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러브송 < 30 >

나비200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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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아까는 잘도 떠들더니 왜 말을 못하니? 니들 내 얘기한 거 아니었어? 삐쩍 마른 문대리 그거 내가 얘기 아니야? 빨리 말해봐! 내 얘기 아니었냐고 묻잖아!”

“······.”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얘기를 들었던 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화해 하고 있었지만 2차니 뭐니 이야기를 하던 여직원은 아니꼽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날 째려보고 있었다. 그 여직원이 나이가 더 많아 보였다.


“아무리 사람 안 듣는 데서 욕할 수 있다지만 말은 가려해야지! 니들이 보지도 못한 얘기는 왜 만들어서 하는데? 니가 봤다고? 왜 말을 못해!”

“네가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그럼 없는 얘기가 나오겠어?”


팔짱을 끼고 있던 여직원은 되레 내게 큰 소리를 쳤다. 없는 얘기가 아니다. 마치 내가 욕을 먹어도 싸다는 듯한 말투였다. 상대는 지지 않겠다는 눈을 더 부릅뜨고 날 쳐다보았다. 그 정도 기세에 눌릴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더 가까이 갔다. 얼굴이 30cm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마음 같아서는 날 깔보듯 내려다보고 싶었겠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날 올려다보게 되었고, 그 것에 약간 기가 죽은 듯 보이기도 했다.


“째려보면? 째려보면 어쩔 건데? 쥐방울만한 게 까분다!”

“뭐 쥐방울? 넌 키로 먹고 사냐?”

“쥐방울이란 말 기분 나쁘니? 그럼 가지도 않은 2차 나갔다는 오해받은 내 기분은 어떻겠니?”

“네 기분이야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네가 말한 것 때문에 내 기분 상했잖아. 내가 술집 년이랑 다를 게 없다면서?”

“술집... 년...”


그녀는 자신이 말을 뱉으면 사실이 되리라는 착각을 하는 듯 다시 한 번 나직이 말했고, 나는 순간 나의 귀를 의심했다. 바로 면전에 대고 태연스레 말하다니.


“너 뭐라고 했니? 안 들려. 크게 말해!”

“술집년이라고 했다. 왜? 내가 틀린 말했니? 너 이사들이랑 술집 가서 춤추고 알랑거리고 안했어? 그거 술집 애들 하는 거 아니니?”

“언니 그만해. 그만 가자. 싸워서 뭐해.”


싸움이 커질 것이라 판단이 들었는지 다른 여직원이 방금 내게 말한 여직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래. 그냥 가자. 저런 애랑 말하는 것도 불쾌하다.”

“야! 가긴 어딜 가! 너 나한테 방금 술집 여자라고 했지? 너 정신병자니? 세상에 있지도 않는 일을 사실로 믿어? 어디 네 얘기 끝까지 들어보자. 너 하던 얘기 다 하고 가!”

“내가 언제 술집여자라고 했어? 술집년이라고 했지. 너 귀먹거리야?”

“뭐? 저게. 나 사과 받고 끝내려고 했는데 안 되겠구만.”

“야! 그리고 너 몇 살인데 아까부터 반말이야?”

“오호. 너 나보다 나이 많니? 그럼 나이 값을 하던가.”

“진짜 되먹지 않은 얘네. 넌 예의라는 것도 몰라?”

“넌 네 뒷말하는 사람한테 예의 갖추면 살아? 보니까 아닌 것 같은데. 너도 예의 없기는 마찬가지다!”

“저게 진짜!”


나이 많은 여직원이 내게 달려들려고 하자 어린 여직원이 어깨를 잡고는 말렸다.


“언니! 사람들 구경 나왔어. 그만 가자!”


둘러보니 큰 소리를 듣고 나왔는지 몇몇 직원들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게 웬 망신이란 말인가.


“너! 이따 나 좀 보자!”


화 낼 사람은 난데 나이 많은 여자는 자신이 되레 열을 받았는지 더 큰 소리였다.


“그래. 내가 할 소리를 하고 있네. 이따 봐. 지금은 쪽 팔려서 더 말 못하겠다.”

“너 퇴근하고 회사 앞으로 나와.”

“회사 앞은 창피하니까 어디 공터 없냐? 거기서 만나자. 대판 한 번 붙게.”

“너 종로 5가 2번 출구로 와. 7시 반까지. 알았어?”

“겁먹을 줄 알고. 간다. 가! 그리고 말 퍼트린 홍보부 원대리도 데리고 나와. 누가 거짓말하는지 가리게. 알았어?”

“알았다. 너 이따 보자. 아주 뼈까지 갈아버릴 테니까.”

“웃기고 있네. 쥐방울! 갈 때 짤랑짤랑 소리 내지 말고 굴러서 가라. 다리가 짧아 부지런히 걸어야 겠네.”

“저게 진짜!”

“언니, 가요! 에이구. 그만 좀 가. 아니면 나 혼자 간다.”


그렇게 여직원 둘은 휴게실에서 나가버렸다.


‘이런 일은 아주 깨끗하게 정리해야 돼. 바보처럼 가만히 있으면 말은 점점 더 퍼질 거고 다들 사실로 안다고. 오늘 죽더라도 끝까지 결백함을 밝히고 말겠어. 뭐 술집여자랑 다를 게 없다고? 2차? 광고 PD한테 뭐? 앞뒤가 어디정도 맞는 말을 해야 설명도 하지. 내 참 기가 막혀서. 그 쥐방울 앞으로 짤랑거리지 못하게 입막음을 확실히 해 버려야지. 다른 애들이 무서워서 라도 말을 못 꺼내게 확 때려버려야겠다.’


그 일이 있고 난 한두 시간은 분함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었는데 퇴근시간이 되자 조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일대일이라면 문제는 없겠지만 상대는 셋. 괜히 원대리까지 데리고 나오라고 해서 숫자가 더 커진 것이었다.


‘어쩌지? 혜림이한테 말할까?’


황급히 지원군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어머, 내가 미쳤나? 혜림이를 왜? 채련이한테 연락해볼까? 채련이도 만만한 얘는 아니니까 싸움도 잘하겠지. 그래도 회사에서 싸운 일로 부른다는 건 좀 그런가?’


잠시 당당히 혼자 해결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을 무참히 깨버리고 머리에 맴도는 말이 있었다. 뼈까지 갈아버린다!

사실 초등학교 이후로는 말싸움도 변변히 해본 적이 없었으니 몸싸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말로 끝나지 않을 싸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겁이 많이 나는 일이었는데 거기에 뼈를 갈아버린다는 협박의 말은 전투에 앞선 나의 전의를 자꾸 흩트리고 있었다. 내 생애 들어본 협박의 말로는 최고의 말이었으니까.


아까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최고로 험한 말을 골라한 나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말이었다. 그 말에 비하면 나는 고작 빈정댄 것에 지나지 않은 약한 말만 했던 것이었다. 뼈까지 갈아버린다. 골똘히 생각해서 뱉은 말도 아닌 듯한데 그런 말이 생각 없이 나올 정도면 거칠게 살아왔던 여자 아닐까? 그리고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그 정도로 뻔뻔할 수 있다는 건 싸움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분노는 점점 무서움으로 바뀌었고 퇴근으로 지체 없이 흐르고 있는 시간 속에서 무서움은 공포로 바뀌고 있었다. 친구를 불러왔냐는 말을 듣기 싫어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물러설 수는 없는 싸움에서 질 수는 없는 것이니까 지원군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역시 내 얘기를 들은 채련은 분노하며 꼭 나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20분정도 늦어질 것 같다며 강남으로 약속 장소를 바꾸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는 채련. 아! 채련은 진정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것인가!


***


“시간은 잘 지킨다.”


별 하나! 나 하나!

나 하나! 상대는 셋! 

내가 혼자임을 확인한 쥐방울 여직원은 자신 있게 먼저 빈정대기 시작했다.


“너 좀 늦었다!”


사실 늦은 것은 채련이었다. 세 명이 온 시간은 7시 32분. 코리아 타임과 좋지 않은 서울의, 그것도 퇴근 시간의 교통 상황을 감안하면 늦었다고 말하기는 힘든 시간이었다. 그 말은 내 곁에 없는 채련에게 하고픈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판 붙을까? 공터로 가자니까 웬 지하철역?”


상대가 세 명이라고 기죽은 듯 보일 수는 없는 노릇. 더욱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을 뱉었다.


“야! 우리가 너처럼 저급하게 몸싸움 할 줄 아니? 어디 커피숍이라도 가자. 싸우더라도 말로 하자고!”

“말싸움하는데 왜 커피숍을 가니? 여기서 싸우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혹시 아는 공터라도 있는 건 아닐까? 으슥한 공터에서 셋이 협공을 해오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을 했던 나였으니까.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채련에게 장소를 다시 알려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전화를 받을 수 없게 몸싸움을 하는 도중에 오면 곤란한 일이니까.


“야! 잔말 말고 따라와. 그리고 빈정대지 말고.”


쥐방울 여직원은 의외로 시원한 성격인지 화도 별로 내지 않고 상황 정리를 했다. 아무튼 셋을 따라갔다. 그녀들이 앞서 들어간 곳은 어두컴컴하고 분위기가 좋지 않은 호프집이었다. 우린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는 단체석이어서 내 앞에 세 명의 여자들이 조르르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알아서 시킨다. 들어왔으니 주문을 해야지.”


또 쥐방울 여직원.


“그러든가.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는 채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예상보다 더 늦어지나? 이 기집애 또 미안해서 전화 안받는 모양인데.’


할 수 없이 호프집의 위치와 가게 이름을 문자로 보내고 자리로 갔다.


“왔니? 너 아까 하던 얘기 계속 해봐. 내가 그래도 너보다는 회사 선배거든. 너 아까 말 거침없이 잘 하더라.”


‘오호,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이거야?’


“네가 먼저 이상한 소리를 먼저 했잖아!”

“너라고 하지 마라.”

“싫은데. 왜 듣기 거북스럽냐? 아까도 말했지만 내 뒷말 하는 사람한테까지 선배 대접하고 싶은 생각 없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말란 말이야!”


쥐방울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소리는 지르니? 호프집에서 영업방해로 신고하겠다, 얘. 성질 좀 죽여.”

“여기서는 소리 질러도 돼. 여기 내 남자 친구 가게거든.”


‘어쩐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왔다 이거지. 완전히 궁지에 몰렸구만. 상대가 셋에 남자 친구 가게라. 그래도 질 수 없지.’


“남자친구 가게라고? 굉장히 구리구리하다. 이런 가게 자랑하고 싶어서 왔니? 너 걱정이다. 내가 멋있는 사람 소개 시켜줄까?”

“뭐야?”


확-!

쥐방울은 앞에 있던 맥주를 내 얼굴에 들이부었다. 머리에서부터 맥주가 흘러내렸다. 맥주 냄새가 이런 거였구나.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진짜!”


나도 이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쥐방울의 머리를 확 낚아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있어 나도 불편했지만 상대도 움직이기 힘든 위치였다. 쥐방울은 허공에 손을 내젓다가 내 손을 잡고, 있는 힘껏 꼬집었다.


“아야!”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녀의 머리는 놓지 않았다. 아픔보다 놓아선 안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그렇게 그녀의 머리를 잡고 있을 때였다. 


“뭐하는 겁니까?”


비명과 소프라노 톤 목소리들이 오고가고 있을 때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윤섭씨. 윤섭씨 뒤로 놀란 눈의 채련이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