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사토 유키의 결정>> "어딜 간다구요?" 지나는 점심식사를 준비하다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가 일본으로 간다고 말한 것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간다고 했소." "어, 언제요?" 유키는 똑같은 말을 두번이나 되풀이하는 것이 싫었다.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여자가 금방 듣고도 그새 잊었단 말인가. "내일. 내일이라고 했소." "정말이세요?" "당신 진짜 바보요? 아님 돌머리요?" "뭐라고요?" 유키는 미간을 좁히며 수저를 들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이해를 하겠소?" 그의 신경질적인 말투에 지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으로 보건데 일본으로 간다는 것이 진짜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무슨 일로?' 그러나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물어봤다간 속 좁은 저 남자의 입에서 욕 나오는 것을 들어야할 것이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자리에 앉아 식사했다. 그러나 입맛이 없었다. 아직 입덧이 시작할 시기는 아니었지만 어제부터 입안에 줄곧 까끌까끌한 것 같았다. 마치 모래를 씹는 것처럼. 그녀가 밥을 먹다말자, 유키는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이상하군? 입맛이 없소?" "아, 네. 저 신경쓰지 마시고 식사하세요." "물론 당신이 밥을 먹든 말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당신 뱃속에 있는 내 아기가 신경쓰일 뿐이지. 아무것도 안 먹고있으면 아기한테 안 좋을 테니까 말이오. 유키는 당장에 내뱉고 싶은 말들을 음식과 같이 씹어 삼켰다. "그러고보니 당신 얼굴이 좀 까칠해진 것 같군." 지나는 며칠 전부터 이유도 없이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수수께끼같은 의미심장한 표정이 담겨있었다. "마치 아기를 가진 사람처럼. 어디 몸이 안 좋소?" "네?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좀 계절 타나보죠. 가을이잖아요." 그녀는 있다가 치우러나오겠다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유키는 입 끝을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그녀가 끝까지 임신사실을 숨기겠다면 그도 다 생각이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언제까지 두고보지는 않을 것이다. 행여 낙태를 한다거나 하는 잔인한 생각을 한다면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저녁. 지나는 유키가 왜 일본으로 가는지 너무 궁금해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녀가 아는 바로는... 적어도 그래야 했다. '일본에서 연락이 왔나? 그렇다면?' 어쩌면 카오리에게서 연락이 왔을 수도 있었다. 그의 결혼 문제로... 그와 결혼시킬 여자를 만나게 하려고 일본으로 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그녀의 명치에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내일 언제 떠나는 거지? 갑자기 떠난다고 한 걸 보면 출국준비를 다했다는 거잖아? 어떻게 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미리 말을 꺼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성인이고 이집 주인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의 결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것도 없었다. 그가 어떤 여자와 결혼을 한다해도 그녀가 간섭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여자니까. 주방에 가서 시원한 물을 한잔 가지고 마당으로 나갔다. 이제 가을이라고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그녀는 어두운 밤하늘을 처음 쳐다보는 사람처럼 뚫어지게 올려다봤다. 반짝거리는 별을 보고있자니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결코 별이 슬픈 것도 얄미운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났다. 마음이 저릴 정도로 속상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토 유키가 일본으로 떠난다면 그녀는 그가 귀국했을때 결혼소식을 가지고 올 것이란 걸 예감할 수 있었다. '그래. 잘 됐어. 이제 그는 재혼해도 될 정도로 많이 바뀌었잖아.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왔잖아. 노력한 성과야. 당연한거라고.' 그는 혼자서 일본에 간다고 했다. 혼자 밖으로 다닐 정도로 그에게 많은 발전이었던 것이다. 기뻐해야 했다. 카오리와의 약속대로 그를 변화시켰으니까 잘 된 거였다. 레이를 변화시킨 것처럼 그도 변화시켰다. 지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잘 된 일이라며... "거기서 뭐하는 거요?" 지나는 화들짝 놀라 어둠 속에서 소리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키는 현관에서가 아니라 뒷마당으로 연결된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옷을 입지 않은 상체가 젖어있는 걸 보니 막 수영을 하고 온 것 같았다. 그녀는 애써 그의 가슴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춥지 않아요?" "전혀. 그런데 거기서 뭐하는 거요?" "아, 그냥 바람쐰다고... 있었어요." "그럼 바람 많이 쐬시오." 유키는 그녀를 지나쳐 현관으로 향했다. 지나는 얼른 그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렀다. "저기..." "뭐요?" "아, 저기... 그게... 일본에 왜 갑자기..." "안 돼오." "네?" 유키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그녀에게 돌아섰다. 현관 입구에 세워져있는 은은한 조명 빛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단호한 입매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엄격한 표정으로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왜 말해줘야 하지? 그렇게 궁금한가? 왜?" "..." 지나의 시선은 그를 피했다. 그가 저렇게 무뚝뚝하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유키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한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사토 유키는 언제 올 거란 얘기도 없이 떠났다. 아침에 학교가는 레이에게 할아버지 뵈러 일본에 간다는 말을 했다. 레이는 그가 일본에 가는데 데려가지 않고 갑자스럽게 떠나자 몹시 속상해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중요한 일로 가는 것이고 다음에는 꼭 같이 가자는 그의 말에 아이는 이내 기분이 풀렸는지 밝은 얼굴로 등교했다. 그리고 유키는 오전 비행기로 떠나버렸다. 지나에게는 어떤 인사도 없이... 김 지나는 그에게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잠깐 일본으로 갔을 거라고 여기면 되었지만 그녀의 세포는 집 구석구석 그의 흔적을 찾고있었다. 보리는 서성거리고 있는 주인 뒤를 눈으로 쫓으며 의아해했다. "네가 보기에도 내가 한심해보이니? 어휴~ 그래. 너한테 그렇게 보일 정도면 나도 참... 한심하다. 그치? 에그, 빨래나 하자."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있을 때였다. 거실에 있는 전화기가 마구 울렸다. "여보세요?" "너 많이 바쁘니?" 지 재영이었다. 지나는 미소를 지으며 어쩐 일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냐고 물었다. "네 핸드폰 안 받길래." 지나는 마침 잘된 것 같아 그녀더러 이곳에 놀러오라고 했다. 주인이 없는 집에 함부로 친구를 들이는 것은 미안했지만 마음이 너무 쓸쓸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남자를 들이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가 아닌가. 친구의 약속을 받아낸 그녀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세탁기를 돌리고 거실청소를 시작했다. 재영은 그 후, 30분 후에 초인종을 울렸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 서 동인과 함게였다. 어떻게 된 거냐고 지나가 묻자, 그녀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동인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 했다. "미리 전화를 안 해서 네가 곤란한 거 아냐?" 재영이 아주 넓은 거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거실 크기만 해도 그녀의 집 두 배나 되는 것 같았다. "꼭 그건 아닌데... 레이가 좀..." "꼬마녀석이 왜?" 동인이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레이는 낯선 아저씨를 조금..." "야. 내가 어째서 낯선 아저씨야? 녀석 데리고 저번에 할인매장에 데리고 가, 동물원도 같이 가줬잖아.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래, 그래. 기억할 거야. 하지만 바깥에서 만나는 것 하고 자기 집에서 만나는 거 하고 같니?" "텃새부린다?" "음... 그래. 그걸 거야." "그렇게 나오면 가줘야지 뭐. 그런데 이집 주인은 어디갔는데?" "일본에 갔다고 아까 내가 말했잖아, 인마." 재영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그리고 동인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람 이제 바깥으로 잘 다니나봐?" 동인이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음. 시내는 나가지 않아. 가끔 밤에 나가고 그래. 이번에는 중요한 일 때문에 가는 거야." "그 사람이 일본까지 가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중요한 일인가보네?" "..." 그의 말에 지나는 침묵을 지켰다. 정확히 유키가 무슨 이유로 일본에 갔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윤곽만 떠올려도 심장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한 시간 후에 사토 레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자신의 집에 손님이 두 사람이나 와 있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서 동인이 온 것이 못마땅했다. 몇 번 만났을 때마다 가정교사를 쳐다보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곳에서나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 했고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손을 잡기도 했다. 레이는 그런 그가 가정교사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와 선생님이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서 동인이 중간에 낀 것 같아 싫었다. "저 녀석. 진짜 네가 온 게 싫은 모양이다?" 재영이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꼬마녀석을 쳐다봤다. 아이는 예의바르게 인사는 했지만 표정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다. 특히 동인을 쳐다보던 아이의 눈빛이 아주 차가워보였다. 차가운 아빠의 피를 받았단 이거로군. 지나는 두 사람에게 아무래도 저녁을 먹고가는 것은 무리겠다며 미안하다고 말한 후, 아이 방으로 갔다. "레이. 잠깐 얘기 좀 해도 되겠니?" "아뇨." "레이..." "무슨 일이신데요?" 옷장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던 아이가 그녀를 쳐다봤다. 뭔가를 꾸중하려고 온 것이라면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 같았다. 지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고는 뭐 먹고싶은 것이 없는지 물었다. 아이는 없다고 차갑게 대꾸했다. 방에서 나오는 지나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두 친구는 저녁이 되기 전에 지나와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찻잔을 치우고 저녁준비를 하려던 지나는 방에서 레이가 나오는 것을 봤다. 아직까지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레이. 미트볼 할 건데, 같이 만들지 않을래?" "..." 레이는 그녀를 쳐다만 볼뿐 선뜻 하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재촉했다. "넌 만들기 잘하잖아. 같이 만들어서 오늘 저녁에 먹어보자. 어때?" "글쎄요." 어른스럽게 튕길 줄도 안다 이거로군. 지나는 웃으며 아이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나한테 화가 아직 안 풀린 거야?" "..." "음, 이런... 사토 레이, 의외로 소심하구나?" "네?" "마음이 좁다고. 선생님은 네가 남자답고 마음이 바다처럼 넓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 혼자 착각한 모양이다." 지나는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갈은 고기를 꺼내었다. "그래. 네가 화가 안 풀렸으면 계속 골나 있어. 선생님은 가만히 있을게. 네가 화가 풀릴때까지. 하지만 소심한 사람은 화가 빨리 안 풀리겠지?" "난 소심한 사람아니에요!" "어머, 그래?"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부정하자 지나는 속으로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돌아섰다. "그럼 어떻게 미트볼을 만들어볼까?" "조, 좋아요."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같이 준비했다. 그리고 주방이 아니라 거실에서 식사를 차려 먹기로 했다. 식사 내내 보리가 음식을 몰래 뺏어먹으려는 짓을 해 번번히 식사를 중단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저녁시간이 매우 즐거웠다. 카오리는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고 다다미-방으로 향했다. 거실로 사용하고 있는 그 넓은 방에 유키가 앉아 있었다. "오늘 저녁식사 전에 오신다는구나. 아주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겠구나." 그녀는 아들과 단둘이 대화를 할 때는 한국말로 말했다. "네." "앞전에 왔을 땐 아버지를 만나뵙지 못했잖니. 있다 유스케와 같이 오신단다." 유스케란 말에 유키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러나 카오리는 아들의 그런 표정을 미쳐 발견하지 못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일하는 여자 중에 한 사람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실로 와서 유키를 찾았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운전기사와 지나뿐이지만 그녀는 이곳 번호를 전혀 모른다. 유키는 수화기로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사토 유키입니다." 그는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기는 도쿄에 있는 ***잡시사입니다. 선생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양하겠소." "네? 아, 하지만 제 말씀을 조금만 더 들어보시죠. 선생님께서 인터뷰에 응해주신다면..." 유키는 누군가가 자신이 일본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잡지사에 연락한 것 같아 화가 났다. 조용히 왔다가 떠나려고 했었다.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잡지사 뿐 아니라, 방송국이나 다른 언론매체에서 그와 인터뷰를 하려는 연락이 계속 왔지만 그는 매번 거절해왔다. 이번에도 누군가에게 정보가 들어간 것 같아 아버지를 만나서 얘기가 끝나는대로 떠나야할 것 같았다. "이번에도 어떻게 알았지?" 카오리는 통화를 끝내고 오는 아들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사토 츠바사와 유스케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유키가 온 것을 그리 놀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전화로 이미 그가 온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놀랐던 것이다. 유키는 식사 때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식사 후 차 마시는 시간이 되었을 때 얘기를 꺼낼 작정이었다. 유스케까지 함께 자리를 해줘서 더할나위 없이 기뻤다. "레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느냐?" 츠바사가 중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유키는 어머니가 재혼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눈으로 던졌다. 그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나즈막하게 말했다. "저, 재혼하겠습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날아왔고 츠바사보다는 유스케의 눈동자가 더 놀란 것 같았다. 사토 츠바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찻잔을 들었다. 그는 예정보다 조금 빨리 유키의 입에서 '재혼'얘기가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선생의 영향이 컸던 모양이군." "네." 츠바사는 아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떠나기 전에 양가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유키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떠나기 전에 양가 인사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도 직업이 학교선생이어서 그런지 사람의 마음을 다룰 줄도 아는구나. 네가 그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어머니." 카오리는 아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 선생에게 언제 한번 이곳에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해야겠구나." 츠바사까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유키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네가 재혼할 수 있도록 김 선생이 많이 애쓴 것 같다. 레이를 씩씩하고 밝게 변화시킨데다, 널 이곳에 오게 만들었잖니." "그게 무슨..." "사모님의 부탁으로 지나씨가 널 도왔던 거다." 유스케가 차갑게 유키의 궁금증에 대답했다. 유키의 검은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저번에 이곳에 지나씨가 왔을 때 사모님의 부탁을 받았거든. 널 재혼시키기 위해서 먼저 널 변화시켜달라고 말이다. 사토 레이를 변화시킨 것 처럼. 결국 그녀의 노력으로 넌 어둠 속에서 나왔고 이곳에 제발로 찾아 온 거지. 재혼하겠다는 결심을 들고서 말이다." 친구의 설명을 듣는 동안 유키는 그의 말이 모두 농담이길 바랐다. 그러나 유스케의 눈동자에는 농담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츠바사와 카오리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그의 '재혼'이 어떤 결정을 말하는지 알고있었다. 왜냐면 그 혼자만 모르고 다들 진작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변화되어 재혼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들이 염두해두고 있는 여자와 결혼하기를. 이런 일이 생기도록 만든 것은 아주 멋지게 그를 이곳까지 오게만든 여자, 바로 김 지나였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도 숨긴 채 레이의 마음을 열게 만들었고, 집안을 환하고 생기있게 바꾸었고, 그리고 바로 그의 마음까지 열게 만들었던 것이다. 차갑게 지하 몇 십 미터 아래 숨어있던 그의 심장을 그녀의 따뜻한 미소와 뜨거운 열정으로 녹게 만들었다. 여태 그녀가 보여왔던 행동들이 자신의 재혼때문이었다고 생각하자, 유키는 온몸이 뼛속과 영혼까지 얼어붙었다. 예전보다 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침묵 속에서 저주의 말을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 지나. 나에게 또 뭘 숨기고 있지? 날 사랑한다는 그 말... 그것도 거짓이겠군, 그래. 추악한 거짓말! 멋지군! 멋지고 완벽한 연기였어!' 그는 턱을 씰룩거리며 이를 갈았다.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그것도...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이곳까지 날아왔다. 바보같이, 어리석게도 진정한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기 위해서 부모님을 만나러온 것이 쓰리게 후회가 되었다. "그러니까 제가 재혼할 수 있도록 김 선생에게 부탁하셨다? 저를 변화시켜달라고 말이죠?" 유키는 식을대로 식어버린 차를 마시다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럼 성공이군요. 제가 제 입으로 결혼하겠다고 했으니. 하지만..." 그는 찻잔을 거의 소리나지 않게 내려놓으며 세 삶의 얼굴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제 결혼상대는 제가 정합니다." "유키. 그럴 순 없다." 카오리가 아들의 결정을 정색하며 반대했다. 이미 정해진 여자와 결혼해야 했다. 다른 여자는 결코 안 되었다. "누구냐? 네가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츠바사가 조용히 물었다. 유키는 씩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잔인함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절 변화시킨 여자입니다. 김 지나, 그녀와 결혼합니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유키는 츠바사를 정면으로 노려봤다. 두 남자의 살기 가득한 눈빛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혔다. "유키. 김 선생과의 결혼은 찬성할 수 없다. " "이유가 뭡니까? 재혼이 중요하다면 어느 여자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습니까?" "그건 아니란다. 너와 결혼할 여자는 아버지 회사와..." 카오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키의 시선이 츠바사에게 다시 날아갔다. 무슨 뜻인지 알것 같았다. 그가 들은 정보로 아버지의 회사가 국내에서 막강한 타 무역회사와 손을 잡기로 했던 것이다. 두 회사가 합치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 된다며 언론에서 떠들어댔다. 유키와 결혼하기로 정해진 여자가 바로 합병할 회사의 사장의 셋째 딸인 것이다. 그녀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았고 나이도 스물 두 살밖에 되지 않는 대학생이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지만 결코 그들의 결혼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론에 실린 적이 없었다. "그럼 전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요." "유키! 레이 걱정은 안 해보니?" 카오리의 구슬픈 말에 유키는 그녀를 노려봤다. 오늘따라 어머니가 이렇게 미운 적이 없었다. "레이를 걱정해서 김 지나와 결혼하겠다는 겁니다. 그녀만이 아들을 잘 돌봐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뇨! 레이가 좋아하고 따르는 여자는 김 지나입니다. 그 여자한테만 마음을 열어요. 얼굴도 모르는 낯선여자가 아니라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다시 아들녀석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꼴 결코 보기싫습니다. 두 분도 레이를 보셨잖습니까?" "오직 레이때문에 그 가정교사와 결혼하겠다는 거냐?" 츠바사가 차갑게 물었다. 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아들녀석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약 부모님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내놓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싶었다. 결혼 후에 지나의 임신사실을 꺼낼 생각이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결혼 전에 섣불리 말했다간 그녀에게 어떤 영향이 끼칠지 불 보듯 뻔했다. 츠바사는 혼인 전에 아이를 갖는 짓을 몹시 싫어했다. 쉽게 남자와의 혼전관계를 맺는 여자를 성에 대해 문란한 여자라고 여겼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썩을 대로 썩은 정신을 가진 여자라고 말이다. "네 결정이 확고하다면... 그렇게 하거라. 대신 그 여자를 우리 집안의 여자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 "되도록 빨리 떠나거라." 츠바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오리와 유스케가 일어났지만 유키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 회사하고 무관합니다. 언제까지 절 올가메실 작정이십니까?" "..." "전 아버지 회사에 관심없습니다. 이어 받고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사토 유키!" 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려보고 있는 츠바사를 마주보고 섰다. 한대 후려치면 당장 맞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왜 제가 그 회사때문에 재혼을 해야한다는 겁니까? 회사를 위한 거라면 굳이 제가 아니어도 되잖습니까?" "유키! 그만 하거라! 아버지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카오리가 거침없이 늘어놓는 아들의 말을 말려야했다. 그러나 유키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회사를 위해서... 제가 한국으로 떠났으니까... 그래서 유스케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유스케를 곁에 두신 거 아닙니까?" "유... 유스케... 이 놈!"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유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독기어린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츠바사 옆에 선 유스케를 유심히 바라봤다. 유스케는 아직까지 충격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유키와 김 지나가 결혼한다는 말에. "하지만 제 결심은 바뀌지 않습니다." "..." 츠바사의 몸이 약간 휘청거리는 듯 했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유키를 쳐다봤다. 7년 전부터 아들의 표정과 말투는 변했다. 그 오랜 시간동안 어둠속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사악한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리라. 츠바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사이로 말했다. "어디 네 맘대로 해봐." "어머니를 아껴주시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제가 이곳에 온 겁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아끼시는 마음이 없으시다면 제 결정을 말씀드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유키는 고개를 숙이고는 츠바사를 지나쳐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어? 이상하다? 분명히 여기에 넣어뒀는데?" 다음 날, 지나는 서랍마다 열었다 닫았다는 수도 없이 반복해댔다. 그녀는 지금 방안에 있는 서랍과 핸드백 그리고 지갑을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찾는 명함이 없었다.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입력이 되어있어 없어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있어야할 것이 없는 게 이상했다. "내가 버렸나? 아님 어디에다 흘렀나?" "뭐하세요, 선생님?" "아, 레이! 학교 잘 갔다왔니?" 지나는 아이에게 미소를 던지고는 어지러진 방을 다시 치우기 시작했다. 그래, 신경 끄자. 분명히 어느날 휴지통에다 버렸을 것이다.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저장시켜놓고 바로 버렸던 모양이다. 방을 치우고 나온 그녀는 아이의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나날이 갈수록 아이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즐거워했다. 친하게 사귄 친구들이 셀 수 없을 정도란다. 아이 말로는... 하지만 그래도 친구들 중에 보리가 제일 좋다고 했다. "전보다 글씨가 더 예쁜 걸? 여자친구한테 편지같은 거 쓰면 무척 좋아하겠는데?" "놀리지 마세요, 선생님!" "으음. 정말이야. 앞에 썼던 노트 한번 가져와 봐." 레이는 방으로 달려가 다 쓴 노트를 가져와 펼쳤다. 지나는 최근에 다시 쓰기 시작한 노트를 나란히 펼쳤다. "자, 봐. 어느 게 더 멋있니?" "정말이네?" 레이는 웃으며 자신의 글씨체가 매우 발전한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오늘도 수고했다, 레이. 간식 먹고 보리하고 놀아. 아, 내일 친구집에 놀러가기로 했지?" "네." "좋겠는데? 가지고 가고싶은 장난감이나 게임기 정했니?" 지나는 준비한 간식을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보리가 달려왔다. "안 돼, 보리! 너 조금 전에 과자 먹었잖아." "장난감 말고 책 들고가기로 했어요. 책 바꿔볼 거거든요." "어머, 그래? 그것도 좋지! 무슨 책 들고갈 건데?" "만화책요." "..." 지나는 괜히 물어본 것 같아 억지로 미소를 띠어주고는 아이가 간신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만화책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그녀는 걱정이었다. 이러다가 고학년이 되어서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했다. 아직까지 아이의 성적에는 이상이 없었다. 옛날보다는 담임선생의 평가가 좋았다. 아이의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적극적으로 바뀌었다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그리고 동물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나는 조금 전 그녀의 꾸지람에 토라져 등돌려 앉아있는 보리를 힐끗 쳐다봤다. 갑자기 자신이 이곳을 떠나야할 때 상처받을 영혼이 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녀석... 괜찮을까? 이 집 주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적어도 아들을 염려한다면 떠난 다음 날 전화를 해줘야 했다. "놀러가도 돼죠?" "음? 그래. 마당에서 놀 거지?" "네. 대문밖으로는 안 나가요." 레이는 스스로 하면 안 되는 것을 말로써 확인했다. 지나는 아이의 영리함을 극찬했다. '레이는 한국말로 영리하다는 뜻이오.' 이 집에 처음 온날이었다. 이 집 주인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그의 방으로 갔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얘기만 나누었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의 의미는 눈이라고 했죠? 이름때문인지 당신의 눈은 항상 차갑게 느껴졌어요.' 지나는 레이와 보리가 마당에서 뛰어노는 것을 즐겁게 바라봤다. 이틀 후 아침. 레이를 버스에 태워보내고 집으로 돌아섰을 때였다. 차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유키의 검은 차였다. 혹시... 그가? 차는 그녀 앞에 미끄러지듯 멈춰섰다. 조수석문이 열리고 운전기사가 내렸다. 그의 표정으로 보건데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이집 주인을 너무 닮은 것 같았다. "오셨습니다." 기사의 말과 동시에 그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이내 검은 양복을 입은 사토 유키가 차에서 내렸다. 놀란 지나의 얼굴을 본 유키는 그녀가 어떻게 알고 밖에 나와있었는지 궁금했다. "별로 반갑지 않는 표정인 것 같은데?" "네? 아, 그럴 리가요. 잘 다녀오셨어요?" "..." 그는 그녀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고 대문을 통과했다. 뒤따라 기사가 트렁크를 들고 왔다. "커피 한잔 준비하시오." 유키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으며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위에서 드실 건가요?" 그의 걸음이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침실로." "아, 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곧장 떠나지 말고 차 한잔 하라고 했다. 그리고 두 남자의 커피를 준비했다. "고맙습니다." 기사는 아래층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거렸다. 어쩐 일인지 보리는 그에게 아주 친한 척을 해댔다. 오늘 녀석의 아침밥을 아직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배가 고픈지 아무한테 애교를 부리면서 밥달라고 투정하는 것이다. "들어오시오." 지나는 찻잔을 침실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내려놓고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씻고나오면 커피는 식어있을 것이다. 그녀는 욕실 문을 향해 물었다. "조금 있다가 마실 건가요? 그럼 새로 가져올게요." 대답 대신에 욕실 문이 열리면서 유키가 나왔다. 그의 상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고 허리띠를 푼 정장바지는 단추가 끌러져있어 골반에 위험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그에게 차를 가져왔다고 말한 후,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었다. "있소." "뭔데요?" "당신." 유키는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놀란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순진했다. 아니 순진한 척했다. 그를 감쪽같이 속인 이 시대의 완벽한 여배우. '그래. 당신이 남자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였다는 것은 과히 충격적이긴 해. 하지만 당신의 가증스러움을 가릴 순 없지.' 지나는 차갑게 식은 그의 눈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몰랐다. 그가 내뱉은 말에 놀랍긴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였다. 적어도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그의 눈은 이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차가움 속에 잔인함이 보였다. 살기가 번득거리고 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지나는 쟁반을 가슴으로 끌어안고는 대답했다. "뭘 도와드려요?" "당신." "..." "당신 몸." 유키는 잔인하게 냉소를 던졌다. 그리고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명령했다. "저녁 때 차가 필요하니까 7시까지 오도록 해." 지나는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아래층에 있는 기사와 통화한 것이다. "어디... 가시려고요?" "차 잘 마시겠소. 그만 나가보시오." "..."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서있자 유키는 그녀에게 말했다. "한숨 잘 거요. 나와 같이 잘 거 아니면..." "아, 네... 죄송해요!"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쏜살같이 방에서 나갔다. 유키는 욕조 속에 몸을 담갔다. 한손에 독한 양주가 든 잔을 들고. 그는 잠을 잘 것이다. 아니 잠이 자고싶었다. 사흘 동안 그는 고작 세 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김 지나란 여자 하나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나체의 몸으로 흔들어대고 있는 그녀가 떠올랐고 그런 욕망에 몸부림치고 있는 자신을 자책하느라 매일 밤을 괴로워했다. 막상 그녀를 집 앞에서 보자, 운전기사가 보건 말건 그녀를 부셔저라 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를 알면서도 그의 억제해왔던 욕망이 분출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유키는 거친 욕을 중얼거리며 욕조에서 나왔다. 몸에서 물이 떨어졌다. 물기를 대충 닦고 그는 옷을 입지 않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몸 속에 스며든 양주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의 정신은 또렷했고 그의 복잡한 뇌를 주무르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유키는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운전기사가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기사에게서 열쇠를 받아들고 나갈 것이다. 김 지나를 데리고...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옷을 다 갈이입은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운전기사는 그에게 차 열쇠를 주었다. 유키는 주방을 힐끗 쳐다봤다. "지금 나가시는 건가요?" "..." 유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고있는 레이에게 다가갔다. "레이." "네, 아버지." "오늘 아버지 어디 갈거야. 내일 아침에 네가 학교가기 전에 올 거다." "어디 가실 건데요?" "갔다와서 말해주마." "혼자 가시는 거에요? 아니면..." 레이의 시선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있는 지나에게로 향했다. "그래. 선생님하고 같이 갈 거란다." 그는 아들에게 더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언제부턴가 녀석은 눈치를 챘고, 무엇보다 그녀가 엄마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기사아저씨하고 하룻밤 같이 지내거라. 무서우면 같이 자자고 그러고." "무섭지 않아요. 보리가 있으니까." 지나는 부자의 대화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려면 설거지하던 것을 멈춰야 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여자로 보이고싶지 않았다. "네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거다. 내일보자, 레이." 유키는 아들의 머리와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고 현관으로 나섰다. 그리고 현관에서 기사에게 뭐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지나는 거실로 들어오는 기사에게 물었다. "어딜 가시는 거죠?" "잘 모르겠습니다. 차를 직접 가지고나가실 모양입니다." "네? 그가 직접 운전을 한다고요?" 지나는 놀랐다. 교통사고로 이후로 두번다시 운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곳에 있는 몇 달 동안 유키가 직접 운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괘, 괜찮을까요?" "네... 저,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설거지를 끝내고 고무장갑을 벗으려던 그녀는 돌아섰다. 기사가 그녀에게 종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건 뭐죠?" "올라가셔서 읽어보세요." 그녀는 그의 말대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방에 다다르기 전에 복도에서 접은 종이를 펼쳐들었다. 유키가 쓴 메모였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준비하고 나오시오. 20분 시간을 주겠소. 시간이 지나고나서 후회하는 일이 없길 바라오. - 사토 유키. 지나는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제끼고 바깥을 내다봤다. 차가 대문앞에 있었고 유키가 차 옆에 서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어디론가 갈 것처럼 고급슈트를 입은 그가 결국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종이에 적힌대로 20분이 지나고나서 후회할 일이라면... 아마도 그가 직접 올라오겠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아까 그가 레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제야 짐작갔다. 정확히 20분이 되어서 지나는 유키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차는 곧 출발했다. 사고이후로 운전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라 여겼던 그녀는 불안과 걱정스런 눈으로 그의 얼굴과 핸들을 쥔 그의 손을 쳐다봤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걱정마시오. 같이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는 유연하게 기어를 4단으로 바꾸었다. "어디로 가는지..." "그건 나도 모르지. 무작정 납치하는 거니까." "네?" 지나는 그에게로 고개를 획 돌렸다. 무작정 납치를 하다니. 누구를 납치한다는 것인가? 그녀의 표정을 곁눈질로 쳐다보던 유키는 싸늘하게 웃어보였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있소?" "네?" 그녀는 자신만이 알고있는 날을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9월 30일. 이달 마지막 날을 두 친구와 보내려고 했지만 갑자기 유키가 연락도 없이 불쑥 돌아와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레이와 유키에게 자신의 생일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유키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에 말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글쎄요. 그건 왜 물으시죠?" "그냥. 혹시나 당신이 알고있는게 있나 싶어서." "아뇨. 없어요." 두 사람이 간 곳은 시골의 어느 외진 곳에 위치한 오래된 성당이었다. 사방이 불이 모두 꺼져있었고 성당에서 비치는 유일한 불빛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는 이런 곳에 왜 왔는지 어리둥절했다. 사토 유키가 언제부터 하느님을 믿었는지... 유키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성당 문을 열었다. 성전에는 제대 위에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유키씨... 왜 이런 곳에... 아까 납치얘기는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 납치요." "네? 아니 누구를요?" "누구긴 누구겠소? 바로 당신이지." 그는 전혀 웃음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유키의 입술이 예고도 없이 내려와 그녀의 얘기를 잘라버렸다. 그녀는 놀라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머리를 들었다. 그녀의 턱을 감싸쥔 채로. "지금부터 질문은 내가 허락할 때까지 받지 않겠소. 만약 어떤 질문이라도 던지기라도 한다면 또 키스할 거요." "그런 억지가..." 그가 다시 입술을 부딪혀왔다. 아주 살짝.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언젠가 그녀에게 프로포즈하려고 가지고 있었던 반지였다. "유키씨..." "생일축하하오."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빼려고 했지만 늦었다. "이러면 안 돼요. 난 분명히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나한테 그럴 이유가 있소." "그 이유가 도대체 뭐죠?" 유키의 입 끝이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질문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가차없이 그녀의 입술을 공격해왔다. "제발..." "당신한테 얘기하기 전에 대답해 봐." 그가 입술을 살짝 떼고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그는 온 힘을 끌어모아 이성에 충실해야 했다. "날 사랑한다는 말 진심이오?" "...???"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왜 던진단 말인가. 지금에와서 무슨 소용있다고. 그녀는 대답하고싶지 않았다. 진심을 대답하기에 그녀의 심장은 너무 약했다. "대답해 봐. 진심이오? 날 사랑하는 게?" "..." "대답해!" "네. 그래요.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녀의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가득 고인 눈물은 이내 그녀의 뺨 위로 흘렀다. 그녀가 목 메인 소리로 소리쳤다. "이제 됐어요? 이제 속이 시원해요?" 유키는 그녀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 그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난 죽은 아내를 정말 사랑했다고 믿었소." 그의 갑작스런 얘기에 지나는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조금은 부드러워보였다. 촛불의 은은함때문이겠지. "어머니는 내가 열 세 살때 이혼하셨소. 그리고 지금의 일본 사람인 아버지를 만나 재혼하신 거요.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유능한 일본어 강사셨소. 일본으로 교육가셨다 두 분이 만나셨다고 들었소. 그래서 우리 모자는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난 한국이 그리워서 대학을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건너왔소.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났소. 눈이 부시도록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에 빠졌지. 적어도 그땐 행복하고 서로에 대한 열정이 끝이 없었소. 그녀와 함께 한국에서 살기 위해 난 국적을 옮겨야했소. 그리고 얼마 후, 우리 두 사람에게 레이가 태어난 거요." "국적을 바꿨다면서 어째서 일본 이름을 하고있는거죠?" "어머니때문이오. 국적을 바꾸더라도 이름은 아버지를 따라야한다고 했소. 적어도 새아버지에 대한 예의지." 유키는 다시 하던 얘기를 이어나갔다. "우리의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도 아니 시작하지도 않았소. 결코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그 여자와 난 사랑이 아니라 열정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오. 레이가 태어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소. 아내는 날 사랑한 게 아니었소. 내 육체와 내 재산을 필요했을 뿐이오. 그 여자는 끊임없이 다른 남자와 몸을 뒤섞었소.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녀가 내가 아닌 남자와 우리 두사람의 침대 위에서 짐승처럼 뒹굴고 있는 것을보는 순간 내 머리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줄만 알았소. 내 영혼이라도 팔어머고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유, 유키..." "바로... 내 친한 친구와 그 짓을 하고있었으니까! 내 눈앞에서 신음해대는 두 짐승을 그자리에 죽이지 못한게 지금도 후회가 되오. 더 웃긴건 뭔줄 아나? 그러면서도 그 사악한 여자는 나한테 이혼얘기를 꺼냈소. 하지만 결국 이혼은 못 했지. 죽었으니까! 그 자식하고 나란히 저승으로 떠났지." 키득키득 웃어대는 유키의 표정은 혼이 빠져있었다. 지나는 지금 들은 모든 말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식 있는 여자가 바람을 피우다니. 그것도 남편의 친구와. 너무나도 기가 막혔다. "크크큭... 그 자식의 바지 지퍼가 내려져있었다는군. 이혼하기 전 여행을 떠나겠다더니 둘이서 영원한 여행을 떠난 거지. 차 타고가는 동안에도 악마가 쥐고있는 욕망을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지. 고속도로에서 딴 짓하면 어찌된다는 걸 그 바보같은 짐승들은 몰랐던 거요." 지나는 가슴이 메어왔다. 터질 것만 같은 울음을 간신히 삼켰다. 그가 오랫동안 받아왔을 상처는 육체적인 상처보다 깊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사고로 죽어서 고통받았던 것이 아니라, 사랑했다고 어리석게 믿었던 자신을 오랫동안 원망하고 자신을 배신한 그 두 사람을 증오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 여자의 부모는 내 책임라는군. 나때문에 딸이 죽었다고." "그건 말도 안 돼요! 바람피운 것은 그 여자지... 아, 미안해요." "아니. 그 여자 잘못이지. 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실을 모른다는 거요.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죽은 두 사람과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거요." "세상에..." 그녀는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는 그의 넓은 어깨와 등을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가 받았을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 뒤로 난 세상에서 멀어졌소. 어느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소. 특히 여자는 더욱. 하지만 레이에게는 나와 똑같은 길을 가게 할 수 없었소. 그래서 가정교사를 고용해봤지만 모두들 참지 못하고 떠났소. 아니면 나의 재산을 탐하는 더러운 여자들이거나. 레이를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여자는 없었소." 사토 유키는 고개를 들어 지나를 쳐다봤다. "당신이 유일한 여자요." "..." "레이에게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당신 뿐이오. 레이는 당신을 끔찍하게 좋아하오. 엄마가 되어주기를 바랄 정도로." "유키씨..." "날 사랑한다는 게 진심이라면...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거요. 아니, 진심이든 아니든 우린 결혼할 수밖에 없소." "그게 무슨..." "날 지금의 사토 유키로 변화시킨 이유가 바로 결혼아니오?" 지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알아버렸다. 일본으로 가서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당신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어쩔..." "그럼 당신 감정은?" "네?" "날 사랑하는 건 아무 상관없다는 거요? 내가 아버지 회사를 위해서 나이 어린 여자와 결혼해도 당신은 상관없다는 거요? 전혀?" "..." "왜 대답을 못 하지?" 그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감싸 안으며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절대로 상관있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제 혼자 감당할 일이라고 여겼어요. 어차피 당신은 상관없을 테니까." "뭐? 내가 왜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요?" 지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잖아요? 이제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든 안 하든 뭐가 중요하냐고요? 이제와서 왜?" "..." "어차피 제 혼자의 감정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물론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소. 앞으로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요. 8년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미친 짓은 절대로 안 할 거요. 알겠소? 하지만... 난 당신과 결혼할 거요. 당신의 육체뿐만 아니라 날 사랑하는 당신의 감정까지 내 거요. 난... 당신의 영혼까지 소유하고싶소." 이게 무슨 프로포즈란 말인가. 지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해왔듯 사랑같은 걸 하지 않겠다는 남자를 계속 가슴아파하며 사랑해야했다. 그에게는 관대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오로지 육체를 위해서, 귀여운 레이를 위해서 그와 결혼을 해야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악몽같았다. "당신이 날 속인 것에 대한 죄값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리고 또 한가지. 난 다른 여자도 아닌 당신만을 원하오. 당신을 절대 포기할 생각 없소. 당신에게 접근하는 어떤 남자도 당신에게 손끝하나 대지 못하게 할 거요. 알겠소?" 유키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거칠게 키스를 했다. 그녀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공격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키스로 그녀의 심장이 팽창되었다. 숨을 헐떡거리던 그녀는 흥분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라 젖꼭지가 따끔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그에게 육체적인 욕망에 어쩔 줄 몰라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허벅지 사이에서 리드미컬하게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지나는 그가 한 얘기는 모두 잊고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어디론가 두 사람이 숨어서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오, 이런... 유키가 키스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의 대답을 들을 것이다. 그녀가 거절한다면 이곳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납치라고 하든 협박이라고 하든... "대답해. 나와 결혼할 거요?" "..." "어서 대답해. 나와 결혼할 거냐고?" 그녀의 머릿속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난 마당에 그녀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두 악마와도 같은 영혼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와 결혼하지 말라고, 그와 결혼하라고. "아... 나, 난... 그, 그래요... 그럴게요." "레이의 엄마가 되주겠다는 거요?" "아, 네... 그, 그럴게요." 유키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재차 그녀의 입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내... 내 아내가 되주겠다는 거요?" "네." "내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앞으로도 결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텐데도? 그래도 나와 결혼하겠다는 거요?" 지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가 던지는 어떤 질문에. 유키가 이번에 하는 키스는 이곳에 와서 한 키스 중에 가장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녀의 온몸을 녹이고도 남을 짜릿한 키스였다. '당신을 사랑하진 않지만... 당신을 영원히 내 곁에 둘 거요. 영원히 당신을 지켜주겠소.' 두 사람은 어디선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었다. to be continued
***무례한 남자 유키*** <#27. 사토 유키의 결정>
#27
<<사토 유키의 결정>>
"어딜 간다구요?"
지나는 점심식사를 준비하다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가 일본으로 간다고 말한 것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간다고 했소."
"어, 언제요?"
유키는 똑같은 말을 두번이나 되풀이하는 것이 싫었다.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여자가 금방 듣고도 그새 잊었단 말인가.
"내일. 내일이라고 했소."
"정말이세요?"
"당신 진짜 바보요? 아님 돌머리요?"
"뭐라고요?"
유키는 미간을 좁히며 수저를 들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이해를 하겠소?"
그의 신경질적인 말투에 지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으로 보건데 일본으로 간다는 것이 진짜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무슨 일로?'
그러나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물어봤다간 속 좁은 저 남자의 입에서 욕 나오는 것을 들어야할 것이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자리에 앉아 식사했다. 그러나 입맛이 없었다.
아직 입덧이 시작할 시기는 아니었지만 어제부터 입안에 줄곧 까끌까끌한 것 같았다. 마치 모래를 씹는 것처럼.
그녀가 밥을 먹다말자, 유키는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이상하군? 입맛이 없소?"
"아, 네. 저 신경쓰지 마시고 식사하세요."
"물론 당신이 밥을 먹든 말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당신 뱃속에 있는 내 아기가 신경쓰일 뿐이지. 아무것도 안 먹고있으면 아기한테 안 좋을 테니까 말이오.
유키는 당장에 내뱉고 싶은 말들을 음식과 같이 씹어 삼켰다.
"그러고보니 당신 얼굴이 좀 까칠해진 것 같군."
지나는 며칠 전부터 이유도 없이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수수께끼같은 의미심장한 표정이 담겨있었다.
"마치 아기를 가진 사람처럼. 어디 몸이 안 좋소?"
"네?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좀 계절 타나보죠. 가을이잖아요."
그녀는 있다가 치우러나오겠다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유키는 입 끝을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그녀가 끝까지 임신사실을 숨기겠다면 그도 다 생각이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언제까지 두고보지는 않을 것이다.
행여 낙태를 한다거나 하는 잔인한 생각을 한다면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저녁. 지나는 유키가 왜 일본으로 가는지 너무 궁금해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녀가 아는 바로는... 적어도 그래야 했다.
'일본에서 연락이 왔나? 그렇다면?'
어쩌면 카오리에게서 연락이 왔을 수도 있었다. 그의 결혼 문제로... 그와 결혼시킬 여자를 만나게 하려고 일본으로 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그녀의 명치에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내일 언제 떠나는 거지? 갑자기 떠난다고 한 걸 보면 출국준비를 다했다는 거잖아? 어떻게 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미리 말을 꺼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성인이고 이집 주인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의 결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것도 없었다.
그가 어떤 여자와 결혼을 한다해도 그녀가 간섭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여자니까.
주방에 가서 시원한 물을 한잔 가지고 마당으로 나갔다. 이제 가을이라고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그녀는 어두운 밤하늘을 처음 쳐다보는 사람처럼 뚫어지게 올려다봤다. 반짝거리는 별을 보고있자니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결코 별이 슬픈 것도 얄미운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났다. 마음이 저릴 정도로 속상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토 유키가 일본으로 떠난다면 그녀는 그가 귀국했을때 결혼소식을 가지고 올 것이란 걸 예감할 수 있었다.
'그래. 잘 됐어. 이제 그는 재혼해도 될 정도로 많이 바뀌었잖아.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왔잖아. 노력한 성과야. 당연한거라고.'
그는 혼자서 일본에 간다고 했다. 혼자 밖으로 다닐 정도로 그에게 많은 발전이었던 것이다. 기뻐해야 했다.
카오리와의 약속대로 그를 변화시켰으니까 잘 된 거였다. 레이를 변화시킨 것처럼 그도 변화시켰다.
지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잘 된 일이라며...
"거기서 뭐하는 거요?"
지나는 화들짝 놀라 어둠 속에서 소리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키는 현관에서가 아니라 뒷마당으로 연결된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옷을 입지 않은 상체가 젖어있는 걸 보니 막 수영을 하고 온 것 같았다. 그녀는 애써 그의 가슴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춥지 않아요?"
"전혀. 그런데 거기서 뭐하는 거요?"
"아, 그냥 바람쐰다고... 있었어요."
"그럼 바람 많이 쐬시오."
유키는 그녀를 지나쳐 현관으로 향했다. 지나는 얼른 그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렀다.
"저기..."
"뭐요?"
"아, 저기... 그게... 일본에 왜 갑자기..."
"안 돼오."
"네?"
유키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그녀에게 돌아섰다. 현관 입구에 세워져있는 은은한 조명 빛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단호한 입매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엄격한 표정으로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왜 말해줘야 하지? 그렇게 궁금한가? 왜?"
"..."
지나의 시선은 그를 피했다. 그가 저렇게 무뚝뚝하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유키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한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사토 유키는 언제 올 거란 얘기도 없이 떠났다. 아침에 학교가는 레이에게 할아버지 뵈러 일본에 간다는 말을 했다.
레이는 그가 일본에 가는데 데려가지 않고 갑자스럽게 떠나자 몹시 속상해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중요한 일로 가는 것이고 다음에는 꼭 같이 가자는 그의 말에 아이는 이내 기분이 풀렸는지 밝은 얼굴로 등교했다.
그리고 유키는 오전 비행기로 떠나버렸다. 지나에게는 어떤 인사도 없이... 김 지나는 그에게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잠깐 일본으로 갔을 거라고 여기면 되었지만 그녀의 세포는 집 구석구석 그의 흔적을 찾고있었다.
보리는 서성거리고 있는 주인 뒤를 눈으로 쫓으며 의아해했다.
"네가 보기에도 내가 한심해보이니? 어휴~ 그래. 너한테 그렇게 보일 정도면 나도 참... 한심하다. 그치? 에그, 빨래나 하자."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있을 때였다. 거실에 있는 전화기가 마구 울렸다.
"여보세요?"
"너 많이 바쁘니?"
지 재영이었다. 지나는 미소를 지으며 어쩐 일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냐고 물었다.
"네 핸드폰 안 받길래."
지나는 마침 잘된 것 같아 그녀더러 이곳에 놀러오라고 했다.
주인이 없는 집에 함부로 친구를 들이는 것은 미안했지만 마음이 너무 쓸쓸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남자를 들이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가 아닌가.
친구의 약속을 받아낸 그녀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세탁기를 돌리고 거실청소를 시작했다.
재영은 그 후, 30분 후에 초인종을 울렸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 서 동인과 함게였다.
어떻게 된 거냐고 지나가 묻자, 그녀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동인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 했다.
"미리 전화를 안 해서 네가 곤란한 거 아냐?"
재영이 아주 넓은 거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거실 크기만 해도 그녀의 집 두 배나 되는 것 같았다.
"꼭 그건 아닌데... 레이가 좀..."
"꼬마녀석이 왜?"
동인이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레이는 낯선 아저씨를 조금..."
"야. 내가 어째서 낯선 아저씨야? 녀석 데리고 저번에 할인매장에 데리고 가, 동물원도 같이 가줬잖아.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래, 그래. 기억할 거야. 하지만 바깥에서 만나는 것 하고 자기 집에서 만나는 거 하고 같니?"
"텃새부린다?"
"음... 그래. 그걸 거야."
"그렇게 나오면 가줘야지 뭐. 그런데 이집 주인은 어디갔는데?"
"일본에 갔다고 아까 내가 말했잖아, 인마."
재영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그리고 동인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람 이제 바깥으로 잘 다니나봐?"
동인이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음. 시내는 나가지 않아. 가끔 밤에 나가고 그래. 이번에는 중요한 일 때문에 가는 거야."
"그 사람이 일본까지 가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중요한 일인가보네?"
"..."
그의 말에 지나는 침묵을 지켰다. 정확히 유키가 무슨 이유로 일본에 갔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윤곽만 떠올려도 심장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한 시간 후에 사토 레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자신의 집에 손님이 두 사람이나 와 있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서 동인이 온 것이 못마땅했다. 몇 번 만났을 때마다 가정교사를 쳐다보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곳에서나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 했고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손을 잡기도 했다.
레이는 그런 그가 가정교사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와 선생님이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서 동인이 중간에 낀 것 같아 싫었다.
"저 녀석. 진짜 네가 온 게 싫은 모양이다?"
재영이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꼬마녀석을 쳐다봤다. 아이는 예의바르게 인사는 했지만 표정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다.
특히 동인을 쳐다보던 아이의 눈빛이 아주 차가워보였다. 차가운 아빠의 피를 받았단 이거로군.
지나는 두 사람에게 아무래도 저녁을 먹고가는 것은 무리겠다며 미안하다고 말한 후, 아이 방으로 갔다.
"레이. 잠깐 얘기 좀 해도 되겠니?"
"아뇨."
"레이..."
"무슨 일이신데요?"
옷장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던 아이가 그녀를 쳐다봤다.
뭔가를 꾸중하려고 온 것이라면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 같았다.
지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고는 뭐 먹고싶은 것이 없는지 물었다. 아이는 없다고 차갑게 대꾸했다.
방에서 나오는 지나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두 친구는 저녁이 되기 전에 지나와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찻잔을 치우고 저녁준비를 하려던 지나는 방에서 레이가 나오는 것을 봤다. 아직까지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레이. 미트볼 할 건데, 같이 만들지 않을래?"
"..."
레이는 그녀를 쳐다만 볼뿐 선뜻 하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재촉했다.
"넌 만들기 잘하잖아. 같이 만들어서 오늘 저녁에 먹어보자. 어때?"
"글쎄요."
어른스럽게 튕길 줄도 안다 이거로군. 지나는 웃으며 아이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나한테 화가 아직 안 풀린 거야?"
"..."
"음, 이런... 사토 레이, 의외로 소심하구나?"
"네?"
"마음이 좁다고. 선생님은 네가 남자답고 마음이 바다처럼 넓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 혼자 착각한 모양이다."
지나는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갈은 고기를 꺼내었다.
"그래. 네가 화가 안 풀렸으면 계속 골나 있어. 선생님은 가만히 있을게. 네가 화가 풀릴때까지. 하지만 소심한 사람은 화가 빨리 안 풀리겠지?"
"난 소심한 사람아니에요!"
"어머, 그래?"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부정하자 지나는 속으로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돌아섰다.
"그럼 어떻게 미트볼을 만들어볼까?"
"조, 좋아요."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같이 준비했다. 그리고 주방이 아니라 거실에서 식사를 차려 먹기로 했다.
식사 내내 보리가 음식을 몰래 뺏어먹으려는 짓을 해 번번히 식사를 중단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저녁시간이 매우 즐거웠다.
카오리는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고 다다미-방으로 향했다. 거실로 사용하고 있는 그 넓은 방에 유키가 앉아 있었다.
"오늘 저녁식사 전에 오신다는구나. 아주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겠구나."
그녀는 아들과 단둘이 대화를 할 때는 한국말로 말했다.
"네."
"앞전에 왔을 땐 아버지를 만나뵙지 못했잖니. 있다 유스케와 같이 오신단다."
유스케란 말에 유키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러나 카오리는 아들의 그런 표정을 미쳐 발견하지 못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일하는 여자 중에 한 사람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실로 와서 유키를 찾았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운전기사와 지나뿐이지만 그녀는 이곳 번호를 전혀 모른다. 유키는 수화기로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사토 유키입니다."
그는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기는 도쿄에 있는 ***잡시사입니다. 선생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양하겠소."
"네? 아, 하지만 제 말씀을 조금만 더 들어보시죠. 선생님께서 인터뷰에 응해주신다면..."
유키는 누군가가 자신이 일본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잡지사에 연락한 것 같아 화가 났다.
조용히 왔다가 떠나려고 했었다.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잡지사 뿐 아니라, 방송국이나 다른 언론매체에서 그와 인터뷰를 하려는 연락이 계속 왔지만 그는 매번 거절해왔다.
이번에도 누군가에게 정보가 들어간 것 같아 아버지를 만나서 얘기가 끝나는대로 떠나야할 것 같았다.
"이번에도 어떻게 알았지?"
카오리는 통화를 끝내고 오는 아들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사토 츠바사와 유스케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유키가 온 것을 그리 놀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전화로 이미 그가 온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놀랐던 것이다.
유키는 식사 때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식사 후 차 마시는 시간이 되었을 때 얘기를 꺼낼 작정이었다.
유스케까지 함께 자리를 해줘서 더할나위 없이 기뻤다.
"레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느냐?"
츠바사가 중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유키는 어머니가 재혼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눈으로 던졌다.
그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나즈막하게 말했다.
"저, 재혼하겠습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날아왔고 츠바사보다는 유스케의 눈동자가 더 놀란 것 같았다.
사토 츠바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찻잔을 들었다. 그는 예정보다 조금 빨리 유키의 입에서 '재혼'얘기가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선생의 영향이 컸던 모양이군."
"네."
츠바사는 아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떠나기 전에 양가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유키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떠나기 전에 양가 인사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도 직업이 학교선생이어서 그런지 사람의 마음을 다룰 줄도 아는구나. 네가 그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어머니."
카오리는 아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 선생에게 언제 한번 이곳에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해야겠구나."
츠바사까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유키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네가 재혼할 수 있도록 김 선생이 많이 애쓴 것 같다. 레이를 씩씩하고 밝게 변화시킨데다, 널 이곳에 오게 만들었잖니."
"그게 무슨..."
"사모님의 부탁으로 지나씨가 널 도왔던 거다."
유스케가 차갑게 유키의 궁금증에 대답했다. 유키의 검은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저번에 이곳에 지나씨가 왔을 때 사모님의 부탁을 받았거든. 널 재혼시키기 위해서 먼저 널 변화시켜달라고 말이다. 사토 레이를 변화시킨 것 처럼.
결국 그녀의 노력으로 넌 어둠 속에서 나왔고 이곳에 제발로 찾아 온 거지. 재혼하겠다는 결심을 들고서 말이다."
친구의 설명을 듣는 동안 유키는 그의 말이 모두 농담이길 바랐다. 그러나 유스케의 눈동자에는 농담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츠바사와 카오리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그의 '재혼'이 어떤 결정을 말하는지 알고있었다.
왜냐면 그 혼자만 모르고 다들 진작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변화되어 재혼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들이 염두해두고 있는 여자와 결혼하기를.
이런 일이 생기도록 만든 것은 아주 멋지게 그를 이곳까지 오게만든 여자, 바로 김 지나였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도 숨긴 채 레이의 마음을 열게 만들었고, 집안을 환하고 생기있게 바꾸었고, 그리고 바로 그의 마음까지 열게 만들었던 것이다.
차갑게 지하 몇 십 미터 아래 숨어있던 그의 심장을 그녀의 따뜻한 미소와 뜨거운 열정으로 녹게 만들었다.
여태 그녀가 보여왔던 행동들이 자신의 재혼때문이었다고 생각하자, 유키는 온몸이 뼛속과 영혼까지 얼어붙었다. 예전보다 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침묵 속에서 저주의 말을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 지나. 나에게 또 뭘 숨기고 있지? 날 사랑한다는 그 말... 그것도 거짓이겠군, 그래. 추악한 거짓말! 멋지군! 멋지고 완벽한 연기였어!'
그는 턱을 씰룩거리며 이를 갈았다.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그것도...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이곳까지 날아왔다.
바보같이, 어리석게도 진정한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기 위해서 부모님을 만나러온 것이 쓰리게 후회가 되었다.
"그러니까 제가 재혼할 수 있도록 김 선생에게 부탁하셨다? 저를 변화시켜달라고 말이죠?"
유키는 식을대로 식어버린 차를 마시다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럼 성공이군요. 제가 제 입으로 결혼하겠다고 했으니. 하지만..."
그는 찻잔을 거의 소리나지 않게 내려놓으며 세 삶의 얼굴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제 결혼상대는 제가 정합니다."
"유키. 그럴 순 없다."
카오리가 아들의 결정을 정색하며 반대했다. 이미 정해진 여자와 결혼해야 했다. 다른 여자는 결코 안 되었다.
"누구냐? 네가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츠바사가 조용히 물었다. 유키는 씩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잔인함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절 변화시킨 여자입니다. 김 지나, 그녀와 결혼합니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유키는 츠바사를 정면으로 노려봤다. 두 남자의 살기 가득한 눈빛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혔다.
"유키. 김 선생과의 결혼은 찬성할 수 없다. "
"이유가 뭡니까? 재혼이 중요하다면 어느 여자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습니까?"
"그건 아니란다. 너와 결혼할 여자는 아버지 회사와..."
카오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키의 시선이 츠바사에게 다시 날아갔다. 무슨 뜻인지 알것 같았다.
그가 들은 정보로 아버지의 회사가 국내에서 막강한 타 무역회사와 손을 잡기로 했던 것이다.
두 회사가 합치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 된다며 언론에서 떠들어댔다.
유키와 결혼하기로 정해진 여자가 바로 합병할 회사의 사장의 셋째 딸인 것이다.
그녀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았고 나이도 스물 두 살밖에 되지 않는 대학생이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지만 결코 그들의 결혼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론에 실린 적이 없었다.
"그럼 전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요."
"유키! 레이 걱정은 안 해보니?"
카오리의 구슬픈 말에 유키는 그녀를 노려봤다. 오늘따라 어머니가 이렇게 미운 적이 없었다.
"레이를 걱정해서 김 지나와 결혼하겠다는 겁니다. 그녀만이 아들을 잘 돌봐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뇨! 레이가 좋아하고 따르는 여자는 김 지나입니다. 그 여자한테만 마음을 열어요.
얼굴도 모르는 낯선여자가 아니라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다시 아들녀석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꼴 결코 보기싫습니다. 두 분도 레이를 보셨잖습니까?"
"오직 레이때문에 그 가정교사와 결혼하겠다는 거냐?"
츠바사가 차갑게 물었다. 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아들녀석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약 부모님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내놓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싶었다. 결혼 후에 지나의 임신사실을 꺼낼 생각이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결혼 전에 섣불리 말했다간 그녀에게 어떤 영향이 끼칠지 불 보듯 뻔했다. 츠바사는 혼인 전에 아이를 갖는 짓을 몹시 싫어했다.
쉽게 남자와의 혼전관계를 맺는 여자를 성에 대해 문란한 여자라고 여겼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썩을 대로 썩은 정신을 가진 여자라고 말이다.
"네 결정이 확고하다면... 그렇게 하거라. 대신 그 여자를 우리 집안의 여자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
"되도록 빨리 떠나거라."
츠바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오리와 유스케가 일어났지만 유키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 회사하고 무관합니다. 언제까지 절 올가메실 작정이십니까?"
"..."
"전 아버지 회사에 관심없습니다. 이어 받고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사토 유키!"
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려보고 있는 츠바사를 마주보고 섰다. 한대 후려치면 당장 맞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왜 제가 그 회사때문에 재혼을 해야한다는 겁니까? 회사를 위한 거라면 굳이 제가 아니어도 되잖습니까?"
"유키! 그만 하거라! 아버지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카오리가 거침없이 늘어놓는 아들의 말을 말려야했다. 그러나 유키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회사를 위해서... 제가 한국으로 떠났으니까... 그래서 유스케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유스케를 곁에 두신 거 아닙니까?"
"유... 유스케... 이 놈!"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유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독기어린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츠바사 옆에 선 유스케를 유심히 바라봤다.
유스케는 아직까지 충격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유키와 김 지나가 결혼한다는 말에.
"하지만 제 결심은 바뀌지 않습니다."
"..."
츠바사의 몸이 약간 휘청거리는 듯 했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유키를 쳐다봤다. 7년 전부터 아들의 표정과 말투는 변했다.
그 오랜 시간동안 어둠속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사악한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리라.
츠바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사이로 말했다.
"어디 네 맘대로 해봐."
"어머니를 아껴주시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제가 이곳에 온 겁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아끼시는 마음이 없으시다면 제 결정을 말씀드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유키는 고개를 숙이고는 츠바사를 지나쳐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어? 이상하다? 분명히 여기에 넣어뒀는데?"
다음 날, 지나는 서랍마다 열었다 닫았다는 수도 없이 반복해댔다.
그녀는 지금 방안에 있는 서랍과 핸드백 그리고 지갑을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찾는 명함이 없었다.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입력이 되어있어 없어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있어야할 것이 없는 게 이상했다.
"내가 버렸나? 아님 어디에다 흘렀나?"
"뭐하세요, 선생님?"
"아, 레이! 학교 잘 갔다왔니?"
지나는 아이에게 미소를 던지고는 어지러진 방을 다시 치우기 시작했다. 그래, 신경 끄자.
분명히 어느날 휴지통에다 버렸을 것이다.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저장시켜놓고 바로 버렸던 모양이다.
방을 치우고 나온 그녀는 아이의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나날이 갈수록 아이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즐거워했다.
친하게 사귄 친구들이 셀 수 없을 정도란다. 아이 말로는... 하지만 그래도 친구들 중에 보리가 제일 좋다고 했다.
"전보다 글씨가 더 예쁜 걸? 여자친구한테 편지같은 거 쓰면 무척 좋아하겠는데?"
"놀리지 마세요, 선생님!"
"으음. 정말이야. 앞에 썼던 노트 한번 가져와 봐."
레이는 방으로 달려가 다 쓴 노트를 가져와 펼쳤다. 지나는 최근에 다시 쓰기 시작한 노트를 나란히 펼쳤다.
"자, 봐. 어느 게 더 멋있니?"
"정말이네?"
레이는 웃으며 자신의 글씨체가 매우 발전한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오늘도 수고했다, 레이. 간식 먹고 보리하고 놀아. 아, 내일 친구집에 놀러가기로 했지?"
"네."
"좋겠는데? 가지고 가고싶은 장난감이나 게임기 정했니?"
지나는 준비한 간식을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보리가 달려왔다.
"안 돼, 보리! 너 조금 전에 과자 먹었잖아."
"장난감 말고 책 들고가기로 했어요. 책 바꿔볼 거거든요."
"어머, 그래? 그것도 좋지! 무슨 책 들고갈 건데?"
"만화책요."
"..."
지나는 괜히 물어본 것 같아 억지로 미소를 띠어주고는 아이가 간신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만화책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그녀는 걱정이었다. 이러다가 고학년이 되어서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했다.
아직까지 아이의 성적에는 이상이 없었다. 옛날보다는 담임선생의 평가가 좋았다.
아이의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적극적으로 바뀌었다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그리고 동물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나는 조금 전 그녀의 꾸지람에 토라져 등돌려 앉아있는 보리를 힐끗 쳐다봤다.
갑자기 자신이 이곳을 떠나야할 때 상처받을 영혼이 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녀석... 괜찮을까?
이 집 주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적어도 아들을 염려한다면 떠난 다음 날 전화를 해줘야 했다.
"놀러가도 돼죠?"
"음? 그래. 마당에서 놀 거지?"
"네. 대문밖으로는 안 나가요."
레이는 스스로 하면 안 되는 것을 말로써 확인했다. 지나는 아이의 영리함을 극찬했다.
'레이는 한국말로 영리하다는 뜻이오.'
이 집에 처음 온날이었다. 이 집 주인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그의 방으로 갔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얘기만 나누었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의 의미는 눈이라고 했죠? 이름때문인지 당신의 눈은 항상 차갑게 느껴졌어요.'
지나는 레이와 보리가 마당에서 뛰어노는 것을 즐겁게 바라봤다.
이틀 후 아침. 레이를 버스에 태워보내고 집으로 돌아섰을 때였다. 차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유키의 검은 차였다. 혹시... 그가? 차는 그녀 앞에 미끄러지듯 멈춰섰다.
조수석문이 열리고 운전기사가 내렸다. 그의 표정으로 보건데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이집 주인을 너무 닮은 것 같았다.
"오셨습니다."
기사의 말과 동시에 그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이내 검은 양복을 입은 사토 유키가 차에서 내렸다.
놀란 지나의 얼굴을 본 유키는 그녀가 어떻게 알고 밖에 나와있었는지 궁금했다.
"별로 반갑지 않는 표정인 것 같은데?"
"네? 아, 그럴 리가요. 잘 다녀오셨어요?"
"..."
그는 그녀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고 대문을 통과했다. 뒤따라 기사가 트렁크를 들고 왔다.
"커피 한잔 준비하시오."
유키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으며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위에서 드실 건가요?"
그의 걸음이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침실로."
"아, 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곧장 떠나지 말고 차 한잔 하라고 했다. 그리고 두 남자의 커피를 준비했다.
"고맙습니다."
기사는 아래층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거렸다.
어쩐 일인지 보리는 그에게 아주 친한 척을 해댔다. 오늘 녀석의 아침밥을 아직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배가 고픈지 아무한테 애교를 부리면서 밥달라고 투정하는 것이다.
"들어오시오."
지나는 찻잔을 침실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내려놓고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씻고나오면 커피는 식어있을 것이다. 그녀는 욕실 문을 향해 물었다.
"조금 있다가 마실 건가요? 그럼 새로 가져올게요."
대답 대신에 욕실 문이 열리면서 유키가 나왔다.
그의 상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고 허리띠를 푼 정장바지는 단추가 끌러져있어 골반에 위험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그에게 차를 가져왔다고 말한 후,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었다.
"있소."
"뭔데요?"
"당신."
유키는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놀란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순진했다. 아니 순진한 척했다. 그를 감쪽같이 속인 이 시대의 완벽한 여배우.
'그래. 당신이 남자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였다는 것은 과히 충격적이긴 해. 하지만 당신의 가증스러움을 가릴 순 없지.'
지나는 차갑게 식은 그의 눈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몰랐다.
그가 내뱉은 말에 놀랍긴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였다.
적어도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그의 눈은 이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차가움 속에 잔인함이 보였다.
살기가 번득거리고 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지나는 쟁반을 가슴으로 끌어안고는 대답했다.
"뭘 도와드려요?"
"당신."
"..."
"당신 몸."
유키는 잔인하게 냉소를 던졌다. 그리고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명령했다.
"저녁 때 차가 필요하니까 7시까지 오도록 해."
지나는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아래층에 있는 기사와 통화한 것이다.
"어디... 가시려고요?"
"차 잘 마시겠소. 그만 나가보시오."
"..."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서있자 유키는 그녀에게 말했다.
"한숨 잘 거요. 나와 같이 잘 거 아니면..."
"아, 네... 죄송해요!"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쏜살같이 방에서 나갔다.
유키는 욕조 속에 몸을 담갔다. 한손에 독한 양주가 든 잔을 들고. 그는 잠을 잘 것이다. 아니 잠이 자고싶었다.
사흘 동안 그는 고작 세 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김 지나란 여자 하나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나체의 몸으로 흔들어대고 있는 그녀가 떠올랐고 그런 욕망에 몸부림치고 있는 자신을 자책하느라 매일 밤을 괴로워했다.
막상 그녀를 집 앞에서 보자, 운전기사가 보건 말건 그녀를 부셔저라 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를 알면서도 그의 억제해왔던 욕망이 분출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유키는 거친 욕을 중얼거리며 욕조에서 나왔다. 몸에서 물이 떨어졌다. 물기를 대충 닦고 그는 옷을 입지 않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몸 속에 스며든 양주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의 정신은 또렷했고 그의 복잡한 뇌를 주무르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유키는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운전기사가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기사에게서 열쇠를 받아들고 나갈 것이다. 김 지나를 데리고...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옷을 다 갈이입은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운전기사는 그에게 차 열쇠를 주었다. 유키는 주방을 힐끗 쳐다봤다.
"지금 나가시는 건가요?"
"..."
유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고있는 레이에게 다가갔다.
"레이."
"네, 아버지."
"오늘 아버지 어디 갈거야. 내일 아침에 네가 학교가기 전에 올 거다."
"어디 가실 건데요?"
"갔다와서 말해주마."
"혼자 가시는 거에요? 아니면..."
레이의 시선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있는 지나에게로 향했다.
"그래. 선생님하고 같이 갈 거란다."
그는 아들에게 더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언제부턴가 녀석은 눈치를 챘고, 무엇보다 그녀가 엄마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기사아저씨하고 하룻밤 같이 지내거라. 무서우면 같이 자자고 그러고."
"무섭지 않아요. 보리가 있으니까."
지나는 부자의 대화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려면 설거지하던 것을 멈춰야 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여자로 보이고싶지 않았다.
"네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거다. 내일보자, 레이."
유키는 아들의 머리와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고 현관으로 나섰다. 그리고 현관에서 기사에게 뭐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지나는 거실로 들어오는 기사에게 물었다.
"어딜 가시는 거죠?"
"잘 모르겠습니다. 차를 직접 가지고나가실 모양입니다."
"네? 그가 직접 운전을 한다고요?"
지나는 놀랐다. 교통사고로 이후로 두번다시 운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곳에 있는 몇 달 동안 유키가 직접 운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괘, 괜찮을까요?"
"네... 저,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설거지를 끝내고 고무장갑을 벗으려던 그녀는 돌아섰다. 기사가 그녀에게 종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건 뭐죠?"
"올라가셔서 읽어보세요."
그녀는 그의 말대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방에 다다르기 전에 복도에서 접은 종이를 펼쳐들었다. 유키가 쓴 메모였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준비하고 나오시오. 20분 시간을 주겠소.
시간이 지나고나서 후회하는 일이 없길 바라오. - 사토 유키.
지나는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제끼고 바깥을 내다봤다. 차가 대문앞에 있었고 유키가 차 옆에 서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어디론가 갈 것처럼 고급슈트를 입은 그가 결국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종이에 적힌대로 20분이 지나고나서 후회할 일이라면... 아마도 그가 직접 올라오겠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아까 그가 레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제야 짐작갔다.
정확히 20분이 되어서 지나는 유키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차는 곧 출발했다.
사고이후로 운전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라 여겼던 그녀는 불안과 걱정스런 눈으로 그의 얼굴과 핸들을 쥔 그의 손을 쳐다봤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걱정마시오. 같이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는 유연하게 기어를 4단으로 바꾸었다.
"어디로 가는지..."
"그건 나도 모르지. 무작정 납치하는 거니까."
"네?"
지나는 그에게로 고개를 획 돌렸다. 무작정 납치를 하다니. 누구를 납치한다는 것인가?
그녀의 표정을 곁눈질로 쳐다보던 유키는 싸늘하게 웃어보였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있소?"
"네?"
그녀는 자신만이 알고있는 날을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9월 30일. 이달 마지막 날을 두 친구와 보내려고 했지만 갑자기 유키가 연락도 없이 불쑥 돌아와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레이와 유키에게 자신의 생일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유키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에 말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글쎄요. 그건 왜 물으시죠?"
"그냥. 혹시나 당신이 알고있는게 있나 싶어서."
"아뇨. 없어요."
두 사람이 간 곳은 시골의 어느 외진 곳에 위치한 오래된 성당이었다.
사방이 불이 모두 꺼져있었고 성당에서 비치는 유일한 불빛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는 이런 곳에 왜 왔는지 어리둥절했다. 사토 유키가 언제부터 하느님을 믿었는지...
유키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성당 문을 열었다. 성전에는 제대 위에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유키씨... 왜 이런 곳에... 아까 납치얘기는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 납치요."
"네? 아니 누구를요?"
"누구긴 누구겠소? 바로 당신이지."
그는 전혀 웃음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유키의 입술이 예고도 없이 내려와 그녀의 얘기를 잘라버렸다. 그녀는 놀라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머리를 들었다. 그녀의 턱을 감싸쥔 채로.
"지금부터 질문은 내가 허락할 때까지 받지 않겠소. 만약 어떤 질문이라도 던지기라도 한다면 또 키스할 거요."
"그런 억지가..."
그가 다시 입술을 부딪혀왔다. 아주 살짝.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언젠가 그녀에게 프로포즈하려고 가지고 있었던 반지였다.
"유키씨..."
"생일축하하오."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빼려고 했지만 늦었다.
"이러면 안 돼요. 난 분명히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나한테 그럴 이유가 있소."
"그 이유가 도대체 뭐죠?"
유키의 입 끝이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질문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가차없이 그녀의 입술을 공격해왔다.
"제발..."
"당신한테 얘기하기 전에 대답해 봐."
그가 입술을 살짝 떼고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그는 온 힘을 끌어모아 이성에 충실해야 했다.
"날 사랑한다는 말 진심이오?"
"...???"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왜 던진단 말인가. 지금에와서 무슨 소용있다고.
그녀는 대답하고싶지 않았다. 진심을 대답하기에 그녀의 심장은 너무 약했다.
"대답해 봐. 진심이오? 날 사랑하는 게?"
"..."
"대답해!"
"네. 그래요.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녀의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가득 고인 눈물은 이내 그녀의 뺨 위로 흘렀다. 그녀가 목 메인 소리로 소리쳤다.
"이제 됐어요? 이제 속이 시원해요?"
유키는 그녀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 그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난 죽은 아내를 정말 사랑했다고 믿었소."
그의 갑작스런 얘기에 지나는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조금은 부드러워보였다. 촛불의 은은함때문이겠지.
"어머니는 내가 열 세 살때 이혼하셨소. 그리고 지금의 일본 사람인 아버지를 만나 재혼하신 거요.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유능한 일본어 강사셨소. 일본으로 교육가셨다 두 분이 만나셨다고 들었소.
그래서 우리 모자는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난 한국이 그리워서 대학을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건너왔소.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났소. 눈이 부시도록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에 빠졌지. 적어도 그땐 행복하고 서로에 대한 열정이 끝이 없었소.
그녀와 함께 한국에서 살기 위해 난 국적을 옮겨야했소. 그리고 얼마 후, 우리 두 사람에게 레이가 태어난 거요."
"국적을 바꿨다면서 어째서 일본 이름을 하고있는거죠?"
"어머니때문이오. 국적을 바꾸더라도 이름은 아버지를 따라야한다고 했소. 적어도 새아버지에 대한 예의지."
유키는 다시 하던 얘기를 이어나갔다.
"우리의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도 아니 시작하지도 않았소. 결코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그 여자와 난 사랑이 아니라 열정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오.
레이가 태어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소. 아내는 날 사랑한 게 아니었소. 내 육체와 내 재산을 필요했을 뿐이오.
그 여자는 끊임없이 다른 남자와 몸을 뒤섞었소.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녀가 내가 아닌 남자와 우리 두사람의 침대 위에서 짐승처럼 뒹굴고 있는 것을보는 순간 내 머리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줄만 알았소. 내 영혼이라도 팔어머고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유, 유키..."
"바로... 내 친한 친구와 그 짓을 하고있었으니까! 내 눈앞에서 신음해대는 두 짐승을 그자리에 죽이지 못한게 지금도 후회가 되오.
더 웃긴건 뭔줄 아나? 그러면서도 그 사악한 여자는 나한테 이혼얘기를 꺼냈소.
하지만 결국 이혼은 못 했지. 죽었으니까! 그 자식하고 나란히 저승으로 떠났지."
키득키득 웃어대는 유키의 표정은 혼이 빠져있었다.
지나는 지금 들은 모든 말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식 있는 여자가 바람을 피우다니. 그것도 남편의 친구와. 너무나도 기가 막혔다.
"크크큭... 그 자식의 바지 지퍼가 내려져있었다는군. 이혼하기 전 여행을 떠나겠다더니 둘이서 영원한 여행을 떠난 거지.
차 타고가는 동안에도 악마가 쥐고있는 욕망을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지. 고속도로에서 딴 짓하면 어찌된다는 걸 그 바보같은 짐승들은 몰랐던 거요."
지나는 가슴이 메어왔다. 터질 것만 같은 울음을 간신히 삼켰다. 그가 오랫동안 받아왔을 상처는 육체적인 상처보다 깊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사고로 죽어서 고통받았던 것이 아니라, 사랑했다고 어리석게 믿었던 자신을 오랫동안 원망하고 자신을 배신한 그 두 사람을 증오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 여자의 부모는 내 책임라는군. 나때문에 딸이 죽었다고."
"그건 말도 안 돼요! 바람피운 것은 그 여자지... 아, 미안해요."
"아니. 그 여자 잘못이지. 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실을 모른다는 거요.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죽은 두 사람과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거요."
"세상에..."
그녀는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는 그의 넓은 어깨와 등을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가 받았을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 뒤로 난 세상에서 멀어졌소. 어느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소. 특히 여자는 더욱. 하지만 레이에게는 나와 똑같은 길을 가게 할 수 없었소.
그래서 가정교사를 고용해봤지만 모두들 참지 못하고 떠났소. 아니면 나의 재산을 탐하는 더러운 여자들이거나. 레이를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여자는 없었소."
사토 유키는 고개를 들어 지나를 쳐다봤다.
"당신이 유일한 여자요."
"..."
"레이에게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당신 뿐이오. 레이는 당신을 끔찍하게 좋아하오. 엄마가 되어주기를 바랄 정도로."
"유키씨..."
"날 사랑한다는 게 진심이라면...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거요. 아니, 진심이든 아니든 우린 결혼할 수밖에 없소."
"그게 무슨..."
"날 지금의 사토 유키로 변화시킨 이유가 바로 결혼아니오?"
지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알아버렸다. 일본으로 가서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당신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어쩔..."
"그럼 당신 감정은?"
"네?"
"날 사랑하는 건 아무 상관없다는 거요? 내가 아버지 회사를 위해서 나이 어린 여자와 결혼해도 당신은 상관없다는 거요? 전혀?"
"..."
"왜 대답을 못 하지?"
그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감싸 안으며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절대로 상관있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제 혼자 감당할 일이라고 여겼어요. 어차피 당신은 상관없을 테니까."
"뭐? 내가 왜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요?"
지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잖아요? 이제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든 안 하든 뭐가 중요하냐고요? 이제와서 왜?"
"..."
"어차피 제 혼자의 감정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물론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소. 앞으로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요.
8년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미친 짓은 절대로 안 할 거요. 알겠소?
하지만... 난 당신과 결혼할 거요. 당신의 육체뿐만 아니라 날 사랑하는 당신의 감정까지 내 거요. 난... 당신의 영혼까지 소유하고싶소."
이게 무슨 프로포즈란 말인가. 지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해왔듯 사랑같은 걸 하지 않겠다는 남자를 계속 가슴아파하며 사랑해야했다.
그에게는 관대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오로지 육체를 위해서, 귀여운 레이를 위해서 그와 결혼을 해야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악몽같았다.
"당신이 날 속인 것에 대한 죄값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리고 또 한가지. 난 다른 여자도 아닌 당신만을 원하오.
당신을 절대 포기할 생각 없소. 당신에게 접근하는 어떤 남자도 당신에게 손끝하나 대지 못하게 할 거요. 알겠소?"
유키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거칠게 키스를 했다. 그녀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공격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키스로 그녀의 심장이 팽창되었다. 숨을 헐떡거리던 그녀는 흥분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라 젖꼭지가 따끔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그에게 육체적인 욕망에 어쩔 줄 몰라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허벅지 사이에서 리드미컬하게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지나는 그가 한 얘기는 모두 잊고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어디론가 두 사람이 숨어서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오, 이런...
유키가 키스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의 대답을 들을 것이다.
그녀가 거절한다면 이곳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납치라고 하든 협박이라고 하든...
"대답해. 나와 결혼할 거요?"
"..."
"어서 대답해. 나와 결혼할 거냐고?"
그녀의 머릿속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난 마당에 그녀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두 악마와도 같은 영혼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와 결혼하지 말라고, 그와 결혼하라고.
"아... 나, 난... 그, 그래요... 그럴게요."
"레이의 엄마가 되주겠다는 거요?"
"아, 네... 그, 그럴게요."
유키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재차 그녀의 입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내... 내 아내가 되주겠다는 거요?"
"네."
"내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앞으로도 결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텐데도? 그래도 나와 결혼하겠다는 거요?"
지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가 던지는 어떤 질문에.
유키가 이번에 하는 키스는 이곳에 와서 한 키스 중에 가장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녀의 온몸을 녹이고도 남을 짜릿한 키스였다.
'당신을 사랑하진 않지만... 당신을 영원히 내 곁에 둘 거요. 영원히 당신을 지켜주겠소.'
두 사람은 어디선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었다.
to be continued