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림아! 태림아!" 태림은 유정의 들뜬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자신의 자리로 뛰어오는 유정을 바라보았다. "뭐 때문에 기분이 그렇게 들떠 있어?" "나 어제 무성전자 창립파티에 갔다가 정훈희 언니도 보고 남진 오빠도 봤거든. 그 두 사람 정말 멋있더라. 그런데 그 보다 더 좋은 건 정말로 마음에 드는 남자 발견했어." 쿵 태림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정에게 들릴 까봐 가슴 위에 손을 잠시 올려 둘 정도로 놀랐다. 그녀는 제발 유정이 반한 남자가 세준이 아니기를 바랬다. 태림이 양보할 수 있는 거라면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남편을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군데?" 태림은 목소리는 조심스럽다 못해 거의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무성전자 사장님. 너무 멋있는 것 있지. 넌 한번도 그런 멋있는 남자 본적 없을 꺼야." 걱정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태림의 얼굴을 사색이 되었지만 자기 기분에 푹 빠져 있는 유정은 태림의 기분을 전혀 눈치 못챘다. "야! 어떻게 생긴 걸로 사람을 파악하니?" 태림은 조금이나마 유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을 해보았지만 이미 유정의 마음에는 세준으로 가득 차 버린 것 같았다. "난 그 오빠하고 이야기 해봤거든. 목소리도 어쩜 그렇게 멋있니. 그렇게 굵으면서도 저음의 목소리는 성우들이나 내는 줄 알았는데, 그런 목소리 가진 남자하고 이야기 하니까 여기가 막 떨리는 것 있지." 유정은 오른 손을 왼쪽 손바닥위로 올려놓았다. "목소리만 좋으면 뭐해. 무뚝뚝하고 냉정한 사람을." 아차! 태림의 실수였다. 유정의 마음을 돌려놓는다는 생각에 그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유정의 눈빛은 변해있었다. 마치 자신의 남자를 태림이 빼앗아 가는 것처럼 쳐다보자 태림은 부담스럽고 걱정이 되었다. "어! 그게.. 있지. 우리 아버지랑 아시는 분이잖아. 그래서 이야기를 좀 들었었거든." "그래. 어머 넌 좋겠다. 그런 말도 듣고, 부럽다. 얘." 그런데 유정의 눈빛이 이번엔 태림을 피하고 있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 그래." "모르겠다. 너도 알아야겠지! 그래야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충격을 덜 받을 테니까." 도통 유정의 말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벌써 세준과 무슨 일을 벌렸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태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제 사실은 너희아버지 봤어." 태림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태림이 걱정하는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버지가 세준의 회사 창립파티에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어떻다는 말이고 충격을 왜 받아야 하는지 유정이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기다리면서 유정의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파트너가 웬 젊은 여자더라. 혹시 너희 친척언니니?" 유정은 태림이 받을 충격을 줄여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태림은 그 여자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몇 전 년부터 만나고 있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그 여자와 오랫동안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보통은 오래가야 한 달인 아버지가 그 여자와는 몇 년을 만나 오는 게 항상 불안했다. 그런데 드디어 태림이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 여자가 드디어 엄마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젊은 여자가 아버지와 결혼을 하던 말던 상관없었다. 사실은 차라리 그 여자와 결혼해버리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와 태림이 그 집을 나온 후에나 아버지와 그 여자가 속내를 밝히기를 바랬는데, 그 마저도 태림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니?" 어느 틈에 이현이 태림의 옆에 와 있었다. 이현은 태림과 친해지면서 늦더라도 학교에 오려고 노력했고, 그런 이현을 유정은 좋아하지를 않았다. "어." 쓰러질 것 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오면서도 아버지말고는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 한번 준 적이 없는 엄마였다. 엄마가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얼마나 많은 충격을 받을지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려 괜찮을 수가 없었다. 이현이 거만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에 앉자 유정은 아니꼽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자기의 자리로 가버렸다. "왜 그래. 저 애가 무슨 말을 했기에 니 얼굴이 창백한 거야?" 이현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태림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어디 가려고 곧 수업 종칠텐데." "한 시간쯤 빠진다고 해서 너 잡아먹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태림은 이현이 이끄는 데로 계단을 힘없는 발걸음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왜?" "여기 같이 이야기하기 좋은 데가 어디에 있니. 그 우스꽝스러운 오 공주파도 수업시간에는 잘 오지 않는 데가 여기잖아. 자! 말해봐.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태림은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고, 이현은 그런 그녀가 안정이 될 때까지 안아주었다. 태림은 조금 진정이 되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우리 엄만 그렇게 맞고 또 맞아도 우리 아빠하고 우리들 밖에 모르고 살았어. 혹시라도 자기가 떠나면 언니하고 내가 맞기라도 할까봐 집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사셨는데, 왜 그런 일까지 당해야 되는 거니?" 이현은 울먹거리는 태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일년도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있으면 엄마 데리고 나와서 우리 모녀끼리 살수도 있는데, 왜 하필 지금인지 모르겠어. 왜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는 걸까? 현아 나 너무 속상해. 속상해서 미쳐버릴 것 만 같아." 이현은 현명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림은 그녀의 침묵에 고마움을 느끼며 오랜만에 마음껏 울었다. 지금은 어색한 몇 마디 보다 그냥 태림의 쌓인 아픔을 들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이 되었다.
세준은 태림이 창립파티에 가지 못하게 된 뒤로 얼굴 표정이 좋지 않자 영 마음이 불편했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책상에 앉아있는 그녀의 쳐진 어깨가 마음에 걸려서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지난번 시험기간 이후에 세준은 태림이 언제든지 공부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방 한쪽에 책상과 성능이 좋은 스탠드를 설치해 주었었다. "다음에는 같이 가자." 하지만 태림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그를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음 창립 파티에는 너도 같이 가자니까." "네?" 태림은 세준이 약간 목소리를 높이자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세준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다음 파티.... 잠깐 네 얼굴 왜 그래? 울었니?" 태림은 아직도 조금 부어 있는 눈 커플을 손으로 가렸지만 세준의 날카로운 눈매를 피할 수는 없었다. 세준은 가까이 오더니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태림이 뒤로 돌지 못하게 의자를 한 손으로 붙잡고 그녀의 턱을 잡고 위로 치켜올렸다. "왜 울었어?" "저기... 그게..." 마땅히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어 식은 땀 까지 등에서 날 정도였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는 그런 시시껄렁한 변명은 하지말고 솔직하게 말해." 그녀는 그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음이 뜨끔했지만 부끄러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행이 자신의 아버지를 보지 않은 것 같았다. 만약 보았다면 그가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다. "친구랑 싸웠거든요." "그 나이에 친구하고 싸웠다고 우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하지만 세준은 여자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특이나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생의 심리를 알 턱이 없는 세준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믿어주는 눈치였다. "친한 친구거든요. 너무 속상해서 조금 울었어요." "다음부터는 그딴 일로 울지마. 나 먼저 자니까 공부하려거든 불켜고 해도 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책에 떠오르는 거라고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얼굴과 그 옆에 서 있던 여자의 비웃음 가득한 얼굴 그리고 상처받은 엄마의 얼굴이 계속 스쳐 지나가서 안정을 취할 수가 없었다. 태림의 아버지는 도덕관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여진언니가 죽고 1년이 지난 그 날에도 그 여자를 집으로 불려들여 가족들이 가슴에 비수를 박았던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혜란이라는 여자도 마찬 가지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자신이 온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고, 꼭 그 집이 제집인 것 마냥 행동하고 다녔었다. 그 때 태림이 조금만 더 용기 있던 아이였더라면 방에 들어가 숨는 대신 엄마의 옆에서 방패가 되어주었을 테지만 그 때의 태림은 약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용기가 있어도 그럴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걸 생각하자 다시 눈물이 눈앞을 가리더니 책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세준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대해왔던 태림이 마음 상한 얼굴을 하고 있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거렸기 때문이었다. 태림이 자신의 아버지가 혜란을 데리고 창립파티에 참석한지 당연히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부은 얼굴 보자 한 순간 가슴이 철렁했었다. 뚝뚝뚝 세준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에 그는 그 소리가 욕실에서 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그 소리는 태림이 있는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비가 오나?' 그런데 울고 나면 으레 것 나는 코가 훌쩍이는 소리가 나더니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태림이 또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들었던 소리는 눈물이 종이 위로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였다. 당장에 일어나 우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만한 나이에는 굴러가는 낙엽을 보고도 웃는다고 했다. 지금 웃고 있지는 않지만 태림의 말대로 친구와 심하게 싸워 속상해서 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을 당장에 일어나서 태림을 안아주고 싶어 한동안 잠을 들 수가 없었다.
태림은 세준의 차가 보이지 않고서야 자신이 도시락 가방을 놓고 내렸다는 걸 알아챘다. 창립 파티 때 있었던 일을 들은 후로는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다행이 시아버지가 주시는 두둑한 용돈 덕분에 굶은 일은 없겠지만, 차안에 있는 도시락 가방을 보고 세준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걱정되자 한숨이 절로 흘러 나왔다. 땅에 떨어진 동전이라도 찾는 사람처럼 고개를 처박고 걷던 태림은 맨발에 구두를 신고 있는 남자의 발을 보고 비켜서려고 했지만 여러차례 그녀를 따라 움직이는 남자의 걸음에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태림의 키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태림은 멍하게 풀린 남자의 눈빛을 마주 볼 수 있었고, 순간 바바리를 입고 맨 다리를 내놓고 다니는 남자가 친구들이 말하는 바바리 맨이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남자는 숙련이 된 빠른 동작으로 태림이 눈을 채 감기도 전에 옷자락을 펼쳤다. 퍽 "으윽∼∼." "넌 이럴 땐 조용하구나. 내가 벗고 있을 때는 지붕이 날라 갈 정도로 소리를 치더니." 태림은 자신의 귀에 작게 속삭이는 세준의 목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가 여전히 옷자락을 펼치고 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땅에 널브러져 있는 바바리 맨 때문에 다시 눈을 감았다. "야! 너 이 학교에 다시 나타나면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릴 줄 알아. 어서 꺼져." 세준의 음울한 협박조의 목소리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위기감을 느낀 바바리 맨은 옷을 추스를 정신도 없이 줄행랑을 놓았다. "저런 변태 같은 자식들이 정말로 있잖아. 눈떠, 갔다." 태림이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세준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눈만 감으면 어떻게 해. 도망을 치던가. 그런 자식들이 좋아하는 악이라도 지르던가. 아니면 거기를 확 쳐버리던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저... 그게...." 세준은 더듬거리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태림의 대답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손에 도시락 가방을 쥐어 주었다. "다음부터는 가져다 주지 않을 거니까. 잘 챙겨, 그 나이에 정신이 그렇게 없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꺼야." 하지만 태림은 아직도 바바리 맨 때문에 받은 충격과 세준이 그녀를 위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멍해 있었고, 세준이 차를 타고 떠나려는 순간에 겨우 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태림아! 괜찮아?" 태림 처럼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이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응." 친구들은 놀라서 손이 차가워진 태림의 손을 주물럭거리며 혈액순환을 도왔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친구들의 시선은 태림이 아닌 세준이 떠난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 어.. 저기... 사촌오빠야." 사촌 오빠라는 말에 풋내기 아가씨들은 자신들의 손을 맞잡으며 꼭 자신이 구출된 공주 마냥 들떠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정말 멋있다. 내 생전에 그렇게 멋진 사람은 처음 봐." "나두, 어쩜 그렇게 싸움을 잘 할 수가 있니." 그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하지만 그가 행사한 폭력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폭력이라는 걸 인정해야만했다. "바바리 맨 그 놈 한방에 넘어가더라." 친구들은 놀라서 정신이 없는 태림을 양쪽에서 잡고 가면서도 세준의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태림은 그런 친구들의 틈 사이에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안타까워하며 다시금 자신과 엄마의 앞날을 걱정해야만 했다. "너 괜찮아? 애들이 그러는데 바바리 맨 봤다면서." 현아와 유정은 태림을 걱정했고, 다른 친구들도 걱정을 했지만 사실 그들의 관심은 본적이 없는 남자의 나체와 태림을 구해준 세준에게 가 있었다. 그런 친구들에게 바바리 맨 말고 다른 남자의 나체를 본적이 있다고 말하면 그들이 뭐라고 할까 하는 얄궂은 궁금증이 떠올랐지만 태림은 그 말을 옮길 용기는 없었다. "얘. 네 사촌오빠 정말로 멋있다는 소문에 자자하더라. 1학년 2학년 애들까지 난리야." -내 남편이야. 이 말도 그녀의 입안에서만 맴도는 말이었다. 그 날 하루 내내 세준의 얼굴과 귓가에 스쳤던 그의 입김이 잊혀지지가 않아 여러 번 귓가를 만질 정도로 태림은 붕 떠있었다. 이런 게......? 사랑? 태림은 자신의 자각에 놀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뒤에서 따라오던 친구가 자신의 옷자락에 물을 뿌릴 뻔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넋이 났다. 사랑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그저 처음 해보는 남자와의 생활과 누군가에게 속해있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엄마의 걱정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정신이 팔려 그런 감정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사랑이란 건 말이야, 아무도 모르게 특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옆에 와 있는 거야- 언제가 한 친구가 연애 소설을 한 권 일고 친구들을 앉혀 놓고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때는 그런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지만 자신이 사랑이란 걸 겪고 나니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애련{여섯번째}
"태림아! 태림아!"
태림은 유정의 들뜬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자신의 자리로 뛰어오는 유정을 바라보았다.
"뭐 때문에 기분이 그렇게 들떠 있어?"
"나 어제 무성전자 창립파티에 갔다가 정훈희 언니도 보고 남진 오빠도 봤거든. 그 두 사람 정말 멋있더라. 그런데 그 보다 더 좋은 건 정말로 마음에 드는 남자 발견했어."
쿵
태림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정에게 들릴 까봐 가슴 위에 손을 잠시 올려 둘 정도로 놀랐다. 그녀는 제발 유정이 반한 남자가 세준이 아니기를 바랬다. 태림이 양보할 수 있는 거라면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남편을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군데?"
태림은 목소리는 조심스럽다 못해 거의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무성전자 사장님. 너무 멋있는 것 있지. 넌 한번도 그런 멋있는 남자 본적 없을 꺼야."
걱정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태림의 얼굴을 사색이 되었지만 자기 기분에 푹 빠져 있는 유정은 태림의 기분을 전혀 눈치 못챘다.
"야! 어떻게 생긴 걸로 사람을 파악하니?"
태림은 조금이나마 유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을 해보았지만 이미 유정의 마음에는 세준으로 가득 차 버린 것 같았다.
"난 그 오빠하고 이야기 해봤거든. 목소리도 어쩜 그렇게 멋있니. 그렇게 굵으면서도 저음의 목소리는 성우들이나 내는 줄 알았는데, 그런 목소리 가진 남자하고 이야기 하니까 여기가 막 떨리는 것 있지."
유정은 오른 손을 왼쪽 손바닥위로 올려놓았다.
"목소리만 좋으면 뭐해. 무뚝뚝하고 냉정한 사람을."
아차!
태림의 실수였다. 유정의 마음을 돌려놓는다는 생각에 그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유정의 눈빛은 변해있었다. 마치 자신의 남자를 태림이 빼앗아 가는 것처럼 쳐다보자 태림은 부담스럽고 걱정이 되었다.
"어! 그게.. 있지. 우리 아버지랑 아시는 분이잖아. 그래서 이야기를 좀 들었었거든."
"그래. 어머 넌 좋겠다. 그런 말도 듣고, 부럽다. 얘."
그런데 유정의 눈빛이 이번엔 태림을 피하고 있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 그래."
"모르겠다. 너도 알아야겠지! 그래야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충격을 덜 받을 테니까."
도통 유정의 말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벌써 세준과 무슨 일을 벌렸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태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제 사실은 너희아버지 봤어."
태림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태림이 걱정하는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버지가 세준의 회사 창립파티에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어떻다는 말이고 충격을 왜 받아야 하는지 유정이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기다리면서 유정의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파트너가 웬 젊은 여자더라. 혹시 너희 친척언니니?"
유정은 태림이 받을 충격을 줄여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태림은 그 여자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몇 전 년부터 만나고 있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그 여자와 오랫동안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보통은 오래가야 한 달인 아버지가 그 여자와는 몇 년을 만나 오는 게 항상 불안했다. 그런데 드디어 태림이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 여자가 드디어 엄마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젊은 여자가 아버지와 결혼을 하던 말던 상관없었다. 사실은 차라리 그 여자와 결혼해버리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와 태림이 그 집을 나온 후에나 아버지와 그 여자가 속내를 밝히기를 바랬는데, 그 마저도 태림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니?"
어느 틈에 이현이 태림의 옆에 와 있었다. 이현은 태림과 친해지면서 늦더라도 학교에 오려고 노력했고, 그런 이현을 유정은 좋아하지를 않았다.
"어."
쓰러질 것 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오면서도 아버지말고는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 한번 준 적이 없는 엄마였다. 엄마가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얼마나 많은 충격을 받을지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려 괜찮을 수가 없었다.
이현이 거만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에 앉자 유정은 아니꼽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자기의 자리로 가버렸다.
"왜 그래. 저 애가 무슨 말을 했기에 니 얼굴이 창백한 거야?"
이현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태림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어디 가려고 곧 수업 종칠텐데."
"한 시간쯤 빠진다고 해서 너 잡아먹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태림은 이현이 이끄는 데로 계단을 힘없는 발걸음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왜?"
"여기 같이 이야기하기 좋은 데가 어디에 있니. 그 우스꽝스러운 오 공주파도 수업시간에는 잘 오지 않는 데가 여기잖아. 자! 말해봐.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태림은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고, 이현은 그런 그녀가 안정이 될 때까지 안아주었다.
태림은 조금 진정이 되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우리 엄만 그렇게 맞고 또 맞아도 우리 아빠하고 우리들 밖에 모르고 살았어. 혹시라도 자기가 떠나면 언니하고 내가 맞기라도 할까봐 집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사셨는데, 왜 그런 일까지 당해야 되는 거니?"
이현은 울먹거리는 태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일년도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있으면 엄마 데리고 나와서 우리 모녀끼리 살수도 있는데, 왜 하필 지금인지 모르겠어. 왜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는 걸까? 현아 나 너무 속상해. 속상해서 미쳐버릴 것 만 같아."
이현은 현명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림은 그녀의 침묵에 고마움을 느끼며 오랜만에 마음껏 울었다. 지금은 어색한 몇 마디 보다 그냥 태림의 쌓인 아픔을 들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이 되었다.
세준은 태림이 창립파티에 가지 못하게 된 뒤로 얼굴 표정이 좋지 않자 영 마음이 불편했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책상에 앉아있는 그녀의 쳐진 어깨가 마음에 걸려서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지난번 시험기간 이후에 세준은 태림이 언제든지 공부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방 한쪽에 책상과 성능이 좋은 스탠드를 설치해 주었었다.
"다음에는 같이 가자."
하지만 태림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그를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음 창립 파티에는 너도 같이 가자니까."
"네?"
태림은 세준이 약간 목소리를 높이자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세준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다음 파티.... 잠깐 네 얼굴 왜 그래? 울었니?"
태림은 아직도 조금 부어 있는 눈 커플을 손으로 가렸지만 세준의 날카로운 눈매를 피할 수는 없었다. 세준은 가까이 오더니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태림이 뒤로 돌지 못하게 의자를 한 손으로 붙잡고 그녀의 턱을 잡고 위로 치켜올렸다.
"왜 울었어?"
"저기... 그게..."
마땅히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어 식은 땀 까지 등에서 날 정도였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는 그런 시시껄렁한 변명은 하지말고 솔직하게 말해."
그녀는 그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음이 뜨끔했지만 부끄러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행이 자신의 아버지를 보지 않은 것 같았다. 만약 보았다면 그가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다.
"친구랑 싸웠거든요."
"그 나이에 친구하고 싸웠다고 우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하지만 세준은 여자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특이나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생의 심리를 알 턱이 없는 세준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믿어주는 눈치였다.
"친한 친구거든요. 너무 속상해서 조금 울었어요."
"다음부터는 그딴 일로 울지마. 나 먼저 자니까 공부하려거든 불켜고 해도 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책에 떠오르는 거라고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얼굴과 그 옆에 서 있던 여자의 비웃음 가득한 얼굴 그리고 상처받은 엄마의 얼굴이 계속 스쳐 지나가서 안정을 취할 수가 없었다.
태림의 아버지는 도덕관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여진언니가 죽고 1년이 지난 그 날에도 그 여자를 집으로 불려들여 가족들이 가슴에 비수를 박았던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혜란이라는 여자도 마찬 가지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자신이 온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고, 꼭 그 집이 제집인 것 마냥 행동하고 다녔었다.
그 때 태림이 조금만 더 용기 있던 아이였더라면 방에 들어가 숨는 대신 엄마의 옆에서 방패가 되어주었을 테지만 그 때의 태림은 약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용기가 있어도 그럴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걸 생각하자 다시 눈물이 눈앞을 가리더니 책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세준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대해왔던 태림이 마음 상한 얼굴을 하고 있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거렸기 때문이었다.
태림이 자신의 아버지가 혜란을 데리고 창립파티에 참석한지 당연히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부은 얼굴 보자 한 순간 가슴이 철렁했었다.
뚝뚝뚝
세준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에 그는 그 소리가 욕실에서 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그 소리는 태림이 있는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비가 오나?'
그런데 울고 나면 으레 것 나는 코가 훌쩍이는 소리가 나더니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태림이 또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들었던 소리는 눈물이 종이 위로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였다.
당장에 일어나 우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만한 나이에는 굴러가는 낙엽을 보고도 웃는다고 했다. 지금 웃고 있지는 않지만 태림의 말대로 친구와 심하게 싸워 속상해서 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을 당장에 일어나서 태림을 안아주고 싶어 한동안 잠을 들 수가 없었다.
태림은 세준의 차가 보이지 않고서야 자신이 도시락 가방을 놓고 내렸다는 걸 알아챘다. 창립 파티 때 있었던 일을 들은 후로는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다행이 시아버지가 주시는 두둑한 용돈 덕분에 굶은 일은 없겠지만, 차안에 있는 도시락 가방을 보고 세준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걱정되자 한숨이 절로 흘러 나왔다.
땅에 떨어진 동전이라도 찾는 사람처럼 고개를 처박고 걷던 태림은 맨발에 구두를 신고 있는 남자의 발을 보고 비켜서려고 했지만 여러차례 그녀를 따라 움직이는 남자의 걸음에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태림의 키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태림은 멍하게 풀린 남자의 눈빛을 마주 볼 수 있었고, 순간 바바리를 입고 맨 다리를 내놓고 다니는 남자가 친구들이 말하는 바바리 맨이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남자는 숙련이 된 빠른 동작으로 태림이 눈을 채 감기도 전에 옷자락을 펼쳤다.
퍽
"으윽∼∼."
"넌 이럴 땐 조용하구나. 내가 벗고 있을 때는 지붕이 날라 갈 정도로 소리를 치더니."
태림은 자신의 귀에 작게 속삭이는 세준의 목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가 여전히 옷자락을 펼치고 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땅에 널브러져 있는 바바리 맨 때문에 다시 눈을 감았다.
"야! 너 이 학교에 다시 나타나면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릴 줄 알아. 어서 꺼져."
세준의 음울한 협박조의 목소리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위기감을 느낀 바바리 맨은 옷을 추스를 정신도 없이 줄행랑을 놓았다.
"저런 변태 같은 자식들이 정말로 있잖아. 눈떠, 갔다."
태림이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세준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눈만 감으면 어떻게 해. 도망을 치던가. 그런 자식들이 좋아하는 악이라도 지르던가. 아니면 거기를 확 쳐버리던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저... 그게...."
세준은 더듬거리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태림의 대답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손에 도시락 가방을 쥐어 주었다.
"다음부터는 가져다 주지 않을 거니까. 잘 챙겨, 그 나이에 정신이 그렇게 없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꺼야."
하지만 태림은 아직도 바바리 맨 때문에 받은 충격과 세준이 그녀를 위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멍해 있었고, 세준이 차를 타고 떠나려는 순간에 겨우 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태림아! 괜찮아?"
태림 처럼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이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응."
친구들은 놀라서 손이 차가워진 태림의 손을 주물럭거리며 혈액순환을 도왔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친구들의 시선은 태림이 아닌 세준이 떠난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 어.. 저기... 사촌오빠야."
사촌 오빠라는 말에 풋내기 아가씨들은 자신들의 손을 맞잡으며 꼭 자신이 구출된 공주 마냥 들떠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정말 멋있다. 내 생전에 그렇게 멋진 사람은 처음 봐."
"나두, 어쩜 그렇게 싸움을 잘 할 수가 있니."
그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하지만 그가 행사한 폭력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폭력이라는 걸 인정해야만했다.
"바바리 맨 그 놈 한방에 넘어가더라."
친구들은 놀라서 정신이 없는 태림을 양쪽에서 잡고 가면서도 세준의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태림은 그런 친구들의 틈 사이에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안타까워하며 다시금 자신과 엄마의 앞날을 걱정해야만 했다.
"너 괜찮아? 애들이 그러는데 바바리 맨 봤다면서."
현아와 유정은 태림을 걱정했고, 다른 친구들도 걱정을 했지만 사실 그들의 관심은 본적이 없는 남자의 나체와 태림을 구해준 세준에게 가 있었다.
그런 친구들에게 바바리 맨 말고 다른 남자의 나체를 본적이 있다고 말하면 그들이 뭐라고 할까 하는 얄궂은 궁금증이 떠올랐지만 태림은 그 말을 옮길 용기는 없었다.
"얘. 네 사촌오빠 정말로 멋있다는 소문에 자자하더라. 1학년 2학년 애들까지 난리야."
-내 남편이야.
이 말도 그녀의 입안에서만 맴도는 말이었다.
그 날 하루 내내 세준의 얼굴과 귓가에 스쳤던 그의 입김이 잊혀지지가 않아 여러 번 귓가를 만질 정도로 태림은 붕 떠있었다. 이런 게......?
사랑?
태림은 자신의 자각에 놀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뒤에서 따라오던 친구가 자신의 옷자락에 물을 뿌릴 뻔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넋이 났다.
사랑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그저 처음 해보는 남자와의 생활과 누군가에게 속해있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엄마의 걱정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정신이 팔려 그런 감정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사랑이란 건 말이야, 아무도 모르게 특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옆에 와 있는 거야-
언제가 한 친구가 연애 소설을 한 권 일고 친구들을 앉혀 놓고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때는 그런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지만 자신이 사랑이란 걸 겪고 나니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