 마음을 가진 설무랑이 천계를 멸할 흉성이라는 것을 지국천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설무랑은 지국천 왕가의 자랑이었고 문성(文聖)으로써 천계의 기대주였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져갈 수록 지국천의 고통도 심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스승으로써 관지 곁에 있으며 관지의 됨됨이를 파악했다. 관지는 학문적 이해가 빠르고 예의가 바르며 무예 연마에도 열심히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식들에게조차 잔정이 없는 천제의 사랑을 받는 몇 안되는 황자 중 하나가 되었다. 무엇 하나 빠질 데 없는 황자로 자라는 관지를 보며 지국천은 더욱 괴로워하였다.

  때로 지국천은 관지와 설무랑을 한 자리에 두고 가르쳤다. 둘은 좋은 친구이며 경쟁자가 되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학문에 있어서는 설무랑이 늘 관지를 앞섰다. 지국천은 왠지 그런 상황에 조바심을 느꼈다. 그는 마음껏 아들의 영특함을 칭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계에 대대적인 파장을 일으킨 사건 하나가 터졌다.  

  천제는 어디서 어떤 소식을 들었는지 노발대발하여 제 1황자 후강을 찾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후강이 천제 앞에 끌려왔을 때는 오라에 묶인 여자 하나가 함께였다. 천계의 대신들은 그 장면에 아연실색했다. 그녀는 인간의 무녀(巫女)였던 것이다. 그녀는 후강에게서 신력을 부여받아 예언을 하는 신전의 무녀였다.

  후강은 그 때  천황태자였다. 차기 천제의 보위에 오를 후계자인 셈이었다. 천제는 유난히 애착을 가졌던 장자 후강을 인간 무녀와의 염문따위로 포기할 수 없었는지 인간 무녀만을 제거하고 모든 걸 덮어두려고 하였지만, 후강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밝혔다.

  천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고 그 자리에서 인간 무녀의 목을 치려고 하였다. 하지만 천제의 명을 받아 그녀를 치기위해 달려드는 황궁보위대를 막아서며 후강은 궁내에서 칼을 뽑았다. 그는 그녀를 지키기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고자하는 의지로 가득차 있었다. 천제는 그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믿었던 태자의 변심에 그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하시면 드리겠습니다. 이 여자 하나만 허락해주십시오."

  하며 후강은 황태자를 상징하는 옥패를 바닥에 버렸다. 천제는 아들의 눈에서 그의 진심을 읽어냈다. 후강은 모든 것을 그녀에게 걸고 있었다. 그녀를 허락하지 않으면 후강에게는 삶의 무의미할 것이었다. 대신들은 입을 모아 반대했지만 천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후강은 당장이라도 칼에 피를 묻힐 듯한 기세였고 천제의 마음은 흔들렸다.

  " 인간의 무녀야. 너에게 묻겠다. 너 역시 제 1황자를 위해서라면 정녕 모든 것을 버리겠느냐?"

 인간의 무녀는 한낱 인간의 몸으로 천계에 올라 천제를 대면하는 중압감에 눌려 제 정신이 아닌 듯 했지만 그 말에 대한 답은 확고했다. 그녀는 순수한 눈물을 쏟아내며 말했다.

  " 예...예.. 천제 전하..이름없는 풀 한포기가 되라하시면 그리하겠습니다. 다만 후강님 곁에서 바라만 보게 해 주시어요..."

  천제는 다시 침묵했다. 

  ' 후강아...너는 그리 하거라. 너만은 네가 목숨만치 사랑하는 여인을 가지거라. 내가 결코 하지 못했던 일을 너는 하여라.'

  천제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을 삼키고 선언했다.

  " 제 1황자 후강의 천황태자 보위를 박탈한다. 동시에 후강이 가진 군통솔권과 소유한 모든 영지를 회수한다. 인간의 무녀는 그 더러운 혀로 천상의 이야기를 인간에게 전할 수 있는 바, 그 목소리를 앗으라. 그리고 인간의 기억을 모두 지우겠다. 후강과 인간의 무녀는 평민 속에서 살리라."

  천제의 선언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대신들은 불만의 소리를 높였지만 천제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계의 여인을 사랑했던 자신과 인간을 사랑한 아들 후강. 그는 질긴 피의 인연을 느꼈다.

   그리하여 후강은 인간의 무녀인 만(滿)과 평민 부락에 숨어 살며 귀족으로써의 모든 영광에서 멀어졌다. 후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만을 얻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은 듯했다. 만은 지독한 고통을 겪으며 목소리를 빼앗기고 다시는 노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을 모두 지움으로써 가족과 인간계에서의 추억을 모두 잃었다. 하지만, 성수(聖水)를 마시고 천상인이 되어 후강과 혼인을 함으로써 그녀는 모든 것을 보상받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더한 고통이라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천제는 둘을 다시 황성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비어있던 천황태자의 자리에 관지가 등극하게 된 것은 제 2차 마계대전 덕분이었다. 후강의 폐위 후 천제의 관심은 자연 관지에게 쏠려있었는데, 마침 관지가 마계대전에서 공을 세워 천황태자에 책봉된 것이었다. 지국천이 예언을 따를 결심을 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는 관지가 천황태자로써 후대 천제가 될 것이 확실해지자, 자신의 아들이 반역자가 되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지국천은 왕비에게 혜선의 방문과 예언을 알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왕비는 지국천의 결심에 실신했다. 그녀는 깨어나 지국천에게 매달렸지만 지국천은 완고했다. 그리고 그는 왕비의 극단적인 자살 미수에도 불구하고 설무랑을 불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은 천진한 얼굴로 지국천왕의 부름에 공손히 나타났다.

  "....왕자"

  지국천은 겨우 목소리를 끌어냈다.

  " 예, 아버님. 말씀하십시오."

  " ............."

  지국천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아들의 얼굴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설무랑은 한 번도 본 적없는 아버지의 깊은 시선이 창피한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지국천은 그 미소에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아들이 아닌 천계를 택한 후였다. 물러날 길이 없었다.

  " 훌륭한 왕이란 문과 무를 겸비해야 하느니라."

  " 알고 있사옵니다."

  지국천은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 아비는 부족하여 무예에 능하지 못하였다. 나는 왕자 또한 내 전철을 밟아 백성에게 부족한 왕이 될까 심히 염려스럽구나. 선대 왕들께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야."

  설무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신감을 잃은 목소리로,

  "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옵니다. 소자 무예를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

  지국천은 숨을 골랐다. 그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렸다.

  " 그래서 내 너를 훌륭한 스승에게 보내어 무예를 익히게끔 하고자 한다. 먼 길을 가야할터이다. 받들겠느냐?"

  설무랑은 아버지의 제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왕궁을 떠나는 건 싫은 일이었다. 게다가 부모와 친구들을 떠나 흥미도 없는 무예에 모든 걸 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훌륭한 왕이 되려면 참아내야 한다는 걸 그는 알았다. 설무랑은 좋은 왕이 되고 싶었다.

  " 그리 하겠습니다."

  설무랑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국천은 왕좌에서 내려와 아들을 힘껏 안았다.그것이 지국천의 마지막 사랑표현이었다.

  " 내일 당장 떠나라."

  하루의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어차피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지(死地)로 가는 데 준비란 필요가 없었다. 불안해 하는 왕비에게는 설무랑을 데리고 사냥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지국천은 빼어난 장수 한 명만 대동한 채, 홀로 설무랑을 스승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승이 아니었다.

 

  " 어디로 가셨습니까?"

  제공은 침을 삼키며 지국천에게 물었다. 지국천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져 있었다.

  " 수라계........"

  지국천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고 제공의 얼굴에 공포가 스쳤다.

  " 나는 가는 길에 설무랑의 식사에 약을 타 그를 잠재웠습니다. 그리고 그를 수라계의 검은 숲속에 던져버리고 돌아왔지요. 나중에 장수가 말하길, 차마 그냥 올 수 없어 설무랑의 품에 단도 하나를 숨겨주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그것으로 설무랑이 살아남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요. 설무랑은 무예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 하지만........결국 살아남았군요."

  둘은 침묵했다. 단도 하나를 품고 수라계의 숲 속에 던져진 학문을 사랑했던 소년. 피와 살육과 공포만이 감도는 수라계의 식신들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남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설무랑의 가슴에 남은 건 버려진데 대한 상상할 수 없이 강한 분노와 살육을 헤쳐가며 키운 놀라운 살육 능력이란 것을.

  충격적인 과거사에 제공도 감당하기 힘든 듯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지만 제공은 냉정해지려고 노력하였다. 베일에 가려진 수라계에서의 비밀을 알아내는 열쇠는 이제 하나 뿐이었다. 바로 설무랑 본인이었다.    

 

===3월 1일이 제 생일입니다~축하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